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다음에 순경 가족이 나가고 이어서 공무원 가족이 나갈 즈음뭔가 좋지 않은 낌새를 눈치챈 군중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공무원가족에 이어 마지막으로 대동청년단과 국민회 간부 차례가 왔을때 사람들은 너도나도 앞을 다투어 나아가 이장과 청년단 사람들에게 매달렸다. - P66

"잘 들으라요. 우리레 지금 작전 수행 둥에 있소. 여러분의 집은작전명령에 따라 소각되는 거이오. 우리의 다음 임무는 여러분을모두 제주읍으로 소개하는 거니끼니 소개 등 만약 질서를 안 지키는 자가 있으문 아까와 같이 가차 없이 총살할 거이니 명심하라우요." - P68

"영배 각시 총 맞았져." 누군가 이렇게 속삭였다.
흰 적삼에 번진 붉은 선혈이 역력했다.
"두살 난 그 아기가 바로 방앳간 허는 장식이여. 후제 외할망이 키웠쥬. 이젠 결혼도 하고 씨멸족할 뻔한 집이서 아들 둘까지 낳아시니 죽은 어멍 복을 입은 것일 거라, 아매도" 작은당숙의 말이었다. - P69

할머니가 달려들어 치마를 벌리고 닭이 병아리 품듯이 우리를 싸서 숨겼다. 뒤를 쫓던 청년단원두명이 우리를 포기한 것은 마침 우리 뒤미처 달려드는 다른 사람들 때문이었으리라. 아이들과 아낙네 열명쯤이 달려들었다가 마구내지르는 대창에 쫓겨갔다. - P71

군인들이 이렇게 돼지 몰듯 사람들을 몰고 우리 시야 밖으로 사라지고 나면 얼마 없어 일제사격 총소리가 콩 볶듯이 일어나곤 했다. 통곡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할머니도 큰아버지도 길수 형도나도 울었다. 우익인사 가족들도 넋 놓고 엉엉 울고 있었다. 우는것은 사람만이 아니었다. 마을에서 외양간에 매인 채 불에 타죽는 소 울음소리와 말 울음소리도 처절하게 들려왔다. - P71

"그때 혼자 살아난 순이 삼촌 허는 말을 들으난, 군인들이 일주도로변 옴팡진 밭에다가 사람들을 밀어붙였는디, 사름마다 밭이안 들어가젠 밭담 우엔 엎디어젼 이마빡을 쪼사 피를 찰찰 홀리멍살려달렌 하던 모양입니다."
"쯧쯧쯧, 운동장에 벗겨져 널려진 임자 없는 고무신을 다 모아놓으민 아매도 가매니로 하나는 실히 되었을 거여. 죽은 사람 몇백명이나 되까?" 하고 작은당숙이 말하자 길수 형은 낯을 모질게 찌푸리며 말을 씹어뱉었다. - P72

"면에서는 이 집에 고구마 몇가마 내고 저 집에 유채 몇가마 소출 냈는지는 알아가도 그날 죽은 사람 수효는 이날 이때 한번도 통계 잡아보지 않으니, 내에 참. 내 생각엔 오백명은 넘은 것 같은디.
한 육백명 안되까 마심? 한번에 오륙십명씩 열한번에 몰아가시니까."
열한번째로 끌려가던 사람들은 그야말로 운수 대통한 사람들이었다. 때마침 대대장 차가 도착하여 총살 중지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 P72

고모부는 그 당시 토벌군으로 애월면에 가 있었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할 터였다. 고모부는 한때 인근 부락인 함덕리에주둔했던 서북청년으로만 구성된 중대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마침사건 수개월 전에 애월로 이동해갔던 것이었다. 신혼 초라 고모도따라갔었다. - P73

그런디 인원과 물자를 비워버리라는 대목에서 그만잘못 일이 글러진 거라. 작전지역 내의 인원과 물자를 안전지역으로 후송하라는 뜻이 인원을 전원 총살하고 물자를 전부 소각하라는 것으로 둔갑하고 말아시니 말이여 - P73

"아니, 고모부님도 참, 그 말을 곧이들엄수꽈? 그건 웃대가리들이 책임을 모면해보젠 둘러대는 핑계라 마씸. 우리 부락처럼 떼죽음당한 곳이 한둘이 아니고 이 섬을 뺑 돌아가멍 수없이 많은데 그게 다 작전명령을 잘못 해석해서 일어난 사건이란 말이우꽈? 말도안되는 소리우다. 이 작전명령 자체가 작전지역의 민간인을 전부총살하라는 게 틀림없어 마씸." - P74

그건 한때 무식한 부락민들이 저지른 섣부른 과오 때문이었나보다. 5·10선거 때 부락 출신 몇몇 공산주의 골수분자의 선동에 부화뇌동하여 선거를 보이콧한 사건이 화근이 된 것이었다. 그것이두고두고 군경 측에 부락을 적색시하는 빌미가 될 줄이야. 부락민들이 아무리 개과천선하여 결백을 내보여도 소용이 없었다. 부락민들이 5·10 선거 보이콧을 선동했던 주모자 한라산 입산 공비 김진배의 아내를 부락에서 추방하고, 그의 밭 한가운데를 파헤쳐 비오면 물 차는 못을 만들면서까지 결백을 주장했으나 군경의 오해는 막무가내였다. - P75

밤에는 부락 출신 공비들이 나타나 입산하지 않는 자는 반동이라고 대창으로 찔러 죽이고, 낮에는 함덕리의 순경들이 스리쿼터를 타고 와 도피자 검속을 하니, 결국 마을 남정들은 낮이나 밤이나 숨어 지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순경들이 도피자라고 찾던 폐병쟁이 종철이 형은 공비가 습격해온 밤에 궤 뒤에 숨어 있다가 기침을 몹시 하는 바람에 발각되어 대창에 찔려 죽었고, 헛간 멍석세워둔 틈에 숨어 있다가 역시 공비의 대창 맞고 죽은 완식이 아버지도 순경들이 찾던 도피자였다. 우리 종조부님도 사건 석달 전에부락 출신 공비의 대창에 찔려 돌아가셨다. 당시 1구 구장이던 종조부님은 밤중에 내려온 마을 출신 폭도들로부터 식량을 모아달라는 요구에 고개를 흔들었던 것이다. - P75

한라산 아래의 목장으로 올라가 마른 냇가의 굴속에 피난했다.
행방을 알 길 없는 남편 때문에 모진 고문을 당하던 순이 삼촌도따라 올라갔다. 이 섬은 워낙 화산지대라 곳곳에 동굴이 뚫려 있어서, 우리 부락처럼 폭도에도 쫓기고 군경에도 쫓긴 양민들이 몰래 숨어 있기 안성맞춤이었다. - P76

하여튼 이렇게 남정네들이 마을을 비우자 군경 측에서는 자연히입산한 것으로 오해하게 되고 그러한 오해가 저 섣달 열여드레의끔찍한 사건의 소지가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사건은 마을남정들이 그 냇가 동굴에서 혈거생활을 시작한 지 아흐레 만에 일어난 것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날 순이 삼촌은 우리 할머니에게 맡겨두었던 오누이 자식을 데리러 내려와 있다가 그만 화를 당하고만 것이었다. - P77

내 아래 또래의 아이들에게 몰래 양과자를 주어 아버지나 형이숨은 곳을 가르쳐달라고 꾀어내던 서청 출신의 순경들, 철모르는아이들은 대밭에서, 마루 밑에서, 외양간 밑이나 조짚가리 밑을 판굴에서 여러번 제 아버지와 형을 가리켜냈다. 도피자 아들을 찾아내라고 여든살 노인을 닦달하던 어떤 서청 순경은 대답 안한다고어린 손자를 총으로 위협해서 무릎 꿇고 앉은 제 할아버지의 따귀를 때리도록 강요했다. 닭 잡아내라고 공포를 빵빵 쏘아대기도 했다. 그들은 또 여맹(盟)이 뭣 하는지도 모르는 무식한 촌처녀들을 붙잡아다가 공연히 여맹에 가입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발가벗겨놓고 눈요기를 일삼았다. 순이 삼촌도 그런 식으로 당했다.
지서에 붙들어다놓고 남편의 행방을 대라는 닦달 끝에 옷을 벗겼다는 것이었다. 어이없게도 그건 간밤에 남편이 왔다 갔는지 알아본다는 핑계였는데, 남편이 왔다 갔으면 분명 그짓을 했을 것이고,
아직 거기엔 분명 그 흔적이 남아 있을 테니 들여다보자는 것이었다. 나는 어느날 마당에서 도리깨질하던 순이 삼촌이 남편의 행방을 안 댄다고 빼앗긴 도리깨로 머리가 깨어지도록 얻어맞는 광경을 내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있었다. - P79

섬사람에 대해서 아주 나쁜 선입견을 개지구 있댔어. 서청뿐만이가서? 야, 그땐다 기랬어. 후에 교체해개지구 들어온 다른 눅지 향토부대두 매한가지래서 사실 그때 눅지 사람치구 이 섬 사람들을 도매금으로 몰아쳐 뻘갱이루다 보지 않는 사람이 없댔다. 4.3 폭동이 일어나디,
5·10선거를 방해해설라무니 남한에서 유일하게 이 섬만 선거를 못치렀다. 군대는 반란이 일어나다. 하이간 이런 북새통이었으니까4......"
이때 큰아버지가 끙 앓는 소릴 내며 고개를 돌려 외면해버렸다.
눈썹이 발에 밟힌 송충이처럼 꿈틀거리는 것으로 보아 몹시 심기가 뒤틀린 모양이었다. 고모부는 그제야 이북 사투리를 쓰고 있는자신을 깨달았던지 흠칫 놀라며 말을 멈췄다. 큰당숙, 작은당숙 어른도 못마땅한 표정으로 담배만 풀썩풀썩 빨아댔다. 잠시 거북살스러운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언제나 반죽 좋은 고모부는 곧 섬사투리로 돌아와 다시 말을 꺼냈다.
"성님, 서청이 잘했다는 말이 절대 아니우다. 서청도 참말 욕먹을건 먹어야 헙쥬 - P81

현모 형도 그중에 끼여 있었던 것이다. 때마침 6.25가 터져 해병대모병이 있자 이 귀순자들은 너도나도 입대를 자원했다. 그야말로빨갱이 누명을 벗을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래서 그들은그대로 눌러 있다간 언제 개죽음당할지도 모르는 이 지긋지긋한고향을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현모 형은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해병대 3기였다. ‘귀신 잡는 해병‘이라고 용맹을 떨쳤던 초창기 해병대는 이렇게 이 섬 출신 청년 삼만명을 주축으로이룩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용맹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건 따지고보면 결국 반대급부적인 행위가 아니었을까? 빨갱이란 누명을 뒤집어쓰고 몇번씩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그들인지라 한번 여봐란듯이 용맹을 떨쳐 누명을 벗어 보이고 싶었으리라. 아니, 그것만이아니다. 어쩌면 거기엔 보복적인 감정이 짙게 깔려 있지 않았을까? - P83

"바로 그것입쥬. 선무공작은 왜 진작에 쓰지 못했느냐는 말이우다. 처음부터 선무공작을 했으면 인명피해가 그렇게 많이 나지 않아실 거라 마씸 폭도도 무섭고 군경도 무서워서 산으로 피난 간양민들을 폭도로 간주해시니……………
"
"겔쎄 말이여. 대유격전이란 것이 본디 정치 칠에 군사 삼인데・・・・・・ 이건 정치는 쥐뿔도 없고 무작정 군사행동만 해시니..
창설 일년도 못된 군대니 오죽할 것고......"
아, 떼죽음당한 마을이 어디 우리 마을뿐이던가. 이 섬 출신이거든 아무라도 붙잡고 물어보라. 필시 그의 가족 중에 누구 한사람이,
아니면 적어도 사촌까지 중에 누구 한사람이 그 북새통에 죽었다고 말하리라. - P85

도피자 가족들은 함덕국민학교에 수용되어 취조를 받고 닷새 만에 풀려나왔는데 순이 삼촌도 그중에 끼여 있었다. 그 닷새 동안할머니 심부름으로 길수 형과 내가 번갈아가며 차좁쌀 주먹밥을매일 한덩어리씩 차입해주었다. 마지막 날엔 내가 주먹밥을 가지고 가다가 도중에 풀려나오는 순이 삼촌을 만났는데 그 몰골은 차마 끔찍한 것이었다. 비녀가 빠져나가 쪽이 풀리고 진흙으로 뒤발한 검정 몸뻬에다 발은 맨발이었는데, 길가 돌담을 짚고 간신히 발짝을 떼며 허위허위 걸어오고 있었다.
삼촌은 서울 우리 집에 있을 적에 궂은 날이면 허리뼈가 쑤셔 뜨거운 장판에 지져대곤 했는데, 생각하면 그게 다 그때 얻은 골병임에 틀림없었다. - P89

누구는 제 아버지 시신을 찾아놓고 지고 갈 지게를 가지러 간 사이에 다른 사람이 잘못 알고 가져가버린 일도 있었다. 애어머니들은대개 제 자식의 몸 위에 엎어져 죽어 있었는데 그건 죽는 순간에도몸으로 총알을 막아 자식을 보호해보려는 처절한 몸짓이었다. - P90

부락민들은 순경들의 감독을 받으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눈팔새 없이 허기진 배를 안고 성을 쌓지 않으면 안되었다. 말하자면전략촌 건설이었다. 불탄 집터의 울담도 허물고 밭담도 허물어다가 성을 쌓았다. 그것도 모자라 묘지를 두른 산담까지 허물어다 날랐다. 순이 삼촌도 임신한 몸으로 돌을 져 날랐다. - P91

어려운 시절에 아기를 가진 삼촌은 먹을 것을 구하느라고 그야말로 눈이 벌게 있었다. 만삭의 몸이라 물질은 못하고 하루 종일땡볕에 갯가를 기어다니며 굴, 성게를 까먹고 게, 보말(갯우렁이) 따위를 잡았다. 밤에 초소막에 나올 때는 보말 삶은 것 한 채롱 가득담아가지고 와서는 우리에게 먹어보라는 말 한마디 없이 밤새도록혼자서 걸귀처럼 까먹어대곤 했다. 여자가 아기를 배면 사정없이먹어댄다는 걸 몰랐던 나는 순이 삼촌이 걸신들려 실성하지 않았나 생각할 지경이었다. 이런 전략촌 생활은 거의 일년 넘게 계속되었지만 그동안 한번도 공비의 습격을 당한 적이 없었다. - P92

결국 해안지방의 축성은 과잉조치라는 게 판명된 셈이었다. 이미 몇십명으로 전력이 크게 줄어든 입산폭도들은 해안지방을 약탈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 P92

그 무렵 내 또래 아이들은 사람 죽은 일주도로변의 옴팡밭에서탄피를 주워다 화약총을 만들기가 유행이었다. 아이들은 이제 옴팡밭의 비극을 까맣게 잊고 사람 죽인 탄피를 주워 모았다. 그렇다.
무럭무럭 자라는 데 도움 안되는 것은 무엇이든 편리하게 잊어버리는 게 아이들의 특성이 아닌가. 그러나 어른들은 도무지 잊을 수없었다. 아이들이 장난으로 팡팡 쏘아대는 화약총 소리에도 매번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그들이었다. 어떤 아이는 어디서 났는지 불에 타서 엿가락처럼 휘어진 총신만 남은 구구식 총을 끌고 다니다가 제 아버지한테 얻어맞고 빼앗겼는데, 총의 그 푸르딩딩한 탄 쇠빛은 꼭 죽은 피빛깔을 연상시켜주었다. - P93

그러나 그 누구도 순이 삼촌만큼 후유증이 깊은 사람은 없었으리라. 삼촌네 그 옴팡진 돌짝밭에는 끝까지 찾아가지 않은 시체가둘 있었는데 큰아버지의 손을 빌려 치운 다음에야 고구마를 갈았다. 그해 고구마농사는 풍작이었다. 송장거름을 먹은 고구마는 목침 덩어리만큼 큼직큼직했다. - P93

그 옴팡밭에 붙박인 인고의 삼십년, 삼십년이라면 그럭저럭 잊고 지낼 만한 세월이건만 순이 삼촌은 그러지를 못했다. 흰 뼈와총알이 출토되는 그 옴팡밭에 발이 묶여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었다. 당신이 딸네 모르게 서울 우리 집에 올라온 것도 당신을 붙잡고 놓지 않는 그 옴팡밭을 팽개쳐보려는 마지막 안간힘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오누이가 묻혀 있는 그 옴팡밭은 당신의 숙명이었다. 깊은 소(沼) 물귀신에게 채여가듯 당신은 머리끄덩이를 잡혀 다시 그밭으로 끌리어갔다. 그렇다. - P94

나는 밖으로 나와 마당귀에 있는 조짚가리에 등을 기대고 담배를 피워물었다. 마당에 얇게 깔린 싸락눈이 바람에 이리저리 쏠리고 있었다. 음력 열여드레 달은 구름 속에 가려 있었지만 주위는 희끄무레 밝았다. 고샅길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기척이 들려왔다. 아마두어집째 제사를 끝내고 마지막 집으로 옮아가는 사람들이리라. - P95

서호부락 밖, 모래바람 부는 일주도로에 사람들이 작업반별로 무더기무더기 모여 앉아 인원 점호를 받는다. 서호 본고장 부락민들과 이곳에 정처를 둔 노형 피난민들로 된 성담 쌓는 울력꾼들이다.
세찬 갯바람이 굵은 생소금을 낮에다 뿌리는 듯 얼얼하다. 민보단 사람 넷이 죽창을 옆구리에 낀 채 바람에 종잇장 펄럭대는 손때묻은 공책을 들여다보며 이름을 부르기도 하고 또 턱짓으로 대가리 수를 헤아리기도 한다. 까마귀 오(烏) 순경은 저만치 떨어져서길가 밭담 위에 엉거주춤 엉덩이를 대고 앉아 점호가 끝나기를 기다린다. - P98

길가 밭의 푸릿푸릿 싹 난 청보리를 쪼아 먹는 까마귀 한마리가순경이 앉은 밭담 위로 푸릉 날아올라 아그작아그작 방정맞게 걸어다닌다. 저 순경 옷이 어쩌면 저렇게 까마귀 날갯죽지 색을 닮았을까. 게다가 바람에 날아갈세라 턱끈까지 내려 매고 눈썹 위로 푹눌러쓴 모자 차양도 까마귀 부리처럼 뾰족하다. 그러니 서호 본고장사람들이나 노형 피난민들이 저 오(吳) 순경을 까마귀 오가라고부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까마귀 오순경이 메고 있는 총대엔 어서 점호를 끝내라고 태극기가 조급하게 펄럭인다. - P99

섬사람들이 뒷전에서 얼마나 쑤군쑤군 욕을 했는데. "물건 아낄 게따로 있지, 발쎄 갈기갈기 찢어발기든가 불태워 없애부려야 마땅헌 일본기를 가지고 대한민국 기를 맹글다니, 저것들은 밸도 소가지도 없는가?" "아이고, 쟈이들이 어떤 것들이라고 속창지를 차릴것고 일본놈 치질 똥고망 핥으며 해먹던 것들인다. 같은 섬 동포갑죽 벗기기를 흉년에 송깃대 벗기듯 하던 것들이 새 나라 경관 노릇을 하고 있으니 오죽헐 거여? 일본기로 태극기를 맹그는 거나 일본 순사출신을 대한민국 경찰로 맹그는 거나 매한가지 마니냔 말이여!" - P99

이북 출신이다. 그것도 "쉿, 육지 순경 오람져온다)?" 하면 울던 젖먹이도 경풍 들리게 화들짝 놀라며 울음을 뚝 끊는 무서운 서청사람이란다. 어찌나 무서운지 같은 순경이면서도 섬것들은 도무지기를 못 편다. 무섭기가 섬 출신 순경 몇곱절 더 무섭다. 저것 봐라.
오 순경이 얼마나 무서우면 저리도 쩔쩔맬까? 민보단 사람들이 점호가 먼저 끝나는 대로 까마귀 오 순경한테 보고하느라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뛰어가며 들쭉날쭉하는 꼴이 가련하구나. - P100

오도롱만 남겨놓고 다섯 부락 모두가 한날한시에 불타던 노형리소까이. 저번날 읍내에서 선무공작대가 성담 쌓는 데까지 찾아 올라와서 한시간 동안 말자랑뿐인 시국연설을 늘어놓다 갔는데, 그때 노형 사람들이 제일로 원통해하는 소까이 문제를 놓고 반죽 좋게 너스레 떠는 것을 귀리집은 들은 적이 있다. - P102

산폭도가 양민 가운데 숨어 살기를 머릿니가 걸버시 헌 머리에 서캐슬듯 하니 어느하세월에 챙빗으로 굵은니며 가랑니며 서캐를 훑어내 잡을 것이냐. 아예 석유기름 붓고 머리칼을 홀랑 태워버리는 것만 같지 못하다는 거였다. 그래서 마을을 불태운단다. 생사람 대가리에 석유를부어 불태우다니, 머릿니 잡는다고 생사람 잡는 게 소까이란 말인가. 집과 양식이 불타고, 소개민 중에는 폭도 가족이라고 지목된 여편네들이 여럿 죽고 심지어는 할망, 하르방마저 더러 죽었다. - P102

저 아이들은 심지어 뜨거운 땡볕에 밭일 나가도 밀짚 패랭이 대신에 그 후덥지근한 담요천으로 된 모자를 쓰고 다녔다. 4.3사건이터져 학교 문을 닫은 4월부터 서호부락으로 소까이 내린 10월까지그사이 예닐곱달은 아직 산폭도 토벌도 지금처럼 좁은 골목에 돼지 몰듯 그렇게 다그치지 않던 때라 아이들은 들에 나가 조밭도 매고, 소도 먹이고, 땔감으로 억새도 지어 나를 수 있었다. - P103

그러나 올봄에 저희 상급생인 중학 4, 5학년 중에 몇십명이 집단으로 입산하여 산폭도가 된 불상사가 생긴 다음부터는 중학생이라면 모두 한데 싸잡아 의심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개중에는 벌써코밑이 뜬숯검댕 묻은 것처럼 거뭇거뭇한 숙성한 놈들도 이따금눈에 띄는데 그런 아이를 보면 귀리집은 걱정스러워진다. 저러다가 걸리면 어쩌려고・・・・・・ 카미소리(면도칼)로 슬쩍 밀어버리라고 귀띔해주고 싶어진다. - P105

그때 무심코 모자 속을 들여다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모자 안감에다 헝겊을 대어 몰래담배쌈지를 만들어놓고 있었다. 저러다가 담배 피운다고 어른 취급 받으면 어찌하려고…… 나이가 원수인 세상에 어른 되려고 하다니. 이 난세엔 아이는 자라서는 안된다. 나이 먹어서도 안되어.
젊은 나이가 죄요 원수인지라 반드시 총 맞거나 죽창 맞아 죽는 날이 오는 법이다. - P105

그러나 울력은 내일이면 끝난다. 서호로부터 돌성을 쌓기 시작한지 딱 한달 닷새 만인 바로 어제야 비로소 도두·서호·외도리 사람들은 읍내에서 쌓아 올라온 울력꾼들과 도령마루에서 만났던 것이다. 거기 나온 읍내패들 중에서 한동네 살다가 이 난리 전인 작년에 읍내로 이사 간 필주 어멍을 만나 순원의 소식을 들을 줄이야! - P106

호사다마라고, 좋은 일일수록 동티가 잘 나는 법이라는데, 너무 턱놓고 좋아하지 말아야지. 그래서 귀리집은 아까부터 조심하라고자꾸 북받치는 아들 생각을 꾹 눌러 참고 있던 터이다. - P107

필주 어멍 말이, 중산간 위쪽 오리 밖부터 통행이 금지되어 삭정이, 섶나무, 억새를 못하게 된 후로는 읍내에서도 땔감난으로 생난리라고 한다. 심지어는 말방앗간 지붕 이엉까지 몰래 벗겨다 불 땐다는 것이다. 그런데 순원이는 나무땔감도 아니고 겨우 이 억새 닷으로 몇끼니나 끓여 먹을까? 아니, 끓여 먹을 것이 있기는 하고?
어린것이 사나끼 꼬아 메고 다니며 밥과 바꿔 먹는 반동냥질을 한다는데, 집에 무슨 불 지펴 끓여 먹을 곡기가 있을 말이고. - P108

이런 난리통엔 귀신도 굶기가 일쑤다. 먹어도 밀기울범벅이나먹는다. 잘해야 낱알이 오글오글 살아 사발 운두 밖으로 도망가려는 조밥이 고작이다. 귀리집은 그끄저께 시아버지 삭제(祭)에 명심해서 여투어두었던 딱 한줌 좁쌀로 밥을 지어 올렸다. (순원이아방이 산폭도에게 잡혀간 것이 삭젯날이었으니 이제 생사를 모른지가 꼭 두달이 되는 셈이다!) - P110

캄캄한 모양이다. 잘됐다. 물때를 맞춰 나가자. 썰물이 어느 때쯤일까? 해변까지 내려온 성담은 밀물이 닿지 않는 언덕바지에서 끝나고, 그 성담 끝에 의지해서 감태눌(보리밭 거름으로 쌓아놓은 해초더미)로 눈가림한 초소막이 있다. 밀물 때면 성담 밑 언덕 허리춤까지물이 덩실 추어올라 초소막 곁으로 들쥐 한마리 얼씬 못하지만, 썰물 때면 물끝이 많이 내려가 험상궂은 바위가 삐죽삐죽 솟은 갯바닥이 드러난다. 그 바위들 뒤로 몸을 숨기고 엉금엉금 기어가면 초소막에서 안 보이겠지. 그런데 문제는 자갈 밟히는 소리다. 물풀 붙은 돌막들이 자꾸 발에 미끄덩거려 부딪칠 텐데 어찌하나? 아무래도 안되겠구나. 이번엔 들키면 용서없겠지. 그 까마귀 오가가 기어코 날 죽이고 말 게다. 저번엔 혼겁 주느라고 닛뽄도 칼등으로 어깨를 후려쳤지만, 이번엔 정말 칼날을 세우고 모가질 내려칠 것이다. 결국 귀리집은 어젯밤은 이렇게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뜬눈으로 밝히고 말았던 것이다. - P113

그날은 오도롱 소까이날이었다. 귀리집이 피난 내린 것은 석달전 너븐드르, 진중이, 다랑굿, 함박이굴 같은 부락이 소각되던 노형 1차 소까이 때이고, 그 두달 후인 그날은 2차 소까이로서 노형리 중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오도롱부락이 불에 탈 때였다. 그 2차소까이날 중낮이 좀 지나서 귀리집은 서호지서 순경들과 청년단이군인을 따라 오도롱 소까이에 몰려간 빈틈을 잡아 다랑굿 집터로올라갔다.
집터에 서 있는 거라곤 화기를 먹어 붉어진 돌담벽과 붉게 녹슨솥 두개가 걸린 부뚜막뿐이었다. 불에 타지 않게 헛간에서 울타리돌담까지 옮겨다 세워놓은 멍석 세닢과 향나무 제상이 온데간데없었다. 서호것들이 지서와 짜고 노형 집터에 들어가 가재도구와 양식을 실어내온다는 소문이 있더니 그게 사실인 모양이었다. 풀썩거리는 재위에는 숯등걸이 된 서까래들과 깨어진 독이 뒹굴고 붉은 못들이 지렁이떼처럼 우글거리고 있었다. 귀리집은 재를 파헤쳐 좁쌀을 찾았다.
그런데 순경과 민보단들이 미처 오도롱에서 돌아오기 전에 후딱내려왔더라면 괜찮았으련만 저물녘까지 지체한 것이 탈이었다. - P114

"아니우다, 아니우다.젖 못 먹어 다 죽게 된 물애기(젖먹이)를 놔두엉 이년이 어디라고 산엘 올라갈 말이우꽈? 먹을 것 가지레 집터에 갔다 오는 길이라 마썸. 어린것 때문에 죄짓는 줄 알멍서도⋯⋯⋯ 다시는 안하며한번만 용서해줍서, 한번만 용서해줍서게." - P116

남편이 산에서 내려와 빨고 간 거이 아니가?" 아기가 젖 빨아 그렇다고 미처 변명하기도 전에 갑자기 솥뚜껑 같은 손바닥이 오른쪽 젖통에 덮쳐들어 억세게 움켜쥐었다. 아프게 비튼다. 다음 순간까마귀 오는 질겁하면서 손을 놓았다. 젖줄기가 얼굴에 찍 뿜어져나온모양이다. "이년이!" "헛헛헛, 그것 보라우야. 내레 너무 뎀비디 말라구 안 그래?" 까마귀 오는 손등으로 얼굴을 닦으면서 욕지기난듯 두어번 진저리를 치더니 쌍욕을 고래고래 내지르면서 닛뽄도를휘둘렀다. 그때 그녀는 칼등으로 때리는 걸 칼날로 치는 줄 알고얼마나 혼겁했던가.
귀리집은 그날 다행히 더이상 추궁당하지 않고 놓여났지만 금싸라기 같던 서말 좁쌀은 그만 빼앗기고 말았다. 서말 좁쌀이라면 윽박지르지 않더라도, 귀리집 같은 애기어멍이 아닌 반반한 처녀를데려다가 사타구니에 움집 짓고 살 만하다. - P118

며 젖 만들려고 안달복달하던 때와는 달리 막상 아기가 죽고 보니그냥 덤덤한 심정이었다. 모진 목숨, 살아 더 고생하느니 차라리 잘죽었다는 안도감마저 들었다. 아마도 이런 심정은 그게 유독 자기에게만 닥친 불행이 아니고, 노형서 소까이 온 여편네 중에 젖아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대개 당하는 일이라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귀리집은 이름 석자 지어주지 못한 채 죽은 그 어린것 생각에새삼 가슴이 뭉클해진다. - P119

그놈은 무슨 일이 있어도 무사하게 키워야지. 그런데 당장 오늘 만나는데 먹을 것 한줌 갖다줄 게 없구나. 집터엔 잿더미 속에서 양식이 썩고 있는데 굶어야 하다니, 무슨 이런 놈의 세상이 있는가? 제것 제가 못 먹고 누가 먹는가. 아이고, 먹긴 누가 먹어, 도두, 서호것들이 먹지, 도두, 서호 것들이 지서와 짜고 훔쳐 먹는다지 않는가. 귀리집은 노여움이 불끈 치밀어올랐다. 우리 것을 왜 저들에게빼앗겨? 왜? 계엄령만 해제되면 되를 말로 갚겠다고 그렇게 애걸복걸했건만 저들이 언제 고구마 한 꽁댕이라도 뀌어주던가. - P119

이렇게 개밥에 도토리처럼 괄시받아 처신이 곤란하던 섬 출신들은 이제 육지로 쫓겨나고 새 토벌군이 입도하였단다. 섬 출신이 끼여 있어도 그토록 두렵던 토벌군인데, 섬 출신은 폭도 토벌에 맞지않다고 죄다 육지 병정으로 바꾸었으니 이젠 정말 큰일 났다고 사람마다 걱정이 태산 같다. 그러나 아무리 포악하다 해도 설마 서청만큼이야 않겠지. 서청이 득시글한 경찰은 안 바꾸고 국방군만 바꾸다니. 미친개 눈엔 성한 사람 없다더니, 섬사람이라면 모조리 폭도로 보는 서청의 미친 백정은 왜 안 바꿔주나 바꾸기는커녕 서장자리까지 서청이 차지했고, 섬에 하나 있는 신문사도 빼앗았단다. - P125

아침이 되어 앞집 영순이 아방 등에 업혀나온 그이는 꼬박 열흘을 몸져누웠다. 생각했던 대로 삼우제 끝나는 날 그이를 데리러 산에서 내려왔지만 그 꼴을 보고는 그냥 돌아갔다. 그들은 혹시 꾀병이 아닌가 하고 직접 옷을 들쳐보기까지 했는데 온 데가 푸릿푸릿멍들고 부어 있으니까 제법 호기롭게 경기를 내며 어쩌구 지서를욕했지만, 고양이 쥐 생각해주는 격으로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언제 또, 바로 그 이튿날로 데리러 올지 몰라 마음이 불안한 남편은아직 부기도 제대로 빠지지 않은 몸을 자전거에 실었다. 출근하던여느 때처럼 핸들에 흰 보자기에 싼 도시락 둘을 매달고 짐받이에는 책보를 허리에 맨 순원이를 태웠다. - P127

시어머니랑 둘이서 얼마나 신신당부했던가. 상주 된 몸으로 삭망에 자주 빠지는 게 아무리 괴롭다 해도 마을 폭도가 기다리는또 이제 막 계엄령이 내려 길이 차단되고 사람 왕래가 금지된 위험한 곳을 어디라고 기어왔더란 말인가. 밤중에 밭담에 몸을 숨겨기다시피 고생고생해서 왔건만, 그놈들이 어찌 알았는지 아침 삭체를 지내는데 세명이 들이닥쳤다. - P129

얼마 후 연기에 숨 막혀 밖으로 쫓겨나왔을 때는 폭도 두 놈은간곳없고 시어머니가 보릿짚가리 밑에 허옇게 누워 있었다. 오목가슴에 죽창을 맞고서. 흰옷 위에 불티가 까맣게 내려앉아 있었다.
폭도들이 태우고 도망간 것은 안거리(안채)였다. 그놈들은 한달후인 10월 보름날 국방군들이 와서 불태울 몫으로 밖거리(바깥채)와 대문간을 남겨둔 셈이었다. 온 부락이 불타 화광이 충천하던 토벌군의 소까이, 순원이 아방이 그때 살아 있었더라면 이 섬 어딜가 있어도 그 질펀하게 넓은 불바다를 보았으리라.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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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흉년이던 계축년 3월, 정의고을에 진휼이 실시되어 기민에게죽사발을 돌리던 날, 같은 시 같은 곳에서 기민창 색리 윤관영이 부형(刑)을 받았다.
그날 오시가 가까워져 붉은 상모 달린 창대를 치켜든 군뢰 열두명에게 둘러싸여 옥문을 나선 윤관영은 몹시 불안스러웠다. 과연사또가 약속을 지킬 것인가? 간밤에도 은밀히 사람을 옥으로 보내어 걱정 말라는 다짐을 준 사또였지만, 막상 일이 닥치고 보니 미심쩍은 생각이 앞서는 것이었다. 약속인즉슨 목 자르는 효수 대신부형으로 때워주겠다는 것이었다. - P8

죄인이 일단 부형을 받으면 사망한 것으로 치부되어 여생을 망인(亡人)으로 지내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지만 어떤 골빈 아전이 삭신이 멀쩡한데 죽은 사람 취급 당하며 산송장으로 살겠는가. 모두가산을 정리해서 타관으로 떠나버리는 것이었다.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 P9

효수하라는 어명이 떨어진 판국에 장난짓거리나 다름없는 부형으로 과연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을까? 혹시 처음부터 안되는 일 가지고 호도책을쓰는 거나 아닐까 하는 의심이 더럭 치밀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아무리 상전과 하전 간에 맺어진 신의라 할지라도 그렇게 헌신짝처럼 저버릴 리가 없어. 바로 그 신의 때문에 자기 죄를 기꺼이넘겨받아 대신 짊어진 심복 아전의 모가지를 어떻게 벨 수 있는가말이다. 부형이란 소드방놀이도 따지고 보면 지방 방백이나 수령이 자기 죄를 대신 짊어진 심복 아전을 차마 죽일 수는 없고 해서창출해낸 고육지책이 아니던가. - P9

그는 목뼈를 짓누르는 칼머리를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떠받치고 맨발로 종종걸음을 치며 끌려갔다. 목에 걸린 칼 널판에는 큼직한 먹글씨로 ‘환곡미범포죄인(還穀米犯逋罪人)‘이라고 쓰인 종이때기가 붙어 있고, 그 위에 상투 풀린 머리칼 끝 한모숨이 와닿고 있었다. - P9

그렇다. 형장에 구경꾼을 모으라는 것은 어명이었다. 대회군민(軍民)하라. 환곡미 이백석 이상 범포한 자를 적발하고 대회군민하여 효수하라. - P10

그러나 개들은 따라오지 않는다. 흉년 들어 잡아먹힐까봐 사람이 두려워진 이 비쩍 야윈 짐승들은 삽짝에 꽁무니를 박은 채 힘없이 캥캥거릴 뿐 따라오지 않는다. - P10

앞을 트자 다섯말들이 큰 가마솥 열개가 꺼떻게 드러났다.
가마솥을 보자 다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럴 수가 있나! 솔뚜껑놀이 한다고 해놓고선 가마솥을 갖다놓다니. 어찌 된 일인가?
설마 나를 저 끓는 물에 처넣어 증살시킬 요량은 아닐 테지, 뻘겋게 웃통 벗은 관노 세명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아궁이에 불을 때고있었다. 그런데 호방 임춘일은 웬일로 나와서 뒷짐 지고 부뚜막 주위를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것일까? 형방 관속이 아닌 호방이 미리나와서 설치는 게 이상스럽다. 더군다나 알 수 없는 일은 증살형이라면 가마솥 하나면 충분할 텐데 솥 열개에 모두 불을 때고 있는 것이었다. - P12

"혹시나 하고 사발은 갖고 왔지만 기민 명부에 못 올랐응께 헛일이여. 니기미, 죽 한사발 후루룩 마셔봤으면 참말로 원이 없겠는디………… 곡기를 입에 댄 지도 달포가 넘는구만." - P12

"하여튼지 죽사발은 돌림병이 무서워서 그렇다 치더라도 요꼬라지가 뭔가? 맨땅에 덕석도 안 깔고 주저앉혀서 죽을 멕일 모양인디, 참말로 이럴 수가 있는가? 진휼이란 모름지기 사람 체모가 안다치게 신중해야 되는 법이여" - P13

"넨장, 빌어묵을! 싸게싸게 기어나오라니깐 그러네."
빌어먹는다는 말에 더 토심(心)이 치밀었던지 사람들 틈에서당장 악다구니가 튀어나왔다. - P15

부형 집행에는 반드시칠성판이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 법이었다. 솥뚜껑 위에 올라갔다내려온 죄인은 망인 취급을 받으므로 집으로 옮겨가려면 칠성판에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설명을 해주고 죽어도 거짓 죽는 것이니아무 걱정 말라고 타일렀지만, 아들놈은 아무래도 뭣인가 불안했던지 옥문 창살을 부여잡고 꺼이꺼이 우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자식, 청승맞게 울어쌓긴. 다 큰 녀석이 저리 눈물이 헤퍼서야 쓰겠나. 열여섯 나이면 좀 의젓할 줄 알아야지. 더군다나 이 흉년만 넘기면 내년 가을에 새각시 볼 놈이 말이여. 멀쩡한 아비를 앞에 두고 맏상제 울음을 울다니, 불효막급한 녀석! - P17

목민관은 모름지기 청렴해야 하는 법, 목민관의 퇴임길 행장은 초라할수록 보기 좋다. 헌 수레와 비루먹은야윈 망아지 하나. 수레 속에 서책 이외에 패물, 은식기 따위나 그지방 토산물이 섞여 있으면 재임 시에 토색질했다는 비난을 면치못하는 법. 도임할 때 말채찍 하나만 들고 갔던 제주 목사 김 모는퇴임할 때도 바로 그 말채찍 하나만 달랑 들려 있을 뿐 적수공권이었다지 않은가. 그래서 감사는 거추장스러운 선물들을 돈으로 바꿔치려고 뜻 맞는 곳에다 은밀히 사람을 놓아 흥정을 했던 것이다. - P19

하기는 사창이 텅 비어 있는 것은 어제오늘의 작폐가 아니었다.
지방 수령이 사창의 미곡으로 톡톡히 재미를 보는 것은 이미 관례가 되다시피 해온 터이다. 사창미 중 절반은 춘궁기에 환곡으로 대여해주고 나머지 절반은 유사시에 군량미로 사용되거나 흉년 들어진휼미로 분급될 것이므로 결코 손대어서는 안된다고 국법은 정하고 있지만 어디 그게 한번이라도 제대로 지켜진 적이 있었더냐. 창고 쌀은 일년만 지나면 냄새나는 묵은쌀이 되게 마련, 아무리 갈무리를 잘해도 쥐들이 먹어치운 양이 적지 않고, 볕 좋은 날 내다 널기도 하지만 좀벌레 뭉텅이는 여전하여 자연히 변질되고 말았다. - P20

거기에다 사또는 한가지 더 옹색한 변명을 덧붙였다. 요사이 사창에다 곡식을 비축해두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소백산맥 근처 고을들이 명화적떼가 출몰하여 사창을 털어간다고 야단인데, 난리 때를 대비해서 군량미 조로 비축해둔 곡식을 오히려 바로 그 화적떼의 손아귀에 빼앗겨서야 될 말이냐. 차라리 창고를 비워두는 게 백번 낫지, 안 그런가? 이렇게 사또는 염치 좋게 너스레를 떨었던 것이다. - P21

그러나 사또는 오히려 화를 벌컥 내며 "하라면 할 일이지, 무슨 대거리여! 저들이 파종하고 남은 씨보리를 몰래 숨겨놓고 공연히 엄살떠는 줄을 어째 모르는가" 하면서 억지를 쓰는 것이었다. - P23

사람들은 하루 종일 야산을 헤매고 다녔다. 경칩이 겨우 엊그제지난 초봄이라 산나물은커녕 들나물도 안 나올 때였다. 그들은 칡뿌리, 잔대뿌리를 캐고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었다. 십년생 아래쪽어린 소나무들은 껍질이 허옇게 벗겨져 죽어갔다. 윤관영은 송충이떼처럼 야산을 허옇게 뒤덮고 파먹고 갉아 먹으며 이산 저산 옮아다니는 사람들을 멀찍이 바라보면서 "이러다간 누가 죽어도 몰매 맞아 죽지, 아마" 하고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 P23

어디 이름 몰라서 못 캐 먹는가, 게을러서 굶는가. 숭덕산 밑에 사는 사람들이 말랑말랑한 진흙으로 흙떡을 빚어 먹는다는데, 그 사람들은 산나물 들나물 죽이 좋은 줄 몰라 토식하고 있단 말인가. 때가 일러 싹도 안 난 것들을 어떻게 캐먹는가. 거기다 한술 더 떠서 술과 떡을 빚지 말라니, 도대체 누구보고 하는 말인가. 숭덕산 밑의 저 흙떡 해 먹는 사람들 두고 떡 먹지 말란 말인가. 술쌀, 떡쌀은커녕 쌀독은 바닥난 지 오래고 솥에는쇳녹이 뻘겋게 앉아 있었다. - P23

"이 일을 장차 어찌한다?" 하면서 사또는 넌지시 윤관영의 눈치를 살폈다. "참, 낭패로고・・・・・・ 일이 틀려도 아주 뒤틀리고 말았네."
태산같이 믿고 있던 감사가 손 털고 일어나버렸다는 것이었다.
어사는 뇌물이나 향응 따위는 일절 거절하고 나섰다. 아무래도예사로 끝날 일이 아니란다. 이번 어명은 흉흉한 민심을 다소나마가라앉혀보려는 안간힘에서 취해진 것인지라, 그냥저냥 끝날 일이아니라는 것이었다. - P25

그렇지만 어디 가서 발명하고 누구에게 고변하랴. 저들의 허물은 서로 감추어 체통을 세워주는 것이 사대부의 미덕이라던가. 심지어는 재야의 사림에서도 세도척신이나 지방 방백, 수령보다는아전의 작폐가 더 혹심하다고 지탄의 소리가 높았다. 환정의 문란은 전적으로 실무를 담당하는 아전층의 농간 때문이고, 환정 자체는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한 제도라고 입을 모았다. 참 기가 찰 노릇이었다. 농민의 양곡을 가지고 도로 그 농민들을 상대로 장리놀이를 해먹는 이 조직적인 수탈 방법이 훌륭한 제도라는 것이었다. - P27

큰 부정은 죄가 안되고 작은 것만 죄가 되나. 부정이란 그 규모가크면 클수록 부정의 탈에서 벗어나는가? 그렇다. 도둑도 좀도둑이훨씬 도둑답다. 그것이 대담해져서 명화적쯤 되면 이미 도둑의 탈은 벗겨지는 법. 부정이란 것도 좀스럽고 쩨쩨한 구석이 있어야 진짜부정이지, 쥐가슴 태우며 훔쳐내는 쌀 한톨, 실 한가닥은 부정이지만 환곡미 이백석 횡령은 이미 부정이 아니었다. 그건 백성들의상상을 훨씬 능가해버린 것, 손에 잡히지 않는 막연한 추상이었다.
그건 이미 부정이 아니라 지체 높은 권세였다. 큰 부정일수록 이렇게 모두 환골하고 탈태하여 나라 경영의 대종을 이루었던 것이다. - P28

그러나 죄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일이 터지면 언제나 다치는 건아전뿐이었다. 이번 삼남지방 곳곳에서 일어난 민란에도 몰매 맞아 죽은 것은 아전뿐이었다. 원민(民)이 동헌으로 몰려들면 겁먹은 수령들은 으레 자기 심복 아전을 흥분한 군중 속에다 가차 없이 내던져버리는 것이었다. 심지어 어느 고을 수령은 자신의 결백을 강변하려는 듯이 몸소 매를 들어 이방을 장살했다지 않는가. 아무리 상전과 하전 사이에 맺어진 신의라고 하지만 그렇게 쉽사리저버릴 수가 있는가. 아, 이 일을 어떡하면 좋단 말이냐, 어디 가서누구에게 발명한단 말인가. 윤관영의 눈에서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 P29

"이것은 손님들을 대접하는 주인의 예의요."
그 말을 듣자 윤관영은 절로 웃음이 피식 나왔다. 참으로 약은꾀였다. 맨땅에 퍼질러앉아 죽사발을 들이켠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약이 있을까. 윤관영은 점점 안심이 되면서 마음이 흐뭇해졌다. 사또는 오늘 일을 위하여 저렇게 하나하나 면밀하게 계획해두었음이 틀림없었다. - P32

"사또님! 진휼이 진실로 이렇게 법도 있고 체통이 있을진대, 우리가 얻어먹는다고 어찌 부끄럽다 하겠소." - P33

어중간하고 불안한 침묵이 잠시 멈칫멈칫 흘러가더니 사또 앞을얼쩡거리던 수형리 김진곤이 앞으로 썩 나서며 벼락같이 소리 질렀다.
"듣주어라! 죄인 윤관영을 끌어내려라!" - P35

소요는 더이상 확대되지 않고 거기서 끝이 났다. 내친김에 사또에게 대들거나 아니면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거나 하지도 않고 사람들은 그 자리에 그냥 병신성스럽게 우두커니 서 있었다. 윤관영이가 너무 창졸간에 죽어서 허망스러웠던가? 맥없이 두 팔을 축 늘어뜨린 채 복판에 수북이 쌓인 돌무더기와 깨진 사금파리들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던 그들은 이윽고 모두 땅에 엎드려 대죄 (待罪)하였다. - P38

대죄하고 있는데... 형 집행권이 잠시 농락당한 것이 서운하다면서운하지만 저 실성한 것들이 그만하면 실컷 화풀이도 됐을 테니오히려 잘된 일이다. 하여튼 죽은 놈만 불쌍하구나. 쯧쯧......
사또는 잠시 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다음, 남은 진휼을 마무리짓기 위해 피 묻은 돌무더기와 윤관영의 시신을 치우라고 명했다. - P39

내가 그 얻기 어려운 이틀간의 휴가를 간신히 따내가지고 고향을 찾아간 것은 음력 섣달 열여드레인 할아버지 제삿날에 때를 맞춘 것이었다. 할머니 탈상 때 내려가보고 지금까지이니 그동안 팔년이란 세월이 흐른 것이었다. 바쁜 직장 핑계 대고 조부모 제사에한번도 다녀오지 못했으니 큰아버지나 사촌 길수 형은 편지 글발에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무던히도 욕을 하고 있을 터였다.
물론 일본에 있는 아버지가 제사 때가 되면 잊지 않고 제숫감 마련에 쓰고도 남아 얼마간 가용에 보탬이 될 만큼 넉넉하게 큰집으로송금하는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선산을 못 돌아보고 기제사에 참례 못하는 죄스러움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 P42

그런데 팔년 세월에 비하면 김포공항에서 단 오십분 만에 훌쩍날아간 고향은 참으로 가까운 곳이었다. 기내에 퍼져 틀틀거리는엔진 폭음에 귀가 먹먹해져서 잠시 멍한 방심상태에 몸을 맡기고있는데 별안간 기체가 덜컹하기에 눈을 떠보니 제주공항이었다는식으로 나는 고향에 닿았다. 정말 눈 깜짝할 새에 고향땅 한복판에뚝 떨어진 거였다. 그건 흡사 나 자신이 고향을 찾은 게 아니라 거꾸로 고향이 나를 찾아온 것처럼 어리둥절하고 낭패스러웠다. - P43

내게 고향이란 무엇이었나. 나에게 깊은 우울증과 찌든 가난밖에 남겨준 것이 없는 곳이었다. 관광지니 어쩌니 하지만 그것도 지역 나름이어서 나의 향리인 서촌은 이렇다 할 관광자원도 없고 하늬바람이 몰아쳐 귤농사도 안되는 한촌(村)이었다. 적어도 내 상상 속에서 나의 향리는 예나 이제나 죽은 마을이었다. 말하자면 삼십년 전 군 소개작전에 따라 소각된 잿더미 모습 그대로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 P43

기차를 타도 완행을 타서 반도 끝까지 가거기서 다시 배를 타고 밤을 지새우며 밤 항해를 해야 하는 수륙천오백리 길. 차멀미, 뱃멀미에 시달리며 소주에 젖고 팔년 만에 찾아가는 고향 생각에 젖어서 허위허위 찾아가야 할 고향이었다. 이것이 내가 평소에 고향을 지척에다 두고서도 지구 끝처럼 아득하게 여기던 이유였다.
그러나 휴가는 단 이틀이고 할아버지 제사가 바로 오늘인 걸 어떻게 하냐. 기차 타며 그렇게 여유작작하게 우회해서 고향에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마치 스튜어디스에게 등을 떠밀린 사람처럼 엉거주춤하며 승강구 계단을 내려왔다. - P44

잿빛 바다 안으로 날카롭게 먹혀들어간 시커먼 현무암의 갑(甲),
저걸 사투리로 ‘코지‘라고 했지. 바닷가 넓은 ‘돌빌레(巖盤)‘에 높직이 쌓여 있는 저 고동색 해초더미는 ‘듬뿍‘이겠고, 겨울 바다에 포말처럼 둥둥 떠 있는 저것들은 해녀들의 ‘테‘이다. 시커먼현무암 바위 틈바구니에 붉게 타는 조짚불, 뭍에 오른 해녀들이 불을 쬐는 저곳을 ‘불턱‘이라고 했지. 나는 잊어먹고 있던 낱말들이심층의식 깊은 데서 하나하나 튀어나올 때마다 남모르는 쾌재를불렀다. 이렇게 추억의 심부(部)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내 머릿속은 고향의 풍물과 사투리로 그들먹해지는 것이었다.
그날은 하루에 두집 제사라 큰당숙 댁에서 종조모 제사를 초저녁에 먼저 치른 다음 모두 큰집에 모였다. 나는 누구보다도 길수형을 만나는 것이 반가웠다. - P45

현금이 귀한 농촌생활이라 돈봉투는 충분히 생색이 나겠지만 도청주사로 있으면서 밀감밭도 꽤 크게 갖고 있는 고모부에게마저 봉투를 내밀자니 좀 쑥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고모부는 한마디 능청 떨어 내 얼굴을 화끈 달게 하기를 잊지 않았다.
"이게 뭐라? 욕을 그만해달라고 와이로 씀이라? 하이고, 나도 이런저런 와이로 다 먹어봤쥬만 처조캐한티 와이로 얻어먹긴 이거처음인디....... - P46

가족장지 매입에 대한 의논을 끝내고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한담을 즐기고 있는데 불현듯 순이順) 삼촌 생각이 났다. 아까부터그분이 보이지 않는게 이상했다. 어릴 때 보면 큰집 제삿날마다부조로 기주떡 구덕을 들고 오던 분이었다. 촌수는 멀어도 서너집건너 이웃에 살아서 큰집과는 서로 기제사에 왕래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던 것이다. 그래서 길수 형과 나는 어려서부터 그분을 삼촌이라고 부르면서 무척 따랐다(고향에서는 촌수 따지기 어려운먼 친척 어른을 남녀 구별 없이 흔히 삼촌이라 불러 가까이 지내는풍습이 있다). 어서 삼촌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할 텐데. 더구나 삼촌은 일년 가까이 서울 우리 집에 올라와 밥을 해주며 고생하다가 불과 두달 전에 내려오셨는데 그동안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퍽 궁금했다. 혹시 몸이 편찮으신 게 아닐까? 나는 길수 형에게 물어보았다. - P47

"겨를없어 너한테는 못 알렸져마는 그 삼춘은 며칠 전에 죽어부러시녜."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우꽈? 순이 삼춘이 돌아가셔서 마씸?"
그분이 돌아가시다니, 나는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불과 두달 전만 해도 잔병치레 없이 늘 정정하시던 분이 아니던가. 나는도무지 믿기지 않아서 좌중을 휘둘러보았다. 작은당숙이 나에게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나도 몰랐는디 형님, 무사(왜) 나헌티는 기별도 안합디가?" - P48

그러다가 결국 당신은 국민학교 근처 일주도로변의 밭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부패한 정도로 봐서 죽은 지 이십일은 좋이 넘어 보였다. 그 밭이 일주도로에서 한밭 건너에 있었음에도 이십일이 넘도록 사람 눈에 안 띈 것은 거기가 후미지고 옴팡진 밭인데다밭담으로 가려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흰옷 아닌 밤색 두루마기를 입고 있어서 더더욱 눈에 안 띄었을 것이다. - P49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내 등에는 남모르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얼마 동안 귀가 먹먹해지고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한평생다산 나이 쉰여섯에 끔찍하게도 스스로 목숨을 끊다니. 평생 일궈먹던 밭을 찾아가 양지바른 데를 골라 드러누워버린 삼촌, 유서도한장 없이 죽었으니 그것은 표면상 아무 뚜렷한 이유가 없는 죽음이었다. 그렇다. 정신이 잘못되어 죽었다는 큰아버지의 판단이 옳을 것이다. 평소의 지병인 신경쇠약이 원인이 되었으리라. - P50

혹시 민기 놈이 희야네 가게에 군것질하러 갔다가 그런 못된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다섯살짜리 숫기도 없는 녀석이 어떻게 그런 당돌한 말을 해? 그러나 ‘밥 많이 먹는 제주도식모‘라고 말했을 리는 없지만 밥 많이 먹는다는 말은 누가 해도 했을 것이다. 이런 의심이 좀처럼 풀리지 않은 채 저녁 늦게 돌아온 아내를 맞고 보니 자연히 말다툼이 벌어졌다. 내가 전에 없이치를 떨며 화를 내는 꼴을 보고 놀랐던지 아내는 결혼 후 처음으로내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나는 격앙된 어조로, 시부모 없어 시집살이를 면하더니 시댁 어른을 대하는 게 도무지 버릇없다고 질타했던 것이다. 하여간 아내가 그런 말을 했고 안했고 간에, 그날밤 나는 아내가 순이 삼촌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내 딴에는 톡톡히 보여준 셈이었다. - P53

그날 이후 나는 여태 막연히 기피증 현상으로만 나타나던 고향에 대한 선입견을 대폭 수정하기로 했다. 삼촌의 존재가 나에게 늘고향을 의식하게 해준 셈이었다. 서울생활 십오년 동안 한번도 써보지 못하고 묵혀두었던 사투리도 쓰기 시작했다. 고향말은 주로삼촌하고 얘기할 때만 썼지만 민기 놈에게도 사투리를 꽤나 많이가르쳐주었다. 그렇다. 나는 내 아들이 허여멀끔한 아내를 닮아 빈틈없이 서울내기가 되어가는 것이 딱 질색이었다. 에미를 닮아선지. TV를 너무 봐선지, 다섯살 나이에 벌써 안경을 써야 할 지경으로 눈이 나쁜 녀석, 아내는 피아노를 가르쳐줄 계획이지만 나는 녀석에게 투박한 고향 사투리를 가르치고 싶었다. 아들놈마저 제 애비의 고향을 외면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 서울말 일변도의 내 언어생활이란 게 얼마나 가식적이고 억지춘향식이었던가. 그건 어디까지나 표절 인생이지 나 자신의 인생은 아니었다. - P54

또 하루저녁은 늦은 저녁상을 혼자 받는데 삼촌이 상을 들여다놓고 얼른 부엌으로 쫓아가더니 석쇠를 들고 왔다. 웬일인가 했더니 삼촌은 그 생선 껍질이 눌어붙은 석쇠를 보이면서 밥상에 오른구운 생선이 부스러진 이유를 해명하는 것이 아닌가. 생선이 석쇠에 들러붙어서 부서진 것이지 당신이 입질해서 그 모양이 된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왔다. 왜 생선이 부서졌느냐고 누가 묻기라도 했단 말인가. 왜 묻지도 않았는데 그런 자격지심이 생겼을까? 당신의 결벽증은 정말 지독한 것이었다.
결국 나는 완전히 손들고 말았다. 오해를 풀어드리려고 얼마나진력을 다했던가. 그러나 순이 삼촌은 완강한 패각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꼼짝도 않고 막무가내로 우리를 오해하는 것이었다. 그오해는 증오와 같이 이글이글 타는 강렬한 감정이었다 - P56

그러나 사위가 찾아와 같이 내려가재도 순이 삼촌은 웬일인지싫다고 고집을 세웠다. 애초에 마음먹은 대로 남의집살이 일년을다 채우고 내려가겠노라고 했다. 우리 내외와 원만치 못하게 지내온 푼수로 봐서는 미련 없이 훌훌 떠나버릴 것 같은 분이 그냥 눌러 있겠다니 우리로선 참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사람 구하기 어려운 때라 아쉬운 생각에서가 아니라, 우리를 그토록 오해했으면서도 딱 잘라 매정하게 돌아서버리지 않는 그 마음 씀이 더없이 고맙게 여겨졌다. 아마 순이 삼촌 자신도 시간을 두고 오해를 풀고 가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 P57

아무래도 장모를 두고 가는 것이 걱정이라고 했다.
그의 속삭이는 말로는 순이 삼촌은 심한 신경쇠약 환자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환청 증세까지 있어 시골에 있을 때도, 한 적이 없는말을 들었노라고, 보지도 않은 흉을 봤다고 따지고 들기를 잘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밥 많이 먹는 식모‘라는 것도, 우리에게 품은오해도 모두 환청 때문에 생긴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 P58

당신은 1949년에 있었던 마을 소각 때 깊은 정신적 상처를 입어, 불에 놀란 사람 부지깽이만 봐도 놀란다는 격으로 군인이나 순경을 먼빛으로만봐도 질겁하고 지레 피하던 신경 증세가 진작부터 있어온 터였다 - P58

순이 삼촌은 사위를 홀로 내려보낸 뒤 우리 집에서 석달 가까이더 지냈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당신은 오해를 풀어주기는커녕 오히려 새로운 오해를 자꾸 만들어 보태가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당신은 끝내 일년을 다 못 채우고 고향에 내려온 것인데 내려온 지 한달도 못되어 이 일이 발생했으니, 나로서는 일말의 가책을 안 느낄 도리가 없었다. 아니, 양심의 가책이라니, 내가 무슨 잘못이 있나. 나도 골치를 썩이며 당신에게 꽤 하노라고 하지 않았던가. 당신은 한마디로 불가항력이었다. 그럼에도 결과론으로 따져순이 삼촌의 서울생활이 여의치 못했으리라고 짐작하고 있을 친척어른들을 마주 대하기가 참으로 면구스러웠다. - P59

그 시간이면 이집 저집에서 그 청승맞은 곡성이 터지고 거기에 맞춰 개 짖는 소리가 밤하늘로 치솟아오르곤 했다. 한날한시에 이집 저집 제사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이날 우리 집 할아버지 제사는 고모의 울음소리로부터 시작되곤 했다. 이어 큰어머니가 부엌일을 보다 말고 나와 울음을 터뜨리면 당숙모가 그뒤를 따랐다. 아, 한날한시에 이집 저집에서 터져나오던 곡소리. 음력 섣달 열여드렛날, 낮에는 이곳저곳에서 추렴 돼지가 먹구슬나무에 목매달려 죽는 소리에 온 마을이 시끌짝했고 오백위(位) 가까운 귀신들이 밥 먹으러 강신하는 한밤중공목이면 슬픈 곡성이 터졌다. - P60

자정 넘어 제사시간을 기다리며 듣던 소각 당시의 그 비참한이야기도 싫었다. 하도 들어서 귀에 못이 박힌 이야기. 왜 어른들은아직 아이인 우리에게 그런 끔찍한 이야기를 되풀이해서 들려주었을까? - P61

그것들은 시체가 널린 보리밭을 까맣게 뒤덮고 파먹다가심심하면 겨울 하늘로 떼 지어 날아오르며 세찬 날갯짓으로 하늬바람 타기를 잘했다. 그 당시 일주도로변에 있는 순이 삼촌네 발처럼 옴팡진 밭 다섯개에는 죽은 시체들이 허옇게 널려 있었다. 밭담에도, 지붕에도, 듬뿍눌에도, 먹구슬나무에도 어디에나 앉아 있던까마귀들. 까마귀들만이 시체를 파먹은 게 아니었다. 마을 개들도시체를 뜯어 먹고 다리 토막을 입에 물고 다녔다. 사람 시체를 파먹어 미쳐버린 이 개들은 나중에 경찰 총에 맞아 죽었지만, 그 많던 까마귀들은 모두 어디 갔을까? 아까 낮에 까마귀가 눈에 안 띄길래 길수 형에게 물어보았지만 그도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농작물에 큰 피해가 될 정도로 그렇게 번성하던 까마귀들이 사오년 전부터는 웬일인지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 P61

이렇게 순이 삼촌이 단서가 되어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그 흉물스럽던 까마귀들도 사라져버리고, 세월이 삼십년이니 이제 괴로운기억을 잊고 지낼 만도 하건만 고향 어른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오히려 잊힐까봐 제삿날마다 모여 이렇게 이야기를 하며 그때 일을명심해두는 것이었다. - P62

"연설 들으러 나오시오! 한사람도 빠짐없이 국민학교 운동장으로 모이시오!"
보통 때 같으면 순경이나 대동청년단원 몇사람이 다니면서 사람들을 불러모았는데 이번엔 어쩐 일인지 철모에 총까지 든 군인들이 수십명 퍼져다니면서 득달같이 재촉하는 것이 뭔가 심상치 않았다. 심지어는 총검으로 창문을 열어젖히면서 병든 노인까지 내몰았다. 좀 불안한 생각이 없지도 않았지만, 그 전해 5·10선거 무렵에도 그렇게 득달같이 사람들을 불러모은 적이 있어서 그때처럼무슨 중요한 연설이 있는가보다라고만 생각했다 - P64

"아명해도(아무래도) 낌새가 이상해연 나도 어머님을 찾아 뫼시고 군인 가족들 틈에 섞연 나갔쥬. 매부가 군인이니 직계가족은 아니지만 다행히 이장 강씨가 눈감아주언 넘어갔죠." 큰아버지의 말이었다.
"형님, 그것 봅서, 누이동생을 나한티 팔아 무신 손핼 봅니까? 이북 것한티 시집간다고 결사반대허더니" 하고 고모부가 너털웃음을 웃었다. - P66

"불났져! 마을에 불났져!"
화들짝 놀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 학교 돌담 울타리를 기어올랐다.
"불이여, 불!" "불났져, 불났져!" "아이고 아이고!" 운동장 사방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회오리바람처럼 일어나 하늘을 찔렀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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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 형무소 - 옮기던 날의 기록 그리고 그 역사, 개정증보판
리영희·나영순 글, 김동현·민경원 사진 / 열화당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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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보고] 열화당 『서대문형무소, 옮기던 날의 기록, 그리고 역사』: 독립운동의 성지 너머,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감옥사를 증언하는 장소

1. 도서 개요 및 책의 구성

가. 발행 정보 및 기본 내용

ㅇ(도서명) 『서대문형무소, 옮기던 날의 기록, 그리고 역사』

ㅇ(출판사) 열화당

ㅇ(초판) 1988년 열화당 사진문고 23으로 발행되었음.

ㅇ(개정증보판) 2008년 서대문형무소 개소 백주년을 맞아 개정증보판으로 발간되었음.

ㅇ(갈래) 사진기록집, 역사기록, 현장기록

ㅇ(사진) 김동현, 민경원

ㅇ(글) 리영희, 나명순

ㅇ(배경)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서대문형무소 일대

ㅇ(내용) 1908년 경성감옥으로 출발한 서대문형무소가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를 거치며 어떤 억압의 장소로 기능했는지를 사진과 글로 기록한 책임.

나. 책의 실제 구성

ㅇ(첫째 구성) 책은 리영희 선생님의 「서대문형무소의 기억」으로 시작함.

ㅇ(둘째 구성) 이어서 서대문형무소가 의왕으로 이전한 뒤 남겨진 감방, 복도, 사형장, 교수대, 화장실, 담장 등 사진 기록을 보여줌.

ㅇ(셋째 구성) 마지막으로 나명순 선생님의 「서대문형무소 소사」를 통해 서대문형무소의 개소부터 서울구치소 이전, 역사관으로 남기까지의 흐름을 정리함.

ㅇ(구성의 의미) 이 책은 한 사람의 체험에서 출발해, 사진으로 감옥의 공간을 보여주고, 마지막에 역사적 맥락을 정리하는 방식으로 서대문형무소를 보여주고 있음.

다. 도서의 기본 성격

ㅇ(체험·사진·역사의 결합) 이 책은 개인의 수감 체험, 감옥 공간의 사진기록, 서대문형무소의 역사 서술이 결합된 기록물임.

ㅇ(장소 중심의 기록) 이 책은 특정 인물 한 명의 전기나 사건 중심의 역사책이 아니라, 서대문형무소라는 장소가 품은 한국 근현대사의 고통을 읽어내는 책임.

ㅇ(사물의 증언) 감방, 교수대, 화장실, 식기, 젓가락 같은 사소한 사물과 공간을 통해 감옥의 비인간성을 구체적으로 드러냄.

ㅇ(기억의 확장) 서대문형무소를 독립운동의 성지로만 기억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해방 이후 독재와 사법폭력, 민주화운동의 기억까지 함께 보게 함.

라. 도서의 역사적 의의

ㅇ(기록의 가치) 사라지거나 일부만 남게 된 서대문형무소의 모습을 사진과 글로 남겼다는 점에서 기록적 가치가 큼.

ㅇ(체험의 가치) 리영희의 글은 서대문형무소를 직접 겪은 사람의 증언이라는 점에서 감옥의 고통을 생생하게 전달함.

ㅇ(사진의 가치) 김동현·민경원의 사진은 글로만은 느끼기 어려운 감옥 공간의 압박감과 현장감을 보여줌.

ㅇ(역사 서술의 가치) 나명순의 글은 서대문형무소의 긴 역사를 정리하여, 이 장소가 한국 근현대사의 여러 격변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줌.

ㅇ(핵심 의의) 이 책은 서대문형무소를 “독립운동가들이 갇혔던 감옥”이라는 익숙한 이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대마다 권력이 두려워한 사람들을 가두었던 한국 근현대사의 어두운 감옥으로 다시 보게 함.

2. 사진·글 참여자 소개

가. 사진

ㅇ(김동현) 1945년 전북 정읍 출생, 동국대학교 졸업, 조선일보 사진부 기자 및 출판사진부 부장 역임

ㅇ(민경원) 생몰년·출생지 등은 확인하지 못했으며, 조선일보 사진부 차장 역임

나. 글

ㅇ(리영희) 1929년 평안북도 운산 출생, 2010년 별세. 경성공립공업학교와 국립해양대학을 졸업하고 합동통신·조선일보 기자, 한양대학교 교수로 활동했으며, 이 책에서는 「서대문형무소의 기억」을 통해 직접 겪은 감옥의 체험을 기록함.

ㅇ(나명순) 1942년 충남 서천 출생, 2004년 별세. 전주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조선일보 기자, 세계일보 논설위원, 경원대학교 부총장 등을 지냈으며, 이 책에서는 「서대문형무소 소사」를 통해 서대문형무소의 역사를 정리함.

3. 리영희 「서대문형무소의 기억」: 세 번 끌려간 감옥의 체험

가. 체험으로 시작하는 책

ㅇ(체험의 글) 지금은 작고하신 리영희 선생님의 「서대문형무소의 기억」은 서대문형무소를 밖에서 해설한 글이 아니라, 실제로 그곳에 갇혔던 사람이 자신의 몸과 기억으로 써 내려간 글임.

ㅇ(세 번의 수감 경험) 리영희 선생님은 박정희 시대에 두 번, 전두환 시대에 한 번, 모두 세 차례 서대문형무소에 잡혀 들어갔다고 회고함.

ㅇ(현대사의 감옥) 이 대목은 서대문형무소가 일제강점기의 감옥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해방 이후 독재정권 아래에서도 비판적 지식인과 양심적 인사들을 억압한 공간이었음을 보여줌.

ㅇ(기억의 무게) 그래서 이 글은 단순한 감옥 회고담이 아니라, 한 시대의 권력이 사람의 생각과 말, 양심을 어떻게 가두었는지를 보여주는 현대사의 증언으로 읽힘.

나. 젓가락과 식사의 기억

ㅇ(젓가락의 의미) 리영희의 글에서 특히 강하게 남는 것은 감옥 안에서의 식사와 젓가락에 대한 기억임. 젓가락 하나는 단순한 식사용 도구가 아니라, 사람이 감옥 안에서 얼마나 초라하고 비참한 처지로 떨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처럼 다가옴.

ㅇ(식사의 굴욕) 음식을 먹는 일조차 인간다운 식사가 아니라, 감시와 통제 아래에서 겨우 허기를 해결하는 생존 행위로 떨어짐.

ㅇ(인간의 품위) 감옥은 사람의 몸을 가두는 데서 그치지 않음. 사람답게 먹고, 자고, 씻고, 배설할 최소한의 품위까지 빼앗는 공간으로 드러남.

ㅇ(핵심 의미) 작은 젓가락 하나가 거대한 역사 설명보다 더 강하게 감옥의 비인간성을 보여주었음.

다. 감옥 안팎으로 이어지는 고통

ㅇ(몸의 통제) 감옥은 사상이나 정치적 입장만을 억압한 것이 아니라, 먹고 자고 배설하는 인간의 몸 전체를 통제한 공간이었음.

ㅇ(마음의 압박) 수감자는 좁은 공간에 갇혀 생활하면서 신체적 불편뿐 아니라 정신적 압박도 함께 감당해야 했음.

ㅇ(가족의 고통) 리영희의 기억에서 감옥의 고통은 수감자 한 사람에게만 머물지 않음. 가족은 어디에 끌려갔는지, 언제 돌아올 수 있는지조차 제대로 알 수 없는 불안 속에서 함께 고통을 겪음.

ㅇ(핵심 의미) 리영희의 글은 서대문형무소를 낡은 감옥 건물이 아니라, 실제 사람의 몸과 마음, 가족의 삶까지 흔들어 놓은 장소로 보게 함.

4. 서대문형무소 사진 기록: 공간과 사물이 증언하는 역사

가. 사진기록의 성격

ㅇ(옮기던 날의 기록) 사진은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으로 이전한 뒤, 현저동 101번지에 남아 있던 서대문형무소의 모습을 기록함.

ㅇ(현장성) 감방, 복도, 담장, 화장실, 사형장, 교수대 같은 장면이 있어 역사가 추상적으로 흐르지 않음.

ㅇ(공간의 압박감) 낡은 벽과 닫힌 문, 좁은 감방과 교수대의 장치는 그 자체로 감옥의 압박감을 전함.

ㅇ(기록의 의미) 이 책에서 사진은 글의 보조자료가 아니라, 서대문형무소의 역사를 증언하는 또 하나의 본문임.

나. 감방과 생활공간

ㅇ(감방의 현실) 감방은 단순히 잠을 자는 방이 아니라, 사람이 움직일 공간조차 제대로 없는 억압의 공간이었음.

ㅇ(생활의 통제) 수감자의 일상은 먹고 자고 앉고 움직이는 기본 행위까지 감옥의 질서 안에서 통제되었음.

ㅇ(공간의 폭력) 감방의 좁음과 폐쇄성은 감옥의 폭력이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드러나는 장면임.

ㅇ(핵심 의미) 사진 속 감방은 서대문형무소가 실제 사람이 몸으로 견뎌야 했던 장소였음을 보여줌.

다. 화장실과 몸의 굴욕

ㅇ(화장실의 문제) 감방 안 화장실과 좌변기, 생리대 주머니 같은 기록은 수감자의 몸이 얼마나 노골적으로 통제되고 방치되었는지를 보여줌.

ㅇ(사생활의 박탈) 배설과 위생이라는 가장 사적인 영역조차 감옥 안에서는 제대로 보호되지 않았음.

ㅇ(생활의 굴욕) 감옥의 고통은 고문이나 사형 같은 극단적 폭력에만 있는 것이 아님. 먹고 자고 배설하는 기본 생활이 무너지는 데서도 인간은 깊은 굴욕을 겪음.

ㅇ(핵심 의미) 화장실과 생활시설의 사진은 감옥의 폭력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몸의 조건까지 침범했다는 사실을 보여줌.

라. 교수대와 사형장

ㅇ(사형장의 존재) 서대문형무소 안의 사형장은 이곳이 단순한 수감시설이 아니라, 국가가 죽음을 집행하던 장소였음을 보여줌.

ㅇ(교수대의 공포) 교수대, 레버, 떨어지는 마룻바닥, 시신 확인 장소에 대한 기록은 국가권력이 사람의 생명을 끊어내던 방식을 보여줌.

ㅇ(죽음의 제도화) 사형장은 죽음이 분노나 우발적 폭력이 아니라 제도와 절차의 이름으로 집행되었음을 드러냄.

ㅇ(핵심 의미) 감옥의 폭력은 구호가 아니라, 먹고 자고 배설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구체적인 몸의 고통으로 나타났음.

5. 나명순 「서대문형무소 소사」: 감옥의 긴 역사

가. 경성감옥에서 서대문형무소까지

ㅇ(개소)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10월 21일 경성감옥으로 설치되었음.

ㅇ(명칭 변화) 1912년 서대문감옥,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이름이 바뀌었음.

ㅇ(식민지 시설) 이 감옥은 단순한 교정시설이 아니라,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고 항일세력을 가두기 위해 만든 근대식 감옥이었음.

ㅇ(수용 확대) 의병항쟁과 항일운동이 확산되면서 기존 감옥만으로는 수용이 어려워졌고, 서대문형무소는 일제의 통치 폭력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음.

나. 식민지 억압의 공간

ㅇ(초기 수감자) 책은 이승만, 의병장 허위, 안명근, 김구 등 초기 항일운동 관련 인물들이 경성감옥과 서대문감옥에 수감된 사례를 소개함.

ㅇ(백오인사건) 김구가 입감된 뒤 백오인사건으로 많은 애국지사들이 붙잡혀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음.

ㅇ(3·1운동 이후) 3·1운동 관련 수감자들에 대한 재판과 수감 과정은 혼란스럽고 가혹했으며, 그 과정에서 양한묵 지사가 옥사하고 유관순 열사가 서대문감옥 안에서 순국했음.

ㅇ(강우규 의사) 사이토 마코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져 암살을 기도했던 강우규 의사의 수감과 처형 기록도 서대문형무소의 항일 기억을 강하게 보여줌.

ㅇ(김동삼과 한용운) 김동삼 열사가 옥사한 뒤 일제의 보복이 두려워 아무도 시신을 찾지 못하던 때, 만해 한용운이 홀로 시신을 찾아 안장했다는 일화도 이곳의 비극성을 보여줌.

ㅇ(핵심 의미) 일제강점기의 서대문형무소는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기리는 장소이기 이전에, 실제 사람들이 고문당하고 죽어간 민족수난의 현장이었음.

다. 해방 이후 현대사 폭력의 현장

ㅇ(해방 이후 명칭 변화) 해방 이후에는 1945년 서울형무소, 1961년 서울교도소, 1967년 서울구치소로 이름이 바뀌었음.

ㅇ(이름과 기능) 이름은 바뀌었지만, 사람을 가두고 통제하는 감옥의 기능은 계속되었음.

ㅇ(수감자의 변화) 4·19와 5·16 같은 격변기에는 정치인, 고위관료, 군장성, 부정축재자로 몰린 기업인 등이 이곳에 들어왔음.

ㅇ(민주화운동기) 3선개헌, 유신, 10·26, 12·12 같은 격랑 속에서는 재야인사와 대학생 등 민주화를 외치는 사람들도 이곳에 갇혔음.

ㅇ(다양한 수감자) 책은 이 밖에도 흉악범, 대형 경제사범, 간첩 혐의자, 잡범에 이르기까지 서대문형무소의 수감자 구성이 매우 다양했다고 설명함.

ㅇ(수용 규모) 1987년 이전 당시 이곳은 삼천이백 명가량을 수용할 수 있었고, 1969년에는 칠천여 명이 수용되어 포화상태가 되었다고 책은 설명함.

ㅇ(사형장의 지속) 서대문형무소의 교수형장은 일제강점기뿐 아니라 해방 이후에도 여러 인물들의 최후 장소가 되었음.

ㅇ(핵심 의미) 서대문형무소는 식민지의 감옥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해방 이후에도 한국 현대사의 정치적 폭력과 사법폭력을 품은 장소였음.

라. 역사관으로 남은 서대문형무소

ㅇ(서울구치소 이전) 1987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면서, 서대문형무소는 칠십 년 가까운 서대문 시대를 마감했음.

ㅇ(한국의 바스티유) 책에서는 서대문형무소가 한때 ‘한국의 바스티유’로 불리기도 했다고 적고 있음.

ㅇ(독립공원과 역사관) 1992년 독립공원이 개원했고, 1998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개관했음.

ㅇ(보존 시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는 중앙사와 9~13사, 한센병사 등 일부 건물과 사형장이 보존되어 일반에 공개되고 있음.

ㅇ(장소의 변화) 사람을 가두던 감옥이 이제는 인간을 억압한 역사를 증언하는 장소가 되었음.

6. 2018년 「대한독립영웅전」 답사와의 연결

가. 답사의 기억

ㅇ(답사 계기) 나는 2018년 5월 21일 아들과 함께 “대한독립영웅전”이라는 이름으로 서울에 있는 독립유공자 동상과 독립운동 관련 장소들을 찾아다닌 적이 있음.

ㅇ(답사 장소) 당시 효창공원, 서대문독립공원, 탑골공원, 장충단공원, 어린이대공원, 남산공원 등 서울 곳곳의 독립운동 관련 인물과 장소를 찾아보았음.

ㅇ(답사의 의미) 그때의 답사는 아들에게 독립운동가들의 이름과 행적을 단순히 책으로만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실제 도시 공간 속에서 직접 확인하게 하려는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었음.

ㅇ(서대문형무소의 기억) 그때 서대문형무소는 주로 독립운동지사들의 고난과 순국을 기리는 장소로 다가왔음.

나. 당시 느낀 아쉬움

ㅇ(독립운동 중심의 전시) 당시 현장에서 본 서대문형무소는 독립운동지사들의 고난과 희생을 중심으로 기억하게 만드는 성격이 강했음.

ㅇ(당연한 중요성)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을 기리는 일은 당연히 중요하고, 결코 약해져서는 안 되는 기억임.

ㅇ(부족했던 현대사) 그러나 해방 이후 이곳이 서울형무소, 서울교도소, 서울구치소로 이어지며 정치범, 사상범, 양심수, 민주화운동 관련 인사들을 가두었던 장소였다는 점은 현장에서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음.

ㅇ(남은 질문) 그래서 당시의 서대문형무소는 독립운동의 성지로는 강하게 다가왔지만, 해방 이후 권력과 사법폭력의 공간으로는 충분히 읽히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남았음.

7. 종합 감상 및 평가

가. 책의 핵심 가치

ㅇ(기록의 가치) 『서대문형무소, 옮기던 날의 기록, 그리고 역사』는 사라지거나 일부만 남게 된 서대문형무소의 공간과 시설을 사진과 글로 남긴 중요한 기록임.

ㅇ(체험의 가치) 리영희의 「서대문형무소의 기억」은 감옥을 밖에서 설명한 글이 아니라, 직접 갇혔던 사람이 몸으로 겪은 기억이라는 점에서 무게가 있음.

ㅇ(사진의 가치) 김동현·민경원의 사진은 감옥의 물리적 흔적을 보여주며, 글로만은 느끼기 어려운 공간의 압박감과 현장감을 전함.

ㅇ(역사 서술의 가치) 나명순의 「서대문형무소 소사」는 경성감옥 개소부터 서울구치소 이전까지의 흐름을 정리하여, 이 장소가 식민지 억압과 해방 이후 현대사의 폭력을 함께 품고 있음을 보여줌.

나. 서대문형무소를 다시 읽는 관점

ㅇ(장소의 복합성) 서대문형무소는 순국선열을 기리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해방 이후 국가권력의 억압과 사법폭력까지 품은 장소임.

ㅇ(수감자의 변화)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와 민족지도자가 갇혔고, 해방 이후에는 정치인, 지식인, 재야인사, 학생, 민주화운동 관련 인사들이 이곳을 거쳐 갔음.

ㅇ(권력의 거울) 감옥에 누가 갇혔는지를 보면, 그 시대 권력이 무엇을 두려워했는지가 보임.

ㅇ(핵심 판단) 서대문형무소는 단순한 옛 감옥이 아니라, 시대마다 권력이 두려워한 사람들을 가두었던 한국 근현대사의 어두운 감옥임.

다. 최종 소회

ㅇ(기억의 책임) 서대문형무소를 제대로 기억하려면 독립운동가들의 희생만이 아니라, 해방 이후 독재정권 아래에서 벌어진 억압과 사법폭력까지 함께 보아야 함.

ㅇ(역사교육의 방향) 역사교육은 자랑스러운 기억만 골라 보여주는 일이 아니라, 부끄럽고 아픈 기억까지 함께 보여주는 일이어야 함.

ㅇ(최종 평가) 이 책은 서대문형무소라는 장소를 통해, 역사는 기념하는 것만이 아니라 끝까지 들여다보고 반성해야 하는 것임을 깨닫게 하는 책임.

<시대마다 권력이 두려워한 사람들을 가두었던 감옥>

『서대문형무소, 옮기던 날의 기록, 그리고 역사』는 한 사람의 체험에서 시작해, 사진으로 감옥의 공간을 보여주고, 마지막에 그 장소의 긴 역사를 정리하는 책이다. 첫머리에 놓인 리영희의 「서대문형무소의 기억」은 이 책 전체의 정서를 결정한다. 리영희는 박정희 시대에 두 번, 전두환 시대에 한 번, 모두 세 차례 서대문형무소에 묶여 들어갔다고 회고한다. 이 고백 때문에 서대문형무소는 곧바로 먼 과거의 유적이 아니라, 해방 이후에도 사람의 생각과 양심을 가두었던 현대사의 감옥으로 다가온다. 이어지는 사진들은 감방, 화장실, 교수대, 사형장 같은 구체적 사물과 공간을 통해 감옥의 비인간성을 눈앞에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나명순의 「서대문형무소 소사」는 경성감옥 개소부터 서울구치소 이전까지의 흐름을 정리하며, 이 장소가 한국 근현대사의 폭력과 고통을 품은 공간이었음을 확인하게 한다.

나는 2018년 5월 21일 아들과 함께 “대한독립영웅전”이라는 이름으로 서울의 독립유공자 동상과 독립운동 관련 장소들을 찾아다닌 적이 있다. 그때 서대문형무소는 주로 독립운동지사들의 고난과 순국을 기리는 장소로 다가왔고, 그 기억은 지금도 소중하게 남아 있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며, 그곳이 해방 이후 서울형무소, 서울교도소, 서울구치소로 이어지며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감옥사까지 품은 장소였다는 점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 책에서 특히 강하게 남는 것은 감방, 젓가락, 화장실, 교수대, 사형장 같은 구체적 사물과 공간이다. 거대한 역사 설명보다 나무젓가락 하나, 감방 안 변기 하나, 교수대의 마룻바닥 하나가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사람은 그곳에서 이름과 생각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통제되고 감시되고 처벌되는 존재로 다루어졌다. 감옥의 폭력은 거창한 구호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먹고 자고 배설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구체적인 몸의 고통으로 나타난다는 점이 이 책을 통해 선명하게 다가왔다.

결국 서대문형무소는 시대마다 권력이 두려워한 사람들을 가두었던 감옥이다. 일제는 독립운동가와 민족지도자를 가두었고, 해방 이후의 권력은 정권에 비판적인 정치인, 지식인, 학생, 민주화운동 세력을 가두었다. 이곳을 제대로 기억하려면 독립운동가들의 희생만이 아니라, 해방 이후 독재정권 아래에서 벌어진 억압과 사법폭력까지 함께 보아야 한다. 자랑스러운 역사만 골라 기념하는 것은 온전한 기억이 아니다. 이 책은 서대문형무소라는 장소를 통해, 역사는 기념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픈 곳까지 들여다보고 반성해야 하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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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경성감옥이 서대문감옥으로 개칭되었는데, 그 전 해에는 데라우치 마사타케(寺) 총독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안명근(安根, 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 김구(金九) 선생 등이 각각 종신형과 십오년 징역형을 언도받고 입감된다. - P130

김구 선생이 입감되고 일 년 후인 1912년 6월에는 대량 검거의 회오리가 불어닥쳐 감옥은 만원을 이룬다. 이른바 ‘백오인사건‘이라 불리는 신민회(新民會) 사건, 일제는 총독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혐의를 씌워 전국에서 무려 칠백여 명에 달하는 애국지사들을 무더기로 잡아 가두었던 것이다. 이 가운데 대부분은 경무총감부에서 악형을겪은 끝에 무혐의로 풀려나고, 백스물한 명만이 기소되어 서대문감옥에 수감된다. 일심(一審)에서 윤치호(尹致昊), 양기탁(梁起鐸), 이승훈(李昇薰) 등 여섯 명은 징역 십년, 옥관빈(玉觀彬) 등 열일곱 명은징역 칠 년, 이덕환(李德煥) 등 서른여덟 명은 징역 육년, 오대영(吳大泳) 등 마흔네 명은 징역 오년을 언도받았고, 이창식(李昌植) 등 열여섯 명은 무죄 판결을 받아 그 해 9월 28일 서대문 옥문을 나갔다. 무죄 판결을 받은 열여섯 명을 제외하고 백다섯 명이 남았다 해서 백오인사건‘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이들 백다섯 명도 이듬해 3월 20일 열린 경성복심원(京城覆審院) 항소심에서 윤치호 등 주범으로 몰린 여섯 명만이 오륙 년으로 확정되었을 뿐 나머지 아흔아홉 명은 무죄로 나왔으며, 주범이라던 여섯 명도 1915년 2월엔 모두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 P130

삼일운동 관련 수감자들에 대한 재판은, 내란법이 적용되었던 일심이 파기되는 등 번복을 거듭하다가 삼 년이 채 못 돼 모두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 소용돌이 속에서 양한묵지사가 1919년 5월 26일옥사했으며, 유관순1920년 10월 12일 서대문감옥 안열사도에서 끝내 눈을 감았다. 유 열사는 당시 이화학당 일학년생, 열여섯 살의 어린 나이로 충남 천안군 아우내(竝川)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주도하다 체포돼 공주법원에서 칠 년형을 선고받고 불복, 공소하였으나,
경성복심원에서 역시 칠년형을 언도받고 복역 중이었다. - P133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에게 폭탄을 던져 암살을 기도했던 강의사는 바닥 나무판(가로 백십이 센티미터, 세로 이십사 센티미터)에 ‘姜宇奎 四二五三 一九二0 十一二九‘ 라고 자신의 이름과 처형된 연월일을 단기와 서기로 구분해 정확히 새겨 놓았다. 특히 날짜를 새긴 ‘二九‘는 급히 쓴 흔적이 엿보여 강 의사가 이름과 연월은 미리 새겨두었다가 처형 직전 날짜만 따로 새겨 넣은 것으로 추정됐다. 강의사는 사형집행 직전, 일인 검사가 "감상이 어떠냐"고 묻자, "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단두대 위에 봄바람만이 불어올 뿐. 이 몸은 나라 없는 자이니 어찌 무슨 생각이 있으리오)" 이라고 써 주었다.
강 의사의 나이 육십육 세였다. - P134

1923년, 서대문감옥이 서대문형무소로 개칭된 후에도 송학선(宋學先) 의사가 사형을 당했고, 김동삼(金東三)열사가 옥사했으며, 안창호(安昌浩) 지사 등이 옥고를 치렀다. 송 의사는 1926년 4월 20일 사이토총독을 금호문(金虎門) 앞에서 암살하려다 실패, 피검되어 다음 해 5월19일 처형됐다. - P134

독립투사나 열사, 애국지사나 사상가들에 대한 체포, 신문, 수감에일제는 악랄한 고문과 혹독한 수형생활을 강요했다. 특히 독립투사, 열사들에 대해서는 병보석도  허용치 않았고, 병감(病監)으로 옮겨 주지도 않아 감옥에서 병사한 사람이 많았다. 간수에게 반항하는 경우 참혹하게 구타를 당해야 했고, 햇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  암실 독방 즉중징벌감(重懲罰監)에  수감돼야 했다. - P135

일제의 경찰은 송남헌, 홍익범, 허헌을 비롯, 보성중 교사였던 문석준(文錫俊), 민중의원 의사 경기현(景棋鉉), 신문기자 황인철(靴哲) 등 지식인 백오십여 명을 붙잡아들여 밤낮없이 끔찍한 고문을 가했다. 이들은 몇 번씩이나 산송장이 되어 감방으로 업혀 오곤 했는데.
이 중 홍익범은 사경에 빠져 형식상 병보석으로 출감했으나 곧 숨을 거두고 말았고, 문석준 등 여섯 명도 끝내 옥사를 면치 못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끝내 민족지도자들의 이름은 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 P137

송남헌 씨가 수감된 1943년 5월의  서대문형무소 미결감 2동에는 5호 감방에  여운형(呂運亨), 6호 감방에  조선공산당의 김태준(金俊), 16호 감방에는 보성전문 교수(뒷날 북한에서 사법상까지 지냈다) 최용달(崔容達), 20호 감방에는 허헌 등 당시의쟁쟁한 사회주의 사상가들이 수용돼 있었다. - P137

그 무렵 유난히 뚱뚱한 몸집의 사상범 하나가 ‘소제‘ 노릇을 하고 있어 재소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함북 갑산(甲山)에서 경찰주재소를 습격하여 박살을 낸, 이른바 ‘보천보사건‘의 주역인 박금철(朴金)이었다. 함흥재판소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서대문형무소로 이감, 복역 중이었다. 박금철은 뒷날 북한에서 부수상까지 지냈으나 김일성에 의해 숙청을 당하고 말았다. - P137

‘국회프락치사건‘의 두목격인 김약수(金若水)도 해방 전 한때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적이 있었다. - P138

서울형무소(육이오 직전 개칭)의 형무관들은 인민군 탱크가 형무소에들이닥친 28일까지도 그대로 직장을 지키고 있었다. 이 바람에 많은형무관들이 희생을 면치 못했을 것은 불문가지 (不問可知). 재소자들역시 후송되지 못해 인민군에 의해 참변을 당한 숫자가 적지 않았다.
또한, 인민군이 서울을 장악하기 시작한 6월 28일, 형무소 문을 밀치고거리로 뛰쳐나온 좌익수들은 우익 인사들에 대해 무차별 보복살육을자행하기도 했다. - P141

사일구, 오일륙 등과 같은 격변기일수록 정치인, 고위관리, 군장성,
재벌 등 거물급 인사들로 인해 서대문형무소는 붐비게 마련이었다. 사일구 직후엔 부정선거의 원흉으로 지목받은 최인규(崔仁圭) 내무장관, 발포 명령자인 경무대 경비대장 곽영주(郭永周), 이재학(李在鶴) 국회부의장, 정치깡패 이정재(李丁載), 임화수(林和秀) 등이 이곳에 들어앉아야 했고, 오일륙 직후 서울교도소로 개칭될 무렵에는 민주당정부의 장·차관을 비롯한 행정부·정당의 요인들, 부정축재자로 몰린기업인들, 이한림(李翰林) 장군 등 반혁명사건 연루자들이 대거 투옥되어, 수감자의 중량이라는 측면에서는 형무소 역사상 구감기록을 또한번 갱신해야 했다. - P141

이 교수형장에서 강우규 열사를 비롯한 많은 애국지사, 그리고 조봉암(曹奉岩), 최인규, 이정재, 육영수(陸英修) 여사 저격범 문세광(文世光), 십이륙의 주역 김재규(金載圭)같은 시대적 인물들, 거물간첩으로 탈옥을 기도했던 김종태(金種泰), 위장 귀순간첩 이수근(李穗根), 노동당 부부장 황태성(黃泰成), 유괴범 주영형(朱永炯), 강력범고재봉(高在奉), 김대두(金大斗), 박철웅(朴鐵雄) 등이 최후를 마쳤다. 이곳에서 처형된 사형수의 정확한 숫자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1960년대 전국에서 집행된 사형집행자의 숫자를 참고로 살펴보면,
1963년에 스무 명, 1964년에 열네 명, 1965년에 스물한 명, 1966년에열세 명, 1967년에 열일곱 명, 1968년에 스물여섯 명으로 나타나 있다. (신진규, 「형사정책』 2, 법문사, 1974) - P143

서울구치소, 아니 서대문형무소는 1987년 11월, 삼 년 만에 완공을본 새 집을 찾아 경기도 시흥군 의왕읍 포일리로 이사함으로써 칠십구년에 걸친 다사다난했던 서대문시대의 막을 내렸다. - P143

정부가 이백억 원의 예산으로 신축한 시흥의 새 구치소는 부지 십삼만여 평에 건평 만육천여 평, 열여덟 개 동(棟) 팔백팔십오 실(室)로모두 삼천오백 명을 수용할 수 있다. 격세지감이랄까. 새 구치소는 감방마다 카펫을 깔았고, 수세식 변기와 개인별 사물함까지 갖추어 수감자들이 이용하기에 편리하도록 했다. 아직은 아시아지역 형무소 중에선 최고의 시설이라고 한다. - P143

서대문형무소는 한마디로 민족저항과 민족이 집약된 역사의 현장. 구한말 일제시대엔 민족운동, 애국운동, 독립운동, 해방 이후엔 좌우익투쟁, 골육상쟁, 여러 차례의 정변, 반독재 민주화운동 등 우리의현대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의 현장이기도 하다. - P144

김동삼 열사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국내에 잠입했다가 밀정의 밀고로 붙잡혀 옥사했는데, 일제의 보복이 두려워 아무도 김 열사의 시신을 찾아 가는 사람이 없자,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선생이 "내가 평생에 그분의 시체만이라도 볼 수있다면, 그 이상의 영광이 어디 있겠느냐"고 하면서 혼자 나서 시체를찾아다 안장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어려 있는 곳도 서대문형무소다. - P144

숱한 민족의 수난사를 이젠 안으로만 간직한 채, 서대문시대 그 칠십구 년의 역사를 마감한 서대문형무소, ‘한국의 바스티유‘로 불리기도하다가 이제는 퇴역한 서울구치소, 아니 서대문형무소는 그러나 오늘,
아직은 철문에 빗장을 지르고 텅 빈 채로 침묵에 싸여 얼룩진 벽돌담과감시탑만으로 말없이 오가는 시민들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 P146

나명순(1942-2004) 선생이 이 글을 쓴 1988년 이후, 서울시는 서대문 독립문로터리에1992년 8월 15일 ‘독립공원‘을 개원했으며, 1998년에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개관했다. 공원 내에는 한옥 목조건물로 복원한, 순국선열들의 위패봉안과 전시실로 사용하고 있는 ‘독립관‘이 있으며, 순국선열들의 이름이 새겨진 ‘추모비‘와 그 투쟁을 형상화한 모습이 부조된 ‘순국선열추념탑‘이 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는 중앙사와 9-13사, 나병환자 수감동인 한센병사 등 일곱 개의 건물과 사형장을 보존하고, 보안과 청사를 전시실로 꾸며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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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면관의 살인 ㅣ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박수지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독서보고] 아야츠지 유키토 『기면관의 살인』: 단절된 동선, 훼손된 지문, 그리고 붕괴된 신원

1.작품 개요

가.기본 정보

ㅇ(작품명) 『기면관의 살인』

ㅇ(작가) 아야츠지 유키토

ㅇ(갈래) 장편소설, 본격 미스터리, 관 시리즈

ㅇ(주요 배경) 기면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세이지의 저택’ 안의 별관, 가면 수집품이 놓인 기묘한 공간, 그리고 그곳에서 열린 의문의 모임이 중심 배경임.

ㅇ(주요 인물) 기면관의 주인 가게야마 이쓰시, 모임에 초대된 사람들, 사건의 진상을 추적하는 인물들이 중심을 이룸.

ㅇ(주요 내용) 가게야마 이쓰시가 ‘또 하나의 자신’을 찾기 위해 기묘한 모임을 열고, 그 모임의 참가자들이 기면관 안에서 살인사건과 신원 확인의 혼란을 마주하는 이야기임.

ㅇ(주요 정서) 처음에는 가면과 기묘한 저택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지만, 사건이 벌어진 뒤에는 얼굴, 지문, 신원, 또 하나의 자신이라는 문제가 불안하게 얽혀 들어감.

나.작품의 기본 성격

ㅇ(관 시리즈) 『기면관의 살인』은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에 속하는 작품으로, 기괴한 건축물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됨.

ㅇ(본격 미스터리) 단순한 분위기 소설이 아니라, 인물의 정체, 공간의 구조, 가면이라는 장치, 시신 확인의 문제를 통해 독자가 진상을 추리하게 만드는 작품임.

ㅇ(신원 확인의 미스터리) 이 작품은 “누가 죽였는가”의 문제뿐 아니라, “누가 죽었는가”라는 문제를 강하게 밀어붙임.

ㅇ(가면의 소설) 가면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라, 사람의 얼굴과 정체를 흔들고,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흐리게 만드는 핵심 장치임.

2.작가 아야츠지 유키토 소개

가.작가 개요

ㅇ(출생) 아야츠지 유키토는 1960년 12월 23일 일본 교토에서 태어난 소설가임.

ㅇ(본명) 본명은 우치다 나오유키이며, 아야츠지 유키토는 필명임.

ㅇ(학력) 교토대학교 교육학부와 동 대학원에서 수학한 것으로 알려져 있음.

ㅇ(등단) 1987년 『십각관의 살인』으로 데뷔함.

ㅇ(대표작) 『십각관의 살인』, 『수차관의 살인』, 『미로관의 살인』, 『인형관의 살인』, 『시계관의 살인』, 『흑묘관의 살인』, 『암흑관의 살인』, 『기면관의 살인』 등이 대표작임.

나.관 시리즈에서 『기면관의 살인』의 위치

ㅇ(후반부 작품) 『기면관의 살인』은 관 시리즈 후반부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앞선 작품들에서 반복되어온 ‘기괴한 관’의 설정을 가면과 신원 확인의 문제로 확장함.

ㅇ(세이지의 저택) 작품 속 기면관은 나카무라 세이지와 관련된 저택으로 제시되며, 관 시리즈 특유의 기묘한 건축물 설정을 이어감.

ㅇ(시리즈의 변주) 『십각관의 살인』이 외딴섬, 십각형 구조, 시간 조작을 중심으로 했다면, 『기면관의 살인』은 가면, 얼굴, 지문, 또 하나의 자신, 신원 확인의 혼란을 중심에 둠.

3.기면관의 공간 구조와 가면의 의미

가.기면관이라는 공간

ㅇ(기묘한 별관) 기면관은 ‘세이지의 저택’ 안에 있는 별관으로, 이름부터 기괴하고 불길한 분위기를 풍김.

ㅇ(직선형 동선) 기면관 별관은 출입구와 소홀에서 시작해 객실들이 붙은 긴 복도, 살롱, 대면의 방, 기면의 방으로 이어지는 구조임. 여러 방향으로 흩어지는 공간이라기보다,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며 시야와 동선이 단계적으로 제한되는 공간임.

ㅇ(방의 배열) 객실 1~6은 복도에 나란히 붙어 있고, 그 위쪽에 살롱과 대면의 방, 더 안쪽에 기면의 방이 놓임. 따라서 인물의 이동은 복도와 공용공간을 거쳐야 하며, 각 방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문이 닫히는 순간 외부에서 쉽게 확인되기 어려움.

ㅇ(구조의 역할) 기면관의 구조는 단순히 비밀 공간이 있다는 수준을 넘어, 누가 어느 지점까지 들어갔는지, 어느 순간부터 시야가 끊겼는지, 시신이나 인물의 신원을 어떻게 오인하게 되는지를 뒷받침하는 물리적 장치로 기능함.

ㅇ(핵심 의미) 십각관이 기하학적 형태로 동선을 흔든 공간이라면, 기면관은 직선 복도와 안쪽 방의 단계적 배치를 통해 얼굴과 신원 확인을 흔드는 공간임.

나.가면의 의미

ㅇ(장식 이상의 물건) 작품 속 가면은 단순한 수집품이나 장식품이 아님. 가면은 얼굴을 가리고, 사람의 정체를 숨기며,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상상을 불러일으킴.

ㅇ(미래의 가면) 작품에서는 ‘미래의 가면’이라는 말이 등장함. 그 가면에는 마력이 있어, 쓰면 미래가 보인다는 식의 기묘한 이야기가 붙어 있음.

ㅇ(기묘한 매력) 가면은 사람을 끌어당기지만, 동시에 사람을 불안하게 만듦. 얼굴을 가리는 순간, 그 사람의 진짜 모습도 함께 흔들리기 때문임.

ㅇ(핵심 의미) 가면은 공포의 도구라기보다, 정체를 감추고 신원 확인을 흐리게 만드는 미스터리적 장치임.

다.또 하나의 자신

ㅇ(모임의 이유) 가게야마 이쓰시가 모임을 여는 이유는 ‘또 하나의 자신’을 찾기 위해서임.

ㅇ(도플갱어적 상상) ‘또 하나의 자신’이라는 말은 단순히 닮은 사람을 찾는다는 뜻을 넘어, 자기와 같은 얼굴이나 운명을 가진 존재가 어딘가에 있다는 불길한 상상을 불러일으킴.

ㅇ(행운과 불안) 작품 속에서는 또 하나의 자신이 나타나면 행운이 찾아온다는 말도 나오지만, 실제 사건 속에서는 그 믿음이 오히려 불안과 의심을 키움.

ㅇ(핵심 의미) 이 작품에서 ‘또 하나의 자신’은 행운의 상징이라기보다, 신원과 존재의 확신을 흔드는 불안한 장치로 작동함.

4.작품 전체 내용 정리

가.전체 흐름

ㅇ(기묘한 초대) 가게야마 이쓰시는 ‘또 하나의 자신’을 찾기 위해 사람들을 기면관으로 초대함.

ㅇ(기면관의 분위기) 초대된 사람들은 가면으로 가득한 기묘한 저택과 그 안의 별관을 마주하게 됨. 기면관이라는 이름은 그 공간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줌.

ㅇ(대면의 다과회) 모임에서는 ‘또 하나의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가 오가고, 참가자들은 왜 이런 모임이 열렸는지 의문을 품음.

ㅇ(살인사건 발생) 이후 기면관의 주인과 관련된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시신의 얼굴과 손가락 훼손 문제가 사건의 중요한 쟁점으로 떠오름.

ㅇ(기면관의 비밀) 사건이 진행되면서 기면관에는 주인조차 몰랐던 비밀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남.

ㅇ(진상의 접근) 가면, 시신 확인, 또 하나의 자신, 기면관의 구조가 하나로 맞물리면서 사건의 진상에 접근하게 됨.

나.현재 사건과 기면관의 비밀

ㅇ(살해당한 주인) 사건의 중심에는 살해당한 기면관의 주인이 있음.

ㅇ(시신의 문제) 피해자의 얼굴은 드러나지만, 손가락이 훼손되어 지문 확인이 어려움. 이 때문에 시신의 신원 자체가 의심의 대상이 됨.

ㅇ(비밀 공간) 기면관에는 겉으로 보이는 구조만으로는 알 수 없는 비밀이 숨어 있음.

ㅇ(핵심 의미) 이 작품의 사건은 단순히 “누가 죽였는가”가 아니라, “누가 죽었는가”, “누가 누구로 보이게 되었는가”의 문제로 확장됨.

다.작품의 중심 갈등

ㅇ(진짜와 가짜) 가면을 쓴 얼굴, 가면 아래의 얼굴, 실제 신원 사이의 간격이 작품의 핵심 갈등을 이룸.

ㅇ(공간과 인식의 혼란) 기면관의 구조와 가면의 장식은 인물들이 사건을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게 만듦.

ㅇ(확인의 붕괴) 얼굴과 지문이라는 기본적인 확인 수단이 흔들리면서, 독자와 인물들은 죽은 사람이 정말 누구인지부터 의심하게 됨.

ㅇ(핵심 갈등) 『기면관의 살인』의 중심 갈등은 범인 찾기뿐 아니라, 얼굴과 이름, 신원과 역할이 뒤섞이는 데서 발생함.

5.작품의 주요 특징

가.가면과 신원 확인의 교란

ㅇ(얼굴의 차단) 가면은 사람의 얼굴을 가리고, 얼굴을 가리면 그 사람의 정체도 불분명해짐.

ㅇ(지문 확인의 차단) 피해자의 손가락 훼손은 잔혹함을 보여주기 위한 장면에 그치지 않고, 신원 확인을 어렵게 만드는 장치임.

ㅇ(피해자 신원의 의심) 이 작품은 살인을 감추는 것보다, 살해된 사람이 누구인지 확신하지 못하게 만드는 데 초점을 둠.

ㅇ(핵심 의미) 『기면관의 살인』은 가면과 지문 훼손을 통해 신원 확인 절차 자체를 흔드는 작품임.

나.‘또 하나의 자신’이라는 불길한 상상

ㅇ(모임의 명분) 가게야마 이쓰시가 사람들을 모은 이유는 ‘또 하나의 자신’을 찾기 위해서임.

ㅇ(심리적 불안) 누구에게나 자신과 닮은 존재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흥미롭지만, 동시에 불안함을 줌.

ㅇ(핵심 의미) ‘또 하나의 자신’은 행운의 상징처럼 말해지지만, 작품 속에서는 죽음과 착각, 신원 혼란으로 이어지는 불길한 장치가 됨.

다.기면관의 구조와 비밀

ㅇ(건축물의 역할) 기면관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사건의 성격을 결정하는 공간임.

ㅇ(단계적 구조) 출입구에서 소홀, 객실 복도, 살롱, 대면의 방, 기면의 방으로 이어지는 구조는 인물의 동선을 제한하고, 안쪽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을 바깥에서 바로 확인하기 어렵게 만듦.

ㅇ(숨겨진 구조) 겉으로 보이는 저택의 모습과 실제 구조 사이에 차이가 있고, 이 차이가 사건의 진상과 연결됨.

ㅇ(핵심 의미) 관 시리즈답게 건축물은 단순한 무대가 아니라, 범행과 착각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로 기능함.

라.고전 추리와의 연결

ㅇ(에도가와 란포 언급) 작품 속에서는 에도가와 란포와 소년탐정단, 『기면성의 비밀』 같은 고전 추리의 흔적이 언급됨.

ㅇ(괴저택의 분위기) 기면관이라는 이름, 가면 수집품, 수상한 모임은 고전 추리소설 특유의 괴저택 분위기를 떠올리게 함.

ㅇ(핵심 의미) 『기면관의 살인』은 가면과 괴저택이라는 낡은 소재를 현대적인 본격 미스터리 구조 안에서 다시 활용한 작품임.

6.작품 감상 및 종합 평가

가.가면은 공포보다 신원 확인을 흔드는 장치임

ㅇ(핵심 감상) 『기면관의 살인』에서 가면은 단순히 무서운 물건이 아님. 가면은 사람의 얼굴을 가리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는 절차 자체를 흔드는 장치임.

ㅇ(신원 확인의 붕괴) 얼굴, 지문, 방의 위치, 이동 동선이 모두 불확실해지면서 사건은 “누가 죽였는가”보다 “누가 죽었는가”의 문제로 옮겨감.

ㅇ(핵심 의미) 이 작품은 가면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흐리는 소설이라기보다, 얼굴·지문·공간 배치를 이용해 신원 확인 절차 자체를 흔드는 소설로 읽혔음.

나.기면관의 구조가 사건을 뒷받침함

ㅇ(구조적 감상) 기면관 별관은 십각관처럼 한눈에 형태가 강하게 드러나는 구조는 아니지만, 출입구에서 안쪽 방으로 깊어지는 직선형 동선을 통해 사람의 이동과 시야를 제한함.

ㅇ(공간의 역할) 객실, 살롱, 대면의 방, 기면의 방이 단계적으로 배치되면서, 누가 어느 지점까지 들어갔고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게 되었는지가 사건의 중요한 조건이 됨.

ㅇ(핵심 감상) 『십각관』이 기하학적 평면으로 착각을 만든다면, 『기면관』은 깊숙한 동선과 안쪽 방의 배치를 통해 신원 착각을 만드는 작품임.

다.『십각관』과 다른 방식의 재미가 있음

ㅇ(십각관과의 차이) 『십각관의 살인』이 외딴섬과 시간 조작, 강한 반전의 힘으로 밀어붙였다면, 『기면관의 살인』은 가면과 신원 확인, 또 하나의 자신을 중심으로 전개됨.

ㅇ(기면관의 장점) 『기면관』은 한 방의 충격보다는, 기묘한 설정과 상징이 사건과 맞물리는 방식에 재미가 있음.

ㅇ(핵심 감상) 『십각관』이 구조적 반전의 작품이라면, 『기면관』은 얼굴과 신원을 둘러싼 착각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음.

라.아쉬운 점

ㅇ(설정의 부담) 가면, 또 하나의 자신, 미래의 가면, 비밀 구조 등 흥미로운 장치가 많지만, 그만큼 설정이 다소 과하게 느껴질 수 있음.

ㅇ(분위기의 우세) 사건 자체보다 기면관의 분위기와 상징이 앞서는 느낌도 있음. 독자에 따라서는 추리보다 설정 설명이 더 강하게 느껴질 수 있음.

ㅇ(핵심 감상) 다만 이 과한 설정이야말로 관 시리즈 특유의 맛이기도 하므로, 단점이면서 동시에 작품의 개성으로 볼 수 있음.

마.최종 평가

ㅇ(작품의 가치) 『기면관의 살인』은 가면, 또 하나의 자신, 신원 확인의 혼란, 기괴한 저택 구조를 결합해 관 시리즈의 개성을 이어간 작품임.

ㅇ(장점) 가면이라는 소재를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얼굴과 지문, 신원 확인의 문제와 연결한 점이 좋았음.

ㅇ(아쉬운 점) 『십각관』처럼 단번에 독자를 뒤집는 강렬함보다는, 분위기와 설정의 비중이 더 커서 호불호가 갈릴 수 있음.

ㅇ(최종 소회) 『기면관의 살인』은 무서운 저택 이야기라기보다, 얼굴을 가리고 지문을 훼손한 순간 인간의 신원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본격 미스터리임.

ㅇ(핵심 의미) 『기면관의 살인』은 단절된 동선과 훼손된 지문을 통해, 인간의 얼굴과 이름, 신원 확인의 절차가 얼마나 쉽게 붕괴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관 시리즈의 신원 미스터리임.

<단절된 동선과 훼손된 지문이 만든 신원의 미로>

『기면관의 살인』은 기면관이라는 기묘한 저택을 배경으로, 가면과 신원 확인의 혼란을 중심에 둔 본격 미스터리 소설이다. 가게야마 이쓰시는 ‘또 하나의 자신’을 찾기 위해 사람들을 모으고, 초대된 사람들은 가면으로 둘러싸인 저택에서 불길한 모임을 마주한다. 처음에는 기묘한 취미와 이상한 모임처럼 보이지만, 사건이 벌어진 뒤 기면관은 단순한 저택이 아니라 얼굴과 신원을 흔드는 공간으로 바뀐다.

이 작품에서 가면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다. 가면은 얼굴을 가리고, 얼굴이 가려지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확신도 흔들린다. 특히 피해자의 얼굴과 손가락 훼손 문제는 사건을 단순한 살인사건이 아니라 신원 확인의 문제로 확장시킨다. 결국 이 작품은 “누가 죽였는가”보다 “정말 누가 죽었는가”라는 질문을 강하게 던진다.

기면관이라는 공간도 중요하다. 도면상 별관은 출입구와 소홀에서 시작해 객실들이 붙은 긴 복도, 살롱, 대면의 방, 기면의 방으로 이어진다. 이 구조는 사람을 여러 방향으로 흩어지게 하기보다,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게 만들고 시야가 끊기는 지점을 만든다. 따라서 기면관은 단순한 괴저택이 아니라, 인물의 동선과 신원 착각을 물리적으로 뒷받침하는 공간으로 기능한다.

『십각관의 살인』이 외딴섬과 시간 조작, 강한 반전의 힘으로 읽히는 작품이라면, 『기면관의 살인』은 가면과 또 하나의 자신, 신원 확인의 혼란을 통해 다른 방향의 재미를 준다. 강렬한 한 방보다는 기묘한 설정과 상징이 사건과 맞물리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다만 가면, 미래의 가면, 또 하나의 자신, 비밀 구조 등 장치가 많아 설정이 다소 과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그럼에도 『기면관의 살인』은 관 시리즈의 개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가면 아래 숨은 얼굴이 누구인지, 또 하나의 자신이 과연 행운인지 불행인지, 기면관이라는 공간은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끝까지 의심하게 만든다. 결국 이 작품은 단절된 동선과 훼손된 지문, 그리고 붕괴된 신원을 통해 인간의 얼굴과 이름, 신원 확인의 절차가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신원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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