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지 세트 - 전10권 - 개정증보판
시내암 지음, 이문열 평역 / 민음사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칼끝의 저편에도 백성이 있었다

— 이문열 평역 『수호지』를 읽고

『수호지』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양산박의 108호걸이다. 저마다 기구한 사연을 안고 양산박으로 모여든 호걸들. 그들의 별호만 들어도 오래된 벗을 만나는 듯 반갑다.

쌍편 호연작, 표자두 임충, 옥기린 노준의, 화화상 노지심, 행자 무송, 흑선풍 이규, 구문룡 사진….

그중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인물은 호연작과 임충, 그리고 노준의다. 세 사람 모두 뛰어난 무예를 지녔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내 마음을 끄는 이유가 단순히 그들의 무용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호연작과 임충은 본래 송나라의 관군 출신이다.

임충은 팔십만 금군의 교두였고, 호연작은 명장 호연찬의 후손으로 조정의 군대를 지휘하던 장수였다. 그들에게 관직은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평생 쌓아온 명예이자 자부심이었을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이 결국 양산박에 합류한다.

물론 그 과정은 다르다. 임충은 부패한 권력의 모함으로 모든 것을 잃고 쫓기듯 양산박으로 향했고, 호연작은 양산박을 토벌하러 왔다가 패전한 뒤 송강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두 사람의 선택을 모두 순수한 의협심 때문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이 기존의 신분과 소속에만 매달리지 않고, 한때 적이었던 사람들과 뜻을 함께하게 되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명예보다 의(義).

내가 그들에게서 발견하고 싶은 가치다.

노준의가 양산박에 이른 사정은 또 다르다. 그는 관군 출신은 아니었지만, 하북의 부호이자 이름난 무인이었다. 그 역시 계략과 배신에 휘말려 모든 것을 잃고 양산박에 합류한 인물이다.

그러나 『수호지』를 끝까지 읽고 나면 그토록 좋아했던 호걸들의 이야기가 마냥 통쾌하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양산박에 모인 108호걸은 부패한 관리와 부조리한 세상에 맞서 싸운다. 그들은 충의당(忠義堂)에 모여 형제의 의리를 맹세하고, 체천행도(替天行道), 곧 하늘을 대신하여 도를 행한다는 기치를 내건다.

그들의 반항에는 분명 통쾌함이 있다. 하지만 양산박의 호걸들이 언제나 정의롭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 역시 살인과 약탈을 저질렀고, 동료를 얻기 위해 무고한 사람을 희생시키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내세운 의는 과연 누구를 위한 의였을까.

이 질문은 송강이 조정의 초안(招安)을 받아들이면서 더욱 무거워진다.

한때 조정의 부패에 맞서 싸웠던 호걸들이 다시 송나라의 관군이 된다.

송강은 부패한 관리들에게 맞섰지만, 황제의 권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는 조정의 인정을 받아 기존 질서 안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체천행도를 외치던 양산박이 다시 황제의 명령을 받들게 된 것이다.

이후 그들은 요나라를 비롯한 여러 적과 싸운 끝에 방랍의 반란군을 토벌하러 간다.

그 마지막 전쟁에서 수많은 호걸이 죽는다.

벽력화 진명, 구문룡 사진, 반명삼랑 석수…. 그토록 무예가 뛰어나고 숱한 전장을 헤쳐 나온 호걸들이 방랍군의 칼과 창, 화살 앞에 하나둘 쓰러진다. 임충은 정벌을 마친 뒤 병으로 죽고, 노준의와 송강마저 끝내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

이 대목에 이르면 허망함마저 느껴진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양산박에 모였고, 무엇을 위해 싸웠으며, 결국 무엇을 위해 죽었는가.

송나라 조정의 입장에서 보면 송강과 그의 부하들은 반역자에서 충신으로 거듭난 사람들이다. 그러나 방랍의 입장에서 보면 어떠했을까.

방랍 역시 실제 역사에서 송나라 말기의 가혹한 수탈에 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그에게도 자신을 따르는 장수들이 있었고,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과 삶의 터전이 있었을 것이다.

송강에게 충성을 다한 호연작이 의로운 장수라면, 방랍에게 충성을 다한 석보와 방걸은 단지 역적의 장수에 불과한 것일까.

송강의 군대가 승리하면 충의의 승리이고, 방랍의 군대가 승리하면 반역의 승리인가.

나는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수 없다.

충(忠)과 의(義)는 누구를 향하느냐, 누구의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송강에게 충성하는 것이 의로운 일이라면, 방랍에게 충성하는 것 역시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의로운 일일 수 있다. 송나라에 대한 충성이 절대적인 선이라면, 송나라의 압제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렇다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이유만으로 방랍을 의로운 지도자라고 평가할 수도 없다. 그의 군대 또한 많은 사람을 죽이고 해쳤다. 저항의 명분이 있다고 해서 그 과정의 모든 폭력까지 정당해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느 편에 섰느냐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충과 의를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이어야 할까.

나는 그 대상이 **백성(百姓)**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민이라는 말도 있고, 민중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나는 백성이라는 표현이 더 좋다.

국민이라는 말에서는 국가의 구성원이라는 의미가 먼저 떠오른다. 어느 나라의 국민인가에 따라 소속이 구분된다. 민중이라는 말에서도 때로는 특정한 계층이나 집단을 떠올리게 된다.

반면 내가 생각하는 백성은 그런 경계를 두지 않는다.

나라와 민족, 신분과 소속을 떠나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다.

물론 백성은 오래도록 임금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을 가리켜 온 말이다. 그러나 내게는 그 말이 칼과 깃발을 든 사람들보다, 그 칼에 집과 가족을 잃고도 삶을 이어가야 했던 사람들을 먼저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나는 이긴 편과 진 편을 가리지 않고, 전쟁의 한복판에서 살아내야 했던 사람들을 부를 때 이 말이 가장 알맞다고 느낀다.

송나라 사람도 백성이고, 요나라 사람도 백성이다. 방랍을 따르던 사람들도 백성이고, 송나라 관군에게 징집된 병사들 역시 백성이다.

그들에게도 부모와 처자식이 있고, 지켜야 할 집과 논밭이 있으며, 내일을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들에게는 개선의 북소리가 울리겠지만, 패배한 사람들의 집에서는 곡소리가 날 것이다. 그리고 그 곡소리에는 국경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충과 의를 바라보는 기준도 달라진다.

황제에게 충성했다는 사실만으로 충신이 되는 것은 아니다. 형제들과 끝까지 의리를 지켰다는 이유만으로 의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 충성이 백성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그 의리를 지키는 과정에서 누구의 삶이 희생되었는지까지 살펴야 한다.

나는 호연작과 임충을 여전히 좋아한다. 관군의 명예를 뒤로하고 양산박의 일원이 된 그들의 삶에는 분명 마음을 움직이는 무엇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양산박의 형제들을 위해 휘두른 칼이 과연 누구를 향하고 있었는가. 그 칼끝의 저편에는 또 어떤 사람들이 서 있었는가.

그곳에 있는 사람들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형제이고 가족이 아니었을까.

돌이켜보면 『수호지』는 처음에는 영웅들의 용맹에 열광하게 만들지만, 마지막에는 그 영웅들이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묻게 하는 작품이다.

108호걸의 이름과 별호, 그들이 펼치는 무예와 기발한 계략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흥미롭다. 그러나 이제 내 마음에 더 오래 남는 것은 승패도, 서열도, 무예의 우열도 아니다.

충은 누구를 위한 충이어야 하며, 의는 누구를 지키기 위한 의여야 하는가.

그 물음에 대한 나의 대답은 백성이다.

양산박의 호걸들이 방랍을 향해 진군하던 순간, 그들은 칼끝의 저편에도 백성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했을까.

백성은 어느 한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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