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 여성, 아무튼 잘 살고 있습니다 - 같이는 아니지만 가치 있게 사는
권미주 지음 / 이담북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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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에 다양성은 점점 생겨나고 있다는 것을, 나는 결혼하고 알았다. 그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우리 부부 역시도 보편적이라고 불리는 삶의 범주에서 약간 비껴나있는 삶을 살기로 결심했을 때 비로소 눈에 보였다. 보편적인 삶이 아니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비난과 충고와 조언 속에서 나는 화도 났고 경계심도 가졌고 오기도 생겼다. 해명하지 않을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명을 해야 할 것 같았고 내 삶에 대한 변명을 해야 할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 역시도 그랬다. 결혼 전에는 이혼이 한쪽의 일방적인 결격사유로 인해서만 발생하는 것인 줄만 알았고, 결혼을 하지 않으면 저 사람은 왜 결혼을 못 하는 걸까 하고 생각했고, 아이를 가지지 않는 부부들에 대해 자발적이라는 생각도 못 했다. 지금이야 내가 듣는 무례함들에 좀 무뎌진 편이기는 하지만, 열에 한 번 타인의 아무렇지 않은 물음에 여전히 화가 날 때 오래전의 그만큼 세계의 넓이를 가늠하지 못했던 나를 불러오고, 그 사람도 이전의 나처럼 그런 것이겠구나 하고 말아버리려고 ‘노력’해보기도 한다.

 

 

내 주변에도 비혼주의자가 한두 명이 있고, 그들의 삶을 지지하기도 한다. 혼자 살든 둘이 살든 셋이 살든, 자신이 주체가 되어 자신이 행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삶을 꾸려가는 것이 얼마나 멋있는 일인지. 이 책도 그래서 읽어보고 싶었다. 내가 살아보지 않은 삶이고, 그 삶을 꿈꾸게 된 계기가 있는지, 그리고 어떤 가치관을 가졌는지에 대해서 궁금해서.

 

 

 

책에는 정부 정책에는 비혼이 제외라는 것과 청약이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것, 대출도 쉽지 않다는 것, 고독사 등과 같은 비혼의 장점 외에 단점도 함게 쓰여있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곁들여서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새로운 시선을 가질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다. 비혼의 장점으로는 아무래도 자유롭다는 것에 있었는데, 어쩐지 나는 그 부분이 조금 거슬렸지만 왜 그런지 몰랐기 때문에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그걸 짚어주는 문장을 봤다.

162. 멋진 이웃들과 쌓아가는 나의 내적 친밀감이 결혼으로 남편을 두고 있음에도 섹스리스에, 버려진 느낌으로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리는 어떤 이의 삶보다 나을 수 있지 않을까?

아, 글쎄... 그런 부부가 일부에 불과하다고 말할 자신도 없지만 모두가 다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설령 그것이 고민이라고 하더라도 그게 삶의 전부가 아니라고도 말하고 싶었다. 세상에는 모두 장점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단점만 있는 것도 아니듯이 세상에 즐거운 일만 있는 사람도 없고, 슬픈 일만 있는 사람도 없으니까. 본인이 그 삶을 살아보지 않았으니 더더욱.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불쾌감은 첫 번째로 비혼의 삶을 결혼한 삶보다 우위에 두려는 것이 간간이 보였던 까닭이고, 두 번째로 결혼한 삶에는 무조건 아이가 있다는 가정이 들어가 있었던 까닭이다. 다양한 삶 중 어떤 한 형태를 살기로 결심했다면 너무나도 당연하게 다른 삶에 대해서도 인지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 탓이었고,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내가 기혼이기 때문인 걸까.

결혼하는 이유가 각기 다르고, 결혼하지 않으려는 이유가 각기 다르고, 아이를 낳으려는 이유가 각기 다르고,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이유가 각기 다르듯이 자신의 삶에 정말로 확신이라는 게 있다면 비겁한 비교가 아니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서다. 그들은 그들만의 삶이 있음을 인정함을 넘어 존중해야 하고,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이 있음을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내 삶이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고 존중받기를 원한다면 나와 다른 타인의 삶 역시 인정하고 존중해야 마땅하다.

 

 

 

내가 인간으로 살 수 있는 삶이 3개가 존재한다면, 나는 비혼으로도 살아보고 싶고 아이를 낳고 살아보고 싶기도 하고 아이를 낳지 않고 살아보고 싶기도 하다. 물론 내가 인간으로 살 수 있는 삶은 이번 생으로 끝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다른 생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아닐 테니까. (정말 그런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사실 관심이 전혀 없어서 잘 모르겠다.)

나는 결혼 7년 차를 앞두고 있는 지금까지도 내가 미혼도 아니고 기혼도 아닌 중간의 상태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사람을 처음 사귀어야 할 때에 확연하게 더 느껴지는데, 주제가 모호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고 그 안에서 사람을 만난다. 그건 미혼이든 기혼이든 같은 취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니까. 취향에는 나라는 사람 말고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마음의 구석에 불편함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투자를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나 가계부를 쓴다는 것이나 유서를 쓰며 삶을 좀 더 진중하게 바라보는 것이나 비혼주의 공동체를 만들어서 살고 싶다고 하는 것을 보면서 삶에 대한 애착이 느껴져 좋았다. 그냥 흘러가는 인생이 아니고 바라보는 인생도 아니고 내가 꾸려가는 인생. 말이 쉽지, 행동은 어렵다. 무언가 배우거나 하는 것에 있어 시간이 있어서, 여유가 있어서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혼자여도, 둘이어도, 셋이어도, 넷이어도, 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꺾을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인생이란, 삶이란 노력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기혼의 입장에서 비혼을 응원하기도 하지만 언젠가 마음이 바뀌어 기혼이 된다 하더라도 그 역시 응원한다. 자신의 가치와 행복을 신중히 고민한 결과의 삶이야말로 충분히 인정받아야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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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에도 연습이 필요합니다 - 타인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단호하고 건강한 관계의 기술
박상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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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렵게 생각해서 더 어려운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사람과 맺는 관계가 늘 어렵게만 느껴진다. 회사에서 나는 여직원들과 친밀하게 지내본 적이 많지 않은데, 그 이유가 우스울지 몰라도 내가 만난 여직원들은 ‘점심시간은 언제나 같이 보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고, 친하니 말을 놔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대부분의 점심은 같이 먹되 가끔은 나 혼자만의 시간도 알뜰하게 챙겨야 하는 사람이었고, 직장에서의 존칭은 직장 생활을 하며 응당 쓰여야 하는 예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기에 그게 어려웠다. 또 누군가의 험담으로 이루어지는 친분 유지가 많았기 때문에 나는 점심시간 대부분을 누군가를 욕하면서 보내는 것에 대해 에너지 낭비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그렇다 보니, 내가 내 시간을 챙기는 시간들과 꼬박꼬박 존칭을 하는 것들에 대해 그들은, 내가 그들에게 벽을 세워둔 것 같다거나 거리감을 둔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라고 말하기는 좀 애매하지만, 지금은 같은 팀 11명과 사이가 크게 나쁜 사람이 없는 상태로 잘 지내고 있고 성별은 전부 남성이다. 오히려 남성이 대하기 편한 것은 선을 딱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생 때도 이랬었는데, 요즘 드는 느낌은 내가 지금 대학을 간다면 이런 생활을 하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인 거다. 허허.

 

그런데 그런 내 마음에 꼭 맞게 직장동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료는 친구가 될 수 없다는 문장이었는데, 정말 내 말이...(엉엉) 동료가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동료와 깊이 공감하려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업무적인 협력 관계에 중점을 둔 지혜로운 관계 맺기에 주력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렇기에 ‘지혜로운 거리 두기’가 필수이며, 이것에 실패하면 직장 내 인간관계에서 지옥을 경험할 수도 있다. 동료는 친구가 아니라, ‘업무를 위해 협력하는 동반자’ ! 그랬는데 나도 올 초에 나한테 이런저런 지적을 하며, 나와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다는 어이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 더 많이 공감했던 바였다. 친해지는 거랑 사사건건 터치하는 게 도대체 무슨 상관이냐며(...) 책에는 이외에도 자존감이 낮은 후배를 대하는 법, 남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사람 대하는 법과 같은 예시를 들어주며 직장 생활에 필요한 팁들을 공유하고 있어서 쏠쏠하게 읽었다.

 

 

 

최소한의 거리두기

고슴도치는 가까이 있으면 서로의 가시에 찔리기 때문에 자기가 찔리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둔다고 한다. 나는 지금보다 더 어릴 때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사람을 만나면 우선 천천히 그 사람을 살핀다. 내게 그 사람의 첫인상은 대개 행동이나 말투다. 그래서 나와 대화를 하는 게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내가 저 사람과 관계를 맺을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판단을 내린다. 난 낯가림도 심하고 경계도 심해서 사람과 단시간에 친해지는 경우도 드문데, 공통점이 있으면 그게 허물어짐을 느끼기는 한다. 물론 같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도 싫은 사람은 존재하지만 실패할 확률이 좀 더 적다고 해야 할까

 

 

 

20. 나의 자존감을 짓밟고, 수시로 내 감정에 상처를 주는 사람 중에는 직장 동료나 가족이 많습니다. 산불의 확산을 줄이는 데는 3미터 이상의 나무 간격이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가족 간에도 서로에게 기대치를 낮추고 각자의 세계를 존중해 주면서 마음의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57. 가족 간에도 적당한 거리 두기가 필요합니다. 자발적인 희생도 혼자 너무 오래 하면 분노가 됩니다 마음이든 물질이든 내 것을 너무 많이 퍼주고 나면 가족이 미워집니다. 나부터 챙길 줄 알아야 가족을 보살필 힘도 생깁니다. 그건 이기적인 게 아니라 지혜로운 겁니다.

 

나도 이 부분 때문에 힘들었기에, 많이 공감했다. 기대치를 낮추고 각자의 세계를 존중한다는 말이 말처럼 쉽지 않아서 여전히 힘들다.

 

 

 

 

그가 나에게 상처를 줬다.

내가 그 사람에게 상처를 받았다.

나는 어떤 사건이 생기면 전자로 생각해왔었다. 그가 나에게 상처를 주었기에 내가 기분이 불쾌한 것이라고. 상대의 말에 가시가 있다면 전자가 맞겠지만,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내가 그 사람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하게 되면, 좀 다르게 생각하게 될까? 아직까지 큰 차이는 느끼지 못하겠지만, 나중에 한번 그렇게 생각을 해보도록(...)

 

 

 

생각을 말하지 말고 소망을 말하라.

애매하면서도 공감됐던 말이었다.

(대부분 배우자에게 적용한다는 사실을 기반한 가정하에) 나는 당신의 그 말과 행동에 대해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말하며 그 마음을 그가 이해는 못 하겠지만 인정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말하면 결국 배우자는 “그래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라고 묻는다. 그래서 그가 저렇게 물어오면, 어쩐지 또 꿍해지는 거다. 아니! 결론성으로 말하지 말라고!!! 라며(;;)

 

 

 

43. 지나치게 생각을 많이 하면 정신이 상하고,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하면 재앙에 이르게 한다.

44. 만족하는 법을 알아서 평소에 만족하며 살면 평생 모욕당할 일이 없고, 절제하는 법을 알아서 제대로 절제하면 평생 부끄러워할 일이 없다.

143. 괴테 - 사람은 자신이 아는 것만 들을 수 있다.

162. 사람을 만날 때는 말을 10분의 3만 하고,

진짜 속마음을 전부 털어놓아서는 안 된다.

호랑이 세 마리의 입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사람의 두 개의 모습을 가진 마음을 두려워하라.

입은 사람을 상하게 하는 도끼요, 말은 혀를 베는 칼이니

입을 막고 혀를 깊숙이 감추면 몸이 편안해져 가는 곳마다 견고할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명심보감>을 한번 주욱 읽고 싶어졌다. 군자는 역시 군자, 달라도 달라. 라며 어떻게 이런 말들을 했지 싶었다. 나는 그럴 수 있는 깜냥이 되는 인간이 되지는 못하지만, 그런 척해 보고 싶기도 했고, 그 문장들에 가까이 다가가는 인간이고 싶다.

 

 

 

 

이외에도 책에는 여러 팁을 알려주는데, 죄송합니다 대신에 실례합니다 혹은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라는 문장을 구사하라고 한다. 죄송합니다는 상대에게 예의를 차리는 말 같지만 나에게 손해가 큰 말이기 때문에. 나 역시 죄송하지만, 죄송한데,라는 말을 남발하는 사용자로서 자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또 내가 요즘 유독 좀 신경 쓰이는 호칭도 나와서 반가웠는데, 사모님, 어머님, 아버님이라는 호칭이다. 나는 회사에서는 직함이 불분명한 작업자분들께는 사장님이라고 칭하고, 직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타인을 불러야 할 때는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쓴다. 남자라고 해서 아버님, 여자라고 해서 어머님, 사모님이라고 불리는 게 썩 기분이 좋지는 않다. 특히나 결혼이나 가족계획이 이전보다 더 선택이 되어버린 시대에, 그런 호칭은 어울리지 않기도 하고.

 

 

 

 

참 잘 읽은 책이라 이후에도 한 번 더 읽을 기회가 온다면 자연스레 다시 펼치고 싶을 정도로. 관계를 맺는 것은 어렵지만, 유지하는 것도 어렵고, 끊는 것도 어렵다. 어려운 것투성이인데, 이 정도면 나 잘 살고 있다! 하고 셀프 칭찬을 해본다.

 

 

 

 

 

오탈자 P212. 우리 맨날 방법 없을까? 우리 맨날 만날 방법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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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 먼저 건넸을 뿐인데 - 아무도 몰라주던 나를 모두가 알아주기 시작했다
이오타 다쓰나리 저자, 민혜진 역자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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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잡담을 잘 못하는 사람이다. 특히나 친하지 않은 사람과 밀폐되어 있는 공간에 둘만 있다는 것은 상상만도 싫다. 전에 있던 회사에서 부장님과 외근을 나가는데 같은 성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할 말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차 안에서 적막하게 있어야만 했는데, 그것을 깨뜨린 사람은 나였다. 차라리 내가 운전을 했다면 좋으련만, 가만히 앉아있기만 하는 것도 고역이었기 때문에. 나는 친하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이야기를 할 때에는 주로 질문을 하는 편인데, 그때 도대체 무슨 질문을 했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아마 부장님의 아이에 대해 물었겠지. 나는 그 사람이 혼자서 몇 분 정도는 술술 말할 수 있는 질문을 하곤 하니까. 차라리 나는 상대가 혼자서 술술 잘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하고 바라곤 한다.




나는 친구들과의 수다가 아닌 직장동료들과의 잡담을 그다지 즐기는 편은 아닌데, 그조차 업무의 연장선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특히나 공유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라면 더더욱. (하지만 친한 직장동료와 이야기를 하거나 여러 명이 함께 대화를 하는 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나라는 인간은 참...) 하지만 내가 원하는 상황만 있을 수는 없고, 싫은 상황을 피할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며칠에 한 번쯤은 꼭 부딪히는 게 잡담 시간이었다. 그게 찰나의 시간, 아주 잠깐이라도 말이다. 나는 이 책을 잡담의 기술을 익히기보다는 잡담을 하는 그 시간을 어색하게 보내지 않기 위해 읽어보고 싶었다. 당장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는 생각으로.



다양한 책들에서 네/아니오로 대답할 수 없는 ‘열린 질문’을 던지는 게 좋다고 하지만, 잡담에서는 예외라고 한다. 처음부터 열린 질문을 하게 되면 상대방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게 된다고. 처음엔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며 어리둥절했다. 그런데 예를 들어, “요즘 어때?” 대신에 “일은 잘 돼?”라고 묻는 것이 좋다고 하는데, 요즘 어떠냐는 말은, 업무의 진행 상황을 묻는 건지 업무와는 관계없는 일을 물어보는 건지 아니면 설교하기 전에 떠보려는 건지 헷갈리기 때문이라고. 그걸 듣고 나니, 나 역시 누군가에게 요즘 어떠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요즘요?라고 되물으며 그냥 뭐 똑같다든지, 아무 일도 없다든지 하는 대답을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내가 요즘 뭐 힘든 일이 있었다고 말한 적이 있나, 내가 요즘 뭐가 있었나 하며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이런 대화법에서 신선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무심코 습관처럼 애매한 질문을 했다면 곧바로 다음의 예시처럼 상대방이 대답하기 쉽도록 말을 덧붙이라고 한다. 물어보기 쉬운 질문이 아니라 대답하기 쉬운 질문을 할 것.

“요즘 어때? + 예전에 말했던 프로젝트는 끝났어?”

“주말에는 보통 뭐 해? + 지난 주말에는 뭐 했어?”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 아프거나 하진 않았지?”



위와 비슷한 예시로 “OO 씨는 취미가 뭐예요?”라고 묻는 대신에 “최근에 빠져 있는 게 있나요?”라고 묻는 것이 좋다.

생각을 해보니, 나 역시 취미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지만 상대가 책을 좋아하지 않으면 깊은 대화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겉돌았던 적이 있다. 오히려 취미가 공통인 모임에 갔을 때 그 취미에 대해 좀 더 깊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거겠지. 책의 질문처럼 요즘 빠져있는 게 있느냐고 질문을 받았다면, 나는 아마 이렇게 대답했을 거다.


“8월 30일에 저한테 개조카가 생겼는데요. 원래 개는 좋아하지도 않고 만지지도 못하는데, 개조카는 좀 귀여워서 사진도 저장해두고 즐겨찾기에 해놓고 보고 있어요. 요즘은 산책하면서 제 개조카랑 닮은 개들이 유독 많이 보이고 그러는데 은근히 내 개조카가 좀 더 예쁘네. 해요. 그리고 남동생이 개조카 사진을 가끔 올리는데 좀 자주 올려줬으면 좋겠어요. 아, 그런데 남동생은 그 사실을 모르고 알아서도 안 되는 부분이에요.”라고(...)

“제가 몇 달 전부터 해피트리라는 식물을 키우는데, 날씨가 좀 추워져서 그런 건지 아니면 햇빛이 부족한 건지, 아니면 그밖에 제가 모르는 다른 문제가 생긴 건지 연두색 잎이 노랗게 되어버렸더라구요. 낙엽은 아닐 텐데 좀 속상해요. 그래서 출퇴근길에 주시하고 있는데 다시 싱싱하게 자랐으면 좋겠어요.”라고(...)



대화를 할 때, “왜 그랬어요?”라는 말을 나도 모르게 자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니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예시가 있어 읽어보니 왜?라는 물음은 내가 편하기 위해 하는 물음과 같았기 때문에. why가 아니라 how를 묻기. “어떤 상황이었어요?”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잡담의 기술이 눈에 띄게 늘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마음이 편해지긴 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인사하는 법이라든지, 칭찬을 인사말로 가볍게 받아들이는 법이라든지, 선 넘은 질문을 받았을 때라든지, 모든 말에 리액션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라든지 (물론 내가 다니는 회사의 가장 큰 영감님은 리액션을 좋아하는 게 분명해 보이지만), 말을 끝내는 기법이라든지 하는 팁들이 많이 있기에, 잡담이 어려운 사람들이 읽는다면 공감도 하고 팁도 얻어 가며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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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사람, 하정우
하정우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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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하정우는 내 범주에 크게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배우로서 좋아하기는 하지만, 모든 영화들을 찾아볼 정도로 광팬은 아니었다. 어떤 영화가 보고 싶어졌고, 그 영화에 하정우 씨가 나오면 “볼 만하겠네.” 정도인 배우.

그런데 그런 그가 몇 년 전에 걷는 것에 대해 책을 냈다고 했다. 바로 읽어보고는 싶었지만 어쩐지 꺼려졌다. 연예인의 책을 읽고 감흥이 길었던 적이 거의 없는 까닭이었다. 그들의 책을 읽고 나면 단지 책을 내기 위해 글을 쓴 사람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다가 이웃님의 서평을 보고, ‘읽어봐도 좋겠다.’하는 확신이 들었지만 그 이후로도 책 구매는 계속 망설였다. 여름에는 덥다고, 습하다고, 끈적거린다고 걷는 일을 멈추고 있다가 내가 선포한 가을, 9월이 되자마자 나는 걷기를 계획했고, 주문을 실행해 비로소 이 책을 손에 쥘 수 있게 되었다.

8. 이 점이 마음에 든다. 내가 처한 상황이 어떻든, 내 손에 쥔 것이 무엇이든 걷기는 내가 살아 있는 한 계속할 수 있다는 것.

나도 걷는 것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무작정 걷는 것을 좋아하진 않고 달라지는 풍경들을 관찰하는 재미를 느끼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서 헬스장에서 런닝머신을 걷거나 운동장 트랙을 도는 것보다 공원을 걷고, 골목길을 걷고, 도시를 걷는 일을 즐긴다. 그리고 목표 지향적인 까닭에 대부분 도착지를 설정해두는 편이기도 하다. 어쩐지 그래야만 목표 달성한 느낌을 받아서.

하루 보통 3만보, 가끔 10만보까지 걷는다는 하정우 씨를 보며, 나는 기껏 해봐야 팔천보에서 만보 정도인데. 하며 주눅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보를 넘어가면, /우와 나 오늘 진짜 많이 걸었다! 야호!/ 하며 굉장히 기뻐하는 사람이 나인데. 으흐흐

10. 걷기 모임을 만들어 친구들과 오늘은 얼마나 걸었나 서로 내기하고 응원하며 계속 걷는다. 내가 사는 도시를 내 발로 걸어 다니면서 사람들을 관찰하고, 동네에 연결된 작은 골목길들을 알아가는 게 나는 즐겁다.

그렇다고 내가 언제나 소풍 가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서는 건 아니다. 어느 날 아침에는 나도 하루쯤은 그대로 이불 속에 파묻혀 있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귀찮음과 게으름을 딛고 일어나 몸을 움직여 걸으면, 이내 두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멀고 막막해 보였던 세상과 나의 거리가 훅 당겨진다.

타지역으로 여행을 갈 때 걷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또,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할 때마다 그 지역의 깊은 곳까지 걸어본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에서 윤이 그 도시에 적응하기 위해 걸었던 것처럼. 나는 눈으로 스윽 본 곳은 쉽게 잊어도 발이 닿은 곳은 쉽게 잊지 못하는 사람이어서 그 지역을 깊숙이 알고 지내기에 그보다 좋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올 3월 즈음에 걷기 모임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 모임은 하루 만보를 걷고 인증을 하는 방식이었는데, 목표가 8000보인 나에게도 만보를 걷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8000보가 목표라면 2000보만 더 걸으면 되는데, 그 2km 걷는 게 생각보다 잘 되지가 않는다. 물론 이전에 몇 년 동안 착용하던 샤오미미밴드라면 생활 걸음으로 채울 수도 있겠지만, 샤오미미밴드 대신 좋아하는 시계를 착용하고 있어 생활 걸음보다 작정하고 걸어야 하기도 한다. 오히려 이게 더 운동이 잘될 거라며 혼자 위안을 삼기도 한다. 하하

154. 한 발만 떼면 걸어진다.

서평을 쓰게 된 오늘 아침, 나는 체중계를 보고 뜨악하고 놀란 것과 어제 먹은 저녁을 소화시킬 요량으로 공복으로 3.5km(40분가량)를 걷고 왔다. 하정우 씨 말대로, 우선 몸을 일으켜 걸으러 나가면 어쨌든 걷게 된다. 신기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새삼스럽게 참 신기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몸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 생각이 무거운 것. 일단 몸을 일으키는 것. 다리를 뻗어 한 발만 내디뎌보는 것.

책을 읽고 있노라면, 몸을 일으키고 산책을 나가고 싶게 만든다. 묘한 매력이다.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평소보다 더 많이 걸었다. 책을 읽다가 도중에 책을 덮고 동네 한 바퀴를 걷고 오기도 하고, 평일에는 점심시간에 밥 먹고 근처 산책로를 걷다 오기도 했다. 하정우 씨의 글은, 내게 생각보다 더 큰 울림을 주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58.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휴식을 취하는 것은 다르다. 나는 휴식을 취하는 데도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적어도 일할 때처럼 공들여서, 내 몸과 마음을 돌봐야 하지 않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휴식이라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는데,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더 나른해질 때가 있었다. 생각은 잘 나지 않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 피로가 풀릴 때도 있기는 있었겠지? 나는 정말 내가 피곤을 느낄 때, 누적된 피로들을 날려줄 수 있는 휴식을 취하는 방법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공들여 내 몸과 마음을 돌봐야 한다는 사실에 깊은 공감을 한다.

186. 별 뜻 없이 한 말도, 일단 입 밖에 흘러나오면 별 뜻이 생긴다고 믿는 편이다.

걷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70% 정도라면 나머지는 하정우 씨의 생활습관이나 마인드를 엿볼 수 있었다. 요리, 직업, 그림, 독서, 대인관계, 말에 대한 자신의 가치관. 그 부분들에 대해 배우 하정우가 아니라 인간 하정우를 읽을 수 있었고, 그 바르고 건강한 가치관들 덕에 그가 이전보다 더 좋아졌다. 읽기 쉬운 정갈한 글솜씨도 한몫한다. 책을 읽고 있는데 자꾸 하정우 씨의 목소리가 오버랩되어 신선함을 느끼기도 했다.

292. 티베트어로 ‘인간’은 ‘걷는 존재’ 혹은 ‘걸으면서 방황하는 존재’라는 의미라고 한다. 나는 기도한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 걸어나가는 사람이기를. 어떤 상황에서도 한 발 더 내딛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기를.

책에는 하와이도 참 많이 나오는데 하정우 씨 덕에, 풍광이나 일몰, 바다가 아니라 걷기 위해 하와이에도 가보고 싶어지기도 했다. 책 속에 소개된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도 읽어봐야지. 그리고 오늘도 J가 시간외근무가 끝나고 오면 슬렁슬렁 하품하는 퓨마처럼 운동화 끈을 동여매고 걸으러 나가야겠다.

덧. 다음에 이 책을 다시 읽을 때는 아낌없이 밑줄을 좍좍- 그어가며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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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 많은 귀여운 환자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 수의사가 되고 싶은 수의사의 동물병원 이야기
김야옹 지음 / 뜻밖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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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가벼운 마음으로 봤다가 큰 코 다칠 뻔했다. 책의 첫 페이지, 고양이 두 마리의 사진을 보자마자 나는 책을 읽으며 마시려던 커피를 한쪽으로 치워버렸다. 가벼운 마음으로 볼 이야기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길고양이나 유기견에 관심을 크게 가져본 적도 없고, 사료를 사서 줘본 경험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가까이 다가오면 오히려 피하기 일쑤다. 살아있는 동물들을 만진다는 게 아직까지 나한테는 어려운 과제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책임을 동반하는 문제라서 반려동물을 들일 생각은 전혀 안 하거나 못 하고 있지만, 하지만 몇 년 전부터는 멀리서 보며 고양이 야옹~이라든지, 너 어디 가~ 하고 말을 붙이는 정도가 되면서도 조금씩 관심이 간다.




그러다가 필명이 너무나도 귀여운(필명이 아닐 수도 있을까?) 김야옹 님의 수의사가 되고 싶은 수의사의 동물병원 이야기가 눈에 띄었고, 읽어볼 기회가 주어졌다. 그런데 이 분, 참 멋지다. 30대의 늦은 나이에 수의대에 입학하고 수의사가 된 것이 멋지다는 게 아니라, 동물들을 대하는 따듯한 마음들, 동물들을 사랑하는 시선이 멋져 보이는 것이다. 그 마음 때문에 아내인 김부장님에게 구두로 이혼을 몇 번이나 당하는 신세가 되기는 하지만, 그 마음이 잘못된 것은 아니니까. 오히려 더 빛나는 예쁜 마음인 것이니까.

몇 년 전, 1차선만 있는 도로에서 지나가는 차에 다친 건지, 일어나지 않고 야옹야옹 우는 어린 유치원생 같은 고양이를 본 적이 있다. 나는 사람이 옆에 쓰러져 있어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지나갈 사람이라는 말을 지속적으로 들어왔었는데, 그게 아님을 그때 새삼스레 느꼈다. 다행히 어쩌지 못하는 나 대신에 나보다 조금 어린 친구들이 고양이를 걱정하고 있는 걸 몇십 분 동안 보고 들어왔기 때문에 처치를 잘 했다고 믿고 싶다. 하지만 여전히 그때의 그 고양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픈 건 어쩔 수 없다. 내가 좀 더 용감한 사람이었다면,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런데 책을 읽으며 처음 알았다. 다친 동물을 동물병원을 데리고 갔을 때 비용 부담은 데려온 사람에게 있는 것이고, 치료를 받은 이후의 거취 문제도 신경을 아예 안 쓸 수 없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인 부분을 감안하기도 하고 거취 문제는 잠시 뒷전으로 미뤄서라도) 아픈 동물을 동물병원에 데리고 가는 마음이 여리고 착한 사람들이 있기에 다행이라는 생각을, 이 책을 읽으며 처음 가져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데려온 동물들을 경제적인 부분에서 조금 손해로 보더라도 치료를 해주는 수의사들이 있다는 것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도 역시. 참 감사한 일이다.



 

내가 동물병원에 간 적이 한 번 있는데, 중학생 때 아주 잠시 키우던 강아지가 아팠을 때였다. 아주 잠시라는 것은, (엄마가) 강아지를 강아지 가게에서 금액을 지불하고 데리고 왔는데, 어느 날부터 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친구랑 택시를 타고 동물병원에 데리고 갔다. 그 새끼 강아지, 요크셔테리어는 죽었고, 내가 그 개를 데리고 왔는지 아니면 엄마가 데려왔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엄마와 강아지를 잘 묻어주고 온 기억밖에.


변을 보지 못해 죽을 것 같던 미루가 살아난 것도, 새 주인에게 입양되었지만 아프다는 이유만으로 버림받았던 쫑이가 소운이로 새로이 태어나 행복하게 살다가게 된 것도, 동동이와 봄이가 서로에게 도움을 받고 도움이 된 것도,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취준생이 데려온 튼튼이가 살아난 것도, 죽을 병에 걸려 스스로 보호자를 찾아다닌 길고양이 봉순이가 살아난 것도, 죽기 전에 수액이라도 한 번 맞춰보자던 다람이가 살아있는 것도 모두, 한 사람의 덕분이 아니라 마음이 따듯하고 여린 사람들이 그 생명들을 잘 보살펴주었기 때문일 거다. 튼튼이를 포기하지 않고 감당할 수 있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라고 말했던 취준생의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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