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은인이 바로 루벤스입니다. 1628년 시대의 거장 루벤스는 외교관 자격으로 마드리드를 다시 찾습니다. 이때 루벤스는 자신보다 22살 어린 벨라스케스를 만나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벨라스케스는 초기에 하층민의 일상을 주로 그렸는데요. 루벤스는 그의 작품을 보고 ‘시골풍‘이라는 짧은평을 남깁니다. - P549

디에고 벨라스케스, 검은 옷을 입은 펠리페 4세, 1623년, 프라도 미술관(왼쪽)/ 디에고 벨라스케스, 갈색과 은색 옷을 입은 펠리페 4세, 1631~1632년경, 런던 내셔널 갤러리(오른쪽) 이탈리아유학을 마친 후 벨라스케스는 풍부한 색채와 자신감 넘치는 필치를 선보인다. - P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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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처한 미술 이야기 8 - 바로크 문명과 미술 : 시선의 대축제, 막이 오르다 ㅣ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8
양정무 지음 / 사회평론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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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역사를 읽으며] 『난처한 미술이야기』 북유럽 바로크
― 전쟁과 돈, 시민, 그리고 물과 싸우며 만든 그림


로마 바로크를 읽을 때 미술 뒤에 교황과 종교, 권력과 도시가 보였다면 북유럽 바로크에서는 다른 세계가 나타났다.

바로크를 한 단어로 줄이면 흔히 ‘화려함’이라고 한다.

로마에서는 그 말이 잘 맞았다. 거대한 성당과 광장, 조각과 천장화가 사람을 압도했고, 건축과 회화와 조각은 종교와 권력의 힘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런데 북유럽 바로크를 읽으면서는 그 한 단어만으로 바로크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루벤스가 활동한 남부 네덜란드에는 가톨릭교회와 궁정을 중심으로 한 웅장하고 화려한 바로크가 있었다. 그러나 북부 네덜란드로 올라가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화려한 성당 대신 시민의 집과 창가가 보이고, 왕과 성인 대신 의사와 상인, 술집의 사람들, 학교의 아이들이 나타난다. 들판과 풍차, 부엌과 식탁까지 그림의 주제가 되었다.

같은 바로크 시대였지만 북부 네덜란드의 미술은 로마보다 훨씬 소박하고 사람들의 생활에 가까이 있었다.

여기에서도 종교는 중요했다. 그러나 북유럽에서는 종교가 사람들을 하나로 묶기보다 갈라놓았다. 가톨릭과 개신교가 충돌했고, 스페인의 지배에 저항한 네덜란드는 긴 독립전쟁을 치렀다. 북부와 남부는 갈라졌고, 그 차이는 정치와 종교뿐 아니라 미술에도 나타났다.

그리고 또 하나의 힘이 커졌다.

돈이었다.

무역으로 부자가 된 시민들이 그림을 사기 시작했다. 교회와 왕실만이 아니라 상인과 도시의 시민이 미술의 중요한 소비자가 되면서, 성인과 왕이 차지하던 그림 속에 의사와 상인, 술집 사람들, 부엌과 거리, 꽃과 음식, 들판과 풍차가 들어왔다.

북유럽 바로크를 읽으면서 나는 미술양식의 변화뿐 아니라 누가 그림을 사고, 무엇을 그리고, 어디에 걸어두는가가 달라지는 과정을 함께 보게 되었다.


1. 네로가 죽기 전에 보고 싶어 했던 화가

루벤스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미술책이 아니었다.

어릴 적 『플랜더스의 개』였다.

네로는 가난했고, 할아버지를 잃고, 일자리마저 잃었다. 마지막에는 파트라슈와 함께 성당으로 들어가 평생 보고 싶어 했던 루벤스의 그림을 바라본다.

어렸을 때는 네로가 불쌍해서 울었다.

지금 다시 생각하면 화가 나는 쪽이 조금 달라졌다.

『플랜더스의 개』는 루벤스가 살았던 17세기의 이야기가 아니다. 영국 작가 위다가 1872년에 발표한 소설이니 네로의 비극은 루벤스보다 훨씬 뒤인 19세기를 배경으로 한다.

그런데 그 시대의 성당 안에도 그리스도의 고난과 사랑을 그린 루벤스의 위대한 그림이 걸려 있었다. 소설 속에서는 바로 그 성당 밖에서 가난한 아이 하나가 굶고 추위에 떨다가 죽어간다.

종교는 사랑과 자비를 말했지만 현실의 사회와 공동체는 그 아이를 지켜주지 못했다.

네로가 잘못한 것은 아니다. 지금의 복지제도와 같은 사회안전망도 충분하지 않았고, 주변 어른들도 아이 하나를 끝내 구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에는 네로가 불쌍했고, 지금은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든 사회가 답답하다.

그래서 루벤스를 다시 만나자 네로부터 떠올랐다.


2. 한 지역에서 서로 다른 길로

오늘날의 네덜란드와 벨기에 일대는 한때 합스부르크 지배 아래 있던 저지대 세계였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갈등이 깊어졌다.

1566년에는 안트베르펜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개신교도들이 성당의 성상과 종교화를 파괴했다. 이어 스페인의 강경한 진압이 계속되었고, 1576년 안트베르펜에서는 책이 소개한 「스페인의 대학살」의 배경이 된 참극까지 벌어졌다.

종교의 이름으로 성상을 때려 부수고, 다시 종교와 왕권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였다.

그 과정에서 북부 네덜란드는 스페인에 맞서 독립전쟁을 벌였고, 남부는 가톨릭 세력 아래 남았다.

루벤스가 활동한 안트베르펜은 남부에 있었다.

남부에서는 가톨릭교회를 중심으로 웅장한 종교화가 다시 발전했고, 북부에서는 개신교와 도시 시민사회의 성장 속에서 다른 미술시장이 형성되었다.

한때 하나의 정치적 공간에 있던 사람들이 종교와 정치 때문에 갈라졌고, 그 차이가 미술의 모습에도 드러났다.


3. 루벤스, 화가이자 사업가이고 외교관

루벤스는 그림만 잘 그린 사람이 아니었다.

대규모 공방을 운영해 많은 작품을 제작했고, 제자와 조수들에게 역할을 나누어 작업한 뒤 자신이 마무리하는 체계를 갖추었다.

오늘날 식으로 보면 뛰어난 화가이면서 공방의 대표이고 사업가였다.

그런데 외교까지 했다.

스페인과 영국 사이를 오가며 협상에 참여했고, 영국의 찰스 1세에게 「마르스로부터 평화를 지키는 미네르바」를 선물했다. 전쟁의 신 마르스를 밀어내고 평화와 풍요를 지키는 장면을 외교의 메시지로 이용한 것이다.

그림으로 돈을 벌고, 그림으로 명성을 얻고, 그림을 외교에도 활용했다.

‘평화의 사도’라고 부르면 조금 거창할 수 있지만, 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대에 실제로 평화를 위한 협상에 참여한 화가였다는 사실은 인상적이었다.


4. 루벤스의 현실적인 Inner Peace

루벤스의 말년은 더 흥미로웠다.

그는 이미 돈도 벌 만큼 벌었고, 명예도 얻었으며, 기사 작위까지 받았다. 넓은 땅과 성을 사고 두 번째 부인 헬레나 푸르망과 가족생활을 하며 전원에서 지냈다.

이 시기에는 외교활동에서도 물러났고, 오랫동안 그를 괴롭힌 통풍으로 건강도 예전 같지 않았다.

그의 말년 풍경화를 경제적 여유 하나로만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외교와 정치의 세계에서 물러난 것, 새 가족과 함께하는 생활, 건강의 변화, 고향 플랑드르의 풍경에 대한 애착, 그리고 더 이상 주문자의 요구에만 매달리지 않아도 될 정도의 경제적 여유가 함께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돈의 역할을 빼놓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먹고살 걱정도 없고, 집 걱정도 없으며, 반드시 주문자의 취향에 맞는 그림만 그려야 할 이유도 줄어들었다.

돈이 마음의 평화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돈이 없어서 생기는 수많은 걱정을 덜어주는 것은 분명하다.

『쿵푸팬더』에서 시푸 사부가 말하는 Inner Peace가 수행을 통해 얻는 내면의 평화라면, 루벤스의 말년에는 조금 더 현실적인 Inner Peace가 있었던 것 같다.

그는 그 여유 속에서 자기가 살고 있는 땅과 사람, 자기가 그리고 싶은 풍경을 그렸다.


5. 독립전쟁이 만든 나라, 오렌지색이 된 역사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80년에 걸쳐 이어졌다.

빌럼 1세, 오라녀 공 빌럼은 스페인의 종교정책에 맞서 독립운동의 중심인물이 되었고 결국 암살당했다.

그러나 오라녀 가문은 이후 네덜란드의 중요한 상징으로 남았다.

오늘날 네덜란드 축구대표팀을 ‘오렌지 군단’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이 역사와 연결된다.

오라녀, Orange.

네덜란드의 오렌지색에는 독립전쟁과 왕가의 역사가 들어 있다.

책에서 헤이그의 하우스텐보스 궁전을 보면서 일본 나가사키현 사세보의 하우스텐보스도 떠올랐다. 두 번이나 가보려다가 결국 못 갔던 곳인데, 그 이름의 뿌리를 미술책을 읽다가 다시 만나게 되었다.

미술을 읽다가 축구가 나오고, 일본 여행지가 나오고, 다시 네덜란드 왕가로 돌아간다.

이런 연결도 책 읽는 재미다.


6. 좋은 땅에 나라를 만든 것이 아니라, 땅을 만들어 나라를 세웠다

네덜란드를 보면서 또 하나 눈에 들어온 것은 땅이었다.

국토의 상당 부분이 해수면보다 낮고, 습지와 갯벌이었던 곳을 수백 년 동안 제방을 쌓고 물을 퍼내며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으로 바꾸었다.

“신은 세상을 만들었지만 네덜란드는 네덜란드인이 만들었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암스테르담은 토목의 힘으로 만들어진 도시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좋은 땅을 골라 도시를 세운 것이 아니라, 토목의 힘으로 도시가 설 수 있는 땅을 만들어냈다.

연약한 점토와 이탄층 위에 도시를 세우기 위해 목재말뚝을 박고, 제방을 쌓고, 물을 빼고, 운하를 만들며 도시를 넓혀왔다.

그 토목의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물이 지금의 암스테르담 왕궁이다.

원래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에 암스테르담 시청으로 지어진 이 거대한 석조건물 아래에는 목재말뚝이 무려 13,659개나 박혔다.

수많은 말뚝으로 거대한 건물의 하중을 지지하고 그 하중을 지반에 전달한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웅장한 석조건물이지만, 그 아래에는 1만 3천 개가 넘는 나무말뚝이 박혀 있었다.

네덜란드 황금기의 화려한 시민사회 역시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토목 위에 서 있었던 셈이다.

풍차도 지금은 네덜란드의 낭만적인 풍경을 상징하지만 원래는 물을 퍼내기 위한 중요한 기계였다.

제방, 수로, 운하, 풍차, 간척지는 모두 살아남기 위해 만든 기반시설이었다.

그들에게 풍차와 제방, 운하와 들판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었다.

물과 싸우며 살아가기 위해 만든 시설이고, 수백 년에 걸쳐 스스로 만들어낸 국토였다.

그래서 네덜란드 풍경화도 다르게 보였다.

남이 준 자연을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물을 막고 퍼내며 만들어낸 땅을 그린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7. 돈이 그림을 바꾸었다

17세기 암스테르담은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다.

동인도회사가 등장하고 주식이 거래되었으며, 증권거래소가 성장했다.

튤립 한 구근 가격이 치솟았다가 급격하게 무너지는 튤립 투기까지 벌어졌다.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돈이 몰리면 사람들이 따라붙고, 가격이 계속 오를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며, 어느 순간 거품이 꺼진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림도 시장에서 거래되었다는 점이다.

네덜란드에서는 왕이나 교회만 그림을 사는 것이 아니었다.

상인과 시민이 자기 집에 걸 그림을 샀다.

그 결과 그림의 주제도 달라졌다.

성모와 성인뿐 아니라 부엌과 식탁, 술집과 학교, 가족과 거리, 꽃과 음식, 풍경이 중요한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미술이 시민의 생활공간으로 들어간 것이다.


8. 시장은 자유를 주었지만 안전을 보장하지 않았다

시민 미술시장의 성장은 화가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었다.

교회나 왕실의 주문만 기다리지 않고 시장을 상대로 자신의 그림을 팔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화가들에게 좋은 일만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시장이 커졌다는 것은 경쟁자가 많아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구매자의 취향과 유행에 맞는 그림이 잘 팔렸고, 화가들은 특정 장르를 전문적으로 그리거나 가격경쟁을 해야 했다.

후원자의 지시에서 조금 벗어난 대신 시장의 선택을 받아야 했다.

렘브란트처럼 큰 명성을 얻은 화가도 말년에 재정적으로 무너졌다. 그의 파산에는 비싼 집과 수집품 구입, 수입의 변화 등 여러 사정이 얽혀 있었고 단순히 유행을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다.

페르메이르 역시 죽은 뒤 가족에게 상당한 빚을 남겼다.

시민이 새로운 미술 소비자가 된 것은 분명한 변화였다.

그러나 시장은 화가에게 자유를 주면서 동시에 실패의 위험도 화가 개인에게 떠넘겼다.

이것 역시 네덜란드 미술 황금기의 한쪽 얼굴이었다.


9. 잘살면서도 ‘다 소용없다’고 말했다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서 네덜란드 사람들이 부를 무조건 자랑한 것은 아니었다.

바니타스 정물화가 그 반대편에 있었다.

비싼 그릇과 과일, 꽃과 책을 늘어놓고 그 옆에 해골이나 시든 꽃, 꺼진 촛불을 넣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죽으면 끝이라는 이야기였다.

이것도 참 인간답다.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장사하고 투자하면서, 그림에서는 재물의 허무함을 경고한다.

튤립에 돈을 쏟아붓던 사람들과 바니타스를 그려 걸어놓던 사람들이 같은 사회에 살았다.

부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부를 경계했다.

그 긴장이 네덜란드 황금기의 한 모습이었던 것 같다.


10. 그림 속에 들어온 평범한 사람들

풍속화가 커진 것도 같은 흐름이었다.

얀 스텐의 그림에는 술 마시는 사람, 떠드는 아이, 엉망이 된 집안, 학교에서 장난치는 학생들이 나온다.

성인도 영웅도 아니다.

그냥 사람들이다.

그러나 웃기기만 한 그림은 아니다.

흐트러진 집안, 술 취한 사람, 제멋대로인 아이들의 모습에는 사치와 방종, 교육과 가정생활을 풍자하는 의미가 함께 들어 있다.

얀 스텐을 보고 있으면 김홍도의 풍속화가 떠오르기도 한다.

시대도 장소도 다르지만 둘 다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을 그림의 중요한 소재로 삼았다.

시민이 그림을 사기 시작하면서 시민 자신도 미술의 주인공이 되었다.


11. 풍경화는 조국을 그리는 그림이었다

네덜란드 풍경화도 단순히 아름다운 경치를 그린 그림으로 보기 어려웠다.

풍차, 운하, 제방, 낮은 들판은 네덜란드인이 수백 년 동안 물과 싸우며 만들어내고 지켜낸 삶의 공간이었다.

독립전쟁까지 거친 뒤에는 의미가 하나 더 생겼다.

스페인과 싸워 지켜낸 자신들의 나라였다.

그러니 그 들판과 하늘을 그린다는 것은 자신들의 국토를 그리는 일이기도 했다.

평범해 보이는 자연과 생활의 터전이 네덜란드인에게는 직접 만들고 지켜낸 세계였다.

풍경을 화폭에 담는 일은 아름다운 경치를 기록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살아갈 땅을 바라보는 일이기도 했다.


12. 렘브란트는 단체사진도 살아 움직이게 만들었다

렘브란트의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를 보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사람들의 몰입이었다.

비슷한 시기의 미레벨트가 그린 해부학 강의와 비교하면 차이가 분명했다.

미레벨트의 그림 속 사람들은 한자리에 모여 있지만 표정이 다소 굳어 있고 멍하게 보인다.

반면 렘브란트의 사람들은 다르다.

누군가는 시신을 보고, 누군가는 튈프 박사의 손동작을 보고, 누군가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설명을 듣는다.

사람마다 반응이 다르다.

양정무도 이 장면을 열띤 강의현장처럼 설명한다.

렘브란트는 단체초상화를 그리면서 사람을 단순히 줄 세우지 않았다.

미레벨트가 해부학 강의의 참석자를 그렸다면, 렘브란트는 강의를 듣고 반응하는 사람들을 그렸다.

그래서 400년 전 강의실의 분위기가 지금 눈앞에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13. 루벤스와 렘브란트, 같은 바로크의 다른 얼굴

루벤스와 렘브란트를 비교하면 남부와 북부 네덜란드의 차이가 그림에서도 보인다.

루벤스의 그림은 크고 웅장하고 화려하다.

가톨릭교회와 궁정의 주문을 많이 받았던 그의 작품에는 거대한 공간을 채우는 힘이 있다.

렘브란트의 그림은 상대적으로 어둡고 절제되어 있다.

그러나 사람의 얼굴과 표정, 빛의 방향에서 이야기가 나온다.

카라바조의 빛이 사건을 드러내는 빛이었다면, 렘브란트의 빛은 사람의 얼굴과 반응을 바라보는 빛에 더 가까워 보였다.

같은 바로크라는 이름 아래에서도 지역과 종교, 주문자의 차이에 따라 전혀 다른 그림이 만들어졌다.

바로크가 반드시 화려해야만 바로크인 것은 아니었다.


14. 할스는 순간을 잡았고, 페르메이르는 시간을 멈췄다

프란스 할스는 빠른 붓질로 사람의 표정과 움직임을 잡아냈다.

정교하게 마감하기보다 순간의 생기를 살렸다.

그래서 수백 년 뒤 인상파 화가들이 그의 붓질에 주목했다는 설명도 이해가 갔다.

페르메이르는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비롯한 그의 그림에서는 시간이 잠시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 방 안의 고요함, 한 사람의 작은 몸짓을 바라본다.

카메라 옵스큐라 같은 광학기구가 당시 화가들의 시각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종교전쟁으로 시작한 북유럽 바로크의 이야기가 시민의 일상을 지나 과학과 광학기술의 발전으로까지 이어진다.

렘브란트, 할스, 페르메이르는 같은 네덜란드에서 활동했지만 사람과 일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서로 달랐다.

그 차이가 네덜란드 미술의 폭을 보여준다.


15. 북유럽 바로크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사람’이었다

로마 바로크에서는 거대한 성당과 조각, 교황과 예술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북유럽 바로크에서는 사람이 더 가까이 보였다.

돈을 버는 상인, 그림을 사는 시민, 술집에서 떠드는 사람, 학교에서 장난치는 아이, 해부학 강의를 듣는 의사,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가 그림 속으로 들어왔다.

그 변화에는 종교개혁과 독립전쟁이 있었고, 무역과 금융의 성장이 있었으며, 시민 중심의 미술시장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생활의 밑바탕에는 물과 싸워 땅을 만들고 지켜온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

루벤스는 가톨릭 남부의 웅장한 미술을 대표했고, 렘브란트는 사람의 얼굴과 반응을 살려냈으며, 할스는 순간의 생기를 잡았고, 페르메이르는 평범한 일상 속의 빛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북유럽 바로크는 내게 교회와 궁정의 미술이 사라진 시대가 아니라, 그 옆에 시민과 시장이라는 새로운 미술의 주체가 크게 등장한 시대로 보였다.

그 시장은 그림을 평범한 사람들의 집으로 가져왔지만 화가들에게 치열한 경쟁도 안겨주었다.

로마에서 돔과 광장이 권력과 종교의 무대였다면, 북부 네덜란드에서는 시민의 집과 창가, 술집과 학교, 운하와 들판이 미술의 무대가 되었다.

풍차는 낭만을 위해 서 있던 것이 아니라 물을 퍼내기 위해 돌았고, 그 풍차가 지켜낸 땅 위에서 상인은 그림을 사고, 화가는 평범한 사람의 얼굴과 생활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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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화가의 몰락 
어느덧 렘브란트의 인생에도 어둠이 깊어집니다. 렘브란트가 야간순찰을 그린 1642년, 부인 사스키아가 갑자기 세상을 떠납니다. 아들 티투스가 한 살도 되기 전에 아내를 먼저 떠나 보내면서 그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합니다. 티투스를 돌보려고 고용한 보모와 관계를 맺으면서 법정 소송에 시달리고, 밝고 화사한 이탈리아 고전주의 화풍으로 유행이 바뀌면서그림 주문마저 끊깁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애인 헨드리케마저 1663년에 세상을 떠나고, 외아들 티투스도 렘브란트보다 한 해 먼저 숨을 거둡니다.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1656년 50세에 접어든 렘브란트는 개인파산을신청합니다. 전성기 시절에 초호화 저택을 매입했다고 말씀드렸죠. 이 저택은 4분의 1만 렘브란트 소유였습니다. 잔금을 연 5퍼센트씩 나누어 갚는 조건으로 계약했거든요. - P440

렘브란트, 클라우디위스 시빌리스의 음모, 
1661~1662년경, 스웨덴 국립미술관 
로마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던 네덜란드 지도자들의 모습을 대담한 필치로 그려냈지만 당시 시 정부는 이 그림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 P444

마지막 기회마저 허무하게 날아갔군요.
렘브란트는 여기서 좌절을 넘어 최악의 모욕을 느꼈을 겁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그를 지켜주던 가족마저 잃은 렘브란트는 1669년 63세의 나이로 쓸쓸히 생을 마감합니다. - P444

프란스 할스도 말년이 고달팠나요?
맞습니다. 1652년 프란스 할스는 개인파산을 신청했는데요. 재산 경매 목록을 보면 그의 빈곤함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렘브란트의 경매 목록에는미술 걸작과 값비싼 물품이 가득했지만, 할스는 매트리스 세 개, 테이블하나, 그림 다섯 점이 전부였으니까요. 파산 이후, 할스는 다행히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아 근근이 생활하게 됩니다. - P447

신비한 분위기가 보는 이의 마음을 단번에 잡아끄는 명작입니다. 얼핏 평범한 초상화처럼 보이지만 특정 인물이 아닌 이상적인 인물을 상상해서그런 것 같습니다. 살짝 벌어진 입술과 빛나는 눈동자가 매력을 더합니다. 그림의 백미는 진주 귀걸이죠. 큼지막한 진주 귀걸이는 평면에 그려졌는데도 매끄러움이 느껴질 정도로 입체적인데요. 페르메이르는 작은점을 겹겹이 찍어 질감을 살리는 유화 기법으로 귀걸이를 강조했습니다.
빛에 반짝이면서도 입체감이 살아있는 귀걸이 때문일까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네덜란드의 모나리자‘로도 불립니다. - P467

글쎄요, 진리에 정답이 있을까요? 시대가 변하여 새로운 해석이 나올 수있겠지만, 새로움이 더 진리에 가까운 건 아닐 겁니다. 마찬가지로 과거라고 해서 진리로부터 뒤떨어졌다고 볼 수도 없고요. 분명한 건 각각의시대에 걸맞은 방식이 있겠죠. 르네상스는 르네상스만의 방식이 있고, 바로크는 바로크 시대에 맞는 방법이 있었듯이 말이죠. 우리는 르네상스 하면 원근법을 떠올리죠. 바로크에도 이에 대응하는 강력한 시선이 있었습니다. - P469

네덜란드는 80년간 스페인과 독립 투쟁을 벌였습니다. 이후, 독립에 성공한 북부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루고 공화국을 건설합니다. 네덜란드 황금기는 시민들의 정치적 자유를 기반으로 종교와 이념의 차이를 극복하는 시기였습니다. 네덜란드인들은 개인과 공동체가 힘을 합쳐 이뤄낸 하루하루의 평화로운 일상을 소중히 여겼죠. 그걸 그려낸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은 조금 과장하자면 탈종교, 탈이념을 지향했다고볼 수 있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그린 그림이 유독 많은 이유입니다. - P475

미술은 특정 단어로 말할 수 없는 복잡한 세계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 세력의 정치적 자유가 미술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믿습니다. 르네상스가 추구한 인간 중심 문화가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에서한층 높은 단계로 완성된 이유입니다. - P475

15세기에 출발한 인간을 향한 관심은 17세기에 더욱 확장됩니다. 그 열망이 정치적·사회적·경제적으로 들끓던 시대의 에너지와 만나 네덜란드에서 독창적인 미술로 탄생한 겁니다.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은 종교와 신화속 이야기를 현실과 맞닿게 재해석한 걸로도 유명합니다. 시민들이 일군 풍경과 정물을 그림의 소재로 적극 채택하고, 자신들의 세계를 익숙하면서도 평화로운 일상으로 시각화한 거죠.
지금까지 플랑드르와 네덜란드의 바로크 미술을 만났습니다. 이제 바다건너 스페인으로 향할 텐데요.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미술이 펼쳐지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 P476

황홀한 영광도 잠시, 타오르는 한낮의 태양처럼 이글거리던 스페인 황금기도 어둠이 내려앉는다. 영원히 빛날 듯했던 제국은 서서히 몰락의 길을걷는다. 그러나 저무는 해가 오래도록 세상을 얇게 물들이듯이 스페인 바로크 미술은 찬란한 시대의 잔상으로 남아 세계로 퍼져갔다.
-마드리드 왕궁, 스페인 - P483

바로크 미술을 이야기하며 스페인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스페인 바로크미술은 이탈리아와 네덜란드 미술을 아우를 뿐만 아니라 여기서 한 발 더나아가 바로크 미술의 새로운 정점을 찍었으니까요. - P485

펠리페 2세의 통치 철학은 ‘가톨릭 군주‘였습니다.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대제국을 가톨릭 신앙으로 묶고자 했죠. 그래서 엘 에스코리알수도원같이 조용한 종교 공간에서 일하기 좋아했습니다. 마드리드를 비롯한 스페인 곳곳에 궁전을 보유했는데도 말이죠. - P488

그는 29살인 1556년 왕위에 올라 159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42년간 스페인을 통치합니다. 16세기 후반의 스페인은 펠리페 2세의 시대였다고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 P488

펠리페 2세는 아메리카 잉카제국을 정복하고 포르투갈과 합병하는 등 큰업적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랑하던 무적함대가 1588년 영국과 네덜란드 연합에 패배하면서 바다에서의 패권을 잃게 됩니다. 신교도를 탄압하여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부추긴 것도 뼈아픈 실책이었습니다. 1568년부터 1648년까지 80년간 벌어진 네덜란드와의 기나긴 전쟁으로 스페인은 전쟁의 늪에 빠집니다. 신대륙에서 들여온 막대한 은으로 전쟁 비용을 감당했지만, 비효율적인 관료 시스템마저 겹치며 나라가 파산하고 맙니다. 스페인은 펠리페 2세가 재위하는 동안 네 차례나 국가 파산을 선언하는 수모를 겪습니다. - P489

비록 통치력을 둘러싼 평가는 엇갈리지만 미술에 대한 업적은 이견이 없습니다. 스페인 미술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기념비적인 건축물 엘에스코리알수도원 덕분이죠. 펠리페 2세는 즉위한 이듬해 1557년에 숙적 프랑스에게 큰 승리를 거둡니다. 그날이 성 로렌스의 축일과 같아서 엘 에스코리알을 성 로렌스에게 봉헌합니다. - P489

당시 스페인의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반종교개혁 운동에 앞장선 스페인은 트리엔트공의회가 선언한 미술 강령을 엄격히 지키려 했습니다. 이 때문에 스페인에서 종교미술은 어떤 곳보다 명확하고 단순하며 지적이어야 했고, 사실적이면서도 신앙에 좋은 자극원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엘 그레코의 그림은 어수선해 보였을 겁니다. - P518

‘크레타는 그에게 생명을 주고, 이탈리아는 그에게 붓을 주고, 스페인은그에게 정신을 주었다‘는 어느 미술사가의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크레타에서 태어난 그에게 이탈리아는 그리는 재능을 주었지만, 그 능력을 정서적으로 끌어낸 건 스페인이었으니까요. 이 점이 우리가 엘 그레코를 스페인 화가로 부르는 결정적 이유입니다. - P528

엘 그레코는 스페인의 정신을 대표하는 화가다. 엘 에스코리알 프로젝트를 맡•았으나 왕실과 교회의 미감을 충족시키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톨레도에서예술 세계의 전환점을 맞이한 그는 회심의 역작 오르가즈 경의 매장을 탄생시켰다. 이후 엘 그레코가 톨레도에서 여생을 보내며 그린 풍경화는 후대 작가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 P529

작곡가 로시니가 이탈리아 사람이기 때문에 세빌리아로 제목을 지었지만, 스페인어에 따라 세비야로 부르는 게 옳습니다.
세비야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에 위치한 도시로, 17세기 바로크 시대에는 수도 마드리드만큼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1600년 마드리드 인구가3만 명이었는데요. 당시 세비야의 인구는 15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사실상 규모면에서 세비야는 당시 스페인의 경제 수도였습니다. 얼마나위용이 대단했는지 ‘세비야를 보지 않고 세상을 보았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입니다. - P531

세비야는 콜럼버스가 항해를 시작한 항구로 유명합니다. 이후 대항해 시대가 열리면서 스페인이 아메리카와 교역할 때 가장 중요했던 항구가 바로 세비야였습니다. 스페인의 황금기를 이끈 막대한 부가 바로 이곳을 거쳐 들어온 겁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세비야는 바다에서 약 60킬로미터떨어진 내륙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 P532

아니, 그렇게 안쪽에 자리한 도시가 어떻게 항구가 될 수 있었나요?
과달키비르라는 강 덕분입니다. 세비야를 가로지르는 과달키비르강은수심이 깊고 강폭도 넓어 큰 배들이 강을 따라 세비야와 대서양을 오갔습니다. 왼쪽 위의 그림을 보면 과달키비르강을 통해 수많은 배들이 세비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17세기 후반부터 강에모래가 퇴적되면서 세비야는 항구 기능을 점점 잃게 됩니다. - P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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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비행 ㅣ 세계문학그림책
이산호 지음, 구남훈 그림,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원작 / 고래의숲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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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비행
Vol de Nuit
『야간 비행』은 생텍쥐페리가 자신의 비행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로, 항공 조종사들의 삶과 그들이 직면하는 끊임없는 도전을 다룬 소설이다.
이 소설에는 초창기 항공 업계의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당시 항공 업계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거나 정기 노선을 개설하는 데 주력했는데, 생텍쥐페리는 그 위험한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추락 사고를 다섯 번이나 겪으면서도 자신의 임무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처음 입사한 항공사에서 업무를 지휘하던 디디에 도라를 만났고, 『야간 비행』의 리비에르라는 인물을 착상 했다. 『야간 비행』이 디디에 도라에게 바치는 헌사로 시작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야간 비행』은 생텍쥐페리가 항공 일을 하면서 겪은 사건과 시련, 그리고 그 속에서 발견한 진실을 시인의 서정으로 기록한 작품이다. 아울러 야간 비행의 위험성과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심리적, 물리적 고통, 어둠과 날씨의 변화 속에서 길을 찾아가는 조종사의 능력과 용기가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생텍쥐페리는 『야간 비행』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항공우편 서비스의 복잡하고도 인간적인 갈등을 보여 주었다. 리비에르는 항공우편 회사의 엄격하고 냉철한 책임자로, 안정적인 항공 노선 운영과 조종사들의 안전 사이에서 고뇌하며, 불가피한 결정을 내리는 인물이다. 그는 조종사들과 직원들에게 엄격하지만, 그들이 안전하게 임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책임감 있는 지도자이다. 또한 남미 대륙에서 처음으로 야간 비행을 시도하고, 정기 항로를 개척하기까지 수많은 자연재해와 인간의 약점을 극복하며 악전고투하는 굳건한 의지와 결단력의 승리를 보여 준다.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오직 전진하는 그의 한결같은 의지는 개인을 넘어선 삶의 의미를 드러내며, 죽음을 초월하는 행동적 휴머니즘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부하인 로비노는 항공 회사의 관리자로서 리비에르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는 인물이다.
파비앙은 용감한 조종사로, 야간 비행 중 위험한 안데스산맥을 넘으며 최악의 태풍을 만나 극한의 도전에 직면한다. 그의 아내 시몬은 남편의 위험한 직업에 대해 불안해하면서도 그를 사랑하고 지지해 주는 여인이다.
생텍쥐페리는 『야간 비행』에서 항공 비행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통해 인간 정신의 깊이를 드러 내며,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유사한 갈등과 선택의 순간을 성찰하게 만든다. 또한, 조종사 들이 임무를 수행하면서 겪는 고독과 고립, 서로에게 느끼는 동료애와 연대감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이 모든 요소가 결합한 『야간 비행』은 단순한 항공 모험 이야기를 넘어,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탐구하는 문학 작품이다.

혼돈의 시대
『야간 비행』이 쓰인 1930년대는 혼돈의 시대였다. 1929년 미국을 덮친 경제 공황의 매서운 바람이 프랑스에도 불어닥쳤고, 대공황은 공화제의 핵심 지지층인 중산층을 몰락시켰다. 1934년 파리에서는 극우파에 의한 반민주주의 폭동으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어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하면서부터는 전쟁의 기운마저 감돌기 시작한다.
1차 세계대전 이후 10년간의 평화와 번영의 시대가 저물어 가며, 전쟁 전야의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는데, 이러한 변화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아 죽음도 불사하는 영웅적 행동주의 문학이 등장한다. 위대한 행동을 찬양한 몽테를랑과 혁명적인 행동을 주창했던 앙드레 말로, 그리고 행동적 휴머니즘을 보여 준 생텍쥐페리가 이 시대의 대표적인 행동주의 작가들이다.
비행을 소재로 한 작품들
생텍쥐페리의 『야간 비행』 외에도 비행이라는 특별한 상황 속에서 모험, 고독, 인간의 한계 등의 주제를 다루면서 독특한 서사와 감정을 전달하는 작품들이 있다.
생텍쥐페리의 가장 유명한 작품, 『어린 왕자(The Little Prince)』는 사막에 불시착한 조종사와 소행성에 사는 어린 왕자와의 만남을 통해 우정, 사랑, 책임감을 그린 소설이다. 그의 또 다른 작품 『인간의 대지(Wind, Sand and Stars)』는 항공우편 조종사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위험한 비행 임무, 사막에서의 추락 생존, 인간 정신의 진정한 가치에 관해 쓴 에세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사하라 사막에서의 추락 사고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고난 속에서 발견한 인간애와 연대감을 감동적으로 묘사하였다.
또 리처드 바크의 『땅에 낯선 자(Stranger to the Ground)』는 작가의 자전적인 작품이 있다. 저자가 항공기를 조종하면서 겪은 고독과 고립, 그리고 하늘과 땅 사이에서의 경험이 표현되어 있다. 어니스트 K. 개노의 『운명은 사냥꾼(Fate Is the Hunter)』은 항공 사고와 그 원인을 탐구하여 항공 조종사의 삶을 들여다보고, 야간 비행의 위험과 아름다움을 세밀하게 묘사한 작품이 다. 이 작품은 항공기의 기술적 실패와 인간의 실수, 그리고 운명적인 요소들이 어떻게 결합되어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여 주며, 운명이라는 불가항력적인 힘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존 길레스피 맥기가 쓴 시 「고공비행(High Flight)」은 야간 비행과 고도에서의 독특한 체험을 서정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이 시는 존 길레스피 맥기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 왕립공군 조종사로 복무하며 쓴 작품으로, 비행에 대한 열정과 자신이 경험한 자유를 표현하여 항공 조종 사들과 비행을 사랑하는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야간 비행 : 세계문학그림책 | 이산호 저자(글) · 구남훈 그림/만화 ·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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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트완 드 생텍쥐페리
Antoine de Saint-Exupery
생텍쥐페리는 1900년 프랑스 리옹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4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친척들의 성에서 시를 쓰거나 작은 모험들을 하면서 자유분방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12 살에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나는 경험을 하고, 기숙사에서 독서와 고독을 즐기며 문학에 눈뜨기 시작했다. 1921년 제2 전투비행 연대에 소속되어 군 복무를 시작했는데, 처음엔 정비부대 소속이었으나 개인 교습으로 조종 면허를 취득하여 조종사가 된다.
1926년 민간 항공사에 입사한 생텍쥐페리는 프랑스와 아프리카에서 다양한 항공 업무를 경험 했고, 이 시기에 항로 개척자들의 노력과 희생을 기록한 『남방 우편기』를 집필한다. 1929년 아르헨티나의 항공사로 이직하여 파타고니아 노선 확장에 참여하고, 1931년 『야간 비행』으로 페미나상을 받으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어 1936년 <파리 스와르> 신문의 마드리드 특파 원으로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는데, 이를 계기로 『인간의 대지』를 쓰고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소설 대상을 받는다.
전쟁이 임박했음을 직감한 생텍쥐페리는 공군에 입대하여 여러 작전에 참여했으며, 『전시 조종사』를 발표한다. 그리고 1940년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어느 인질에게 보내는 편지』, 『어린 왕자』, 『성채』 등을 집필한다.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프랑스 공군으로 모로코에 있는 항공 부대에 복귀했는데, 연합군의 프로방스 상륙작전을 앞두고 1944년 7월 31일 정찰 비행에 나섰으나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 훗날 생텍쥐페리 이름이 새겨진 팔찌와 정찰기의 일부 잔해들이 남프랑스 마르세유의 지중해 연안에서 잇달아 발견되었다.

야간 비행 : 세계문학그림책 | 이산호 저자(글) · 구남훈 그림/만화 ·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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