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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花樣年華) - [할인행사]
왕가위 감독, 양조위 외 출연 / 드림믹스 (다음미디어) / 2003년 7월
평점 :
품절
화양연화는 홍콩의 한 아파트에서 이웃이 된 두 상하이 이주민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지역 신문사에서 일하는 차우는 이사하던 날 역시 같은 날에 이사 온 첸 부인을 만난다. 남편의 잦은 출장은 그렇지 않아도 고독한 그녀에게 알 수 없는 정적의 깊이를 부여한다. 이웃인 이들은 물리적으로 지극히 한계가 분명한, 비좁은 공간에서 자주 마주치지만 특별한 관능도 무엇도 주고받지 않는다. 그저 스쳐가는 인연일 뿐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늘 가능성이 숨겨져 있다. 지금 나와의 거리가 0.001cm이었던 이는 남이 될 수도, 의지에 따라 친구가 될 수도 있다. 숨이 막히는 쪽은 관객이다. 훔쳐보는 듯한 카메라의 시선과 짧은 조각처럼 연결된 씬들 그리고 마치 상처가 곪아 터질듯 느릿하게 쿵쿵 울려대는 음악의 조화는 바로 그 가능성을 폭발시킨다.
사랑, 차마 말로 다 못할 그 무엇 <화양연화>
이 영화는 한 마디로 사랑영화입니다. 워낙 사랑에 메마른 사람인 탓인지 나는 사랑 이야기를 무척 좋아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까닭은 그저 사랑영화이기 때문은 물론 아닙니다. 이 영화에는 스타일이 있고 무드가 있습니다. 이야기 자체도 좋고, 연기도 좋고, 또 음악도 좋습니다.
줄거리는 역시 생략합니다. 저는 영화소개를 하면서 줄거리를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영화는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옛날이야기가 아니니까요. 대체로 좋은 영화는 말로 줄거리를 설명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리고 줄거리 자체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도 많습니다. 그렇지요. 말로 할 수 있는 것이면 그냥 말로 하지 뭐 하러 영화로 만들겠습니까.
주인공은 <양조위> – 영어 이름은 <토니 륭> – 그리고 <장만옥> – 영어 이름은 <메기 장>입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주인공이었다면 전 이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되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장만옥>이 아니었다면 이 영화는 내 ‘다시 보고 싶은 영화 순위’에서 한참 밀려났을 것입니다.
사랑은 말로 하기도 하고, 눈빛으로 하기도 하고, 몸짓으로 하기도 합니다. <화양연화>에서의 사랑은 눈빛으로 하는 사랑입니다. 영화에서는 그 흔한 키스장면 조차 하나 없습니다.
<양조위>를 바라보는 <장만옥>의 눈빛은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가득했다가 이내 떨림으로 바뀌고 그리고는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마침내 그 녀의 눈이 붉어지며 눈물이 흐르면 영화는 막바지로 치닫습니다. <양조위>의 눈에서는 뿌리칠 수 없는 사랑의 유혹과 체념의 고통을 같이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본능적 자석의 끌림과 현실이라는 완강한 버팀이 영화 내내 팽팽히 맞섭니다.
감독은 한 고비를 넘을 때마다 천천히 움직이는 화면에 흐느끼는 듯한 음악을 깔아 보여줍니다. 이 장면들은 볼 때마다 내 가슴을 때립니다. 마치 내가 <양조위>가 된 듯한 느낌입니다. 잘 만든 영화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주인공을 마치 자신처럼 느끼게 한다고 하지요.
이 영화에서 또 하나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흔히 말하는 <미장센>입니다. <미장센>은 쉽게 말해 전체적인 화면을 구성하는 방법인데 카메라, 무대장치, 소품, 의상, 분장 등이 어우러지는 것을 말합니다.
부드러운 카메라의 움직임과 좁은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무대장치에 <장만옥>의 눈부신 <치파오>가 더해지면서 미장센은 완성됩니다. <치파오>는 중국여자들이 입는 전통의상입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한복 같은 것인데 우리의 한복과는 반대로 몸의 곡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아주 자극적인 옷입니다.
서로의 배우자가 정을 쌓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이들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달라진다. 낯선 이에게서 같은 배경과 같은 상처를 느끼면서 이들은 오묘한 위로를 받는다. 배우자의 외도는 아픈 상처이지만 그 상처가 준 새로운 만남의 힘은 또 한편으로 강렬하다. 이들은 책에 대해 토론하고, 음식을 같이 먹고, 각자 배우자에게 어떻게 이야기할지 예행연습을 하면서 가까워진다. 두 사람의 행위는 영화 전체를 통틀어 지극히 반복적이다. 같은 동선과 같은 만남 그리고 같은 안부인사. 달라지는 것은 의상일 뿐이다. 영화는 같은 테크닉을 활용해 반복적으로 특정 상황을 묘사해낸다. 그러나 반복된 행위가 같은 결말을 맺는 것은 아니다. 같은 행위는 반복되면서 감정을 차곡차곡 쌓아 이들에게서 낯설음을 제거한다. 영화는 마침내 한 화면에 둘을 나란히 배치시키는데 성공한다. 서로를 마주하는 게 낯익게 될 때까지 영화는 조심스럽게 캐릭터를 매만진다. 그 시선의 예민함이 소름끼칠 정도다. 사물 하나하나에는 의미가 담겨있고 의상에 그려진 그림도 인물에 감정에 따라 화려하게 꽃피다 저문다. 외적으로 절제된 영상은 실상 텍스트의 풍부함이 배어있다.
그러나 도덕적 기로와 양심의 문제를 거스를 수는 없다. 배우자의 외도로 만난 사이가 또 다른 불륜으로 연결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모욕이고 타인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혼란스러운 첸 부인의 마음은 만남이 약속된 호텔 앞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짧고 빠른, 그리고 여러 개의 시선으로 분산된 편집은 극단적으로 초조하고 불안하다. 이들은 가까워질수록 멀어지지 않아선 안 된다. 서로를 품지 않고 급기야 이별에 이르러서야 사랑을 고백한다. 적극적이지도 못했고 꽃피지도 못한 채 도망가고픈, 비겁하고 허무한 기억만을 남긴다. 그러나 서둘러 떠나려는 차우를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공간에 대한 불우한 기억은 자연스레 그 공간을 점유했던 이를 몰아낸다. 그 허무함이 여운이 되어 자꾸만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세월이 흘러 차우는 그때의 추억을 앙코르와트 유적의 작은 구멍에다 묻는다. 시공간이 초월된 유적에 묻힌 비밀은 영원할까. 한편 그가 유적 안에 비밀을 털어놓는 그 시각, 캄보디아에는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이 방문한다. 같은 해 개혁에 대한 국민 투표에서 패배해 사임한 드골이 상징하듯 역사는 한 시간을 놓치지 않고 거칠게 요동친다. 그러나 개인의 고독과 허무를 담은 추억은 바래지 않는다. 역사와 공간은 인간 개개인을 자유롭게 허락하지 않지만 그것이 주체의 부재까지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꿈틀거리는 인간의 몸짓은 역사 앞에 선다. 낯선 공간이 내린 고독의 형벌은 그와 동일한 다른 이를 통해 치유된다.
아픔과 고통은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몹시 아이러니하다. 고통과 쾌락은 희극과 비극이 이어지듯 거대한 원으로 이루어진 듯하다. 정말로 아름답고 행복한 시기는 고통과 고독으로 버무려진 그 시간 바로 직후에 오는 것일까. 화양연화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뜻한다고 한다. 감성을 숭배하는 자가 있다면 왕가위는 그들 앞에 신의 사도로 군림한다.
여러 블로거의 리뷰를 그대로 옮겼다. 지금 볼 때는 너무나 아름답고, 나이가 들어서 보면 더 저릿할 것 같다. 배우, 영상, 음악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다. 이렇게 흔한, 단 한 줄의 문장으로 표현될 수 있는 이야기가 이렇게 풀어내어질 수 있다니 신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