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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사람, 하정우
하정우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평점 :
배우 하정우는 내 범주에 크게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배우로서 좋아하기는 하지만, 모든 영화들을 찾아볼 정도로 광팬은 아니었다. 어떤 영화가 보고 싶어졌고, 그 영화에 하정우 씨가 나오면 “볼 만하겠네.” 정도인 배우.
그런데 그런 그가 몇 년 전에 걷는 것에 대해 책을 냈다고 했다. 바로 읽어보고는 싶었지만 어쩐지 꺼려졌다. 연예인의 책을 읽고 감흥이 길었던 적이 거의 없는 까닭이었다. 그들의 책을 읽고 나면 단지 책을 내기 위해 글을 쓴 사람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다가 이웃님의 서평을 보고, ‘읽어봐도 좋겠다.’하는 확신이 들었지만 그 이후로도 책 구매는 계속 망설였다. 여름에는 덥다고, 습하다고, 끈적거린다고 걷는 일을 멈추고 있다가 내가 선포한 가을, 9월이 되자마자 나는 걷기를 계획했고, 주문을 실행해 비로소 이 책을 손에 쥘 수 있게 되었다.
8. 이 점이 마음에 든다. 내가 처한 상황이 어떻든, 내 손에 쥔 것이 무엇이든 걷기는 내가 살아 있는 한 계속할 수 있다는 것.
나도 걷는 것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무작정 걷는 것을 좋아하진 않고 달라지는 풍경들을 관찰하는 재미를 느끼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서 헬스장에서 런닝머신을 걷거나 운동장 트랙을 도는 것보다 공원을 걷고, 골목길을 걷고, 도시를 걷는 일을 즐긴다. 그리고 목표 지향적인 까닭에 대부분 도착지를 설정해두는 편이기도 하다. 어쩐지 그래야만 목표 달성한 느낌을 받아서.
하루 보통 3만보, 가끔 10만보까지 걷는다는 하정우 씨를 보며, 나는 기껏 해봐야 팔천보에서 만보 정도인데. 하며 주눅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보를 넘어가면, /우와 나 오늘 진짜 많이 걸었다! 야호!/ 하며 굉장히 기뻐하는 사람이 나인데. 으흐흐
10. 걷기 모임을 만들어 친구들과 오늘은 얼마나 걸었나 서로 내기하고 응원하며 계속 걷는다. 내가 사는 도시를 내 발로 걸어 다니면서 사람들을 관찰하고, 동네에 연결된 작은 골목길들을 알아가는 게 나는 즐겁다.
그렇다고 내가 언제나 소풍 가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서는 건 아니다. 어느 날 아침에는 나도 하루쯤은 그대로 이불 속에 파묻혀 있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귀찮음과 게으름을 딛고 일어나 몸을 움직여 걸으면, 이내 두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멀고 막막해 보였던 세상과 나의 거리가 훅 당겨진다.
타지역으로 여행을 갈 때 걷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또,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할 때마다 그 지역의 깊은 곳까지 걸어본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에서 윤이 그 도시에 적응하기 위해 걸었던 것처럼. 나는 눈으로 스윽 본 곳은 쉽게 잊어도 발이 닿은 곳은 쉽게 잊지 못하는 사람이어서 그 지역을 깊숙이 알고 지내기에 그보다 좋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올 3월 즈음에 걷기 모임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 모임은 하루 만보를 걷고 인증을 하는 방식이었는데, 목표가 8000보인 나에게도 만보를 걷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8000보가 목표라면 2000보만 더 걸으면 되는데, 그 2km 걷는 게 생각보다 잘 되지가 않는다. 물론 이전에 몇 년 동안 착용하던 샤오미미밴드라면 생활 걸음으로 채울 수도 있겠지만, 샤오미미밴드 대신 좋아하는 시계를 착용하고 있어 생활 걸음보다 작정하고 걸어야 하기도 한다. 오히려 이게 더 운동이 잘될 거라며 혼자 위안을 삼기도 한다. 하하
154. 한 발만 떼면 걸어진다.
서평을 쓰게 된 오늘 아침, 나는 체중계를 보고 뜨악하고 놀란 것과 어제 먹은 저녁을 소화시킬 요량으로 공복으로 3.5km(40분가량)를 걷고 왔다. 하정우 씨 말대로, 우선 몸을 일으켜 걸으러 나가면 어쨌든 걷게 된다. 신기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새삼스럽게 참 신기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몸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 생각이 무거운 것. 일단 몸을 일으키는 것. 다리를 뻗어 한 발만 내디뎌보는 것.
책을 읽고 있노라면, 몸을 일으키고 산책을 나가고 싶게 만든다. 묘한 매력이다.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평소보다 더 많이 걸었다. 책을 읽다가 도중에 책을 덮고 동네 한 바퀴를 걷고 오기도 하고, 평일에는 점심시간에 밥 먹고 근처 산책로를 걷다 오기도 했다. 하정우 씨의 글은, 내게 생각보다 더 큰 울림을 주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58.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휴식을 취하는 것은 다르다. 나는 휴식을 취하는 데도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적어도 일할 때처럼 공들여서, 내 몸과 마음을 돌봐야 하지 않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휴식이라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는데,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더 나른해질 때가 있었다. 생각은 잘 나지 않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 피로가 풀릴 때도 있기는 있었겠지? 나는 정말 내가 피곤을 느낄 때, 누적된 피로들을 날려줄 수 있는 휴식을 취하는 방법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공들여 내 몸과 마음을 돌봐야 한다는 사실에 깊은 공감을 한다.
186. 별 뜻 없이 한 말도, 일단 입 밖에 흘러나오면 별 뜻이 생긴다고 믿는 편이다.
걷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70% 정도라면 나머지는 하정우 씨의 생활습관이나 마인드를 엿볼 수 있었다. 요리, 직업, 그림, 독서, 대인관계, 말에 대한 자신의 가치관. 그 부분들에 대해 배우 하정우가 아니라 인간 하정우를 읽을 수 있었고, 그 바르고 건강한 가치관들 덕에 그가 이전보다 더 좋아졌다. 읽기 쉬운 정갈한 글솜씨도 한몫한다. 책을 읽고 있는데 자꾸 하정우 씨의 목소리가 오버랩되어 신선함을 느끼기도 했다.
292. 티베트어로 ‘인간’은 ‘걷는 존재’ 혹은 ‘걸으면서 방황하는 존재’라는 의미라고 한다. 나는 기도한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 걸어나가는 사람이기를. 어떤 상황에서도 한 발 더 내딛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기를.
책에는 하와이도 참 많이 나오는데 하정우 씨 덕에, 풍광이나 일몰, 바다가 아니라 걷기 위해 하와이에도 가보고 싶어지기도 했다. 책 속에 소개된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도 읽어봐야지. 그리고 오늘도 J가 시간외근무가 끝나고 오면 슬렁슬렁 하품하는 퓨마처럼 운동화 끈을 동여매고 걸으러 나가야겠다.
덧. 다음에 이 책을 다시 읽을 때는 아낌없이 밑줄을 좍좍- 그어가며 읽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