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시스터즈 키퍼 - 쌍둥이별
조디 피콜트 지음, 곽영미 옮김 / 이레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마지막 결말을 통해 소설 족 가족의 문제를 우리 모두의 문제로 확대시킨 작품




유전공학의 발달은 법과 윤리의 영역에서도 전에는 상상에만 머무르던 문제를 현실 세계로 끌어낸다.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단계의 문턱까지 다다른 것 중 하나는 '맞춤형 아기(Designer-baby)'를 둘러싼 논쟁이다. 디자이너 베이비를 만들어내는 기술은 착상 전 유전자 진단법(PGD·Pre-implantation Genetic Diagnosis)이다. 배아가 가진 특성을 검사해 그중 선택된 것을 자궁에 착상시키는 것이다.

한때 유전질환의 치료에 기여할 것으로 여겨졌던 기술이 이제 아이의 특징을 선택하는 도구로 사용하게 되었다. 사실 전부터 아이의 성별을 선택하는 시술은 이미 수천 건 이상 행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년에는 1970년대 시험관아기 연구의 권위자였던 제프 스타인버그가 이끄는 의료기관에서 '아이의 머리카락과 눈 색깔을 선택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발표했다가 거센 반대 여론에 못 이겨 한 달 만에 포기해버린 일도 있었다.




부모가 아이의 특성을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은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상당수 국가는 법으로 이러한 시술을 금지하고 있다. 물론 유전적 결함을 가진 남녀가 건강한 아이를 갖고 싶어 할 때 의학의 도움을 받는 정도에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이 정도는 허용한다. 실제로 ‘엄지 공주’라는 애칭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한 여성은 50% 확률로 유전되는 자신의 선천성 질환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 PGD를 사용했다. 하지만 성별을 선택하는 것도 허용해야 할까? 외모는 어떨까? 자식이 큰 키에 매력적인 몸매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많은 부모의 선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나아가 쌍꺼풀을 갖고 태어나게 하는 것은 어떨까? 작은 얼굴이나 긴 팔다리를 갖는 것은?




외모뿐만이 아니다. 높은 지능을 가진 유전자나 예술적 재능을 가진 유전자를 장착한 배아를 선택하는 것이 허용되어야 할까? 지능이 아닌 성격은 어떨까? 자상한 성격을 가진 아이를 원하는 것은 괜찮을까? 리더십이 타고난 아이는 어떨까?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는 강함, 매사에 당당하고 긍정할 수 있는 자세, 이런 것들도 자라면서 겪는 경험을 통해서가 아니라 태어나기도 전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고도 가질 수 있다면? 




'맞춤형 아이'를 향한 시도에 반대하는 논리는 인간을 품질개선이 가능한 상품으로 보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근거를 두고 있다. 능력 있는 부모의 아이들은 날 때부터 사회에서 바람직하게 여기는 자질을 갖추고 태어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상대적으로 살아가는 게 버거워질지 모른다. '우월한 인종의 출현' '초인(Super Human)의 탄생'을 경계하는 목소리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오는 것이다. 태어나는 아이의 인권도 중요한 쟁점이다. 유전과학은 아직도 발전중인 분야이며, 특히 인간에 관한 분야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것이어서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아무도 모른다. 수많은 동물실험, 검증에 또 검증을 반복하더라도, 아이가 자란 뒤에 어떤 현상이 나타날지 완벽히 예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일들이 일반화되면 인류의 유전자 풀(pool)에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미 가지고 있는 질병이나 유전적 결함을 치료하기 위해 과학의 힘을 이용하는 것은 ‘인간의 행복 추구권’에 위배되지 않아 가능할지라도, 세상에 나기도 전에 이른바 '품질개선'을 위한 행위는 허용되지 않아야 한다는 데 다수의 의견이 모아지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다른 사람을 위해 '맞춤제작'되는 아이가 있다면 어떻게 봐야 할까? 물론 인간을 완전히 수단으로 봐서 '전투형 인간'을 만든다거나 '순종적인 인간'을 생산하려는 시도가 있다면 당연히 금지해야 하겠지만,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일이라면 어떨까? 불치병에 걸린 자식을 둔 부모가 조직 이식이 가능한 아이를 낳기 위해 유전자 검사를 이용하는 것은 허용될까?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도 크게 위험한 일이 아니라면 아직 스스로 의사 표현할 수 없는 신생아 단계에서 혈액채취나 골수이식 등을 부모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을까? 그런데 만일 아이가 자라면서 거부를 한다면? 몸에 대한 결정권은 부모가 아닌 자신에게 있는데 형제자매를 돕기 싫다고 한다면 법은 누구의 손을 들어줘야 할까? 조디 피콜트의 소설 <마이 시스터즈 키퍼-쌍둥이별>은 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다.




변호사였던 사라는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일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된다. 소방관인 남편 브라이언과 함께 행복했던 그녀의 인생은 두 살 된 딸 케이트가 전골수구백혈병(promyelocytic leukemia)에 걸리면서 큰 위기를 맞게 된다. 의사는 케이트에게 골수 공여자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라 부부나 케이트의 오빠는 항원이 일치하지 않아서 공여를 할 수 없었고, 골수은행만 바라보고 있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사라 부부는 케이트의 이상적인 공여자가 될 수 있는 배아를 선택해서 체외수정을 통해 착상한다. 언니를 위한 존재, '마이 시스터즈 키퍼'(My Sister's Keeper)인 안나가 탄생한 것이다.




안나는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언니에게 제대혈을 제공한다. 다섯 살이 되던 해 팔꿈치 안쪽에서 피를 뽑아서 림프구를 채취했고, 수차례 똑같은 시술을 받아야 했다. 1년 뒤에는 케이트가 감염과 싸울 수 있도록 과립구를 기증했다. 골수를 채취할 때는 전신마취를 하고 엉덩이뼈에 바늘을 찔러야 했다. 백혈병 환자인 케이트는 끊임없는 병의 재발로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한다. 무엇보다 부모를 견디기 어렵게 하는 것은 그런 고통에도 불구하고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케이트가 병원 갈 때는 안나도 같이 가야 한다.




안나는 아픈 언니를 동정하고 사랑하지만, 부모님이 항상 케이트에게만 매달리고 자신의 희생은 당연한 듯이 여기는 것이 조금은 불만이다. 오랜 기간 고대했던 하키 캠프에 못 가게 되었을 때는 "언제쯤 언니에 대한 의무에서 풀려날 수 있느냐"고 불만을 터뜨리기도 한다. 케이트의 병은 다시 악화되고 의사는 신장이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신장을 이식한다고 해서 반드시 회복된다는 보장은 없다. 다만 신장이식을 하지 않으면 며칠 안에 신부전으로 사망하게 된다. 당연히 사라 부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안나의 신장을 케이트에게 이식해야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안나는 이번에는 협조하지 않는다. 이제 13살이 된 안나는 그동안 모은 137달러87센트를 들고 변호사를 찾는다. 부모가 신장이식을 강요하지 못하게 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 책의 가족은 인간의 존엄과 가족의 의미 사이에서 커다란 도전과 시험을 받는다. 딸의 생명을 소중히 여길수록 또 다른 딸의 삶의 질은 종잇장처럼 얇아져 간다. 언니를 위해 기증을 하면 동생의 삶은 저당 잡힌다. 그러니 몸의 권리를 찾는 건 정당하지만 기증을 거부하면 죽어가는 언니를 지켜봐야 한다. 어느 한쪽만을 위할 수 없고 어느 누구도 손가락질 받을 수 없는 상황. 작가는 가족 모두에게 각자의 내레이션을 부여하며 그들 내면의 소리를 꺼내 보인다.

병에 걸린 아이로 인해 행복을 잃은 것은 이 가족 뿐만은 아니다. 그 주변에도 아픔은 많다. 안나의 사건을 맡은 판사는 딸을 교통사고로 잃었고, 나중에 밝혀져 놀라움과 함께 은은한 감동을 주게 되는 변호사의 몸에 대한 반전도 있다.

모두들 상처투성이다. 실제로 3년 동안 10번이 넘는 대형수술을 한 아이의 엄마였던 원작자 조디 피콜트가 바라본 세상이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소설은 물론 의료윤리나 신체의 자기결정권에 관한 법률 이론을 묻기 위해 만든 단순한 케이스 문제가 아니다. 불치병을 앓는 딸을 가진 부모의 고뇌, 자녀들 사이의 갈등,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생각 등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안나가 신장이식을 거부하게 되는 사연도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다. 언니를 위해서 태어난 '맞춤형 아기'였던 안나의 운명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옳은지는, 소설의 이야기가 이미 현실이 되어버린 이 시대의 의학과 법학이 반드시 대답을 해야 하는 문제다. 불치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 안나와 같은 존재를 만드는 게 허용되는 것일까? 신장이식은커녕 피 한 방울이라도 본인의 동의 없이 채취하는 것은 당연히 법으로 금지되지만, 만약 나를 세상에 내어놓기로 결정한 부모가 요구한다면? 그 이유가 역시 부모의 또 다른 아이를 위해서라면 이것은 부모의 권리에 포함되는 것일까? 또한 과학이 치료의 가능성을 제공하는데 법이 그것을 가로막는 것은 올바른 일일까?




법과대학에서 불법행위와 손해배상책임에 대해 배울 때 만나게 되는 문제 중에 '결함 있는 생명으로 인한 소송'(wrongful life lawsuit)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제약회사의 잘못으로 약을 복용한 임신부가 장애아를 낳거나, 태아의 장애를 발견하지 못한 의사의 오진으로 인해 장애아를 낳은 경우 '결함 있는 생명'이라는 손해를 입었다는 이유로 제기하는 소송이다. 당연히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런 소송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결함 있는 생명'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머리가 좋건 나쁘건, 키가 크건 작건, 성격이 착하건 포악하건, 장애가 있건 없건 모든 생명은 똑같이 소중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건에서 치료비를 청구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남들보다 못한 존재'라는 이유로 배상을 받을 수는 없다.




치료를 위해 태어나는 아이의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이런 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과학의 발달은 쉽게 답하기 어려운 윤리적 딜레마를 가져온다. 양쪽의 주장 모두 일리가 있고 구체적인 사건에 모두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 원칙을 찾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생명은 똑같이 소중하다는 사실이다. 불치병을 앓는 자식을 가진 부모의 마음이 아무리 괴롭더라도 다른 사람의 희생을 강요해서 생명을 연장할 수는 없다. 안나의 사건이 미국이 아니라 우리나라 법원에 오더라도 승소해야 하는 것은 이런 원리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사람의 특징을 다양성이 아닌 '품질'로 생각해서 개량이 가능하다고 여기거나, 생명이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인류는 유전공학의 결과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생각에 의해 괴물로 변모할지도 모른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작년에 동명의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이다. 예고편만 보고 영화소개만 보아도 ‘그렇고 그런 영화는 아니겠구나’하는 강렬한 느낌이 들었다. 약간은 상투적이지만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어쩔 수 없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책을 빌려보기 위해 동네 도서관에 대출 예약을 해 놓았는데 반년이 넘어서야 볼 수 있었다. 수많은 독자들의 칭찬처럼, 이 책은 한번 잡기 시작하면 책을 다 읽고 결말을 확인할 때까지 쉬지 못하게 한다. 다 읽고 나서야 500쪽이 넘는 책의 두께가 느껴진다. 이보다 덜 두꺼운 책도 이렇게 끝까지 재미있고 지루함 없이 읽을 수 있었던 적이 과연 있었던가?




책을 읽은 독자들에게는 어이없을 정도로 당황스러운 결말이, 영화를 본 관객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상상력의 제한이 불만인 것 같다. 하지만 영화 ‘노트북’의 감독이었던 닉 카사베츠는 과감한 생략과 때론 원작을 뛰어넘는 의미 부여를 통해 영화를 매끄럽게 잘 각색하였다고 생각되며, 책의 결말은 영화에서 너무 상냥하고 우아하게 다독여진 문제를 좀 더 첨예하고 깊이 있게 찌름으로써 여운이 더 오래가는 아픔을 우리 모두에게 던졌다는 점에서 만족스럽다. 사실 이것 이외의 결말을 내기가 작가 입장에서는 힘들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두 딸 모두를 사랑한 극 중 사라처럼 작가도 등장인물 모두에게 치우치지 않은 똑같은 애정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상처를 억지로 봉합하는 대신 시간과 자연의 흐름에 맡기는 것, 이 가족에게 그것 외엔 다른 어떤 치료법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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