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 산속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여름이 시원해진다
* 복용산과 박산을 이어 걸은 동네 뒷동산 산행
게실염을 앓고 난 뒤라 아직 예전처럼 긴 종주산행에 나설 때는 아니었다. 몸이 얼마나 회복됐는지 살펴볼 겸, 집 뒤의 복용산과 박산을 천천히 이어 걷기로 했다. 오늘의 목표는 정상 정복도 기록 갱신도 아니었다. 무리하지 않고 살방살방 걸으며 산바람이나 쐬고 오는 것이었다.
장비도 동네 뒷산에 맞게 간단히 챙겼다. 반바지에 면티를 입고 햇볕을 가릴 모자를 썼다. 땀을 닦을 수건 한 장과 이탈리아제 ASOLO 경량 등산화를 준비했다. 가볍고 발을 잘 잡아 주는 신발이라 이런 뒷산 산행에 그만이다. 물은 따로 챙기지 않고 룰루레몬 물병에 얼음을 가득 넣은 디카페인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란데 한 잔을 담았다. 말 그대로 동네 뒷동산 차림이었다.
아파트에서 출발해 스타벅스에 들러 커피를 받은 뒤 복용산으로 향했다. 산 입구까지 이어지는 아스팔트길은 햇볕을 그대로 받아 뜨거웠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 더위가 몸에 달라붙었다.
그런데 복용산 숲으로 들어가자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나무들이 햇볕을 가려 주고 숲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조금 전까지 뜨거운 도로 위를 걷던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시원했다. 복용산은 높지도 않고 램블러 인증 배지도 없는 말 그대로의 동네 뒷산이다. 그래도 흙길과 솔잎이 깔린 숲길을 걷다 보니 유명한 산이 부럽지 않았다. 여름에는 산의 높이보다 그늘과 바람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용산을 내려와 박산으로 향하려면 다시 한동안 아스팔트길을 걸어야 했다. 숲을 벗어나자마자 뜨거운 열기가 다시 몸을 감쌌다. 산속에서는 그렇게 시원했는데 도로 위는 숨이 턱 막혔다.
“아, 덥다. 역시 산이 훨씬 시원하네.”
박산으로 들어서자 다시 살 것 같았다. 박산은 박씨들의 산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그 내력을 살펴보면 정상 부근에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의 아버지 박항한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묘 옆의 비석을 살펴보니 고령 박씨 박항한의 묘임을 알리는 글과 함께 그가 받은 품계와 벼슬이 새겨져 있었다. 박문수 집안의 묘역이 자리한 고령 박씨의 산이어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박산’이라 불러온 것이다. 낮은 동네 산인 줄만 알았는데, 산 이름 속에는 조선시대 한 집안의 내력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 박문수는 1728년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분무공신 2등에 책록되고 영성군에 봉해졌다. 공신의 아버지에 대한 예우로 그의 아버지 박항한은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종1품에)에 추증되고 영은군에 봉해졌다.
박산은 복용산보다 조금 높고 경사도도 제법 있었다. 그래도 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이 시원해 힘든 줄 모르고 걸었다. 정상에는 램블러 인증 배지도 있어 복용산보다는 어엿한 산 대접을 받는 곳이기도 하다.
박산 정상에서는 유아숲체험원까지 고도를 쭉 낮추며 내려갔다. 높은 소나무 아래 통나무 놀이시설과 쉼터가 펼쳐진 모습이 제법 좋았다. 잠시 둘러본 뒤 내려온 만큼을 그대로 다시 올라 박산 정상으로 돌아왔다. 오늘 기록의 고도 그래프에 두 개의 봉우리가 생긴 이유다.
박산을 내려온 뒤 또다시 아스팔트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오르막보다 도로가 더 힘들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길에서는 햇볕이 머리 위로 그대로 쏟아졌다.
“야, 이거 더워 죽겄다.”
뜨거운 길을 지나 다시 복용산 숲으로 들어갔다. 하루에 같은 산을 두 번째 만났지만 반가웠다. 숲의 그늘과 바람이 또 한 번 열기를 식혀 주었다. 복용산을 넘어 마지막 아스팔트길을 걸은 뒤 집으로 돌아왔다.
총 8.9km, 3시간, 누적고도 465m. 살방살방 걷자고 나선 것치고는 제법 걸었다. 그래도 몸에 이상이 생길 만큼 속도를 내거나 무리하지는 않았다. 게실염 뒤 다시 산을 걷기 시작했다는 데 의미가 있는 하루였다.
높은 산도 아니고 대단한 풍경이 있는 코스도 아니다. 그러나 뜨거운 아스팔트와 시원한 숲길을 몇 번씩 오가고 나니 확실히 알겠다. 한여름에는 산이 최고다. 그늘 아래로 바람 한 줄기만 불어도, 산에 들어온 이유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ㅁ 비석 전면에 새겨진 한자는 우측부터 세로로
純忠積德輔祚功臣贈 (순충적덕보조공신증)
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 (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
高靈朴公諱恒漢之墓 (고령박공휘항한지묘)
[해석]
˝순충적덕보조공신으로 추증된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고령 박씨 항한의 묘˝
* 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輔祚功臣): 충성을 다하고 덕을 쌓아 나라를 도운 공신이라는 뜻의 공신호
* 증(贈): 생전에 지낸 벼슬이 아니라 사후에 추증했다는 뜻
* 숭정대부(崇政大夫): 조선시대 종1품 문관 품계
*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의정부의 종1품 관직
* 고령 박공(高靈朴公): 고령 박씨 박공
* 휘 항한(諱恒漢): 이름은 항한, ‘휘‘는 돌아가신 분의 이름을 높여 부르는 말로, 성함이 ‘항한‘이시라는 뜻
* 지묘(之墓): 그의 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