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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타의 매 ㅣ 동서 미스터리 북스 11
대쉴 해미트 지음, 양병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평점 :
일단 이 소설의 저자부터 알아보자.
저자는 대실 해밋. 하드보일드 장르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사람이며 그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이 '말타의 매'이다.
하드보일드hard-boiled는 원래 계란이 완숙된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이지만 예술 장르에서는 비정, 냉혹, 누와르와 유사하다. 그러니까 주인공 탐정이 인간미라고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고 그저 사건을 해결하고 돈을 받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는데, 1차세계대전과 대공황의 시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회가 탄생시키고 즐긴 문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정확하게 겹치지는 않지만 빅토리아 시대의 홈즈나 벨 에포크 시대의 루팡과는 다를 수 밖에 없다. 하드보일드가 태동했던 시대의 사람들에게 홈즈나 루팡은 어떤 면에서는 신선놀음으로 보여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영화로도 유명하다던데 선입견을 갖지 않기 위해 일부러 찾아보지 않았다. 책을 읽는 내내 주인공으로는 카사블랑카의 험프리 보가트가 연상되었는데 다 읽고 나서 찾아보니 진짜 험프리 보가트가 주연이었다! 영화는 100 대 영화로도 선정되었으며 이미 이전에 2번 영화화가 된 적이 있지만 험프리 보가트 주연의 세번째 영화가 워낙 높게 평가받아 앞의 두 영화는 묻힌 것 같다. 책 자체의 리뷰를 보면... 아마도 이 작품은 원작 소설과 영화의 위상이 비교도 되지 않는 것 같다. 물론 책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는 상당한 화제작이었겠지만(그러니까 영화화도 되었겠지) 현대에 와서는 미스터리 문학의 애독자가 아니라면 그 유명한 영화의 원작 소설 정도의 위치가 대체적인 평인 듯하다.
영화로 만들기 편한 소설이겠다는 생각도 든다. 인물에 대한 복잡한 심리묘사는 없는데, 옷차림이나 행동에 대한 묘사는 읽으면서 동시에 눈앞에 그려질 정도다. 장황하지 않고 깔끔하며 힘이 있다. 그래서 오히려 이런 부분을 곱씹어 읽게 된다. 예를 들면...
스페이드의 굵은 손가락이 정성껏 담배를 말기 시작했다.
우선 둥글게 만 종이 안쪽에 황갈색의 썬 잎담배를 알맞게 덜어놓는다. 그리고 가운데를 가볍게 누르며 양쪽 끝에도 담배가 고루 가도록 편 다음 양쪽 엄지손가락으로 종이 안쪽 끝을 우겨넣고 둘째 손가락으로 종이 바깥쪽을 누르면서 말아간다. 그리고 엄지손가락과 둘째 손가락ㅇ로 만 담배 양쪽 끝을 고르게 매만지며 이음매를 혀로 핥는다. 그리고 왼쪽 둘째 손가락으로 담배 한쪽 끝을 잡고 오른쪽 둘째손가락과 엄지손가락으로 축축한 이음매를 꼭꼭 누른다. 그런 다음 한쪽 끝을 살짝 비튼 뒤 다른 한쪽 끝을 입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이런 부분도 있다.
그는 목덜미를 긁고 나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얇은 흰 바탕의 유니언슈트(셔츠와 바지가 하나로 된 콤비네이션)에 회색 양말, 검은 양말대님, 그리고 짙은 갈색 단화를 신었다. 구두끈을 매고 나자 수화기를 들고 그레이스턴 4500번을 돌려 택시를 불렀다. 녹색 줄무늬가 든 흰 와이셔츠에 흰 소프트 칼라, 녹색 넥타이, 낮에 입었던 회색 양복에 풍신한 트위드코트, 그리고 검은 회색 모자, 이리하여 몸치장이 끝났다. 담배와 열쇠와 돈을 주머니에 넣었을 때 현관 벨 소리가 났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머리에 그려지면서, 이 인물이 어떤 성격일지 짐작이 간다. 유니언슈트를 입고 낮에 입었던 양복을 입고 풍신한 코트를 입는 사람. 흰색 녹색 회색 갈색 검정색 만으로 몸치장이 끝나는 사람. 열쇠와 돈보다도 담배를 먼저 챙기는 사람. 이런 사람이 몸치장을 끝나고 나가려고 하는 순간에 울리는 벨 소리. 정말 영화의 한 장면이다.
촘촘한 소설은 아니다. 주인공인 탐정부터 꼼꼼하고 치밀한 면도 있지만 그 못지 않게 허술한 부분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저런 기법이니 트릭이니 다 떠나서 읽는 내내 정말 흥미진진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장르든 교훈이든 실험적이든 뭐든지 간에 소설은 무조건 재미 아닌가. 재미있다. 정말 충분히 재미있다.
아, 그리고 작가는 실제로 핑커톤 탐정 사무실에서 일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 핑커톤 사는 현재까지 존재하는 미국은 물론 전세계 여러 나라에 사무실을 둔 기업이라고 한다. 전직 탐정이 쓴 탐정 소설이다. 이래저래 매력적이다.
가장 인상깊은 구절 중 하나. 소설 전체와는 큰 상관은 없는 이야기지만.
"프리트클래프트는 선량한 시민이자 선량한 남편이며 아버지였소. 그것은 누구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었지요. 다만 본디부터 주위와 잘 어울리는 것을 무엇보다도 기분 좋게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오. 그는 그렇게 자라온 거요. 그가 아는 사람들도 모두 그런 사람뿐이었소. 그가 알고 있는 인생은 질서 있고 깨끗하며 건전하고 책임감 있는 것이었소. 그런데 그때 떨어져 내린 쇠들보가 인생이란 결코 근본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그에게 일깨워 준 거요. 선량한 시민이며 남편이며 아버지인 자기도 이처럼 사무실에서 레스토랑으로 가는 잠깐 동안에 떨어지는 쇠들보에 맞는 우발적 사고로 간단히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것-인간은 그런 식으로 우연히 죽어버리는 존재로서, 맹몽적인 운명이 눈감아주는 동안만 살아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때 비로소 깨달았던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