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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두근거리는 중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예담 / 2014년 5월
평점 :
품절
참, 귀엽고 예쁜 책.
이 책은 마스다 미리가 한 잡지에 연재한 글들을 묶은 것이라고 한다. 당시 30대 후반이었던 마스다 미리. 읽다보면 이른바 '소녀 감성'이라는 것은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없어지지도 않고 여자의 평생동안 지속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내가 이만한 나이 때에는 어떨까, 어쩌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감수성이 보통 사람보다는 진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목차만 훑어 보아도 '내 청춘에 보태고 싶은 사랑의 에피소드'라는 소개가 실감이 난다.
패스트푸드점에서 데이트하기
그의 교복을 빌려 입기
하트 은목걸이 선물 받기
방과 후의 고백
커플룩 입기
그의 타진 옷을 꿰매주기
자전거 둘이서 함께 타기
수제 초콜릿 선물하기
졸업식 날 고백하기
하굣길에 선 채로 계속 대화하기
데이트 도시락 싸기
여름방학, 수영장에서 만나기
가사 실습 음식 챙겨주기
공주님처럼 안기기
관람차 안에서의 첫 키스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하기
헝겊 가방 만들어주기
여행 가서 공중전화로 전화하기
교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는 남학생!
이 모든 에피소드를 보태지 못했기 때문에 마스다 미리는 후기에 ' 나의 청춘은 항상 때를 놓쳤지만!'이라고 적고 있다.
나는 마스다 미리보다 한참은 어리지만 저 목록의 모든 것들을 다 해 본 것도 아니고 해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도 없다.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냉정에 가까워서인지, 감성이 부족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읽다 보면 이제 40대에 접어든 작가가 한편으로는 귀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징그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내가 그 나이가 되면 어떻게 생각하게 되고 말하게 될 지는 절대 장담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그래서 더 나이가 들기 전에, 저 목록에서 내가 해보지 못한 것은 빨리빨리 해봐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나이가 들었을 때, 정말 당시에는 별 것 아닌 것 같이 느껴졌지만 지나고 나면 그 때밖에는 할 수 없는 것이라서 아쉽게 마음에 남을 수도 있으니까.
한편으로는 '청춘에게 쫒겨났다'는 표현을 쓸 정도로 노화라는 것이 무서운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십 대, 삼십 대의 순수함에는 누런 얼룩이 묻어 있다'라고까지 자학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머리에 다는 작은 액세서리조차, '이 디자인 나이 제한 넘는 거 아냐?' 자문한다는 에피소드에서는 우리나라 지상파 모 아나운서가 떠올랐다. 50대의 나이에도 여전히 진한 화장과 염색한 긴 머리, 미니스커트, 분홍색 악세사리를 단 그녀가. 현재 그녀의 모습을 보기 전에 미리 젊은 시절 그녀의 모습과 책을 접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이에 굴하지 않고 본인의 개성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모습이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내가 보기에는 아름다웠다. 일본이 지나치게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을 쓰고, 튀는 사람을 경계하는 문화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고보니 발렌타인 데이가 다가오는구나. 잊고 있었다. '수제 초콜릿 선물하기'가 해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한이 될 정도라면 돌아오는 그 날에는 꼭 치르고 넘어가야겠구나.
<데이트 도시락 싸기>에서,
십 대 여자아이가 머잖은 장래에 헤어질 남자를 위해 순정을 바치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엄마의 가슴이 찡하지 않을까.
이런 문장, 미혼인 작가가 어떻게 생각해 냈을까, 신기하다.
'중년 남녀가 한참을 서서 얘기하는 모습 따위, 멋이고 뭐고 없다. 보는 사람에게 아무런 감동도 줄 수 없다는 사실이 서글퍼진다'라는 대목에서는 조금 놀랐다. 아직 내가 젊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중년 남녀가 얘기하는 모습'에서 나는 프랑스 영화 '남과 여'나 조지 클루니와 미셸 파이퍼의 '어느 멋진 날'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아이가 딸린 중년 남녀인데도 지금의 나보다 몇 년이나 더 어린 내가 떨릴 정도였는데 보는 사람에게 전혀 감동을 주지 않는다니? 잘생기고 예뻐서, 라고 반문한다면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반례로 들 수 있겠다. 그 영화 속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나 메릴 스트립은 전형적인 미남미녀도 아닐 뿐더러 그 영화에서 깔끔하고 단정하며 화려하게 나오지도 않는다. 그래도 나는 감동적이었는데. 어쩌면 가진 자의 여유라고 아직 젊은 나의 치기어린 만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한 나이를 먹었을 때 과연 나는 어떻게 생각하게 될 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마스다 미리의 이 책에서 등장하는 문장들은 자학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 분야에서 인정받는 유능한 워킹우먼이라도, 남편과 자식이 없다면 스스로를 이렇게까지 비하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부족한 것이 많았던, 그 '결핍'이 지금의 마스다 미리의 감성을 키웠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관점이 넓어진다고 할까? 예를 들면 <여행 가서 공중전화로 전화하기>에서,
학교 밖에 남자 친구가 있다.
그건 다른 세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세계는 언제나 두 가지였다. 집에 있을 때의 나와 친구와 있을 때의 나.
지금은 더 많은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작은 세계를 여러 개 갖는 것이라는 걸, 나는 언제쯤 깨달을까?
그리고 지금의 내게는 대체 몇 개의 세계가 있을까?
그 세계를 일일히 공표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어른이라는 것을, 나는 어떻게 학습했을까?
이런 대목이 그렇다. 이런 감수성을 만약 내가 가지고 있다면? 여러가지 감정을 겪을 수 있어서 인생이 좀 더 풍요로웠을까? 아니면 그 감정들 때문에 오히려 힘겨웠을까?
<교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는 남학생!>을 보고 문득 생각난 몇 년 전의 일이다. 다른 대학에 다니는 고등학교 동창과 모 여대 주변을 갈 일이 있었는데 역시 고등학교 동창 남자아이를 그 여대 교문 앞에서 만났다. 나와는 얼굴만 아는 사이지만 내 동창과는 친한 사이라 인사를 했는데, 동행했던 친구 왈, "여자 친구 기다리나봐~" 그러고 보니 역시 우리 셋 모두의 고등학교 한 해 후배와 그 남자아이가 고등학교 때부터 교제 중이라는 사실과 함께 그 후배가 그 여대에 진학했다는 사실도 기억이 났다. 굉장히 부러워하는 말투 때문에 나는 친구를 돌아보았고, 말로는 표현 못 할 정도의 부러움이 얼굴에 가득한 것을 보았다. 다시 원래 내 시선이 있던 곳으로 눈을 돌리고 나서 그 남자 동창 말고도 수많은 남자들이 그 여대 교문 앞에서 여자 친구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는데도 나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어쩌면 그 친구는 '누군가의 소유물처럼 다뤄지고 싶었다. 십 대의 나는 그러면 미래의 불안이 조금 옅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은가를 그가 정해주길 바랐다. 집에 가자, 해서 집에 가는 카나가 되고 싶었다.' 이 문장을 나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