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아주 천천히 읽었다. 한 문장을 읽고 다음 문장을 읽었다. 아니, 단어 단위로 쪼개어 읽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읽었다. 내가 좋아하는 실체가 샬롯 브론테인지 아니면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인지를 확인해야 했다. 위대한 작품은 작가의 예상을 뛰어넘고 작가가 의도한 바를 넘어선다고 생각해왔다. 위대한 작가라는 말보다 위대한 작품이라는 말이 더 정확한 말이라 생각했다. 샬롯 브론테의 가장 위대한 작품은제인 에어』가 되어야 했기에 나는, 『빌레뜨』를 아주 천천히 읽었다. 소설 속에서 그녀도 모르는 흠결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얼마 되지 않아 나는 금방 소설 속으로 빠져들었다.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이, 트렁크 하나 들고 상복을 입은 채, 런던으로 향하는 가련한 주인공이 되어 버렸다.

 

 

내 처지가 유령처럼 날 덮쳐왔다. 나는 아무 데도 어울리지 않고 쓸쓸하고 희망이 없는 처지였다. 이 거대한 런던에서, 여기서 혼자 무얼 하고 있는가? 내일은 뭘 해야 하는가? 내 인생에 무슨 전망이 있는가? 이 세상에 친구라고 누가 있는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어디로 가야 하나? 무엇을 해야 하나? (70)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혼자 여행하는 여자가 흔치 않던 시대였다. 수수하다 못해 초라한 차림의 젊은 여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일자리를 찾아 타지로 먼 여행을 떠난다. 두려움을 이겨내려고 애쓰는 그녀의 내면에서 오히려 강인함이 느껴진다.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그것을, 그녀는 가지고 있다. 더 안전한 세상, 더 개화된 세상을 살면서도 난 아직도, 세상에 대해 두렵고 떨린 마음이다.

 


 

침착하게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주인공은 요행을 바라지 않는다.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에게 필요한 일들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 중의 하나가 외국어 공부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미루거나 서둘지 않으면서 꾸준히 외국어를 공부했고, 꼭 필요한 순간에 그 외국어를 이용해 자신의 처지를 바꿔나갔다. 베끄 부인과 주인공의 대화는 자주 프랑스어로 이어졌기에, 원문에 프랑스어로 표기된 부분은 각주에 ‘()’라고 표시되었다. 이런 식이다.

 

 




프랑스어를 아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샬롯 브론테가 전하고자 했던 느낌을 좀 더 세밀하게 가늠할 수 있었을 텐데. 『나혼자 끝내는 독학 프랑스어 첫걸음』도 마치지 못한 사람은 하릴없이 각주만 쳐다본다. 후회는 이제 그만. 다시, 루시 스노우가 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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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6 2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0-06-16 20:42   좋아요 0 | URL
👍🏼👍🏼👍🏼🎉🎉🎉🎉🎉 정말 대단하십니다!!! 제가 아는 단어로는 이런게 가끔 나왔어요.
Bon soir!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