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살인 동서 미스터리 북스 30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박용숙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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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크리스티가 스스로 꼽은 베스트 10에 들어가는 소설이다. 독자 입장에서 봐도 훌륭하다.

사실 크리스티는 이미 몇 년 전 황금가지 전집으로 다 읽었다. 당연히 이 소설도 그 전집에 들어 있다. 그때도 감탄하면서 읽었는데 몇 년이 흐른 지금도 그렇다. 역시는 역시다.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이 1920년에 발간되었고, 잠자는 살인이 1976년 발간되었다. 이 소설은 1950년 발간되었다.

작가의 커리어를 통틀어서 대략 중간쯤 되는 시기이고, 작품 외적으로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얼마 안 된 때이다.

 

작품 외적이라는 표현은 맞지 않을 수도 있다. 크리스티의 작품은 사실 전쟁과 빼놓을 수는 없다. 크리스티의 수많은 작품에는 직간접적으로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1890년에 태어나 1976년에 사망한 작가이다. 1차 세계 대전은 1914년부터 1918, 2차 세계 대전은 1939년부터 1945년이니 작가가 24살부터 28살때 1차 세계 대전을, 49살부터 55살까지 2차 세계 대전을 겪은 것이다.

청년기와 장년기, 꼭 크리스티가 아니라 누구에게든 인생의 큰 변곡점이 되는 시기에 유럽인으로서 이런 전쟁을 몸으로 겪어냈다는 것은, 그 중에서도 영국인으로서 살아냈다는 것은 다른 시기에 다른 지역에서 살았던 작가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작품을 탄생하게 했을 것이다.

 

같은 영국인이더라도 1859년에 태어나 1930년에 사망한 아서 코난 도일은 제 2차 대전이 또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났을 때 이미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1888년에 태어난 레이먼드 챈들러와 1894년에 태어난 대실 해밋은 크리스티와 비슷한 연배지만 미국인이다. 미국은 세계 대전에 참전은 하였으나 진주만을 제외하면 본토가 받은 피해는 미미한 수준이다. 수도가 공습당했던 나라의 국민과는 같을 수가 없다.

 

2년 넘게 지속되는 코로나 판데믹 상황이 전세계에 얼마나 큰 영향을 줬는지를 생각해 보면 합쳐셔 10,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등 수많은 분야를 얼마나 뒤흔들어 놓았을 지는 상상이 어려울 정도이다.

크리스티는 장수하기도 했고, 젊을 때부터 수 십년 동안 집필 활동을 하며 (아마도 세 자리 수는 무조건 넘길 정도로) 수 많은 작품을 쓰며 죽기 전까지 현업 작가로 살았다.

그 누구보다 예민하게 시대의 변화를 절감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야말로 천지개벽을 온 몸으로 느끼며 살지 않았을까.

 

이 책에도 세상이 이렇게 변했다며 아쉬워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독자 입장에서는 아, 이 시기에 이런 변화가 있었구나 하면서 또 다른 재미로 느껴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현재의 코로나 판데믹 상황이 오늘날 문학에 얼마나 녹아 있는지, 내가 모르는 다른 작품들이 얼마나 나오고 있는지, 시간이 지나면 이 시기를 어떻게 기억하게 될 지 궁금하기도 하고.

 

참고로 이 책의 말미에 나오는 코끼리는 잊는다, 라는 에드먼드의 연극의 제목은 푸아로가 등장하는 코끼리는 기억한다를 떠올리게 했다. 어느 쪽을 먼저 구상했든 작가의 센스였던 것은 분명할 것이다.

 

크리스티의 책을 읽다 보면 이 방대한 세계에서 다소 허우적거리는 느낌이 든다. 처음 전집을 읽을 때는 잘 헤엄쳐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서 다시 읽을 때에는 분명히 익숙한 곳인데도 낯설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처음보다는 그래도 여러 번 읽으면서 덜 헤매게 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 헤메는 느낌도 솔직히 나쁘지 않고.

 

황금가지 전집으로 크리스티의 이 작품을 읽었을 때에도 인상 깊은 구절을 따로 표시했었는데, 이번과 비교해보는 재미도 있었다.

 

37

"예전에는 집집마다 석탄이나 코크스가 수북수북 쌓여 있었지요?" 줄리아가 낯선 나라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호기심을 얼굴에 나타내며 물었다.

"그렇단다. 그리고 무척 싼 값이었지."

"그 시절엔 얼마든지 필요한 만큼 살 수 있었겠네요. 연료 부족 같은 건 없었을 테니까 찔금찔금 보충하지 않아도 상점에만 가면 언제든지 살 수 있었겠군요?"

"어떤 종류의 어떤 연료든 있었지. 요즘같이 돌이나 슬레이트가 섞인 건 찾아보려해도 없었단다."

"세월이 참 좋았군요."

줄리아가 아주 부러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스 블랙록은 미소지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확실히 좋은 세월이었지. 하지만 난 나이를 먹었어. 사람이란 누구나 자기의 옛 시절을 좋아하기 마련이거든. 그러니까 너희들 젊은 사람들은 옛날 일 같은 건 그렇게 생각지 않아도 돼."

 

150~153

"게다가 전쟁이 일어난 뒤로는 세상이 몹시 변했으니까요. 이를테면 이 치핑 클레그혼을 예로 들어볼까요? 여기는 내가 살고 있는 세인트 메리 미드와 닮은 데가 많은데, 15년 전만 해도 우리 마을 주민들은 모두들 훤히 알고 있었지요. 큰 저택에서 살고 있던 벤트리 집안, 그리고 해트넬 집안, 플래이스 리드레이 집안, 웨저비 집안-이 집안 사람들의 부모 조부모, 혹은 백부 백모는 이들보다 오래 전부터 여기서 살고 있는 거예요. 가령 누군가가 이곳에서 살기 위해 새로 옮겨올 때는 소개장을 가져오든가, 이 고장 사람과 같은 연대나 배에 있던 사람들뿐이었지요. 마일 누군가가 새로이-정말 생면부지의 사람이 아무런 연줄도 없이 옮겨 왔다간 그대로 쫓겨나고 말았어요. 마을 사람들이 못마땅하게 여겼을 뿐더러 한결같이 사귀려 들지 않기 때문에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될 때까지 견뎌 내지를 못했던 거지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마을마다 도시마다 갓 옮겨온 사람, 아무 연고도 없이 이사와 사는 주민들로 가득차 있으니까요.

큰 저택은 팔리고 시골집은 개조되어 모습이 바뀌어 버렸어요. 살고 있는 주민들이란 모두 새로 옮겨온 사람들뿐이고요. 그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일이라야 전부 그 사람들 자신이 말하고 있는 사실뿐이지요. 그 사람들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옮겨왔어요. 인도, 홍콩, 그리고 중국에서 건너온 사람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이나 기묘한 섬에서 살던 사람들, 웬만큼 돈을 모아서 은거할 만한 여유를 가진 사람들. 그러기 때문에 이젠 누가 누군지 도무지 모르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경감님? 이젠 경감님 댁에서도 비날리즈의 놋그릇을 가질 수 있는 세상이 되었어요. 그리고 인도 요리에 대한 이야기도 할 수가 있고요. 타올미나의 그림을 가지거나 영국의 사원이나 도서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는 거예요. 꼭 저 미스 힌치리피나 미스 마거트로이드처럼 말이에요. 당신은 남프랑스에서도 옮겨올 수가 있고, 동양에서 평생을 지낼 수도 있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은 모두 장신의 자기 평가를 그냥 그대로 건성으로 들어넘기는 거예요."

확실히 이 사실은 클래독을 답답하게 눌러왔다. 정말로 꺠닫지 못했던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확실히 겉보기와 소문과 이주증명서와 그리고 사진도 지문도 찍혀 있지 않은, 다만 번호만 붙어 있는 요령있게 기입된 신분증명서로서 몸을 치장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만 힘을 쓰면 누구나 적당히 신분증명서쯤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까닭으로 말미암아 이제까지 영국의 전원 생활을 연결하고 있던 미묘한 끈이 산산이 흩어져 버린 것이다. 이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이웃 사람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시골에서조차 이웃 사람을 알려고 하지 않게 되어 있는 것이다.

 

아무튼 인도, 중국, 홍콩, 남프랑스-비록 이것이 15년 전이었다 해도 어려운 일임에는 변함이 없다. 경감도 잘 알고 있듯이 도회지에서 갑자기 사고나 병으로 죽은 이에게서 훔쳐낸 가짜 신분증명서를 사 모으거나 식량 카드를 위조하는 무리들인 것이다. 아무튼 소소한 악당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렇다. 신원 조회를 못할 것도 없지만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다.

 

315

"그때 말한 간호사 엘러튼처럼-죽이는 것은 친절심에서라고 자기 변명을 했을 거야. 우스운 이야기지만 배너의 마지막 날을 행복한 하루로 하기 위해 그녀는 온 힘을 다했습니다. 생일 파티, 그리고 특제 케이크......"

 

"이렇게 되어 배너는 잠든 것처럼 행복하게 죽었습니다. 샬롯은 안도의 숨을 쉬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돌라를-돌라의 애정과 충실함이 사라진 것을 쓸쓸하게 생각했어요. 이제 옛일을 이야기할 수도 없게 된 셈이지요....... 내가 줄리앙이 맡긴 편지를 전하러 갔던 날, 샬롯은 몹시 울고 있었어요. 그녀는 진심으로 슬퍼했던 거예요. 자기 친구를 죽여 버렸으니까요......."

"무서운 이야기로군요" 하고 번치가 말했다. "무서워요."

"하지만 아주 인간적이 아닙니까?" 하고 줄리앙 하몬이 말했다.

"인간은 살인을 해도 그런 법이오."

"그래요" 미스 마플이 말했다. "인간적이에요. 살인법이라도 상당히 동정할 만한 경우가 있어요. 그러나 역시 아주 위험한 일이에요. 특히 샬롯 블랙록처럼 마음이 약하고 친절한 살인자는, 즉 약한 인간이란 정말로 자기의 안전이 위협을 받으면 너무 무서운 나머지 광포해져서 자신을 억제할 수 없게 되기 마련이지요."

 

318~319

"알았어요. 그리고 감미로운 죽음이라는 거겠지요. 과자-그러나 과자만이 아니었어요. 파티 전체가 준비물이었었군요. 죽기 전의 행복한 하루, 죽이려는 개를 귀여워해 주는 것 같은 거지요. 이런...... 뭐랄까 '표면'만의 친절은 정말 무섭군요."

"그러나 샬롯은 정말 친절한 여자였어요. 마지막으로 부엌에서 한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도 죽이고 싶지는 않았어'라고 말했잖아요. 그 사람이 원했던 것은 자기 것이 아닌 막대한 유산이었던 거예요! 그리고 그 욕망 앞에서-그것은 일종의 부수물 같았어요. 그 돈은 그녀의 과거의 괴로운 생활을 보상하는 것이었지요. 모든 것이 길을 양보한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악의와 원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항상 위험합니다. 그 사람들은 세상은 으레껏 자기들에게 보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나는 샬롯 블랙록보다도 훨씬 더 괴로워하고 보다 더 인생에서 동떨어진 환자를 많이 알고 있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행복하고 만족한 생활을 보내려 하고 있어요.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나 불행하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정신 나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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