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사람, 하정우
하정우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大田都市鐵道 一號線 驛舍 따라 걷기

죽어서야 누울 것이니, 살아 있으니 걸어라. (死臥生步)

— 스물두 역을 걷다 —

2026년 10월 10일, 토요일

ㅇ 걷기 코스: 유성온천역 → 반석역 → 시청역 → 대전역 → 판암역 → 대전역 → 시청역 → 유성온천역

(儒城溫泉 → 九岩 → 顯忠院 → 世界杯競技場 → 老隱 → 智足 → 盤石 → 智足 → 老隱 → 世界杯競技場 → 顯忠院 → 九岩 → 儒城溫泉 → 甲川 → 月坪 → 葛馬 → 政府廳舍 → 市廳 → 炭坊 → 龍汶 → 五龍 → 西大田四街 → 中區廳 → 中央路 → 大田 → 大洞 → 新興 → 板岩 → 新興 → 大洞 → 大田 → 中央路 → 中區廳 → 西大田四街 → 五龍 → 龍汶 → 炭坊 → 市廳 → 政府廳舍 → 葛馬 → 月坪 → 甲川 → 儒城溫泉)

ㅇ 걷기 기록

- 출발시간: 오전 6시 37분
- 총거리: 48.0km
- 소요시간: 9시간 39분 4초
- 이동시간: 8시간 54분 29초
- 휴식시간: 44분 35초
- 평균속도: 5.1km/h
- 총 획득고도: 904m
- 최고점: 해발 134m

---

1. 다시 걷고, 다시 책을 읽기로 했다

미국 여행을 다녀온 지도 며칠이 지났다.

이번 미국 여행에서는 참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이동한 거리만 놓고 보면 어마어마했지만, 정작 내 두 발로 걸은 거리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자동차로 이동하는 시간이 길었던 탓이다.

여행을 다녀오느라 한동안 책도 제대로 읽지 못했고, 평소 즐기던 걷기 운동도 소홀해졌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으니 운동도 시작하고, 밀렸던 책도 펼쳐야겠다. 기왕이면 체중도 조금 줄였으면 좋겠고.

그런 생각으로 이번 주말에는 좀 길게 걸어보기로 했다.

어디를 걸을까. 산에 오를 수도 있고, 갑천을 따라 걸을 수도 있다. 그러다 문득 대전도시철도 1호선이 떠올랐다.

늘 익숙하게 지나치는 지하철역들을 지상에서 하나하나 찾아가며 걸어보면 어떨까.

유성온천역에서 출발해 북쪽 종점인 반석역을 찍고, 다시 동쪽 종점인 판암역까지 내려간 다음 처음 출발했던 유성온천역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이렇게 하면 대전도시철도 1호선의 스물두 역을 모두 찾아가게 된다.

지하철을 타면 어렵지 않을 길이지만 지상에서 걸으려면 제법 긴 거리가 될 것이다. 대략 50km 가까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오늘의 걷기 코스를 정했다.

2. 고요한 아침, 반석을 찍고 돌아오다

오전 6시 37분, 유성온천역 4번 출구.

오늘 걷기의 출발점이다.

유성온천역에서 반석역까지는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구암, 현충원, 월드컵경기장, 노은, 지족을 지나 반석에 이른다.

아침 일찍 길을 나선 탓인지 거리는 조용했다. 평소 차량과 사람들로 분주한 도심이지만 이른 아침의 모습은 사뭇 달랐다. 한산한 거리를 따라 걷는 기분이 좋았다.

지족역에서는 뜻밖의 일이 생겼다. 갑자기 화장실이 급해진 것이다. 다행히 지하철역이 있으니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장거리 걷기에서 지하철역은 이럴 때도 요긴하다.

그렇게 첫 번째 종점인 반석역을 찍었다.

이제 방향을 바꿔 대전의 동쪽 끝, 판암역으로 향한다. 반석에서 되돌아오는 길도 조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거리에는 한가로운 분위기가 남아 있었다.

같은 길을 되짚어 걷지만 풍경은 달라 보인다. 진행 방향이 달라지면 거리의 표정도 달라지는 법이다.

정부청사 일대에 이르렀을 무렵, 걸음 기록은 17.3km를 가리켰다. 경과시간은 3시간 10분. 지족역에서 화장실에 들렀던 시간까지 포함해서다.

잠시 녹지공간에 자리를 잡았다.

파란 하늘 아래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소나무와 나무들이 어우러져 있었다. 멀리 정부청사 건물들이 보였다. 마님이 싸준 사과를 꺼내 먹으며 잠시 쉬었다.

아침부터 걸었으니 사과 한 조각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평소 집에서 먹던 사과와 다를 게 없겠지만, 오래 걸은 뒤에 먹으니 맛이 한결 좋았다.

사과를 먹고 다시 길을 나섰다. 아침의 고요함도 어느새 지나가고, 대전의 중심부로 들어설수록 거리에는 차량과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오전 11시 30분, 대전역 통과. 누적거리 27.0km.

대전역 앞 세븐일레븐 편의점에 들렀다. 게토레이를 사려고 보니 마침 2+1 행사를 하고 있었다. 한 병을 사느니 세 병을 사는 게 낫겠다 싶어 세 병을 구입했다.

그 자리에서 한 병을 마시고 나머지는 챙겼다. 아침부터 사과만 먹으며 걸어왔으니 수분과 당분을 보충할 때도 됐다.

다시 길을 나서 대동역과 신흥역을 지나니 마침내 판암역이 나타났다.

누적거리 30.6km.

두 번째 종점이다. 유성온천에서 반석을 거쳐 판암까지 왔으니 대전도시철도 1호선의 양쪽 끝을 모두 밟았다.

이제 처음 출발했던 유성온천역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3. 판암에서 돌아서다, 그리고 사와생보

판암역 역사 안에는 잠시 앉아 쉴 수 있는 테이블이 있었다. 그곳에 자리를 잡고 게토레이 한 병과 마님이 싸준 사과를 테이블에 올려놓은 뒤 잠시 휴식을 취했다.

30km가 넘도록 걸었으니 몸이 피곤할 법도 한데 아직은 걸을 만했다. 그렇다고 힘이 남아도는 것은 아니다. 장거리 걷기에서 중요한 것은 순간의 속도보다 자기 걸음을 유지하는 일이다.

오늘 걸으면서 ‘와사보생(臥死步生)’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는 뜻이다. 걷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지만, 나는 이 네 글자의 순서를 바꾸고 싶었다.

사와생보(死臥生步).

죽어서야 누울 것이니, 살아 있으니 걸어라.

비슷한 말처럼 보이지만 내가 담고 싶은 뜻은 조금 다르다.

와사보생이 건강을 위해 걸으라는 말이라면, 내가 생각하는 사와생보는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걸어야 할 이유라는 뜻이다.

언젠가는 누구나 영원히 누울 날이 올 것이다. 지금은 당연하게 여기는 두 다리의 움직임도 세월이 흐르면 예전 같지 않을 수 있다. 가고 싶은 곳이 있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고, 보고 싶은 것이 있어도 쉽게 찾아갈 수 없는 날이 올지 모른다.

그렇다고 그날을 미리 걱정하며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미뤄둘 이유는 없다.

내가 해외여행을 자주 떠나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올해 터키와 미국은 네 식구가 함께했고, 일본은 아내와 두 차례 다녀왔다. 먼 나라에서 낯선 풍경을 만나는 일이나, 익숙한 도시를 천천히 걸으며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일이나 내게는 같은 즐거움이다.

책을 통해 세상을 만나는 것도 좋지만, 직접 그 땅을 밟고 사람들을 만나며 눈앞의 모습을 바라보는 경험은 또 다르다.

걸을 수 있을 때 걷고, 떠날 수 있을 때 떠나고, 읽을 수 있을 때 읽는 것.

내가 생각하는 사와생보는 그런 삶의 자세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길을 나섰다.

신흥역과 대동역을 거쳐 대전역으로 돌아왔다. 같은 대전역을 오늘 두 번 지나간 셈이다.

4. 성심당의 긴 줄, 그리고 추억의 코다리냉면

중앙로역으로 향하는 길에서는 뜻밖의 구경거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성심당 케익부띠끄 앞이었다.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끝나는 곳을 찾기도 쉽지 않았고, 햇볕을 피하려고 양산을 들고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니, 빵이 뭐라고 저렇게까지 줄을 선단 말인가.

물론 저 사람들에게는 성심당 빵을 사는 일이 대전 여행의 중요한 목적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나도 마찬가지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지하철역 스물두 개를 찾아다니며 50km 가까이 걷겠다고 나섰으니, 다른 사람이 나를 보면 똑같은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서고, 누군가는 도시를 걸어서 돌아본다. 즐거움을 찾는 방법이 서로 다를 뿐이다.

그렇게 혼자 웃으며 중앙로역을 지나 중구청역에 도착했다.

이제는 제대로 식사를 해야겠다. 아침부터 사과와 게토레이로 버텼으니 점심 한 끼는 든든하게 먹어도 될 것 같았다.

중구청역을 지나 속초 코다리냉면 식당에 들어갔다.

이곳은 내게 낯선 식당이 아니다. 예전에 문화동에 살 때 자주 들르던 냉면집으로, 지역에서는 제법 유명한 곳이다. 여름이면 어느 냉면집이나 손님이 많겠지만, 이곳은 특히 붐비던 기억이 있다.

오랜만에 다시 찾으니 반가웠다.

메뉴판을 보니 코다리냉면이 13,000원, 동태전이 15,000원이었다. 코다리냉면 한 그릇에 동태전 한 접시를 주문했다.

혼자 먹기에 적지 않은 양이지만 오늘 걸은 거리를 생각하면 그 정도는 먹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먼저 나온 동태전은 큼지막하고 노릇노릇했다. 간장 양념에 찍어 먹으니 제법 맛있었다.

이어서 코다리냉면이 나왔다. 커다란 그릇에 면이 담기고, 그 위에는 붉게 양념한 코다리와 오이, 배, 삶은 달걀이 올라가 있었다. 보기에는 무척 매워 보였지만 생각보다 맵지 않았고, 맛도 좋았다.

다만 욕심껏 주문한 동태전은 양이 너무 많았다. 배가 불러 도저히 다 먹을 수가 없어 결국 절반 정도는 포장했다.

아침에는 살을 빼야 한다며 사과와 게토레이로 버텼는데, 점심에는 코다리냉면에 동태전까지 시켜 먹고 남은 음식을 싸 들고 나서는 신세가 됐다.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걸음을 이어갔다. 서대전네거리역과 오룡역을 지날 무렵에는 슬슬 몸이 대근해졌다.

특별히 어느 한 곳이 아픈 것은 아니었다. 그냥 전반적으로 피로가 쌓인 느낌이었다. 아침부터 38km가 넘는 거리를 걸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5. 40km를 넘어서 만난 또 하나의 성심당

용문역에 도착하니 마침내 누적거리 40km를 넘어섰다.

40.3km.

용문역 부근 롯데백화점 대전점 앞에서는 또다시 긴 행렬을 만났다. 이번에도 성심당이었다.

중앙로에서만 사람이 많은 줄 알았더니 이곳도 만만치 않았다. 백화점 건물 앞 경사로를 따라 기다리는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도로 사정도 비슷했다. 백화점으로 들어가려는 차량들 때문에 주변 교차로가 복잡해졌고, 경찰관들이 나와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다.

인도에서는 빵을 사려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도로에서는 백화점에 들어가려는 차량들이 기다린다.

대전의 토요일 오후가 참 부산스럽다.

걸어서 지나가는 내게는 그 혼잡마저 구경거리였지만, 차를 몰고 들어가려는 사람들에게는 여간 답답한 일이 아닐 것이다.

성심당이라는 빵집 하나가 사람과 차량의 흐름까지 바꿔놓는 광경이 새삼 놀라웠다.

그 모습을 뒤로하고 탄방역에 도착했다.

6. 바르게 살자, 그리고 가을 축제

시청역으로 향하던 중 커다란 돌 표석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바르게 살자’

그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바르게 살면 미래가 보인다.’

대전광역시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에서 세운 표석이었다.

거창한 내용은 아니다. 하지만 당연한 말도 돌에 새겨놓고 마주하니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바르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것이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답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내게는 오늘처럼 걷고, 보고, 생각하며 하루를 보내는 것도 내가 바라는 삶의 한 모습이다.

그렇게 시청역에 도착했다.

인근 보라매공원에서는 축제가 한창이었다.

제10회 대전 서구 아트페스티벌.

가을볕이 참 좋은 날이었다.

나무들은 아직 푸른빛을 많이 간직하고 있었지만 군데군데 노랗고 붉은 잎들이 섞이기 시작했다. 공원 산책로에는 국화 화분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길 양옆으로는 하얀 행사 천막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전시와 체험행사를 구경하는 사람들, 가족과 함께 나온 시민들, 그늘에 앉아 쉬는 사람들까지 공원은 제법 활기가 넘쳤다.

잔디광장에는 무대가 설치돼 있었고, 객석에는 수많은 의자가 놓여 있었다. 누군가는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가을 풍경은 참 좋았지만 노랫소리는 내 귀에 영 거슬렸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겠지만, 내게는 차라리 조용한 가을 산책로가 더 좋겠다 싶었다.

조금 더 걸으니 행사 부스들이 길게 이어졌고,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가을볕이 길가의 국화꽃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멀리 여행을 떠나야만 좋은 풍경을 만나는 것은 아니었다.

늘 생활하는 도시에서도 계절은 바뀌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하루를 즐기고 있었다. 자동차나 지하철을 타고 지나갔다면 이런 장면들을 얼마나 자세히 보았을까.

걷는 동안에는 거리의 모습이 그냥 스쳐 지나가지 않는다. 때로는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때로는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오늘 ‘역사 따라 걷기’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도 바로 이런 데 있을 것이다.

7. 출발했던 자리로 돌아오다

정부청사역을 다시 지날 때는 누적거리가 43.7km에 이르렀다.

아침에 마님이 싸준 사과를 먹으며 쉬었던 곳이 가까워졌다. 그때는 아직 17.3km를 걸었을 때였는데, 어느새 43km를 넘겼다.

같은 장소라도 아침과 오후의 느낌은 달랐다. 조용했던 아침 거리를 걸어 반석에 다녀온 일이 벌써 오래전의 일처럼 느껴졌다.

이어서 갈마역에 도착했다.

주변 가로수들이 노랗게 물들고 있었다. 파란 하늘 아래 햇살을 받은 나뭇잎들이 반짝였다. 오늘 찍은 수많은 역사 사진 중에서도 갈마역의 가을 풍경은 유난히 보기 좋았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월평역을 지나 갑천역에 이르렀다. 남은 역은 유성온천역 하나뿐이다.

아침부터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니 참 멀리도 돌아왔다. 유성온천에서 반석까지 올라갔다가 판암까지 내려왔고, 다시 여기까지 온 것이다.

차를 타고 움직였다면 그저 몇 차례의 이동으로 끝났을 길이지만, 걸어서 지나온 거리에는 중간중간 쉬었던 자리와 길에서 만난 사람들, 눈에 들어왔던 장면들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유성온천역이 나타났다.

먼저 1번 출구를 지나면서 누적거리가 47.9km를 가리켰다. 이제 아침에 출발했던 4번 출구로 돌아갈 차례다.

유성온천역 4번 출구.

아침에 걸음을 시작했던 바로 그 자리다.

다시 돌아와 역 표지판을 사진으로 남겼다.

최종 누적거리 48.0km.

오늘 계획했던 대전도시철도 1호선 역사 따라 걷기가 끝났다. 반석역과 판암역을 모두 찍고 스물두 역을 따라 걸어 처음 출발한 자리로 되돌아왔다.

아침에 이곳을 떠날 때는 그저 오래 걸어보겠다는 생각이었다. 운동을 다시 시작하고, 밀린 책도 읽으며 일상의 리듬을 되찾겠다는 다짐이 출발의 이유였다.

하지만 하루를 걷고 돌아오니 거리의 숫자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마님이 싸준 사과, 지족역에서의 급한 화장실, 게토레이 2+1 행사, 예전에 자주 다니던 냉면집과 남아서 포장한 동태전. 성심당 앞의 긴 줄과 롯데백화점 주변의 혼잡, 보라매공원에서 만난 가을 풍경까지.

빵을 사려고 긴 줄을 선 사람들을 보며 웃었던 나도, 누가 시키지 않은 48km를 걸었다. 남 웃을 처지가 아니었다.

아침에 출발했던 자리로 다시 돌아왔지만, 그 길에서 보고 느낀 것들까지 출발할 때와 같지는 않았다.

역사 따라 걷기는 여기서 끝났지만 집까지는 조금 더 걸어야 했다. 그렇게 집에 도착하고 보니 하루 동안 걸은 거리는 어느새 51km가 되어 있었다.

미국 여행에서 돌아와 다시 운동하고 책을 읽겠다고 마음먹었던 주말. 이제 밀린 책도 다시 펼치고, 기회가 닿으면 또 길을 나설 것이다.

아직 가보지 못한 곳도 많고, 읽지 못한 책도 많다.

언젠가는 마음이 있어도 떠나지 못할 날이 올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죽어서야 누울 것이니, 살아 있으니 걸어라.

死臥生步.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카스피 2026-10-12 23: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창 많이 걸을 떄는 하루 7~8km씩 주 5~6일을 걸은 기억이 나는데 하루 40km는 정말 엄두가 나질 않네요.걷고나서 건강은 괜찮으신지요.

대장정 2026-10-13 05:11   좋아요 0 | URL
네~~아직은 젊은지라 괜찮습니다. 일요일, 월요일에도 각각 2만보이상 걸었네요. 대략 15km이상 될듯 합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되세요.
 

작가를 말하다
레프 톨스토이, Leo Tolstoy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는 19세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위대한 작가 겸 사상가로 평가받는 다. 어린 나이에 부모가 죽고, 친척들 손에 자라났다. 16세가 되던 1844년 카잔대학교에 입학 했으나 형식적인 교육에 실망해 1847년에 중퇴했다. 공허한 생활에 염증을 느낀 톨스토이는 1851년 형 니콜라이를 따라 카프카즈 의용대에 들어가 포병 장교가 된다. 군대에 복무하면서쓴 『유년 시절』이 잡지 『현대인』에 실리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제대 이후, 문학의 새로운 방향을 추구하는 동시에 농민들의 열악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교육에 힘을 쏟는다. 1859년에는 농민 학교를 짓고 창작과 별개로 교육에 관한 다양한 연구를 진행한다.
1862년 지적 관심이 충만했던 중산층 출신 소피야 안드레예브나 베르스와 결혼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은 탓인지 아내에게 모성을 몹시 강조했다. 소피아는 열세 명의 아이들을 키우는 한편, 틈나는 대로 톨스토이의 원고를 교정하고 교열했다.
18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를 집필 했다. 1880년대 들어서 톨스토이는 원시 그리스도교로 회귀하고, 단순하고 간소한 생활을 유지하며,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농민 계몽에 힘쓰는 금욕주의자로 변신했고, 말년에는 러시아 민중 사이에서 입에서 입으로 오래도록 구전되는 설화를 다시 쓰는 일에 몰두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도 그 작품 중 하나다. 또다른 대작 『부활』도 이 시기에 쓰였다. 톨스토이는 순례자가 되겠다고 집을 나선 며칠 후, 1910 년 11월 7일 아스타포보 역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작품을 말하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What Men Live By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톨스토이가 한평생 붙잡았던 화두인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변을 해 주는 단편이다. 민중의 가슴을 적시기 위해 쓰인 작품이라 쉽고 따뜻하고 뭉클하다.
종교에 귀의한 후 원시 그리스도교가 지닌 미덕이 사람들과 세상에 스며들기를 원했던 그의 간절한 바람이 잘 녹아든 작품이기도 하다.
제화공 세묜이 신에게 버림받아 세상에 온 미하일을 돌보는 이야기지만, 이 ‘돌봄’은 결코 일방적인 것은 아니다. 세묜은 구두 만드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지만 사는 일은 힘겹기만 하다. 빵값은 비싼 데 품삯은 현저히 낮기 때문이다. 게다가 받아야 할 돈을 받지 못해 새 외투도 살 수없다. 고단한 생활과 빠듯한 생계 앞에서 긍정적인 삶의 방식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세묜은 인간성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분투한다. 이 과정에서 미하일은 세묜과 그의 가족에게서 인생의 근본적인 가치에 대해 알게 한다. 세묜은 사람의 가치가 물질적 풍요에 있지 않고, 사랑과 이타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또한, 미하일이 지닌 신비로운 힘과 그의 선한 영향력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다준다.
미하일이 발견된 곳은 공교롭게도 예배당 앞이었다. 이는 민중들과 멀어진 당시 기독교에 대한 비판 의식이 담겨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미하일은 신이 던진 세 질문, 사람 안에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무엇이 주어지지 않았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야 했다. 이 질문은 작품의 후반부에 등장하는데, 덕분에 우리는 이전에 있었던 여러 사건을 복기할 기회를 얻는다. 동시에 천사 미하일이 왜 세 번 웃었는지 알게 되면서 그를 따라 자연스럽게 미소 짓게 된다.
“모든 사람이 스스로 계획해서가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사랑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 다.”라는 미하일의 말은 이 작품의 주제 의식을 관통한다. 사람을 어지럽히는 무수한 유혹과 삶을 뒤흔드는 갖가지 사건 사이에서 사랑이 갖는 힘과 가치를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람 안에 사랑이 있고, 사랑이 주어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으며, 마침내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깨달음은 시공을 초월해 여전히 우리에게 울림을 준다. ‘사랑하라!‘는 말을 건네는 이 책이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자신의 깊은 종교적 신념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사랑과 연민이야말로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근본임을 강조했다.

세계를 말하다
‘입고’ ‘먹고’ ‘사는’ 사랑, 그리고 애칭
톨스토이는 후반기에 쓴 작품들에서 사랑과 선을 실천하라고 이야기한다. 이 사랑의 대상은 비단 가족이나 연인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랑은 헐벗은 자, 굶주린 자, 몸 누일 곳 없는 자들에 게까지 향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주인공 세묜의 직업이 제화공인 것도, 그들이 빵값이 없어 걱정하는 나날을 보내는 것도, 예배당에서 발견한 미하일이 갈 데가 없는 것도, 삶의 바탕을 이루는 의식주의 중요성을 드러내 준다. 그의 작품에서 의식주는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것이 된다.
톨스토이는 작품을 통해 외면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든든한 초석임을 이야기한다. 세묜은 미하일을 보고 고민에 빠진다. ‘네 돈을 도둑질할까 봐 두려운 거야? 에이, 세마. 그건 좋지 않지!’ 외면하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을 때, 세묜은 스스로를 가리켜 ‘세마’라고 일컫는다. 세마는 세묜의 애칭이다. 한편, 세묜이 미하일의 이름을 알게 된 뒤 곧장 ‘미하일라’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것 또한 사랑의 발현이다. 사랑이 필요한 순간, 애칭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가 미하일을 부를 때 “사랑하는 사람아”라고 버릇처럼 말하는 것 또한 사랑의 실천이다. 사랑이 계속되 어야 한다고 재확인하는 것이다.
문학에서 신앙으로
톨스토이는 젊은 시절부터 자신을 괴롭혀 온 삶의 목적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했다. 과학, 철학, 역사, 문학 등 여러 분야의 책을 탐독하며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그 실패는 곧바로 정신적 위기로 이어졌고 이때 톨스토이는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 사는 게두렵고 삶이 불명확하고 불투명하게만 느껴졌다. 그때 쓴 책이 『고백록』(1879)이다. 이 책에서 그는 그간 신봉해 왔던 ‘이성’이 비이성적이었음을 고백했다. 또한 자기 자신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서 일할 때, 삶의 의미가 발견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1885)를 쓰기 전, ‘인간은 어떻게, 무슨 목적으로 살아야 하는가?’란 질문에 대한 답을 『고백록』에 먼저 담은 셈이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상류 계층으로서 자기의 삶이 철저히 거짓과 위선 위에 세워 졌음을 자각한다. 청빈과 금욕을 한껏 예찬하면서도 정작 안락한 삶을 버리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엄습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때부터 그는 문학보다 종교 사상에 더욱 몰두한다.
톨스토이에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허위의식을 벗어 버리는 ‘실천’에 있었다. 그는 기존의 복음서 네 권을 하나로 묶어 새로운 『복음서』(1883)를 펴냈다. 그러나 ‘독선과 신비로부터 해방된 기독교’를 만들겠다는 그의 원대한 꿈은 정교회로부터 파문당하면서 좌절되고 만다. 이 때문에 후대인들은 예술가 톨스토이와 사상가 톨스토이를 구분해 평가하기도 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세계문학그림책 | 오은 저자(글) · 조아름 그림/만화 · 레프 톨스토이 원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What Men Live By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레프 톨스토이
사람 안에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무엇이 주어지지 않았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P-1

성실한 제화공 세묜이 있었다.
바지런히 구두를 만들었지만 품삯은 싸고 빵 값은 비싸서 늘 가난했다.
딱 한 벌 있는 외투는 낡을 대로 낡았지만, 새로 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것은 아내와 함께 입는 유일한 외투였다. - P-1

가을쯤 양 모피 살 돈을 모을 수 있었다.
모아 둔 3루블에 농부에게 받을 5루블 20코페이카를 보태면새 옷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농부에게서 고작 20코페이카밖에 받지 못했다. - P-1

세묜은 혼잣말을 했다.
"20코페이카 은전 하나로 술 마시는 것 말고 뭘 할 수 있겠는가?"
그는 그날 술에, 가난에, 가련한 신세에 취해버렸다. - P-1

투덜대며 집에 오는 길, 세묜은 예배당 뒤에서 한 사람을 보았다.
무슨 영문인지 그는 벌거벗은 채로 앉아 있었다.
‘다가갈까, 아니면 그냥 지나갈까?’ 그 사람을 본 이상, 못 본 척 지나칠 수는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 사람은 세묜을 힘없이 쳐다보았다.
세묜은 그 시선에 선선히 마음을 빼앗겼다. - P-1

세묜은 자기 외투를 벗어 그에게 입혀 주었다.
"어디서 온 겐가?"
"저는 이곳 사람이 아닙니다."
세묜은 취기가 가셔서 추위가 고통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럼, 우리 집에 가세. 좀 지내다 떠나게나." - P-1

세묜의 아내 마뜨료나는 새 외투에 대한 기대감으로 남편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때 남편과 낯선 사람이 집에 들어섰다.
얼큰한 술 냄새도 함께였다.
탕진의 냄새였다. - P-1

마뜨료나는 욕을 퍼붓고 싶었지만, 나그네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마뜨료나, 당신 안에는 신이 없는가?"
세묜이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다시 나그네를 바라보자 마뜨료나의 마음이 차분해졌다.
"한술 자시던가."
한참 나그네를 바라보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그가 좋아졌다.
나그네가 마뜨료나를 향해 해맑게 미소 지었다. - P-1

"그나저나 누군가에게 강도를 당한 거요?"
마뜨료나가 물었다.
"신이 저를 징벌하셨습니다."
마뜨료나는 당장 입을 옷을 나그네에게 건넸다.
속상했지만 나그네의 미소를 떠올리자 이내 행복해졌다.
그 속상함을 풀 곳은 남편이었다.
"세묜!"
"왜?"
"우리는 주는데, 왜 우리한테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가난은 하루아침에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 P-1

다음 날 아침, 세묜이 말했다.
"귀한 손님, 밥벌이는 해야 하지 않겠나. 무슨 일을 할 줄 아는가?"
"아무것도 할 줄 모릅니다."
세묜이 놀란 마음을 추슬렀다.
"할 마음만 있으면 되네."
"사람들이 일을 하니 저도 하겠습니다."
"자네 이름이 뭔가?"
"미하일입니다."
"자, 미하일라, 나를 잘 따라 하게."
세묜은 실을 집어 손에 두르고 매듭을 짓기 시작했다. - P-1

미하일라의 바느질 솜씨는 일품이었다.
사흘째부터 숙련된 제화공처럼 일하기 시작했다.
평생 이 일을 해온 세묜보다 실력이 나았다.
한겨울의 어느 날, 몸집이 커다란 신사가 집 안에 들어섰다.
"잘 듣게, 제화공. 이 물건이 보이는가?"
고급 가죽이었다.
"보입니다, 나리."
"1년 내내 다녀도 비틀어지지도, 터지지도 않는 장화를 만들어 주게나.
그렇게만 된다면 10루블을 주겠네.
대신, 그 전에 장화가 터지면 자네를 감옥에 집어넣겠네!" - P-1

미하일라는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자네, 사랑스러운 사람아, 이게 무슨 짓인가!"
미하일라가 만들어 놓은 목 없는 신발을 보고 세묜은 당황했다.
장화를 망쳤다는 소문이 벌써 난 것일까?
때마침 신사의 집에서 온 하인이 문을 쾅쾅 두드렸다.
"나리께 장화는 더 이상 필요 없소. 나리께서 돌아가셨소."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미하일라가 목 없는 신발을 건넸다.
죽은 사람에게 신길 신발이었다. - P-1

몇 년이 흘렀다.
한 여자가 쌍둥이 여자애들을 데리고 찾아왔다.
"이 아이들에게 가죽 구두를 맞춰 주고 싶어요."
두 아이가 똑 닮았지만, 그중 한 아이는 다리를 절뚝였다.
"이 아이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습니까?"
치수를 재던 세묜이 여자에게 물었다.
"어머니한테 눌려서 이렇게 되었어요."
마뜨료나가 끼어들었다.
"아주머니가 애들 엄마 아닌가요?"
"아닙니다. 이 아이들은 내 양녀들입니다.
내 아이는 신이 데려가셨거든요." - P-1

한번 말문이 터지자, 여자의 입에서 이야기가 술술 쏟아져 나왔다.
"6년 전, 이 아이들의 부모가 며칠을 사이에 두고 운명했답니다.
엄마는 아이들을 낳고 한 아이 위에 쓰러져 있었어요.
참 선량한 사람들이었는데…….
이웃인 제가 일단 아이들을 데려왔지요.
8주가 된 제 아들과 이 두 아이, 그날부터 제가 젖을 먹여 키우기 시작했지요.
슬프게도 아들은 두 돌 때 땅에 묻었답니다.
이 아이들이 없었다면 과연 제가 살 수 있었을까요?"
이야기를 듣는 미하일라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 P-1

"마침내 신이 저를 용서하셨어요."
미하일라가 두 주인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자네를 붙잡지는 않겠네.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나?
지금껏 자네는 딱 세 번 미소를 지었네. 그때마다 빛이 났고."
미하일라가 말했다.
"저는 신이 내린 벌을 받는 중이었어요.
사람 안에 무엇이 있는지, 사람에게 무엇이 주어지지 않았는지,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지 알게 된 뒤에야 다시 하늘로 올라갈 수 있었어요." - P-1

그제서야 세묜과 마뜨료나는 미하일라가 누군지 알게 되었다.
"세묜은 저를 지나치지 않았고 마뜨료나는 저를 내치지 않았죠.
그 때문에 저는 사람 안에 사랑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1년 뒤 우람한 신사가 찾아왔잖아요.
그때 신사 어깨 너머로 제 친구인 죽음의 천사를 보았습니다.
그는 1년간 신을 수 있는 신발을 주문했지만, 저는 그가 죽을 것을 알았지요.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 그것은 자기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저는 세 번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았습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들을 먹이고 키운 여자를 보니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사랑이지요."
세 번의 미소는 세 차례의 깨달음이었다. - P-1

한 사람에서 나그네로, 식구이자 제화공으로, 그리고 지금은 천사가 된 미하일라가두 사람의 눈앞에 있었다.
커다란 빛을 내뿜으며 천사의 날개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 P-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난처한 미술 이야기 8 - 바로크 문명과 미술 : 시선의 대축제, 막이 오르다 ㅣ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8
양정무 지음 / 사회평론 / 202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술과 역사를 읽으며] 『난처한 미술이야기』 8권을 읽고
― 화려한 바로크 너머의 사람과 역사를 보다


『난처한 미술이야기』 8권은 로마에서 시작해 북유럽을 거쳐 스페인까지 이어진다.

바로크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먼저 화려함을 떠올린다. 그런데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그 화려함이라는 한 단어로는 세 지역을 묶을 수 없었다. 로마에서는 내가 떠올리던 바로크의 화려함이 가장 선명했다. 북유럽에서는 화려함 대신 시민의 얼굴이 보였다. 스페인에서는 이슬람의 기억과 제국의 흥망이 겹쳐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은 결국 하나의 질문을 남겼다.

바로크란 무엇인가. 아니, 더 정확히는 그 화려함 뒤에 누가 있었는가.


I. 로마 — 화려함 뒤의 손

우리는 완성된 돔을 올려다보며 미켈란젤로를 기억한다. 그러나 그 높은 곳에서 횃불을 밝히고 밤새 돌을 나르던 사람들은 기억하지 않는다.

로마 바로크의 화려함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교황의 권력과 막대한 돈이 있었고, 예술가의 천재성이 있었으며, 그 뒤에는 돌을 나르고 벽돌을 쌓았던 이름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르바노 8세는 예술을 적극 후원한 교황이었지만, 그의 시대에 판테온의 고대 청동이 뜯겨 나가 대포가 되었다. 그래서 로마에는 “야만인이 하지 않은 일을 바르베리니가 했다”는 조롱까지 생겼다. 시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은 탐나는 그림을 얻기 위해 화가를 감옥에 가두기도 했다. 예술을 사랑하는 것과 예술을 존중하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었다.

카라바조는 성인을 신의 자리에서 끌어내려 거리의 인간으로 그렸다. 어둠 속에서 빛이 사건을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반면 카라치는 신화를 그려도 성당 천장처럼 그렸다. 같은 시대, 같은 도시에서 두 화가는 전혀 다른 길을 갔다.

그리고 베르니니와 보로미니가 있었다.

베르니니는 공간을 연출하는 천재였고, 보로미니는 공간을 만들어내는 천재였다.

베르니니는 성 베드로 대성당 종탑 공사에서 큰 실패를 겪었다. 그러나 그것을 베르니니 한 사람의 설계 실패로만 볼 수는 없다. 지하수와 불균질한 지반, 마데르노 때부터 이어진 기존 기초, 그 위에 더해진 종탑의 하중이 얽혀 있었다. 대리석을 자유롭게 다루던 베르니니에게도 땅과 기존 구조물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재료가 아니었다.

보로미니는 좁은 부지에서 산 카를리노 성당이라는 걸작을 만들어냈지만, 결국 스스로 생을 마쳤다. 화려한 재기를 거둔 베르니니보다, 나는 보로미니 쪽에 더 마음이 갔다.

돔은 미켈란젤로의 이름으로 남았고, 종탑은 베르니니의 실패로 남았다. 그러나 그 사이 어딘가에서 돌을 나르고 횃불을 들었던 손들은 어떤 이름으로도 남지 않았다.

로마 바로크가 남긴 것은 화려함만이 아니라, 그 화려함이 감추고 있는 무수한 이름들이었다.


II. 북유럽 — 돈이 만든 새로운 얼굴

로마에서는 교황과 교회가 미술의 방향을 이끌었다. 북유럽에서는 다른 힘이 등장했다.

돈이었다.

무역으로 부자가 된 시민들이 그림을 사기 시작했다. 그러자 성인과 왕이 차지하던 그림 속에 상인과 술집 사람들, 부엌과 들판이 들어왔다.

루벤스는 그림만 잘 그린 사람이 아니었다. 대규모 공방을 운영하는 사업가였고, 스페인과 영국 사이를 오간 외교관이기도 했다. 그림으로 돈을 벌고, 그림으로 평화를 협상했다. 말년에는 정치에서 물러나 전원에서 지내며 자신이 사랑하는 땅을 그렸다.

돈이 마음의 평화를 보장하지는 않지만, 돈이 없어서 생기는 걱정을 덜어주는 것은 분명했다.

네덜란드를 보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땅이었다.

습지와 갯벌이었던 곳을 수백 년 동안 제방을 쌓고 물을 퍼내며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으로 바꾸었다. 암스테르담 왕궁 아래에는 목재말뚝이 1만 3천 개 넘게 박혀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웅장한 석조건물이지만, 그 아래에는 보이지 않는 토목이 있었다.

네덜란드 황금기의 화려한 시민사회도 그 위에 서 있었다.

시장은 화가에게 자유를 주었지만 위험도 함께 떠안겼다. 렘브란트는 파산을 겪었고, 페르메이르는 죽을 때 많은 빚을 남겼다. 그런가 하면 잘살면서도 바니타스 정물화를 통해 “아무리 많이 가져도 죽으면 끝”이라고 경고했다.

부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부를 경계하는 긴장이 그 시대의 얼굴이었다.

렘브란트는 사람의 얼굴과 반응을 살려냈고, 할스는 순간의 생기를 붙잡았고, 페르메이르는 고요한 일상의 빛을 바라보았다.

로마에서 돔과 광장이 권력과 종교의 무대였다면, 북부 네덜란드에서는 시민의 집과 창가, 술집과 운하가 미술의 무대가 되었다.

풍차는 낭만을 위해 서 있던 것이 아니라 물을 퍼내기 위해 돌았고, 그 풍차가 지켜낸 땅 위에서 화가는 평범한 사람의 얼굴과 생활을 그렸다.


III. 스페인 — 지워지지 않은 과거와 바로크라는 이름

스페인 바로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이슬람의 흔적이었다.

711년부터 1492년까지, 700년 넘게 이 땅에 있던 이슬람 문화의 기억은 레콩키스타가 끝났다고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았다.

세비야 대성당의 히랄다 탑은 원래 모스크의 미나레트였다. 미나레트는 종탑이 되었고, 모스크의 자리에는 고딕 성당이 올라섰다.

한 건물 안에 역사가 층층이 겹쳐 있었다.

엘 에스코리알 같은 거대한 건축물 앞에서도 나는 왕의 권력보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사람들의 손을 먼저 보았다.

왕의 이름은 남았고, 돌을 나른 사람의 이름은 남지 않았다.

책이 펠리페 2세의 잉카 정복을 “업적”이라 부르고 신교도 탄압을 “실책”이라 부르는 대목에서는 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제국에 이익이 되면 업적이고 손해가 되면 실책이라면, 그 기준에는 정복당한 사람도 박해받은 사람도 없었다.

엘 그레코의 그림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피카소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내가 좋아하지 않는 두 화가가 서로 이어져 있다는 점이 오히려 흥미로웠다.

벨라스케스는 카라바조의 영향에서 출발했지만 거기 머물지 않았다. 닮은 소재와 영향관계는 같은 말이 아니었다. 그는 결국 「시녀들」에서 자기만의 세계에 도달했다.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의문이 남았다.

베르니니의 조각, 보로미니의 건축처럼 압도적인 화려함을 바로크라 부른다면, 그 원형은 로마에 가장 가깝지 않은가.

북유럽의 소박함과 스페인 초기의 절제된 화면까지 모두 같은 이름으로 묶는다면, 그 ‘바로크’는 하나의 양식이라기보다 시대를 묶는 넓은 우산에 가까웠다.

스페인의 뒤쪽 역사를 따라가면서 그 질문은 다시 달라졌다.

무리요는 1649년 세비야 대역병이 닥치기 전부터 거리의 가난한 아이들을 그리고 있었다. 대역병과 경제적 어려움은 이미 존재하던 빈곤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그리고 수십 년이 흐른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 스페인에서는 추리게레스코를 비롯한 극단적으로 화려한 장식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무리요의 빈민 그림과 추리게레스코가 같은 순간에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긴 흐름으로 놓고 보면 강한 대비가 보였다.

제국의 힘은 약해지고 사회의 어려움은 깊어졌는데, 종교 공간의 장식은 오히려 더욱 화려해졌다.

시대의 현실은 어두워졌는데, 장식은 더 밝아졌다.

세 지역을 모두 읽고 나니 내게 ‘바로크’는 하나의 모양을 가리키는 말보다, 같은 시대가 서로 다른 지역에서 얼마나 다른 미술을 만들어냈는지를 묶어 보는 이름에 가까워졌다.

그래도 내가 바로크라는 말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올릴 미술은 여전히 로마다.


결국, 세 개의 바로크

로마에서는 교황과 예술가의 이름 뒤에 이름 없는 손이 있었다.

북유럽에서는 궁정과 교회의 자리에 시민과 시장이 들어섰다.

스페인에서는 지워지지 않은 이슬람의 기억 위에 제국이 올라섰고, 그 제국이 기울어가는 동안 미술은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해갔다.

세 지역은 같은 세기에 있었지만 서로 다른 질문을 던졌다.

로마는 존중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북유럽은 무엇을 그림으로 남길 것이냐고 물었고, 스페인은 바로크라는 이름이 과연 하나로 묶일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난처한 미술이야기』를 여기까지 읽으면서 나는 이제 화려한 성당과 조각만 보지 않는다.

그 화려함이 가려온 손, 그 화려함을 가능하게 한 돈과 땅, 그리고 그 화려함이 지우지 못한 오래된 기억까지 함께 본다.

그림을 온전히 본다는 것은 어쩌면 그림만 보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미술관에 간 할미
짧게 읽고 오래 남는 모두의 명화수업 - P-1

"이렇게 쉽고 재밌는 미술사라니!"
_아트 메신저, 미술 교육인 이소영
누적 조회수 5000만 뷰, 30만 구독자가 선택한화제의 유튜브 <할미아트>드디어 책으로! - P-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