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유럽 각국이 산업화로 엄청난 경제 성장을  이루었음에도 신대륙 아메리카로 떠나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진 까닭은?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머나먼 나라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돈을 벌기위해 떠난 엄마. 안타깝게도 일 년도 지나지않아 엄마에게서 소식이 끊어졌다. 열세 살소년 마르코는 반드시 자기 힘으로 엄마를 찾겠다며 삼만리 장대한 여행길에 나섰다.

<엄마 찾아 삼만리>의 원작은 이탈리아 작가 에드몬도 데 아미치스(Edmondo De Amicis)의  동화 『쿠오레 (Cuore)』에 실린 단편 ‘아펜니노산맥에서 안데스산맥까지‘다. 이 책은 1886년에  출간되었는데, 당시는 바야흐로 ‘이민의 시대‘였다.

같은 시기 런던 - 콜카타 간 황마 가격 차이는 35퍼센트에서 4퍼센트로 줄었다. 이렇게 가격 차이가 줄어든 원인은 증기선으로 대량 운송이 가능해지고 운송 시간 또한 단축되면서 운송 비용이 감소했기 때문이었다.

상품, 노동과 더불어 국경과 바다를 넘어 활발하게  이동한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자본이다. 영국으로 대표되는 유럽의 몇몇 국가와 미국이라는 소위 ‘잘나가는 국가‘는 해외, 특히 가난한 나라에 거액을 투자했다. 같은 액수를 투자했을 때 가난한 나라에서큰 수익을 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줄줄이 독립하게 된 요인 중 하나는 주요 통상 상대가 영국으로 바뀌면서 종주국과의 경제적 유대가 약해졌기 때문이라고 추정할 수있다. 여기에서도 역사를 바꾼 건 해운, 즉증기선의 힘이었다.

‘헤게모니 (Hegemonie)‘라는 말을 흔히 들어봤을 것이다. 헤게모니는 주로 ‘패권‘으로 번역되는데 ‘압도적인 지위와 힘으로 주변을지배하는 권력‘을 의미한다.

경제사의 관점에서는 그 답을 ‘수수료‘라고본다.

사람보다 물건보다 빠르게

왜 전신을 영국 헤게모니의 중심축이라고하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세계 무역 결제가 전신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19세기 말에 들어서면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 사이에 불과 1.8일이면 정보를 전달할 수있게 되었다. 즉 정보가 인간과 상품의 아동(물류)보다 훨씬 빨리 전달되게 된 셈이다.

세계 전신망의 중심에 런던이 있었다. 이는 국제 거래  결제가 대부분 런던에서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결국 결제 시스템을 장악한 자가 상업의 규칙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세기 말에 금본위제가 국제적 표준으로 확립되었는데, 그 시작은 1816년 단행한 영국의 화폐법이었다. 영국의 기준을 세계가 받아들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헤게모니 국가가 가진 막강한 권력이다.

일대일로 정책은 단순히 말하면 중국이 중,
심이 되어 유라시아대륙을 통합하려는 시도다.

재미있게도 이 정책을 세계사 속에 대입해보면 15세기 초 명나라 환관 정화가 갔던 대원정 경로를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다<지도23>. 또 17세기 아르메니아 상인이 구축한상업 네트워크와도 겹친다<지도 24>.

정화와 아르메니아 상인이 오간 바닷길이나 내륙을 연결한 실크로드는 기본적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상인들이 자발적으로 형성한길로,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개척한 길이 아니다.

일대일로 정책은 군사적 목표를 설정하지않았다. 일대일로 정책은 크게 에너지, 안전, 시장이라는 세 가지  항목으로 분류된다. 다양한 운송로와 항만 시설이 무역을 촉진하고 안전을 개선해 시장을 확장하려는 시도다.

‘자국 우선주의‘의 한계에 부닥친 중국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직접 일하지 않아도 돈이 저절로  들어오는 구조를 만든 사람이 부자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면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그것이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본주의 속성을 국가에 대입한 것이 바로 헤게모니 국가다.

중국의 목표는 모든 것을 중국이 통제하는중화 시스템으로 보인다. 이 시스템은 중국인의 사고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어 쉽게바꿀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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