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흉년이던 계축년 3월, 정의고을에 진휼이 실시되어 기민에게죽사발을 돌리던 날, 같은 시 같은 곳에서 기민창 색리 윤관영이 부형(刑)을 받았다.
그날 오시가 가까워져 붉은 상모 달린 창대를 치켜든 군뢰 열두명에게 둘러싸여 옥문을 나선 윤관영은 몹시 불안스러웠다. 과연사또가 약속을 지킬 것인가? 간밤에도 은밀히 사람을 옥으로 보내어 걱정 말라는 다짐을 준 사또였지만, 막상 일이 닥치고 보니 미심쩍은 생각이 앞서는 것이었다. 약속인즉슨 목 자르는 효수 대신부형으로 때워주겠다는 것이었다. - P8

죄인이 일단 부형을 받으면 사망한 것으로 치부되어 여생을 망인(亡人)으로 지내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지만 어떤 골빈 아전이 삭신이 멀쩡한데 죽은 사람 취급 당하며 산송장으로 살겠는가. 모두가산을 정리해서 타관으로 떠나버리는 것이었다.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 P9

효수하라는 어명이 떨어진 판국에 장난짓거리나 다름없는 부형으로 과연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을까? 혹시 처음부터 안되는 일 가지고 호도책을쓰는 거나 아닐까 하는 의심이 더럭 치밀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아무리 상전과 하전 간에 맺어진 신의라 할지라도 그렇게 헌신짝처럼 저버릴 리가 없어. 바로 그 신의 때문에 자기 죄를 기꺼이넘겨받아 대신 짊어진 심복 아전의 모가지를 어떻게 벨 수 있는가말이다. 부형이란 소드방놀이도 따지고 보면 지방 방백이나 수령이 자기 죄를 대신 짊어진 심복 아전을 차마 죽일 수는 없고 해서창출해낸 고육지책이 아니던가. - P9

그는 목뼈를 짓누르는 칼머리를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떠받치고 맨발로 종종걸음을 치며 끌려갔다. 목에 걸린 칼 널판에는 큼직한 먹글씨로 ‘환곡미범포죄인(還穀米犯逋罪人)‘이라고 쓰인 종이때기가 붙어 있고, 그 위에 상투 풀린 머리칼 끝 한모숨이 와닿고 있었다. - P9

그렇다. 형장에 구경꾼을 모으라는 것은 어명이었다. 대회군민(軍民)하라. 환곡미 이백석 이상 범포한 자를 적발하고 대회군민하여 효수하라. - P10

그러나 개들은 따라오지 않는다. 흉년 들어 잡아먹힐까봐 사람이 두려워진 이 비쩍 야윈 짐승들은 삽짝에 꽁무니를 박은 채 힘없이 캥캥거릴 뿐 따라오지 않는다. - P10

앞을 트자 다섯말들이 큰 가마솥 열개가 꺼떻게 드러났다.
가마솥을 보자 다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럴 수가 있나! 솔뚜껑놀이 한다고 해놓고선 가마솥을 갖다놓다니. 어찌 된 일인가?
설마 나를 저 끓는 물에 처넣어 증살시킬 요량은 아닐 테지, 뻘겋게 웃통 벗은 관노 세명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아궁이에 불을 때고있었다. 그런데 호방 임춘일은 웬일로 나와서 뒷짐 지고 부뚜막 주위를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것일까? 형방 관속이 아닌 호방이 미리나와서 설치는 게 이상스럽다. 더군다나 알 수 없는 일은 증살형이라면 가마솥 하나면 충분할 텐데 솥 열개에 모두 불을 때고 있는 것이었다. - P12

"혹시나 하고 사발은 갖고 왔지만 기민 명부에 못 올랐응께 헛일이여. 니기미, 죽 한사발 후루룩 마셔봤으면 참말로 원이 없겠는디………… 곡기를 입에 댄 지도 달포가 넘는구만." - P12

"하여튼지 죽사발은 돌림병이 무서워서 그렇다 치더라도 요꼬라지가 뭔가? 맨땅에 덕석도 안 깔고 주저앉혀서 죽을 멕일 모양인디, 참말로 이럴 수가 있는가? 진휼이란 모름지기 사람 체모가 안다치게 신중해야 되는 법이여" - P13

"넨장, 빌어묵을! 싸게싸게 기어나오라니깐 그러네."
빌어먹는다는 말에 더 토심(心)이 치밀었던지 사람들 틈에서당장 악다구니가 튀어나왔다. - P15

부형 집행에는 반드시칠성판이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 법이었다. 솥뚜껑 위에 올라갔다내려온 죄인은 망인 취급을 받으므로 집으로 옮겨가려면 칠성판에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설명을 해주고 죽어도 거짓 죽는 것이니아무 걱정 말라고 타일렀지만, 아들놈은 아무래도 뭣인가 불안했던지 옥문 창살을 부여잡고 꺼이꺼이 우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자식, 청승맞게 울어쌓긴. 다 큰 녀석이 저리 눈물이 헤퍼서야 쓰겠나. 열여섯 나이면 좀 의젓할 줄 알아야지. 더군다나 이 흉년만 넘기면 내년 가을에 새각시 볼 놈이 말이여. 멀쩡한 아비를 앞에 두고 맏상제 울음을 울다니, 불효막급한 녀석! - P17

목민관은 모름지기 청렴해야 하는 법, 목민관의 퇴임길 행장은 초라할수록 보기 좋다. 헌 수레와 비루먹은야윈 망아지 하나. 수레 속에 서책 이외에 패물, 은식기 따위나 그지방 토산물이 섞여 있으면 재임 시에 토색질했다는 비난을 면치못하는 법. 도임할 때 말채찍 하나만 들고 갔던 제주 목사 김 모는퇴임할 때도 바로 그 말채찍 하나만 달랑 들려 있을 뿐 적수공권이었다지 않은가. 그래서 감사는 거추장스러운 선물들을 돈으로 바꿔치려고 뜻 맞는 곳에다 은밀히 사람을 놓아 흥정을 했던 것이다. - P19

하기는 사창이 텅 비어 있는 것은 어제오늘의 작폐가 아니었다.
지방 수령이 사창의 미곡으로 톡톡히 재미를 보는 것은 이미 관례가 되다시피 해온 터이다. 사창미 중 절반은 춘궁기에 환곡으로 대여해주고 나머지 절반은 유사시에 군량미로 사용되거나 흉년 들어진휼미로 분급될 것이므로 결코 손대어서는 안된다고 국법은 정하고 있지만 어디 그게 한번이라도 제대로 지켜진 적이 있었더냐. 창고 쌀은 일년만 지나면 냄새나는 묵은쌀이 되게 마련, 아무리 갈무리를 잘해도 쥐들이 먹어치운 양이 적지 않고, 볕 좋은 날 내다 널기도 하지만 좀벌레 뭉텅이는 여전하여 자연히 변질되고 말았다. - P20

거기에다 사또는 한가지 더 옹색한 변명을 덧붙였다. 요사이 사창에다 곡식을 비축해두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소백산맥 근처 고을들이 명화적떼가 출몰하여 사창을 털어간다고 야단인데, 난리 때를 대비해서 군량미 조로 비축해둔 곡식을 오히려 바로 그 화적떼의 손아귀에 빼앗겨서야 될 말이냐. 차라리 창고를 비워두는 게 백번 낫지, 안 그런가? 이렇게 사또는 염치 좋게 너스레를 떨었던 것이다. - P21

그러나 사또는 오히려 화를 벌컥 내며 "하라면 할 일이지, 무슨 대거리여! 저들이 파종하고 남은 씨보리를 몰래 숨겨놓고 공연히 엄살떠는 줄을 어째 모르는가" 하면서 억지를 쓰는 것이었다. - P23

사람들은 하루 종일 야산을 헤매고 다녔다. 경칩이 겨우 엊그제지난 초봄이라 산나물은커녕 들나물도 안 나올 때였다. 그들은 칡뿌리, 잔대뿌리를 캐고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었다. 십년생 아래쪽어린 소나무들은 껍질이 허옇게 벗겨져 죽어갔다. 윤관영은 송충이떼처럼 야산을 허옇게 뒤덮고 파먹고 갉아 먹으며 이산 저산 옮아다니는 사람들을 멀찍이 바라보면서 "이러다간 누가 죽어도 몰매 맞아 죽지, 아마" 하고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 P23

어디 이름 몰라서 못 캐 먹는가, 게을러서 굶는가. 숭덕산 밑에 사는 사람들이 말랑말랑한 진흙으로 흙떡을 빚어 먹는다는데, 그 사람들은 산나물 들나물 죽이 좋은 줄 몰라 토식하고 있단 말인가. 때가 일러 싹도 안 난 것들을 어떻게 캐먹는가. 거기다 한술 더 떠서 술과 떡을 빚지 말라니, 도대체 누구보고 하는 말인가. 숭덕산 밑의 저 흙떡 해 먹는 사람들 두고 떡 먹지 말란 말인가. 술쌀, 떡쌀은커녕 쌀독은 바닥난 지 오래고 솥에는쇳녹이 뻘겋게 앉아 있었다. - P23

"이 일을 장차 어찌한다?" 하면서 사또는 넌지시 윤관영의 눈치를 살폈다. "참, 낭패로고・・・・・・ 일이 틀려도 아주 뒤틀리고 말았네."
태산같이 믿고 있던 감사가 손 털고 일어나버렸다는 것이었다.
어사는 뇌물이나 향응 따위는 일절 거절하고 나섰다. 아무래도예사로 끝날 일이 아니란다. 이번 어명은 흉흉한 민심을 다소나마가라앉혀보려는 안간힘에서 취해진 것인지라, 그냥저냥 끝날 일이아니라는 것이었다. - P25

그렇지만 어디 가서 발명하고 누구에게 고변하랴. 저들의 허물은 서로 감추어 체통을 세워주는 것이 사대부의 미덕이라던가. 심지어는 재야의 사림에서도 세도척신이나 지방 방백, 수령보다는아전의 작폐가 더 혹심하다고 지탄의 소리가 높았다. 환정의 문란은 전적으로 실무를 담당하는 아전층의 농간 때문이고, 환정 자체는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한 제도라고 입을 모았다. 참 기가 찰 노릇이었다. 농민의 양곡을 가지고 도로 그 농민들을 상대로 장리놀이를 해먹는 이 조직적인 수탈 방법이 훌륭한 제도라는 것이었다. - P27

큰 부정은 죄가 안되고 작은 것만 죄가 되나. 부정이란 그 규모가크면 클수록 부정의 탈에서 벗어나는가? 그렇다. 도둑도 좀도둑이훨씬 도둑답다. 그것이 대담해져서 명화적쯤 되면 이미 도둑의 탈은 벗겨지는 법. 부정이란 것도 좀스럽고 쩨쩨한 구석이 있어야 진짜부정이지, 쥐가슴 태우며 훔쳐내는 쌀 한톨, 실 한가닥은 부정이지만 환곡미 이백석 횡령은 이미 부정이 아니었다. 그건 백성들의상상을 훨씬 능가해버린 것, 손에 잡히지 않는 막연한 추상이었다.
그건 이미 부정이 아니라 지체 높은 권세였다. 큰 부정일수록 이렇게 모두 환골하고 탈태하여 나라 경영의 대종을 이루었던 것이다. - P28

그러나 죄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일이 터지면 언제나 다치는 건아전뿐이었다. 이번 삼남지방 곳곳에서 일어난 민란에도 몰매 맞아 죽은 것은 아전뿐이었다. 원민(民)이 동헌으로 몰려들면 겁먹은 수령들은 으레 자기 심복 아전을 흥분한 군중 속에다 가차 없이 내던져버리는 것이었다. 심지어 어느 고을 수령은 자신의 결백을 강변하려는 듯이 몸소 매를 들어 이방을 장살했다지 않는가. 아무리 상전과 하전 사이에 맺어진 신의라고 하지만 그렇게 쉽사리저버릴 수가 있는가. 아, 이 일을 어떡하면 좋단 말이냐, 어디 가서누구에게 발명한단 말인가. 윤관영의 눈에서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 P29

"이것은 손님들을 대접하는 주인의 예의요."
그 말을 듣자 윤관영은 절로 웃음이 피식 나왔다. 참으로 약은꾀였다. 맨땅에 퍼질러앉아 죽사발을 들이켠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약이 있을까. 윤관영은 점점 안심이 되면서 마음이 흐뭇해졌다. 사또는 오늘 일을 위하여 저렇게 하나하나 면밀하게 계획해두었음이 틀림없었다. - P32

"사또님! 진휼이 진실로 이렇게 법도 있고 체통이 있을진대, 우리가 얻어먹는다고 어찌 부끄럽다 하겠소." - P33

어중간하고 불안한 침묵이 잠시 멈칫멈칫 흘러가더니 사또 앞을얼쩡거리던 수형리 김진곤이 앞으로 썩 나서며 벼락같이 소리 질렀다.
"듣주어라! 죄인 윤관영을 끌어내려라!" - P35

소요는 더이상 확대되지 않고 거기서 끝이 났다. 내친김에 사또에게 대들거나 아니면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거나 하지도 않고 사람들은 그 자리에 그냥 병신성스럽게 우두커니 서 있었다. 윤관영이가 너무 창졸간에 죽어서 허망스러웠던가? 맥없이 두 팔을 축 늘어뜨린 채 복판에 수북이 쌓인 돌무더기와 깨진 사금파리들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던 그들은 이윽고 모두 땅에 엎드려 대죄 (待罪)하였다. - P38

대죄하고 있는데... 형 집행권이 잠시 농락당한 것이 서운하다면서운하지만 저 실성한 것들이 그만하면 실컷 화풀이도 됐을 테니오히려 잘된 일이다. 하여튼 죽은 놈만 불쌍하구나. 쯧쯧......
사또는 잠시 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다음, 남은 진휼을 마무리짓기 위해 피 묻은 돌무더기와 윤관영의 시신을 치우라고 명했다. - P39

내가 그 얻기 어려운 이틀간의 휴가를 간신히 따내가지고 고향을 찾아간 것은 음력 섣달 열여드레인 할아버지 제삿날에 때를 맞춘 것이었다. 할머니 탈상 때 내려가보고 지금까지이니 그동안 팔년이란 세월이 흐른 것이었다. 바쁜 직장 핑계 대고 조부모 제사에한번도 다녀오지 못했으니 큰아버지나 사촌 길수 형은 편지 글발에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무던히도 욕을 하고 있을 터였다.
물론 일본에 있는 아버지가 제사 때가 되면 잊지 않고 제숫감 마련에 쓰고도 남아 얼마간 가용에 보탬이 될 만큼 넉넉하게 큰집으로송금하는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선산을 못 돌아보고 기제사에 참례 못하는 죄스러움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 P42

그런데 팔년 세월에 비하면 김포공항에서 단 오십분 만에 훌쩍날아간 고향은 참으로 가까운 곳이었다. 기내에 퍼져 틀틀거리는엔진 폭음에 귀가 먹먹해져서 잠시 멍한 방심상태에 몸을 맡기고있는데 별안간 기체가 덜컹하기에 눈을 떠보니 제주공항이었다는식으로 나는 고향에 닿았다. 정말 눈 깜짝할 새에 고향땅 한복판에뚝 떨어진 거였다. 그건 흡사 나 자신이 고향을 찾은 게 아니라 거꾸로 고향이 나를 찾아온 것처럼 어리둥절하고 낭패스러웠다. - P43

내게 고향이란 무엇이었나. 나에게 깊은 우울증과 찌든 가난밖에 남겨준 것이 없는 곳이었다. 관광지니 어쩌니 하지만 그것도 지역 나름이어서 나의 향리인 서촌은 이렇다 할 관광자원도 없고 하늬바람이 몰아쳐 귤농사도 안되는 한촌(村)이었다. 적어도 내 상상 속에서 나의 향리는 예나 이제나 죽은 마을이었다. 말하자면 삼십년 전 군 소개작전에 따라 소각된 잿더미 모습 그대로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 P43

기차를 타도 완행을 타서 반도 끝까지 가거기서 다시 배를 타고 밤을 지새우며 밤 항해를 해야 하는 수륙천오백리 길. 차멀미, 뱃멀미에 시달리며 소주에 젖고 팔년 만에 찾아가는 고향 생각에 젖어서 허위허위 찾아가야 할 고향이었다. 이것이 내가 평소에 고향을 지척에다 두고서도 지구 끝처럼 아득하게 여기던 이유였다.
그러나 휴가는 단 이틀이고 할아버지 제사가 바로 오늘인 걸 어떻게 하냐. 기차 타며 그렇게 여유작작하게 우회해서 고향에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마치 스튜어디스에게 등을 떠밀린 사람처럼 엉거주춤하며 승강구 계단을 내려왔다. - P44

잿빛 바다 안으로 날카롭게 먹혀들어간 시커먼 현무암의 갑(甲),
저걸 사투리로 ‘코지‘라고 했지. 바닷가 넓은 ‘돌빌레(巖盤)‘에 높직이 쌓여 있는 저 고동색 해초더미는 ‘듬뿍‘이겠고, 겨울 바다에 포말처럼 둥둥 떠 있는 저것들은 해녀들의 ‘테‘이다. 시커먼현무암 바위 틈바구니에 붉게 타는 조짚불, 뭍에 오른 해녀들이 불을 쬐는 저곳을 ‘불턱‘이라고 했지. 나는 잊어먹고 있던 낱말들이심층의식 깊은 데서 하나하나 튀어나올 때마다 남모르는 쾌재를불렀다. 이렇게 추억의 심부(部)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내 머릿속은 고향의 풍물과 사투리로 그들먹해지는 것이었다.
그날은 하루에 두집 제사라 큰당숙 댁에서 종조모 제사를 초저녁에 먼저 치른 다음 모두 큰집에 모였다. 나는 누구보다도 길수형을 만나는 것이 반가웠다. - P45

현금이 귀한 농촌생활이라 돈봉투는 충분히 생색이 나겠지만 도청주사로 있으면서 밀감밭도 꽤 크게 갖고 있는 고모부에게마저 봉투를 내밀자니 좀 쑥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고모부는 한마디 능청 떨어 내 얼굴을 화끈 달게 하기를 잊지 않았다.
"이게 뭐라? 욕을 그만해달라고 와이로 씀이라? 하이고, 나도 이런저런 와이로 다 먹어봤쥬만 처조캐한티 와이로 얻어먹긴 이거처음인디....... - P46

가족장지 매입에 대한 의논을 끝내고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한담을 즐기고 있는데 불현듯 순이順) 삼촌 생각이 났다. 아까부터그분이 보이지 않는게 이상했다. 어릴 때 보면 큰집 제삿날마다부조로 기주떡 구덕을 들고 오던 분이었다. 촌수는 멀어도 서너집건너 이웃에 살아서 큰집과는 서로 기제사에 왕래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던 것이다. 그래서 길수 형과 나는 어려서부터 그분을 삼촌이라고 부르면서 무척 따랐다(고향에서는 촌수 따지기 어려운먼 친척 어른을 남녀 구별 없이 흔히 삼촌이라 불러 가까이 지내는풍습이 있다). 어서 삼촌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할 텐데. 더구나 삼촌은 일년 가까이 서울 우리 집에 올라와 밥을 해주며 고생하다가 불과 두달 전에 내려오셨는데 그동안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퍽 궁금했다. 혹시 몸이 편찮으신 게 아닐까? 나는 길수 형에게 물어보았다. - P47

"겨를없어 너한테는 못 알렸져마는 그 삼춘은 며칠 전에 죽어부러시녜."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우꽈? 순이 삼춘이 돌아가셔서 마씸?"
그분이 돌아가시다니, 나는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불과 두달 전만 해도 잔병치레 없이 늘 정정하시던 분이 아니던가. 나는도무지 믿기지 않아서 좌중을 휘둘러보았다. 작은당숙이 나에게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나도 몰랐는디 형님, 무사(왜) 나헌티는 기별도 안합디가?" - P48

그러다가 결국 당신은 국민학교 근처 일주도로변의 밭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부패한 정도로 봐서 죽은 지 이십일은 좋이 넘어 보였다. 그 밭이 일주도로에서 한밭 건너에 있었음에도 이십일이 넘도록 사람 눈에 안 띈 것은 거기가 후미지고 옴팡진 밭인데다밭담으로 가려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흰옷 아닌 밤색 두루마기를 입고 있어서 더더욱 눈에 안 띄었을 것이다. - P49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내 등에는 남모르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얼마 동안 귀가 먹먹해지고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한평생다산 나이 쉰여섯에 끔찍하게도 스스로 목숨을 끊다니. 평생 일궈먹던 밭을 찾아가 양지바른 데를 골라 드러누워버린 삼촌, 유서도한장 없이 죽었으니 그것은 표면상 아무 뚜렷한 이유가 없는 죽음이었다. 그렇다. 정신이 잘못되어 죽었다는 큰아버지의 판단이 옳을 것이다. 평소의 지병인 신경쇠약이 원인이 되었으리라. - P50

혹시 민기 놈이 희야네 가게에 군것질하러 갔다가 그런 못된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다섯살짜리 숫기도 없는 녀석이 어떻게 그런 당돌한 말을 해? 그러나 ‘밥 많이 먹는 제주도식모‘라고 말했을 리는 없지만 밥 많이 먹는다는 말은 누가 해도 했을 것이다. 이런 의심이 좀처럼 풀리지 않은 채 저녁 늦게 돌아온 아내를 맞고 보니 자연히 말다툼이 벌어졌다. 내가 전에 없이치를 떨며 화를 내는 꼴을 보고 놀랐던지 아내는 결혼 후 처음으로내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나는 격앙된 어조로, 시부모 없어 시집살이를 면하더니 시댁 어른을 대하는 게 도무지 버릇없다고 질타했던 것이다. 하여간 아내가 그런 말을 했고 안했고 간에, 그날밤 나는 아내가 순이 삼촌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내 딴에는 톡톡히 보여준 셈이었다. - P53

그날 이후 나는 여태 막연히 기피증 현상으로만 나타나던 고향에 대한 선입견을 대폭 수정하기로 했다. 삼촌의 존재가 나에게 늘고향을 의식하게 해준 셈이었다. 서울생활 십오년 동안 한번도 써보지 못하고 묵혀두었던 사투리도 쓰기 시작했다. 고향말은 주로삼촌하고 얘기할 때만 썼지만 민기 놈에게도 사투리를 꽤나 많이가르쳐주었다. 그렇다. 나는 내 아들이 허여멀끔한 아내를 닮아 빈틈없이 서울내기가 되어가는 것이 딱 질색이었다. 에미를 닮아선지. TV를 너무 봐선지, 다섯살 나이에 벌써 안경을 써야 할 지경으로 눈이 나쁜 녀석, 아내는 피아노를 가르쳐줄 계획이지만 나는 녀석에게 투박한 고향 사투리를 가르치고 싶었다. 아들놈마저 제 애비의 고향을 외면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 서울말 일변도의 내 언어생활이란 게 얼마나 가식적이고 억지춘향식이었던가. 그건 어디까지나 표절 인생이지 나 자신의 인생은 아니었다. - P54

또 하루저녁은 늦은 저녁상을 혼자 받는데 삼촌이 상을 들여다놓고 얼른 부엌으로 쫓아가더니 석쇠를 들고 왔다. 웬일인가 했더니 삼촌은 그 생선 껍질이 눌어붙은 석쇠를 보이면서 밥상에 오른구운 생선이 부스러진 이유를 해명하는 것이 아닌가. 생선이 석쇠에 들러붙어서 부서진 것이지 당신이 입질해서 그 모양이 된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왔다. 왜 생선이 부서졌느냐고 누가 묻기라도 했단 말인가. 왜 묻지도 않았는데 그런 자격지심이 생겼을까? 당신의 결벽증은 정말 지독한 것이었다.
결국 나는 완전히 손들고 말았다. 오해를 풀어드리려고 얼마나진력을 다했던가. 그러나 순이 삼촌은 완강한 패각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꼼짝도 않고 막무가내로 우리를 오해하는 것이었다. 그오해는 증오와 같이 이글이글 타는 강렬한 감정이었다 - P56

그러나 사위가 찾아와 같이 내려가재도 순이 삼촌은 웬일인지싫다고 고집을 세웠다. 애초에 마음먹은 대로 남의집살이 일년을다 채우고 내려가겠노라고 했다. 우리 내외와 원만치 못하게 지내온 푼수로 봐서는 미련 없이 훌훌 떠나버릴 것 같은 분이 그냥 눌러 있겠다니 우리로선 참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사람 구하기 어려운 때라 아쉬운 생각에서가 아니라, 우리를 그토록 오해했으면서도 딱 잘라 매정하게 돌아서버리지 않는 그 마음 씀이 더없이 고맙게 여겨졌다. 아마 순이 삼촌 자신도 시간을 두고 오해를 풀고 가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 P57

아무래도 장모를 두고 가는 것이 걱정이라고 했다.
그의 속삭이는 말로는 순이 삼촌은 심한 신경쇠약 환자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환청 증세까지 있어 시골에 있을 때도, 한 적이 없는말을 들었노라고, 보지도 않은 흉을 봤다고 따지고 들기를 잘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밥 많이 먹는 식모‘라는 것도, 우리에게 품은오해도 모두 환청 때문에 생긴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 P58

당신은 1949년에 있었던 마을 소각 때 깊은 정신적 상처를 입어, 불에 놀란 사람 부지깽이만 봐도 놀란다는 격으로 군인이나 순경을 먼빛으로만봐도 질겁하고 지레 피하던 신경 증세가 진작부터 있어온 터였다 - P58

순이 삼촌은 사위를 홀로 내려보낸 뒤 우리 집에서 석달 가까이더 지냈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당신은 오해를 풀어주기는커녕 오히려 새로운 오해를 자꾸 만들어 보태가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당신은 끝내 일년을 다 못 채우고 고향에 내려온 것인데 내려온 지 한달도 못되어 이 일이 발생했으니, 나로서는 일말의 가책을 안 느낄 도리가 없었다. 아니, 양심의 가책이라니, 내가 무슨 잘못이 있나. 나도 골치를 썩이며 당신에게 꽤 하노라고 하지 않았던가. 당신은 한마디로 불가항력이었다. 그럼에도 결과론으로 따져순이 삼촌의 서울생활이 여의치 못했으리라고 짐작하고 있을 친척어른들을 마주 대하기가 참으로 면구스러웠다. - P59

그 시간이면 이집 저집에서 그 청승맞은 곡성이 터지고 거기에 맞춰 개 짖는 소리가 밤하늘로 치솟아오르곤 했다. 한날한시에 이집 저집 제사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이날 우리 집 할아버지 제사는 고모의 울음소리로부터 시작되곤 했다. 이어 큰어머니가 부엌일을 보다 말고 나와 울음을 터뜨리면 당숙모가 그뒤를 따랐다. 아, 한날한시에 이집 저집에서 터져나오던 곡소리. 음력 섣달 열여드렛날, 낮에는 이곳저곳에서 추렴 돼지가 먹구슬나무에 목매달려 죽는 소리에 온 마을이 시끌짝했고 오백위(位) 가까운 귀신들이 밥 먹으러 강신하는 한밤중공목이면 슬픈 곡성이 터졌다. - P60

자정 넘어 제사시간을 기다리며 듣던 소각 당시의 그 비참한이야기도 싫었다. 하도 들어서 귀에 못이 박힌 이야기. 왜 어른들은아직 아이인 우리에게 그런 끔찍한 이야기를 되풀이해서 들려주었을까? - P61

그것들은 시체가 널린 보리밭을 까맣게 뒤덮고 파먹다가심심하면 겨울 하늘로 떼 지어 날아오르며 세찬 날갯짓으로 하늬바람 타기를 잘했다. 그 당시 일주도로변에 있는 순이 삼촌네 발처럼 옴팡진 밭 다섯개에는 죽은 시체들이 허옇게 널려 있었다. 밭담에도, 지붕에도, 듬뿍눌에도, 먹구슬나무에도 어디에나 앉아 있던까마귀들. 까마귀들만이 시체를 파먹은 게 아니었다. 마을 개들도시체를 뜯어 먹고 다리 토막을 입에 물고 다녔다. 사람 시체를 파먹어 미쳐버린 이 개들은 나중에 경찰 총에 맞아 죽었지만, 그 많던 까마귀들은 모두 어디 갔을까? 아까 낮에 까마귀가 눈에 안 띄길래 길수 형에게 물어보았지만 그도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농작물에 큰 피해가 될 정도로 그렇게 번성하던 까마귀들이 사오년 전부터는 웬일인지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 P61

이렇게 순이 삼촌이 단서가 되어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그 흉물스럽던 까마귀들도 사라져버리고, 세월이 삼십년이니 이제 괴로운기억을 잊고 지낼 만도 하건만 고향 어른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오히려 잊힐까봐 제삿날마다 모여 이렇게 이야기를 하며 그때 일을명심해두는 것이었다. - P62

"연설 들으러 나오시오! 한사람도 빠짐없이 국민학교 운동장으로 모이시오!"
보통 때 같으면 순경이나 대동청년단원 몇사람이 다니면서 사람들을 불러모았는데 이번엔 어쩐 일인지 철모에 총까지 든 군인들이 수십명 퍼져다니면서 득달같이 재촉하는 것이 뭔가 심상치 않았다. 심지어는 총검으로 창문을 열어젖히면서 병든 노인까지 내몰았다. 좀 불안한 생각이 없지도 않았지만, 그 전해 5·10선거 무렵에도 그렇게 득달같이 사람들을 불러모은 적이 있어서 그때처럼무슨 중요한 연설이 있는가보다라고만 생각했다 - P64

"아명해도(아무래도) 낌새가 이상해연 나도 어머님을 찾아 뫼시고 군인 가족들 틈에 섞연 나갔쥬. 매부가 군인이니 직계가족은 아니지만 다행히 이장 강씨가 눈감아주언 넘어갔죠." 큰아버지의 말이었다.
"형님, 그것 봅서, 누이동생을 나한티 팔아 무신 손핼 봅니까? 이북 것한티 시집간다고 결사반대허더니" 하고 고모부가 너털웃음을 웃었다. - P66

"불났져! 마을에 불났져!"
화들짝 놀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 학교 돌담 울타리를 기어올랐다.
"불이여, 불!" "불났져, 불났져!" "아이고 아이고!" 운동장 사방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회오리바람처럼 일어나 하늘을 찔렀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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