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은행 효자동지점 삼거리 
우리은행 효자동지점 건물은 서촌의 랜드마크 중 하나이다. 은행 지점치고는 대단히 중후한데, 이는 전신인 상업은행 시절엔 청와대의 주거래 은행이어서 여느 지점과는 격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 P77

자교교회  
통인시장 맞은편 창성동에 있는 자교교회는 미국인 여성 선교사 캠벨이 내자동배화학당 기도실에 처음 설립한 뒤 1922년 현재의 터전에 2층 양옥의 붉은 벽돌집으로 세운 것이다. 어느덧 100년을 맞이한 오래된 교회다. - P81

신교 옛 모습  
신교동의 ‘신교‘는 선희궁 터에 있던 다리 이름이다. 영조 40년에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 생모인 영빈 이씨의 사당으로 선희궁을 지으면서 새 다리를 놓고 신교라 불렀다. 1920년 개천 복개 때 사라지고 지금은터만 남았다. - P82

 국립서울농학교 내 선희궁 터  
선희궁은 훗날 칠궁으로 합사되었지만 사당 건물 자체는 국립서울농학교 내에 그대로 남아 있고 이름도 선희궁 터로 표시돼 있다. - P83

천막교실  
한국전쟁 당시 부산 초량동 항도초등학교에 설치된 천막교실 모습이다. 내가 다니던 청운초등학교 건물 또한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교실이 부족했기 때문에 나는 2학년 때 국립서울농학교 안에 설치된 이런 천막학교에서 공부했다. - P84

국립서울맹학교  
신교동 안동네에는 국립서울농학교뿐만 아니라 국립서울맹학교도 있다. 청각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로 서울맹아학교라고 불리다가 2002년에 국립서울맹학교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P85

청운초등학교 
청운초등학교는 제법 명문이었다. 나와 같은 37회 동창생으로는 개그맨 전유성과 여성 최초의 지방법원 부장판사였던 이영애 전 판사가 있다. - P86

동창생으로는 카페 ‘학교종이 땡땡땡‘의 주인장이기도 한 개그맨 전유성이 맹활약을 하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법조계에서 유리천장을 뚫고여성 최초로 지방법원 부장판사와 사법연수원 교수가 된 이영애 전 판사도 동창이다. 6학년 때는 모의고사가 끝나면 성적순으로 방(膀)이 붙었는데 나는 항상 6반 이영애와 9반 이영애 사이에 있어서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우연히 그를 만났을 때 물어보았더니 37회 동기는 맞지만몇 반이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 P87

겸재 정선의 <청풍계도> 
청풍계는 청운초등학교 후문에서 조금 더 올라가다 왼쪽으로 난 가파른 비탈길에 있는 그윽한 골짜기였다. 여기에는 김상용의 저택이 있었는데 선조가 맑을 청(淸)과 바람 풍(風)을 써서 청풍(淸風溪)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 P89

원래 이름은 푸를 청(靑)과 단풍 풍(楓) 자의 청풍계(楓溪)였으나 선조가 맑을 청(淸)과 바람 풍(風)을 써서 청풍계(淸風溪)라는 이름을 내린후 바뀌었다. 
청풍계 더 가까이에는 훗날 우암 송시열이 이 뜻을 기려 주희의 글씨를 집자해 새긴 ‘백세청풍(百世淸風)‘ 이라는 암각 글씨(청운기 52-111번지)가 지금도 남아  있다. - P91

김상용의 아우 김상헌은 칠궁 담장과 맞대고 살면서 이 일대를 노래한 「근가십영」에서 ‘우리 형님이 청풍계 태고정을 지었다‘고 했다. 김상헌의 손자 김수항을 비롯한 수(壽)자 돌림 5명과 증손자 김창집을 비롯한 창(昌) 자 돌림 6명이 모두 출세하여 이 5 6창‘의 안동 김씨가문은 ‘장동 김씨‘라고 따로 불리었고, 김창집의 4대손 김조순이 순조의 장인이 되면서 조선 최대의 세도가문을 이루었다. 김상헌의집터인 칠궁 담장 밖 효자동 무궁화동산(효자로 97 건너편)에는 김상헌 시비가 세워져 있다. - P92

청운동 일대에는 조선시대 명사들이 많이 살았다. 청운초등학교 자리에서는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태어나  자하문로 길가(청운동 123번지)에표지석이 놓여 있다. 경기상업고등학교 교정에는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의  집터가 있다. 성수침의 아들이 우계(牛溪)  성혼(成渾)이니 단짝으로 유명한 송강과 우계가 어린  시절 같은 동네 살면서 얼마나 정을 나누었을까 안 보아도 본 듯하다. - P92

경복고등학교 뒤편 창의문로 큰길 건너편 북악산 기슭에는 중종 때 남곤(南袞)이 살던 집이 있었다. 남곤은  심정(沈貞)과 함께 기묘사화를일으킨 장본인으로  벽초의 『임꺽정』에서 무수한 흉떨림을 당했다. 이들을 미워하여 작은 새우로 만드는 젓갈을 ‘곤쟁(袞貞)이 젓‘이라고 하여 소인배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는 인물이다. - P93

정선의 <대은암도> 
대은암은 기묘사화를 일으킨 남곤의 집에 있던 큰 바위로, 승지가 된 남곤이업무에 바빠 함께 어울릴 수 없게 되자 그의 친구 박은이 크게 은거했다는 뜻으로 ‘대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전한다. - P94

그러나 이 설은 재고될 여지가 있다. 근래의 역사학계 연구를 보면 기묘사화에서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중종 본인이었다. 남곤의 경우 실제로는 김종직의 일파로 훈구파이면서도 사림파와 가까웠던 인물이고,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기묘사화 당시에도 조광조의 처벌을 주장하긴 했지만 사사에는 반대하고 그 죽음에 슬퍼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 P94

동농은 청풍계 김상용의 후손으로 일찍이 관로에 진출해 1895년 농상공부대신을 지냈다. 갑오경장이 실패한 뒤에는 독립협회의 위원으로선임되어 독립문에 걸려 있는 한자와 한글의 이름패를 쓴 명필이기도했다. 1902년 궁내부특진관을 지낼 때 창덕궁 후원 공사를 차질 없이수행한 공로로 고종이 목재를 하사해 이듬해에 이곳에 백운장(白雲莊)이라는 한옥과 몽룡정(夢龍亭)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 P98

동농 김가진의 장례식
동농 김가진은 상해임시정부에 합류한 지 3년 뒤인 1922년에 세상을 떠났다. 임시정부는최고 원로였던 동의 장례식을 이처럼 성대하게 치렀다. - P99

스스로 충청도 관찰사로 좌천해 지방으로 내려갔고 1908년에는 대한협회 제2대 회장으로 친일단체 일진회를 성토하고 나섰다. 1910년 강제한일합병 후 일제가 예우 차원에서 남작 작위를 수여하여 받았다. - P99

그리고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그해 10월, 동은 73세의 노구를 이끌고 허름한 늙은이로 위장하고서 육로로 몰래 빠져나가 상해임시정부에 합류했다. 병자호란 때 자결한 선원 김상용의 후손다운 애국심과 기개가 느껴지는 망명길이었다. 당시 『독립신문』은 동농의 망명 사실을보도하면서 그가 망명하는 심정을 노래한 한시 2편까지 실었다. (임형택「동농 김가진, 그의 한시」, 『역사비평』 2022년 가을호) - P99

나라가 깨지고 임금도 잃고 사직이 무너졌으되
치욕스런 마음으로 죽음을 참으며 여태껏 살아왔는데
늙은 몸이 상기도 하늘 찌를 뜻을 품어
단숨에 하늘 높이 몸을 솟구쳐서 만리길을 떠났노라 - P100

國破君亡社稷傾
包羞忍死至今生
老身尙有沖霄志
一舉雄飛萬里行

올해(2022)는 등농 서거 100주기가 되는 해이다. - P101

안평대군은 풍류를 좋아하여 부암동 무계정사와 용산 담담정을 지은바 있는데 이곳 수성동에도 별서를 지었던 것이다. 그래서 수성동계곡에서는 친형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낭만의 왕자 안평대군의 자취를 느낄 수 있다. - P111

치마바위에는 중종의 첫 왕비인 단경왕후의 애틋한 전설이 서려 있다. 단경왕후는 좌의정을 지낸 신수근(愼守勤)의 딸로 연산군 5년(1499)에 진성대군과 결혼했는데 그가 왕(중종)이 되면서 자연히 왕비가 되었다. 그런데 왕비가 된지 7일 만에 역적의 딸이라고 폐위되어 궁궐에서쫓겨났다. - P111

사연인즉 아버지 신수근은 권세가문의 명신으로 그의 누이동생은 연산군의 비였다. 일설에는 1506년 연산군을 몰아내는 중종반정의 주모자인 박원종이 신수근에게 넌지시 "누이와 딸 중 누가 더 중하냐고 물어보며 거사에 동참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신수근은 "내가 매부를 폐위하고 사위를 왕으로 세우는 일은 못하겠다"고 거절하자 박원종은 자객을 보내 신수근을 철퇴로 쳐 죽였다. 그래서 단경왕후는 졸지에 역적의딸이 되었다. - P111

단경왕후는 명종 12년(1557) 나이 70세에 세상을 떠나 양주에 있는 친정집 거창 신씨 묘역에 묻혔다. 그후 영조 15년(1739)에 복위됨으로써 새로이 왕릉으로 조성하고 능호를 온릉(溫陵)이라고 했다. 그리고 신수근 또한 복권되어 사람으로부터 고려 말의 정몽주와 같은 충신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 P112

중인 시인인 장혼(張混)도 송석원 곁으로 이사해 집을  짓고 이이엄(而巳嚴)이라 했다. 이후 중인들이 이  일대에 모여들었다. 중인문학을 위항문학(委巷文學),  또는 여항문학(巷文學)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꼬불꼬불한 골목,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를 가리킨다. 양반들은 넓은 집에 살았으나 중인들은 좁은 골목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 P123

벽수산장의 윤덕영 
친일귀족 윤덕영은 나라를 일제에 넘긴 공로로 막대한 하사금을 받아 송석원과 그 일대의 집을 모두 사들이고 벽수산장을 지었다. ‘벽수산장‘이라는 글씨 옆에는 추사가 쓴 ‘송석원‘ 글씨가 흐릿하게 보인다. - P127

"아닙니다. 제가 고맙죠. 오늘 저는 선생님께 크게 배운 것이 있어요.
그건 오거리 길들이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고 그것은 개천을 따라 자연스럽게 난 것이라는 점요. 저는 집만 보았지 길의 특징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었거든요. 사실 저는 인사동길이 S자로 휘었다는 것을 여태 의식하지 못했어요. 제가 느끼는 인간적인 체취가 이 자연스러운 길에서나온다는 것도요." - P137

‘제비‘는 이를테면 이제까지 있었던 가장 슬픈 찻집이요, 또한 이상은 말하자면 우리의 가장 슬픈 동무이었다.

불우하기는 구본웅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쟁 중인 1952년 급성폐렴으로 누하동 이 집에서 46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벗이상을 그린 <친구의 초상> <푸른 머리의 여인> <여인>이라는 주옥같은작품들을 남겼고 그의 예술가 유전자는 후손에게 전해져 외손녀 강수진이 희대의 발레리나가 되었다. - P143

필운대는 인왕산 아래에 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어렸을때에 대 아래에 사는 원수 권율의 집에 처가살이하였으므로 자신의 호를) 필운이라 불렀다. 석벽에 새긴 ‘필운대‘ 세 글자는 곧 백사의 글씨다. 대곁 인가에 꽃나무를 많이 심었기 때문에 경성 사람들이 봄철 꽃구경할 곳으로 반드시 먼저 여기를 꼽았다. - P144

인왕산은 2018년 5월부터 완전 개방되어 지금은 누구나 자유롭게 등반할 수 있게 되었다. 청와대의 경호·군사 목적 시설물이 배치돼 일반인접근이 부분적으로 통제된 인왕산 지역을 완전히 개방하기에 앞서 인왕산의 폐쇄적인 군사시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함께 검토하기 위해2018년 3월 10일 문재인 대통령과 나, 건축가 승효상이 함께 등반에 나섰다. - P147

이때 본래 초소란 사방 경계를 하기 가장 좋은 위치에 지은 것이기 때문에 이곳을 전망대로 활용하는 것이 역사성도 살리는 방안이라고 건의하여 지금 등반객들이 가장 애용하는 ‘초소책방‘이 탄생했다. - P147

중학교 때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큰 바위 얼굴」을 배울 때 소년 어니스트가 바라보며 살았다는 얼굴바위보다 우리 인왕산의 부처바위가 더 미덥고 멋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미술사를 전공하면서 인왕仁王)이 부처님 세계의 수호상임을 알게 되면서부터는 우리 부처바위가 서울을 수호하고 나라를 지키는바위라고 생각했다. 거기에다 산자락에 서울성곽이 둘러 있어 더 믿음이 갔다. - P149

북촌 1경 창덕궁 전경: 돌담 너머로 창덕궁의 전경이 잘 보인다.
북촌 2경 원서동 공방길: 창덕궁 돌담길 따라 빨래터까지 올라가는 길.
북촌 3경 가회동 11번지: 한옥들과 전통문화 체험 공방이 있다.
북촌 4경 가회동 31번지 언덕 기와지붕들 너머의 북촌 조망.
북촌 5경 가회동 골목길(내리막): 한옥들이 맞대어 빼곡히 늘어서 있다.
북촌 6경 가회동 골목길(오르막) 한옥 돌담들이 길게 뻗어 있다.
북촌 7경 가회동 31번지 : 1930년대에 지은 한옥밀집지구이다.
북촌 8경 삼청동 돌계단길: 경복궁 인왕산이 조망되는 돌층계길. - P152

북촌이라고 하면 우리는 막연히 조선왕조 대대로 내려오는 양반 동네를 떠올리기 쉽다. 북촌이라는 말의 유래 때문이다. 예부터 한양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청계천과 종로를 중심으로 남쪽 남산 아랫동네는 남촌, 북쪽 동네는 북촌이라고 불러왔다. 매천 황현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고 부르며 노론이 살고 있고, 종각 남쪽을 남촌이라고 하는데 소론, 남인,  북인 삼색(三色)이 섞여살았다. - P154

근대의 지성들이 여기에 많이 모여 살면서 북촌에서는 개화사상이일어나고, 갑신정변이 모의되었고, 동학·대종교·불교의 종교운동이 일어났고, 3·1운동 준비가 이루어졌으며, 『동아일보』 창간되고, 진단학회 · 조선어학회 · 조선민속학회 등이 창립되었다. 해방공간에서 암살된대표적인 정치인인 우익의 송진우, 중도좌파의 여운형이 살았으니 북촌은 우리 개화기와 근대 지성의 심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 P155

왜 공공기관 건물의 정원은 다 이렇게 천편일률적으로 되었는가를조사해보니 이것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관에서 건축비 예산을 잡을 때조경 비용을 아주 낮게 책정하고 또 관급공사는 이렇게 해야 뒷말이 없어 ‘공무원표‘로 귀착된 것이라고 한다. 이를 일컬어 돌과 영산홍과 회양목으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돌·영·회‘라고 한다나. - P158

박영효는 1931년 이광수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개화파의 신사상은 모두 내 일가인 박규수대감 집 사랑방에서 나왔소.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그리고 나의 형박영교가 모두 재동 박규수 대감 집 사랑에서 모였지요. - P159

재동 백송을 보고 헌법재판소를 나오면 바로 재동초등학교 네거리다.
재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1453년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일으킨 계유정난 때 황보인 등 단종을 보필하던 대신들을 이곳으로 유인해 참살하면서 흘린 피가 내를 이루므로 동네 사람들이 집 아궁이에 있던재를 가지고 나와 길을 덮었다고 해서 잿골 (灰洞)이라 부르던 것이 한자명으로 재동(洞)이라고 표기된 것이라고 한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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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토박이
1993년, 서울시는 정도600년 사업의 일환으로 ‘서울토박이‘를조사했다. 선정 기준을 ‘선조가 1910년 이전의 한성부에 정착한 이후, 현서울시 행정구역 내에 계속 거주해오고 있는 시민‘으로 확정해 조사한바, 서울시민 1,100만명 중에서 해당자는 오직 3,564가구, 1만 3,583 명에 불과했다.
- P59

나는 그중 한 명인 서울토박이다. 내가 중학생이던 1960년대에도 사대문 안 서울 알토박이를 조사한다며 윤보선 대통령도 했고 누구도 했으니 해당되는 사람은 신고하라고 했다. 그때 큰아버지께 우리 집안도신고하자고 했더니 "그런 거 신고하면 주민세만 더 내라고 할지 모르니쓸데없이 신고할 생각하지 마라" 하셔서 못했다. 당시 결과는 모르지만 아마도 몇 천명에 불과했을 것이다. - P60

갑자기 서촌이라는 이름이 등장한 것은 북촌의 가회동 한옥마을이요즘 말로 ‘핫플레이스‘로 떠오르자 여기에도 한옥마을이 있다는 것을내세우기 위해 서촌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이후가 분명하다. 더 정확히는 북촌의 시가가 올라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 생기고 들어갈 여지가 좁아지자골목골목 전통마을의 분위기가 살아 있는 이쪽으로눈길을 돌리면서부터 생긴 이름이다. - P61

젠트리피케이션

gentrification

낙후된 구도심 지역이 활성화되어 중산층 이상의 계층이 유입됨으로써 기존의 저소득층 원주민을 대체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https://naver.me/Ft8uF08j

인왕산 아랫동네 서촌 
조선시대에 서촌은 한양의 서쪽인 서소문 정동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요즘은 인왕산 아랫동네를 서촌이라고 부른다. 필운대에서 백운동까지 인왕산 자락 아랫동네를 옛날엔 장동이라고 불렀다. - P62

박수근의 <아기 업은 소녀>는 생활은 가난했지만 따뜻한 온정이 넘치는 이 시절 골목 풍경을 그린 것이다. 그리고 그 소녀의 마음을 가장 잘표현한 시는 이오덕 선생이 펴낸 『일하는 아이들』에 실려 있는 문경 김룡초등학교 6학년 이후분 어린이의 「아기 업기」이다.

아기를 업고
골목을 다니고 있자니까
아기가 잠이 들었다.
아기는 잠이 들고는
내 등때기에 엎드렸다.
그래서 나는 아기를
방에 재워놓고 나니까
등때기가 없는 것 같다. - P69

선생님은 비록 이름을 세상에 널리 펼치시지 못했지만 이 세상의속물적인 부와 명성을 뛰어넘는 더 큰 사도(道)를 이루셨습니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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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엄마 손을 잡고 따라온 한 중학생이 내게 바짝 붙어 다니면서 마치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를 듣듯 재미있어하는 것이었다. 인왕산 수성동계곡에서 잠시 쉬어 갈 때도 내 곁에 붙어 앉아서는 무슨 얘기라도 해주려나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스스로도멋쩍었던지 손에 든 귤을 까서 권하는 것이었다.
"고마워요. 근데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요?"
"선생님 어렸을 때 얘기가요."
"실례지만 몇 살이세요?"
"선생님과 띠동갑이에요." - P5

하나는 『천변풍경』의 박태원이 소설 기법으로 받아들였다는 고현학(考現學, modern-ology)이다.  고현학은 과거의 유물을 연구하는 고고학(考古學,  archae-ology)의 방법론을 현대 생활사에 적용하는  민속학적 방법론으로 일본의 곤 와지로(今和次郞)가  관동대지진(1923) 이후 도쿄의 주거생활을 연구하면서 내건 개념이다. 이런 고현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서울 묵은 동네에 대한 나의 기억과 서술은 그 나름의 의의를 지닐 수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P6

또 하나는 서성(書聖)으로 일컬어진 왕희지(王羲之)가  자기 집 정원인 난정(蘭亭)에서 벗들과 한차례 계회(契會)를 베풀고 그 모임을 기념하여 난정계서(蘭亭契序) 를  쓰면서 말한 마지막 구절이다.
후대 사람이 지금을 보는 것은 마치 지금 사람이 옛날을 보는 것과마찬가지일 것이니 (・・・) 후대에 이 글을 펼쳐보는 사람에게는 나름의감회가 있지 않겠는가.
後之視今 亦猶今之視昔(…)
後之攬者 亦將有感於斯文 - P6

북악산
서울의 주산, 그 오랜 금단의 땅 - P11

서울의 주산, 북악산
북악산(北岳山, 명승 제67호)은 높이 342 미터의  화강암 골산으로 서울의 주산(主山)이다. 백악산(白岳山)이라고도 불리며 전체 면적은 약 360만제곱미터(약 110만평)이다. 산줄기의 흐름을 보면 백두산에서 시작된 백두대간의 중간지점에 있는 금강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나온 한북정맥(광주산맥)이 북한산을 거쳐 북악산에서 문득 멈추고 양팔을 벌린 형상이다. - P11

서울이 조선왕조의 도읍이 되어 도시계획을 세울 때 경복궁 북쪽 담장 밖 북악산 지역은 한양의 지세를 보호하기 위해 일반인 출입을 금지시켰다. 수도 한양의 방위체제상 도성의 북문인 숙정문과 북문인 창의문은 평소에는 닫아두고 필요할 때, 이를테면 창의문은 군사 이동이 있을 때, 숙정문은 가뭄이 심해 기우제를 지낼 때만 열어두었다. 당시 한양의 인구가 10만 명 정도였기 때문에 공간 운영에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 P14

백악사
북악산은 금단의 구역이었기 때문에 동쪽삼청동과 서쪽 청운동 사이에는 오직 백악사(白岳祠)라는 사당만  있었을 뿐 어떤 건물도 축조되지 않았다. 백악사는 북악산의 산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당이다. - P14

북악산은 진국백(鎭國伯)으로 삼고, 남산은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삼아 경대부와 사서인(士庶人) 모두 제사를 올릴 수 없게 하였다.

실록에서 말하고 있는 백악사는 북악산 정상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아직 명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북악산 정상에서는 조선 초기 기와편이 다수 수습된 바가 있다. - P15

조선왕조는 국난을 수습하면 그때마다 공신을 책봉했다. 공신에게 주어지는 혜택은 엄청난 것이었고 자손에게 상속되었다. 그러니 나라에공을 세우라는 것이었다. 공신책봉은 태조 때 나라를 세운 공이 있는개국공신부터 영조 때 이인좌의 난을 수습한 분무공신까지 모두 28번(삭제된 것을 제외하면 24번) 있었고 여러 형태의 공신회맹제가 열렸다. - P16

이 영빈관 건물은 박정희 시대 우리 관공서 건물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정면정관의 권위를 앞세우면서 골조가 콘크리트든 석조든 전통 지붕을 얹어 한옥의 이미지를 살리겠다는 뜻이 들어 있는데 결과적으로갓 쓰고 자전거 타는 어색함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 때문에 건축가가누구인지 알 수도 없고 또 알 필요도 없이 권위주의 시절의 자취만을 볼수 있을 뿐이다. - P37

결국 나는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기자들에게 공표했다. 그때 내 개인 생각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관저만은 옮기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우선사람이 사는 생활공간으로서 부적합하고 ‘풍수‘를 보아도 관저는 옮겨야 한다고 답했다. 이후 나는 청와대의 풍수 문제가 나올 때마다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그러나 내가 말한 풍수는 청와대 터가 아니라 관저 건물에 국한해 말한 것이었다. 청와대 자리야 예부터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고 칭송되는 길지인데 내가 그렇게 말할 리 있겠는가. - P43

상춘재 
청와대를 방문하는 외국 국빈들에게 우리나라 전통 가옥을 소개하고 의전 행사를 치르기 위한 목적으로세운 건물이다. 전형적인 한옥 구조로 되어 있으며 수령 200년 된 금강송을 사용해 그 재질감이 아주 뛰어나다. - P44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말하기를 서화를 보는  눈은 ‘금강안(金剛眼) 혹리수(酷吏手)‘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즉, 금강역사처럼 부릅뜬눈으로 보고, 혹독한 관리가 세금을 메기는 손끝처럼 치밀하게 따져야그 진면목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이 책이야말로 ‘혹리수‘가 펴낸 책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나는 몇 가지 사항에 대해서만 재확인을 해주고 기꺼이 추천사를 써주었다. 그리고 그해 ‘대한민국 문화유산상‘ 시상식 때이성우 본부장에게 문화재청장 감사패를 수여했다. 이 책은 2019년에개정판이 발간되었다. - P46

고종의 문집인 『주연선집 (珠淵選集)』에 실려  있는데 그중 등옥련정(玉蓮亭)은 다음과 같다.

화려한 산 저절로 우뚝 솟았고
그 아래 옥련정이 놓여 있구나
여름날엔 맑은 기운 많기도 한데
긴 계곡엔 푸른 나무 가득하네

華山天作屹
下有玉蓮亭
夏日多佳氣
溪長萬木靑 - P50

이 글씨는 누군가가 오래전에 북악산에 올라 한양을 내려다보면서과연 복지임에 감동해 새겨놓은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암각상태로 볼 때 200년 이상은 되어 보이지 않기 때문에 혹시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복원을 정당화하기 위해 누군가를 시켜 새기게 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그 내막이야 어떻든 북악산에서 서울을 내려다보면 여기는 천하의 복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600년 이상 수도를 이어가고 있겠는가.  - P55

그래서 수헌거사(樹軒居士, 유득공의 아들 유본예로  추정)는 『한경지략(漢京識略)』에서 이렇게 말했다.

백악이 도성 북쪽에 있는데 평지에 우뚝 솟아났고, 경복궁이 그 아래 기슭에 있다. 서울 도성을 에워싼 여러 산 중에 이 산이 북쪽에 우뚝 뛰어나니 조선왕조 국초에 이 산으로 주산을 삼고 궁궐을 세운 것은 잘된 일이다. - P55

현실적으로 이미 개방된 청와대의 문을 다시 닫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인, 나아가서는 최종적인  개방 형태에 대해서는 명확한그림을 제시해야 한다. 청와대라는 역사적이고 상징적인 공간을 앞으로어떻게 사용할 것이라는 마스터플랜을 제시해야 하는데, 이는 대통령혹은 문화부장관이나 문화재청장 개인의 상식적인 소견에서 나오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는 것도 단편적이고 아이디어제공이라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 P56

이럴 경우 가장 좋은 방법은 ‘건축설계 경기‘를 여는 것이다. 그리고이것은 세기적인 설계 경기로 국제적으로도 크게 주목받을 것이다. 이때 반드시 커미셔너나 코디네이터 주도 하에 추진해야 한다. 지금 정부에서 해야 할 일은 뛰어난 건축가에게 이 책임을 맡기는 것이다. 그리고그 설계 경기는 국내외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세계적인 프로젝트로 진행해야 좋은 마스터플랜도 구할 수 있고 더불어 국제적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키며 국가 홍보에도 보탬이 될 것이다. 나는 이런 방향에서 청와대가 재정비되어 우리 시대의 문화유산으로 남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간절하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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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상티망 같은 피해의식이 있어요. 아라시마 씨가전형적인 그런 부류죠."
*실패자가 성공자에게 품는 증오, 질투, 원한, 복수심.

"그 사람들은 될수있으면 소설처럼 귀찮은 것은쓰고 싶지 않아해요. 그러니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돌려쓰기처럼 다른상에서 낙선한 작품으로 다른신인상에 또 응모하죠. 그들은 작가라는 타이틀을갖고 싶을 뿐입니다. 현실의 자신을 과거에 묻고 작가라고 소개하며 거들먹거리고 싶은 거죠. 그런 놈들이 득실득실합니다."

라시마 씨. 이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우리회사는 『변화의 조기 문고화‘와 『유현의 숲』의 동시 출간을 결정했습니다."
일본에서는 보통 책을 단행본으로 먼저 출간한 다음 일정 시간이 흐른 뒤 문고판으로 재출간한다.
그 대단한 이누카이도 말문이 막혔다. 살인사건피해자와 범인, 두 사람의 작품을 팔아먹으려는 심산이다.
그야말로 기회를 놓치지 않는 민첩함과 빈틈없는상술에 이 상황에 가장 어울리는 말을 떠올렸다.

떨어진 동전,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다.

"인간의 체온은 외부 온도와 상관없이 항상 일정온도를 유지해. 하지만 자율신경에 이상이 오면 체온 조절이 불가능해져서 신체 기능에 지장을 주지.
즉 원인은 자율신경 이상이기에 동사가 반드시 추운곳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란 말이야. 설령 한여름뙤약볕이라고 해도 조건만 맞으면 동사해. 원래 동사라는 건 특이소견이 적긴 한데, 저온 상태에서 헤모글로빈과 산소가 결합해 산소 헤모글로빈 농도가높아지므로 시반이 선명한 붉은색을 띠어. 같은 이유로 좌우 심실의 혈액 색상에도 차이가 나지. 그리고 온몸을 도는 심장의 피는 추출해서 내버려 두면응고돼. 또 이번 경우에는 다른 요인으로도 동사를추정할 수 있어."

"알코올은 뇌를 마비시켜 일정량 이상을 섭취하면 심박 기능을 제어하는 뇌간부, 나아가 생명유지에 관여하는 중추 부분까지 마비시키지. 혈중알코올농도 0.40퍼센트를 넘으면 만취자의 절반은 한두시간 만에 사망해. 잘 걷지못하고 의식이 흐릿하고말도 제대로 못 하지. 한번 넘어지면 일어나지도 못해. 알코올 때문에 혈관이 확장돼서 빠르게 체온을빼앗겨. 공원 벤치에 쓰러지면 꼼짝도 못 하는 상황에서 체온이 떨어지기 시작하지."

"빈축은 돈을 내고라도 사라, 라는게 우리사훈이라서요."
자조 섞인 웃음을 짓는 얼굴은 어딘가 측은하게느껴졌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시궁창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하는 존재는 물고기 정도일 테다.

"자신이나 자신이 몸담은 조직을 정당화하는 인간보다 현실을 제대로 인식한 인간을 더 믿을 수 있거든요. 자신과 다른 사람의 능력을 옳게 평가할 수있으니 일을 할 때도 실패가 적죠."

이누카이는 종이 한 장을 더 꺼냈다.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변화는 계절만의 것이아니다. 시대도 유행도 마치 가을 하늘의 구름처럼흘러간다. 내 주위에서는 아내의 태도가 그러했다.
예전에는 햇살처럼 따스했던 아내가 지금은 북풍처럼 차갑다. 그것은 마치 온도를 한껏 내린 냉장고처럼………."

"너처럼 살면 너 나 할 것 없이 다 나쁜 인간으로 보이나 보지."
"그건 아니지."
데루유키는 비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인간은 원래 다 나빠. 정도에 차이만 있을 뿐이지."
"너란 놈은!"

"옛날부터 도덕주의자였던 형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 인간은 누구나 가슴속에 악의를 품고 있어. 우리 야쿠자들의 악의는 겉으로 티라도 나니 애교지. 아무튼 간판이니까. 그런데 평소에 숨기고 있는 아마추어들은 감당이 안 된다니까."

노노개호: 노인이 노인을 간병하는 사회현상을 뜻하는 말로, 초고령사회 일본에서 나타난 신조어,

"바뀌었다기보다는 완화됐다고 해야겠지. 성동일성 장애자의 성별 취급에 관한 특례법, 이름이 길지? 성별을 바꾼 것을 사회가 인정한다는 뜻으로, 요점은 뭐 호적이나 주민등록표 내용을 변경하는 거야. 그 조건이 예전보다 완화됐어요. 즉 세상이 그런 사람들을 받아들인다는 뜻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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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간다 미시마초에 있는 주머니 가게 미시마야는 조금 특이한 괴담 자리를 마련해 왔다. 사람들이 하룻밤 동안 한 방에 모여 순서대로 괴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꾼 한 명에 듣는 사람도 한 명, 한 번에 하나의 이야기를 청하여듣고 그 이야기를 결코 바깥에는 흘리지 않으며,
"이야기하고 버리고, 듣고 버린다."
이것이 미시마야의 특이한 괴담 자리의 정취이다.

지금 막 들어온 소식입니다. 조금 전 오후 8시 20분 쯤, 주자동차도다카이도 인터체인지 부근에서도로를 달리던 고속버스가 방호책을 들이받았습니다. 이 사고로 승무원과 승객 중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방호책의 이음매에 처박힌 형태로 차체 왼쪽이 원형을 알아볼 수 없게 파손된 버스가 TV 화면에 크게 나오고 있었다. 마치 종이처럼 구겨진 버스의 모습은 충돌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대변하는 듯했다.
버스 운전기사는 경상을 입은 듯 구급대원에게 응급처치를 받으면서도 스스로의 힘으로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 잘못입니다! 이렇게 큰 사고를 내다니 정말 죄송합니다."

"졸음운전을 했습니다."

교통조사과로 발령받은 지 벌써 5년이다. 신입 니시키노에게 요모기다는 만주 박사 같은 존재인데 그새에는 수많은 희생자가 쓰러져 있었다. 최근 2, 3년 동안 교통사고 사망자 수 추이는 연간 4 명에서 5천 탈락이였는데, 자신이 경찰관이 된 해에는 9천 명을 넘어섰다. 교통전쟁이라고 불립 치 오래인데 그 상황이 완화되었다고는 해도 전쟁 상태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사체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으면 다행인 편이다. 사지가 갈기갈기 찢어진사체, 배속 내용물이 아스팔트에 쏟아져 흩어진 사체, 상반신이 저며지다시피 한 사체.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이누카이의 지적을 상사에게 보고하지 않은 와중에, 교통조사과에서는 고다이라를 자동차운전 과실치사상죄로송치하자는 분위기가 짙어졌다.
물론 그보다 중죄인 위험운전치사상죄 적용도 논의했지만 원래 졸음운전이나 지병이 있는 상태에서의 운전은 구성요건에 해당하지 않아서 이안은 단박에 무산됐다.

형법 제211조 2항, 자동차 운전상 필요한 주의를 게을리하여 사람을 사상케 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또는 백만 엔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다만 그 상해가 가벼운 경우에는 정상을 참작해 형을 면제할 수 있다.

자동차운전 과실치사상죄의 조문은 읽을수록 이번 사건과 일치했다. 더욱이 피의자 고다이라 신지에게는 음주벽이나 사소한 위반 기록도 없다. 체포 후 태도도 성실하고 사고 직후부터 사죄 의지도 어필하고 있다. 우수한 변호사라면 그리 어렵지 않게 정상 참작을 이끌어 내리라.

"실제로 말입니다, 하루 운행거리 제한이 670킬로미터라는 기준부터가 정상이 아니에요. 내 말이 거짓말 같으면형사님도 심야에 670킬로미터를 운전해 보세요. 분명 도중에 녹초가 될걸요?"

"그렇겠죠. 버스회사 운행 관리 담당자들은 전부 연속 운전 거리는 4백 킬로미터 정도가 한계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670킬로미터라는 기준은 국토교통성에서 내놓은 지침일 텐데………."
"그 670킬로미터의 근거를 아십니까?"
"분명, 국토교통성이 전국 아흔두 개 전세버스 사업장의 운행 데이터를 추출해서 분석한 결과……였을 텐데요."

"표면적으로는 그렇죠.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현장의 목소리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670킬로미터라는 제한 기준에 다른 근거가 있다는 말이지요."
"다른 근거라니요?"
"물론 이건 우리 기사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이긴 하지만, 오사카에서 도쿄 디즈니랜드까지 거리가 딱 670킬로미터거든요."
"설마요. 그냥 우연이겠죠."

"설마가 사람 잡는 일 많습니다. 형사님도 공무원이니 매년 국토교통성에서 트럭 협회나 대기업 여행대리점에 낙하산 보내는 거 아시잖아요. 만약 그런 황금노선이나 장거리를 운전기사 한 명으로 커버할 수 있다면 회사 입장에서는 무조건 이득이죠."
"하지만 이번처럼 운전기사의 과도한 근무가 사회 문제시되면 국토교통성도 기준을 수정하라는 압박을 받을 겁니다."

실제로 언론 보도가 과열되고 국민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국토교통성의 안전정책과는 제한 기준 670킬로미터의변경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 검토에 감시체제 강화를 목적으로 한 새 법인 창설 안도 당연히 따라붙었다.

한 노인의 죽음, 그리고 지나치게 착실한 젊은이 한 사람의 앞날을 제물 삼아 관료들이 또다시 약속의 땅을 넓혀갔다. 그것이 이 나라가 돌아가는 꼴이라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부끄러움이 남는다. 두 눈을 뻔히 뜨고도 정말 죄많은 자들을 못 본 체하고 마는 분한 마음도 남는다. 지금 요모기다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제물이 된 젊은이의죄상을 현실적으로 타당하게 만들어 주는 것 정도다.

"이건 제 지론인데, 세상에는 완전히 착한 사람도, 완전히 나쁜 사람도 없습니다. 속이는 자와 속은 자만 있을 뿐입니다."
"고다이라 씨에게 사람을 속이는 자라고 하는 건 듣기 거북하군요."
"제가 언제 고다이라를 속이는 자라고 했습니까? 그 반대입니다. 고다이라는 속은 자입니다."
"네?"

"학교폭력은 뒷골목에서 못난 인간이 못난 인간을 괴롭히는 짓이야. 그래서 강자와 약자가 있으면 반드시 학교폭력이 일어나지. 비단 요즘에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야. 우리 때도 있었어. 그러니까 몇 년이 지나도 학교폭력 자체는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이지."

"듣고 보니 맞는 말이긴 한데……… 하지만 이번 일로 교장이든 야가미 선생이든 징계를 받으면 조금은 나아지겠지..
학교폭력은 언제 어디에나 있어. 제 몸 지키기에 급급해 책임 회피할 궁리나 하는 놈들이 교사거나교육위원회에 있는 한 이런 사건은 절대 없어지지 않아."
"하루키. 넌 괜찮은 거지?"
어머니가 문득 걱정스럽게 물었다.
"다른 아이를 괴롭히거나 괴롭힘당하지는 않지?"
"엄마, 내 성격 알지? 이번 마사야 사건 때는 나서기는 했지만 원래 눈에 띄지 말고 소란도 일으키지 말자는 주의잖아. 그런 콘셉트니까 가해자도 피해자도 되지 않아요."
"그럼 다행이지만.………."
"흠, 글쎄.........

"그런데 중2라서 처벌받지 않는다고 하던데요."
"만 14세 미만이면 법률상 성인과 같은 벌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야. 교도소에는 가지 않을 거야. 하지만 가정법원의 판결로 소년원에 갈 수 있어."
"그렇게 끔찍한 짓을 했는데도 그 정도밖에 안 된단 말이에요?"
"소년법은 이런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개정 이야기가 나온단다. 적용 연령을 낮췄는데 이번에는 그 적용 연령보다어린아이가 흉악범죄를 일으켰지. 마치 도돌이표처럼."
"그런 건 이상해요."

"너희 나이 때는 아직 모를 테지만 평범하게 산다는 것도 나름대로 힘들고 대단한 일이란다. 게다가 평범하기에오히려 더 수많은 사람과 희노애락을 나눌 수 있지. 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다. 밤에 안심하고 푹 잘 수 있다. 평온한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범죄자는 그렇지 못해.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끊임없이 떠올리고 결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열지 못하며 불안해서 잠 못 이루는 날들이 이어지지. 그게 갱생하지 못 하는 자들에게 주어진 진정한 형벌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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