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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빨개지는 아이 ㅣ 장자크 상페의 그림 이야기
장 자크 상뻬 지음, 김호영 옮김 / 별천지(열린책들) / 200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이 1969년에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틀림없이 놀랄 것이다. 다정다감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이야기, 최소한의 선과 색만 사용했지만 따스함이 넘치는 그림. 한마디로 '우정'에 대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딱 알맞는 책, 이 책이 최근도 아닌 40년도 더 전에 만들어졌고 지금 봐도 전혀 이질감이 없다는 것. 아마도 첫번째 이유는 책이 훌륭해서일 것이고, 두번째 이유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보편적인 감성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 책을 알게 된 것은 내가 고등학교 시절, 10년도 더 전의 일이다. 우리 반에는 이 책의 주인공처럼 걸핏하면 얼굴이 빨개지는 남자아이가 있었다. 물론, 그 아이는 시도때도 없이 얼굴이 빨개지는 것은 아니었다. 흔히들 얼굴이 빨개지는 바로 그런 상황이 유독 그 친구에게는 좀 잦았다. 그만큼 순수하고 또 순진한 친구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친구에게 역시 우리 반의 한 여자아이가 선물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선물한 때가 남자아이의 생일이거나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그리고 두 친구가 사귀거나 소위 말하는 "썸을 타는" 사이도 아니었다. 물론 그 시대에는 그런 말도 없었지만. 여자아이가 선물을 주기 전부터 이 책에 대해 이야기했고, 선물을 주는 그 과정을 내가 전부 목격했던 것은 내가 남자아이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었다거나 그 여자아이가 내 절친이었던 이유는 아니었고 오로지 내가 앉은 자리가 그 둘의 중간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 둘은 바로 붙어 앉아있지는 않았지만 각자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아도 대화가 가능한 정도의 자리에 있었고, 내 자리는 그 둘의 중간쯤이었다. 그리고나서는? 별 일 없었다. 그걸로 끝.
약 10년의 세월이 흐른 후, 이 책을 다시 보자마자 그 때의 일이 어제처럼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어른이 된 아이들이 등장하는 책의 거의 마지막 부분이 나오기 전까지 얼굴 빨개지는 아이의 절친인 재채기하는 아이는 당연히 여자아이인 줄로만 알았다. 내 고등학교 동창 중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에게 책을 통해 마음을 표현한 것이 분명했을 것이기에. 아마도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에게 호감이 있었을 것이고 남자아이는 아니었겠지. 물론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극히 일부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래서 나는 이 책을 기억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참 재미있는 것이, 내가 좋아하는 남자아이가 언급한 책도 아니고, 나와 절친했던 여자아이가 좋아했던 책도 아니고 사실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는 책이었는데, 이상하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고등학교 때의 그 일이 매우 흥미롭게 느껴지고 실제보다 더 아름답게 각색되어 기억에 남아 있는 느낌이다. 어쩌면 내가 그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씁쓸하거나, 부끄럽거나, 안타까운 느낌이 전혀 없이 그저 갑남을녀의 예쁜 한 때로만 기억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정작 당사자들은 그 일을 기억하지도 못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하지만, 아마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둘 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몇 년이 흘렀고 사회인이 되면서 남자아이도 여자아이도 그 때와 똑같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남자아이는 순수의 시절을 지나 더 이상 얼굴이 빨개지지 않을 수도 있고 여자아이도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먼저 선물을 하기보다는 선물을 받아내는 방법을 터득했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일은 분명히 둘 다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책은 40년이 넘어선 생명력을 지닐만큼 훌륭한 책이니까. 남자아이는 소장가치가 분명한 이 책을 버리지는 않았을 것 같고 자기 방 책꽂이 한 편에서 볼 때마다 그 때 기억을 떠올릴 테니까. 여자아이는 이 책을 소개하는 예능 프로를 볼 때마다, 어쩌면 서점의 스테디셀러 코너를 지날 때마다 그 때 추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