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마지막 두 달에 걸쳐 구한 책들 중에서 좀 추려서 정리를 해 보았다. 읽은 책도 있고, 후일을 기약하며 그냥 꽂아두기만 한 책들도 있다. 이 '책의 손맛' 페이퍼는 책의 내용에 대한 소개도 있지만, 페이퍼 제목처럼 책의 외관이나 디자인 등 물리적인 특징들도 다룬다.

 

<- 평범한 제목을 가진 옥타브 마노니의 <프로이트>는 변별력이 약한 책 제목으로 눈에 띄기 어려운 책이다.

 

 

드디어 브루스 핑크의 <에크리 읽기>를 손에 쥐었다. 겉장의 표지는 마치 고다르 영화 <주말>의 중간 중간에 삽입된 자막같은 느낌이다. 양장본인데, 같은 출판사인 '도서출판b'에서 전에 나온 <신체 없는 기관>과 책의 외관(표지 디자인 말고)이 좀 흡사한 느낌이다. 본문에 쓰인 종이질은 <신체 없는 기관>에 비해서는 좋은 편이다. 오래 두고 볼 책은 종이질도 꼼꼼히 챙기는 것이 좋다. 나중에 책이 누렇게 바래진 걸 넘기려면 약간 곤혹스러우니까.

번역은 김서영 씨가 맡았는데, 전에 <라캉 읽기>도 큰 문제는 없었던 터라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 본문의 편집은 무난하긴 하지만, 작은제목 등에 쓰인 글자폰트 등 좀 더 세련되고 간단명료했음 하는 아쉬움이 든다. 물론 이런 책의 외양보다 책의 내용이 중요하긴 하지만..

'Routledge Critical THINKERS'시리즈가 우리나라에서도 선을 보였다. 이 시리즈 말고도 'Routledge Philosophy Guidebook'도 좋은 책들이 많은데, 어쨌든 이 출판사는 불교 관련 책에서부터 현대 철학 사상까지 영양가 있는 책들을 많이 내놓는다. <경계에 선 줄리아 크리스테바>라캉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약간 경미한 진동으로 건강한 거리감을 줄 거 같은 여자 '크리스테바'에 관한 간단한 입문서다. 크리스테바의 책들이 의외로 우리말 번역으로 많이 나와 있는데, 쉽지 않은 내용이고 번역도 약간 겁이 나는 상황에서, 일단 이 책으로 한숨은 돌릴 수 있을 거 같다.

그런데, 크리스테바를 건드리면 '라캉과 지젝 or 핑크'쪽에서 생산하는 지식의 색깔과 또 다른 빛깔과 방향을 흡수해야 하기 때문에 지적인 체력에 부담이 될 수도 있겠다. 우선 '바흐친'과 기호학에 대한 업그레이드가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아방가르드 작가들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라캉보다는 문학의 힘을 더 직접적으로 끌어 오는 것 같다. 둘 다 조이스를 특별하게 인용하는데, 이 점도 흥미롭다. 젊은 시절 '누보 로망'에 관한 논문도 썼다고 하는데, 영화적으로 보자면, 알렝 레네와 어떻게든 이어지는 선을 찾을 수 있다(마르그리트 뒤라스를 통해서도).  뭐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다면 그것도 추가다.

옥타브 마노니의 <프로이트>는 부제가 '라깡학파의 프로이트 읽기'로 되어 있다. 어떤 책을 보다가 이 책이 자주 인용되길래 찾아봤더니 다행히 우리말 번역본이 있었다. 책 표지에 이런 말이 있다. "이 책은 프로이트에 대한 '중립적인' 입문서가 아니다. 라깡의 과학주의적 그리고 반 적응주의적 입장의 입문서이다."라고.  슬슬 좀 입맛이 땡기는 사람도 있을 터.. 

 

 

 

 

융의 <연금술에서 본 구원의 관념>은 일단 연금술과 관련된 풍부한 그림들이 눈길을 끈다. 비록 선명하지 못한 흑백의 그림일지라도, 융의 해설과 함께 연금술에 관한 깊이 있는 지식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이 책은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과 연속성이 있는 책이기도 하다. '시공디스커버리총서'에서 나온 <연금술>은 적은 분량의 책이지만, 역시 좋은 그림들이 많이 실려 있다. 어쩌면 내용보다 컬러로 된 신비한 그림들 때문에 손이 가는 책이다. 

<연금술 이야기>는 현재 절판된 책이라서 어렵게 구한 책이다. 여기엔 그다지 연금술 관련 그림들이 많지는 않지만, 내용으로만 보자면, 연금술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제공하는데 가장 적당한 책으로 보인다.  특히 중국에 관한 부분('중국인들의 엘릭시르 탐닉'이란 제목)도 눈여겨 볼 부분이다. 이런 책들이 왜 재출간되지 않는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카메라 폴리티카>

 

 

 

여기 있는 대부분의 책들은 품절이라 지금 새책으로 구하기는 좀 어렵다. <여신들로 본 그리스 로마 신화>는 신간이라 괜찮고, <카메라 폴리티카> 하권은 가능할 것 같다. 류상욱의 <호모 시네마쿠스>는 <영화의 철학과 미학>으로 약간 증보가 되어 다시 나왔다. 이 책은 프랑스 '카이에 뒤 시네마'를 중심으로 벌어진 영화 이론과 작가들을 진지하게 살펴보는 책인데, '시네아스트'의 시선이 녹아 있는 영화책이다. 특히 프랑스 '68 학생 운동'과 관련된 이야기가 흥미롭다.

 

<노자와 도교>

 

 

 

<거북의 비밀>은 중국 고대사회의 신화와 점, 예술 그리고 우주관을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서술도 어렵지 않고, 흥미로운 내용들이 두루 있어서 맛깔스런 책이기도 하다. 김성철 씨의 <중관사상>은 중론, 중관철학에 대한 입문서로 적당해 보인다.      불교 대승 경전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숫타니파타>도 여태 미루기만 했는데, 이번 기회에 읽으려고 산 책이다. 불교 경전은 너무 방대해서 짧은 시간에 뭔가를 얻기엔 막막해 보인다.

이렇게 간단하게 작년 2007년 마지막 두 달에 걸쳐 손에 쥔 책들을 추려서 정리해 보았다. 이런 작업은 내 스스로, '책과의 만남'에 대한 기록으로 시작한 일인데, 어쨌거나, 2008년에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한 두달에 한번은 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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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본문과 관련된 책들

-앨피에서 나온 Critical THINKERS 시리즈 중

 

 

 

 

일단 프레드릭 제임슨과 주디스 버틀러와 관련된 책을 볼 생각이다.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두려워하는가>는 전에 봤는데, 누군가 빌려가서 아무 소식이 없는 책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이 쓴 <언어의 감옥>이란 책을 갖고 있는데, 이 책도 날 잡아서 제대로 읽어봐야겠다.

이젠 슬슬 데리다는 좀 거시기 하고, 바르트는 달콤한 거품 같아서 가끔 톡 터지는 신선한 자극은 있는데, 연속적으로 남는 혹은 쌓이는 맛은 덜한 편이다. 그게 매력이기도 하지만...

 

-악마에 대한 글쓰기-제프리 버튼 러셀의 책들

 

 

 

 

이런 책들 은근히 땡긴다. 사악한 글쓰기가 아니라 '사악함' '악마성'에 대한 글쓰기..

 

-숫타니파타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전재성 씨가 팔리어(빠알리어)에서 우리말로 옮긴 <숫타니파타>도 갖고 있는데, 숫타니파타라는 텍스트의 가장 원형의 소리를 전하려는 노력이 깃든 책이지만, 처음에 보기에는 좀 부담스러울 수 있다. 우리말 해석과 밑으로 각주로 원문이 빼곡하게 있기 때문인데, 가독성에 좋은 구성일리 없다. 하지만, 나중에라도 왜곡되지 않은 원래의 의미를 알려면, 이 책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초기 불교의 香! 석가제존의 직접적인 소리가 담겼다는 책이니만큼, 일독의 가치가 있는 경전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책들

 

 

 

 

 

 

 

 

아.. 줄리아 크리스테바.. 이 여자의 책들도 탐닉하려면, 긴 여정이 필요할 듯.. 탁월한 이론에서부터 소설까지 강렬하게 뻗는 글의 힘이 예사롭지가 않다.  마치 오랜만에 만나보는 무시무시한 내공을 지닌 여인무사가 아닌가? <영웅문>의 '매초풍'이 주는 섬뜩함이 중국무림이 아닌, 지적 시공간에서 이 여자를 통해서 뚜렷한 물결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이 여자의 소설 중에 <사무라이>도 있지 않던가. 근데 요새 통 보이질 않는다.

솔출판사에서 <무사들>이란 제목으로 다시 나왔는데, 이마저도 품절이다. 그 외 <언어 그 미지의 것>, <사랑의 역사>, <사랑의 정신분석>, <포세시옹> 등도 이젠 새책으로 찾기 힘들다.

우선 초기 대표작으로 그녀의 기호분석이 등장하는 <세미오티케><시적 언어의 혁명>이 필수로 보인다. 최근에 (원대한) 기획성이 농후한 천재적인 여성 3명-한나 아렌트, 멜라니 클라인,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를 다룬 책이 있는데, 그 중에서 멜라니 클라인에 관련된 책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다. <정신병 모친살해 그리고 창조성>이란 제목을 가진 책인데, 알라딘에서는 아직 보이질 않는다. 멜라니 클라인은 라캉하고 '번역 문제'로 나중에 심기가 안 좋았다고 하는데, 크리스테바한테는 존경의 대상으로 모셔지고 있다.

멜라니 클라인에 대한 책은 그 밖에 <멜라니 클라인>이 있고, <위대한 7인의 정신분석가>에서도 그로덱, 위니코트 등과 함께 짧게 다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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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당신의 추천 영화는?

그대

빛나는 것이라고 무조건 넋을 빼고 바라보지 마라

그 보잘것 없는 부스러기는 당신의 을 기다렸다

그 유혹에, 무심코 그것을 클릭하는 순간

운명의 프로그램은 어김없이 작동한다

대개 뭇사람을 유혹하는, 사람의 내재된 욕망을 은밀하게 꾀는 시스템은

그에 맞는 쾌감을 선사하는데, 그것은 보통의 즐거움보다 몇 갑절 큰 것으로

당신이 원하지 않지만 원하는 타나토스(의 영상)를 선사할지도 모른다

시스템적으로 말하자면, 파국(Catastrophe)이다

...

시스템에서 질서가 더는 감당 못하는 지나친 쾌감은

못된 작은 구멍의 급류에 휩쓸려 빠져 나갈 것이다. 

 

매력적인 여배우 키이라 나이틀리가 세실리아 역으로 나오는 영화 <어톤먼트(atonement)>는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는 너무도 단순한 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시각'은 각 개인에게는 너무도 사실적이라 하더라도, 우리 모두에게 다 그러한 것은 아니다. 각 유기체의 독특함 만큼이나 마음의 작용도 미묘한 차이들이 있다. 그래서 사람 사는 세상에는 온갖 오해들이 소울 메이트가 꿈꾸는 투명한 소통의 다발들을 부지런히 오염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어린 소녀가 있다. 브리오니라는 이 소녀는 을 통해 저 아래에서 언니와 젊은 일꾼의 묘한 행동을 우연히 보게 된다. 짧은 무성 영화같기도 한 장면인데, 두 인물의 모습은 극단의 감정이 실렸는지 동작이 크고 거세다. 그리고 물에 옷이 흠뻑 젖은 여자의 모습에서 성적 코드는 무리없이 자리잡는다. 어떻게 보면, 두 연인의 감정싸움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감정이 복받쳐 씩씩 거리는 이 여자가 바로 세실리아고, 젊은 일꾼은 그래도 명문 의대를 다니는 장래가 유망한 로비라는 청년이다(뭐 우리나라 드라마로 치자면, 사장집에 얹혀 사는 공부를 잘하는 운전기사의 아들 정도..).  

영화는 친절하게도 소녀의 시선에 잡혔던 광경을 다시 한번 '실제는 이러했다'는 식으로 보여준다. 사실?은 아직 두 남녀는 서로 시큰둥한 사이였고, 세실리아가 오빠가 집에 오는 걸 환영하기 위해 연못에서 꽃병을 씻어 꽃을 넣으려고 하는데, 로비가 옆에서 도와준다고 설치다가 작은 사고가 난 것이다. 꽃병에서 살짝 작은 조각이 떨어지면서 연못에 풍덩 빠져버린다. 그 꽃병을 건지려고 세실리아는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이고(그래서 물에 흠뻑..), 그리고 격분해서 로비를 신경질적으로 밀치고 집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니까 브리오니가 창을 통해 불확실하지만 대충 받아들인 인상하고는 많이 어긋난 이야기다. 즉 방의 창문은 이 어린 소녀에게는 하나의 필터 역할을 한 것인데, 그것은 그녀의 마음 속에서도 동시적으로 하나의 결론을 도출하는 오해의 필터를 제공한다. 하지만 어쨌든, 그녀는 스스로 미진하지만 하나의 이해에 도달한 것이다.

하필 왜 그런 인상을 받았을까? 순전히 제한된 정보로 인한 우연이라고만 볼 수 없는게, 영화를 계속 보면 알겠지만, 과거에 이미 브리오니의 마음에는 그런쪽으로 흘러갈 만한 싹(로비에 대한 감정)이 뿌려져 있었다.

 

벌써 두시가 넘었다. 나머지는 내일 써야지.

자기 전에, 이 영화의 원작이 바로 이언 매큐언(Ian McEwan)의 속죄(Atonement)라는 소설이다. 아직 소설은 보지 못했지만, 영화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느낀 건, 어떤 우연의 짧은 순간에 잠복해 있는 운명의 갈래질에 대한 묘사가 꽤 섬세하고 순발력이 있는 거 같다. 그래서 아주 커다란 사건이 아니더라도, 그 마디 마디를 잇는 운명의 힘이 소리 없이 보는 사람의 가슴에 두터운 흔적을 남긴다. 그래서 결말이, 아니면 늙은 할머니가 된 소녀의 고백이 설득력을 갖는지도 모르겠다.

 

 

 

 

  이언 맥큐언(이안 맥이완?)의 소설들.

  많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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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은 물과 같단다 - 라틴어린이환상동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카르메 솔-벤드렐 그림, 송병선 옮김 / 좋은엄마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라틴아메리카에는 사람이 살고, 당연히 어린아이들도 있어, 골목길에서 반바지 차림으로 기대어 서성이거나 누비고 다닐 것이 뻔하다. 알갱이 작은 황토빛 먼지와 여기보다 더 강한 태양이 내리쬐는 곳에서...

그런데, 언뜻 라틴아메리카와 동화책을 함께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어린아이가 있는 곳이라면 그들의 작은 손에 펼쳐질 동화책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인데도 말이다. 우리에겐 아직 그곳이 낯설어서인지 사람사는 풍경의 공간에 딱히 들어갈 내용들이 아직 분명하게 잡히질 않나보다. 다만, '그들도 우리처럼..' 그런 막연함으로 일본이나 미국과는 다른 이국적인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니 '라틴어린이환상동화'로 나온 이 책을 처음 손에 쥐고는 여느 책처럼 "음.. 새로운 읽을거리군"라며 그냥 책장을 넘기게 되진 않았다. 잠시라도 "이건, 또 어떤 세상일까? 어떤 다른 맛일까?"하는 기대감과 설레임이 작은 거품 만큼이라도 생기게 마련이다. 거기에다 마르케스의 동화라니..

기다림에 비해 만남의 시간이 너무 짧을 때가 있다. 이 동화 속의 형제 토토와 조엘의 짧고 친근한 이름을 막 귀에 넣고 미지의 여행을 즐기려는데, 벌써 책의 두터운 뒤 겉장이 손에 잡힌다. 환상은 짧아야 제 맛인가?

토토는 아빠를 졸라서 집에 보트를 들여놓는다. 학교에서 공부를 잘한 대가로 받은 선물인데, 과연 이 보트는 눈요기 말고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 물론 어른들에겐 그렇지만, 아이들은 또 다르다. 무엇보다 토토는 수업 시간에 어느 시인이 '빛은 물이 될 수 있다'고 한 말을 기억한다. "빛은 물과 같단다.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오는 것과 같은 거지."

토토와 조엘에게는 과학자보다 시인이 더 현실적인 사람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환상일지라도.. 어쨌든 예상했겠지만, 토토의 5층 집 안은 부모가 영화를 보러 나가는 사이, 전등에서 바닥으로 쏟아진 빛이 바다를 이루어 보트는 둥둥 뜨게되고, 두 형제는 노를 저으며 미지의 항해, 환상의 여행을 하게된다.

그러나 아무리 달콤한 것이라도 단 한번이라면 아쉬운 법이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욕망은 어른들처럼 세속적이진 않더라도 결코 무시할 게 못된다. 빛 위를 타고 가는 것은 해봤으니, 이젠 물안경까지 끼고 빛물 속으로 뛰어들고 싶어 간잘간질해진다. 그리고 부모는 어김없이 매주 하루는 영화를 보러 자리를 비운다. 그러니 어쩌랴..

토토와 조엘의 더 깊어지는 빛물의 여행은 어떻게 될까? 그 환상으로 얼룩진 마지막 몇 장은 남겨두고 나도 이 짧은 동화책에서 빠져 나와야 할 거 같다. 역시나 라틴아메리카 동화책은 색다른 맛이 있었다. 쇼파 위에 걸터앉아 자신들의 환상을 훔쳐보는 우리들을 쳐다보는 듯, 눈매가 인상적인 노란색 고양이의 그림들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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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달 전부터 레드제플린의 재결성 공연이 있을거란 소식이 있었다. 물론 재결성은 아니고, 아틀랜틱 창립자의 추모공연을 위해 하루 동안 일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사망한 존 본햄 대시 아들 제이슨 본햄이 드럼을 맡았다). 원래는 11월에 할 예정이었는데, 지미 페이지의 약간의 부상으로 연기, 2007년 마지막 달인 12월 10일 영국 아레나에서 드디어 펼쳐졌다.

다행히 공연 동영상이 인터넷에 돌아다녀서, 여러 곡을 맛볼 수 있었는데, 환갑이 넘은 그들이 과연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염려가 컸지만, 의외로 괜찮았다. 아마 어느 정도는 기술적인 도움(특히 마이크 관련)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인터넷 뉴스를 종합해 보면, 약 2만 장에 가까운 티켓은 구매 웹 사이트에 천만 명이 넘는 접속의 폭주로 그들의 전설이 지금도 여전히 위력을 떨칠 수 있음을 보여줬다.  그리고 이날 공연장에는 폴 메카트니를 비롯 믹 재거, 데이빗 길모어, 로저 테일러 등이 찾아왔다고 한다. 그러니까 레드제플린의 짤막한 부활을 감상하려 그들과 같이 영국 락의 황금기를 이끈, 비틀즈, 롤링 스톤즈, 핑크 플로이드, 퀸의 멤버들도 함께 한 것이다. 또 야드버즈에서 같이 활동했던 마당쇠 코를 가진 제프 벡의 모습도 반가웠다. 한편으론, 에릭 크랩톤도 왔으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을 해본다. 이 외에도 제네시스와 오아시스의 멤버와 스티븐 윈우드, 마릴린 맨슨도 왔다는 소식도 들린다.

무대의 시작은 작은 구형 텔레비젼에서 과거 레드제플린의 역사적인 활약을 소개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영상과 함께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이어서 무대 스크린에 흑백으로 그들의 1집 첫 곡이기도 한 'Good times Bad times'가 흥겹게 울린다. 물론 그 스크린 앞에는 정말 레드제플린의 살아 있는 연주가 펼쳐지고 있고...

 

레드제플린이 해체된 후에도, 로버트 플랜트와 지미 페이지는 잠시 만나 앨범도 만들고, 공연도 하곤 했다. 이들의 이런 모습이 반가우면서도 좀 아쉬웠던 건, 존 폴 존스의 모습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멤버들의 빛에 가려지긴 했지만, 존 폴 존스는 거의 모든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다재다능한 연주자다. 기본적으로 베이스 기타를 맡고 있지만, 'No Quarter'에서의 건반 악기의 활용은 비범해보이기까지 한다. 그리고 활동 당시엔, 단발 머리 비슷한 모양으로 수줍고 얌전해 보였는데, 이번 공연에서는 아주 짧고 시원한 얼굴로, 오히려 다른 멤버들을 압도하는 외모를 선보였다.

 

 

 

 

 이런 와중에 제플린의 베스트 앨범이 나와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디지털로 리마스터링한 앨범으로 과거에 나온 베스트와는 차별성을 갖는다. 그리고 로버트 플랜트는 그래미에서 '최우수 컨츄리 앨범상'을 받기도 한 앨리슨 크라우스와 2007년에 <Raising Sand>라는 앨범을 통해 좋은 평을 받았다. 나도 들어봤는데, 레드제플린의 로버트 플랜트를 기대하지 않는다면, 잔잔하고 흥겹게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첫 곡 'Rich Woman'과 'Goen Gone Gone' 그리고 'Through The Morning, Through The Night'이 눈에 띈다. 이 앨범은 여러 매체에서 올해의 앨범에 꼽히기도 했다.

어쨌든, 제플린.. 그들의 귀환은 세계 수 많은 락의 매니아들을 2007년 연말에 들뜨게 한 하나의 사건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백발의 늙은 사자의 포효는 뭔가 아스라한 감정을 일으키키도 한다. 그들 전성기 시절, 젊음이 넘치는 모습과 대비가 되면 더욱 그러하다. 오른쪽 허벅지 위가 약간 터진 청바지를 입고 가슴을 풀어 헤치고 마이크를 잡고 소리치던 그 젊은 사자는 어디로 갔을까?

 

 

 

 

 

 

 

<- 어떻게 제플린과 맘보킹이란 영화를 한 데 묶어서 디브디로 내 놓을 수 있는지..

 

 

 

최근에 기술이 많이 발전하면서 과거의 음원을 새롭게 복원하는 작업이 활발하다. 레드제플린의 앨범도 그런 작업을 통해서 나오기도 하는데, 좀 더 깨끗한 음색을 선호한다면 고려해 볼 일이다. 그런데, 제플린의 음악은 약간 입자가 굵은 덜 가공된 느낌의 맛이 매력이기도 하다. 프로듀서를 맡기도 한 지미 페이지는 음악에 대한 완벽성이 있는데, 그것이 음악의 전체적인 완성도를 말하는 것이지, 아주 투명하고 분명한 음을 구현하는 것은 아닌 듯 하다. 물론 프로그래시브 밴드 예스의 앨범이라면 이런것도 필요할테지만... 

이들의 공연 실황이 담긴 <The Song Remains The Same>도 전과 딴판으로 아주 새롭게 복원해서 곧 나온다고 하는데, 관심이 있는 살람들은 한번 기다려봐도 좋을 듯 싶다.

어쨌든, 어떤 옷을 입고 나와도 레드제플린의 고공침투를 허락하는 매니아들은 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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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크리 - 라캉으로 이끄는 마법의 문자들 e시대의 절대사상 29
김석 지음 / 살림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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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은, 라캉의 글은 애매모호하다.

라캉의 입장에선 분명하고 명료한 주장은 오히려 병을 앓고 있는 진리일 가능성이 높다. 즉 우리 인간은 진리를 통째로 먹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니 먹었다고 하더라도 우리 유기체의 소화 흡수 능력이 닿지 않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의 글이 미로와 같고, 모호하다면, 그것은 읽는 자의 눈을 해메게 만들어 그 꼴을 즐기려는 천재의 장난질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저 멀리 그것?!에 닮으려는 전략적인 글쓰기라고 보면 되지 않을까? 가령 입자적인 분명함(코키토적 주체가 선호하는)을 포기하는 대신 파장이라는 (중층적으로 꼬인) 역동적인 긴장감은 보존하려고 말이다. 

 

또 한 권의 라캉에 대한 입문서가 나왔다. '라캉으로 이끄는 마법의 문자들'이란 부제를 가진 <에크리>인데, 라캉에서 좀더 클로즈업해 들어가 '에크리'라는 텍스트에 초점을 맞춘 책이다. 책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른 라캉 입문서들과 큰 차이는 없다. 그러나 전혀 색다른 라캉의 출현을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책들에서 좀 아쉽게 다룬 부분을 약간 지그시 눌러 보기 좋은 윤곽을 만들기도 한다.

글쓴이도 라캉의 애매모호함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에 나름대로 가치를 부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라캉을 알기쉽게 설명하는 책이니 만큼, 그의 "모호함을 즐겨라!"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설명 과정에서 라캉 이론의 중층적인 매듭을 잠시 풀어서 좀더 단순하고 명확한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이러한 것들은 라캉의 진면목을 전달하는 최상의 방법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라캉 입문자들에겐 효과적일 수 있다. 어렵고 복잡한 문제는 기본적인 내공이 쌓이고 나서 나중에 어차피 맞닥뜨려야한다. 그렇다면, 라캉의 기이하게 살찐 주름진 살들의 부피를 억지로라도 약간 죽일 필요는 있다. 이런 차원에서 이 책을 읽는다면, 라캉과 어울리지 않는 명료함들도 잠깐의 효과적인 디딤돌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라캉의 중요한 이론인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를 다른 (입문 성격의) 책들에선,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중요성이 넘어오는 것을 강조하고, 대개 상징계에 대한 비중이 높은 편이다. 그러나 이 책은 라캉이 <에크리>라는 책 이후에 상징계보다 실재계를 더 중요하게 다룬 것과 어느 정도 맥을 같이 한다. 그래서 상상계-상징계-실재계에 대해서 어떤 과정으로 중요성이 옮겨가고, 또 최후에는 세 가지를 다시 동등하게 인정하기도 하는 등 이론의 미세한 변화를 어느 정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 책에 또 다른 장점이 있다면, 바로 라캉 공식과 도식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영향으로도 보이는 수학소의 활용은 라캉이 말년까지 고심한 문제였던 것 같다. 이것이 예전에 앨런 소칼의 <지적 사기>라는 책에서 라캉을 비판하는 큰 빌미가 되었다. 어쨌든, 이 책에서는 136쪽에서 '부성 은유의 공식'은 물론, 194쪽부터 시작하는 '욕망의 그래프'에 대한 설명도 친절하고 상세한 편이다.

 

라캉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아버지의 이름'을 통해 정착한 상징계에서는 '주체 분열'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끊임없는 욕망의 운동이 발생하고 '빈 껍데기'를 마치 성배를 찾듯 헤맨다. 이런 '주체의 오디세이'는 주이상스를 통해 흘깃 그것이(실재) 있음을 어렴픗이 느낄 뿐이다.

그렇게 신나는 오디세이가 아님에도 왜 이렇게 라캉의 텍스트는 우리를 유혹하는 것일까? 그래서 나도 라캉을 통과한 또 하나의 미끼, 이 책을 물었으니 말이다. 라캉에서 배운 걸 써먹는다면, 이런 비유도 가능하다. 라캉의, 라캉에 대한 책을 내가 고른 것이 아니라, 나는 이 작은 책의 덫에 걸려 든 것이다. 거기다가 이 책의 부제에 '마법'이 들어가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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