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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천사의 시 SE - [초특가판]
빔 벤더스 감독, 브루노 간즈 외 출연 / 기타 (DVD) / 2005년 1월
평점 :
아이가 아이였을 때 팔을 휘저으며 다녔다
시냇물은 하천이 되고 하천은 강이 되고
강도 바다가 된다고 생각했다
아이였을 때 자신이 아이라는 걸 모르고
완벽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세상에 대한 주관도, 습관도 없었다
책상다리를 하기도 하고 뛰어다니기도 하고,
사진 찍을 때도 억지 표정을 짓지 않았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질문의 연속이었다
왜 나는 나이고 네가 아닐까?
왜 난 여기에 있고
저기에는 없을까?
시간은 언제 시작되었고
우주의 끝은 어디일까?
태양 아래 살고 있는 것이 내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이
모였다 흩어지는 구름조각은 아닐까?
악마는 존재하는지, 악마인 사람이 정말 있는 것인지,
내가 내가 되기 전에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지금의 나는 어떻게 나일까?
과거엔 존재하지 않았고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는
다만 나일뿐인데 그것이 나일 수 있을까
아이가 아이였을 때
시금치와 콩, 양배추를 억지로 삼켰다
그리고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모든 것을 잘 먹는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낯선 침대에서 잠을 깼다
그리고 지금은 항상 그렇다
옛날에는 인간이 아름답게 보였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옛날에는 천국이 확실하게 보였지만
지금은 상상만 한다
허무 따위는 생각 안 했지만
지금은 허무에 눌려 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딸기만 손에 꼭 쥐었다
지금도 그렇다
덜 익은 호두를 먹으면
떨떠름했는데 지금도 그렇다
산에 오를 땐 더 높은 산을 동경했고
도시에 갈 때는 더 큰 도시를 동경했는데 지금도 역시 그렇다
버찌를 따러 높은 나무에 오르면 기분이 좋았는데 지금도 그렇다
어릴 땐 낯을 가렸는데 지금도 그렇다
항상 첫눈을 기다렸는데 지금도 그렇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막대기를 창 삼아서 나무에 던지곤 했는데
창은 아직도 꽂혀 있다
난 이 세상에 뛰어들겠어. '기회 속으로 파고들어라' 라는 뜻을 알겠어
지금 아니면 할 수 없고 흐름 속으로 들어와야만 여울물도 있는 거야
시간의 강, 죽음의 강으로 뛰어들겠어
천사의 누각에서 내려오게 되겠지
위에서 보지 않고 눈높이에서 볼거야
우선 목욕을 해야지
그리고 면도할 거야. 터키인 가게에 가서 손끝까지 마사지도 하고
그리고 신문을 사서 1면부터 운세까지 봐야지
첫날엔 대우만 받을 거야
그 어느 누가 부탁을 해도 나는 거절할 테야
누가 내 다리를 걸면 사과하라고 할 거야
술집에 가면 주인이 자리를 정해 주고
시장이 리무진을 보내면서 나를 초대할 거야
그 누구도 나를 타인이라 생각지 않을걸
난 말없이 듣기만 할 거야
그게 첫날에 내가 할 일이지
하지만 그건 공상일 뿐이야
과연 공상일 뿐일까.
원제는 베를린의 하늘이라는 이 영화는 한글 제목이 훨씬 더 의미 있고 멋있다. 세상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던 아이 때에는 천사를 볼 수 있지만 어른들은 그럴 수 없다. 단지 천사가 어깨에 손을 올리면 간지러운 느낌이 드는지 어깨를 만질 뿐이다. 은연중에 손으로 건드리는 부위에는 천사의 손길이 닿았던 것일까.
그 전에만 하더라도 천사들은 구원해주는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를 보니 위로해주는 존재이다. 천사들은 보통 근심 중에 있거나 극단적인 경우 자살 직전인 사람들 곁에서 그들을 위로한다. 그들이 하는 것은 정말 위로에 그칠 뿐이다. 많은 사람들은 천사의 위로를 통해 다시 한 번 삶에 대한 희망을 가져보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대로 아래로 추락하다. 결국 추락해버린 한 남자. 그리고 천사의 절규 “Nein!(안 돼!)”, 그리고 차마 확인하지 못하고 자리를 떠버리는 천사의 모습. 이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내내 흑백으로 진행되다가 서서히 컬러 화면으로 바뀌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 아름답다.
베를린이라는 도시에 가보지는 못했지만, 이 영화는 특히 베를린이라는 도시의 특색을 잘 살린 것 같다. 영화가 나온 시기에는 막 통일이 되었거나, 아직 되지 않았을 무렵이다. 흑백의 화면, 그리고 삶의 무게에 짓눌린 사람들을 표현하기에 시끌벅적하고 즐거운 도시는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한 가지 인상 깊은 것은, 사람들의 독백을 끝없이 들으면서 그 누구보다 인간의 고뇌에 대해 잘 알고 있을 천사들이 어떻게 감히 인간이 되겠다고 결심할 수 있는 지였다. 자신들 또한 힘든 길을 가야 할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모든 고통이란 자신이 직접 겪어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많이 알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나는 이제 안다, 그 어떤 천사도 모르는 것을”이라는 독백이 의미심장한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아는’ 것이 과연 즐겁고 행복하기만 한 것일까. 아니,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살아가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