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양이로소이다 ㅣ 세계문학그림책
이해나 그림, 정아원 글, 나쓰메 소세키 원작 / 고래의숲 / 202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세키 이후 단 한 명의 소세키도 다시 태어나지 않았다.” _ 세누마 시게키
“지금도 낡지 않았다. 이것은 가히 기적이다.” _ 고바야시 교지
“메이지 시대 일본인의 정신적 공백을 지식인의 눈으로 정확히 포착해 낸 작가.” _ 나카무라 미츠오

1. 작가를 말하다-나쓰메 소세키 夏目漱石

일본의 대문호 나쓰메 소세키(1867~1916)는 일본 문학사상 최고의 국민 작가로 칭송 받는 작가다. 일본인 대부분이 중고등학교 시절에 그의 작품을 읽고 배울 만큼 소세키는 여전히 존경받는 존재다.
소세키는 도쿄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에 게는 두 살 때 다른 집안에 양자로 입양되었다 양부모의 이혼으로 다시 생가로 돌아온 독특한 사연이 있다. 도쿄 제국 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도쿄 고등 사범 학교, 제5고등학교 등에서 교사로 일하던 중 폐결핵 초기 진단을 받기도 했다.

1900년 국비 유학생으로 영국 유학길에 올라 런던 에서 셰익스피어 연구가인 윌리엄 크레이그 밑에서 수학했지만, 부담스러운 유학 비용과 고독감, 영문학에 대한 위화감 등으로 신경 쇠약에 시달렸다.
1903년 일본으로 돌아와 교직 생활에 몸담다 1905년 38세의 나이에 『나는 고양이로 소이다』로 좋은 평가를 얻으며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사실 소세키는 문학적 야망보다는 유학 시절 얻은 신경증을 완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소설을 창작했다고 한다. 이후 교직을 떠나 아사히 신문사에 소설 기자로 입사해 전업 소설가의 길을 모색한다.

소세키는 소설뿐 아니라 한시, 하이쿠, 수필 등 여러 장르에 걸쳐 작품을 남겼다. 대표 작으로는 『도련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풀베개』, 『산시로』, 『마음』, 『그 후』, 『한눈팔 기』 등이 있다. 1916년 지병인 위궤양이 악화되어 내출혈로 49세에 세상을 떠났다.


2. 작품을 말하다-나는 고양이로소이다, 吾輩は猫である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한심하고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을 고양이의 시선으로 거침없이 폭로하는 소설이다. 일본 근대 소설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이 작품은 소세키의 데뷔 작이기도 하다. 1905년 1월부터 1906년 8월까지 잡지에 연재되면서 사람들에게 알려 지기 시작했고, 1905년 10월부터 1907년 8월까지 세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중학교 교사 구샤미가 키우는 고양이가 그 집의 서재에 모여드는 메이테이, 간게 쓰, 도후 등 무기력하고 속물적인 지식인 계급의 말과 행동을 관찰하고, 보고하는 형식으로 전개되는 글이 다. 소세키는 작품 속 고양이의 시선으로 만담하듯 위트 넘치는 문체로 인간의 위선과 허세, 밑바닥 본성을 폭로하며 비웃는다.

이 작품은 전통과 서구 문명, 정신적 가치와 물질적 가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풍자 적으로 그리고 있다. 섬세하고 치밀한 심리 묘사와 윤리적 문제의식, 그리고 그것을 감싸는 능청스러운 이야기로 일본 근대 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었다.
소세키의 작품들은 일본 근대 문학의 시작점으로 손꼽히면서 동시에 완성도 높은, 지금까지도 낡지 않은 기적의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3. 세계를 말하다

지폐에 실린 작가의 얼굴

죽은 지 100년이 훌쩍 지났지만, 소세키는 여전히 뜨겁게 사랑받는 작가다. 소세키는 지난 2000년 일본의 아사히 신문에서 실시한 한 조사에서 ‘지난 1000년 동안 일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 1위로 선정될 정도였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1984년부터 2004년까지 20년 동안 일본의 1000엔권 지폐에 그려진 초상화의 주인공이 바로 소세키라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사랑받는 작가인지 확고 하게 증명하고 있다.

작가들의 작가

‘일본의 셰익스피어’라고도 불리는 소세키는 일본 근대 문학의 형태를 확립한 작가로 추앙 받는다. 소세키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기쿠치 간 등 내로라하는 작가들을 그의 문하생 으로 두었다고 한다. 소세키는 일본에서만 존경받는 작가로 그치지 않았다. 우리나라 근대 문학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이광수와 염상섭, 중국 근대 문학의 아버지로 자리매김한 루쉰도 그의 문학 사상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메이지 유신

메이지 유신은 19세기 후반 일본의 메이지 천황 때에,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중앙 집권 통일 국가를 이루어 일본 자본주의 형성에 기점이 된 변혁의 과정을 뜻한다. 소세키가 살았던 메이지 시대는 메이지 유신으로 인해 서양 문화가 급작스럽게 밀려온 시기였다. 소세키는 가치관의 혼란으로 빚어진 정체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펜을 들었다. 급변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심리를 치밀하게 묘사하며 인간 본질에 대해 깊이 탐구했다. 소세키가 일본인의 정신적 스승으로 자리매김한 이유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 세계문학그림책 | 정아원 저자(글) · 이해나 그림/만화 · 나쓰메 소세키 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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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똑똑한 내가 쥐를 못 잡을 리 없다.
잡았다가 놓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잡지 않은 것은 잡고 싶지 않아서이다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 주인의 얼굴을 처음 본 게 인간과의 첫 만남이었다.
털 없이 매끈한 게 참 신기하게 생긴 족속도 다 있구나 싶었다.
주인은 선생이다. 매일같이 배 터지도록 먹고 소화제를 챙긴다.
책 펴 놓고 졸다가 침도 곧잘 흘린다. 나는 고양이지만 이따금 생각한다.
선생은 정말 편한 직업이구나. 그래도 주인은 이 노릇이 지긋지긋하다며 푸념한다.

인력거꾼네 검둥이는 힘은 세지만, 교양이 없다.
검둥이는 나한테 지금껏 잡은 쥐가 몇 마리 되냐고 묻더니 인간만큼 인정머리 없는 것도 세상에 없다고 흉을 봤다.
나는 절대 쥐를 잡지 않을 것이다.
욕심부리지 않고 평생 주인집에서 이름 없는 고양이로 살자고 마음먹었다.

설날 아침, 주인 앞으로 온 엽서 한 장. 파스텔로 그린 틀림없는 나의 초상이다.
고양이들이 펜을 쥐고 책을 펼쳐 공부하는 그림엽서도 도착했다.
책상 귀퉁이 쪽 춤추는 고양이 그림 위에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는 먹으로 쓴 글씨가 있었다.
엽서 오른쪽 옆에는 <어느 봄날 책 읽고 춤추는 고양이의 하루>라는 하이쿠까지 적혀 있다.
고양이 주제에 우쭐한 기분이 들었지만, 몰래 떡국을 먹다 휘청대는 바람에 떡국 먹고 춤추는 고양이로 찍혀 체면을 구겼다.

손님이 찾아왔다. 금테 낀 메이테이 선생은 허풍쟁이 미학자다.
끝없는 말장난으로 주인을 놀려 먹기 바쁘다.
그 앞에서 쩔쩔매는 주인은 내 눈동자처럼쉴 새 없이 마음이 변하는 사람이다.
주인의 옛 문하생 간게쓰 군은 앞니가 하나 빠져 있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잠자코 들었지만 재밌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인간이란 그저 시간을 때우려 끊임없이 입을 놀리는 시시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대문의 종이 튀어 오를 정도로 울렸다.
짜랑짜랑한 목소리의 여자가 기모노 자락을 다다미에 끌며 들어왔다.
벗어진 이마, 가는 눈과 균형미 없이 유난히 큰 코가 눈에 띈다.

사업가인 가네다의 부인이었다.
딸의 결혼 문제로 간게쓰 군의 성격을 알고 싶다며 다짜고짜 질문을 퍼부어 대더니 샐쭉하며 돌아갔다.
메이테이 선생과 주인은 예의 없는 부인의 태도에 황당해했다.

고양이는 발이 있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어디를 어떻게 걸어도 불필요한 소리를 내지 않는다.
하늘을 가는 것처럼, 구름 위를 밟는 것처럼.
고양이 꼬리에는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묘약이 담겨 있다.
덕분에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을 한심하게 내려다볼 수 있다.
나는 가네다 부부의 집을 엿보다 돌아왔다.
주인이 가네다 집안과의 관계를 반대한다고 간게쓰 군에게 말했다.
주인의 말에 나도 야옹야옹 하고 두 번을 울었다.

똑똑. 깊은 밤, 부엌 덧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침실까지 들어와 높지도 않은 주인의 콧등을 깨물고 달아난 그 쥐일 것이다.
똑똑한 내가 쥐를 못 잡을 리 없다.
지금까지 잡지 않은 것은 잡고 싶지 않아서이다.
똑똑. 쥐가 아니라 도선생이었다.
주인을 깨우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도선생은 안주인의 머리맡에 가지런히 놓인 상자를 정성껏 챙겼다. 선물 받은 참마가 든 네모난 상자였다.
단무지가 안방에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안주인의 버릇을 도선생이 알 리 없다.
다음 날, 주인 부부는 순사에게 참마를 도둑맞았다고 신고했다.

보통 때처럼 가네다 댁에 몰래 숨어들었다.
숨어든다는 말은 좀 그렇다.
이 광활한 대지에 막대기를 세우고 울타리를 쳐누구누구 소유라고 정하다니 아무래도 이상하다.
직접 만든 것도 아니면서.
아니, 그렇게 우기는 건 괜찮다 해도 출입을 금지할 이유는 없다.
그러니 나는 어느 곳이든 드나들 수 있다.

고양이가 아니라 개였으면 나았을 거라는 말에 결국 쥐를 잡기로 했다.
나도 사회적 동물이다. 오늘 밤, 반드시 주인 가족을 기쁘게 해 주겠다.
일찌감치 작전을 세워 두었다. 이윽고 밤이 깊었다.
달그락달그락. 나는 널마루에서 선반 위 놈들을 올려다본다.
앞발에 힘을 잔뜩 주고 얍 하고 뛰어올랐다.
"도둑이야!" 주인이 안방에서 고함을 지르며 헐레벌떡 뛰쳐나왔다.

덥다. 이 옅은 회색 점박이 무늬 털옷을 벗어 빨든 당분간 전당포에 맡기든 하고 싶을 정도다.
그러고 보니 인간은 참 사치스럽다. 날것으로 먹어야 할 걸 굳이 익히고 굽고, 품을 들인다.
다리가 네 개나 있는데, 두 개밖에 쓰지 않는 것도 사치스럽다.
더 웃긴 건 이렇게 한가한 사람들이 모였다 하면 서로 바쁘다 떠들기 바쁘다.

인간의 세월과 고양이의 세월을 같은 비율로 계산하는 건 부당하다.
주인의 세 살배기 셋째 딸은 울고 짜는 것과 누워 똥오줌 싸는 것, 젖 먹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른다.
세상을 걱정하고 시대에 분노하는 나와 비교하면 그저 한심한 수준이다.

주인은 남들 앞에 자랑할 만한 성품이 못 된다. 늘 끝이 흐지부지하다.
공을 줍겠다고 울타리를 넘어온 학생들의 윤리 선생과 마주하고는 꼬리를 바짝 내렸다.
참마를 훔치다 잡힌 도선생과 마주쳤을 때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안주인과 조카에게는 늘 엉터리 지식을 뽐내며 거드름을 피운다.
말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주인이 곰곰 생각한다.
메이테이 선생, 간게쓰 군, 가네다 부부, 울타리를 넘어온 아이들 모두 미치광이라고, 어쩌면 세상은 미치광이가 모여 사는 곳이라고.
주인의 마음을 어떻게 아냐고? 이까짓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래 봬도 나는 독심술을 터득한 고양이다.
얼마 전,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던 주인의 생각을 알아차리고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내 가죽으로 조끼를 만들면 따뜻하겠네 하는 생각.
끔찍한 일이다.

경찰서에 출석해 도난품을 받아 온주인을 기다리는 손님이 있었다.
밤송이머리 부에몬은 가네다의 딸에게 장난으로 연애편지를 보낸 일을 고백하며 울먹였다.
주인은 거드름을 피우며 "글쎄."라는 말만 했다.
참 재밌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자신을 아는 것은 삶의 큰 숙제다.
하지만 사람이 자기 코 높이를 스스로 알 수 없듯 자신을 깨닫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다.
이제 부에몬은 주인의 집을 찾아온 덕분에 진정한 인간이 될 것이다.
주인처럼 다른 사람의 걱정에 냉담해질 것이고, 다른 사람의 곤경에 즐거워할 것이다.

고양이로 태어나 산 지 벌써 두 해가 지났다.
죽음이 누구에게나 정해진 운명이라면 일찌감치 죽는 것이 현명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왠지 울적해졌다. 부엌으로 갔다.
고양이도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지 말란 법은 없을 것이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으니 뭐든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 해볼 일이다.

두 눈 딱 감고 홀짝홀짝. 잠이 쏟아졌다. 첨벙!
나는 커다란 항아리에 빠졌다. 자연의 힘에 맡기기로 했다.
나는 죽는다. 죽어서 이 평온을 얻는다. 죽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다.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기쁘고 기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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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하지 말고 따라와. 우리들은 벌써 10년 이상 아르헨티나의 산을 수도 없이 오르내린 경험이 있으니까 안심해도 돼.
우리가 모두 가우초라고 했지만 나는 사실 수의사이고 루카스는 농기계를 디자인하는 엔지니어, 파블로는 건축가, 아구스틴은 변호사, 그리고 내 동생인 또 다른 루카스가 실제 가우초라고 할 수 있지." 그들 중 가장 수다스러운 하비에르가 내 곁으로다가와 함께 걸으며 말했다. - P241

신이시여, 당신께 오로지 이것만을 빕니다. 메마른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제가 최선을 다하지 못한 허무함과 외로움으로 가득하게 되지않기를… 신이시여, 당신께 오로지 이것만을 빕니다. 제가 불의에 무관심한 사람이 되지 않기를, 매서운 발톱이 운명을 할퀸 뒤에 또다시 저의 다른 뺨을 치지 않기를……………. - P249

"아, 그렇게 된 거였구나. 그럼 잠은 어디서 자?" 나의 질문에 모두가 서로의 얼굴을 보며 다시 웃었다. "어, 그냥 아무 데서나잤어. 골목길에 침낭을 펼쳐놓고... 실은 지금도 너희한테 너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씻기는 해야겠는데 난감하더라고. 그래서 주유소에 가서 사정을 하고 세차하는 호스로 샤워를 하고온 거야. 하하하. 우리가 좀 그래………… - P252

‘미나, 어제의 멋진 만남을 우리들은 평생 기억할 거야. 그 시간이 얼마나 특별했는지는 우리의 마음속에만 남게 되겠지.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퇴색되지 않을 거라고 믿어. 책을 좋아한다고 했지? 어제 산에 올라갔을 때 너하고 레이나에게 주려고 만든 거야. 언제나 행운이 함께하길 빌게. - 아르헨티나 가우초 친구들로부터 - P255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항로 중 하나인 파타고니아의 항로를 개척한주인공이 되었다. 그때의 경험으로 탄생한 책이 바로 <야간 비행>그가 보았던 세상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이었겠지. 비행을 나선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어디서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도 모르지만 하늘을 사랑하고 파타고니아를 사랑했던 그의 영혼만큼은 그곳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어린 왕자가 여우에게 말하는 사랑, 그런 마음으로 파타고니아를 사랑했던 그이니까. - P257

하비에르의 말대로 어쩌면 모든 일들은 우주의 움직임으로인해 운명 지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고심하던 나는 비행기 일정을 바꾸고 산타페 주의 작은 도시 피르마트로 가는 버스 티켓을 샀다. 파타고니아에서 만난 친구들이 살고 있는 그곳을 거쳐대평원 팜파가 있는 아르헨티나의 심장을 지나 인티와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북쪽까지 가볼 수도 있겠구나! 우주의 움직임으로 ‘세상의 끝‘에서 그 친구들을 만난 것만큼이나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사건들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지 못한 채 나는 그렇게 새로운 만남과 경험들에 대한 기대로 부푼 가슴을 안고 피르마트로 가기 전날 밤을 하얗게 지냈다. 과연 어떤 멋진 일들이있을까를 상상하면서……………. - P259

‘새들이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다. 물이 없는 세상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책이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다.‘ 보르헤스가 어느 책인가에 썼던 말이야. 하루 종일 책을 옆에 끼고 살다시피 하는 하비에르의 어머니는 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 P297

‘인간의 한계는 예술적인 행위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뀐다. 춤은인간의 육체를 이용해 서로가 가장 깊이 소통할 수 있는 길,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는 과정,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영혼의 성장을 경험할 수있는 가장 멋진 방법이다.‘. - P302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어떤 질문을 먼저 받게 될지 궁금해하고 있는데 그가 대뜸 이렇게 말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오랜 시간 머물며 여행을 하셨다구요. 여쭤보고 싶은 게 많습니다. 그나저나 얼마 전 멘도사에서 매우 아르헨티나적인 경험을하셨다면서요? 우리 그 이야기부터 해봅시다." 허걱... 아무리그래도 아르헨티나 온 국민이 보고 있을 토크쇼에 출연하게 되었는데 좋은 얘기부터 하는 것이 아니라 도둑맞은 얘기부터 하라니. 순간 당황스럽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소매치기와 도둑이 많기로 유명한 그곳에서 아주 제대로 한 경험이니 만큼 어차피 피해갈 수 없는 이야기였다. - P317

"참 안 된 일이구나. 하지만 미나, 너무 상심하지 마. 어차피처음부터 누군가에게 속해 있는 물건이란 없어. 그것들은 잠시네 것이었던 것뿐이지. 세상 모든 일은 이유가 있다고 해. 분명네가 잃은 것만큼 얻은 것이 있을 거야."
"그래. 나도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야. 하지만 여전히 화가나고 억울해. 물건들은 그렇다 치고 내가 찍은 사진과 글들은 어쩌라고. 그것들은 분명 내 것이잖아. 안 그래?" - P321

"물론 그렇지. 하지만 네 모습을 봐. 잃어버린 것은 물건들뿐이고 넌 무사하잖아. 그게 얼마나 감사한 일이야. 너의 건강한두 팔과 두 다리로 다시 걸으면 되는 거야. 다 잊고 열심히 다시걷는 거야."
그의 말이 옳았다. 처음부터 나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P321

여행은 끝났지만 내 가슴은 오히려 뜨거워지고 있었다. 영원한 애증의 대상과도 같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심금을 울리는 탱고 선율처럼 묘한 울렁임을 주는 그곳에서 얻은 추억들은 오래도록 나를 웃게 하고 때로는 눈물짓게 할 것이며,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손을 잡아줄 것이다. - P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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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나선 ㅣ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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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감상] 『투명한 나선』 ― 총열의 강선에서 DNA까지, 유카와 마나부의 가슴속 하트

1. 추리소설이라기보다 사람 사는 이야기

지난해 여름에는 요코미조 세이시의 살인 추리소설을 읽었고, 올해는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를 읽었다. 요코미조의 작품에서는 복잡한 혈연과 집안의 원한이 기괴한 살인의 수수께끼를 만들고, 아야츠지의 관 시리즈에서는 저택의 구조와 불가능해 보이는 범죄, 곳곳에 놓인 단서가 정교하게 맞물린다. 두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면 탐정보다 먼저 범인과 트릭을 알아내기 위해 자연스럽게 사건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런 본격 추리소설들을 읽은 뒤 히가시노 게이고로 돌아오니 『투명한 나선』은 추리소설이라기보다 그냥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총상을 입은 시신이 발견되고 경찰 수사가 이어지지만, 누가 어떻게 죽였는지를 풀어내는 재미는 크지 않다. 수사가 진행될수록 드러나는 것은 범행의 기술보다 사건의 중심에 선 소노카와 히데미, 그리고 나에와 유카와가 서로 어떤 관계이며, 누구를 지키기 위해 무슨 선택을 했는가 하는 사정들이다. 요코미조와 아야츠지에게 가족관계와 공간이 범인과 트릭을 밝혀내는 장치라면, 이 작품에서는 가족관계 자체가 이야기의 중심이다. 장르상으로는 추리소설이지만, 읽는 감각은 살인사건을 품은 가족 이야기에 가까웠다.

추리의 긴장보다 가족 이야기에 무게를 두었지만,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속도감은 그대로였다. 문장은 군더더기 없이 앞으로 나아갔고, 사건과 수사가 교차하는 흐름은 독자가 책을 내려놓을 틈을 주지 않았다. 복잡한 설명에 발이 묶이는 일도 없었다. 한번 책장을 넘기기 시작하자 마지막까지 술술 읽혔다.

그러나 잘 읽힌다는 것과 이야기가 새롭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페이지는 빠르게 넘어갔지만 결말은 너무 일찍 보였다. 폭력을 휘두르는 악질 남자, 그에게 시달리는 젊은 여자, 그 여자를 지키려는 사람, 사랑하는 이를 보호하기 위한 살인과 은폐, 버려진 아이와 뒤늦게 드러나는 혈연의 비밀까지 소재 대부분이 익숙했다.

우에쓰지 료타는 그중에서도 지나치게 기능적인 악역이었다. 소노카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사람의 약점을 이용하는 그의 행동에는 독자가 이해하거나 고민해 볼 만한 여지가 거의 없었다. 나는 읽는 내내 그를 속으로 “그 상놈의 자식”이라고 불렀다. 그가 철저한 악인으로 그려진 순간부터 누군가가 소노카를 지키기 위해 그를 죽였으리라는 방향이 보였다.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할 이유가 없으니 살인과 은폐를 둘러싼 윤리적 갈등도 약해졌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한 범죄와 은폐를 여러 작품에서 다루어 왔다. 『용의자 X의 헌신』도 비슷한 소재에서 출발했지만, 범행을 감추는 방법과 이시가미의 선택이 예상 밖의 비극을 만들었다. 그러나 『투명한 나선』은 익숙한 재료를 새롭게 뒤집기보다 예상한 길을 따라간다. 읽는 속도는 빨랐지만 이야기가 도착할 곳은 일찌감치 보였다.


2. 시리즈 안에서 뜬금없는 비밀

이 작품이 내세운 가장 큰 비밀은 유카와 마나부의 출생이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나에와 유카와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했고, 나에가 유카와의 생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에의 정체가 밝혀졌을 때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전에 놀랐다기보다, 읽는 동안 품었던 의심이 맞았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결말을 예상했다는 것과 출생의 비밀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갈릴레오 시리즈 전체를 돌아보면 유카와가 양자였다는 설정을 준비해 온 흔적은 거의 없다. 앞선 작품들에서 차곡차곡 쌓인 단서가 이번 작품에서 하나의 진실로 모였다면 예상했더라도 납득과 감동이 따랐을 것이다. 아무런 낌새가 없다가 열 번째 작품에서 갑자기 출생의 비밀이 등장하니, 오래 감춰 둔 진실이 밝혀졌다기보다 이번 이야기에 특별함을 더하기 위해 뒤늦게 붙인 설정처럼 보였다.

결국 유카와의 출생 비밀은 이 작품 안에서는 예상하기 쉬웠고, 시리즈 전체에서는 뜬금없었다. 이번 작품에서 내가 느낀 가장 큰 아쉬움은 바로 그 간격이었다.


3. 나는 왜 ‘나선’을 총열의 강선으로 읽었는가

책을 읽는 동안 제목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왜 하필 ‘투명한 나선’일까. 한국판 표지에는 저녁노을이 번지는 바다가 펼쳐져 있고, 그 바다 위로 투명한 선들이 회오리처럼 솟아 있다. 지바현 미나미보소 앞바다에서 총상을 입은 남자의 시신이 발견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점까지 겹치자, 나는 표지의 나선을 DNA가 아니라 총과 연결했다.

나는 총열 안쪽에 탄환을 자기 축을 중심으로 회전시키는 나선형 강선(腔線)이 파여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탄환이 나선형 궤적을 따라 날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강선을 통과하면서 생긴 회전은 총구를 벗어난 뒤에도 이어진다. 그래서 ‘투명한 나선’을 총열 속 강선과 눈에 보이지 않는 탄환의 회전으로 받아들였다. 바다와 총상 시신, 회오리 모양의 표지가 내 생각을 그쪽으로 이끌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문예춘추의 공식 소개에서는 제목의 ‘나선’이 DNA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그제야 작품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혈연과 DNA 검사가 제목으로 연결되었다. 하지만 한국판 표지 중앙의 선은 교과서에서 보던 두 가닥의 이중나선보다 아래로 좁아지는 소용돌이나 탄환의 회전을 시각화한 흔적에 가깝다. 제목의 공식적인 뜻을 몰랐던 독자가 총격 사건을 먼저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일본판 표지는 한국판과 방향이 달랐다. 2021년 일본 단행본은 검은 바탕에 투명하게 비치는 뼈의 손과 붉은 장미를 배치했다. ‘투명함’과 소노카가 일하는 꽃집을 연상하게 한다. 2024년 일본 문고본은 아기 바구니와 인형을 내세워 버려진 아이와 부모·자식의 관계를 곧바로 가리킨다. 반면 한국판은 바다와 소용돌이를 앞세워 혈연의 비밀보다 총격 사건의 현장으로 독자의 시선을 이끈다.

작가가 총열의 강선을 염두에 두었다는 근거는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공식적인 해석이 아니라 내가 표지와 사건을 따라가며 만들어 낸 독법이다. 그렇다고 틀린 답이라고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나의 제목이 작품 밖에서 다른 이미지를 낳았다면, 그 또한 독서가 만들어 낸 의미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투명한 나선』은 DNA의 이중나선이면서 동시에 총열 속에 숨어 있는 강선이었다.


4. DNA로 확인되는 혈연, 삶으로 맺어진 가족

이처럼 작품 속 DNA는 나에와 유카와가 혈연으로 이어졌음을 밝혀 주는 결정적 단서다. 그러나 유카와에게 부모는 나에 한 사람만이 아니다. 자신을 낳은 사람은 나에지만, 자신을 키운 사람은 양부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카와는 어느 한쪽만을 고르지 않고 나에와 양부모 모두를 자신의 부모로 받아들인다.

히데미와 소노카의 관계도 비슷하다. 히데미는 소노카와 피가 이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을 알면서도 소노카를 지키려 한다. 히데미에게 소노카는 혈연 검사 결과와 상관없이 이미 가족이기 때문이다.

결국 DNA는 누가 누구와 피로 이어졌는지는 알려 주지만, 함께 살아온 시간과 서로를 지키려는 마음까지 보여 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제목의 ‘투명한’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혈연뿐 아니라 검사 결과에도 나타나지 않는 가족의 마음까지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마지막에 유카와가 나에에게 양부모와 생모 가운데 한쪽을 선택할 수 없으며 모두가 자신의 부모라는 뜻을 전하는 장면은 이 작품이 말하려는 바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 준다. 출생의 비밀이 갑작스럽게 붙었다는 아쉬움은 남지만, 유카와가 혈연만을 기준으로 부모를 나누지 않는다는 점은 좋았다.


5. 명석한 두뇌와 가슴속 하트

나는 갈릴레오 시리즈의 핵심이 과학적 트릭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유카와 마나부가 사랑받는 까닭은 명석한 물리학자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냉철하게 현상을 분석하면서도 사건 속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다. 머리로 진실을 찾아내지만, 그 진실을 향해 움직이는 이유와 마지막에 내리는 판단은 사람을 향한다.

이번 작품에는 갈릴레오 시리즈를 대표할 만한 화려한 과학 실험이나 기발한 물리학적 트릭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유카와는 자신의 명석한 두뇌로 흩어진 관계와 행동의 이유를 짚어 내고, 나에와 소노카가 처한 사정에는 마음을 기울인다. 경찰보다 먼저 진실에 접근하지만 곧장 누군가를 몰아세우지 않는다. 사실을 밝히는 일과 사람의 사정을 헤아리는 일을 함께한다.

갈릴레오 시리즈에서 사건을 푸는 것은 유카와 마나부의 명석한 두뇌지만, 그를 사건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하는 것은 이 물리학자의 가슴속 하트다. 이번 작품의 사건은 다소 뻔했고 유카와의 출생 비밀은 뜬금없었지만, 유카와라는 인물의 매력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과학적 장치가 약한 작품이었기에 그동안 논리와 이성 뒤에 가려졌던 그의 마음이 더 직접적으로 드러났다.


6.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에게 ― 2026년 7월 23일, 영면에 들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다. 워낙 많은 작품을 쉼 없이 발표해 ‘소설 찍는 기계’라고 불렸고, 집필 속도가 너무 빨라 “일본에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여러 명 있다”는 농담까지 나왔다. 그러나 그의 다작을 단순히 숫자로만 말할 수는 없다. 본격 미스터리와 과학 미스터리, 사회문제와 가족 이야기를 가리지 않고 썼으며, 어떤 장르에서도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막힘없이 읽히는 소설을 내놓았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2026년 7월 23일 새벽 대장암으로 타계했다. 향년 68세였다. 늘 다음 작품이 나올 것 같던 작가였기에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아직도 실감 나지 않는다. 새 작품이 나오면 이번에는 어떤 사건을 만들어 냈을까 기대했고, 작품이 많다는 사실 자체가 든든했다.

그렇다고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투명한 나선』의 아쉬움을 덮고 싶지는 않다. 좋아했기 때문에 더 기대했고, 많이 읽었기 때문에 익숙한 소재와 반복되는 구도가 더 잘 보였다. 이번 작품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고작이라고 하기 어렵다. 이야기는 예상 가능한 방향으로 흘렀고, 유카와의 출생 비밀은 앞선 작품들과 충분히 이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마음이 허전했던 까닭은 작품의 완성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작품에 대한 아쉬움보다 그가 더는 유카와의 다음 이야기를 써 줄 수 없다는 상실감이 컸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나는 그의 문장을 따라 막힘없이 달렸고, 유카와 마나부의 냉철한 추리와 가슴속 하트를 다시 만났다. 내가 따라간 것은 범인의 정체만이 아니라 유카와 마나부였고, 그 인물 뒤에는 내가 가장 좋아한 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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