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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들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1
정소현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10월
평점 :
이 책은 레삭매냐님의 서재에서 알게 된 책이다. 도서관 신착도서 자리에서 만났을 때 제목이 눈길을 끌어 한 번 쳐다보기는 했는데, 처음 보는 작가라(죄송합니다, 작가님) 패쓰했는데, 레삭매냐님 리뷰를 읽고 관심이 생겼다. 주말에 도서관에 갔더니 아직도 그 곳에 얌전히 자리하고 있기에 얼른 대출해 왔다. <작가의 말>에서 정소현이 말한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피해자라고 말했다.
이상하게도 가해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 상황이 무서워 그곳을 영영 떠났다.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일까. 이 소설은 ‘미안하다’고 말하던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아파트라는 공동 건물이 가진 한계와 나만의 공간을 침범해 들어오는 소음이라는 가볍고 두려운 폭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1111호 윤서엄마는 결혼할 당시만 해도 명랑하고 싹싹한 여자였다. 전처의 아들, 시어머니까지 감싸 안으며 예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애썼다. 딸 윤서를 낳은 후에도 좋은 아내, 좋은 엄마, 좋은 며느리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며느리를 믿지 못 하고 의심하는 시어머니와 시어머니와의 갈등을 모른 척 하는 남편으로 인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던 중, 아이를 낳고 8년이나 지난 후에 심각한 산후풍을 앓게 된다. 한기 때문에 냉장고도 열 수 없는 극한 상황에 내몰려 집에서만 생활하던 윤서엄마는 시어머니의 분가 이후, 시어머니와 친했던 1211호 진이 이모 손자들의 층간소음을 더는 참을 수 없어한다.
가해자이면서 피해자라는 말은, 피해자들에게 전적으로 가혹한 말이다. 귀책사유가 95인 사람과 귀책사유가 5인 사람이 싸우고 있을 때, 현재 상황으로는 둘이 싸우고 있으니 너희 둘 다 잘못이다,라는 말 역시 그렇다. (예: 귀책사유 95의 윤총장과 귀책사유 5의 추장관) 더 잘못한 사람(윤총장)이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가 얼마나 흐릿한지를 보여주는데, 가장 약한 고리의 피해자가 아파트 위층에 산다는 이유로 가해자가 되고, 무조건 피해자인 아래층이 윗집의 횡포 때문에 옆집의 가해자로 변해가는 과정이 소상하게 그려진다.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이들이 모두 여성이라는 점도 유의해서 볼 만하다. 1111호 윤서엄마는 산후풍으로 9년 가까이 침대에만 누워있는 상태이고, 1211호 진이 이모는 오후에 손자 5명을 돌봐주는 외할머니이자 친할머니이다. 1011호 주부는 배앓이중인 신생아를 돌보는 초보엄마이다. 원하던 원치 않던 이제는 자신의 집에 갇혀 버린 그녀들. 휴식과 재충전의 장소이자 화목한 스위트홈은 이제 감옥이 되어, 감옥에 갇힌 그들은 결국 하나 둘 미쳐간다. 들리지 않은 소리를 듣고, 고통을 주는 윗집과 옆집, 아랫집을 향해 음악을 틀어 대고, 발로 쿵쿵대고, 급기야는 우는 아이를 안고 소파위로 올라간다. 아이의 시끄러운 울음 소리를 윗집에 잘 들리게 하려고.
각 가정의 이야기는 너무나 뻔하고 흔한 거라서, 오히려 슬펐다. 가족이라는 굴레, 시어머니의 질시, 재혼 가정의 갈등, 초보 엄마의 괴로움까지. 집에 갇힌 그녀들의 한숨과 슬픔이 너무나 생생했다. 아파트에 살고 있는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아이를 낳는 순간부터 가해자이며 피해자였고, 어린 아이가 둘이라 ‘죄송합니다’를 입에 달고 살았다. 1211호 쌍둥이 엄마의 대사는 내가 한 말 그대로다.
“… 인터폰 주신 뒤로 저희는 더 조심하고 지내요. 아이들까지 층간소음 방지 슬리퍼를 신겼어요. 그런데 또 인터폰을 주셔서 좀 당황스러웠어요. 그때도 관리실에 말씀드렸지만, 한번은 애들이 앉아서 숙제하는 중이었고, 한번은 애들이 학원에 있었고 저는 소파에 앉아 있었거든요. 오늘도 오전에 외출했다가 이제 막 들어오는 길인데 이렇게 올라오셨네요. 지금 무슨 소리가 들리신다면 그건 우리 집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에요. 옛날이랑 달라진 것도 없는데 갑자기 이러시니 저희도 좀 당황스럽지만 죄송한 일은 죄송한 거고 아닌 건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요. 저희도 신경 쓰고 조심하고 있으니 그쪽에서도 예전처럼 배려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