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동안 (28 Days)
소니픽쳐스 / 2000년 7월
평점 :
품절


한 때 산드라블록에 빠졌던 적이 있었다.
영화 스피드에서 키아누리브스와 함께 나왔던 산드라블록은 얼마나 마음을 두근거리게 했는지.
이 영화의 개봉 소식도 알았고 활짝 웃는 산드라블록의 포스터를 보면서 설렜지만 보러 가지는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의 나는 굉장히 얌전했던 것 같다.

발랄하고 명랑했던 산드라블록은 이제 아카데미에서 수상하고 그래비티를 통해 현재까지 깨지지 않은 여배우 최고 출연료를 기록했으며 연기 뿐 아니라 제작도 하고 있다. 그야말로 거물이 되었다.

사랑스럽고 친근한 매력의 여배우가 자신의 커리어를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작품 선택을 하게 되는 시작점이 바로 이 영화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조심스레 하게 된다. 산드라블록 이후의 앤 해서웨이도 엠마 스톤도 비슷한 경로를 가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 영화에서는 여전히 생기발랄한 산드라블록을 발견할 수 있으면서도, 중독이라는 소재에 경박하거나 신파스럽게 접근하지 않는다. 중독은 누군가에게는 경력의 단절을, 누군가에게는 가족과의 불화를, 누군가에게는 죽음을 가져온다. 그러나 또 누군가에게는 노력하면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극복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지루함, 중독, 지긋지긋함의 고리가 계속 이어지는 삶에서 누군가는 잠시 왔다가 가고 누군가는 오래 머물다 간다. 잠시 내 인생에 왔다 가는 사람이 내 인생에 큰 변화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진중하고 무게 있는 지금의 산드라블록의 모습도 멋있지만, 예전의 발랄했던 산드라블록을 보지 못 해 아쉬웠던 사람이라면 이 영화가 반가울 것이다. 중독에 대해, 인생에 대해 내내 냉정하게 느껴질만큼 관조적이던 영화가 점점 마지막으로 흐르면서 응원해주고 토닥여주는 것 같은 이 영화의 흐름도 좋았다. 여주인공의 극적인 변화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지만 산드라블록의 연기는 말할 것도 없고 잠깐 등장하는 비고 모텐슨이나 스티브 부세미의 연기가 좋아 설득당하고 싶어진다.
너가 했지만 그것은 너의 전부가 아니라고 누구나 실수를 한다고 말하는 비고 모텐슨의 극중 대사는 처음 볼 때는 평범하게 느껴졌지만 산드라블록이 남친과 헤어지며 키스하는 부분과 연결되자 명장면이 되었다. 나의 전부는 분명히 아니지만 어쨌든 지긋지긋하더라도 그 또한 내가 했던 나의 과거의 한부분이라는 것을 누구의 탓도 하지 않고 인정하면서 과거에 대한 안녕을 하는 성숙함은 사실 어렵다.
더는 볼 수 없는 쌍둥이빌딩의 모습이영화에서 나오는 장면을 보노라면 최근 그린북에서의 비고 모텐슨과 이 영화에서의 모습이 겹쳐지며 돌이킬 수 없는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며 아련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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