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처한 미술 이야기 8 - 바로크 문명과 미술 : 시선의 대축제, 막이 오르다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8
양정무 지음 / 사회평론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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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역사를 읽으며] 『난처한 미술이야기』 8권을 읽고
― 화려한 바로크 너머의 사람과 역사를 보다


『난처한 미술이야기』 8권은 로마에서 시작해 북유럽을 거쳐 스페인까지 이어진다.

바로크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먼저 화려함을 떠올린다. 그런데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그 화려함이라는 한 단어로는 세 지역을 묶을 수 없었다. 로마에서는 내가 떠올리던 바로크의 화려함이 가장 선명했다. 북유럽에서는 화려함 대신 시민의 얼굴이 보였다. 스페인에서는 이슬람의 기억과 제국의 흥망이 겹쳐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은 결국 하나의 질문을 남겼다.

바로크란 무엇인가. 아니, 더 정확히는 그 화려함 뒤에 누가 있었는가.


I. 로마 — 화려함 뒤의 손

우리는 완성된 돔을 올려다보며 미켈란젤로를 기억한다. 그러나 그 높은 곳에서 횃불을 밝히고 밤새 돌을 나르던 사람들은 기억하지 않는다.

로마 바로크의 화려함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교황의 권력과 막대한 돈이 있었고, 예술가의 천재성이 있었으며, 그 뒤에는 돌을 나르고 벽돌을 쌓았던 이름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르바노 8세는 예술을 적극 후원한 교황이었지만, 그의 시대에 판테온의 고대 청동이 뜯겨 나가 대포가 되었다. 그래서 로마에는 “야만인이 하지 않은 일을 바르베리니가 했다”는 조롱까지 생겼다. 시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은 탐나는 그림을 얻기 위해 화가를 감옥에 가두기도 했다. 예술을 사랑하는 것과 예술을 존중하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었다.

카라바조는 성인을 신의 자리에서 끌어내려 거리의 인간으로 그렸다. 어둠 속에서 빛이 사건을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반면 카라치는 신화를 그려도 성당 천장처럼 그렸다. 같은 시대, 같은 도시에서 두 화가는 전혀 다른 길을 갔다.

그리고 베르니니와 보로미니가 있었다.

베르니니는 공간을 연출하는 천재였고, 보로미니는 공간을 만들어내는 천재였다.

베르니니는 성 베드로 대성당 종탑 공사에서 큰 실패를 겪었다. 그러나 그것을 베르니니 한 사람의 설계 실패로만 볼 수는 없다. 지하수와 불균질한 지반, 마데르노 때부터 이어진 기존 기초, 그 위에 더해진 종탑의 하중이 얽혀 있었다. 대리석을 자유롭게 다루던 베르니니에게도 땅과 기존 구조물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재료가 아니었다.

보로미니는 좁은 부지에서 산 카를리노 성당이라는 걸작을 만들어냈지만, 결국 스스로 생을 마쳤다. 화려한 재기를 거둔 베르니니보다, 나는 보로미니 쪽에 더 마음이 갔다.

돔은 미켈란젤로의 이름으로 남았고, 종탑은 베르니니의 실패로 남았다. 그러나 그 사이 어딘가에서 돌을 나르고 횃불을 들었던 손들은 어떤 이름으로도 남지 않았다.

로마 바로크가 남긴 것은 화려함만이 아니라, 그 화려함이 감추고 있는 무수한 이름들이었다.


II. 북유럽 — 돈이 만든 새로운 얼굴

로마에서는 교황과 교회가 미술의 방향을 이끌었다. 북유럽에서는 다른 힘이 등장했다.

돈이었다.

무역으로 부자가 된 시민들이 그림을 사기 시작했다. 그러자 성인과 왕이 차지하던 그림 속에 상인과 술집 사람들, 부엌과 들판이 들어왔다.

루벤스는 그림만 잘 그린 사람이 아니었다. 대규모 공방을 운영하는 사업가였고, 스페인과 영국 사이를 오간 외교관이기도 했다. 그림으로 돈을 벌고, 그림으로 평화를 협상했다. 말년에는 정치에서 물러나 전원에서 지내며 자신이 사랑하는 땅을 그렸다.

돈이 마음의 평화를 보장하지는 않지만, 돈이 없어서 생기는 걱정을 덜어주는 것은 분명했다.

네덜란드를 보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땅이었다.

습지와 갯벌이었던 곳을 수백 년 동안 제방을 쌓고 물을 퍼내며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으로 바꾸었다. 암스테르담 왕궁 아래에는 목재말뚝이 1만 3천 개 넘게 박혀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웅장한 석조건물이지만, 그 아래에는 보이지 않는 토목이 있었다.

네덜란드 황금기의 화려한 시민사회도 그 위에 서 있었다.

시장은 화가에게 자유를 주었지만 위험도 함께 떠안겼다. 렘브란트는 파산을 겪었고, 페르메이르는 죽을 때 많은 빚을 남겼다. 그런가 하면 잘살면서도 바니타스 정물화를 통해 “아무리 많이 가져도 죽으면 끝”이라고 경고했다.

부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부를 경계하는 긴장이 그 시대의 얼굴이었다.

렘브란트는 사람의 얼굴과 반응을 살려냈고, 할스는 순간의 생기를 붙잡았고, 페르메이르는 고요한 일상의 빛을 바라보았다.

로마에서 돔과 광장이 권력과 종교의 무대였다면, 북부 네덜란드에서는 시민의 집과 창가, 술집과 운하가 미술의 무대가 되었다.

풍차는 낭만을 위해 서 있던 것이 아니라 물을 퍼내기 위해 돌았고, 그 풍차가 지켜낸 땅 위에서 화가는 평범한 사람의 얼굴과 생활을 그렸다.


III. 스페인 — 지워지지 않은 과거와 바로크라는 이름

스페인 바로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이슬람의 흔적이었다.

711년부터 1492년까지, 700년 넘게 이 땅에 있던 이슬람 문화의 기억은 레콩키스타가 끝났다고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았다.

세비야 대성당의 히랄다 탑은 원래 모스크의 미나레트였다. 미나레트는 종탑이 되었고, 모스크의 자리에는 고딕 성당이 올라섰다.

한 건물 안에 역사가 층층이 겹쳐 있었다.

엘 에스코리알 같은 거대한 건축물 앞에서도 나는 왕의 권력보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사람들의 손을 먼저 보았다.

왕의 이름은 남았고, 돌을 나른 사람의 이름은 남지 않았다.

책이 펠리페 2세의 잉카 정복을 “업적”이라 부르고 신교도 탄압을 “실책”이라 부르는 대목에서는 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제국에 이익이 되면 업적이고 손해가 되면 실책이라면, 그 기준에는 정복당한 사람도 박해받은 사람도 없었다.

엘 그레코의 그림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피카소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내가 좋아하지 않는 두 화가가 서로 이어져 있다는 점이 오히려 흥미로웠다.

벨라스케스는 카라바조의 영향에서 출발했지만 거기 머물지 않았다. 닮은 소재와 영향관계는 같은 말이 아니었다. 그는 결국 「시녀들」에서 자기만의 세계에 도달했다.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의문이 남았다.

베르니니의 조각, 보로미니의 건축처럼 압도적인 화려함을 바로크라 부른다면, 그 원형은 로마에 가장 가깝지 않은가.

북유럽의 소박함과 스페인 초기의 절제된 화면까지 모두 같은 이름으로 묶는다면, 그 ‘바로크’는 하나의 양식이라기보다 시대를 묶는 넓은 우산에 가까웠다.

스페인의 뒤쪽 역사를 따라가면서 그 질문은 다시 달라졌다.

무리요는 1649년 세비야 대역병이 닥치기 전부터 거리의 가난한 아이들을 그리고 있었다. 대역병과 경제적 어려움은 이미 존재하던 빈곤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그리고 수십 년이 흐른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 스페인에서는 추리게레스코를 비롯한 극단적으로 화려한 장식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무리요의 빈민 그림과 추리게레스코가 같은 순간에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긴 흐름으로 놓고 보면 강한 대비가 보였다.

제국의 힘은 약해지고 사회의 어려움은 깊어졌는데, 종교 공간의 장식은 오히려 더욱 화려해졌다.

시대의 현실은 어두워졌는데, 장식은 더 밝아졌다.

세 지역을 모두 읽고 나니 내게 ‘바로크’는 하나의 모양을 가리키는 말보다, 같은 시대가 서로 다른 지역에서 얼마나 다른 미술을 만들어냈는지를 묶어 보는 이름에 가까워졌다.

그래도 내가 바로크라는 말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올릴 미술은 여전히 로마다.


결국, 세 개의 바로크

로마에서는 교황과 예술가의 이름 뒤에 이름 없는 손이 있었다.

북유럽에서는 궁정과 교회의 자리에 시민과 시장이 들어섰다.

스페인에서는 지워지지 않은 이슬람의 기억 위에 제국이 올라섰고, 그 제국이 기울어가는 동안 미술은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해갔다.

세 지역은 같은 세기에 있었지만 서로 다른 질문을 던졌다.

로마는 존중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북유럽은 무엇을 그림으로 남길 것이냐고 물었고, 스페인은 바로크라는 이름이 과연 하나로 묶일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난처한 미술이야기』를 여기까지 읽으면서 나는 이제 화려한 성당과 조각만 보지 않는다.

그 화려함이 가려온 손, 그 화려함을 가능하게 한 돈과 땅, 그리고 그 화려함이 지우지 못한 오래된 기억까지 함께 본다.

그림을 온전히 본다는 것은 어쩌면 그림만 보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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