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할 때는 동서 미스터리 북스 47
제프리 허드슨 지음, 홍준희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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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리 허드슨이 누군가 했더니 그 유명한 마이클 크라이튼이다. 마이클 크리이튼이라면 의사 출신 작가로 그의 수많은 작품이 영상화되었으며, 대표적인 작품에는 쥬라기 공원이 있다. 드라마 ER의 각본을 쓰기도 했다고. 그래서인지 이 소설도 결말은 초반부터 대충 예상이 되었지만 그와 상관없이 전개가 그야말로 드라마틱했고, 무엇보다도 등장인물에게 마치 현미경을 갖다 댄 것처럼 촘촘하게 묘사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익숙한데도 재미있는, 아니 익숙해서 재미있는 그런 책.

 

210p

난 가끔 생각해요하고 그녀가 말했다. “저 사람들이 정치이야기 같은 건 하지 않을까 하고요. 의학 이야기뿐이거든요.”

나는 의사는 무정치적이라고 하던 아더의 말이 생각나서 빙긋 웃었다. 아더는 언제나 의사는 진정한 정치적 시야를 갖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치를 생각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군대와 같은 거지.” 그는 언젠가 말했다. “정치적인 사고방식은 직업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거야.”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좀 과장해서 말한 것이지만, 아더의 말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더는 사람들에게 쇼크를 주고 초조하게 만들고 부추기기 위해 무슨 일이든 허풍스럽게 과장해서 말한다. 참으로 그다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한편 그가 진실과 허위, 진실과 과장을 구별짓는 가느다란 선에 매력을 느끼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의견을 던져 누군가 그것을 집어든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살피려는 것이다. 취해 있을 때면 특히 더 그렇다.

내가 아는 의사 가운데 술에 곤드레가 되는 것은 아더뿐이다. 다른 의사들은 상당한 양의 알코올을 마셔도 거의 취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한동안 말이 많아지고 떠들썩하다가는 곧 존다. 아더는 몹시 취했을 때면 특히 화를 잘 내며, 아무도 보이지 않는 듯 거침없이 행동한다.

나는 그의 이런 버릇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리하여 얼마 동안 그것을 병리적 명정(酩酊)의 한 종류이리라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다른 사람이 자제하려고 애쓸 때 마음껏 행동하고 싶어지는 자기탐닉의 한 종류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에게는 이 탐닉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어쩔 수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마음대로 행동할 구실로서 스스로 탐닉을 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확실히 그는 자신의 직업을 좋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좋지 않게 생각하는 의사는 많다. 존즈는 연구에 붙잡혀 마음대로 돈을 벌 수가 없다고 싫어했고, 앤드류스는 비뇨기과가 그에게서 아내와 행복한 가정생활을 빼앗아갔다고 싫어했으며, 피부과의인 텔서는 환자가아니라 정신병자로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고 싫어했다. 이러한 의사들 가운데 누군가와 이야기해 보면 반드시 불만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들은 아더와는 다르다. 아더는 의사라는 직업 그 자체에 분노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어떤 직업에나 그 자신과 동료를 경멸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아더는 극단적이었다. 그는 마치 자신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불행에 빠지게 하고, 화를 내고, 슬퍼하기 위해 의사세계에 들어온 것 같았다.

나는 이따금 그가 중절해 주는 것은 동료들이 자신을 싫어하게 만들고 불쾌감을 느끼게 하기 위한 게 아닐까생각할 때가 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좋지 않지만, 그렇지 않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그는 취하지 않았을 때는 임신중절에 대해 지성적인 의견을 조리있게 편다. 그러나 취하면 감정과 태도와 자세와 자기만족을 이야기한다.

아더는 의학에 적의를 느끼고 있어, 취해 있다는 구실로 그 적의를 발산시키기 위해 술을 마시는지도 모른다. 그는 취하면 다른 의사들과 지나치게 심하다고 여길 만큼 크게 말다툼을 한다. 언젠가 그는 저니스 보고 그의 아내에게 중절을 해주었다고 말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저니스는 급소를 찔린 듯한 얼굴을 지었다. 저니스는 가톨릭 신자지만, 그의 아내는 그렇지 않다. 그리하여 아더는 화기애애했던 디너파티를 엉망으로 만들고 말았다.

나도 그 파티에 있었기 때문에 그 다음 일이 걱정되었다. 며칠 뒤 아더는 나에게 사과했다. 내가 곧 저니스에게 사과하라고 말하자 그는 사과했다. 이상하게도 저니스와 아더는 그로부터 아주 친한 친구가 되었으며, 저니스는 중절에 찬성하게 되었다. 아더가 그에게 뭐라고 말했는지, 어떤 식으로 설득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설득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누구보다도 아더를 잘 알고 있으므로 그가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중대하게 생각한다. 그의 출생과 육체적 특징이 그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의사 중에는 중국인과 일본인이 많아 그들에 대한 우스갯소리도 많다. 그들의 에너지, 영리한 두뇌, 성공을 쫓는 열의에 대한 경계심이 담긴 농담이다. 유대인들이 듣고 있는 그런 종류의 우스갯소리이다. 아더는 중국계 미국인으로서 이 전통과 싸웠고, 또 보수적인 그의 가정과 싸웠다.

그는 반대방향으로 치달려 과격해져서 좌익에 가담했다. 그가 온갖 새로운 것을 자진해서 받아들이는 게 그 좋은 증거이다. 그는 보스턴의 산부인과의들 가운데 가장 근대적인 의료시설을 갖추고 있다. 새로운 제품이 나올 때마다 곧 그것을 산다. 이 일에 대해서도 우스갯소리가 오갔다. ‘새로운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동양인이라고. 그러나 아더에게 있어서는 동기가 다르다. 아더는 전통과 습관과 인정받고 있는 방식과 맞서싸우는 것이다.

아더와 이야기하노라면 언제나 새로운 생각에 가득차 있는 듯이 여겨진다. 그는 파파니코로 염색의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 냈다. 지금까지 해온 내진은 시간낭비이므로 그만두자는 것이다. 그는 배란을 나타내는 기초체온은 지금까지 발표된 것 이상으로 효과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아무리 난산이라 하더라도 분만 때 겸자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분만할 때 전신마취법을 그만두고 많은 양의 트랑키라이저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생각과 학설을 들으면 처음에는 감명을 받는다. 그러나 곧 그는 모든 기회에서 결점을 찾아내어 전통을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가 임신중절을 시작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에게 동기를 따져물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경우 언제나 잠자코 있다. 동기는 그 일의 궁극적인 결과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올바른 동기를 가지고도 잘못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역사가 가르쳐주고 있다. 그런 경우 그는 패배한다. 그러나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올바른 일을 할 수도 있다. 이 경우 그는 영웅이 된다.

 

226p

어찌된 까닭인지 아는 학생시절과 퍼플 넬이 생각났다. 퍼플 넬은 78살 된 알콜 중독 환자였는데, 그녀가 우리의 해부용 시체가 된 것은 죽고 나서 1년이 지난 뒤였다. 우리는 그녀를 이라고 불렀다. 해부하기 쉽도록 우리는 여러 가지 취미가 좋지 않은 우스갯소리를 주고받았다. 나는 차갑고 축축하게 젖은 고약한 냄새가 풍기는 살을 베다가 그리고 피부를 걷어올리다가 그대로 도망쳐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일이 기억난다. 넬과 관련된 일을 얼른 끝내고, 그녀를 잊고, 그녀의 냄새를 잊고, 죽은 뒤 오랜 시간이 지난 살의 촉감을 잊을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바랬다. 사람들은 차츰 아무렇지도 않게 된다고 말했다. 나는 한시라도 빨리 끝내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해부를 끝내고 모든 신경과 혈관을 하나하나 가르쳐줄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맨 처음 해부용 시체와의 쓰디쓴 경험을 맛본 뒤 나는 병리에 흥미를 품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나는 해부를 좋아하게 되었고, 새로운 검시해부를 할 때마다 시체의 냄새와 모습을 마음에서 쫓아버리는 데 익숙해졌다. 그러나 검시해부는 다른 점이 있어 이상한 매력이 느껴진다. 검시해부에서는 막 죽어 병력(病歷)을 알 수 있는 사람을 다룬다. 인격이 없는 해부용 시체가 아니라 인생의 싸움을 겨루다 막 패한 사람을 다루는 것이다. 우리의 임무는 그가 왜 어떻게 패했는가를 찾아내어 같은 싸움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돕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부만을 목적으로 하여 방부제를 써서 죽은 뒤 오래도록 보관해 둔 해부용 시체와는 크게 차이가 있다.- 이 단락은 220p에서 221p에 걸쳐 똑같이 등장하는데 아마 편집의 실수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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