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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나선 ㅣ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다 / 2026년 7월
평점 :
[독서감상] 『투명한 나선』 ― 총열의 강선에서 DNA까지, 유카와 마나부의 가슴속 하트
1. 추리소설이라기보다 사람 사는 이야기
지난해 여름에는 요코미조 세이시의 살인 추리소설을 읽었고, 올해는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를 읽었다. 요코미조의 작품에서는 복잡한 혈연과 집안의 원한이 기괴한 살인의 수수께끼를 만들고, 아야츠지의 관 시리즈에서는 저택의 구조와 불가능해 보이는 범죄, 곳곳에 놓인 단서가 정교하게 맞물린다. 두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면 탐정보다 먼저 범인과 트릭을 알아내기 위해 자연스럽게 사건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런 본격 추리소설들을 읽은 뒤 히가시노 게이고로 돌아오니 『투명한 나선』은 추리소설이라기보다 그냥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총상을 입은 시신이 발견되고 경찰 수사가 이어지지만, 누가 어떻게 죽였는지를 풀어내는 재미는 크지 않다. 수사가 진행될수록 드러나는 것은 범행의 기술보다 사건의 중심에 선 소노카와 히데미, 그리고 나에와 유카와가 서로 어떤 관계이며, 누구를 지키기 위해 무슨 선택을 했는가 하는 사정들이다. 요코미조와 아야츠지에게 가족관계와 공간이 범인과 트릭을 밝혀내는 장치라면, 이 작품에서는 가족관계 자체가 이야기의 중심이다. 장르상으로는 추리소설이지만, 읽는 감각은 살인사건을 품은 가족 이야기에 가까웠다.
추리의 긴장보다 가족 이야기에 무게를 두었지만,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속도감은 그대로였다. 문장은 군더더기 없이 앞으로 나아갔고, 사건과 수사가 교차하는 흐름은 독자가 책을 내려놓을 틈을 주지 않았다. 복잡한 설명에 발이 묶이는 일도 없었다. 한번 책장을 넘기기 시작하자 마지막까지 술술 읽혔다.
그러나 잘 읽힌다는 것과 이야기가 새롭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페이지는 빠르게 넘어갔지만 결말은 너무 일찍 보였다. 폭력을 휘두르는 악질 남자, 그에게 시달리는 젊은 여자, 그 여자를 지키려는 사람, 사랑하는 이를 보호하기 위한 살인과 은폐, 버려진 아이와 뒤늦게 드러나는 혈연의 비밀까지 소재 대부분이 익숙했다.
우에쓰지 료타는 그중에서도 지나치게 기능적인 악역이었다. 소노카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사람의 약점을 이용하는 그의 행동에는 독자가 이해하거나 고민해 볼 만한 여지가 거의 없었다. 나는 읽는 내내 그를 속으로 “그 상놈의 자식”이라고 불렀다. 그가 철저한 악인으로 그려진 순간부터 누군가가 소노카를 지키기 위해 그를 죽였으리라는 방향이 보였다.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할 이유가 없으니 살인과 은폐를 둘러싼 윤리적 갈등도 약해졌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한 범죄와 은폐를 여러 작품에서 다루어 왔다. 『용의자 X의 헌신』도 비슷한 소재에서 출발했지만, 범행을 감추는 방법과 이시가미의 선택이 예상 밖의 비극을 만들었다. 그러나 『투명한 나선』은 익숙한 재료를 새롭게 뒤집기보다 예상한 길을 따라간다. 읽는 속도는 빨랐지만 이야기가 도착할 곳은 일찌감치 보였다.
2. 시리즈 안에서 뜬금없는 비밀
이 작품이 내세운 가장 큰 비밀은 유카와 마나부의 출생이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나에와 유카와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했고, 나에가 유카와의 생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에의 정체가 밝혀졌을 때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전에 놀랐다기보다, 읽는 동안 품었던 의심이 맞았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결말을 예상했다는 것과 출생의 비밀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갈릴레오 시리즈 전체를 돌아보면 유카와가 양자였다는 설정을 준비해 온 흔적은 거의 없다. 앞선 작품들에서 차곡차곡 쌓인 단서가 이번 작품에서 하나의 진실로 모였다면 예상했더라도 납득과 감동이 따랐을 것이다. 아무런 낌새가 없다가 열 번째 작품에서 갑자기 출생의 비밀이 등장하니, 오래 감춰 둔 진실이 밝혀졌다기보다 이번 이야기에 특별함을 더하기 위해 뒤늦게 붙인 설정처럼 보였다.
결국 유카와의 출생 비밀은 이 작품 안에서는 예상하기 쉬웠고, 시리즈 전체에서는 뜬금없었다. 이번 작품에서 내가 느낀 가장 큰 아쉬움은 바로 그 간격이었다.
3. 나는 왜 ‘나선’을 총열의 강선으로 읽었는가
책을 읽는 동안 제목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왜 하필 ‘투명한 나선’일까. 한국판 표지에는 저녁노을이 번지는 바다가 펼쳐져 있고, 그 바다 위로 투명한 선들이 회오리처럼 솟아 있다. 지바현 미나미보소 앞바다에서 총상을 입은 남자의 시신이 발견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점까지 겹치자, 나는 표지의 나선을 DNA가 아니라 총과 연결했다.
나는 총열 안쪽에 탄환을 자기 축을 중심으로 회전시키는 나선형 강선(腔線)이 파여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탄환이 나선형 궤적을 따라 날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강선을 통과하면서 생긴 회전은 총구를 벗어난 뒤에도 이어진다. 그래서 ‘투명한 나선’을 총열 속 강선과 눈에 보이지 않는 탄환의 회전으로 받아들였다. 바다와 총상 시신, 회오리 모양의 표지가 내 생각을 그쪽으로 이끌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문예춘추의 공식 소개에서는 제목의 ‘나선’이 DNA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그제야 작품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혈연과 DNA 검사가 제목으로 연결되었다. 하지만 한국판 표지 중앙의 선은 교과서에서 보던 두 가닥의 이중나선보다 아래로 좁아지는 소용돌이나 탄환의 회전을 시각화한 흔적에 가깝다. 제목의 공식적인 뜻을 몰랐던 독자가 총격 사건을 먼저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일본판 표지는 한국판과 방향이 달랐다. 2021년 일본 단행본은 검은 바탕에 투명하게 비치는 뼈의 손과 붉은 장미를 배치했다. ‘투명함’과 소노카가 일하는 꽃집을 연상하게 한다. 2024년 일본 문고본은 아기 바구니와 인형을 내세워 버려진 아이와 부모·자식의 관계를 곧바로 가리킨다. 반면 한국판은 바다와 소용돌이를 앞세워 혈연의 비밀보다 총격 사건의 현장으로 독자의 시선을 이끈다.
작가가 총열의 강선을 염두에 두었다는 근거는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공식적인 해석이 아니라 내가 표지와 사건을 따라가며 만들어 낸 독법이다. 그렇다고 틀린 답이라고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나의 제목이 작품 밖에서 다른 이미지를 낳았다면, 그 또한 독서가 만들어 낸 의미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투명한 나선』은 DNA의 이중나선이면서 동시에 총열 속에 숨어 있는 강선이었다.
4. DNA로 확인되는 혈연, 삶으로 맺어진 가족
이처럼 작품 속 DNA는 나에와 유카와가 혈연으로 이어졌음을 밝혀 주는 결정적 단서다. 그러나 유카와에게 부모는 나에 한 사람만이 아니다. 자신을 낳은 사람은 나에지만, 자신을 키운 사람은 양부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카와는 어느 한쪽만을 고르지 않고 나에와 양부모 모두를 자신의 부모로 받아들인다.
히데미와 소노카의 관계도 비슷하다. 히데미는 소노카와 피가 이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을 알면서도 소노카를 지키려 한다. 히데미에게 소노카는 혈연 검사 결과와 상관없이 이미 가족이기 때문이다.
결국 DNA는 누가 누구와 피로 이어졌는지는 알려 주지만, 함께 살아온 시간과 서로를 지키려는 마음까지 보여 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제목의 ‘투명한’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혈연뿐 아니라 검사 결과에도 나타나지 않는 가족의 마음까지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마지막에 유카와가 나에에게 양부모와 생모 가운데 한쪽을 선택할 수 없으며 모두가 자신의 부모라는 뜻을 전하는 장면은 이 작품이 말하려는 바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 준다. 출생의 비밀이 갑작스럽게 붙었다는 아쉬움은 남지만, 유카와가 혈연만을 기준으로 부모를 나누지 않는다는 점은 좋았다.
5. 명석한 두뇌와 가슴속 하트
나는 갈릴레오 시리즈의 핵심이 과학적 트릭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유카와 마나부가 사랑받는 까닭은 명석한 물리학자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냉철하게 현상을 분석하면서도 사건 속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다. 머리로 진실을 찾아내지만, 그 진실을 향해 움직이는 이유와 마지막에 내리는 판단은 사람을 향한다.
이번 작품에는 갈릴레오 시리즈를 대표할 만한 화려한 과학 실험이나 기발한 물리학적 트릭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유카와는 자신의 명석한 두뇌로 흩어진 관계와 행동의 이유를 짚어 내고, 나에와 소노카가 처한 사정에는 마음을 기울인다. 경찰보다 먼저 진실에 접근하지만 곧장 누군가를 몰아세우지 않는다. 사실을 밝히는 일과 사람의 사정을 헤아리는 일을 함께한다.
갈릴레오 시리즈에서 사건을 푸는 것은 유카와 마나부의 명석한 두뇌지만, 그를 사건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하는 것은 이 물리학자의 가슴속 하트다. 이번 작품의 사건은 다소 뻔했고 유카와의 출생 비밀은 뜬금없었지만, 유카와라는 인물의 매력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과학적 장치가 약한 작품이었기에 그동안 논리와 이성 뒤에 가려졌던 그의 마음이 더 직접적으로 드러났다.
6.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에게 ― 2026년 7월 23일, 영면에 들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다. 워낙 많은 작품을 쉼 없이 발표해 ‘소설 찍는 기계’라고 불렸고, 집필 속도가 너무 빨라 “일본에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여러 명 있다”는 농담까지 나왔다. 그러나 그의 다작을 단순히 숫자로만 말할 수는 없다. 본격 미스터리와 과학 미스터리, 사회문제와 가족 이야기를 가리지 않고 썼으며, 어떤 장르에서도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막힘없이 읽히는 소설을 내놓았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2026년 7월 23일 새벽 대장암으로 타계했다. 향년 68세였다. 늘 다음 작품이 나올 것 같던 작가였기에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아직도 실감 나지 않는다. 새 작품이 나오면 이번에는 어떤 사건을 만들어 냈을까 기대했고, 작품이 많다는 사실 자체가 든든했다.
그렇다고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투명한 나선』의 아쉬움을 덮고 싶지는 않다. 좋아했기 때문에 더 기대했고, 많이 읽었기 때문에 익숙한 소재와 반복되는 구도가 더 잘 보였다. 이번 작품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고작이라고 하기 어렵다. 이야기는 예상 가능한 방향으로 흘렀고, 유카와의 출생 비밀은 앞선 작품들과 충분히 이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마음이 허전했던 까닭은 작품의 완성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작품에 대한 아쉬움보다 그가 더는 유카와의 다음 이야기를 써 줄 수 없다는 상실감이 컸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나는 그의 문장을 따라 막힘없이 달렸고, 유카와 마나부의 냉철한 추리와 가슴속 하트를 다시 만났다. 내가 따라간 것은 범인의 정체만이 아니라 유카와 마나부였고, 그 인물 뒤에는 내가 가장 좋아한 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