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녀를 사랑했네
안나 가발다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세계사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읽기 전에 접했던 몇 몇 프랑스 소설들은 나에게 난해함과 생뚱맞음과 쓸데없는 허세와 과욕으로 기억되었다. 문학적인 소양이 부끄러울 정도라 함부로 말하기 어렵고, 특히나 프랑스 문학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지만, 이 소설만큼은 마음에 쏙 들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견이다. 프랑스 문학이라고는 레미제라블, 슬픔이여 안녕, 이방인 등 고전문학만 접해 본 게 고작이고, 최근 프랑스 작가들의 책은 이상하게 읽을 때마다 알레르기가 나서 많이 읽지 않았다. 역시 프랑스 작가의 작품인 '어린 왕자'는 언제 읽어도 읽을 때마다 새롭게 다가오는 그 느낌이 어떤 책과도 대체 불가능할 정도로 정말 좋지만, 요즘 나오는 프랑스 소설들은 꼭 보기에는 엄청 화려하고 예쁜데, 한 입 베어물면 과한 크림으로 속이 메슥거리는 케이크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그런데 이 책은 잘 구워진 바게트나 크루아상처럼 담백하면서도 계속 계속 먹고 싶은 느낌이 있다. 물론 불문학쪽으로는 무식에 가까운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일 뿐이다.

 

두 딸을 두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 아내를 떠나간 남편, 웬만하면 등장 인물에 감정이입하기 좋아하지만 정말 상상하기도 싫은 그 입장에 처한 아내에게, 시아버지, 즉, 남편의 아버지가 이야기를 들려준다. 결혼 후 가정이 생긴 상황에서, 다가온 사랑 이야기. 즉, 이 책의 제목에서 '나'는 시아버지이고, '그녀'는 시아버지가 결혼한 상태에서 만나고 사랑하게 된 여자인 것이다.

 

읽다 보면 '나'와 '그녀'의 사랑이 너무나 아름답다는 것에는 반대 의견을 내기가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아마도 저자는 그것을 노리지 않았을까. 시아버지는 결국 가정을 택했고, 아들은 가정을 떠났다. 가정을 택했던 시아버지가 가정을 떠난 아들의 아내에게 자신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는 구성을 택함으로써 저자는 어느 쪽의 손도 들어주지 않고 판단은 온전히 독자에게 맡긴다.

 

하지만... 내가 저자의 의도를 잘못 이해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나는 가정을 박차고 나간 남편의 손을 들어주고 싶지 않다. 사랑만큼 그 실체가 불분명한 것이 또 어디 있으며, 찰나에 불과한 것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프랑스에서 살아보았거나, 프랑스인 친구가 있는 것은 아니라 섣불리 말할 수는 없지만, '타인의 취향'이나 '8명의 여인들'등 이때까지 보아온 프랑스 영화에서 혼외 관계에 대해 다루는 관점을 보면 프랑스는 그런 쪽으로 꽤 관대한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 나라의 사회적 모습일 뿐, 굳이 인정해 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유혹에 흔들릴 수는 있는 것이 사람이지만, 결국 더 나은 가치를 위해 잠깐의 감정은 누를 수도 있는 것 또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사랑하는 것이 옳다면, 책임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닐까?

 

다만, 이 책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어하는 목록을 여자가 작성한 부분이 나오는데, 이 부분만큼은 마음에 와닿았다. 알고 보니 노희경 작가의 '굿바이 솔로'에도 등장한 부분이라고.

 

 

........ 소풍가기, 강가에서 낮잠자기, 낚시로 잡은 물고기 구워 먹기, 새우와 크로와상과
쫀득쫀득한 쌀밥 먹기, 수영하기, 춤추기, 당신이 골라주는 구두와 속옷과 향수 사기,
신문 읽기, 가게 진열장을 한참동안 바라보기, 지하철 타기, 열차 시각 확인하기,
둘이 앉는 자리를 당신이 다 차지하고 있다고 투덜대며 옆으로 떼밀기, 빨래 널기,
파리 오페라 극장에 가기, 베이루트와 비엔나에 가기, 시장 보러 가기, 슈퍼마켓에 가기,
바비큐 해 먹기, 당신이 깜박 잊고 숯을 안 가져 왔다고 볼멘소리 하기, 당신과 동시에
양치질 하기, 당신 팬티 사 주기, 잔디 깎기, 당신 어깨 너머로 신문 읽기, 당신이 땅콩을
너무 많이 먹지 못하게 하기, 루아르 지방과 헌터 밸리의 포도주 저장고 견학하기,
바보처럼 굴기, 재잘거리기, 당신에게 마르타와 티노를 소개하기, 오디 따기, 요리하기,
베트남에 가서 아오자이 입어보기, 정원 가꾸기, 당신이 코를 골며 잘 때 시끄럽다고
투덜대며 쿡쿡 찌르기, 동물원과 벼룩시장에 가기, 파리와 런던과 멜로즈에 가기,
런던의 피커딜리 거리에서 돌아다니기, 당신에게 노래 불러주기, 담배끊기, 당신에게
손톱 깎으라고 요구하기, 그릇 사기, 우스꽝스러운 물건들과 아무 쓸모 없는 물건들 사기,
아이스크림 먹기, 사람들 바라보기, 체스에서 당신을 이기기, 재즈와 레게 음악 듣기,
맘보와 차차차 추기, 심심하다고 투정부리기, 변덕 부리기, 뾰로통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깔깔거리며 웃기, 새끼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당신을 놀리기, 소들이 보이는 곳에 있는
집 찾으러 다니기, 점잖치 못한 물건들로 쇼핑 카트를 채우기, 천장에 페인트칠 하기,
커튼 꿰매기, 재미난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몇 시간 동안 꼼짝못하게 만들기, 당신 머리
깎아 주기, 잡초 뽑기, 세차하기, 바다 보기, 시시풍덩한 옛날 영화 다시 보기, 공연히
당신 이름 불러보기, 당신에게 야한 농담 하기, 뜨개질 배워서 당신에게 목도리 떠 주기,
그랬다가 보기 흉하다고 다시 풀어버리기, 주인 없는 고양이와 개를 거두어 먹이기,
앵무새와 코끼리에게 먹이 주기, 자전거를 빌려서 타지 않고 그냥 놓아두기, 해먹에
누워 있기, 할머니가 보시던 비코네 식구들의 이야기 다시 읽으며 쉬잔의 드레스 다시 보기,
응달에서 마르가리타 마시기, 게임하면서 속임수 쓰기, 다리미 사용법 배우기, 다리미를
창문 너머로 내 던지기, 빗속에서 노래 부르기, 관광객들 피해 다니기, 술에 취하기,
당신에게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하고 나서 때로는 거짓말이 약이 된다는 것을 새삼 깨닫기,
당신 말에 귀 기울이기, 당신에게 손 내밀기, 버렸던 다리미 다시 찾아오기, 대중 가요의
가사를 음미하기, 자명종 맞춰 놓기, 우리 여행 가방 챙기는 거 잊어버리기, 조깅 며칠
하다가 그만 두기, 쓰레기통 비우기, 당신이 날 여전히 사랑하는지 물어보기, 이웃집
여자랑 수다떨기, 당신에게 바레인에서 보낸 내 어린 시절 이야기 들려 주기, 내 유모의
반지와 헤나 냄세와 호박으로 된 동글동글한 장신구들에 관해서 이야기하기, 계란 반숙
이나 커피 따위에 적셔 먹을 길고 가느다란 빵 조각 만들기, 잼 단지에 붙일 딱지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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