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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명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9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권도희 옮김 / 황금가지 / 2004년 6월
평점 :
애거서 크리스티 자신이 선정한 '베스트 10'에 속하는 작품이라고는 하지만, 독자로서 나는 그 정도까지는 꼽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물론, 매우 독특하며 참신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에르큘 포와로와 미스 마플이 등장하는 소설들처럼 철저하게 증거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사건 정황에 상당히 의존한다. 어쩌면 그래서 크리스티가 일부러 그 어떤 탐정도 등장시키지 않았을 수도 있다. 크리스티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격언에 의문을 품고 이 작품을 구상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 작품의 주제를 전달하기에 가장 적합한 방식을 택한 것 같다.
엄청난 재력가 부부와 2남 3녀. 11월의 어느날 어머니가 살해당하고, 작은 아들 재코가 범인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감옥에서 죽는다. 그런데 2년 뒤 방문객에 의해 재코의 알리바이가 입증된다. 당시 사고로 병원에 입원하고, 퇴원 즉시 남극으로 떠나면서 이 사건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없었던 캘거리는 귀국 후 우연한 기회로 이 사건에 대해 알게 되고, 감옥에서 죽은 범인의 알리바이를 유일하게 입증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이었다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고민 끝에 직접 찾아가 가족들에게 사실을 밝히지만, 그들의 반응은 그의 예상과는 너무나 다르다. 아들이자 동생이며 오빠인 사람의 누명을 벗겨준 것에 대해 감사해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가족들은 서로를 경계하며 의심에 휩싸인다. 사실 이들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완전한 남남으로, 불임판정을 받은 부인이 5명의 아이를 전부 입양해서 만들어진 가족이었다. 어릴 때부터 불량했고 정서가 불안했던 재코가 범인이 아니라면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이 피 한 방울 안 섞인 가족들 중 한 명이라는 뜻이 된다.
제목이 왜 누명일까 생각해봤는데, 죽은 자의 누명이 벗겨지면서 이 이야기가 시작하기 때문이었다. 사건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재수사가 이루어지고, 당연히 당시의 증거는 전부 없어졌을 것이며 기억 또한 명확하지 않다. 결국 이후에 캘거리의 방문 후 일어난 사건과, 이런 저런 심리적인 추론으로 범인을 압박하여 자백을 받아내는 방식으로 결말을 맺게 되는데, 아마도 작가는 추리 소설의 형식을 빌려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결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반전일 수도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안전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데, 나로서는 읽는 내내 몰입할 정도로 재미있었지만, 막바지에서 약간 실망해서 안타까웠다. 아무리 생전에 극악무도한 인물이었고, 어떤 경우에라도 정의는 존재해야 하며, 죄인은 벌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실제 범인이 밝혀지기 전까지 단 한번도 바꾸지 않았는데, 정황을 알게 되고 나면 과연 밝혀진 이 진실이, 밝혀지기 전 모두가 믿고 있던 그 사실과 비교해보면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크리스티의 집필 의도는 꽤 성공적이라는 뜻일 테다. 아마도 사족처럼 느껴지는 성급한 로맨스는, 그것마저 없으면 캘거리의 방문이 차라리 없는 게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 같다는 점에서, 불가피한 장치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물론, 어디까지나 작가의 입장에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