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색 손가락이 바를 잡았다.

열 번째를 넘기면서부터 그 리듬이 차츰 흐트러졌다. 하지만 여자는 끝내 같은 동작을 열두 번 반복했다.
"좋았어!"

"어둠 속 생활도 이제 곧 끝이야. 너는 빛으로 나간다. 그렇게 세상을 바꾼다. 장애물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아. 내가 어떻게든 해볼 거다. 그것만이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네 애정에 답하는 거니까."

"제군들, 도둑놀이는 끝났네."

이 방에 갇혀 있는 것이 지금까지 그녀의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기다리면 언젠가는 문이 열린다. 그렇게 믿었다. 그가 죽은 지금도 그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야마나시 현경은 돌연 부산해졌다. 부검 결과로 화재사건이 갑자기 살인사건으로 다뤄지면서 관할 경찰서에 수사본부가 설치되었다.

남자의 이름은 센도 고레노리였다. 나이는 56세, 본적지는 나가노 현 마쓰모토 시.

경부(警部, 한국 경찰의 경감, 경찰서 분서장이나 과장·과장대리직·본부 계장 직책을 맡는다)

순사부장(巡査部長, 한국 경찰의 경장, 경찰서 반장 직책을 맡는다)

순사(巡査, 한국 경찰의 순경)

"여기에 누군가가 갇혀 있었다는 건가요?"

"정말 그래. 하지만 저 동네 사람들은 재미있지만은 않을걸. 권총을 가진 범인이 어슬렁거린다고 생각하면 편안히 잠들 수 없을 거야.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저 근처는 얼씬도 하지 말아야겠어."

"그건 아마…… 센도의 비밀병기일 거야."
"비밀병기? 그게 뭔데?"

여자는 경찰관을 죽이고 ‘우리’를 빠져나온 뒤 조금 떨어진 빈 별장에 숨어들었다. 옷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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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유럽 각국이 산업화로 엄청난 경제 성장을  이루었음에도 신대륙 아메리카로 떠나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진 까닭은?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머나먼 나라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돈을 벌기위해 떠난 엄마. 안타깝게도 일 년도 지나지않아 엄마에게서 소식이 끊어졌다. 열세 살소년 마르코는 반드시 자기 힘으로 엄마를 찾겠다며 삼만리 장대한 여행길에 나섰다.

<엄마 찾아 삼만리>의 원작은 이탈리아 작가 에드몬도 데 아미치스(Edmondo De Amicis)의  동화 『쿠오레 (Cuore)』에 실린 단편 ‘아펜니노산맥에서 안데스산맥까지‘다. 이 책은 1886년에  출간되었는데, 당시는 바야흐로 ‘이민의 시대‘였다.

같은 시기 런던 - 콜카타 간 황마 가격 차이는 35퍼센트에서 4퍼센트로 줄었다. 이렇게 가격 차이가 줄어든 원인은 증기선으로 대량 운송이 가능해지고 운송 시간 또한 단축되면서 운송 비용이 감소했기 때문이었다.

상품, 노동과 더불어 국경과 바다를 넘어 활발하게  이동한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자본이다. 영국으로 대표되는 유럽의 몇몇 국가와 미국이라는 소위 ‘잘나가는 국가‘는 해외, 특히 가난한 나라에 거액을 투자했다. 같은 액수를 투자했을 때 가난한 나라에서큰 수익을 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줄줄이 독립하게 된 요인 중 하나는 주요 통상 상대가 영국으로 바뀌면서 종주국과의 경제적 유대가 약해졌기 때문이라고 추정할 수있다. 여기에서도 역사를 바꾼 건 해운, 즉증기선의 힘이었다.

‘헤게모니 (Hegemonie)‘라는 말을 흔히 들어봤을 것이다. 헤게모니는 주로 ‘패권‘으로 번역되는데 ‘압도적인 지위와 힘으로 주변을지배하는 권력‘을 의미한다.

경제사의 관점에서는 그 답을 ‘수수료‘라고본다.

사람보다 물건보다 빠르게

왜 전신을 영국 헤게모니의 중심축이라고하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세계 무역 결제가 전신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19세기 말에 들어서면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 사이에 불과 1.8일이면 정보를 전달할 수있게 되었다. 즉 정보가 인간과 상품의 아동(물류)보다 훨씬 빨리 전달되게 된 셈이다.

세계 전신망의 중심에 런던이 있었다. 이는 국제 거래  결제가 대부분 런던에서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결국 결제 시스템을 장악한 자가 상업의 규칙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세기 말에 금본위제가 국제적 표준으로 확립되었는데, 그 시작은 1816년 단행한 영국의 화폐법이었다. 영국의 기준을 세계가 받아들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헤게모니 국가가 가진 막강한 권력이다.

일대일로 정책은 단순히 말하면 중국이 중,
심이 되어 유라시아대륙을 통합하려는 시도다.

재미있게도 이 정책을 세계사 속에 대입해보면 15세기 초 명나라 환관 정화가 갔던 대원정 경로를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다<지도23>. 또 17세기 아르메니아 상인이 구축한상업 네트워크와도 겹친다<지도 24>.

정화와 아르메니아 상인이 오간 바닷길이나 내륙을 연결한 실크로드는 기본적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상인들이 자발적으로 형성한길로,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개척한 길이 아니다.

일대일로 정책은 군사적 목표를 설정하지않았다. 일대일로 정책은 크게 에너지, 안전, 시장이라는 세 가지  항목으로 분류된다. 다양한 운송로와 항만 시설이 무역을 촉진하고 안전을 개선해 시장을 확장하려는 시도다.

‘자국 우선주의‘의 한계에 부닥친 중국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직접 일하지 않아도 돈이 저절로  들어오는 구조를 만든 사람이 부자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면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그것이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본주의 속성을 국가에 대입한 것이 바로 헤게모니 국가다.

중국의 목표는 모든 것을 중국이 통제하는중화 시스템으로 보인다. 이 시스템은 중국인의 사고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어 쉽게바꿀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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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읽는 세계사 - 세계사 중심을 관통하는 13가지 질문과 통찰력 있는 답변
다마키 도시아키 지음, 서수지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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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떠오른 사람은 전두광이었다.
3ㅇ교육대

영국 해군은 ‘강제 징집(press gang)’이라는 상당히 험한 징집 제도를 시행했다. 전쟁이 터지면 승조원을 강제로 징집한 것인데, 쉽게 말해 길에 지나다니는 장정을 붙잡아 배에 태우는 식으로 군인을 보충한 것이다. 이렇게 끌려온 사람 중에는 부랑자가 많이 포함되어 있어 전쟁이 나면 실업자가 줄고 범죄율이 떨어진다는 보고가 있을 정도였다.


한 권으로 읽는 세계사 : 세계사 중심을 관통하는 13가지 질문과 통찰력 있는 답변
| 다마키 도시아키 저/서수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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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과연 ‘역사의 페이스메이커’였을까?

15~16세기는 물론이고 18~19세기까지 세계 경제에서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두 나라, 포르투갈과 스페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아시아와 아메리카대륙 진출의  선두주자였을 뿐 아니라 15~16세기에 세계 경제를 하나로 만든 ‘글로벌리제이션(globalization)‘을 추진한 나라였다. 당시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영향력은 상상 이상으로 막강했다. 두 나라는 18~19세기에도 여전히 세계 경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세계를 제멋대로 양분한 두 개의 조약, 토르데시야스 조약과 사라고사 조약

한편 스페인은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계기로 아메리카대륙을 차근차근 정복했다. 그 결과 브라질을 제외한 중남미 대부분의 지역이 스페인 영토가 되었고 오늘날에도 이 지역의 공용어는 스페인어다. 이 지역을 흔히 ‘라틴아메리카(Latin America)‘라고 부르는데 이는 ‘라틴족의 아메리카‘라는 의미다. 라틴아메리카는 ‘이베로아메리카(Iberoamérica)‘라고도 하며 여기서 ‘이베로‘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자리한 이베리아반도를 말한다.

1494년 이 경계선을서쪽으로 1,500킬로미터 옮기는 일에 양국이 동의하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체결된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1494년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스페인의 토르데시야스에서 만나각자의 세력 확장 범위를 확정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이는 전 세계를 두 가톨릭 세력이 제멋대로 나누어 먹은, 현대인의관점으로는 믿기 어려울 만큼 황당하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결정이었다.

아무튼 가톨릭의 기준에서는 가톨릭을 대표하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세계를 사이좋게 나누어 가진 셈이었다. 로마 교황이 세계를 제멋대로 분할할 수 있었던 논리의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세계는 신(기독교의 하느님)이 창조했으며 그것을 관리하고 다스릴 권리를 로마 교회가 상속받았다는 믿음과 교리가 바로 그것이었다.

물리적인 영토의 너비와 산업국 여부를 가지고 한 나라의 국력을 판단하는 것은 산업자본주의 관점, 제국주의 관점의 역사관이다. 이는다소 편협한 시각으로, 한나라의 국력을 그 시대 관점에서 국제적으로 평가할 때는 교역에서 얼마나 우월한 지위를 차지했는지, 국민 소비 생활은 얼마나 향상되었는지 등과 같은 다른 기준도 함께 적용해야 한다.

1571년 오스만제국을 격파한 레판토해전,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 해군에게 무참하게 패배한 칼레해전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투가 모두 펠리페 2세 시대에 일어났다.

사실은 ‘좀처럼 쇠퇴하지 않은 두 나라‘
포르투갈과 스페인

마찬가지로 대서양 노예무역에 있어서도 기존에는 영국 선박이 노예무역의 상당 부분을 담당했다고 알려졌으나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흑인 노예를 가장 많이 운송한 것은 포르투갈 선박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16~19세기에 영국이 실어 나른 노예는 326만여 명이던 데반해 포르투갈과 브라질은 585만여 명에 달했다.

포르투갈은 사탕수수를 대규모 플랜테이션으로  생산하는 방식을 최초로 완성했다.  이 과정에서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아프리카에서 포르투갈령 브라질로 대량의 노예를 끌고 왔다.

천재 수학자 페르마가 고안한 ‘확률론‘이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보험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가입하는 보험료율은 사고와 재해 등이 어느 정도 확률로일어날지를 예측해 보험사에서 결정한다. 이를 판단하기 위한 데이터 준비 작업이 ‘통계‘이며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을 계산하는 작업이 ‘확률론‘이다.

그러한 확률론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 페르마다. 여기에 또 한명의 천재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이 힘을 보탬으로써 확률론이 완성될 수 있었다.

죽을 때까지 한 번도 만나지 않고 오로지 편지로만 확률론 분야를 함께 개척한 두 천재, 파스칼과 페르마

확률론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 페르마다.  여기에 또 한 명의 천재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이  힘을 보탬으로써 확률론이 완성될 수 있었다.

파스칼이 편지를 보낸 이후 100년 사이에 평균여명표가 영국 종신연금의 기초가 되었고 런던은 해운 보험 사업의 중심지로 거듭났다. 만일이 보험이 없었다면 해운업은 거대한 리스크를 감수할 수 있는 부유층의 독점 사업으로 남았을 것이다.

해상 운송 사업에서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를 분담하기 위한 한자동맹의 시스템, 파르텐레더라이

일회성 사업을 기본으로 여긴 중세 상인은 보험제도와는 다른 리스크 헤지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 한 예가 한자동맹에서 활용한 ‘파르텐레더라이(Partenreederei)‘로, 일종의 파트너십이다.

흥미로운 것은, 19세기에 이르러 큰수의 법칙이 사회 기본 법칙으로 여겨지게 된 일이다. 벨기에 수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아돌프 케틀레(Adolphe Quetelet)는 ‘사회 물리학(Social Physics)‘이라는 이름으로범죄율, 혼인율, 자살률 등을 고찰하고 국세(國勢)조사를 지도했다.
케틀레 덕분에 통계학으로 인간 행동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고가 정립되었다.

17세기 후반 영국에는 이미 생명보험 회사가 존재했다. 그러나 보험료 계산의 명확한 근거가 없는 상황이었기에 사실 도박에 가까운사업이었다.
이러한 때 근대 생명보험의 기초를 마련한 것은 영국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 (Edmond Halley)의 연구였다.

커피하우스에서 세계 최고의 보험조직으로

런던에 커피하우스 하나가 문을 열었다. 1688년 무렵의 일이다. 이후 1730년대에 커피하우스가 금융가인 롬바드가로 이전하자 무역상과 선원이 가게에 몰려들었다. 오늘날 세계 보험시장의 중심 ‘로이즈’는 이렇게 ‘로이즈 커피하우스’에서 시작되었다.

• 페르마, 파스칼 등이 확립한 수학적 확률론
• 정치 산술 등 사회를 통계적으로 파악하는 발상,
• 그러한 발상을 뒷받침하는 사회 조사 기법과 통계학의 발전
• 영구적으로 사업을 추진하는 근대 기업
그리고 해상보험이 성립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조건이 있다.
• 증기선의 도입으로 정기 항로 확립, 항해 수 증가.

18~19세기 영국은 이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런던에서 탄생한 로이즈 해상보험이 세계를 아우르는 보험의 중심이 될수 있었다.

18~19세기에 영국은 천문학적 부채, ‘남해 버블 사건’,
수많은 전쟁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승승장구할 수 있었을까?

영국은 어떻게 천문학적인 부채에 시달리면서도재정파탄을 면할 수 있었을까?
사실 빚더미에 올라앉은 나라는 영국만이아니었다. 근세 유럽 각국은 대부분 막대한부채에 짓눌려 있었는데, 전쟁이 주요 원인이었다.

영국 사회학자 존 브루어(John Brewer)는18세기 영국은 ‘재정-군사국기(nical-military state)‘였다고 했다.  즉 영국은 전쟁을 위해 거액의 빚을 내어 막대한 재정을 운영하며 강력한 전쟁 수행 국가를 만들었다는주장이다. 실제로 영국과 프랑스를 비교해보면 영국의 조세 부담이 프랑스보다 훨씬 무거웠다. 애초에 프랑스 인구는 영국 인구의2~4배였기에 넉넉한 세수를 기대할 수 있었다.

그 비결은 세금 체계에있었다.

프랑스가 토지세 같은 직접세를 주체로 세금을 징수했다면 영국은 간접세, 특히 소비세를 중심으로 세수를 충당했다.

똑같은 ‘버블 사건’의 위기에 대한 전혀 다른 대응으로
백팔십도 다른 운명을 맞이한 두 나라 영국과 프랑스

18세기 초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거의 같은 시기에 유명한 버블 사건이 일어났다. 영국의 남해 버블(South Sea Bubble, 일본의 ‘버블 경제(Bubble Economy)’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과 프랑스의 미시시피 버블(Mississippi Bubble). 이 두 사건은 발단에서부터 붕괴 과정까지 소름끼치게 닮았다. 그러나 이후 처리 과정에서 명암이 갈렸다.

남해회사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승리하며 획득한 라틴아메리카 무역권을 목적으로 세워졌으며, 그중에서도 아프리카와 서인도제도를 잇는 노예무역 이권을 주로 노렸다. 그런데 남해회사의 진정한 목적은 급격히 늘어난 영국 정부의 채무를 상환하는 것이었다.

월폴은 남해회사가 안고 있던 정부 부채를 절반으로 줄이고 나머지는 회사 이사와 정쟁에서 패배한 정치인의 재산을 몰수하고 잉글랜드은행에 부담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처리하고 투자가에게도 보상했다.

월폴이 여당인 휘그당을 이끌며 의회의 지지를 기반으로 사태를 수습하고 뒤처리에 나섰다는 사실이다.

남해 버블을 겪으며 영국은 잉글랜드은행을 중심으로 재정 제도를 일원화했다. 이처럼 정부, 의회, 중앙은행이 하나가 된 펀딩 시스템(자금 조달 시스템)이 바로 영국의 비결이었다. 영국은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도 이 시스템 덕분에 전쟁 자금 조달에 성공하며 재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자크 네케르(Jacques Necker)의 재정 개선책 역시 번번이 귀족층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네케르는 혁명 이후에도 프랑스 재정 관리를 맡아 아시냐 지폐(Assignat, 국유화된 토지를 담보로 발행한 불환지폐)를 발행해 재정난을 타개하고자 했지만 대규모 인플레이션 사태로 끝나고 말았다.

유럽 제일의 경제 선진 지역으로 도약한 네덜란드는 영국과 반복적으로 전쟁을 치르면서 차츰 유럽의 선두 자리를 내주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금융, 투자에 있어서는 여전히 암스테르담이 유럽 금융 시장의 중심이었고 전 유럽의 금융 정보가 암스테르담으로 모여들었다.

프랑스는 신용을 잃어 네덜란드 자본 유입마저 끊겼으며 반대로 영국은 버블 대처 능력으로 좋은 평가를 받음으로써 신용 점수가 높아졌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다르게 영국 남해 버블 사건은 영국 경제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역할을 했다.

영국 해군은 ‘강제 징집(press gang)’이라는 상당히 험한 징집 제도를 시행했다. 전쟁이 터지면 승조원을 강제로 징집한 것인데, 쉽게 말해 길에 지나다니는 장정을 붙잡아 배에 태우는 식으로 군인을 보충한 것이다.

유럽의 다른 국가와의 승부에서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낸 것은 다름 아닌 영국의 경제력, 재정 능력이었다.

결국 자금 조달에 성공한 나라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공채를 발행해 전쟁 비용을 조달하고, 자금이 장기적으로 상환되도록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경제적 역량을 다진 영국이 유럽 최강 국가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부채 액수가 아니라 빌린 돈을 확실하게 갚을 수 있는지가 가장 중요했다.

산업혁명이 시작된 후 오랫동안 인도에 비해
한참 뒤처졌던 영국의 면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비결은?

세계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 그 흐름을 뒤바꾼 상품을 꼽으라고 한다면 ‘면’을 빼놓을 수 없다. 면의 역사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세계 경제에서 아시아와 유럽 사이의 균형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영국은 글로벌 생산 체제를 구축했는데, 이때 본보기가 된 것은 설탕무역이었다.

대서양무역은 기본적으로 서아프리카에서신세계로 노예를 공급하고 이 노예를 활용해신세계에서 사탕수수(설탕)를 생산하는 세제로 이루어졌다. 

포르투갈은 브라질에서, 네덜란드는 카리브해 식민지에서, 영국은 서인도제도에서, 프랑스는 아이티에서 플랜테이션 방식으로 설탕을 생산해암 스테르담과  함부르크, 보르도 등의 항구로 들여왔다.

어째서 영국만 이러한 면 생산 제세를 성공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을까? 그 답은 간단하다. 영국이 세계 최대 해양제국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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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읽는 세계사 - 세계사 중심을 관통하는 13가지 질문과 통찰력 있는 답변
다마키 도시아키 지음, 서수지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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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 신항로 개척시대 연표

1467 오닌(應仁)의 난(~1477)
1480 포르투갈이 통북투에 도달
1488 바르톨로메우 디아스(포르투갈)가 희망봉에 도달
1492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스페인)가 서인도제도에 상륙
1494 토르데시야스 조약 체결
1494 이탈리아전쟁(~1559)
1498 바스쿠 다가마(포르투갈)가 인도 항로 개척
1507 신대륙을 ‘아메리카’라 명명
1511 포르투갈이 말라카(오늘날의 믈라카) 점령
1513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스페인)가 파나마해협 횡단
1516 호조 소운(北条早雲)이 사가미노쿠니(相模国) 평정
1517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95개조 반박문’
1519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 스페인)가 아즈텍왕국 정복, 페르디난드 마젤란(스페인)이 세계 일주 출발
1533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 스페인)가 잉카제국 정복
1534 예수회 설립
1541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이 가이노쿠니 (甲斐国)의 지방관인 슈고 자리에 오르다
1543 다네가시마섬에 철포 전래
1545 트리엔트 공의회(Council of Trent, ~1563), 페루 포토시 은광 발견
1549 프란시스코 사비에르가 다네가시마섬에 도착
1550 포르투갈이 나가사키 히라도에 상관 설치
1553 제1차 가와나카지마전투
1571 마닐라시 건설(스페인)
1575 나가시노전투
1576 오토모 소린이 대포 ‘구니구즈시’ 구입
1577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 영국)의 세계 일주(~1580)
1580 오무라 스미타다가 나가사키를 예수회에 바침
1582 혼노지(本能寺)의 변
1596 산펠리페호 사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금교령을 내림


한 권으로 읽는 세계사 : 세계사 중심을 관통하는 13가지 질문과 통찰력 있는 답변 | 다마키 도시아키 저/서수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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