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무결한 예술 작품."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가장 위대한 소설 세 편, 「안나 카레니나」, 「안나 카레니나」, 「안나 카레니나」."
-윌리엄 포크너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회 소설이자 반사회 소설." 
- 토마스 만 - P-1

작가를 말하다-레프 톨스토이
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위대한 사상가인 레프 톨스토이(1828~1910)는 러시아의 야스나야 몰라나에서 태어났다. 백작 집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친척집에서 자랐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다 그만두고 고향으로돌아와 농지를 경영하고, 농노 계몽을 위해 일했다. 크림 전쟁에 참전하고, 교육에 대한 관심으로 자신의 영지에 학교를 세우고, 농노의 자녀들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평화 사상의 설파 금욕 생활과 빈민 구제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톨스토이는 특히 민중들의 사랑을 독차지한 사상가로도 알려져 있다. 자기완성과 사적소유 부정이라는 철학적 관점에 기초해 그가 살던 시대의 러시아 사회와 종교를 비판했다. 러시아 정교에서 파문을 당하고 정부의 압박을 받았지만, 사람들의 강력한 지지를 이끌어 냈다.
"러시아 황제는 모든 걸 가졌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아무것도가지지 않았지만 모든 걸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러시아 황제다"라고 할 만큼 살아 있는동안에도 사랑받는 슈퍼스타였다. 1910년 여행 중 세상을 떠나 고향 야스나야 폴라나숲에 묻혔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이반 일리치의 죽음」 「크로이처 소나타부활」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19세기 비평가 매튜 아놀드가 ‘그의 작품은 예술 작품이 아니라 삶의 파편이다"라는 평가를 남길 정도로 톨스토이는 삶의 의미를 탐색하는방대한 작품 세계를 완성했다. - P-1

작품을 말하다-안나 카레니나
Анна Каренина

‘안나 카레니나‘는 전쟁과 평화」 「부활과 더불어 톨스토이의 3대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8부작 239장으로 구성된 방대한 작품으로, 사랑과 결혼, 가족 문제라는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당대 러시아의 시대상과 개인의 내면을 생생하게 묘사한 고전이다.
많은 사람들이 안나와 브론스키 안나의 남편 카레닌의 삼각관계 이야기가 이 소설의 전부라고 오해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고위 공직자의 아내인 안나가 다른 남성과 사랑에 빠지면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는 이야기와 사랑하는 여인에게 청혼해 이상적인 가정을이루려는 농촌 귀족 지주 레빈의 이야기 두 축으로 전개된다.
톨스토이는 의도적으로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에 대비되는 레빈과 키티의 사랑 이야기를 교차시켜 엮어 놓았다. 레빈의 이야기가 안나 못지않게 중요한 비중으로 다루어지는설정은 작품에 긴장감을 더하면서 작가가 제시하는 사랑과 인생의 의미를 깊이 성찰하게 만든다.
안나 카레니나는 단순한 연애 소설에 머물지 않는다. 다양한 주제, 여러 인물 유형을 담은 광범위한 작품이다. 귀족층의 위선과 허위의식, 종교와 교육 문제, 가족 문제와 농업전쟁과 일상 등 사회 구조적인 모순부터 사랑에 빠지는 순간의 기쁨, 불안과 고통, 질투와 증오, 광기의 감정들이 가져오는 인간적 고뇌, 심리적 통찰까지 꿰뚫는다.
톨스토이가 "나는 모든 것을 ‘안나 카레니나 속에 썼다.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할정도로 톨스토이의 모든 사회적, 윤리적, 종교적 고민을 녹여 낸 대표작이다. 농노제 붕괴에서 러시아 혁명에 이르는 19세기 후반 러시아 사회가 겪은 역사적 과도기를 다양한등장인물과 사실적인 묘사로 생생히 그려 낸 이 작품은 오늘날까지 전 세계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 P-1

세계를 말하다

작품에 들인 시간
안나 카레니나는 1875년부터 1877년까지 잡지 <러시아통보>에 연재되었다. 2년 반가량의 긴 시간 동안 톨스토이는 아동 교육용 원고를 제외하고는 오로지 이 작품에만 몰두했다. 소설 구상에서 수정, 출간까지 1870년대 대부분을이 작품의 창작에 매달렸다고 한다.

실제 사건
톨스토이는 실제 사건에 착안해 안나 카레니나의 비극적 죽음을 그려 냈다. 1872년 안나 피로고바라는 여성의 화물 열차 투신 사건이 일어났다. 애인에게 버림받고 야스나야 폴랴나 근처기차역에서 달리는 화물 열차에 몸을 던진 사건이었다. 톨스토이는 당시 기차역 막사에 안치된 안나 피로고바의 사체를 일부러 찾아가 살펴볼 정도로 이 사건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배우들이 사랑한 주인공
안나 카레니나는 세계문학에 등장하는 인물 중가장 아름다운 부인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주인공으로 손꼽힌다. 소설 원작을 토대로 다양한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그레타 가르보 비비안 리 소피 마르소 등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이 독보적인 매력을 지닌 아름답지만 불행한여인 안나 카레니나를 연기했다.

톨스토이의가출
톨스토이도 마냥 행복한 가정을 꾸리지는 못했던 것 같다.
톨스토이가 살아생전 작성한 유언장을 둘러싸고 그의 가족들끼리 겪었던 갈등도 깊었다. 톨스토이는 가족의 불화도견디기 힘들었지만, 그가 사유 재산을 부정하면서 자신이누리던 모든 것에 말할 수 없는 수치심과 고통을 느껴 집을 벗어나고 싶어했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심정을 유일하게이해하는 딸 알렉산드라와 결국 가출했다. 모든 신문이 그의 가출 소식을 전했고, 그가 탄 기차마다 탐정과 기자들로 가득했다고 한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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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모습을 지녔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불행을 안고 산다.

모스크바의 오블론스키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스티바는 아내 돌리를 두고 부적절하게 처신했다.
풀기 어려운 문제에 삶이 제시하는 해답은 그에게 하나였다.
바로 그날그날의 요구대로 사는 것이었다.

절망에 빠진 돌리 앞에 전보가 도착했다.
페테르부르크에 사는 스티바의 동생 안나가 다음 날 모스크바에 도착한다는 소식이었다.
집으로 와 달라는 스티바의 요청에 안나가 응한 것이었다.

스티바가 안나를 맞이하러 기차역으로 나갔다.
안나와 여행길에 마주친 브론스카야 백작 부인은 아들인 브론스키가 마중 나왔다.
안나와 청년 장교 브론스키는 역 플랫폼에서 스치듯 인사를 나누었지만, 첫 만남에서부터 서로에게 강렬하게 끌렸다.

스티바와 여러모로 달랐지만, 어릴 때부터 친구로 지내던 레빈도 모스크바에 왔다.
용기를 내 스티바의 막내 처제인 키티에게 청혼하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키티는 레빈이 아닌 브론스키의 청혼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절당한 레빈은 상심에 빠져 영지로 돌아갔다.
레빈은 고독 속에 머물렀다.

안나와 인사를 나눈 뒤로 브론스키는 그녀를 다시 만날 생각에 온통 사로잡혀 있었다.
오빠 부부를 화해시킨 안나는 검은 벨벳 드레스를 입고 무도회에 나타났다.
키티는 안나의 매력이 옷차림을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브론스키는 안나만 보고 있었다.
키티가 받은 상처는 컸고, 안나는 저녁을 마다하고 자리를 떠났다.

안나는 자신을 바라보는 브론스키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기쁨과 죄책감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마음을 뒤로하고 결연히 모스크바를 떠났다.
하지만 기차가 잠시 머문 사이, 거센 눈보라 속에서 브론스키와 마주쳤다.
그가 안나를 따라 페테르부르크행 기차를 탄 것이다.

안나는 놀라면서도 알 수 없는 행복을 느꼈다.
기차역에는 남편 카레닌과 아들 세료자가 안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나의 친구이자 브론스키의 사촌 벳시가 여는 살롱은 페테르부르크 사교계의 핵심이었다.
돌리와 스티바는 벳시의 살롱에서도 다투었고, 이들 부부와 다르게 안나와 브론스키는 서로 다시 만나는 기쁨을 누렸다.
아름답고 정결한 여인으로 칭송받던 안나의 평판은 걷잡을 수 없이 나빠졌다.

카레닌은 아내와 브론스키의 관계가 거슬렸지만 체면을 차리기 위해 애써 모르는 척했다.
부부는 거리를 두었고, 어색해졌다.
사교계에서 평판이 나빠질수록 안나와 브론스키의 감정은 깊어져 갔다.
브론스키의 사랑만 있다면, 안나는 위선과 기만으로 지켜 온 결혼 생활을 망가뜨린 죄책감과 수치심도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군 복무와 사교계 말고도 브론스키가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승마였다.
장교들의 경주에 브론스키도 참가했다.
안나와 카레닌, 스티바와 돌리, 벳시와 브론스카야 백작 부인을 비롯한 명문가 사람들이 승마장에 가득 모였다.
전력 질주하며 선두를 달리던 브론스키가 승리를 확신하던 순간, 말이 비틀대며 쓰러졌다.

브론스키는 다치지 않았고, 말의 허리가 부러졌다.
안나가 주저앉아 부채로 얼굴을 가리더니 가슴을 들썩이며 소리 내 울었다.
정숙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냉담한 표정으로 처신을 나무라는 카레닌에게 안나는 자신이 브론스키를 사랑하고 있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 버렸다.

레빈은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았다.
풀베기를 거들며 마음의 상처를 잊어 갔다.
레빈의 청혼을 거절하고, 브론스키의 무관심에 상심했던 키티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맑고 깨끗한 영혼으로 내면을 가득 채운 키티가 레빈이 잠시 머물던 곳을 지나가면서, 두 사람은 마주쳤다.
키티의 꾸밈없는 두 눈동자를 알아본 레빈은 자신의 마음을 다시 깨달았다.
레빈과 키티는 가까워졌다.

레빈과 키티는 결혼식을 올렸다.
레빈은 자신의 행복을 믿어도 될지 두려웠다.
두 사람은 시골에 머물며 평범한 일상에 실망하기도 하고, 다투기도 했다.
레빈과 키티는 몇 번의 위기를 함께 넘기며 서로를 보듬었다.
형의 죽음 앞에 무너진 레빈을 키티가 위로해 주었고, 새 가족도 생겨났다.

안나를 벌주려는 마음과 체면을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가득 찼던 카레닌은 브론스키의 딸을 낳고 위독해진 안나와 불안에 떠는 브론스키를 용서했다.
건강을 회복한 안나는 아들까지 포기하고, 브론스키는 안나와 함께하기 위해 군 복무를 그만두었다.
안나와 브론스키는 함께하는 행복을 누렸지만, 안나는 아들이 그리웠다.
브론스키는 장교로 복무하며 자유롭게 지내던 예전의 삶이 그리워졌다.
딸을 데리고 이탈리아에서 지내던 두 사람은 러시아로 돌아왔다.

안나는 남몰래 아들을 보러 갔다.
아들을 만나는 기쁨도 잠시, 안나와 카레닌은 심한 말다툼을 벌였다.
안나는 피폐해졌다.
친구 벳시조차 등을 돌릴 정도로 아예 사교계에서 쫓겨났다.
안나는 자신을 향한 브론스키의 사랑까지도 의심했다.
브론스키는 안나의 집착과 질투로 고통스러웠다.

심한 말다툼을 벌이던 날, 안나는 브론스키에게 사과하며 매달리려 했지만 상황이 엇갈렸다.
마음 붙일 곳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안나는 기차역의 플랫폼에 서 있었다.
화물 열차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 바로 저기 저 한가운데. 모두에게서 나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거야."
안나는 빨간 손가방을 내던지며 열차 밑으로 뛰어들었다.

안나가 죽고, 브론스키는 6주 동안 아무하고도 말하지 않았다.
삶의 기쁨을 모조리 잃어버린 뒤, 세르비아 전쟁에 참전하러 떠났다.
안나가 낳은 브론스키의 딸은 카레닌이 맡았다.
부모가 된 키티와 레빈은 소소한 일상의 기쁨을 누리며 지냈다.
레빈은 자신의 삶이, 자신의 평생이, 자신의 매 순간이 의미 있다고 믿으며, 자신 안에서 느끼는 선의 법칙을 이해하고, 신의 존재를 믿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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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스케스는 세비야에서 활동하며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로마에 가기 직전 스페인 궁정에서 그린 작품에서도 카라바조 스타일이 열보입니다. 바로 앞 페이지의 작품, 바쿠스의 승리죠.
그림 속 인물은 당장이라도 스페인에 가면 만날 법한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술의 신 바쿠스도 신이라기보다 평범한 인간으로 보이죠. 그림 속 인물들의 사실적인 모습에서 카라바조의 바쿠스가 떠오르지 않나요? - P550

이 작품은 1625년에 벌어진 전투 장면을 담아냈는데요. 네덜란드 독립전쟁에서 스페인군이 네덜란드 도시 브레다를 함락시킨 사건을 그렸습니다. 네덜란드의 장군이 도시의 열쇠를 스페인 장군에게 바치면서 항복하는 장면에서 스페인 군대의 권위가 잘 드러납니다. - P552

스페인은 여전히 건재하다는 마지막 몸부림이 아니었을까요.
1640년에는 바르셀로나가 있는 카탈루냐에서 반란이 일어납니다. 프랑스와 연합하면서 카탈루냐의 반란군 세력이 커지고, 설상가상으로 포르투갈까지 독립을 시도합니다. 이베리아반도 안팎으로 반란이 일어나자1648년 스페인은 결국 네덜란드 독립을 인정하고 맙니다. - P553

공주의 시중을 깍듯하게 드는 시녀와 달리 화면 오른쪽의 난쟁이는 여유로워 보입니다. 심지어 개의 등을 발로 툭 차고있지요. 화면 중앙의 시녀와 시종은 왕가에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난쟁이는정적인 그림에 움직임을 넣어 단조로움을 깨고 있습니다. - P557

그림 속 벨라스케스는 캔버스에 무엇을 그리고 있었을까요? 프랑스 철학자미셸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이 그림에 주인공은 없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 그림의 거울 앞에 가장 오래 서 있던 사람은 화가 자신일 겁니다.
그러나 정작 거울 속에 그의 모습은 없는데요. 거울은 모든 것을 보여주지만 결국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 P561

카를로스 2세와 스페인 합스부르크의 종말다시 스페인 왕가 이야기로 돌아갈까요. 마르가리타 공주가 태어났지만,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고민하던 펠리페 4세는 1661년 기대하던 아들을 품에 안습니다. 바로 카를로스 2세죠. 이토록 귀한 아들을 얻고 4년후 펠리페 4세가 죽음을 맞이하고, 4살이었던 카를로스 2세가 왕위에 오릅니다. - P562

합스부르크 왕가는 사촌이나 조카끼리 결혼하는 근친혼이 흔했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6세기 중반 카를로스 1세의 양위 과정에서 스페인계와 오스트리아계로 나뉘는데요. 이후 양쪽 집안이 근친혼을 더 강하게맺어나갑니다. 다른 가문과 결혼할 경우 영토나 권력이 분산될 우려가 있어 근친혼을 통해 양쪽 가문의 이익을 보호하려 했던 겁니다. - P562

펠리페 4세를 기준 삼으면 1621년부터 1665년까지를 스페인 바로크 미술의 골든 에이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벨라스케스가 마드리드 궁정에서일한 시기를 기준으로 하면 1623년부터 1660년까지고요.  - P565

결국 황금기는 40년 남짓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다행히 스페인 미술은 1660년 이후 다시 화려하게 날아오릅니다. 이 재도약은 세비야에서 펼쳐집니다. - P566

세비야라면 이장을 시작한 곳이네요. 벨라스케스의 고향이기도 하고요그렇습니다. 17세기 후반 세비야는 마드리드를 이어 스페인 미술의 새로운 도전을 이어 나갑니다. 이후 스페인 미술의 발전 과정은 더 감동적인니다. 이와 맞물려 동시에 펼쳐진 바로크 미술의 전 지구적 확산은 다음장에서 알아보겠습니다. - P566

1600년의 세비야는 파리나 런던에 견줄 만큼 큰 도시였다. 세비야 출신 벨라스케스는 스승인 파체코의 전폭적인 지지로 스페인이 배출한 최고의 화가로거듭난다. 궁정 화가로 활동한 그는 초기에 카라바지즘을 추구했으나, 로마유학 후 화려하고 다양한 색채를 사용하여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한다. - P567

바로 무리요입니다. 부드럽고 우아하면서도 놀라울 만큼 강렬한 바로크회화의 세계를 보여준 작가입니다. 그는 벨라스케스의 뒤를 이어 17세기후반 스페인 바로크 미술의 변화를 이끌었습니다.
그의 작품 세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은 세비야 미술관입니다. 이름에서알 수 있듯이 중세부터 현대까지 세비야의 다양한 미술 세계를 감상할 수있는 곳이지만 핵심 컬렉션은 17세기 바로크입니다. - P569

이러한 연유로 빈민 문제가 큰 사회 문제가 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때부터 무리요는 가난한 사람들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거리에서 음식을 주워 먹는 거지, 가난한 아이들의 비참한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냅니다. - P575

당시 세비야의 지배층이 위기를 극복하려고 노력했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합니다. 1674년 세워진 세비야 자선병원 Hospital de la Cariclad도 이중 하나인데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병원에서 살게 해주고, 환자를 돌보는 데서 나아가 경제적 문제로 장례를 치르기 힘든 사람들의 장례를 치러줍니다. 심지어 사형수들의 장례까지 치르는 등 세비야 사회를 재건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 P576

추리게라 양식에는 기둥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1690년부터 상당히 독특한 기둥이 스페인에 출현하는데요. 왼쪽처럼 오벨리스크를 거꾸로 집어넣은 혹은 옥수수 모양의 기둥이 나타납니다. - P581

요즘 연경에 사신으로 다녀온 사람들이 서양화를 사다가 대청에걸어 놓는다. 처음에 한 눈을 감고 다른 한 눈으로 오랫동안 주시하면 건물 지붕의 모퉁이와 담이 모두 실제 형태대로 튀어나온다.
이익, 『성호사설』 제4권, 「만물문」 - P587

천주당 가운데 벽과 천장에 그려져 있는 구름과 인물들은 보통 생각으로는 헤아려 낼 수 없었고, 또 보통의 언어, 문자로는 형용할수도 없었다. 천장을 우러러보니 수없는 어린아이들이 오색구름 속에서 뛰노는데, 허공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이 살결을만지면 따뜻할 것만 같고 팔목이며 종아리는 살이 포동포동 쪘다.
갑자기 구경하는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레지도록 놀라 어찌할 바를모르며 손을 벌리고서 떨어지면 받을 듯이 고개를 젖혔다.
박지원, 열하일기, 양화 - P589

처음 천주당 안에 들어가 얼굴을 들어 언뜻 보니, 벽에 커다란 감실이 있고, 그 안에 구름이 가득하고 구름 속에 대여섯 사람이 서 있어아른하고 황홀한 것이 신선과 귀신이 환상으로 변한 것인 줄 알았으나 자세히 본즉 벽에 붙은 그림이었다.
이기지, 일암연기 - P590

이기지는 북경 천주당에서 만난 서양 선교사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며견문을 넓힙니다. 서양 문물을 마주한 놀라움과 신선함은 그림에서 그치지 않는데요. 서양 디저트를 처음 맛본 느낌을 고스란히 담은 기록도 함께 전해집니다.

부드럽고 달았으며 입에 들어가자마자 녹았으니 참으로 기이한 맛이었다. 만드는 방법을 묻자 사탕과 계란, 밀가루로 만든다고 했다.
이기지, 「일암연기』 - P591

포도주 석 잔을 내왔는데 지난번에 마신 것보다 맛이 더 좋았다. 나는 연거푸 두 잔을 마셨을 뿐인데도 많이 취하였다. 입에 들어갈 때는 상쾌하고 목으로 넘어갈 때는 부드러워 그 맛을 형언할 수 없었다. 선인의 음료라 하더라도 이보다 낫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기지,『일암연기 - P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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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은인이 바로 루벤스입니다. 1628년 시대의 거장 루벤스는 외교관 자격으로 마드리드를 다시 찾습니다. 이때 루벤스는 자신보다 22살 어린 벨라스케스를 만나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벨라스케스는 초기에 하층민의 일상을 주로 그렸는데요. 루벤스는 그의 작품을 보고 ‘시골풍‘이라는 짧은평을 남깁니다. - P549

디에고 벨라스케스, 검은 옷을 입은 펠리페 4세, 1623년, 프라도 미술관(왼쪽)/ 디에고 벨라스케스, 갈색과 은색 옷을 입은 펠리페 4세, 1631~1632년경, 런던 내셔널 갤러리(오른쪽) 이탈리아유학을 마친 후 벨라스케스는 풍부한 색채와 자신감 넘치는 필치를 선보인다. - P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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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처한 미술 이야기 8 - 바로크 문명과 미술 : 시선의 대축제, 막이 오르다 ㅣ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8
양정무 지음 / 사회평론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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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역사를 읽으며] 『난처한 미술이야기』 북유럽 바로크
― 전쟁과 돈, 시민, 그리고 물과 싸우며 만든 그림


로마 바로크를 읽을 때 미술 뒤에 교황과 종교, 권력과 도시가 보였다면 북유럽 바로크에서는 다른 세계가 나타났다.

바로크를 한 단어로 줄이면 흔히 ‘화려함’이라고 한다.

로마에서는 그 말이 잘 맞았다. 거대한 성당과 광장, 조각과 천장화가 사람을 압도했고, 건축과 회화와 조각은 종교와 권력의 힘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런데 북유럽 바로크를 읽으면서는 그 한 단어만으로 바로크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루벤스가 활동한 남부 네덜란드에는 가톨릭교회와 궁정을 중심으로 한 웅장하고 화려한 바로크가 있었다. 그러나 북부 네덜란드로 올라가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화려한 성당 대신 시민의 집과 창가가 보이고, 왕과 성인 대신 의사와 상인, 술집의 사람들, 학교의 아이들이 나타난다. 들판과 풍차, 부엌과 식탁까지 그림의 주제가 되었다.

같은 바로크 시대였지만 북부 네덜란드의 미술은 로마보다 훨씬 소박하고 사람들의 생활에 가까이 있었다.

여기에서도 종교는 중요했다. 그러나 북유럽에서는 종교가 사람들을 하나로 묶기보다 갈라놓았다. 가톨릭과 개신교가 충돌했고, 스페인의 지배에 저항한 네덜란드는 긴 독립전쟁을 치렀다. 북부와 남부는 갈라졌고, 그 차이는 정치와 종교뿐 아니라 미술에도 나타났다.

그리고 또 하나의 힘이 커졌다.

돈이었다.

무역으로 부자가 된 시민들이 그림을 사기 시작했다. 교회와 왕실만이 아니라 상인과 도시의 시민이 미술의 중요한 소비자가 되면서, 성인과 왕이 차지하던 그림 속에 의사와 상인, 술집 사람들, 부엌과 거리, 꽃과 음식, 들판과 풍차가 들어왔다.

북유럽 바로크를 읽으면서 나는 미술양식의 변화뿐 아니라 누가 그림을 사고, 무엇을 그리고, 어디에 걸어두는가가 달라지는 과정을 함께 보게 되었다.


1. 네로가 죽기 전에 보고 싶어 했던 화가

루벤스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미술책이 아니었다.

어릴 적 『플랜더스의 개』였다.

네로는 가난했고, 할아버지를 잃고, 일자리마저 잃었다. 마지막에는 파트라슈와 함께 성당으로 들어가 평생 보고 싶어 했던 루벤스의 그림을 바라본다.

어렸을 때는 네로가 불쌍해서 울었다.

지금 다시 생각하면 화가 나는 쪽이 조금 달라졌다.

『플랜더스의 개』는 루벤스가 살았던 17세기의 이야기가 아니다. 영국 작가 위다가 1872년에 발표한 소설이니 네로의 비극은 루벤스보다 훨씬 뒤인 19세기를 배경으로 한다.

그런데 그 시대의 성당 안에도 그리스도의 고난과 사랑을 그린 루벤스의 위대한 그림이 걸려 있었다. 소설 속에서는 바로 그 성당 밖에서 가난한 아이 하나가 굶고 추위에 떨다가 죽어간다.

종교는 사랑과 자비를 말했지만 현실의 사회와 공동체는 그 아이를 지켜주지 못했다.

네로가 잘못한 것은 아니다. 지금의 복지제도와 같은 사회안전망도 충분하지 않았고, 주변 어른들도 아이 하나를 끝내 구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에는 네로가 불쌍했고, 지금은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든 사회가 답답하다.

그래서 루벤스를 다시 만나자 네로부터 떠올랐다.


2. 한 지역에서 서로 다른 길로

오늘날의 네덜란드와 벨기에 일대는 한때 합스부르크 지배 아래 있던 저지대 세계였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갈등이 깊어졌다.

1566년에는 안트베르펜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개신교도들이 성당의 성상과 종교화를 파괴했다. 이어 스페인의 강경한 진압이 계속되었고, 1576년 안트베르펜에서는 책이 소개한 「스페인의 대학살」의 배경이 된 참극까지 벌어졌다.

종교의 이름으로 성상을 때려 부수고, 다시 종교와 왕권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였다.

그 과정에서 북부 네덜란드는 스페인에 맞서 독립전쟁을 벌였고, 남부는 가톨릭 세력 아래 남았다.

루벤스가 활동한 안트베르펜은 남부에 있었다.

남부에서는 가톨릭교회를 중심으로 웅장한 종교화가 다시 발전했고, 북부에서는 개신교와 도시 시민사회의 성장 속에서 다른 미술시장이 형성되었다.

한때 하나의 정치적 공간에 있던 사람들이 종교와 정치 때문에 갈라졌고, 그 차이가 미술의 모습에도 드러났다.


3. 루벤스, 화가이자 사업가이고 외교관

루벤스는 그림만 잘 그린 사람이 아니었다.

대규모 공방을 운영해 많은 작품을 제작했고, 제자와 조수들에게 역할을 나누어 작업한 뒤 자신이 마무리하는 체계를 갖추었다.

오늘날 식으로 보면 뛰어난 화가이면서 공방의 대표이고 사업가였다.

그런데 외교까지 했다.

스페인과 영국 사이를 오가며 협상에 참여했고, 영국의 찰스 1세에게 「마르스로부터 평화를 지키는 미네르바」를 선물했다. 전쟁의 신 마르스를 밀어내고 평화와 풍요를 지키는 장면을 외교의 메시지로 이용한 것이다.

그림으로 돈을 벌고, 그림으로 명성을 얻고, 그림을 외교에도 활용했다.

‘평화의 사도’라고 부르면 조금 거창할 수 있지만, 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대에 실제로 평화를 위한 협상에 참여한 화가였다는 사실은 인상적이었다.


4. 루벤스의 현실적인 Inner Peace

루벤스의 말년은 더 흥미로웠다.

그는 이미 돈도 벌 만큼 벌었고, 명예도 얻었으며, 기사 작위까지 받았다. 넓은 땅과 성을 사고 두 번째 부인 헬레나 푸르망과 가족생활을 하며 전원에서 지냈다.

이 시기에는 외교활동에서도 물러났고, 오랫동안 그를 괴롭힌 통풍으로 건강도 예전 같지 않았다.

그의 말년 풍경화를 경제적 여유 하나로만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외교와 정치의 세계에서 물러난 것, 새 가족과 함께하는 생활, 건강의 변화, 고향 플랑드르의 풍경에 대한 애착, 그리고 더 이상 주문자의 요구에만 매달리지 않아도 될 정도의 경제적 여유가 함께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돈의 역할을 빼놓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먹고살 걱정도 없고, 집 걱정도 없으며, 반드시 주문자의 취향에 맞는 그림만 그려야 할 이유도 줄어들었다.

돈이 마음의 평화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돈이 없어서 생기는 수많은 걱정을 덜어주는 것은 분명하다.

『쿵푸팬더』에서 시푸 사부가 말하는 Inner Peace가 수행을 통해 얻는 내면의 평화라면, 루벤스의 말년에는 조금 더 현실적인 Inner Peace가 있었던 것 같다.

그는 그 여유 속에서 자기가 살고 있는 땅과 사람, 자기가 그리고 싶은 풍경을 그렸다.


5. 독립전쟁이 만든 나라, 오렌지색이 된 역사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80년에 걸쳐 이어졌다.

빌럼 1세, 오라녀 공 빌럼은 스페인의 종교정책에 맞서 독립운동의 중심인물이 되었고 결국 암살당했다.

그러나 오라녀 가문은 이후 네덜란드의 중요한 상징으로 남았다.

오늘날 네덜란드 축구대표팀을 ‘오렌지 군단’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이 역사와 연결된다.

오라녀, Orange.

네덜란드의 오렌지색에는 독립전쟁과 왕가의 역사가 들어 있다.

책에서 헤이그의 하우스텐보스 궁전을 보면서 일본 나가사키현 사세보의 하우스텐보스도 떠올랐다. 두 번이나 가보려다가 결국 못 갔던 곳인데, 그 이름의 뿌리를 미술책을 읽다가 다시 만나게 되었다.

미술을 읽다가 축구가 나오고, 일본 여행지가 나오고, 다시 네덜란드 왕가로 돌아간다.

이런 연결도 책 읽는 재미다.


6. 좋은 땅에 나라를 만든 것이 아니라, 땅을 만들어 나라를 세웠다

네덜란드를 보면서 또 하나 눈에 들어온 것은 땅이었다.

국토의 상당 부분이 해수면보다 낮고, 습지와 갯벌이었던 곳을 수백 년 동안 제방을 쌓고 물을 퍼내며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으로 바꾸었다.

“신은 세상을 만들었지만 네덜란드는 네덜란드인이 만들었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암스테르담은 토목의 힘으로 만들어진 도시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좋은 땅을 골라 도시를 세운 것이 아니라, 토목의 힘으로 도시가 설 수 있는 땅을 만들어냈다.

연약한 점토와 이탄층 위에 도시를 세우기 위해 목재말뚝을 박고, 제방을 쌓고, 물을 빼고, 운하를 만들며 도시를 넓혀왔다.

그 토목의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물이 지금의 암스테르담 왕궁이다.

원래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에 암스테르담 시청으로 지어진 이 거대한 석조건물 아래에는 목재말뚝이 무려 13,659개나 박혔다.

수많은 말뚝으로 거대한 건물의 하중을 지지하고 그 하중을 지반에 전달한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웅장한 석조건물이지만, 그 아래에는 1만 3천 개가 넘는 나무말뚝이 박혀 있었다.

네덜란드 황금기의 화려한 시민사회 역시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토목 위에 서 있었던 셈이다.

풍차도 지금은 네덜란드의 낭만적인 풍경을 상징하지만 원래는 물을 퍼내기 위한 중요한 기계였다.

제방, 수로, 운하, 풍차, 간척지는 모두 살아남기 위해 만든 기반시설이었다.

그들에게 풍차와 제방, 운하와 들판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었다.

물과 싸우며 살아가기 위해 만든 시설이고, 수백 년에 걸쳐 스스로 만들어낸 국토였다.

그래서 네덜란드 풍경화도 다르게 보였다.

남이 준 자연을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물을 막고 퍼내며 만들어낸 땅을 그린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7. 돈이 그림을 바꾸었다

17세기 암스테르담은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다.

동인도회사가 등장하고 주식이 거래되었으며, 증권거래소가 성장했다.

튤립 한 구근 가격이 치솟았다가 급격하게 무너지는 튤립 투기까지 벌어졌다.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돈이 몰리면 사람들이 따라붙고, 가격이 계속 오를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며, 어느 순간 거품이 꺼진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림도 시장에서 거래되었다는 점이다.

네덜란드에서는 왕이나 교회만 그림을 사는 것이 아니었다.

상인과 시민이 자기 집에 걸 그림을 샀다.

그 결과 그림의 주제도 달라졌다.

성모와 성인뿐 아니라 부엌과 식탁, 술집과 학교, 가족과 거리, 꽃과 음식, 풍경이 중요한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미술이 시민의 생활공간으로 들어간 것이다.


8. 시장은 자유를 주었지만 안전을 보장하지 않았다

시민 미술시장의 성장은 화가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었다.

교회나 왕실의 주문만 기다리지 않고 시장을 상대로 자신의 그림을 팔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화가들에게 좋은 일만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시장이 커졌다는 것은 경쟁자가 많아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구매자의 취향과 유행에 맞는 그림이 잘 팔렸고, 화가들은 특정 장르를 전문적으로 그리거나 가격경쟁을 해야 했다.

후원자의 지시에서 조금 벗어난 대신 시장의 선택을 받아야 했다.

렘브란트처럼 큰 명성을 얻은 화가도 말년에 재정적으로 무너졌다. 그의 파산에는 비싼 집과 수집품 구입, 수입의 변화 등 여러 사정이 얽혀 있었고 단순히 유행을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다.

페르메이르 역시 죽은 뒤 가족에게 상당한 빚을 남겼다.

시민이 새로운 미술 소비자가 된 것은 분명한 변화였다.

그러나 시장은 화가에게 자유를 주면서 동시에 실패의 위험도 화가 개인에게 떠넘겼다.

이것 역시 네덜란드 미술 황금기의 한쪽 얼굴이었다.


9. 잘살면서도 ‘다 소용없다’고 말했다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서 네덜란드 사람들이 부를 무조건 자랑한 것은 아니었다.

바니타스 정물화가 그 반대편에 있었다.

비싼 그릇과 과일, 꽃과 책을 늘어놓고 그 옆에 해골이나 시든 꽃, 꺼진 촛불을 넣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죽으면 끝이라는 이야기였다.

이것도 참 인간답다.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장사하고 투자하면서, 그림에서는 재물의 허무함을 경고한다.

튤립에 돈을 쏟아붓던 사람들과 바니타스를 그려 걸어놓던 사람들이 같은 사회에 살았다.

부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부를 경계했다.

그 긴장이 네덜란드 황금기의 한 모습이었던 것 같다.


10. 그림 속에 들어온 평범한 사람들

풍속화가 커진 것도 같은 흐름이었다.

얀 스텐의 그림에는 술 마시는 사람, 떠드는 아이, 엉망이 된 집안, 학교에서 장난치는 학생들이 나온다.

성인도 영웅도 아니다.

그냥 사람들이다.

그러나 웃기기만 한 그림은 아니다.

흐트러진 집안, 술 취한 사람, 제멋대로인 아이들의 모습에는 사치와 방종, 교육과 가정생활을 풍자하는 의미가 함께 들어 있다.

얀 스텐을 보고 있으면 김홍도의 풍속화가 떠오르기도 한다.

시대도 장소도 다르지만 둘 다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을 그림의 중요한 소재로 삼았다.

시민이 그림을 사기 시작하면서 시민 자신도 미술의 주인공이 되었다.


11. 풍경화는 조국을 그리는 그림이었다

네덜란드 풍경화도 단순히 아름다운 경치를 그린 그림으로 보기 어려웠다.

풍차, 운하, 제방, 낮은 들판은 네덜란드인이 수백 년 동안 물과 싸우며 만들어내고 지켜낸 삶의 공간이었다.

독립전쟁까지 거친 뒤에는 의미가 하나 더 생겼다.

스페인과 싸워 지켜낸 자신들의 나라였다.

그러니 그 들판과 하늘을 그린다는 것은 자신들의 국토를 그리는 일이기도 했다.

평범해 보이는 자연과 생활의 터전이 네덜란드인에게는 직접 만들고 지켜낸 세계였다.

풍경을 화폭에 담는 일은 아름다운 경치를 기록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살아갈 땅을 바라보는 일이기도 했다.


12. 렘브란트는 단체사진도 살아 움직이게 만들었다

렘브란트의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를 보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사람들의 몰입이었다.

비슷한 시기의 미레벨트가 그린 해부학 강의와 비교하면 차이가 분명했다.

미레벨트의 그림 속 사람들은 한자리에 모여 있지만 표정이 다소 굳어 있고 멍하게 보인다.

반면 렘브란트의 사람들은 다르다.

누군가는 시신을 보고, 누군가는 튈프 박사의 손동작을 보고, 누군가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설명을 듣는다.

사람마다 반응이 다르다.

양정무도 이 장면을 열띤 강의현장처럼 설명한다.

렘브란트는 단체초상화를 그리면서 사람을 단순히 줄 세우지 않았다.

미레벨트가 해부학 강의의 참석자를 그렸다면, 렘브란트는 강의를 듣고 반응하는 사람들을 그렸다.

그래서 400년 전 강의실의 분위기가 지금 눈앞에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13. 루벤스와 렘브란트, 같은 바로크의 다른 얼굴

루벤스와 렘브란트를 비교하면 남부와 북부 네덜란드의 차이가 그림에서도 보인다.

루벤스의 그림은 크고 웅장하고 화려하다.

가톨릭교회와 궁정의 주문을 많이 받았던 그의 작품에는 거대한 공간을 채우는 힘이 있다.

렘브란트의 그림은 상대적으로 어둡고 절제되어 있다.

그러나 사람의 얼굴과 표정, 빛의 방향에서 이야기가 나온다.

카라바조의 빛이 사건을 드러내는 빛이었다면, 렘브란트의 빛은 사람의 얼굴과 반응을 바라보는 빛에 더 가까워 보였다.

같은 바로크라는 이름 아래에서도 지역과 종교, 주문자의 차이에 따라 전혀 다른 그림이 만들어졌다.

바로크가 반드시 화려해야만 바로크인 것은 아니었다.


14. 할스는 순간을 잡았고, 페르메이르는 시간을 멈췄다

프란스 할스는 빠른 붓질로 사람의 표정과 움직임을 잡아냈다.

정교하게 마감하기보다 순간의 생기를 살렸다.

그래서 수백 년 뒤 인상파 화가들이 그의 붓질에 주목했다는 설명도 이해가 갔다.

페르메이르는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비롯한 그의 그림에서는 시간이 잠시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 방 안의 고요함, 한 사람의 작은 몸짓을 바라본다.

카메라 옵스큐라 같은 광학기구가 당시 화가들의 시각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종교전쟁으로 시작한 북유럽 바로크의 이야기가 시민의 일상을 지나 과학과 광학기술의 발전으로까지 이어진다.

렘브란트, 할스, 페르메이르는 같은 네덜란드에서 활동했지만 사람과 일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서로 달랐다.

그 차이가 네덜란드 미술의 폭을 보여준다.


15. 북유럽 바로크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사람’이었다

로마 바로크에서는 거대한 성당과 조각, 교황과 예술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북유럽 바로크에서는 사람이 더 가까이 보였다.

돈을 버는 상인, 그림을 사는 시민, 술집에서 떠드는 사람, 학교에서 장난치는 아이, 해부학 강의를 듣는 의사,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가 그림 속으로 들어왔다.

그 변화에는 종교개혁과 독립전쟁이 있었고, 무역과 금융의 성장이 있었으며, 시민 중심의 미술시장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생활의 밑바탕에는 물과 싸워 땅을 만들고 지켜온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

루벤스는 가톨릭 남부의 웅장한 미술을 대표했고, 렘브란트는 사람의 얼굴과 반응을 살려냈으며, 할스는 순간의 생기를 잡았고, 페르메이르는 평범한 일상 속의 빛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북유럽 바로크는 내게 교회와 궁정의 미술이 사라진 시대가 아니라, 그 옆에 시민과 시장이라는 새로운 미술의 주체가 크게 등장한 시대로 보였다.

그 시장은 그림을 평범한 사람들의 집으로 가져왔지만 화가들에게 치열한 경쟁도 안겨주었다.

로마에서 돔과 광장이 권력과 종교의 무대였다면, 북부 네덜란드에서는 시민의 집과 창가, 술집과 학교, 운하와 들판이 미술의 무대가 되었다.

풍차는 낭만을 위해 서 있던 것이 아니라 물을 퍼내기 위해 돌았고, 그 풍차가 지켜낸 땅 위에서 상인은 그림을 사고, 화가는 평범한 사람의 얼굴과 생활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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