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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이성 친구 (작은책)
장 자끄 상뻬 글 그림,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5월
평점 :
품절
"대화의 분위기는, 오래 전부터, 아주 아주 오래 전부터, 어쩌면 너무 오래 전부터 약한 불 위에 올려 놓은 어떤 음식이 설핏한 저녁 햇살 속에서 천천히 익어 가고 있는 시골 부엌의 분위기만큼이나 아늑했다."
개인적으로 제일 인상 깊은 구절이자 이 책을 잘 설명하고 있는 구절인 것 같다.
속 깊은 이성 친구... 실제 그대로 번역한 것인지 아니면 의역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참 함축적이면서도 시적이고 책 안의 모든 이야기를 포괄하는 내용인 것 같다.
40편 정도의 짤막짤막한 이야기들. 이야기들은 대체로 한 장을 넘어가지 않고,
삽화는 그 이야기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을 잡아낸다.
기-승-전-결 이 없고 단지 남녀 사이의 스쳐지나가는 짧은 순간,
어쩌면 그 순간은 사람에 따라서 평생을 뒤흔들 순간이 될 수도 있고
뇌 속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그저 날아가버릴 순간이 될 수도 있다.
그 순간을 작가답게 포착하여 두고두고 펼쳐보고 싶은 이야기책을 만들었다.
동성이 아닌 이성, 그러나 아직 연인은 아닌 친구, 격렬하고 열정적인 사이는 아니지만
꼭 거기에 있어서 내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고, 아직 정의되지 않은 우리 사이를
침착하게 관조할 수 있는 속 깊은, 그런 이성 친구. 누구나 그런 존재를 꿈꾸고
어쩌면 그 이상을 바랄 수도 있고. 이 책은 오늘같은 봄보다는 가을에 어울리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