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엄마 손을 잡고 따라온 한 중학생이 내게 바짝 붙어 다니면서 마치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를 듣듯 재미있어하는 것이었다. 인왕산 수성동계곡에서 잠시 쉬어 갈 때도 내 곁에 붙어 앉아서는 무슨 얘기라도 해주려나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스스로도멋쩍었던지 손에 든 귤을 까서 권하는 것이었다. "고마워요. 근데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요?" "선생님 어렸을 때 얘기가요." "실례지만 몇 살이세요?" "선생님과 띠동갑이에요." - P5
하나는 『천변풍경』의 박태원이 소설 기법으로 받아들였다는 고현학(考現學, modern-ology)이다. 고현학은 과거의 유물을 연구하는 고고학(考古學, archae-ology)의 방법론을 현대 생활사에 적용하는 민속학적 방법론으로 일본의 곤 와지로(今和次郞)가 관동대지진(1923) 이후 도쿄의 주거생활을 연구하면서 내건 개념이다. 이런 고현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서울 묵은 동네에 대한 나의 기억과 서술은 그 나름의 의의를 지닐 수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P6
또 하나는 서성(書聖)으로 일컬어진 왕희지(王羲之)가 자기 집 정원인 난정(蘭亭)에서 벗들과 한차례 계회(契會)를 베풀고 그 모임을 기념하여 난정계서(蘭亭契序) 를 쓰면서 말한 마지막 구절이다. 후대 사람이 지금을 보는 것은 마치 지금 사람이 옛날을 보는 것과마찬가지일 것이니 (・・・) 후대에 이 글을 펼쳐보는 사람에게는 나름의감회가 있지 않겠는가. 後之視今 亦猶今之視昔(…) 後之攬者 亦將有感於斯文 - P6
북악산 서울의 주산, 그 오랜 금단의 땅 - P11
서울의 주산, 북악산 북악산(北岳山, 명승 제67호)은 높이 342 미터의 화강암 골산으로 서울의 주산(主山)이다. 백악산(白岳山)이라고도 불리며 전체 면적은 약 360만제곱미터(약 110만평)이다. 산줄기의 흐름을 보면 백두산에서 시작된 백두대간의 중간지점에 있는 금강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나온 한북정맥(광주산맥)이 북한산을 거쳐 북악산에서 문득 멈추고 양팔을 벌린 형상이다. - P11
서울이 조선왕조의 도읍이 되어 도시계획을 세울 때 경복궁 북쪽 담장 밖 북악산 지역은 한양의 지세를 보호하기 위해 일반인 출입을 금지시켰다. 수도 한양의 방위체제상 도성의 북문인 숙정문과 북문인 창의문은 평소에는 닫아두고 필요할 때, 이를테면 창의문은 군사 이동이 있을 때, 숙정문은 가뭄이 심해 기우제를 지낼 때만 열어두었다. 당시 한양의 인구가 10만 명 정도였기 때문에 공간 운영에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 P14
백악사 북악산은 금단의 구역이었기 때문에 동쪽삼청동과 서쪽 청운동 사이에는 오직 백악사(白岳祠)라는 사당만 있었을 뿐 어떤 건물도 축조되지 않았다. 백악사는 북악산의 산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당이다. - P14
북악산은 진국백(鎭國伯)으로 삼고, 남산은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삼아 경대부와 사서인(士庶人) 모두 제사를 올릴 수 없게 하였다.
실록에서 말하고 있는 백악사는 북악산 정상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아직 명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북악산 정상에서는 조선 초기 기와편이 다수 수습된 바가 있다. - P15
조선왕조는 국난을 수습하면 그때마다 공신을 책봉했다. 공신에게 주어지는 혜택은 엄청난 것이었고 자손에게 상속되었다. 그러니 나라에공을 세우라는 것이었다. 공신책봉은 태조 때 나라를 세운 공이 있는개국공신부터 영조 때 이인좌의 난을 수습한 분무공신까지 모두 28번(삭제된 것을 제외하면 24번) 있었고 여러 형태의 공신회맹제가 열렸다. - P16
이 영빈관 건물은 박정희 시대 우리 관공서 건물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정면정관의 권위를 앞세우면서 골조가 콘크리트든 석조든 전통 지붕을 얹어 한옥의 이미지를 살리겠다는 뜻이 들어 있는데 결과적으로갓 쓰고 자전거 타는 어색함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 때문에 건축가가누구인지 알 수도 없고 또 알 필요도 없이 권위주의 시절의 자취만을 볼수 있을 뿐이다. - P37
결국 나는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기자들에게 공표했다. 그때 내 개인 생각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관저만은 옮기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우선사람이 사는 생활공간으로서 부적합하고 ‘풍수‘를 보아도 관저는 옮겨야 한다고 답했다. 이후 나는 청와대의 풍수 문제가 나올 때마다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그러나 내가 말한 풍수는 청와대 터가 아니라 관저 건물에 국한해 말한 것이었다. 청와대 자리야 예부터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고 칭송되는 길지인데 내가 그렇게 말할 리 있겠는가. - P43
상춘재 청와대를 방문하는 외국 국빈들에게 우리나라 전통 가옥을 소개하고 의전 행사를 치르기 위한 목적으로세운 건물이다. 전형적인 한옥 구조로 되어 있으며 수령 200년 된 금강송을 사용해 그 재질감이 아주 뛰어나다. - P44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말하기를 서화를 보는 눈은 ‘금강안(金剛眼) 혹리수(酷吏手)‘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즉, 금강역사처럼 부릅뜬눈으로 보고, 혹독한 관리가 세금을 메기는 손끝처럼 치밀하게 따져야그 진면목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이 책이야말로 ‘혹리수‘가 펴낸 책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나는 몇 가지 사항에 대해서만 재확인을 해주고 기꺼이 추천사를 써주었다. 그리고 그해 ‘대한민국 문화유산상‘ 시상식 때이성우 본부장에게 문화재청장 감사패를 수여했다. 이 책은 2019년에개정판이 발간되었다. - P46
고종의 문집인 『주연선집 (珠淵選集)』에 실려 있는데 그중 등옥련정(玉蓮亭)은 다음과 같다.
화려한 산 저절로 우뚝 솟았고 그 아래 옥련정이 놓여 있구나 여름날엔 맑은 기운 많기도 한데 긴 계곡엔 푸른 나무 가득하네
華山天作屹 下有玉蓮亭 夏日多佳氣 溪長萬木靑 - P50
이 글씨는 누군가가 오래전에 북악산에 올라 한양을 내려다보면서과연 복지임에 감동해 새겨놓은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암각상태로 볼 때 200년 이상은 되어 보이지 않기 때문에 혹시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복원을 정당화하기 위해 누군가를 시켜 새기게 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그 내막이야 어떻든 북악산에서 서울을 내려다보면 여기는 천하의 복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600년 이상 수도를 이어가고 있겠는가. - P55
그래서 수헌거사(樹軒居士, 유득공의 아들 유본예로 추정)는 『한경지략(漢京識略)』에서 이렇게 말했다.
백악이 도성 북쪽에 있는데 평지에 우뚝 솟아났고, 경복궁이 그 아래 기슭에 있다. 서울 도성을 에워싼 여러 산 중에 이 산이 북쪽에 우뚝 뛰어나니 조선왕조 국초에 이 산으로 주산을 삼고 궁궐을 세운 것은 잘된 일이다. - P55
현실적으로 이미 개방된 청와대의 문을 다시 닫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인, 나아가서는 최종적인 개방 형태에 대해서는 명확한그림을 제시해야 한다. 청와대라는 역사적이고 상징적인 공간을 앞으로어떻게 사용할 것이라는 마스터플랜을 제시해야 하는데, 이는 대통령혹은 문화부장관이나 문화재청장 개인의 상식적인 소견에서 나오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는 것도 단편적이고 아이디어제공이라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 P56
이럴 경우 가장 좋은 방법은 ‘건축설계 경기‘를 여는 것이다. 그리고이것은 세기적인 설계 경기로 국제적으로도 크게 주목받을 것이다. 이때 반드시 커미셔너나 코디네이터 주도 하에 추진해야 한다. 지금 정부에서 해야 할 일은 뛰어난 건축가에게 이 책임을 맡기는 것이다. 그리고그 설계 경기는 국내외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세계적인 프로젝트로 진행해야 좋은 마스터플랜도 구할 수 있고 더불어 국제적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키며 국가 홍보에도 보탬이 될 것이다. 나는 이런 방향에서 청와대가 재정비되어 우리 시대의 문화유산으로 남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간절하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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