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츠제럴드 단편선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3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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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아온 바빌론: 아마도 피츠제럴드와 젤더, 딸의 이야기가 녹아 있을 자전적 소설.

겨울 꿈: 한때 나의 여신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영화 건축학개론과 피천득의 수필 인연이 생각나는 소설.

비행기를 갈아타기 전 세 시간: 왠지 예상되는 반전, 도널드라는 이름 때문에 약간 더 기억에 남을 듯.

광란의 일요일: 인생이란 이리도 허무한 것, 예술적 양심을 갖춘 사람이 영화 산업에 휩쓸려 어떤 탄력도 건강한 냉소주의도 피난처도 갖지 못해 신경 쇠약이란 도피처로 도망가 버린 감독.

기나긴 외출: 남편이 곧 돌아온다는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아내. 아니 망상이 아니고 환상이었을까.

컷글라스 그릇: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시대를 지난 컷글라스시대. 딱딱하고 아름답고 속이 텅 비어 있고 쉽게 속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컷글라스 그릇, 차갑고 소름끼치는 비극.

'분별 있는 일': 죽을 위기도 넘겨 성공한 남자가 사랑을 갈구했던 여자의 사랑을 얻는 순간, 예전 자신이 상대에게 품었던 그 마음이 예전 그대로는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부잣집 아이: 당신은 결혼해서 안주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옛 애인에게 듣고 충격 받은 남자.

오월제: 멋쟁이 이디스가 급진적인 오빠 헨리의 신문사를 찾아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갑자기 에드워드 호퍼의 1940년 작품 office at night 이 생각났다. 최근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에 영감을 받은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그 영화에도 이 장면이 나오기는 하지만 이 책의 내용과는 다른 내용으로 진행된다. 다만 영화, 그림, 소설 세 장르에서 느껴지는 정서는 같을 것이다. 피츠제럴드 단편선 1,2 모두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으로 표지가 되어 있다. 호퍼는 피츠제럴드보다 14년 일찍 태어났고 17년 늦게 세상을 떠났는데 산업화와 제1차 세계대전, 경제대공황을 겪은 미국 사회의 소외감이나 고독감을 도시의 일상적인 모습을 그리며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데 그야말로 피츠제럴드의 작품 세계와 일치하지 않는가.

 

특히 이 책은 역자 김욱동 교수의 해설을 계속 곱씹고 싶어진다.

 

18세기 영국 문학의 대부(大父)라고 할 새뮤얼 존슨은 오직 바보만이 돈을 벌지 않기 위하여 글을 쓴다.”하고 말한 적이 있다. 바보가 아닌 피츠제럴드는 돈을 벌 작정으로 단편 소설을 썼던 것이다.

적지 않은 비평가들이나 학자들은 안타깝게도 피츠제럴드가 장편 소설을 창작하는 데 쏟아야 할 창조적 에너지를 저질 단편 소설을 쓰는 데 낭비해 버렸다고 입을 모은다. 물론 그가 좀 더 진지한 작품을 쓰는 데 써야 할 시간과 정열을 대중 잡지 독자를 위한 단편 소설을 쓰는 데 낭비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대중 잡지에 발표한 작품이라고 하여 반드시 질이 떨어지는 작품이라고 보는 것은 좁은 생각이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순수 문학지에 발표하였다고 해도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작품이 얼마든지 있다. 상업적으로 실패한 작가가 훌륭한 작가인 반면,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 작가는 삼류 작가라고 생각하는 것은 흔히 실패한 작가가 위안을 삼는 구실인 경우가 많다. 문제는 상업성을 떠나 작가가 얼마나 예술적인 성실성으로 작품을 집필하였느냐, 즉 삶의 경험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극적으로 형상화하였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피츠제럴드의 이러한 태도는 사망하기 일 년 전 사랑하는 딸 스코티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엿볼 수 있다. “뮤지컬 작가들처럼 글을 썼으면 할 때가 있었지만 그러기에는 나는 실제로는 너무나 도덕가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독자들을 즐겁게 해주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용인할 수 있는 형식으로 그들을 가르치고 싶어 한다.” 하고 밝혔다. 여기에서 찬찬히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어떤 용인할 수 있는 형식이라는 표현이다. 독자들을 가르치되 윤리 교과서나 도덕 교과서와는 다르게 가르친다는 뜻이다. 그에게 어떤 미학적이고 예술적인 형식의 뒷받침을 받지 않는 문학 작품이란 한낱 도덕과 윤리를 전달하는 수신 교과서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새로운 것이 없기는 문학도 마찬가지여서 작가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온 이야기를 새롭게 반복할 뿐이다. 삶의 내용은 크게 달라지지 않고 오직 그 내용을 담는 그릇, 다시 말해서 형식이 달라질 뿐이다......세계 문학사를 들여다보면 똑같은 이야기를 형식만 바꾸어 거듭거듭 되풀이하는 작가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1933년에 발표한 일백 번의 그릇된 출발이라는 단편소설에서 피츠제럴드는 거의 대부분의 작가들이 오직 두세 개의 이야기를 일생 동안 반복하고 있다고 밝힌다. “우리 작가들은 대부분 똑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한다. 우리는 삶에서 감동적인 경험을 두세 가지 겪게 된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작가로서의 기술을 배운다. 우리는 두세 가지 이야기를 아마 열 번, 독자들이 들으려고 하는 한 어쩌면 백 번이라도 되풀이해서 말한다-물론 이야기할 때마다 새롭게 변장하면서 말이다.”

 

피츠제럴드의 단편 소설이 출간된 지는 불과 반세기 조금 넘었지만 그의 작품에는 특정한 시대, 특정한 공간과 관련한 내용이 유난히 많다. 마치 시대 의상처럼 그의 작품은 재즈 시대를 살아간 잃어버린 세대의 삶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 중에서 어떤 것들은 이미 현대 독자의 뇌리에서 멀어져 있거나 아예 사라져버렸다. 이러한 문화에 낯선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지명이나 인명 그 밖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건이나 사항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을 붙였다. 남의 나라 작품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일이란 단순히 언어를 옮기는 것 이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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