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민의 겨울 토베 얀손 무민 연작소설 5
토베 얀손 지음, 따루 살미넨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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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앞 권인 위험한 여름과 짝을 이루는 것 같은 책이다.

무민의 고향인 핀란드는 북극에 닿아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도 낮이 제일 긴 하지와 밤이 제일 긴 동지가 있어서 하지로 갈수록 날이 길어졌다가 하지를 지나면서 낮이 점점 짧아지다가 동지를 지나면 다시 낮이 길어지기는 하지만, 그 차이는 길어야 3시간 정도일 것이다. 보통 한여름에는 오전 6시 전에 해가 떠서 오후 8시 넘어서 질 때가 있고, 한겨울에는 오전 7시쯤 해가 뜨고 오후 7시에는 해가 지는 때가 있었지만 오전 8시까지 해가 뜨지 않거나 오후 6시에 해가 지는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땅의 3분의 1이 북극권에 해당되는 핀란드는 그 차가 엄청나게 큰데, 북극권은 하지 때 해가 지지 않는 백야, 동지 때는 해가 뜨지 않는 흑야가 되는 곳이라고 한다. 북극권의 유명한 관광지인 로바니에미 근처로 가면 아예 해가 뜨지 않은 채 몇 달씩 지난다고 하며, 중남부지방으로 내려와도 약간 나아질 뿐 크게 달라진게 없을 정도인데, 예를 들어 중남부 지역인 탐페레만 해도 12월엔 해가 10시에 떠서 2시에 진다고 한다. 대신 여름에는 이 로바니에미와 같은 북극권 지역에서 정반대로 몇 달씩 해가 지지 않으며 남부 지역 또한 새벽 2시 반에 떠서 밤 10시가 되어서야 진다고. 몇 년 전 한여름에 핀란드를 짧게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가 밤 10시가 넘었는데도 마치 대낮같아 놀랬던 기억이 난다. 기념하기 위해 사진도 찍었으나 나중에 확인한 사진은... 마치 대낮 10시 경에 찍은 사진 같아 사진만으로 그때의 충격을 전달하기는 어려웠다는 것은 뒤늦게 깨달았고... 보통 아름다운 곳을 여행할 때면 이 계절이 아닌 다른 계절에도 이 지역을 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인데 겨울의 핀란드는 왠지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에 망설이게 된다. 흑야도, 눈이 녹지 않고 계속 잠길 것 처럼 내리는 풍경도, 오로라도, 산타 마을도 전부 궁금하기는 하지만 왠지 겨울의 핀란드는 생존도 쉽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당시 가이드 분으로부터도 북유럽은 겨울에 상품을 운영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부 지역은 정부 차원에서 겨울철에 입장을 하지 못하게 하는 곳도 있을 정도라서 여행 상품 운영이 어렵다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이 책은 겨울잠을 자던 가족 중 유일하게 일찍 깨어버린 무민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는 한겨울의 이야기이다. 솔직히 어릴 때 겨울잠 이야기를 읽었을 때는 어떻게 안 일어나고 계속 자지? 하는 생각이 들고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 책에서 나오는 정도의 추위라면 생존을 위해 생물이 겨울잠을 자도록 진화한 것이 지극히 당연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계속 하게 되었다. 무민이 추위를 극복하는 모습에서는 영화 겨울왕국이 생각나기도 했다. 눈의 나라의 모습을 읽으면서 마치 눈 앞에 생생히 그려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읽고 또 읽었다. 역시 무민은 겨울이로구나, 지금껏 읽은 무민 이야기 중 가장 재미있어하며 읽었다.

 

덜컥 겁이 난 무민은 달빛이 닿지 않는 따뜻한 어둠 속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끔찍하게도 혼자 내팽개쳐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민이 무민마마의 이불을 당기며 소리쳤다.

"엄마! 일어나 보세요! 온 세상이 사라져 버렸어요!"

하지만 무민마마는 일어나지 않았다. 여름 꿈을 꾸던 무민마마는 잠시 불안해졌고 걱정이 밀려왔지만, 일어날 수가 없었다. 무민은 무민마마의 침대 옆에 깔린 카펫에 몸을 웅크렸고, 기나긴 겨울밤은 계속되었다.

 

'자명종을 모조리 맞춰 놓아야지. 그러면 봄이 더 빨리 올지도 몰라. 뭔가 커다란 걸 때려 부수면 무슨 일인가 싶어서 누구 하나 일어나 보지 않으려나.'

하지만 무민은 아무도 일어나지 않을 줄 알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새로운 일이 일어났다. 무민의 발자국을 가로지르며 작은 발자국이 새로 나 있었다. 무민은 우뚝 서서 한동안 그 발자국을 내려다보았다. 고작 30분쯤 전에 살아 있는 누군가가 이 숲을 지나갔다. 멀리 가지는 못했을 터였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골짜기 쪽으로 갔고, 무민보다 몸집이 작아 보였다. 발자국이 눈 속에 거의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민은 꼬리털부터 귀 끝까지 온몸이 후끈해졌다.

"기다려! 떠나 버리지 마!"

이렇게 소리치며 눈 위를 비틀비틀 걸어가던 무민은 갑자기 어둠과 외로움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두려워졌다.

이 두려움은 잠든 집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내내 무민의 마음속 어딘가에 숨어 있었겠지만, 이제껏 맞닥뜨릴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무민은 이제 더는 소리치지 않았는데,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할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무민은 어두워서 거의 보이지도 않는 발자국에서 눈을 뗄 엄두도 내지 못했다. 비슬비슬 걷고 또 걸으며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가기만 했다.

그때 갑자기 밝은 불빛이 보였다.

그저 작은 불빛일 뿐이었지만, 붉은빛이 온 숲을 따스하게 채워 주고 있었다.

그제야 무민은 마음이 놓였다. 발자국은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고 계속 천천히 걸어갔다. 불빛 가까이에 도착해 보니 흔하지흔한 양초가 눈에 꽂혀 있었다. 양초는 동글동글한 눈 뭉치를 쌓아 만든 작고 멋진 집 안에 있었다. 투명하고 조금 불그스름해 보이는 눈 뭉치들이 꼭 집에 있는 침실 등의 전등갓 같았다.

 

밤이 깊어질수록 추위가 심해졌고 달빛은 붉고 푸른 유리창에서 빛났다.

무민이 아빠의 빛바랜 정원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눈 이야기를 들려줘. 눈은 이해가 잘 안 돼."

투티키가 말했다.

"나도 잘은 몰라. 눈은 차디찬데, 눈으로 만든 집 안은 따뜻하지. 하얗지만 불그스름하게 보일 때도 있고, 파랗게 보일 때도 있어. 세상 무엇보다 부드러울 수도 있고, 돌보다 단단할 수도 있어. 뭐라 딱 잘라 설명할 수가 없어."

 

"네 눈썹은 보기 드물게 덥수룩하구나."

그러자 눈썹이 덥수룩한 동물이 대답했다.

"스나다프 우무흐."

무민이 깜짝 놀라 물었다.

"뭐라고?"

작은 동물이 벌컥 화내며 말했다.

"라담사."

투티키가 설명했다.

"녀석한테는 자기만의 언어가 있는데, 네가 무례한 말을 했다고 생각해."

무민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어."

그러더니 사과하듯 덧붙였다.

"라담사, 라담사."

그러자 눈썹이 덥수룩한 동물은 정신이 나간 듯 벌떡 일어나더니 사라져 버렸다.

무민이 말했다.

"이제 어떡하면 좋지? 녀석은 내가 뭔가 다정한 말을 건네려고 했다는 사실도 모르고 일 년 내내 싱크대 밑에 틀어박혀 있을 텐데!"

투티키가 말했다.

"그런 일도 일어나는 법이지."

 

눈이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새해가 된 다음 처음으로 내리는 눈이었고, 난생처음 눈 내리는 모습을 본 무민은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눈송이가 자꾸만 무민의 따뜻한 얼굴에 내려앉았다가 녹아내렸다. 무민은 눈송이를 손바닥으로 받아 잠시 감탄하며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눈송이를 쳐다보았는데, 눈송이는 점점 더 많아졌고 솜털보다도 부드럽고 가벼웠다.

무민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눈이 이렇게 오는구나. 땅에서 자라는 줄 알았는데.'

날이 포근해졌다. 쏟아지는 눈 때문에 주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무민은 여름에 바닷물을 헤치며 걸을 때마다 느꼈던 황홀한 기분이 떠올랐다. 무민은 목욕 가운을 벗어던지고 눈 더미에 풀썩 드러누었다.

무민은 생각했다.

'겨울! 이제 겨울도 좋아!'

 

시간도 온 세상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보고 만질 수 있었던 세상 모든 것이 온데간데없이 날아가 버리고, 축축한 어둠 속에서 춤추는 마법에 걸린 소용돌이밖에 남지 않았다.

상식이 있는 누군가라면 이제 기나긴 봄이 시작된다고 말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하필 그때 바닷가에는 그런 말을 해 줄 만한 이가 없었고, 엉뚱한 쪽으로 가려고 바람에 맞서 기어가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무민 뿐이었다.

무민이 기어가면 갈수록 거센 눈이 무민의 눈을 가리며 얼굴에 쌓여갔다.

무민은 생각했다.

'내가 겨울을 이겨 낼 수 없다는 사실을 똑똑히 보여 주고 무릎 꿇리려고 이런 짓을 하는 게 틀림없어.'

겨울은 먼저 부드럽게 떠다니는 눈송이로 아름다운 커튼을 만들어 무민을 속인 다음, 아름다운 눈송이를 눈보라로 바꾸어 얼굴에 마구 내던진다. 그것도 무민이 막 겨울을 좋아하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에 말이다.

무민은 조금씩 화가 나기 시작했다.

벌떡 일어난 무민은 눈보라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도 무민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발로 눈을 걷어차며 조용히 투덜거리기만 했다.

그러고 나자 무민은 기운이 빠졌다.

무민은 눈보라엣 등을 돌려 싸움을 끝냈다.

바로 그때 따뜻한 바람이 느껴졌다. 바람은 무민을 눈보라 한가운데로 가볍게 이끌고 갔고, 무민은 허공을 나는 듯했다.

무민이 온몸의 힘을 빼고 생각했다.

'나는 공기고, 바람이야. 나는 눈보라와 하나야. 지난여름에도 딱 이런 느낌이었어. 그때도 처음에는 파도에 맞서서 씨름하다가 몸을 돌렸더니 밀려드는 파도에 어우러져서 무지갯빛 물거품 속에서 코르크 마개처럼 둥둥 떠다니다가 조금 겁먹을 때쯤 바닷가 모래바닥에 딱 도착했지.'

무민은 두 팔을 벌리고 날았다.

신이 난 무민이 생각했다.

'어지 한 번 마음껏 겁을 줘 봐. 이제 널 제대로 알게 됐으니까. 어한테 익숙해지기만 하면 돼. 너는 이제 날 못 속여.'

겨울은 무민이 눈 덮인 부잔교에 털썩 고꾸라져 탈의실 창문에 비치는 따뜻한 불빛을 바라보게 될 떄까지 바닷가를 따라 멀리멀리 한참 동안이나 무민과 함께 어우러져 춤추며 나아갔다.

무민이 깜짝 놀라 혼잣말했다.

"어휴, 살았네. 신나는 일은 언제나 두려움이 가시고 재미가 붙을라치면 끝나 버린다니까."

 

무민은 계단 쪽으로 나가 흠뻑 젖은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무민이 혼잣말했다.

"이제 나는 다 가졌어. 한 해를 온전히 가졌다고. 겨울까지 몽땅 다. 나는 한 해를 모두 겪어 낸 첫 번째 무민이야."

 

오후가 되면 남쪽 창문 아래쪽 땅이 따뜻해졌다. 작은 움직임은 흙속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갈라진 갈색 양파에서 가느다란 뿌리가 가닥가닥 뻗어 나와 눈 녹은 물을 열심히 빨아들였다.

어느 바람 부는 날, 어스름이 내리기 바로 전에 바다 쪽에서 거대하고도 웅장한 소리가 들려왔다.

투티키가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말했다.

"자, 이제 봄이 으르렁거리기 시작했어."

빙판이 천천히 들썩거리자 또 다른 으르렁 소리가 바닷가를 덮쳤다.

무민은 따뜻한 봄바람을 맞으며 낯선 소리를 들으려고 탈의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투티키가 무민의 뒤에서 말했다.

"저기 좀 봐. 바다가 다가오고 있어."

먼 바다에서부터 쉬익거리며 가장자리에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며 달려드는 파도들은 허기지고 화가 나서 겨울 얼음을 한 조각씩 베어 물고 있었다.

이제 까맣게 갈라지기 시작한 실금이 빙판을 따라 내달렸고, 이리저리 굽이치며 나아가다 제풀에 지쳐 사라져 버렸다. 바다가 또다시 들썩거렸다. 그러자 실금이 더 늘었다. 심지어 넓게 벌어지기까지 했다.

 

그떄 갑자기 바다가 섬처럼 산산이 부서진 얼음 조각으로 가득 차더니 정신없이 서로 밀치고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둥둥 뜬 얼음 조각 위헤 미이가 서 있었는ㄷ, 물이 점점 더 넓어지는 주위 모습을 바라보며 겁먹지도 않고 가만히 생각했다.

"점점 재미있어지는군."

무민은 미이를 구하러 나섰다. 잠시 지켜보던 투티키는 탈의실로 걸음을 옮겨 화로에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투티키가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뭐, 그렇지. 모험담은 늘 이런 식이지. 구하고 구해지고. 그 뒤에서 영웅들을 따뜻하게 덥혀 주려고 애쓰는 이들 이야기도 누가 한 번쯤 써 주면 좋겠어."

한참 내달리던 무민은 옆에서 빙판을 따라 함께 내달리는 실금을 발견했다. 무민과 똑같은 속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발밑으로 빙판이 너울거리는 느낌이 들더니 조각조각 나서는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미이는 얼음 조각 위에 가만히 서서 풀쩍풀쩍 뛰며 다가오는 무민을 지켜보았다. 무민은 통통 튀는 고무공 같아 보였고, 바짝 긴장해서 용을 쓰느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무민이 미이의 얼음 조각 옆에 도착하자 미이가 팔을 뻗으며 말했다.

 

"엄마도 겨울에 어땠는지 봤어야 했는데! 눈 더미가 온 집을 뒤덮었어요! 머리끝까지 파묻힐 정도였다니까요! 눈 내리는 모습은 꼭 하늘에서 작디작은 별이 쏟아지는 것 같았고, 저 위 어둠 속에 파랗고 푸른 커튼도 매달려서 펄럭거렸어요."

무민마마가 말했다.

"무척 아름다웠겠구나."

 

무민마마는 눈을 조금 집어 눈 뭉치를 만들었다. 그리고 엄마들이 늘 그렇듯 엉성하게 던졌고, 눈 뭉치는 조금 날아가다 툭 떨어져 버렸다.

무민마마가 웃으며 말했다.

"멀리 못 갔네. 수르쿠도 엄마보다는 잘 던졌겠구나."

무민이 말했다.

"엄마, 엄마가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무민과 무민마마는 다리 쪽으로 조금 더 걸어갔지만, 아직 우편물은 하나도 오지 않았다. 저무는 태양이 골짜기를 가로지르며 기나긴 그림자를 드리웠고, 온 세상이 평화롭고 경이로울 만큼 고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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