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경성감옥이 서대문감옥으로 개칭되었는데, 그 전 해에는 데라우치 마사타케(寺) 총독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안명근(安根, 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 김구(金九) 선생 등이 각각 종신형과 십오년 징역형을 언도받고 입감된다. - P130
김구 선생이 입감되고 일 년 후인 1912년 6월에는 대량 검거의 회오리가 불어닥쳐 감옥은 만원을 이룬다. 이른바 ‘백오인사건‘이라 불리는 신민회(新民會) 사건, 일제는 총독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혐의를 씌워 전국에서 무려 칠백여 명에 달하는 애국지사들을 무더기로 잡아 가두었던 것이다. 이 가운데 대부분은 경무총감부에서 악형을겪은 끝에 무혐의로 풀려나고, 백스물한 명만이 기소되어 서대문감옥에 수감된다. 일심(一審)에서 윤치호(尹致昊), 양기탁(梁起鐸), 이승훈(李昇薰) 등 여섯 명은 징역 십년, 옥관빈(玉觀彬) 등 열일곱 명은징역 칠 년, 이덕환(李德煥) 등 서른여덟 명은 징역 육년, 오대영(吳大泳) 등 마흔네 명은 징역 오년을 언도받았고, 이창식(李昌植) 등 열여섯 명은 무죄 판결을 받아 그 해 9월 28일 서대문 옥문을 나갔다. 무죄 판결을 받은 열여섯 명을 제외하고 백다섯 명이 남았다 해서 백오인사건‘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이들 백다섯 명도 이듬해 3월 20일 열린 경성복심원(京城覆審院) 항소심에서 윤치호 등 주범으로 몰린 여섯 명만이 오륙 년으로 확정되었을 뿐 나머지 아흔아홉 명은 무죄로 나왔으며, 주범이라던 여섯 명도 1915년 2월엔 모두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 P130
삼일운동 관련 수감자들에 대한 재판은, 내란법이 적용되었던 일심이 파기되는 등 번복을 거듭하다가 삼 년이 채 못 돼 모두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 소용돌이 속에서 양한묵지사가 1919년 5월 26일옥사했으며, 유관순1920년 10월 12일 서대문감옥 안열사도에서 끝내 눈을 감았다. 유 열사는 당시 이화학당 일학년생, 열여섯 살의 어린 나이로 충남 천안군 아우내(竝川)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주도하다 체포돼 공주법원에서 칠 년형을 선고받고 불복, 공소하였으나, 경성복심원에서 역시 칠년형을 언도받고 복역 중이었다. - P133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에게 폭탄을 던져 암살을 기도했던 강의사는 바닥 나무판(가로 백십이 센티미터, 세로 이십사 센티미터)에 ‘姜宇奎 四二五三 一九二0 十一二九‘ 라고 자신의 이름과 처형된 연월일을 단기와 서기로 구분해 정확히 새겨 놓았다. 특히 날짜를 새긴 ‘二九‘는 급히 쓴 흔적이 엿보여 강 의사가 이름과 연월은 미리 새겨두었다가 처형 직전 날짜만 따로 새겨 넣은 것으로 추정됐다. 강의사는 사형집행 직전, 일인 검사가 "감상이 어떠냐"고 묻자, "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단두대 위에 봄바람만이 불어올 뿐. 이 몸은 나라 없는 자이니 어찌 무슨 생각이 있으리오)" 이라고 써 주었다. 강 의사의 나이 육십육 세였다. - P134
1923년, 서대문감옥이 서대문형무소로 개칭된 후에도 송학선(宋學先) 의사가 사형을 당했고, 김동삼(金東三)열사가 옥사했으며, 안창호(安昌浩) 지사 등이 옥고를 치렀다. 송 의사는 1926년 4월 20일 사이토총독을 금호문(金虎門) 앞에서 암살하려다 실패, 피검되어 다음 해 5월19일 처형됐다. - P134
독립투사나 열사, 애국지사나 사상가들에 대한 체포, 신문, 수감에일제는 악랄한 고문과 혹독한 수형생활을 강요했다. 특히 독립투사, 열사들에 대해서는 병보석도 허용치 않았고, 병감(病監)으로 옮겨 주지도 않아 감옥에서 병사한 사람이 많았다. 간수에게 반항하는 경우 참혹하게 구타를 당해야 했고, 햇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 암실 독방 즉중징벌감(重懲罰監)에 수감돼야 했다. - P135
일제의 경찰은 송남헌, 홍익범, 허헌을 비롯, 보성중 교사였던 문석준(文錫俊), 민중의원 의사 경기현(景棋鉉), 신문기자 황인철(靴哲) 등 지식인 백오십여 명을 붙잡아들여 밤낮없이 끔찍한 고문을 가했다. 이들은 몇 번씩이나 산송장이 되어 감방으로 업혀 오곤 했는데. 이 중 홍익범은 사경에 빠져 형식상 병보석으로 출감했으나 곧 숨을 거두고 말았고, 문석준 등 여섯 명도 끝내 옥사를 면치 못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끝내 민족지도자들의 이름은 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 P137
송남헌 씨가 수감된 1943년 5월의 서대문형무소 미결감 2동에는 5호 감방에 여운형(呂運亨), 6호 감방에 조선공산당의 김태준(金俊), 16호 감방에는 보성전문 교수(뒷날 북한에서 사법상까지 지냈다) 최용달(崔容達), 20호 감방에는 허헌 등 당시의쟁쟁한 사회주의 사상가들이 수용돼 있었다. - P137
그 무렵 유난히 뚱뚱한 몸집의 사상범 하나가 ‘소제‘ 노릇을 하고 있어 재소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함북 갑산(甲山)에서 경찰주재소를 습격하여 박살을 낸, 이른바 ‘보천보사건‘의 주역인 박금철(朴金)이었다. 함흥재판소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서대문형무소로 이감, 복역 중이었다. 박금철은 뒷날 북한에서 부수상까지 지냈으나 김일성에 의해 숙청을 당하고 말았다. - P137
‘국회프락치사건‘의 두목격인 김약수(金若水)도 해방 전 한때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적이 있었다. - P138
서울형무소(육이오 직전 개칭)의 형무관들은 인민군 탱크가 형무소에들이닥친 28일까지도 그대로 직장을 지키고 있었다. 이 바람에 많은형무관들이 희생을 면치 못했을 것은 불문가지 (不問可知). 재소자들역시 후송되지 못해 인민군에 의해 참변을 당한 숫자가 적지 않았다. 또한, 인민군이 서울을 장악하기 시작한 6월 28일, 형무소 문을 밀치고거리로 뛰쳐나온 좌익수들은 우익 인사들에 대해 무차별 보복살육을자행하기도 했다. - P141
사일구, 오일륙 등과 같은 격변기일수록 정치인, 고위관리, 군장성, 재벌 등 거물급 인사들로 인해 서대문형무소는 붐비게 마련이었다. 사일구 직후엔 부정선거의 원흉으로 지목받은 최인규(崔仁圭) 내무장관, 발포 명령자인 경무대 경비대장 곽영주(郭永周), 이재학(李在鶴) 국회부의장, 정치깡패 이정재(李丁載), 임화수(林和秀) 등이 이곳에 들어앉아야 했고, 오일륙 직후 서울교도소로 개칭될 무렵에는 민주당정부의 장·차관을 비롯한 행정부·정당의 요인들, 부정축재자로 몰린기업인들, 이한림(李翰林) 장군 등 반혁명사건 연루자들이 대거 투옥되어, 수감자의 중량이라는 측면에서는 형무소 역사상 구감기록을 또한번 갱신해야 했다. - P141
이 교수형장에서 강우규 열사를 비롯한 많은 애국지사, 그리고 조봉암(曹奉岩), 최인규, 이정재, 육영수(陸英修) 여사 저격범 문세광(文世光), 십이륙의 주역 김재규(金載圭)같은 시대적 인물들, 거물간첩으로 탈옥을 기도했던 김종태(金種泰), 위장 귀순간첩 이수근(李穗根), 노동당 부부장 황태성(黃泰成), 유괴범 주영형(朱永炯), 강력범고재봉(高在奉), 김대두(金大斗), 박철웅(朴鐵雄) 등이 최후를 마쳤다. 이곳에서 처형된 사형수의 정확한 숫자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1960년대 전국에서 집행된 사형집행자의 숫자를 참고로 살펴보면, 1963년에 스무 명, 1964년에 열네 명, 1965년에 스물한 명, 1966년에열세 명, 1967년에 열일곱 명, 1968년에 스물여섯 명으로 나타나 있다. (신진규, 「형사정책』 2, 법문사, 1974) - P143
서울구치소, 아니 서대문형무소는 1987년 11월, 삼 년 만에 완공을본 새 집을 찾아 경기도 시흥군 의왕읍 포일리로 이사함으로써 칠십구년에 걸친 다사다난했던 서대문시대의 막을 내렸다. - P143
정부가 이백억 원의 예산으로 신축한 시흥의 새 구치소는 부지 십삼만여 평에 건평 만육천여 평, 열여덟 개 동(棟) 팔백팔십오 실(室)로모두 삼천오백 명을 수용할 수 있다. 격세지감이랄까. 새 구치소는 감방마다 카펫을 깔았고, 수세식 변기와 개인별 사물함까지 갖추어 수감자들이 이용하기에 편리하도록 했다. 아직은 아시아지역 형무소 중에선 최고의 시설이라고 한다. - P143
서대문형무소는 한마디로 민족저항과 민족이 집약된 역사의 현장. 구한말 일제시대엔 민족운동, 애국운동, 독립운동, 해방 이후엔 좌우익투쟁, 골육상쟁, 여러 차례의 정변, 반독재 민주화운동 등 우리의현대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의 현장이기도 하다. - P144
김동삼 열사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국내에 잠입했다가 밀정의 밀고로 붙잡혀 옥사했는데, 일제의 보복이 두려워 아무도 김 열사의 시신을 찾아 가는 사람이 없자,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선생이 "내가 평생에 그분의 시체만이라도 볼 수있다면, 그 이상의 영광이 어디 있겠느냐"고 하면서 혼자 나서 시체를찾아다 안장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어려 있는 곳도 서대문형무소다. - P144
숱한 민족의 수난사를 이젠 안으로만 간직한 채, 서대문시대 그 칠십구 년의 역사를 마감한 서대문형무소, ‘한국의 바스티유‘로 불리기도하다가 이제는 퇴역한 서울구치소, 아니 서대문형무소는 그러나 오늘, 아직은 철문에 빗장을 지르고 텅 빈 채로 침묵에 싸여 얼룩진 벽돌담과감시탑만으로 말없이 오가는 시민들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 P146
나명순(1942-2004) 선생이 이 글을 쓴 1988년 이후, 서울시는 서대문 독립문로터리에1992년 8월 15일 ‘독립공원‘을 개원했으며, 1998년에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개관했다. 공원 내에는 한옥 목조건물로 복원한, 순국선열들의 위패봉안과 전시실로 사용하고 있는 ‘독립관‘이 있으며, 순국선열들의 이름이 새겨진 ‘추모비‘와 그 투쟁을 형상화한 모습이 부조된 ‘순국선열추념탑‘이 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는 중앙사와 9-13사, 나병환자 수감동인 한센병사 등 일곱 개의 건물과 사형장을 보존하고, 보안과 청사를 전시실로 꾸며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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