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에듀윌 9급 공무원 6개년 기출문제집 한국사 - 고난도 기출문제 부록+기출문제편+해설편 2020 에듀윌 9급 공무원 6개년 기출문제집
신형철 지음 / 에듀윌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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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팍팍하다 느껴진다. 특히나 내 지금 직업을 가지고 언제까지 일을 할 수 있으려나, 하고 생각해보면 아득하고 막연해진다. 게다가 주기적으로 직업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고 있는 시기가 잦아지고 있어 변화가 필요하기도 하다. 내 일을 계속해서 이어가되, 조금 더 안정적일 수 있는 직업. 그건 다름 아닌 공무원일 텐데, 검색해서 찾아보는 것만으로도 진이 다 빠져버렸다. 그래서 카페에 가입해 둘러보다가 우선 문제를 좀 훑어보자 하고, 보는데 난이도가 어떤지조차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냥 나는 많이 어려웠다.) 문제 20개 중에 아는 게 거의 없다니. 심지어 알던 것도 갸우뚱거리게 된다. 세상에나 만상에나.

 

 

 

현재 한국사는 자격증만 있으면 패스가 되는 부분이어서 많은 공시생들은 시험보다 자격증을 우선 따놓고 시험을 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자격증을 취득하지 못한 공시생은 시험을 볼 수밖에 없는데, 2020 에듀윌 9급 공무원 6개년 기출문제집 한국사에서는 2014년부터 2019년까지 6개년 9급(국가직, 지방직, 서울시, 사회복지직) 문제와 경찰직 문제를 분석하여 실어놓았기 때문에 조금 더 집중해서 공부를 할 수도 있을 수 있다.

 

 

 

사실 한국사라는 과목은, 한국인이라면 응당 알아야 하지만 한 나라의 역사를 전부 다 알기에는 매우 방대하기 때문에 연도별로 정리하며 공부를 한 게 아니라면 쉽지 않다. 그냥 그냥 아는 어느 정도로만 한국사를 대한다면 문제들을 보고 나처럼 당황하고 뒷걸음질을 칠 수도 있다. 이건 뭐지? 이건 뭐야? 이건 또 무슨 말이야... 결국 문제를 다 풀지도 못한 채, 해설을 펼쳐본다. 개인적으로 틀린 문제를 다시 틀리는 이유는, 문제와 답만 외우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기출문제의 경우에는 해설이 친절한 경우를 본 적이 별로 없다. 우선은 답만 알고 넘어가~라는 식이었달까. 그런데 이 책 역시 기출문제이기 때문에 세세한 해설을 요구하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을 가졌는데, 해설 자체도 꼼꼼하게 되어있어 실제로도 많은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읽어봐도 모르는 경우에는 에듀윌 홈페이지에서는 해설강의가 무료로 진행되고 있으니 강의를 들어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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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는 아니지만 매일 피아노를 칩니다 - 느리게 하지만 선명하게 달라지는 나를 만나러 가는 길
김여진 지음 / 빌리버튼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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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Rubato’는 언제일까, 생각해보면 너무 명확히 그때였다. 이곳에 와서 적응하며 살아내야 할 때.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글을 쓰며 마음을 달래도 달래지지 않는 헛헛함이 쌓여 고름으로 번졌다. 내가 세상에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을 소리로써 표현해내고 싶었다. 그래서 정말 느닷없이, 배우자에게 통보했다. “나 피아노를 배워야겠어.”

 

 

나는 피아노만 아니라면 어떤 악기든 상관이 없었다. 피아노라는 악기는 우선 부피가 커서 자리를 많이 차지하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악기를 살 생각은 없었지만, 내가 연주하고 싶을 때마다 꺼내기에 피아노라는 악기는 무리가 있었다. 대안으로 생각했던 것이 바이올린이나 우쿨렐레나 기타 정도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 피아노를 등록한 것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사는 동네에 피아노 학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바운더리를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피아노를 만났다.

 

 

나는 피아노와는 낯선 관계다. 서먹서먹함을 넘어 짝사랑하다 친구한테 빼앗겨버린 존재가 피아노의 존재였다. 어릴 적,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엄마를 조르고 조르고 조르다가 드디어 등록을 하게 되었던 날. 그때의 설렘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일곱 살의 설렘. 피아노 앞에 앉아서 건반을 누르고 소리가 났을 때 느낀 그 전율. 그런데 그 설렘은 만 하루를 가지 못했다. 피아노를 다녀와서 나는 수두를 앓았다. 며칠을 꼬박 앓아야 했기에 피아노는 고사하고 방안에서만 틀어박혀 지내야만 했었다. 그리고 예상했겠지만, 나는 그 이후로도 피아노를 다니지 못했다. 학교에 가는 초등생의 나는 속셈학원을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피아노 안녕.

 

 

그리고 다시, 피아노 안녕.

 

 

 

 

고백하자면, 나는 피아노를 갈 때만 피아노를 친다. 레슨이 끝나고 30분에서 1시간 정도 연습하는 것이 전부다. 그러니 피아노가 늘지를 않는다. 잘 하고는 싶지만, 굳이 스트레스를 받아 가며 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 피아노이다.

 

같은 맥락으로 출석하는 것이 목표라고 생각하고 다녔고 실제로 물속에서 걸어 다니는 것이 가장 재미있었던 내가 키판 없이 배영을 하고, 어설프게나마 자유형을 하던 그 희열을 잊지 않고 있다. 그래서였을까, 크리스마스에 ‘Noel’을 치고 싶어! 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오만 원짜리의 저렴한 피아노를 구매하게 되었다. 노엘도 노엘이지만, 이제까지 배운 것들이 너무 빠르게 잊히는데 그게 너무 아쉬웠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집에 있는 피아노를 뚱땅거리지만, 나는 나아지고 있는 걸까. 글쎄......

 

 

 

그런데 피아노를 배우고 있다는 말이, 피아노를 치고 있다는 말이, 얼마나 뻔뻔하고 염치없고 부끄러운 것인지 피아노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여실히 느끼게 된다. 110. 오늘은 욕심 부리지 않아. 서툴렀던 부분을 서투르지 않게 하는 것이 목적이야. 라는 부분에서 그랬고, 두 마디만 천 번 반복을 한다는 부분에서도 그랬으며, 239. 실수가 잦아지는 구간에서 손가락이 헤매지 않도록 연습하고 곡에 몰입하는 법을 체득한다.는 부분에서 그랬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피아노를 대하고 있는가를 상기할 때마다 부끄러움이 몸을 에워쌌다. 내가 마주 앉아 있는 피아노에게 사죄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마음마저 들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내가 왼손 계이름을 읽을 수 있고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 만족하지 않아야 실력이 늘 텐데, 나는 이런 작은 것에 만족하고 있으니 도통 실력이 늘지 않는 걸까.

 

 

 

47. 피아노를 배우면서 잘못을 인정하는 법과 인내심을 다시 배운다.

나 같은 초보자는 조금이라도 집중하지 않으면, 악보에서 눈이 벗어나기만 해도 기다렸다는 듯 틀려버린다. 그럴 때마다 자꾸만 신경질을 넘어 화가 난다. 이건 분명 내 문제이고 피아노한테 화풀이할 일이 아닌데도, 피아노한테 화풀이를 하고 싶어진다. 그렇다고 내가 엄청 대단한 곡을 치느냐하면 그건 또 아니다. 정말 뚱땅뚱땅하며 피아노를 치는 수준, 간단한 동요 하나를 치는데도 그렇다. 이런 내가 다른 곡들을 소화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지레 겁을 집어먹는다. 다시 처음부터 한다. 다시, 다시 하면 잘 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나를 다독인다. 그래도 안 된다. 계속 틀린다. (휴)

 

 

내가 어려워하는 것 중 하나, 스타카토이다. 부드럽게 가다가 통통 거리는 게 이게 뭐라고 난 힘들지? 싶었는데, 48. 화음 스타카토가 너무 어려워요.란다. 나만 어려운 게 아니었어!!! 아!

 

 

 

그리고 작가의 선생님을 보며, 나의 피아노 선생님도 생각났다. 피아노를 생전 처음 배우는 걸 알아서 기초부터 배우는 게 좋겠다고 먼저 말씀해주셨다. 게다가 내가 연습을 안 했다는 것을 알 텐데도, “리라 씨는 할 수 있어요. 조금만 더 연습하면 될 것 같아요. 연습하면 안 되는 건 없어요. 리라 씨만 포기하지 않으면 돼요. 지금도 충분히 잘 하고 있어요. 어릴 때 피아노를 배우는 것보다 성인이 되어서 피아노를 배우는 게 더 대단한 거예요.”라고 늘 다독여주신다. 얼마나 상냥하고 다정한지... 그래서 그런지 자꾸 응석을 부리게 된다. 아마 선생님은 모르시겠지. 내가 선생님보다 나이가 한 살 많다는 것을. (또 몰라야 한다.) 나의 피아노 선생님이 지금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도 피아노를 계속해서 배울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 같다. 무언가를 할 때에 가르쳐주는 사람 혹은 함께 하는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작가의 선생님도 만만치 않다. 왜인지, 나긋나긋하게 노래하듯 말할 것 같은 사람.

포르테(f) : ‘세게’가 아니라 ‘건강하게’

83. 호흡하세요. 숨 쉬어요.

88. “시작해볼까요? 털썩 주저 앉는 느낌이에요. 드레스 자락을 쥐고 왕 앞에 나서는데 속으로는 주저앉는 심정으로.”

224. “분명히 이 곡과 어울리는 감정이 있단 말이에요, 여진씨는. 그런데 주춤하고 멈칫하는 게 느껴져요. 여기에 포르테가 있잖아요. 일상에서 포르테를 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더라도 어떡해요. 여기에서만큼은 포르테로 표현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쇼팽이 말하고 있잖아요.”

 

 

 

 

162. 나는 ‘울고 싶다’는 말을 속으로 진짜 자주한다. 너무 울고 싶다. 명백한 이유를 알 수 없이 답답할 때, 이유를 당장에 찾을 수 없으니 언어로도 구체화할 수 없는 감정이 치솟고 그 시점에서 울컥 올라오는 말이 ‘울고 싶다’인 거다. 절대 울지 않아도 그냥 매일 조금씩 울고 싶다. 기본값으로 웃음이 많아 잘 웃는데 속이 울이 많다.

 

작가랑 내가 너무나도 동일시되던 부분들1.

나도 울고 싶다라는 말을 정말 자주한다. 왜 울고 싶냐고 물어보면, 복잡한 마음을 말로 설명할 수 없어서.라고 대답해왔다. 그런데 그때마다 울어버린다면 나는 매일매일을 울어야 할지도 모른다. 길을 가다가 돌멩이에 발이 채이면 울고 싶은데, 그렇다고 울 수는 없지 않나. 기껏 시간을 들여 반찬을 했는데 그 반찬이 맛이 없어 울고 싶은데, 그렇다고 울 수는 없지 않나. 어떤 때는 공들여 화장을 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 울고 싶은데, 그렇다고 울 수는 없지 않나 말이다. (뭐, 사실은 그런 이유들로 운 적도 있음을 살짝 고백한다.) 근데 이런 사람이 또 있다니... 세상에...

나는 며칠 전 배우자가 술을 많이 먹고 들어온 날, 그 새벽에 샤워를 하고 수건을 욕실 앞에 두었는데 그걸 보고 울고 싶었다. 그래도 울지 않았다. 세상에 울고 싶은 일은 많지만, 그 어떤 일이 마음을 온통 흔드는 일이 아니라면 나는 절대 울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울고 싶다.

 

 

 

164. 공허하다.

일을 하지 않으면, 책을 읽지 않으면, 글을 쓰지 않으면, 피아노 연습을 하지 않으면 죄책감을 느낀다.

 

166. “일도 해야 하고 원고도 써야 하고 피아노 연습도 해야 하고 사이버 대학에 재학 중이었는데 복학을 해서 인터넷 강의도 들어야 하고 할 게 진짜 많고 힘들어요. 피곤해요. 그런데 불행하고 그런 건 아니에요.”

 

작가랑 내가 너무나도 동일시되던 부분들2.

누가 나한테 일을 하라고 한 것도, 책을 읽으라고 한 것도, 글을 쓰라고 한 것도, 피아노를 배우라고 한 것도, 꽃꽂이를 배우라고 한 것도, 수영을 다니라고 한 것도, 한자 공부를 하라고 한 것도, 필사를 하라고 한 것도, 독서노트를 쓰라고 한 것도, 일기를 쓰라고 한 것도, 가계부를 쓰라고 한 것도, 도서관에 가라고 한 것도, 강제저축을 하라고 한 것도, 영화를 보라고 한 것도 (…중략…) 아니다. 그럴 사람도 없다. 나의 배우자는 내가 무엇을 하든 지지한다. 강요를 하는 것도 없고, 조언은 내가 원할 때에만 해준다. 그러니까 내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내가 자처한 것이고, 내가 벌린 것들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할 게 너무 많아서 힘들고 피곤하다. 할 게 많은데도 이외에도 하고 싶은 것도 너무 많다. 진짜 울고 싶다.

근데 아이러니하게, 불행하지 않다. 오히려 즐거울 때도 많다. 개중에는 억지로 하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즐거우니까 한다. 매일매일 시간이 너무 빠르고, 좀 더 더디게 갔으면 좋겠다. 잠을 자는 시간도, 화장실에 앉아 있는 시간도, 멍 때리고 있는 시간도 아까울 때가 있다. 이 정도면 병인가 싶다가도, 그렇게 생겨먹은 것을 어쩌란 말이야. 하고 이내 체념한다. 즐거우면 됐다.

 

 

 

 

 

성실히 아름다운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아름다운 선율을 감상하고 또 소리도 내본다. 입으로든, 성대로든, 손가락으로든, 그게 어떤 방식이든. 72.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잡기 위해 더듬거리는 그 손을 지지한다. 나는 또 피아노를 뚱땅거릴 예정이다. 피아노를 왜 배우냐는 말에 할 수 있는 말은, 내가 하고 싶으니까- 이다.

 

 

 

 

덧1. 이 책은 정말 신기하게도, 이 책을 읽은 분들의 서평까지도 열정적이다. 너무 재미있다. 계속 찾아 읽게 된다.

덧2. 현을 해머로 때리는 힘으로 소리가 난다. (<양과 강철의 숲>을 다시 읽어야 하나. 읽은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덧3. 나도 외워본다. 발렌느. (고래 : 프랑스어로 발렌느 (Baleine))

 

 

 

오탈자 41. 이론 적인 부분은 금방 이해를 하고 따라오거든요 ▶ 이론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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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강승현 옮김 / 모모북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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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보다 20대에, 그리고 30대가 들어서서 더욱 내 머릿속을 지배하는 게 하나 있다. 그것은 매우 광범위하면서 난해하게도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몇 년째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지만, 여전히 나는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살고 있다. 정답이 없기에 더 어려운 문제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씩 관찰하고, 내게 긍정적인 작용을 하는 것들을 꼼꼼하게 넣어둔다. 머릿속이든 메모든 마음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그렇게 하나가 모이고 또 하나가 모여서 내 삶의 방향을 계속해서 지시하고 실행하고 수정하고 다시 실행할 것도 안다. 그럴 때면 마음이 복잡해지니까 책을 펴야지.




마침 어릴 때 읽었던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다시 읽을 기회가 생겼다. 책을 읽을 당시가 감사하게도 평화로운 이른 오전이었다. 오전에는 마음이 더없이 한량과 같아져서 생각을 좀 더 깊이 할 수가 있다는 장점이 있다. 난생처음 말을 해보는 사람처럼 천천히 제목을 곱씹는다. 사람은 무엇으로 살지? 매슬로우의 인간 욕구가 생각난다. 생존의 욕구, 안전의 욕구, 사회참여의 욕구, 존경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가 바로 그것인데, 이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에 속한다. 이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인간은 스스로를 불행하다 여기기도 한다. 과연 어떤 이야기들이 실려있으려나,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책을 펼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랑하는 곳에 신이 있다>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바보 이반>

<촛불>

<에멜리얀과 북>

<무엇 때문에>


책에는 총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어릴 적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동화라고 생각하며 지냈던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여전히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나는 이 책에 내 마음대로 동화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유순한 이야기에서 삶의 기본기를 만난다. 인간의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이며,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진정한 행복은 어디 있는가 하는 물음과 그 답을 톨스토이의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다. 그것을 내 삶에 적용을 시키느냐 아니냐는 논외로 한다.




모두 유명한 이야기라지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였고, 나머지 이야기들은 ‘들은 적 있는 것 같은데...’ 정도였다. 심지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도 대략적인 줄거리만 아는 정도여서 새롭기까지 했다. 개인적으로는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와 <촛불>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 아마 근래에 내가 생각하는 삶의 바탕을 좀 더 공고히 해주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이 아닌가, 해서이다.



그중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서 “네가 걸은만큼 네 땅이 될 것이다.”라고 나에게 제안한다면 나는 얼마나 걸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나도 바흠과 같은 꼴이 되었으려나. 하지만 나는 실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어서 바흠처럼 그렇게 많은 욕심을 부리지 않았을 것 같긴 하지만 그건 그 상황이 닥치지 않는 한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욕심을 많이 부리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그걸 꽁꽁 숨기며 살아왔던 것뿐이라는 것을 이제는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를 달래기 위해 주문처럼 외고 있는 것은 과유불급(過猶不及)인데, 내가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것을 알아챌 때마다 “이만하면 됐어.”라고 일부러 말하곤 한다.




살면서 욕심을 가지는 것이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겪고 있다. 수많은 것에서 하나 정도는 욕심을 가져도 되지,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하나가 내 삶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기도 한다. 사람 참 우습지. 적절한 조율과 균형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사람이기 때문에 51:49라 하더라도, 아니 50.1:49.9라고 하더라도 한쪽으로 좀 더 치우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잘 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여러 이야기들을 읽으며 삶을 살아가며 버려야 하는 것과 추구해야 할 것을 다시 생각해보는 퍽 귀한 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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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 예찬 - 숨 가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품격 있는 휴식법
로버트 디세이 지음, 오숙은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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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건대, 나는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다. 그 사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의 부모님이다. “우리 집에서 쟤가 제일 게을러~”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의 배우자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결혼 후의 내 생활은 부지런함 그 자체이기 때문에. 하지만 나의 천성은 게으름이다. 나는 내가 게을러지면 어디까지 게을러질 수 있는지를 너무나도 잘 안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고백한다. 나는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라, 부지런해지려고 무던히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음식을 해두는 것도, 청소를 하는 것도, 빨래를 널거나 개는 것도, 심지어 산책을 하는 것도, 책을 읽는 것까지도 모든 것이 ‘노력’의 일부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럴 수 있는 원동력은, 나라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이지만, 모순되게도 뭔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함을 느끼는 사람이기도 하고, 매 순간 내게 주어진 시간을 좀 더 소중하게 쓰고 싶다는 욕심도 매우 강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매일매일을 내가 계획한 시간 속에서 열심히 살다가, 이제는 좀 쉬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런 시간을, 나는 ‘살찐 늙은 쥐의 게으름’을 실천할 시간이라고 표현한다. 그 시간 역시 나의 시간으로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는 확신을 한 것은 불과 2년밖에 되지 않았다. 처음으로 게으름을 예찬했던 그때.

 

 

지금도 꾸준히 나는 그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게을러지는 시간. 하지만 게으름 속에서도 나는 꾸준히 부지런하다. [국어사전]에 등재되어있는  게으르다의 정의는, 행동이 느리고 움직이거나 일하기를 싫어하는 성미나 버릇이 있다.인데, 나의 게으름은 그곳에 속하지 않는다. 게으름에도 이른바 ‘급’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게으름을 부리면서도 가끔은 어떻게 하면 더 게을러질 수 있을지에 대해 좀 더 고심한다. 그러다가 만난 <게으름 예찬>에 마음이 동요했다.

 

 

 

 

 

 

로버트 디세이는 나태함과 게으름의 차이를 명백히 알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에게 게으름은 단순하게 늘어져있는 시간이 아니다. 여가생활을 즐기는 그 시간, 한없이 게을러질 수 있는 시간. ‘내’가 되는 시간. 게으름을 통해 충전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내게 이것은 책 읽기, 독서노트 쓰기, 서평 쓰기, 필사하기, 한자 공부하기, 산책하기, 여행하기, 블로그에 기록하기, 발코니에 앉아 멍하니 커피 마시기, 하릴없이 앉아 풍경 감상하기 정도이다. 이것을 내가 왜 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다. 하고 싶으니까 하는 거지. 이것에 대한 압박이 있다면 외부 압박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든 내부 압박이다. 하고 나서도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나의 즐거운 놀이들.

 

이외에 피아노를 배우는 것과 꽃 수업을 듣는 일은 그것보다는 좀 덜하지만, 그것도 조금 틈을 두어 곁에 세워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것들은 내가 욕심을 얼마나 가지느냐에 따라 좌절감을 가질 수도 있는 부분들이어서 최전선에 섣불리 끼워줄 수는 없다. 빨래를 하거나 청소를 하거나 음식을 하는 일은 해야 하니까 하는 일에 속하고, 낮잠을 자거나 TV를 보는 일들은 나로 하여금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심지어 영화를 보는 일조차도 내가 좋아서 보는 것보다는 봐야 할 것 같아서라는 까닭으로 숙제처럼 여겨지기도 하기에 나의 놀이 활동에는 포함되지 못한다.

 

 

 

 

책을 읽음으로써 나는 좀 더 확신을 얻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하는 동안에는 시간에 유린당하고 싶지도, 침해당하고 싶지도 않다. 그런 게으름을 지금보다 좀 더 많이, 또 자주 가져야겠구나. 나는 게으름뱅이가 되어야겠다!

 

 

 

 

 

오탈자인지 궁금한 49. 눈빛이 교활하고 거만한 허버트 레인을 곯려줄 방법을 궁리한다. ▶ 골려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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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구원
임경선 지음 / 미디어창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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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선 작가의 책이다. 평소 같았으면 당연히 패싱 했을 작가였다. 나는 이 작가에 나는 무척이나 인색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책은 고작 두 권 읽었다. 그중 <태도에 관하여>를 읽었을 때 느꼈던 부정적인 충격이 아직도 선연하다. 내 인생에 실망은 있었을지언정, 실패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을 근거로 나의 직립된 가치관은 빛을 발했다. 내가 잘난 줄 알고 지냈다. 2015년 가을 전까지는. 그리고 2015년 가을부터는 나는 세상에 대한 모든 회의를 지니게 되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을 상실했고, 그로 인해 내가 가지고 있던 가치관이 전부 흔들리던 시절이었다. 때마침 그의 글을 읽게 되었는데 그때 느꼈던 그 괴리감,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글을 쓰는 것이 그 사람의 일이라면, 그 글을 읽고 판단하는 것은 오롯한 내 일이었다. 그 판단에 오류가 있든 없든, 어쨌든 읽히라고 쓴 글이 아니던가. 이 사람은 어떤 일에 대해 실패를 해본 적 없겠고, 중요한 것을 ‘상실’ 해본 적도 없는 사람이겠다. 그렇기에 가치관이 단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는 사람이겠구나. 그러니까 이렇게 사물과 현상에 대해 타인이 받을 상처는 생각 않고 확실하게 정의를 내릴 수 있겠구나. 솔직함을 가장한 무례함이 있다는 것을, 그의 글을 읽고 처음 느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내가 읽을 수 있는 사람도 아니구나. 이 사람의 글을 읽어내는 것이, 내게는 나의 상실을 극대화하는 것이겠구나. 그럼 이만 안녕.하고 돌아섰다. 일말의 미련도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와서 한참을, 고민했다. 그때와 같은 느낌이 들면 당장 덮어버리겠다는 결심을 한 후에야 나는 책장을 펼칠 수 있었다. 그는 부모님을 여의고 깊은 상실감에 빠져있었다. 현실에 숨이 턱턱 막혀올 때 생각난 곳이 있었으니, 그곳은 리스본이었다. 열 살 때 부모님과 함께 살던 곳을, 그때 자신의 나이와 꼭 닮아있는 딸과 함께 떠났다. 올리브 나무의 암녹색을 떠올리게 한다는 리스본에.

그런데 읽을수록 나는 다른 사람의 글을 읽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난을 하거나 책망하거나 힐난하는 눈초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글을 쓸 때에 유약해진 탓에 퍽 감상에 젖어 그런 걸까, 둥근 돌을 매만지는 기분이었다.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상냥해진다는데, 행복이 전부였던 시간을 보냈던 그곳에 나의 모든 것을 걸어도 아깝지 않을 이와 함께 있으니 더욱 그렇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든다.


내게 다정한 구원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본다. 늘 달랐다. 어떤 시기에는 기차 플랫폼이었고, 어떤 시기에는 계절마다 나무색이 다르게 비치는 호수였으며, 어떤 시기에는 지는 해를 볼 수 있는 다리(

)이기도 했다. 이것은 내가 생활하는 곳이 매번 달라지는 까닭이다. 그것 외에 더 확실하고 명확하게 나를 위무해준 것은 포르투갈의 호카곶이었다. 가감 없이 행복했던 때를 기억해내라고 하면 단연 몇 시간 남짓의 그곳이었다. 그렇다고 그곳에서 뭘 한 것도 아니었는데, 힘들어죽을 것 같은 날에는 그때를 떠올렸다. 그날의 날씨, 그날의 공기, 그날의 햇빛, 그날의 감정, 그날의 나, 그리고 당신, 우리. 하나도 잊을 수 없다. 그렇기에 다시 갈 생각은 (아직까지는) 없다. 그때의 행복을 꽁꽁 잠그고 원하는 때에 들여다보고 싶다. 그날의 날것들을 다시 느낄 리 만무하므로. 나에게 호카곶은 그날의 호카곶으로도 충분하다. 그때를 상기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처음 느껴보았는데, 그런 행복감을 느낄 날이 앞으로도 종종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덧.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면서 이번 책의 다정함 때문에 혹여라도 내가 이전 작()을 오해했나 싶어 부러 찾아 펼쳐들어 중간 페이지부터 읽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미간을 찌푸리며 책을 꽂아두었다. 그럼 그렇지. 책의 서두에 쓰셨던 것처럼, <위대한 개츠비>의 "누구를 비판하고 싶어질 땐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좋은 조건을 타고난 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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