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 나고야 - 다카야마·게로·시라카와고, 2026~2027년 최신판 ㅣ 리얼 여행 가이드북 시리즈
최영근.나보영 지음 / 한빛라이프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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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함께하는 일본 북알프스 여행기

여행 1일차. 2026.07.17.(금)
두 번의 출발 끝에 다카야마로

1. 비를 뚫고 나섰다가 다시 집으로

2026년 7월 17일 0시 정각, 대전에서 인천공항을 향해 출발했다.

출발할 때만 해도 비가 조금씩 내리는 정도였다. 그런데 북유성 나들목으로 들어가 고속도로에 올라서자 빗줄기가 갑자기 굵어졌다. 와이퍼를 빠르게 움직여도 앞이 흐릿할 만큼 비가 퍼부었다.

한참 달리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아, 이런 우산 안 가져왔네.”

이번 여행의 중심 일정인 가미코치는 여름에도 소나기가 종종 내리는 곳이었다. 날씨를 몇 번이나 확인하고 등산복과 카메라까지 챙겼는데, 정작 우산을 빼놓고 나온 것이다.

잠시 고민했지만 우산이야 공항이나 일본에 도착해서 하나 사면 될 일이었다. 그대로 계속 달렸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우산과 비교도 되지 않는 중요한 물건이 떠올랐다.

“에이 젠장, 트래블카드 안 가져왔그만.”

일본에서 교통비와 식비를 결제하려고 준비해 둔 트래블카드를 집에 그대로 놓고 나온 것이었다. 우산은 새로 사면 되지만 카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결국 차를 돌렸다.

집으로 다시 돌아가 카드를 챙긴 뒤 두 번째 출발을 했다. 0시 정각에 기분 좋게 출발했다는 의미는 사라졌고, 왕복하면서 한 시간을 그대로 날렸다.

그래도 공항에 거의 도착해서 생각난 것보다는 나았다. 카드 없이 일본에 도착했으면 여행 첫날부터 더 큰 소동이 벌어졌을 것이다.

다시 고속도로에 올라 속도를 냈다.

그러나 한밤중에 쏟아지는 비를 뚫고 계속 운전하다 보니 졸음이 밀려왔다.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시간을 조금 아끼겠다고 무리하다가는 여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사고가 날 수 있었다.

아산 선장 졸음쉼터에 차를 세웠다.

잠깐만 눈을 붙이려고 했는데 거의 한 시간을 잤다. 다시 눈을 뜨고 나니 머리가 한결 맑아졌다. 집에 되돌아가면서 한 시간, 졸음쉼터에서 다시 한 시간을 보냈지만 애초에 공항까지 넉넉하게 시간을 잡고 출발했기 때문에 아직 여유는 있었다.

다시 차를 몰아 인천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출국장에 들어서자 한마디가 절로 나왔다.

“야, 사람 겁나 많네 그려.”

새벽인데도 출국장은 여행객으로 가득했다. 보안검색대 앞에는 긴 줄이 이어졌고, 검색대를 통과하는 데만 30분이 넘게 걸렸다.

공항에 충분히 일찍 도착했다고 생각했지만 줄을 서 있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래도 해외여행의 꽃을 빼놓을 수는 없었다.


2. 몽블랑 잉크와 마리아 칼라스 만년필

면세품은 공항 매장을 돌아다니며 고른 것이 아니었다.

출국 전에 인터넷면세점에서 미리 주문하고 결제해 두었고, 인천공항에서는 물건만 찾아 받았다. 할인 혜택도 더 받을 수 있고 공항에서 시간을 아낄 수 있어 편했다.

이번에 구입한 몽블랑 잉크는 모두 세 병이었다.

두 병은 이번에 새로 나온 ‘오마주 투 브램 스토커 퍼플’, 나머지 한 병은 ‘위대한 개츠비 그린’이었다.

브램 스토커는 소설 『드라큘라』를 쓴 작가다. 드라큘라 백작을 탄생시킨 작가를 기념한 잉크답게 짙은 보라색과 상자 디자인에서도 어둡고 신비로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위대한 개츠비 그린은 1920년대 뉴욕을 연상시키는 상자에 짙은 녹색 잉크가 담겨 있었다. 병잉크는 글씨를 쓰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몽블랑 한정판은 상자와 병까지 포함해 하나의 소장품에 가까웠다.

인터넷면세점 가격은 몽블랑 정상매장보다 확실히 저렴했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부담 없이 여러 병을 살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요즘 몽블랑 잉크 가격이 워낙 많이 올라 할인된 가격을 봐도 예전과는 달랐다.

이번 쇼핑의 핵심은 잉크보다 만년필이었다.

‘몽블랑 뮤즈 마리아 칼라스 스페셜 에디션 만년필’을 구입했다. 짙은 붉은색 몸체와 은색 장식이 어우러진 화려하면서도 품위 있는 만년필이었다.

각종 추가 할인과 혜택까지 모두 적용하니 정상매장에서 판매하는 가격보다 40% 이상 저렴하게 살 수 있었다. 이 정도 할인이 아니었다면 선뜻 결제하기 어려웠겠지만, 평소 관심 있게 보던 만년필을 좋은 조건에 구입했다는 만족감이 컸다.

마님 물건을 비롯해 미리 주문한 다른 면세품까지 찾아 짐을 정리하고 탑승구로 향했다.

나고야행 진에어 LJ345편은 예정된 시각보다 조금 늦게 이륙했다. 비행기가 시간표대로 정확히 움직이지 않는 일이야 늘 있는 일이니, 이 정도 지연은 충분히 봐줄 만했다. 나고야는 작년 겨울 시라카와고 여행시 4박5일 머문 이후 두번째 행이다.

출발 전까지는 비와 트래블카드, 졸음과 보안검색 줄 때문에 정신이 없었지만 비행기가 활주로를 떠나자 비로소 여행을 시작한다는 실감이 났다.


3. 비구름 위에서 만난 푸른 바다와 일본의 산하

밤새 비를 퍼붓던 지상과 달리 구름 위의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항공기 날개 아래로 짙푸른 바다가 펼쳐졌고 해안 가까이에는 크고 작은 섬들이 흩어져 있었다. 하얀 구름과 파란 바다 사이로 비행기 날개가 길게 뻗은 모습이 시원했다.

출발 전부터 마음 한쪽을 차지하고 있던 날씨 걱정도 그 풍경을 보고 있으니 잠시 잊혔다.

일본 열도에 가까워지면서 창밖의 모습은 다시 달라졌다.

산으로 둘러싸인 해안도시와 항구가 보였다. 바다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온 만을 따라 시가지가 형성돼 있었고, 항만시설과 방파제가 한눈에 들어왔다.

조금 더 날아가자 넓은 평야가 나타났다.

논밭과 주택이 바둑판처럼 이어졌고, 여러 갈래의 넓은 강과 제방이 평야를 가로질렀다. 강 위로는 교량이 길게 놓여 있었고 철도와 고속도로가 주택가와 농경지 사이를 복잡하게 지나갔다.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을 찾아가는 여행이었지만 비행기에서 처음 내려다본 일본은 넓은 평야와 물길의 나라처럼 보였다.

창밖 풍경을 계속 사진으로 남기다 보니 어느새 비행기는 고도를 낮추고 있었다.

이륙이 조금 늦기는 했지만 나고야 중부국제공항에는 크게 늦지 않게 도착했다. 이 정도면 여행 일정에 영향을 줄 만한 지연은 아니었다.

활주로에 내려선 뒤 창밖으로 공항 작업자와 다른 항공기들이 보였다. 한국을 떠날 때의 장대비는 온데간데없고 나고야 쪽 하늘은 밝고 쾌청했다.

입국절차를 마친 뒤 공항역으로 내려가 오전 10시 7분 뮤스카이를 타고 나고야역으로 이동했다.

밤새 운전하고 비행기까지 탔지만 일본에 도착했다는 들뜬 기분 때문인지 피곤함보다 다음 일정에 대한 기대가 앞섰다.


4. JR 나고야 다카시마야, 하나였던 가방이 세 개로

나고야역에 도착한 뒤 JR 나고야 다카시마야 백화점으로 향했다.

마님이 눈여겨보던 BAO BAO ISSEY MIYAKE 가방을 사기 위해서였다.

작은 삼각형 조각들이 이어진 독특한 디자인으로, 보는 각도와 빛에 따라 흰색과 은색이 번갈아 드러났다. 평평하게 접히다가 물건을 넣으면 입체적인 형태로 바뀌는 것이 특징이었다.

처음에는 마님 것 하나만 샀다.

쇼핑을 마친 뒤 나고야역 안의 본 보야주(ボン・ヴォヤージュ)에 들어가 점심을 먹었다. 주문한 것은 오구라 샌드 플레이트와 데리야키치킨 핫샌드였다.

오구라 샌드는 구운 식빵 사이에 단팥을 넣은 나고야의 대표 음식이었다. 접시에는 오구라 샌드와 함께 감자튀김과 샐러드가 푸짐하게 담겨 나왔다.

단팥과 식빵의 조합은 우리나라 팥빵이나 앙버터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달랐다. 익숙한 재료인데 샌드위치 형태로 먹으니 나고야에 왔다는 느낌이 났다.

데리야키치킨 핫샌드는 달콤하고 짭짤한 소스가 밴 닭고기를 구운 식빵 사이에 넣은 메뉴였다. 한 끼 식사로 충분할 만큼 든든했다.

오구라 샌드 플레이트는 1,300엔, 데리야키치킨 핫샌드는 1,650엔이었다. 각각 아이스커피가 포함돼 두 사람의 점심값은 모두 2,950엔이었다.

그런데 밥을 먹던 중 가방 한 개가 갑자기 세 개로 늘어나는 일이 벌어졌다.

마님이 언니와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방금 산 가방 이야기를 했다. 일본에서 사니 한국보다 가격이 싸다는 말을 들은 처형과 처제도 하나씩 부탁했다.

두 사람이 함께 다시 움직이면 캐리어까지 끌고 복잡한 역과 백화점을 오가야 했다. 결국 나는 식당에 남아 캐리어와 자리를 지키며 점심을 계속 먹고, 마님 혼자 가방 두 개를 더 사러 백화점으로 뛰어갔다.

나는 오구라 샌드와 감자튀김을 먹으면서 가끔 시계를 확인했다.

우리가 탈 특급 히다 11호는 낮 12시 48분 출발이었다.

마님은 처형과 처제 몫까지 가방 두 개를 더 사 들고 돌아왔다. 곧바로 짐을 챙겨 승강장으로 이동했고, 출발을 약 5분 남겨두고 열차에 올랐다.

쇼핑도 했고, 점심도 먹었고, 갑자기 생긴 가방 심부름까지 모두 마친 뒤 예정된 열차를 탔다.

좌석은 2호차 16C와 16D였다.


5. 히다강을 따라 산속으로 들어간 특급 히다 11호

특급 히다 11호는 나고야를 출발해 기후, 게로를 지나 다카야마까지 가는 열차였다.

차량은 신형 HC85계 하이브리드 열차였다.

객실 모니터에는 엔진과 발전기, 배터리, 주행 모터 사이에서 에너지가 이동하는 모습이 실시간으로 표시됐다. 출발하고 가속할 때는 엔진과 배터리가 힘을 보내고, 속도를 줄일 때는 제동 과정에서 발생한 전기를 배터리에 다시 저장하는 모습이 화면에 나타났다.

기차 안에서 그 화면을 보며 단순히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열차의 작동방식을 살펴보는 재미도 있었다.

나고야를 벗어나 기후를 지나면서 차창 밖의 모습은 서서히 달라졌다.

도시와 평야가 줄어들고 산과 강이 가까워졌다. 다카야마 본선은 산을 길게 뚫고 직선으로 달리기보다 강과 계곡의 굴곡을 따라 이어졌다.

열차는 히다강을 끼고 계속 방향을 바꾸며 달렸다. 커브를 돌 때는 앞쪽 객차가 휘어져 보였고, 어떤 구간에서는 나뭇가지가 창문 가까이를 스쳐 지나갔다.

선로 한쪽에는 강물이 흐르고 다른 쪽에는 산비탈이 바로 붙어 있었다.

우리나라 철도였다면 터널과 교량을 새로 놓아 선형을 펴고 속도를 높였을 법한 곳에서도 이 노선은 오래된 재래선의 굴곡을 그대로 따라갔다.

빠른 이동만 생각하면 답답할 수 있지만 강과 숲, 계곡과 마을을 가까이 바라보며 이동하는 맛이 있었다.

신칸센이 일본의 장거리 고속교통을 담당하더라도 신칸센이 들어가지 않는 산간지역은 여전히 이런 재래선 특급이 이어주고 있었다. 신칸센과 경쟁하다 밀려난 교통수단이 아니라 서로 다른 구간과 역할을 나눠 맡고 있는 셈이었다.

게로역에 도착하자 많은 승객이 내렸다.

온천으로 유명한 곳답게 여행가방을 든 관광객 상당수가 게로에서 하차했다. 게로를 지나면서 객실은 한층 조용해졌다.

열차는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차창 밖에는 짙은 여름 숲과 강물이 계속 이어졌고, 산기슭의 작은 마을과 논밭이 잠깐 나타났다가 다시 숲속으로 사라졌다.

다카야마로 가는 두 시간여의 열차 이동은 단순한 이동시간이 아니었다. 도시와 평야에서 출발해 산과 계곡으로 천천히 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이번 북알프스 여행의 첫 번째 풍경이었다.

특급 히다 11호는 늦지 않게 다카야마에 도착했다.


6. 김치 한 쪼가리도 돈 받는 나라에서 만난 호텔의 환대

숙소는 다카야마역과 노히버스센터 바로 옆에 있는 도큐 스테이 히다 다카야마였다.

다음 날 새벽 가미코치행 버스를 타야 했기 때문에 버스터미널과 가까운 숙소를 선택했는데, 위치뿐 아니라 호텔의 서비스도 기대 이상이었다.

객실은 일본 호텔치고 넉넉했다. 캐리어와 짐을 펼쳐놓아도 크게 불편하지 않았고, 나고야에서 산 가방 세 개도 여유 있게 꺼내볼 수 있었다.

마님이 새로 산 BAO BAO 가방을 직접 들어보니 매장에서 볼 때와는 또 달랐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삼각형 조각들이 각도를 달리하며 흰색과 은색으로 반짝였다.

그런데 객실보다 더 인상 깊었던 것은 호텔의 웰컴서비스였다.

라운지에는 커피와 여러 종류의 음료가 준비돼 있었고, 맥주와 간단한 안주도 투숙객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여행객이 편하게 머물다 갈 수 있도록 세심하게 준비해 놓은 느낌이었다.

일본 여행을 다니다 보면 김치 한 쪼가리도 돈 받고 파는 곳이 적지 않은데, 이 호텔은 막 도착한 손님에게 음료와 맥주, 안주를 넉넉하게 내놓고 있었다.

“김치 한 쪼가리도 돈 받는 나라에서 이런 서비스를 다 보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긴 이동 끝에 도착한 여행객에게는 이런 환대가 크게 다가왔다. 마실 것 하나, 잠깐 쉴 자리 하나를 넉넉하게 제공하는 호텔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했다.

다카야마에서 3박을 이곳으로 정한 것은 제대로 된 선택이었다.

잠시 쉬고 나니 아직 해가 남아 있었다.

가미코치와 노리쿠라가 이번 여행의 중심이었지만 다카야마를 단순한 숙박 거점으로만 지나치기는 아쉬웠다. 카메라를 챙겨 저녁 산책에 나섰다.


7. 다음 날 버스 승강장을 먼저 순찰하다

호텔을 나와 가장 먼저 간 곳은 관광지가 아니라 노히버스센터였다.

다음 날 아침 가미코치로 가는 버스를 타야 했기 때문에 미리 승강장 위치를 확인해 두기로 했다.

버스터미널에는 히라유, 신호타카 방면과 가미코치 방면 안내가 붙어 있었다. 가미코치는 히라유온천에서 갈아타야 한다는 안내도 확인했다.

우리가 탈 버스는 다음 날 오전 6시에 출발하는 첫차였다.

호텔과 버스터미널이 얼마나 가까운지, 어느 승강장에서 타는지, 아침에 어느 방향으로 나오면 되는지를 직접 걸어보며 확인했다.

여행 전 시간표를 아무리 많이 들여다봐도 실제 현장에서 승강장을 한번 보는 것만 못했다. 다음 날 새벽 시간에 허둥대지 않으려면 이런 사전순찰이 필요했다.

버스센터를 확인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이제부터는 다카야마 시내를 천천히 걸어보기로 했다. 다카야마 시내는 작년 시라카와고 여행시 들렀었기 태문에 이번이 두번째였다.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8. 미야가와 강변에서 만난 교복 차림의 학생들

버스센터를 둘러본 뒤 미야가와 강변으로 향했다.

강변에는 ‘히다 다카야마 미야가와 아침시장(飛騨高山宮川朝市)’이라고 적힌 간판이 걸려 있었다.

아침시장이 열리는 곳이지만 저녁에는 장사가 모두 끝난 뒤라 한산했다. 낮에는 관광객으로 붐볐을 거리였지만 해가 기울자 다시 다카야마 주민들의 생활공간으로 돌아가 있었다.

강가에는 오래된 상점과 찻집, 목조주택이 이어졌고 붉은 난간의 다리가 물길을 가로질렀다.

그 길에서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만났다.

짙은색 세일러복 차림의 여학생들이 무리를 지어 걸어오고 있었고, 한 학생은 자전거를 끌고 있었다. 학교가 끝난 뒤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집으로 돌아가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그 장면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관광객을 위해 보존한 옛 건물과 상점 사이로 교복 차림의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지나갔다. 다카야마는 전통거리만 남겨놓은 전시장 같은 도시가 아니라 지금도 사람들이 살고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는 실제 생활공간이었다.

여행지에서 그곳 주민들의 평범한 일상을 만날 때 도시가 훨씬 생생하게 느껴진다.

학생들은 카메라를 든 관광객을 특별히 의식하지 않은 채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며 지나갔다. 미야가와의 물길과 오래된 상점, 교복 차림의 학생들이 한 장면 안에 함께 들어왔다.

강변을 따라 걷다가 오래된 찻집과 상점, 붉은 다리와 골목을 지나 다카야마 동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곳에서 히가시야마 산책길이 이어졌다.


9. 교토 철학의 길을 떠올리게 한 히가시야마 산책길

미야가와 강변을 지나 동쪽 산기슭으로 들어서자 관광객이 눈에 띄게 줄었다.

히가시야마 산책길에는 오래된 절과 신사, 작은 수로와 돌담, 조용한 주택가가 이어졌다. 길가에는 큰 소나무와 석등이 서 있었고 수로에는 맑은 물이 흘렀다.

작은 다리를 건널 때마다 절과 주택의 담장이 번갈아 나타났다.

걷다 보니 교토의 철학의 길이 떠올랐다.

철학의 길처럼 수로를 따라 걷고 길 주변에 사찰과 주택이 이어졌다. 물론 교토처럼 널리 알려진 관광명소는 아니었다. 길도 조금 더 소박했고 유명 카페나 기념품점이 줄지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좋았다.

관광객이 적고 주민들의 생활공간과 종교공간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었다. 교토의 철학의 길이 잘 정돈된 고도(古都)의 산책길이라면, 다카야마의 히가시야마 산책길은 산간도시의 수로와 골목, 절과 숲을 가까이서 따라가는 길이었다.

길을 따라 주택가와 수로를 지나고, 큰 계단 위에 자리 잡은 신사와 오래된 종루도 만났다.

다이오지 절 입구에는 일본 선승의 모습을 그린 판이 세워져 있었다. 선승 두 명이 나란히 서 있는 익살스러운 그림이었고, 얼굴 부분을 비워놓아 그 뒤에 서면 그림 속 선승이 된 것처럼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해 놓았다.

무게감 있는 사찰 입구에 이런 소박하고 재미있는 장치가 놓여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다이오지의 산문은 주변의 소나무와 돌담 사이에서 웅장하면서도 차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해가 기울면서 나무와 지붕, 돌계단에 부드러운 저녁빛이 내려앉았다.

전신주와 복잡하게 얽힌 전깃줄 뒤로 해가 넘어가는 모습도 다카야마의 저녁 풍경답게 느껴졌다. 오래된 사찰과 목조주택만 따로 보존된 것이 아니라 전선과 자동차, 평범한 주택까지 모두 한 도시 안에 함께 있었다.

이날 산책 기록은 약 2시간, 4.7km였다.

평균속도는 시속 3.1km로 나왔지만 사진을 찍고 수로와 사찰을 들여다보며 걸었으니 실제 체감은 훨씬 느긋했다.

다카야마는 가미코치와 노리쿠라로 들어가기 위한 숙박 거점 정도로 생각했던 도시였다.

그러나 첫날 저녁 미야가와 강변과 히가시야마 산책길을 걸으며 생각이 달라졌다. 산과 수로, 오래된 절과 주민들의 생활이 어우러진 도시 자체가 하나의 여행지였다.


10. 패밀리마트에서 준비한 가미코치의 아침

저녁 산책을 마친 뒤 곧바로 호텔에 들어가지 않고 패밀리마트에 들렀다.

다음 날은 오전 6시 첫 버스를 타야 했기 때문에 호텔에서 느긋하게 아침을 먹을 시간이 없었다. 게다가 가미코치에 들어간 뒤에는 언제 어디에서 식사를 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패밀리마트에서 샌드위치와 우유, 빵을 비롯해 아침에 먹을 것과 가미코치에서 걷다가 먹을 간식거리를 챙겼다.

새벽에 호텔에서 간단히 먹을 것과 배낭에 넣어갈 것을 나누어 생각하며 골랐다. 산속에서 먹을 음식이라 화려할 필요는 없었다. 쉽게 꺼내 먹을 수 있고, 오래 걸어도 부담이 적은 것이면 충분했다.

장보기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 배낭과 카메라를 다시 확인했다. 다음 날 입을 옷도 미리 꺼내놓고, 패밀리마트에서 산 샌드위치와 우유, 빵도 빠뜨리지 않도록 한곳에 모아두었다.

다음 날은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하던 가미코치로 들어가는 날이었다. 오전 6시 첫 버스를 타려면 새벽부터 움직여야 했다.

버스센터와 승강장은 저녁에 직접 확인했으니 아침에 길을 헤맬 걱정은 없었다.

남은 걱정은 날씨였다.

가미코치는 산속이라 날씨가 갑자기 변할 수 있었고, 오후에는 소나기가 올 수도 있다고 했다. 대전을 출발할 때 우산을 두고 나온 사실도 다시 생각났다.

“녈은 날씨가 좋아야 헐 틴디.”

인터넷과 사진으로 수없이 보았던 다이쇼이케와 갓파바시, 아즈사강과 호타카 연봉을 직접 보게 될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알람을 새벽 시간에 맞추고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 아침, 이번 여행의 진짜 목적지인 가미코치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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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에  박정희朴正熙 1917-1979 전대통령에  대해 "문경공립보통학교에 근무할 때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군관으로 지원했으나 1차에 탈락하고 재차 응모했다"면서 "당시의 정황을 <만주신문>은 "혈서 군관 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로부터"라는 제목의 기사로 1939년 3월 31일자에 보도했다"라고 밝혔다. 훈도란일제강점기 초등학교 교사를 일컫는 말이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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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항일과 친일의 역사 따라 현충원 한 바퀴》는 현충원 셀프 여행을 위해 만들어진 가이드북‘이다. 이 책을 쓰는 내내 그 점을 염두에두고 기록해나갔다. 그래서 바람이 하나 있다. 우리 일상과 가까운 곳에 있지만 쉽게 찾지 못했던 여러 국립묘지를, 이 책 한 권 들고 가족·친구·연인과 함께 떠나보았으면 하는 것이다. 장소 한 곳당 반나절이면 충분하다. 단언컨대 국립묘지에 어떤 역사가 숨어 있고, 누가 잠들었는지 알고 현장을 찾는다면 우리가 느끼게 될 보람은 투자한 시간보다 몇 배는 더 클 것이다. - P4

2009년 국가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국가공인 친일파로 규정된 7인(김백일, 신응균, 신태영, 이응준, 이종찬, 백낙준, 김홍준)을비롯해 평생 독립운동을 했지만 결국 이들 발밑에 잠들게 된 대한민국임시정부 및 의열단, 광복군 출신 애국지사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채 친일파와 지사들의 공식적인 행적에만 집중해 서술했다. 이유는 하나, 이 책을 살핀 뒤 현장에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기 때문이다. 국가공인 친일파의 묘역에서 독립운동가의 묘역을 바라보자. 그 감정을 잊지 않기를 희망한다. - P5

이외에도 우리 정부가 친일파로 공인하지 않았지만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비공인 친일파 5인에 대해서도 기술했다. 국립서울현충원 최중심부에 잠든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해 애국가의 주인공 안익태, 한국전쟁 때 한강철교를 폭파한 채병덕 육군참모총장 등이 있다. - P5

제2부는 국립대전현충원이다. 국립서울현충원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100만 평에 육박하는 거대한 땅에 마련된 국립묘지다. 충남의 자랑인 계룡산 줄기 따라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친 ‘영웅들이 잠들어 있다. - P5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곳 국립대전현충원 역시 국립서울현충원과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 친일과 항일의 갈림길에서 다른 길을 선택한친일파와 독립운동가가 함께 잠들어 있다. 이들 중에는 국가에서 공인한 친일파인 신현준, 김석범, 송석하, 백홍석이 있다. 2020년 7월 10일백수를 누리고 사망한 국가공인 친일파 백선엽 역시 논란 끝에 장군제2묘역에 영면했다. - P5

제3부는 수유리 4.19국립묘지와 서울 효창공원을 다뤘다. 서울시강북구 북한산 초입에 자리한 민주열사와 애국지사의 무덤, 그 안에 기생하는 친일파와 군부독재의 흔적에 관한 이야기다. 제3부는 앞선 1부와 2부에 비해 덜 무겁다. 우리 일상 속에 스며든 휴식 공간인 수유리4.19국립묘지를 가볍게 산책하는 마음으로 펼쳐놨다. 지금 우리가 향유하는 대한민국이 어떠한 과정과 희생을 거쳐 탄생하게 됐는지 수유리 4.19 국립묘지 곳곳에 잠든 지사들의 이야기를 통해 확인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다. - P6

한눈에 보는국립서울현충원추천 답사
•서울현충원 만남의광장→• 현충탑→・부부위패묘(김홍준)→• 이승만대통령묘소→• 유공자제1묘역(백낙준)→•장군제1묘역(김백일, 채병덕, 신응균)→•박정희대통령묘소→•장군제3묘역(이종찬, 정일권)→•약수터 →•장군제2묘역(신태영, 이응준, 임충식)→•대한독립군무명용사위령탑→•유공자제2묘역(안익태 등)→●임시정부요인묘역(이상룡, 박은식, 신규식, 지청천, 김성숙 등)→•김익상, 이재명, 박열 등→•충열대→•애국지사묘역(박재혁, 김상옥, 조명하, 이종암, 남자현 등)→•만남의집 ‘갈비탕으로 마무리 - P14

국립서울현충원은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사망한 국군장병을 위해 처음 만들어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특별시 동작동 일대에 국립묘지를 조성할 것을 결정했고, 1954년 삼일절을 기념해 공사가 시작됐다. 2년이 지난 1956년 4월 대통령령으로 첫 번째 안장이 이루어졌다. 한국전쟁 중 이름 없이 죽어간 무명용사의 묘였다. 이듬해인1957년 4월부터 신분이 확인된 군인들을 중심으로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 P16

국가공인 친일파‘도 일곱 명이 있다. 바로

김백일 신응균 신태영 이응준 이종찬 
김홍준 백낙준

특히 국립서울현충원 장군묘역에 잠든 신태영과 이응준의 묘소 위치가 문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요인묘역과 애국지사묘역 머리맡에 있다. 지사들의 묘소를 바라보고 참배를 하면 어쩔 수 없이 국가공인 친일파에게도 인사를 드리는 상황이 빚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수십 년이흘렀다. - P17

대통령묘소
박정희1명

장군제1묘역14명
강태민(6번)김용기 (140번)김정호(39번)김백일(국가공인/19번)문용채(72번)박범집(1번)박춘식(92번)신학진(275번)채병덕(12번)안병범(232번)최창언(126번)양국진(118번)신응균(국가공인/288번)윤태일(134번)

장군제2묘역3명
신태영(국가공인/3번)이응준(국가공인/6번) 임충식(2번)

장군제3묘역6명
김용국(20번)이종태(42번)김응조(52번)정일권(4번)김일병(40번)이종찬(국가공인/1번)

유공자제1묘역3명
김정렬(33번)백낙준(국가공인/26번)엄민영(3번)

유공자제2묘역2명
안익태(7번)조진만(8번)

위패2명
김호량(부부위패 02-70)김홍준(국가공인/부부위패05-197)

기타
김준원(충혼당2-212-143)박성도(충혼당2-213-127)안광수(7묘역-5-08)최복수(54묘역-4-2195)4명 - P19

임시정부요인묘역
임시정부요인묘역은 1993년 중국 상하이 만국공묘에 안치되어 있던 임시정부 요인 다섯 명을 모셔오면서 조성됐다. 매우 잘한 일이었으나 안타깝게도 국가공인 친일파 두 명이 잠든 장군제2묘역 하단에 묘역을 조성했다.
- P20

김영삼 대통령이 묘역 하단에 ‘민족정기民族正氣라는 글까지 새겨 넣은 제단을 조성하며 독립 의지를 고취했으나, 결과적으로 친일파의 무덤 아래 지사들을 모신 것은 씻을 수 없는 과오가 됐다. - P20

2020년 4월 기준, 임시정부요인묘역에 잠들어 있는 분들이다.
박은식 대한민국임시정부 2대 대통령이상룡 초대국무령,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대명사신규식 국무총리 대리 및 외무총장 역임김동삼 만주 호랑이라 불렸던 서로군정서 참모장지청천 군무총장 및 광복군 총사령을 역임 - P20

오영선 법무총장. 홍진 국무령
박찬익 외무총장. 이유필 내무총장
양기탁 국무령. 황학수 생계부장
노백린 국무총리. 조경한 비서장
김인전, 손정도, 이강 의정원 의장
윤세용 국무위원 - P21

유관순 3·1운동의 불꽃
이상설과 이위종 헤이그 특사
홍범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냄
오동진 정의부 총사령
김익상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폭탄 의거를 유일하게 성공시킴

등 독립운동을 한 의사와 열사 115위와 한국전쟁 중 납북된 조소앙, 엄항섭, 박열 등 15위도 함께 모셔져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조카사위이자 5.16군사혁명의 주역인 김종필 전총리가 무후선열제단 헌시비를 작성했다. - P22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 아래쪽으로 조성된 묘역이 독립유공자들이 잠든 곳이다.
국립서울현충원이 직접 작성한 소개 글이다.
애국지사 및 임시정부 요인, 무후순국선열을 통틀어 추모하는 충열대가 있다. 1906년 을사5적 처단을 시도하고 군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한 기산도, 상해의열단 소속으로 1923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김상옥,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민중계몽운동을 벌인 서재필, 친일 외교 고문인 미국인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를 미국에서 척살한 장인환과 전명운, 3·1운동에 참여한 이종일, 권병덕,
라인협 등 민족대표 14위와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애국지사 23위가안장되어 있다. - P24

간도특설대 중대장에서 여순사건 계엄사령관으로1946년 육군 중위로 임관한 김백일은 불과 4년 뒤인 1950년에 대한민국 육군 소장에 오른다. 1948년 10월에 발생한 여순사건 진압이결정적 계기가 됐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부터 10월 27일까지 전라남도 여수시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 군인 2000여 명이 중위 김지회 등을 중심으로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자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여수와 순천 지역에 거주했던 무수한 민간인까지 살해됐다. - P29

김백일의 조부 김영학은 만주 지역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만세시위를 전개해 간도지역 3·1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는 이유로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손주인 김백일의 길은 달랐다. 김백일은 열아홉 살 때인 1936년 일제가 세운 괴뢰정부 만주국의 펑톈군관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향후 간도특설대의 핵심이 되는 신현준, 김석범, 김홍준, 송석하 등을 만났다. 펑톈군관학교를 나온 김백일은 1938년 항일무장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창설된 간도특설대에 설립부터 기여했다. 해방 때까지 김백일은 간도특설대에서 중위를 거쳐 1944년 대위에 진급한 뒤 중대장에 임명됐다. 김백일의 간도특설대 활동을 높이 평가한 일본 만주국 정부는1943년 김백일에게 훈5위에 해당하는 ‘경운장‘을 수여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는 이러한 활동을 근거로김백일을 국가공인 친일파로 규정했다. - P31

간도특설대가 집행했다는 삼광정책이란 "모두 죽이고, 모두 태우며, 모두 빼앗는다"는 뜻으로, 위원회는 "특설대 설립부터 해산까지108 차에 달하는 토벌 활동을 전개했고 강간, 강탈, 고문, 구타, 방화 등죄악은 부지기수"라고 설명했다. - P33

국가공인 친일파 신응균은 1921년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났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이자 30년 넘게 일본 군인으로 복무한 친일파 신태영의 장남이다. 신응균이 태어날 때 신태영은 일본 나고야 3사단에서 복무 중이었다. - P37

신응균은 아버지 신태영을 따라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후 20세가 되는 1940년 2월에 53기로 졸업했다. 이후 일본 육군과학학교 포병과, 육군중포병학교에서 신식 군사기술을 습득한다. 1943년 12월에대위로 진급한 신웅균은 1945년 오키나와 전투가 발발하자 일본군 장교로 참전했다. 이 점이 신응균을 국가공인 친일파로 선정하는 주된 이유가 됐다. - P37

2020년 1월 2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광복회 시무식을 진행한 김원웅 광복회장은 "천황폐하 만세를 외쳤던 친일파들이 대한민국에서 가장명당자리인 이곳에 잠들어 있다"면서 "이런 이들을 두고 (극우 언론에서) 국민화합과 단결을 외치는데 이게 일제강점기 내선일체와 뭐가 다른가"라고 일갈했다. - P46

그러나 장군제2묘역 입구에 2020년을 맞아 새롭게 세워진 현판에는 "한국전쟁 중인 1952년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신태영 중장 등 6위가 모셔져 있다"면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하신 장군들의 숭고한얼을 기리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추모해주시기를 바란다"라고만 기록됐다. 친일 행적과 관련된 내용은 어디에도 없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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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 산속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여름이 시원해진다

* 복용산과 박산을 이어 걸은 동네 뒷동산 산행

게실염을 앓고 난 뒤라 아직 예전처럼 긴 종주산행에 나설 때는 아니었다. 몸이 얼마나 회복됐는지 살펴볼 겸, 집 뒤의 복용산과 박산을 천천히 이어 걷기로 했다. 오늘의 목표는 정상 정복도 기록 갱신도 아니었다. 무리하지 않고 살방살방 걸으며 산바람이나 쐬고 오는 것이었다.

장비도 동네 뒷산에 맞게 간단히 챙겼다. 반바지에 면티를 입고 햇볕을 가릴 모자를 썼다. 땀을 닦을 수건 한 장과 이탈리아제 ASOLO 경량 등산화를 준비했다. 가볍고 발을 잘 잡아 주는 신발이라 이런 뒷산 산행에 그만이다. 물은 따로 챙기지 않고 룰루레몬 물병에 얼음을 가득 넣은 디카페인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란데 한 잔을 담았다. 말 그대로 동네 뒷동산 차림이었다.

아파트에서 출발해 스타벅스에 들러 커피를 받은 뒤 복용산으로 향했다. 산 입구까지 이어지는 아스팔트길은 햇볕을 그대로 받아 뜨거웠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 더위가 몸에 달라붙었다.

그런데 복용산 숲으로 들어가자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나무들이 햇볕을 가려 주고 숲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조금 전까지 뜨거운 도로 위를 걷던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시원했다. 복용산은 높지도 않고 램블러 인증 배지도 없는 말 그대로의 동네 뒷산이다. 그래도 흙길과 솔잎이 깔린 숲길을 걷다 보니 유명한 산이 부럽지 않았다. 여름에는 산의 높이보다 그늘과 바람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용산을 내려와 박산으로 향하려면 다시 한동안 아스팔트길을 걸어야 했다. 숲을 벗어나자마자 뜨거운 열기가 다시 몸을 감쌌다. 산속에서는 그렇게 시원했는데 도로 위는 숨이 턱 막혔다.

“아, 덥다. 역시 산이 훨씬 시원하네.”

박산으로 들어서자 다시 살 것 같았다. 박산은 박씨들의 산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그 내력을 살펴보면 정상 부근에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의 아버지 박항한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묘 옆의 비석을 살펴보니 고령 박씨 박항한의 묘임을 알리는 글과 함께 그가 받은 품계와 벼슬이 새겨져 있었다. 박문수 집안의 묘역이 자리한 고령 박씨의 산이어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박산’이라 불러온 것이다. 낮은 동네 산인 줄만 알았는데, 산 이름 속에는 조선시대 한 집안의 내력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 박문수는 1728년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분무공신 2등에 책록되고 영성군에 봉해졌다. 공신의 아버지에 대한 예우로 그의 아버지 박항한은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종1품에)에 추증되고 영은군에 봉해졌다.

박산은 복용산보다 조금 높고 경사도도 제법 있었다. 그래도 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이 시원해 힘든 줄 모르고 걸었다. 정상에는 램블러 인증 배지도 있어 복용산보다는 어엿한 산 대접을 받는 곳이기도 하다.

박산 정상에서는 유아숲체험원까지 고도를 쭉 낮추며 내려갔다. 높은 소나무 아래 통나무 놀이시설과 쉼터가 펼쳐진 모습이 제법 좋았다. 잠시 둘러본 뒤 내려온 만큼을 그대로 다시 올라 박산 정상으로 돌아왔다. 오늘 기록의 고도 그래프에 두 개의 봉우리가 생긴 이유다.

박산을 내려온 뒤 또다시 아스팔트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오르막보다 도로가 더 힘들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길에서는 햇볕이 머리 위로 그대로 쏟아졌다.

“야, 이거 더워 죽겄다.”

뜨거운 길을 지나 다시 복용산 숲으로 들어갔다. 하루에 같은 산을 두 번째 만났지만 반가웠다. 숲의 그늘과 바람이 또 한 번 열기를 식혀 주었다. 복용산을 넘어 마지막 아스팔트길을 걸은 뒤 집으로 돌아왔다.

총 8.9km, 3시간, 누적고도 465m. 살방살방 걷자고 나선 것치고는 제법 걸었다. 그래도 몸에 이상이 생길 만큼 속도를 내거나 무리하지는 않았다. 게실염 뒤 다시 산을 걷기 시작했다는 데 의미가 있는 하루였다.

높은 산도 아니고 대단한 풍경이 있는 코스도 아니다. 그러나 뜨거운 아스팔트와 시원한 숲길을 몇 번씩 오가고 나니 확실히 알겠다. 한여름에는 산이 최고다. 그늘 아래로 바람 한 줄기만 불어도, 산에 들어온 이유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ㅁ 비석 전면에 새겨진 한자는 우측부터 세로로

純忠積德輔祚功臣贈 (순충적덕보조공신증)
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 (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
高靈朴公諱恒漢之墓 (고령박공휘항한지묘)

[해석]
˝순충적덕보조공신으로 추증된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고령 박씨 항한의 묘˝
* 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輔祚功臣): 충성을 다하고 덕을 쌓아 나라를 도운 공신이라는 뜻의 공신호
* 증(贈): 생전에 지낸 벼슬이 아니라 사후에 추증했다는 뜻
* 숭정대부(崇政大夫): 조선시대 종1품 문관 품계
*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의정부의 종1품 관직
* 고령 박공(高靈朴公): 고령 박씨 박공
* 휘 항한(諱恒漢): 이름은 항한, ‘휘‘는 돌아가신 분의 이름을 높여 부르는 말로, 성함이 ‘항한‘이시라는 뜻
* 지묘(之墓): 그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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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철 - 2집 Myself [재발매]
신해철 노래 / 대영에이브이 / 1991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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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고흐의 불꽃같은 삶을 다시 생각하며

「나에게 쓰는 편지」
• 노래 : 신해철
• 작사 : 신해철
• 작곡 : 신해철
• 편곡 : 신해철
• 수록앨범 : 『Myself』(정규 2집)
• 발매 : 1991년 3월 20일

────────────────────────────

난 잃어버린 나를 만나고 싶어
모두 잠든 후에 나에게 편지를 쓰네
내 마음 깊이 초라한 모습으로
힘없이 서 있는 나를 안아주고 싶어

난 약해질 때마다 나에게 말을 하지
넌 아직도 너의 길을 두려워하고 있니
나의 대답은 이젠 아냐

언제부턴가 세상은 점점 빨리 변해만 가네
나의 마음도 조급해지지만
우리가 찾는 소중함들은 항상 변하지 않아
가까운 곳에서 우릴 기다릴 뿐 (오)

이제 나의 친구들은 더 이상 우리가 사랑했던
동화 속의 주인공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고흐의 불꽃같은 삶도, 니체의 상처 입은 분노도
스스로의 현실엔 더 이상 도움될 것이 없다 말한다
전망 좋은 직장과 가족 안에서의 안정과
은행 구좌의 잔고 액수가 모든 가치의 척도인가

돈, 큰 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
그런 것들에 과연 우리의 행복이 있을까

나만 혼자 뒤떨어져 다른 곳으로 가는 걸까
가끔씩은 불안한 맘도 없진 않지만
걱정스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친구여,
우린 결국 같은 곳으로 가고 있는데

때로는 내 마음을 남에겐 감춰왔지
난 슬플 땐 그냥 맘껏 소리 내 울고 싶어
나는 조금도 강하지 않아

언제부턴가 세상은 점점 빨리 변해만 가네
나의 마음도 조급해지지만
우리가 찾는 소중함들은 항상 변하지 않아
가까운 곳에서 우릴 기다릴 뿐 (오)

언제부턴가 세상은 점점 빨리 변해만 가네
나의 마음도 조급해지지만
우리가 찾는 소중함들은 항상 변하지 않아
가까운 곳에서 우릴 기다릴 뿐 (오)

────────────────────────────

신해철의 「나에게 쓰는 편지」에서 ‘고흐의 불꽃같은 삶도, 니체의 상처 입은 분노도’라는 구절은 오랫동안 내게 세상의 기준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끝까지 걸어간 사람들을 상징하는 말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유경희의 『반 고흐』를 읽고 독서보고와 분석보고를 작성하면서, 나는 이 노랫말을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책 속의 반 고흐는 흔히 알려진 ‘불꽃같은 삶’만으로 설명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여성들의 거절을 자신의 방식대로 해석했고, 공동체를 꿈꾸면서도 타인과 조화를 이루는 데에는 서툴렀다. 동생 테오의 희생에 크게 의지했고, 가족사와 유년기의 상처, 정신질환과 가난 속에서 평생 흔들렸다. 그림을 향한 집착은 위대한 예술이 되었지만, 인간관계에서는 수많은 갈등과 실패를 남겼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고흐의 불꽃같은 삶’이라는 표현을 조금 다르게 이해한다. 그것은 낭만적인 천재의 삶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상처와 불안, 고통 속에서도 끝내 붓을 놓지 않았던 한 인간의 치열한 생애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다가온다. 고흐는 불꽃처럼 자유롭게 산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평생 불길 속에 있으면서도 그림만은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에 가까웠다.

신해철의 노래는 세상이 점점 빨라지고, 직장과 가족의 안정, 은행 잔고와 사회적 지위가 모든 가치의 척도처럼 여겨지는 현실을 묻는다. 그 질문 앞에서 고흐의 삶은 단순한 찬양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만드는 사례가 된다. 돈과 안정이 삶에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만으로 인간의 행복과 삶의 가치를 모두 재단할 수 있느냐는 물음이다.

결국 이번 독서를 통해 나는 위대한 예술은 천재성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 뒤에는 인간의 결함과 상처, 주변 사람들의 희생과 사랑, 현실의 제약과 고통이 함께 놓여 있었다. 그래서 이제 ‘고흐의 불꽃같은 삶’이라는 가사는 멋진 수사로만 들리지 않는다. 인간이 자신을 잃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무엇을 끝까지 붙들어야 하는지를 묻는 오래된 질문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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