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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슨살인사건 ㅣ 동서 미스터리 북스 67
S.S. 반 다인 지음, 정광섭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5월
평점 :
번스의 예술적 본능에 대해 이처럼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은 뚜렷한 목적이 있어서다. 6월의 그날 아침 번스를 위해 시작된 멜로드라마 같은 모험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아무래도 그의 penchants(성향)과 내면적인 경향에 대해 얼마쯤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미술에 대한 그의 흥미는 그 개성 가운데 중요한, 거의 지배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중요한 요소였다. 나는 지금까지 그런 인물--겉으로 보기에는 더없이 변덕스러우나 속으로는 견실한 인물--을 본 적이 없다.
번스는 많은 사람들이 '예술 애호가'라고 부르기 쉬운 타입이다. 하지만 그를 예술 애호가라고 부르는 것은 적당치 않다. 번스는 훌륭한 교양과 재기를 갖춘 사람이었다. 출신성분으로 보나 천성으로 보나 귀족적이었으며 행동도 더없이 고상했다. 그의 말씨나 태도에는 온갖 저속한 것에 대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경멸이 나타나 있었다. 가끔 그를 대하게 된 사람들은 대부분 그를 사이비 신사로 보았다. 그러나 그의 겸양과 경멸은 결코 신사처럼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신사연하는 태도는 지성적인 동시에 사교적이었다. 나는 그가 천박한 악취미를 싫어한 이상으로 미련함도 싫어했다고 믿는다. 그가 'c'est plus qu'un crime, c'est une faute(그것은 죄악 이상이다. 그것은 과실이다)'라는 푸셰의 유명한 문구를 인용하는 걸 나는 몇 번 들었다. 그리고 그는 글자 그대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방 안으로 처음 들어가자 번스는 외눈안경을 엄숙하게 조정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한 그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이 번스가 깊은 흥미를 가지고 있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정신이 긴장해서 주위의 인상을 재빨리 파악하려고 할 때 그는 늘 외눈안경을 썼기 때문이다. 외눈안경 없이도 충분히 잘 보이는 데 그것을 쓰는 것은 지적 지상명령의 결과인 듯했다. 그것을 씀으로써 시각이 맑아지면 정신을 맑게 하는 데 미묘한 영향을 미치는 모양이었다.
매컴은 얕보듯이 불만을 털어놓았다.
"진상이 드러났거나 드러날 가능성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자기에게 불리한 일을 고백하겠나?"
"정말이지 한심하군, 매컴. 그 천진스러운 귀에 privatissime et gratis(살짝 무료로) 속삭여줄까? 자백에 대해서는 언제나 여러 가지 많은 동기를 추측해볼 수 있다네. 공포나 강박관념의 결과일지도 모르고 또는 방편, 모성애, 의협심, 정신분석학자들이 말하는 열등감, 망상, 그릇된 의무감, 왜곡된 자만심, 쓸데없는 허영심 등 그밖에도 수많은 원인을 들 수 있지.
따라서 자백은 온갖 형식의 증거 가운데 가장 믿을 수 없는 것이라네. 법률이란 우스꽝스럽고 비과학적이지만, 그래도 살인사건에서의 자백은 다른 증거의 뒷받침이 없는 한 물리쳐지고 있지."
"자네 말솜씨가 굉장하군그래. 감탄했는걸. 법률은 모든 자백을 추방하고 온갖 물적 증거를 무시하라는 것이 자네의 주장인 모양인데, 그렇게 되면 사회는 모든 재판소를 폐쇄하고 형무소를 폐지해야 할지도 모르네."
"전형적인 법이론상의 non sequitur(이론의 비약)로군."
"아주 간단한 추리였군. 그런데 여자가 여기서 차를 마셨다는 건 어떻게 알았나? 누군가가 몰래 귀띔해주었다면 모르지만."
"그것을 설명하려면 창피를 무릅써야겠는걸. 실은 저기 있는 사모바르의 상태를 보고 짐작했다네. 어제 보니 쓴 그대로 더운물도 빼지 않고 닦지도 않았더군."
매컴은 상대를 얕보듯이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도 별수 없이 물적 단서라는 천박한 법률가의 수준으로 떨어진 모양이군."
"그래서 이렇게 부끄러워하고 있잖나. 심리적 추리만으로는 사실을 in esse(있는 그대로의 것)로 추정할 수 없고 다만 in posse(가능성)로 추정할 뿐이라네. 물론 다른 여러 가지 조건도 고려해야지. 이 경우 사모바르에 나타나 있는 조건은 가정이나 추정의 기초 자료로써 유용할 뿐인데, 여기에서 가정부가 등장하게 된다네."
《벤슨살인사건》은 첫 작품이니만큼 파이로 번스에 대하여 아주 자세하게 소개되고 있다. 성격, 풍모, 교양, 취미에 이르기까지 그의 모습이 눈앞에 선히 떠오르도록 세밀히 묘사했다. 번스의 탐정법은 매컴 검사와의 문답에도 있듯이 모든 물적 증거를 무시하기를 극력 주장하고(번스, 의견을 말하다에서), '진실을 아는 유일한 방법은 범죄의 심리적 요인을 분석하여 그것을 개인에게 적용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진실한 단서는 심리적인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처녀작에 이어 제2작 《카나리아살인사건》이 간행되었는데, 여기서도 이 방법을 높이 쳐들며 포커에 의한 범죄 추정을 시도하고 있지만 지은이에 의하여 발견됨직한 형편 좋은 의도적인 구성이니만큼 이 방법으로는 범인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있어도 그 용의자의 급소를 찌르기에 충분할 만큼의 것은 알 수가 없다. 그리하여 제3작 《그린살인사건》 이후 그는 이 방법을 단념해 버리게 되었다.
제3작 《그린살인사건》은 1928년 4월에 간행되어 나오자마자 한 달 만에 온 미국의 최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세 번째 작품에 의한 반년 동안의 수입은 그의 15년 동안에 걸친 문단생활의 총수입보다 훨씬 많았다.
그는 애초에 세 권만 쓰고 그만둘 생각이었으나 <아메리칸>지의 권유를 물리치지 못하여 《비숍살인사건》을 쓰게 되었다.
"이번에는 여섯 권만 완성하고 그 이상은 쓰지 않겠다. 반 다스라는 짝수는 기분 좋은 질서 바른 숫자이다. 한 작가에게 여섯 편 이상의 미스터리소설을 구상할 능력이 과연 있는지 나는 의심스럽다. 내게 수준 이하로 떨어지지 않고 무한하게 미스터리소설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나는 여섯 권으로 끝낼 것이다. 큰 부자가 되는 것을 나는 그다지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은 그 곱절인 열두 편의 미스터리소설을 쓰고, 미국 미스터리소설 사상 획기적인 작가가 되었던 것이다. 그의 작품은 영화로 만들어진 것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