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은 흐른다
이미륵 지음, 전혜린 옮김 / 종합출판범우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학교의 모든 게 아주 낯선 것뿐이었어요. 오랫동안 저는 숱한 근심을 했거든요. 거기는 이제껏 제가 익숙해 있던 것과는 너무나 다르기 떄문에 마음에 안 들 것 같아요."

아버지는 오랫 동안 잠자코 있었다.

"섭섭했니?"

아버지는 나중에야 이렇게 물었다.

"그와 비슷한 생각이었어요. 전 언제나 서당을 우리 집으로 생각해야만 했어요."

"내 곁으로 들어오너라."

아버지는 손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너는 아직 소동파의 시를 잘 알고 있을 테지?"

나는 다시 생각해 보고는 그렇다고 했다. 항행하는 시인의 노래를 작년에 배웠다.

"그것을 읊어봐라."

나는 막히지 않고 읊었다.

"너는 저 <영탄가>를 읊을 수 있니?"

나는 그것도 읊었다. 50절이 끝나기까지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젠 네 마음이 좀 진정되었니?"

아버지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다시 내 이부자리로 들어갔다.

"내일 또 학교에 가겠느나?"

", 아버지가 원하신다면......."

 

"많은 사람들은 이제 나쁜 시대가 왔다고들 말한다. 그러면 너는 분명히 말해 줘라. 그건 조금도 나쁜 시대가 아니고 새로운 시대이고, 그것은 갓 시작된 것이라고. 예를 들자면, 눈이 많은 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듯이, 진달래가 피고 뻐꾸기가 우는 것과 같이 온다고 말이야. 나는 '현대'를 그렇게 생각한다."

 

"네가 이 학교에서 충분히 재주가 없더라도 괜찮아! 우리들에게 그렇게까지 서투른 문화는 맞지 않는거다. 지난 일을 생각해보아라. 너는 얼마나 쉽게 고전이며 시를 배웠었니! 넌 총명했단다. 너를 괴롭히는 새 학교에서 나오너라. 그리고 올 가을에는 송림촌으로 가거라. 휴양하러 말이다. 그곳은 제일 작은 땅이지만 우리에게는 가장 좋은 농토다. 밤이며 감이며 많이 있다. 거기 가서 푹 쉬어라. 우리 일꾼들과 그들의 일을 익혀라. 한적한 마을에서는 네가 이 불안스런 읍에서보다 훨씬 더 잘 자랄 거야. 너는 옛 시대의 아이다."

그건 나를 슬프게 했다. 나는 언제나 새 학문에 대한 재능이 없을까 두려워했었다. 아버지가 이끌어준 이것만이 우리에게 더 높은 문화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제 내가 4년간 열중했던 공부를 재능이 없다고 해서 집어치우고 퇴학을 해야 하는 것은 나를 아주 슬프게 만들었다.

'"너는 그렇게 할 테냐?"

내가 잠자코 있는 동안 어머니가 물었다.

"물론 어머니가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어요."

나는 맥빠진 대답을 하였다.

"아이구, 기특한 내 자식아."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고는 방문을 나섰다.

 

"너는 지금까지 도회지에서 살았기 때문에 불편하겠지만, 그래도 생각해 봐라, 세상이 어지러울 때 은퇴하여 시골에 온 많은 선비들도 있지 않았느냐? 그들은 밤에 붓을 들기 위해서 낮에는 호미를 쥐었다. 그들처럼 너도 몹쓸 세상이 좋아질 때까지 이 고요한 속에서 지내라."

새 왕조가 이룩되기만 하면 다시 좋은 세상이 돌아올 것이라고 모든 농군들은 믿고 있었으나 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나는 우리 민족의 보다 더 화려한 앞날을 상상할 수가 없었지만 굳이 반대는 안 했다. 더욱이 내가 '아저씨', '아주머니'라고 부르는 그분들에게 반대한다는 것은 불손하게 여겨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지주의 가정과 소작인의 가정을 한집안으로 삼고 그렇게 부르는 것은 옛부터 내려오는 좋은 풍습이었다. 나는 즐겨 그렇게 불렀고, 수많은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을 구별하기 위하여 소위 택호를 붙였다. 그래서 한 사람은 '윗골 아저씨', 그 부인은 '윗골 아주머니', '뒷섬 아저씨', '뒷섬 아주머니'라는 식으로 불렀다. 소작인 농군들은 으레 나를 '도회지에서 온 조카'라고 했고 진짜 조카처럼 친절히 대접해 주었다.

 

"과거를 너무 생각지 마라."

끝으로 어머니는 말하였다.

''네가 자주 말한 것처럼 시대가 변하였다. 과거는 새 문화에 앞서 갔다. 새 문화는 자주 분수를 모른다. 그러나 네가 그것에서 무엇을 배우려고 하든지 그것이 생소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아야 하며, 또 언제나 온화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궁궐의 이끼 낀 긴 담장을 따라서 오래되고 조용한 길을 걸었다. 이 궁궐의 담장 안에는 전 왕실의 후예가 수백 명의 시종과 시녀를 데리고 살고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길은 언제나 조용하고 고요했다. 나는 이 길을 걸을 때마다 항시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고 말이 없어졌다. 나는 그들 왕족의 인기척이나마 듣고 싶었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아무런 소리도 아무런 말도 아무런 발짝 소리도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 자랑스러운 5백 년 왕조의 저 후손들은 지극히 조용해졌다.

 

우리 주변의 모든 것-학문, 철학, 자연, 인간의 생활-이 우리에겐 무의미하게 보였다. 아니 더럽게 보였다. 우리가 시체 해부를 마치고 학교에서 나올 때, 우리는 더운물로 깨끗이 목욕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나 자신의 신체를 보아야 하며 피부를 손으로 만지는 게 겁이 났다.

 

"너는 겁쟁이가 아니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잠자코 걷다가 말하였다.

"너는 자주 낙심하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충실히 너의 길을 걸어갔다. 나는 너를 무척 믿고 있단다. 용기를 내라! 너는 쉽사리 국경을 넘을 것이고, 또 결국에는 유럽에 갈 것이다. 이 에미 걱정은 말아라. 나는 네가 돌아오기를 조용히 기다리겠다. 세월은 그처럼 빨리 가니, 비록 우리가 다시 못 만나는 한이 있더라도 슬퍼 마라. 너는 나의 생활에 많고도 많은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 내 아들아, 이젠 너 혼자 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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