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셀프 트래블 - 2023-2024 최신판 ㅣ 셀프 트래블 가이드북 Self Travel Guidebook
김미정.백진수 지음 / 상상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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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 도쿄 여행기

여행 2일차, 2025.12.25.(목요일)
에도성에서 시작한 크리스마스(오전편)


1. 애들과 함께하니 아침 8시 기상

도쿄에서 맞는 크리스마스 아침.

마님과 둘이 여행을 다닐 때라면 아침 일찍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을 것이다.
여행지에서 보내는 시간이 아까워 웬만하면 일찍 일어나 움직이는 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여행은 달랐다. 애들이 함께였다.

아침 8시가 되어서야 느긋하게 일어났다.
이 정도면 우리 부부의 평소 여행에서는 이미 한참 돌아다니고 있을 시간이었다.

창밖으로 바라본 도쿄의 아침은 전날과 달랐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내리던 비는 그쳤고, 건물 사이로 푸른 하늘도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늘 일정은 만만치 않았다.

에도성, 도쿄역, 아키하바라, 센소지, 도쿄 스카이트리까지.

하루 동안 도쿄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빡센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2. 호텔에서 느긋하게 먹은 아침

씻고 준비를 마친 뒤 호텔 3층 식당으로 내려가 조식을 먹었다.

손에는 네 장의 BREAKFAST COUPON.
이번 여행은 네 식구가 함께하는 여행이라는 것이 이런 사소한 장면에서도 드러났다.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아침을 먹었다.

서두를 이유는 없었다.
오늘 갈 곳은 많았지만 그렇다고 아침부터 애들을 몰아붙일 생각은 없었다.

마님과 둘이 왔다면 벌써 어디 한 군데는 보고 있었을 시간이지만,
아이들과 함께하는 여행은 아이들 속도에 맞춰 가는 것도 여행의 일부였다.

그렇게 아침을 먹고 천천히 준비한 뒤,
오전 9시 40분쯤 호텔을 나섰다.


3. 역시 만만치 않은 시부야역, 미궁 속으로

호텔을 나와 시부야역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놈의 시부야역은 올 때마다 헷갈린다.

JR과 도쿄메트로, 도큐선 등 여러 노선이 얽혀 있고,
지상과 지하, 각종 연결통로와 대형 상업시설까지 한데 붙어 있으니
몇 번을 와도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다.

“내가 늙어서 그런가…….”

이번에도 시부야역이라는 미궁 속으로 들어갔다.

시부야 스크램블 스퀘어(渋谷スクランブルスクエア) 안팎을 오가며
안내판을 확인하고 지하 통로를 따라 내려갔다.

그 과정에서 크리스마스 장식이 된 스크램블 스퀘어와
커다란 피카츄가 그려진 유리창도 지나쳤다.

목적은 지하철표였다.

사진 속 안내문에는
Tokyo Subway Ticket을 이용하려면 시부야 스크램블 스퀘어 B6 출구 쪽으로 이동해
3층에서 티켓을 교환하도록 안내되어 있었다.

우리는 안내를 따라가
Tokyo Subway 24-hour Ticket을 손에 넣었다.

도쿄메트로와 도에이 지하철을 24시간 이용할 수 있는 승차권.

오늘처럼 지하철을 타고 도쿄 곳곳을 돌아다녀야 하는 날에는
잘 어울리는 선택이었다.

표까지 해결하고 나니 이제야 본격적인 하루가 시작되는 느낌이었다.


4.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선택한 도시, 에도

오전 10시 20분 무렵 시부야역에서
도쿄메트로 한조몬선(東京メトロ半蔵門線)에 올랐다.

한조몬역(半蔵門駅)에서 내려 오늘의 첫 목적지,
에도성(江戸城)으로 향했다.

지금은 일본의 수도 도쿄 한복판이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들어오기 전의 에도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당시 일본의 정치와 경제, 문화의 중심은
교토와 오사카를 비롯한 간사이 지역이었다.

오랫동안 천황이 자리했던 교토가 정치와 문화의 중심이었고,
오사카를 비롯한 간사이 일대 역시 상업과 교통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처음 일본여행을 갔던 곳도 오사카와 교토였다.

처음 일본을 여행할 때 자연스럽게 찾게 되는 대표적인 도시들이기도 하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오랫동안 일본의 중심이 바로 이 간사이 지역이었다는 사실과도 묘하게 겹친다.

반면 에도는 그에 비하면 변방에 가까웠다.

물론 에도성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15세기 중엽 오타 도칸(太田道灌)이 에도성을 축성했지만,
오늘날과 같은 거대한 도시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 에도의 운명을 바꾼 사람이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였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오다와라의 후호조씨를 무너뜨리고 일본 통일을 거의 완성한 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기존 영지를 떠나 간토로 옮겨왔다.

그리고 에도성을 새로운 거점으로 삼았다.

당시 에도성 주변은 동쪽으로 히비야 만(日比谷入江)이 깊숙이 들어와 있었고,
도시를 크게 만들기에는 땅도 충분하지 않았다.

이에야스와 이후 도쿠가와 막부는
매립과 수로 개착, 하천 정비 등을 계속하며
에도를 본격적인 도시로 만들어 나갔다.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일본의 권력구도는 다시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전투가 벌어진 세키가하라는
지금의 나고야와 교토 사이, 기후현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동서 일본을 잇는 길목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과
이시다 미쓰나리를 중심으로 한 서군이 맞붙었다.

우리에게 임진왜란으로 익숙한 무장들도
이 전투에서 다시 등장한다.

평양성 전투와 강화교섭으로 잘 알려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서군에 섰고,
임진왜란 당시 수군을 이끌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도 처음에는 서군으로 참전했다.

하지만 와키자카는 전투 도중 동군으로 돌아서
오타니 요시쓰구(大谷吉継)의 부대를 공격했다.

반면 임진왜란 당시 울산왜성 전투 등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는 이에야스 측에 섰다.

다만 그는 세키가하라 본전투 현장에 직접 참가한 것은 아니고,
규슈에서 동군 측 군사행동을 벌이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 땅에서 싸웠던 일본 장수들이
불과 몇 년 뒤에는 일본 국내의 패권을 놓고
서로 다른 편에 서 있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결과는 이에야스의 승리였다.

이 전투를 계기로 일본의 권력은 사실상 이에야스에게 넘어갔고,
1603년 그는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에 임명되어
에도에 막부를 열었다.

그때부터 일본의 정치 중심은
교토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간사이에서
점차 에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한때 변방에 가까웠던 에도는
도쿠가와 막부의 정치적 중심지가 되면서 거대한 도시로 성장했고,
그 에도가 훗날 도쿄가 되었다.


에도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일본 작가 한 사람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미미 여사’라는 애칭으로 더 친숙한
미야베 미유키(宮部みゆき).

지금까지 미야베 미유키의 책을 24권 읽었다.

현대사회를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도 좋아하지만,
내게 특히 인상 깊고 좋아하는 책은 에도시대를 무대로 한 작품들, 즉 에도시대물이다.

그중에서도 『얼간이(ぼんくら)』와 『하루살이(日暮らし)』를 좋아한다.

『얼간이』는 에도 후카가와를 배경으로,
철병장(鉄瓶長屋, てつびんながや·데쓰빈나가야)이라는 나가야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도신 이즈쓰 헤이시로와 조카 유미노스케를 비롯한 인물들이 풀어가는 시대 미스터리다.

‘도신’은 한자로 동심(同心)이라 쓰고,
일본어로는 どうしん(도신)이라고 읽는다.

에도시대에 치안과 수사 실무를 담당하던 하급 무사 관리로,
오늘날로 치면 경찰의 실무자와 비슷한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다.

철병장 역시 한자로는 鉄瓶長屋,
일본어로는 てつびんながや(데쓰빈나가야)라고 읽는다.

여기서 나가야(長屋)는 여러 집이 벽을 맞대고 길게 이어진
에도 서민들의 공동주택 같은 곳이었다.

『하루살이』는 『얼간이』의 뒤를 잇는 이야기로,
헤이시로와 유미노스케를 비롯해 전작에서 만났던 인물들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미야베 미유키의 시대소설을 읽다 보면 쇼군이나 다이묘 같은 권력자보다 에도의 골목과 나가야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 더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내 머릿속의 에도는 거대한 성과 쇼군의 도시이면서 동시에, 『얼간이』와 『하루살이』 속 사람들이 북적이며 살아가던 생활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작 미미 여사의 대표적인 에도 시대소설 가운데 하나인 『외딴집』은 아직 못 읽었다.

스물네 권이나 읽어놓고 그걸 아직 안 읽었다니.

ㅠㅠㅠ

언젠가는 꼭 읽어야겠다.

책으로 수없이 만났던 ‘에도’라는 이름.

오늘은 그 에도의 중심이었던 에도성에
내가 직접 걸어 들어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성벽과 해자를 바라보는 느낌도
조금은 다르게 다가왔다.

지하철에서 내려 성 쪽으로 걸어가자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성이 아니라 물이었다.

넓은 해자와 그 너머로 이어지는 높은 석축.

도쿄 한복판의 빌딩숲과 바로 맞닿아 있으면서도
해자를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공간이 펼쳐졌다.

성의 건물 대부분은 사라졌지만,
해자와 석축만으로도 이곳에 얼마나 거대한 성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5. 皇居東御苑, 에도성 안으로

우리는 황거 동쪽 정원(皇居東御苑)으로 들어갔다.

현재 일반인이 둘러볼 수 있는 이 공간에는
에도성의 여러 흔적이 남아 있었다.

입구 주변에는 乾門(이누이몬)과 皇居東御苑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있었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거대한 석축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까이에서 보니 그 규모가 생각보다 훨씬 컸다.

커다란 돌을 층층이 쌓아 올린 성벽은
사람 하나를 그 앞에 세워놓아야 비로소 크기가 실감날 정도였다.

나도 석축 앞에 서서 사진을 한 장 남겼다.

사진 속 사람은 조그맣고,
뒤의 돌벽은 화면을 가득 채웠다.

에도성에 남아 있는 것은 단순히 옛 성터 몇 조각이 아니었다.
성곽의 규모 자체를 몸으로 느끼게 하는 흔적들이었다.


6. 성은 사라지고 천수대만 남았다

안쪽으로 더 들어가 天守台,
에도성 천수대에 도착했다.

한때 에도성의 천수각이 올라서 있던 자리다.

지금 천수각은 없다.

남아 있는 것은 거대한 돌로 쌓은 천수대뿐이었다.

천수대 아래에서 바라본 석축도 거대했지만
직접 위로 올라서니 주변이 한눈에 들어왔다.

멀리 현대 도쿄의 고층빌딩들이 솟아 있고,
그 아래에는 넓은 황거 동쪽 정원이 펼쳐졌다.

옛 에도성과 현대 도쿄가 한 시야 안에 겹쳐 보이는 풍경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천수대에서 사진도 남겼다.

크리스마스에 네 식구가 함께
옛 에도성 천수각이 서 있던 자리에 올라와 있다는 것도
나중에는 하나의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7. 에도성의 흔적을 따라 걷다

천수대에서 내려와 다시 정원을 걸었다.

御休息所跡이라고 새겨진 표석도 지나고,
겨울빛이 내려앉은 나무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화려한 성곽 건물이 남아 있는 곳은 아니었다.

오히려 건물이 사라진 자리를 걸으며
‘이곳에 무엇이 있었을까’를 상상하게 만드는 곳이었다.

전시공간에서는 에도성 천수각의 모형도 볼 수 있었다.

지금은 천수대만 남아 있지만
모형으로 복원된 모습을 보니
조금 전 우리가 올라섰던 거대한 석축 위에
어떤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는지 비로소 그림이 그려졌다.

이어 百人番所(햐쿠닌반쇼)를 지나 성 밖으로 향했다.

거대한 석축 사이의 길을 지나고 성문을 빠져나오자
조금 전까지의 에도성 풍경과는 전혀 다른
현대 도쿄의 빌딩들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다.


8. 분수대 앞 스타벅스에서 잠시 쉬어가기

에도성을 나와 향한 곳은
와다쿠라 분수공원(和田倉噴水公園)이었다.

높이 솟아오르는 분수와 넓은 광장,
그리고 주변을 둘러싼 도쿄 도심의 고층건물들.

그 한쪽에 스타벅스가 있었다.

スターバックス コーヒー 皇居外苑 和田倉噴水公園店.

오전 11시 30분 무렵,
우리는 이곳에 들어가 잠시 쉬었다.

사진에서 보았던 것처럼 이곳은 위치도 좋았지만
건물 자체도 꽤 인상적이었다.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공원과 분수가 보였고,
실내 천장에는 나무 구조물이 격자처럼 이어져 있었다.

에도성을 한 바퀴 걷고 들어와 앉으니
이제야 잠깐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음료를 앞에 두고 창밖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는 에도시대의 거대한 석축 사이를 걷고 있었는데
지금은 스타벅스 창밖으로 분수와 현대 도쿄의 빌딩숲을 보고 있었다.

과거의 에도와 현재의 도쿄가
불과 몇 걸음 사이에서 이어지는 곳이었다.

하지만 오늘 일정은 이제 시작이었다.

잠시 쉬었으니 다시 움직여야 했다.

다음 목적지는 도쿄역.

그리고 그 뒤에는
아키하바라, 센소지, 도쿄 스카이트리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워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9. 도쿄역, 우리 경성역을 떠올리다

스타벅스에서 잠시 쉬고 다시 길을 나섰다.

다음 목적지는 도쿄역(東京駅).

에도성에서 도쿄역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마루노우치 쪽으로 걸어가자 정오가 조금 지나면서
도쿄역의 붉은 벽돌 건물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2시 40분 무렵.

고층빌딩 사이로 도쿄역 마루노우치 역사가 정면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건물은 아니었지만
다시 정면에서 바라보니 문득 우리 경성역이 떠올랐다.

붉은 벽돌,
서양식 건축양식,
오래된 철도역 특유의 묵직한 분위기.

도쿄역은 1914년에 완공된 건물이고,
우리의 옛 경성역사는 1925년에 완공됐다.

두 건물이 같은 설계는 아니지만
내 눈에는 어딘가 닮아 보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두 건물 사이에는 실제로 이어지는 인연이 있었다.

도쿄역 마루노우치 역사를 설계한 사람은
일본 근대건축을 대표하는 건축가 다쓰노 긴고(辰野金吾).

그리고 구 경성역의 설계자로 알려진 쓰카모토 야스시(塚本靖)는
도쿄제국대학에서 다쓰노 긴고에게 건축을 배운 제자였다.

도쿄역과 경성역이 같은 설계도에서 나온 건물은 아니지만,
두 건축가가 사제지간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두 역이 닮아 보였던 것도 그저 우연처럼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어쩐지 비슷해 보이더라.”

하지만 역 앞 풍경은 꽤 달랐다.

도쿄역 앞에는 건물 정면을 시원하게 열어주는
넓은 마루노우치 광장이 펼쳐져 있었다.

역사를 한참 뒤에서부터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앞 공간이 넓고 탁 트여 있었다.

그 광장 덕분인지
붉은 벽돌 역사 전체가 더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우리 경성역 앞에도 이런 공간이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역 앞을 빽빽한 도로나 건물로 채우지 않고
도시 한복판에 이런 넓은 공간을 남겨둔 모습이 부러웠다.

그러다 혼자 피식 웃었다.

“근디 우리나라였으면 여기서 맨날 데모하는 거 아녀?”

뭐, 그건 또 그거대로 우리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크리스마스 당일이라 마루노우치 광장 일대에는
크리스마스트리와 장식들이 남아 있었고,
‘MARUNOUCHI TOKYO’라고 적힌 둥근 조형물도 세워져 있었다.

아들과도,
마님과도,
가족끼리 번갈아 사진을 남겼다.

도쿄역을 배경으로 광장을 천천히 걸었다.


10. 도쿄역 머릿돌 앞에서

도쿄역 정면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붉은 벽돌 벽과 흰색 석재 장식,
좌우로 길게 뻗은 마루노우치 역사는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에서 볼 때 느낌이 또 달랐다.

정면 가까이에는

‘東京駅’

이라고 새겨진 돌 표지석이 있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머릿돌 앞에서 사진을 찍고,
역사 정면에서도 사진을 몇 장 더 남겼다.

도쿄역은 단순히 기차를 타는 장소라기보다
그 자체가 하나의 명소처럼 느껴졌다.

사진을 다 찍고 이제 다음 장소로 이동하려고
마루노우치 중앙구(丸の内中央口)로 들어갔다.

그런데……

밖에서 볼 때는 참 멋있던 도쿄역이
안으로 들어가자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11. 도쿄역도 미궁이다

아이구.

도쿄역도 만만치 않았다.

JR,
신칸센,
도쿄메트로,
수많은 출구와 지하통로.

전광판을 봐도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부야역에서도 헤맸는데
도쿄역까지 이러니 슬슬 환장할 노릇이다.

“아니, 일본 역들은 왜 죄다 미궁이여.”

이쪽으로 갔다가,
다시 안내판을 보고,
또 방향을 틀고.

그래도 오전에 산 Tokyo Subway 24-hour Ticket은
여기서 다시 제 역할을 했다.

어찌어찌 도쿄메트로 마루노우치선(東京メトロ丸ノ内線)
승강장을 찾아 내려갔다.

시각은 오후 1시 10분 무렵.

다음 목적지는
내가 이번 여행에서 은근히 기대하고 있던 곳이었다.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すずめの戸締まり)』의 성지.


12. 두 정거장 만에 아와지초

도쿄역에서 마루노우치선을 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내렸다.

오테마치(大手町)를 지나
아와지초역(淡路町駅, M19).

오후 1시 16분 무렵이었다.

“벌써?”

싶을 정도로 가까웠다.

도쿄역에서 불과 두 정거장.

역을 나와 오차노미즈(御茶ノ水) 쪽으로 걸었다.

조금 걷자
철길과 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 나타났다.

히지리바시(聖橋).

그리고 다리 아래로 흐르는 간다강(神田川).

바로 이곳이
내가 찾던 『스즈메의 문단속』의 도쿄 성지였다.


13. 『스즈메의 문단속』, 영화 속으로 들어가다

나는 『스즈메의 문단속』을 꽤 좋아한다.

주인공 스즈메는 어린 시절 동일본대지진으로 어머니를 잃고,
규슈 미야자키에서 이모와 함께 살아가는 고등학생이다.

그러던 어느 날
폐허를 찾아다니는 청년 소타를 우연히 만나고,
재난을 불러오는 ‘뒷문’을 닫기 위해
함께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게 된다.

영화가 후반부 도쿄로 넘어오면서
이 오차노미즈와 히지리바시 일대도
아주 인상적인 장면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꼭 한 번 실제로 보고 싶었다.

다리 위에 서니
영화에서 보던 풍경이 그대로 펼쳐졌다.

아래에는 간다강이 흐르고,
그 위를 도쿄메트로 마루노우치선이 가로지른다.

조금 높은 곳에는
JR 주오선과 소부선 열차가 오간다.

철도와 강,
터널,
도심 건물이 한 장면 안에 겹쳐지는 풍경.

신카이 마코토 감독 영화에서
그렇게 인상적으로 보이던 복잡한 도쿄의 입체감이
실제로도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다.

잠시 다리 위에 서서 기다렸다.

목표는 하나였다.

영화에서 본 것처럼
빨간 마루노우치선 열차가
간다강 위를 지나가는 순간.

카메라를 들고 기다렸다.


14. 운도 좋지, 기차까지 딱 걸렸다

오후 1시 28분 무렵.

드디어 빨간 열차가 나타났다.

터널을 빠져나온
도쿄메트로 마루노우치선 열차가
간다강 위 철교를 건너오기 시작했다.

“왔다.”

카메라를 들었다.

그리고 셔터를 눌렀다.

딱 내가 기다리던 장면이었다.

더구나 운까지 좋았다.

반대편에서도 빨간 열차가 들어오면서
두 열차가 서로 교행하는 순간까지 만났다.

일부러 시간을 맞추기도 쉽지 않은 장면인데
기다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딱 그 순간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그냥 관광지를 하나 본 것이 아니었다.

영화 속 장면을 기억하고,
그 장소를 찾아와,
그 풍경이 실제로 움직이는 순간까지 기다렸다가
사진으로 남긴 것이다.

나는 이런 게 참 좋다.

영화나 책에서 본 장소를
실제로 찾아가 보는 것.

머릿속에만 있던 장면이
현실의 풍경과 겹쳐지는 순간이다.

히지리바시 아래로 흐르는 간다강,
그 위를 가로지르는 빨간 마루노우치선 열차.

『스즈메의 문단속』 속 도쿄가
잠깐 현실로 튀어나온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을
제대로 한 장 박았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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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 도쿄 여행기

여행 1일차, 2025.12.24.(수요일)
비 내리는 크리스마스이브, 푸른빛의 도쿄


1. 새벽 2시 46분, 크리스마스 도쿄를 향해

크리스마스이브 새벽 2시 46분.

아직 대부분의 사람들이 깊이 잠들어 있을 시간, 우리 가족은 대전을 출발했다.

목적지는 인천공항.
그리고 그 너머의 도쿄였다.

이번 여행은 12월 24일부터 28일까지 4박 5일.
크리스마스를 도쿄에서 보내기로 했다.

깜깜한 새벽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은 언제나 묘한 기분이 든다.

몸은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않았는데 마음은 벌써 여행지에 가 있다.

램블러 기록상 대전에서 인천공항까지의 거리는 207.9km.
소요시간은 2시간 10분 4초였다.

중간에 쉬지 않고 그대로 달렸다.

새벽길을 꼬박 두 시간 넘게 달려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2. 인천공항 쉐이크쉑에서 시작한 크리스마스이브

오늘 우리가 탈 비행기는 진에어 LJ0201편.

인천국제공항을 오전 7시 25분 출발해 나리타국제공항에 오전 9시 55분 도착하는 일정이다.

공항에 도착하니 슬슬 배가 고파졌다.

새벽 2시 46분부터 움직였으니 당연했다.

출국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아침부터 먹기로 했다.

인천공항 쉐이크쉑(Shake Shack).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펼쳐놓고 가족 넷이 이른 아침부터 제대로 칼로리를 채웠다.

마님이 먹는 햄버거에서는 치즈가 길게 늘어났고, 딸래미도 햄버거를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평소라면 아침부터 햄버거를 먹을 일도 별로 없겠지만 여행 가는 날 공항에서는 이런 것도 모두 특별해진다.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나서야 출국수속을 시작했다.

공항 안에는 크리스마스이브답게 눈사람 장식도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이번 여행을 떠나면서 우리 가족이 은근히 준비한 것이 하나 있었다.

네 사람이 똑같이 맞춰 신은 회색 뉴발란스 운동화.

출국을 기다리며 네 켤레의 운동화를 가운데로 모아 사진 한 장을 남겼다.

아빠, 엄마, 아들, 딸.

신발 크기도 다르고 발 모양도 제각각이지만 오늘만큼은 같은 신발을 신고 같은 곳을 향한다.

별것 아닌 운동화 한 켤레지만 넷이 함께 여행을 떠나는 순간에는 그게 제법 의미 있게 느껴졌다.

‘우리는 한 가족.’

말로 굳이 하지 않아도 네 켤레의 회색 운동화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4박 5일 동안 이 신발을 신고 도쿄의 거리를 함께 걸을 것이다.

출국수속을 마치고 탑승구로 향했다.

비행기는 예정시각보다 조금 늦어 오전 8시가 넘어서야 인천공항을 출발했다.

창밖 활주로에는 빗방울이 보였다.

도쿄의 날씨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단 간다.

크리스마스 도쿄로.


3. 비 내리는 나리타, 그리고 N‘EX

오전 10시 무렵 나리타공항(成田国際空港)에 도착했다.

그런데 도쿄의 첫인상은 파란 겨울 하늘이 아니었다.

비였다.

하필 크리스마스이브에 비라니.

입국 절차를 마치고 시부야까지는 나리타 익스프레스(Narita Express, N‘EX)를 이용하기로 했다.

승차권은 나리타공항 제1터미널 11시 44분 출발, 시부야 13시 04분 도착.

NARITA EXPRESS 18호, 8호차였다.

유선 자물쇠가 달린 N‘EX 전용 수하물 보관대에 캐리어를 넣어두고 자리에 앉았다.

검은색과 붉은색이 어우러진 좌석에 아들과 나란히 앉아 사진도 한 장 남겼다.

열차가 나리타를 벗어나자 창밖으로 일본의 겨울 들판과 낮은 주택들이 지나갔다.

하지만 비는 그칠 생각이 없었다.

창문에는 계속 빗방울이 맺혀 있었다.

12시 17분 무렵 지바를 지나고, 오후 1시가 가까워지자 차내 전광판에 드디어

‘잠시후 시부야’

라는 글자가 나타났다.

* 일본어: まもなく 渋谷
* 영어: Arriving at Shibuya
* 한국어: 잠시후 시부야
* 중국어: 即將到達 渋谷

차내 전광판은 4개국어를 함께 안내하고 있었다.

이제 오늘부터 4박 동안 머물 도쿄 한복판으로 들어간다.


4. 시부야 도착, 그런데 호텔이 어디 있는 거야?

오후 1시 무렵 시부야(渋谷)에 도착했다.

이번 여행에서 4박을 모두 책임질 숙소는

JR EAST HOTEL METS SHIBUYA
(JR東日本ホテルメッツ 渋谷).

시부야역과 바로 연결되어 있어 교통 하나만큼은 정말 편리할 것 같았다.

그런데 첫날부터 문제가 생겼다.

시부야역 주변이 대대적인 공사 중이었다.

JR선, 긴자선, 한조몬선, 후쿠토신선, 도요코선에 하치코광장과 동쪽 출구, 시부야 스크램블 스퀘어 방면까지 각종 안내판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분명 역과 연결된 호텔이라는데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캐리어를 끌고 시부야역 안팎을 한참 헤맸다.

밖으로 나가면 비까지 맞았다.

“아니, 지하철하고 바로 연결된다더니 호텔 찾다가 사람 잡겄네.”

그렇게 헤맨 끝에 겨우 호텔을 찾아냈다.

첫날부터 시부야가 만만치 않다.

체크인 시간까지는 아직 일렀다.

캐리어만 호텔에 맡겨놓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5. 시부야로 진격의 거인

드디어 짐에서 해방됐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부야로 진격한다.

진격의 거인이다.

그런데 아무리 거인이라도 배가 고프면 허당이다.

새벽 2시 46분부터 움직였고 인천공항에서 먹은 햄버거 이후 제대로 먹은 것이 없었다.

일단 밥부터 먹어야 했다.

호텔에서 나와 걷다가 근처에 보이는 식당에 들어갔다.

멘한쇼쿠도 나카지마(麺飯食堂 なかじま).

딱히 맛집을 찾아 들어간 것도 아니었다.

그냥 배고프니 눈에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다.

메뉴에는 탄탄멘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면과 볶음밥, 중화요리가 있었다.

아이들은 붉은 국물의 면을 주문했고, 우리는 목이버섯과 달걀, 돼지고기가 들어간 볶음요리에 밥을 먹었다.

그런데,

“오?”

생각보다 맛있다.

아무 기대 없이 들어왔는데 첫 끼부터 성공이다.

유명 맛집을 일부러 찾아다니는 것도 여행의 재미지만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간 집에서 뜻밖에 맛있는 음식을 만날 때가 있다.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나니 다시 힘이 났다.

진격의 거인 부활이다.


6. 포켓몬센터, 전 세계 사람들이 여그 다 모였나

아들이 이번 도쿄여행에서 가고 싶어 했던 곳 가운데 하나가 포켓몬센터였다.

시부야 PARCO(渋谷PARCO) 6층에 있는 포켓몬센터 시부야(ポケモンセンターシブヤ)로 향했다.

그런데 매장에 도착하자마자 입이 벌어졌다.

“워매, 전 세계 사람은 여그 다 모아놨나?”

정말 사람이 많았다.

크리스마스이브라 그런지 일본 사람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매장을 꽉 채우고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사람에 밀려 들어가야 할 정도였다.

피카츄 인형이며 각종 캐릭터 상품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정작 아들이 관심 있어 하는 포켓몬카드는 상황이 달랐다.

종류도 별로 없고 상당수가 품절이었다.

그야말로 포켓몬카드 품절 대란.

계산대 줄은 더 기가 막혔다.

무언가 하나 사더라도 계산하려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우리는 사람 구경, 포켓몬 구경만 실컷 하고 그냥 나왔다.


7. 루피도 만나고, 닌텐도도 구경하고

포켓몬센터와 같은 층에는 볼거리가 많았다.

이번에는 양팔을 번쩍 치켜든 『원피스』의 루피가 나타났다.

익살스럽게 웃으며 서 있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근처에는 닌텐도 도쿄(Nintendo TOKYO)도 있었다.

붉은색 닌텐도 간판 아래로 온갖 캐릭터 상품이 진열돼 있었고 『스플래툰』의 잉클링 캐릭터 대형 조형물도 자리 잡고 있었다.

도쿄에 오면 이런 재미가 있다.

한국에서는 화면 속에서만 보던 게임과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 거리와 상점 곳곳에서 실제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아들은 포켓몬을 찾아다니고, 딸래미는 또 사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시부야 PARCO 안을 다시 돌아다녔다.

각종 패션매장과 캐릭터숍이 층층이 들어서 있고 서점에는 일본 만화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가족여행이라는 것이 그렇다.

내가 보고 싶은 곳만 돌아다닐 수도 없고, 마님이 좋아하는 곳만 갈 수도 없다.

아들이 원하는 곳도 가고,
딸이 사고 싶은 것도 구경하고,
그러다 보면 하루가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8. 비 오는 시부야,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 잔

파르코를 나왔지만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거리에는 온통 우산이다.

우산을 쓰고 시부야 공원거리 쪽으로 걷다가 스타벅스 시부야 공원거리점
(スターバックス コーヒー 渋谷公園通り店)에 들어갔다.

청의동굴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스타벅스다.

새벽부터 계속 움직였고 비까지 맞으며 시부야를 돌아다녔으니 잠깐 쉬어갈 시간이 필요했다.

따뜻한 실내에 자리를 잡았다.

커피 한 잔의 여유.

아들도 자리에 앉아 음료를 마시며 쉬었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크리스마스를 즐기러 나온 사람들은 우산을 쓰고 계속 거리를 오갔다.

여행에서는 이런 시간이 좋다.

무엇을 반드시 봐야 하는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 몇 시에 가야 하는 것도 아닌 시간.

그냥 앉아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아, 지금 우리가 도쿄에 와 있구나.’

하고 느끼는 시간이다.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9. 요요기공원, 그리고 크리스마스 마켓

다음 목적지는 요요기공원(代々木公園).

시부야구청을 지나 겨울 나무들이 늘어선 길을 따라 걸었다.

비를 맞은 나무들은 대부분 잎을 떨어뜨린 채 앙상했고, 산책로 곳곳에는 물웅덩이가 남아 있었다.

도쿄 한복판의 화려한 시부야에서 조금만 걸어 들어왔을 뿐인데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공원 안쪽으로 더 들어가자 뜻밖의 크리스마스 풍경이 나타났다.

커다란

‘SHIBUYA Christmas’

간판이 세워진 입구.

그 안으로 붉은색과 흰색 천막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2025 시부야 크리스마스 마켓이다.

음식과 음료를 파는 부스들이 이어지고, 곳곳에 크리스마스 조명이 켜지기 시작했다.

오늘이 12월 24일.

그야말로 크리스마스이브 한복판에 들어와 있었다.

공원 한편에는 아직도 옛날식 공중전화 부스가 남아 있었다.

도쿄처럼 거대한 현대도시 한복판에서 이런 풍경을 만나니 또 묘하다.

조금 더 걸어가자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밤 가장 보고 싶었던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10. 청의동굴(青の洞窟 SHIBUYA 2025)

청의동굴(青の洞窟 SHIBUYA 2025).

요요기공원 느티나무길과 시부야 공원거리 일대를 푸른 LED 조명으로 뒤덮는 겨울 일루미네이션이다.

길 양쪽 나무에 하나둘 불이 들어오더니 어느 순간 거리 전체가 푸른색으로 변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나무에 파란 조명을 달아놓은 행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로 그 안으로 들어가 보니 느낌이 전혀 달랐다.

머리 위도 파랗고,
옆도 파랗고,
비에 젖은 길바닥까지 파랗다.

나무와 거리 전체가 푸른빛 속에 잠겼다.

청의동굴이라는 이름이 왜 붙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올해 행사장에는 거대한 눈사람도 세워져 있었다.

‘청의동굴 THE SNOWMAN(青の洞窟 THE SNOWMAN)’.

커다란 눈사람 표면으로 빛과 영상이 투사됐다.

처음에는 푸른 별빛이 흐르다가 하얀 눈사람으로 변하고, 얼굴이 나타나기도 했다.

몸통에는 글과 영상이 흘렀다.

단순히 조형물 하나를 세워놓은 것이 아니라 눈사람 전체가 하나의 스크린이자 빛의 공연장이었다.

그 뒤로는 푸른 LED를 뒤집어쓴 나무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푸른색의 오묘한 조화.

참 묘한 색이다.

화려한데 요란하지 않고,
차가운 색인데 이상하게 사람을 끌어당긴다.

그리고 오늘은 비까지 내린다.

처음에는 하필 여행 첫날부터 비냐고 투덜거렸는데 청의동굴에서는 그 비가 오히려 한몫했다.

젖은 도로 위로 푸른빛이 그대로 반사됐다.

위에는 파란 나무,
아래에는 파란 길.

그 사이로 수많은 사람들이 우산을 쓰고 걸었다.

비가 와도 사람은 엄청나게 많다.

오늘이 크리스마스이브이니 당연할 수도 있다.

우산을 쓴 사람들의 행렬과 푸른 불빛이 한데 섞였다.

빛이 변할 때마다 거리는 또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마치 도시 한복판이 아니라 잠시 다른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가족과 함께 도쿄에서 맞이한 크리스마스이브.

오늘 하루 가운데 가장 강하게 기억에 남을 장면이다.


11. 다시 시부야로, 사람에 치여 죽겄다

청의동굴(青の洞窟)을 보고 다시 시부야 쪽으로 걸었다.

길가의 가로수에도 푸른 조명이 이어졌다.

비에 젖은 도로 위로 자동차의 붉은 후미등과 파란 조명이 뒤섞여 번졌다.

밤이 깊어질수록 시부야에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시부야 PARCO를 지나 스크램블 교차로 쪽으로 들어서자 아예 우산의 바다다.

검은 우산,
투명 우산,
하얀 우산.

수많은 우산이 교차로를 꽉 채웠다.

건물의 대형 전광판과 네온사인은 정신없이 번쩍이고, 그 아래로 사람들이 끊임없이 밀려다녔다.

저녁도 먹었다.

그런데 희한하게 오늘 하루 중 저녁 메뉴는 벌써 기억이 희미하다.

확실한 것은 음식보다 사람이다.

크리스마스이브의 시부야.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다.

“아이고, 사람에 치여 죽겄다.”

진짜 그 말이 절로 나온다.

비가 와도 아무 소용이 없다.

오히려 모두 우산을 펼쳐 들고 있으니 거리는 더 좁아졌다.

램블러 기록으로 오늘 오후 시부야와 요요기공원을 돌아다닌 거리는 6.8km.

오후 1시 30분부터 4시간 46분 넘게 돌아다녔다.

새벽 2시 46분부터 움직인 몸에는 이제 피로가 차곡차곡 쌓였다.

일단 호텔로 돌아왔다.


12. 마님은 그로기, 우리는 다시 시부야 스카이로

호텔에서 잠시 쉬었다.

새벽 2시 46분 대전 출발.

인천공항.

비행기.

나리타공항.

N‘EX.

시부야.

그리고 비를 맞으며 오후 내내 걸었다.

결국 마님은 그로기 상태다.

오늘은 더 이상 못 움직이겠다고 한다.

마님은 호텔에서 쉬기로 했다.

하지만 나와 아들, 딸은 아직 마지막 일정이 남아 있었다.

시부야 스카이(SHIBUYA SKY).

밤 8시가 조금 넘어서 셋이 다시 호텔을 나섰다.

램블러 기록상 오후 8시 02분 출발.

오늘 밤 마지막 출격이다.

시부야 스크램블 스퀘어(渋谷スクランブルスクエア)로 향했다.

건물 주변은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특히 분홍빛으로 환하게 빛나는 크리스마스트리가 눈에 띄었다.

아들과 나,
딸과 나.

트리 앞에서 번갈아 사진도 남겼다.

이제 시부야 스카이에 올라가 도쿄의 크리스마스 야경을 내려다볼 차례다.

오늘 하루 종일 비 맞으며 돌아다닌 마지막 보상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또 그놈의 비가 문제였다.

입구에 도착해 전광판을 보니 딱 적혀 있었다.

ROOFTOP CLOSE ×

INDOOR OPEN ○

옥상 폐쇄.

실내 전망공간은 열려 있었지만 우리가 보러 온 것은 옥상에서 바라보는 도쿄의 밤이었다.

옆에는 한국어로도

‘옥상 폐쇄 시 무료 취소 서비스’

라고 안내되어 있었다.

아이고.

여기까지 왔는디.

결국 관람을 포기하고 환불받기로 했다.

“젠장…….”

하루 종일 비가 따라다니더니 마지막 일정까지 제대로 발목을 잡았다.

멋진 도쿄 야경을 보고 첫날을 마무리하려 했는데 이렇게 끝나다니 조금 허무했다.

그래도 스크램블 스퀘어 주변의 크리스마스 장식을 조금 더 구경했다.

비에 젖은 시부야 고층빌딩과 거리는 여전히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도 한계다.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13. 비와 푸른빛의 크리스마스이브

그렇게 도쿄에서의 첫날이 끝났다.

하루 종일 비가 따라다녔고, 사람 많은 시부야에서는 몇 번이나 지쳤다.

마지막 시부야 스카이까지 비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그래도 청의동굴(青の洞窟)에서 가족과 함께 걸었던 푸른빛의 길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비에 젖은 길 위로 번지던 푸른빛과 그 사이를 함께 걷던 우리 네 사람.

새벽 인천공항에서 나란히 모았던 네 켤레의 회색 뉴발란스 운동화는 오늘 하루 종일 도쿄의 같은 길을 걸었다.

2025년 크리스마스이브.

우리 가족의 도쿄여행 첫날은 그렇게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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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일본 소도시 여행
두경아 지음 / 길벗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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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함께하는 일본 알펜루트 여행기

여행 5일차, 2026.05.26.(화요일)
이제 진짜 안녕, 도야마 그리고 알펜루트(알프스 재펜)


1. 오전 6시 50분, 이제 정말 떠나는 아침

여행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오늘 오전 10시 15분 고마쓰공항에서 출발하는 인천행 비행기를 타면 이번 여행도 정말 끝이다.

오전 6시 50분경 HOTEL JAL CITY TOYAMA를 나섰다.

며칠 동안 아침마다 나서고 저녁이면 다시 돌아왔던 호텔이다.

첫날 도야마에 도착했을 때는 앞으로 며칠 동안 무엇을 보게 될지 기대가 컸는데, 이제는 캐리어를 끌고 떠나는 날이 됐다.

호텔을 나와 도야마역으로 걸었다.

아침의 도야마 거리는 아직 한산했다.

며칠 동안 수없이 오갔던 도야마역 앞 풍경도 오늘 보는 것이 마지막이다.

낡은 녹색 트램 한 대가 아침 거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 이런 풍경도 안녕이다.

그래도 그냥 갈 수는 없다.

도야마역으로 가기 전에 역시 스타벅스에 들렀다.

역 바로 앞 스타벅스.

여행 내내 참 자주도 마신 커피다.

오늘 아침은 따로 밥을 먹지 않고 커피 한 잔으로 끝냈다.

올 때 대한항공을 타고 인천에서 고마쓰로 올 때도 두 시간 남짓한 짧은 노선인데 기내식이 나왔다.

그러니 돌아가는 비행기에서도 기내식이 나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침은 그냥 커피만 먹자. 비행기 타믄 밥 주잖어.”

마님과 자리에 앉았다.

마님은 마지막 아침 커피를 마시고 나는 출발 시간을 확인했다.

옆에는 우리의 캐리어가 놓여 있었다.

여행 첫날에는 앞으로 며칠 동안 끌고 다닐 짐이었는데 이제는 한국으로 데려갈 짐이다.

마님과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일본에서의 마지막 아침을 시작했다.

오늘은 더 이상 어디를 바쁘게 돌아다닐 필요도 없다.

이제 공항으로 가서 집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2. 오전 7시 37분, 쓰루기를 타고 마지막으로 도야마를 떠나다

커피를 마시고 도야마역으로 들어갔다.

신칸센 중앙 개찰구로 향했다.

전광판을 보니 우리가 탈 열차가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오전 7시 37분 출발. 쓰루가행 쓰루기.

그 뒤로 오전 8시 16분 쓰루기와 오전 8시 24분 가가야키가 차례로 표시되어 있었다.

열차 이름도 재미있었다.

‘쓰루기(つるぎ)’는 다테야마 연봉의 험준한 명봉 쓰루기다케(剱岳)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번 여행 내내 바라보고 그 안으로 직접 들어갔던 북알프스의 산 이름이 신칸센 열차명에도 남아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출발하는 ‘가가야키(かがやき)’는 우리말로 하면 ‘빛남’, ‘찬란함’ 정도의 뜻이다.

북알프스를 실컷 보고 떠나는 마지막 아침에 ‘쓰루기’와 ‘가가야키’라는 이름을 나란히 보고 있으니 괜히 더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탈 것은 오전 7시 37분 쓰루기였다.

개찰구를 지나 승강장으로 올라갔다.

도야마역 역명판도 다시 한번 보였다.

‘富山 Toyama’

며칠 동안 여행의 중심이 되었던 역이다.

열차가 들어오고 마님과 캐리어를 끌고 객차에 올랐다.

객차 안은 의외로 한산했다.

붉은색 계열의 좌석들이 길게 이어졌고 빈자리도 많았다.

커다란 캐리어도 우리 좌석 가까이에 놓아둘 수 있었다.

“마지막까지 한산허니 좋네.”

오전 7시 37분.

쓰루가행 쓰루기가 도야마역을 출발했다.

목적지는 고마쓰역이다.

승차권에는 도야마 오전 7시 37분 출발, 고마쓰 오전 8시 13분 도착으로 적혀 있었다.

열차가 도야마를 벗어나자 창밖으로 다시 익숙한 풍경들이 흘러갔다.

일본식 주택들이 이어지고, 물이 찬 논과 밭이 지나갔다.

그리고 멀리 산들이 길게 이어졌다.

오늘은 어제처럼 쨍하게 맑지는 않았다.

산에는 약간의 연무가 끼어 있었지만 그 너머로 높은 봉우리의 눈이 여전히 보였다.

이번 여행 내내 참 많이 바라본 산들이다.

처음 도야마에 왔을 때부터 눈에 들어왔고,
쿠로베 협곡으로 가는 열차에서도 바라봤고,
어제는 그 산속으로 직접 들어가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를 통째로 넘어왔다.

그리고 오늘은 돌아가는 열차 안에서 마지막으로 바라본다.

“안녕.”

창밖으로 설산을 계속 바라봤다.

“이제 진짜 안녕이야.”

어제 아침에는 저 산을 향해 그렇게 신나게 달려갔는데 하루가 지난 지금은 반대 방향으로 떠나고 있다.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그래서 또 여행인가 보다.


3. 신타카오카와 가나자와, 여행의 기억을 다시 지나 고마쓰로

열차는 서쪽으로 달렸다.

넓게 물을 댄 논과 작은 마을들이 계속 이어졌다.

열차는 신타카오카역에 정차했다.

‘新高岡 Shin-Takaoka.’

이번 여행에서 다카오카와 아마하라시를 찾아갔던 기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아마하라시 해안에서 바라봤던 바다와,
바다 건너 설산을 기다리며 걸었던 시간도 생각났다.

신타카오카를 지나 열차는 다시 속도를 냈다.

객차 안내판에는 잠시 뒤 가나자와가 표시됐다.

‘Kanazawa.’

가나자와라는 이름을 보니 이번 여행에서 가장 특별했던 장소 가운데 하나가 떠올랐다.

노다산.

그리고 위대하신 천하영웅 윤봉길 의사님의 암장지.

관광지 하나를 지나가는 기분과는 달랐다.

그곳에서 의사님이 겪으셨던 마지막 시간과,
순국 뒤 일제가 유해를 아무렇게나 묻었던 그 자리를 직접 찾아갔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마지막 날 열차 안에서 다시 가나자와를 지나니 마음이 묘했다.

열차는 가나자와를 지나 계속 남쪽으로 달렸다.

한동안 도시와 마을이 이어지다가 다시 논과 산이 펼쳐졌다.

멀리 산줄기 사이로 눈을 이고 있는 높은 봉우리도 다시 나타났다.

여행이 끝날 때가 되니 지나왔던 장소들이 하나씩 다시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객차 안내판에 마침내 고마쓰가 표시됐다.

“곧 고마쓰에 정차합니다.”

이제 일본에서 타는 마지막 신칸센도 거의 끝나간다.


4. 오전 8시 13분, 고마쓰역에서 곧바로 공항으로

열차는 정확히 오전 8시 13분 고마쓰역에 도착했다.

신칸센에서 내려 승강장을 빠져나왔다.

고마쓰역은 도야마나 가나자와보다 훨씬 한산했다.

역 밖으로 나오자 바로 공항행 버스 승차장이 보였다.

‘小松空港行き バスのりば’

고마쓰공항행 버스 승차장은 4번이었다.

우리가 탈 버스는 오전 8시 22분 출발.

열차에서 내린 지 10분도 되지 않아 바로 버스로 갈아탈 수 있는 일정이었다.

“시간 딱딱 맞네.”

고마쓰역 앞 모습도 마지막으로 사진에 남겼다.

오전 8시 22분경 공항행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 전광판에도 ‘小松駅 → 小松空港’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고마쓰역에서 공항까지는 멀지 않았다.

시가지를 빠져나가 약 10분 정도 달리자 고마쓰공항에 도착했다.


5. 한산해서 더 좋았던 고마쓰공항

고마쓰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대한항공 국제선 체크인 카운터가 바로 보였다.

그런데 공항 분위기가 참 조용했다.

대도시 국제공항처럼 여행객들이 끝도 없이 몰려 있는 풍경이 아니었다.

대한항공 체크인 카운터에도 사람들이 조금 서 있을 뿐이었다.

“아이고, 사람 별로 없으니 좋네.”

그러고 보니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는 꼴인가.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을 싫어하는 거다.

여행지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좋은 곳이라도 사람이 너무 많으면 정신이 없고,
조용한 곳에서 천천히 둘러볼 수 있으면 훨씬 좋다.

고마쓰공항은 그런 점에서 마음에 들었다.

시골공항답게 크지도 않았고 사람도 많지 않았다.

복잡하게 헤맬 일도 없었다.

체크인을 마치고 공항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국제선 출발 안내가 보이고,
통로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용 조형물도 있었다.

벽 한쪽에는 일본 특유의 화려한 색으로 꾸민 커다란 그림도 설치되어 있었다.

사람이 거의 없는 대기공간에는 의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마님과 앉아서 비행기를 기다렸다.

창밖으로는 고마쓰공항 활주로 너머 산들이 보였다.

높은 산에는 아직 눈이 남아 있었다.

일본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산이 보인다.

전광판에는 우리가 탈 비행기도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대한항공 KE2190.
서울(인천).
오전 10시 15분.

이제 정말 일본을 떠날 시간이다.


6. 대한항공에 오르고, 이번에는 자위대 전투기 구경

탑승 시간이 되어 대한항공 비행기로 향했다.

탑승교 앞에서 마님과 나란히 마지막 사진도 한 장 남겼다.

며칠 동안 참 많이도 사진을 찍었다.

이제 일본에서 찍는 사진도 정말 몇 장 남지 않았다.

비행기에 탑승했다.

출발 예정시간은 오전 10시 15분.

시간도 거의 예정대로였다.

이제 활주로로 나가 바로 출발하나 싶었다.

그런데 비행기가 좀처럼 뜨지 않았다.

창밖을 보니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공항 한쪽에 회색 자위대 전투기들이 여러 대 줄지어 서 있었다.

그리고 전투기들이 계속 활주로 주변을 오가고 있었다.

고마쓰 공항은 일본 항공자위대 제6항공단이 주둔하는 공항이다.

“야, 전투기가 왜 이렇게 많어?”

한 대가 움직이면 또 다른 전투기가 보이고,
활주로 쪽에서는 계속 군용기 움직임이 이어졌다.

고마쓰공항은 민간공항과 자위대 기지가 함께 있는 곳이다.

이날도 훈련이 있었던 모양이다.

민항기를 타러 왔다가 뜻밖에 자위대 전투기 구경까지 하게 됐다.

“전투기가 끝도 없이 나오네.”

우리가 탄 비행기는 그렇게 약 15분 정도 기다렸다.

출발부터 크게 짜증날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언제 또 이렇게 일본 자위대 전투기들을 줄줄이 구경하겠나.

잠시 뒤 마침내 우리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속도가 붙더니 몸이 좌석 뒤로 살짝 밀렸다.

그리고 땅이 점점 멀어졌다.

창밖 아래로 고마쓰공항 활주로와 주변의 논밭, 마을이 한꺼번에 내려다보였다.

조금 더 고도를 높이자 해안선이 길게 나타났다.

바다와 육지가 선명하게 갈렸다.

조금 전까지 우리가 있던 공항과 활주로도 점점 작아졌다.

“안녕, 일본.”

이제 정말 끝이다.

비행기는 인천 하늘을 향해 방향을 잡았다.


7. 두 시간도 안 되는 거리인데 기내식까지

고마쓰에서 인천까지는 두 시간도 걸리지 않는 짧은 국제선이다.

그런데 대한항공에서는 이런 짧은 노선에도 기내식이 나온다.

일본으로 올 때도 기내식을 먹었기 때문에 돌아가는 비행기에서도 나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침에는 따로 식사를 하지 않고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 잔만 마셨다.

예상대로 이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내식이 나왔다.

“그려, 이거 먹을라고 아침 안 먹었지.”

뚜껑을 열어보니 밥과 고기, 초록색 채소가 들어간 따뜻한 식사였다.

옆에는 작은 빵과 과자, 제주 퓨어워터도 함께 나왔다.

커피도 한 잔 받았다.

두 시간도 안 되는 비행인데 이렇게 한 끼를 챙겨준다.

그리고 맛있었다.

나는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 맛있게 먹었다.

마님은 그런 모습도 사진으로 남겼다.

“뭘 밥 먹는 것까지 찍어.” 하면서도 그냥 먹었다.

아침을 커피 한 잔으로 끝냈으니 더 맛있었다.

마님과 나란히 앉아 기내식을 먹었다.

창밖에는 구름과 바다가 이어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래쪽 해안과 섬들도 보였다.

이제 일본에서의 일정은 모두 뒤에 남겨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그러다 문득 우리가 출발한 공항 이름이 생각났다.

고마쓰.

“고마쓰…… 고마씁니다.”

이번 여행도 참 고마웠다.


8. 낮 12시, 다시 인천

낮 12시 정각.

비행기가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고마쓰에서 출발한 지 두 시간도 되지 않았다.

비행기에서 내려 긴 통로를 따라 입국장으로 이동했다.

익숙한 인천공항이다.

일본의 한산한 고마쓰공항에서 출발해 다시 거대한 인천공항으로 돌아오니 분위기부터 완전히 달랐다.

입국심사장을 지나 수하물 찾는 곳으로 향했다.

전광판 시계를 보니 낮 12시 24분.

이제 캐리어만 찾으면 된다.

그런데 이놈의 캐리어가 금방 나오지는 않았다.

비행기가 도착하고 약 40분 정도 지나서야 짐까지 모두 챙길 수 있었다.

며칠 전 같은 캐리어를 끌고 일본으로 떠났는데 다시 그 짐을 끌고 한국 땅에 서 있었다.

이제 정말 모든 여행 절차가 끝났다.

마님과 짐을 챙겨 집으로 향했다.


9. “고마쓰, 고마씁니다.”

이번 여행도 그렇게 끝났다.

돌아보면 이번 여행에는 산과 기차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가나자와에서는 내가 오래도록 마음에 두고 있었던 위대하신 천하영웅 윤봉길 의사님의 흔적을 찾아갔다.

노다산의 암장지를 직접 찾아가 의사님이 순국하신 뒤 일제에 의해 유해가 묻혔던 바로 그 자리를 바라봤다.

거꾸로 묻혔다고 알려진 의사님의 암장지.

그곳에 직접 서 있으니 책이나 사진으로 접할 때와는 전혀 달랐다.

그리고 그 암장지를 찾아내고,
잊히지 않도록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 애쓴 사람들의 흔적도 만났다.

윤 의사님은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 의거로 일본군 수뇌부에 큰 타격을 입힌 뒤 체포되셨고,
그해 12월 19일 가나자와에서 스물다섯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셨다.

그리고 의사님은 바로 충청남도 예산 출신이다.

나 역시 충남사람이다.

그 사실 때문에 노다산에서 느낀 마음은 더 남달랐다.

멀리 일본 땅까지 와서,
같은 충남 땅에서 태어난 한 젊은이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던지고 마지막에는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평소에도 윤봉길 의사님을 위대하신 천하영웅이라 생각해왔지만,
그분의 마지막 흔적이 남은 땅에 직접 서보니 존경심이 더 커졌다.

“의사님, 같은 충남사람인 제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암장지를 바라봤던 기억은 이번 여행에서 쉽게 잊히지 않을 것 같다.

가나자와에서 만난 윤봉길 의사님의 숨결은 이번 여행에서 가장 무겁고도 뜻깊은 기억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기억들이 이어진다.

다카오카와 아마하라시에서는 바다와 설산이 함께 어우러지는 풍경을 보았다.

아마하라시 해안에서 바다 건너 산을 바라보고,
기차와 바다와 작은 마을이 어우러지는 풍경 속을 걸었다.

비 내리는 쿠로베 협곡에서는 토롯코열차를 타고 네코마타까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비에 젖은 짙은 초록의 산, 산허리에 걸린 구름, 깊은 계곡과 철교, 그리고 험한 산속에 만들어진 발전시설까지.

그날은 비가 와서 더 좋았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토록 기다렸던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를 넘어왔다.

일본에 온 뒤 매일 라이브카메라를 확인하며 날씨를 걱정했는데,
정작 우리가 가는 날은 하늘이 거짓말처럼 맑았다.

5월 말의 새하얀 무로도 설원,
영화 『비밀』을 보고 언젠가는 꼭 가보겠다고 마음먹었던 유키노오타니,
설산 사이로 내려다본 구로베호,
그리고 토목기술자인 내 눈을 사로잡았던 거대한 구로베댐.

어제는 해발 2,450m 무로도의 눈밭과 유키노오타니를 걷고 있었는데,

하루가 지난 오늘은 다시 인천에 와 있다.

여행은 참 빠르다.

떠나기 전에는 한참 남은 것 같다가도 막상 시작하면 순식간에 지나간다.

그래도 사진은 남고,

마님과 함께 보고 걷고 웃었던 기억도 남는다.

그리고 마지막 아침 열차 안에서 바라본 설산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안녕. 이제 진짜 안녕이야.”

그렇게 북알프스 알펜루트와 작별하고 고마쓰공항에서 일본을 떠났다.

“고마쓰, 고마씁니다.”

위대하신 천하영웅 윤봉길 의사님의 숨결을 만났던 가나자와도,

바다와 설산을 함께 바라봤던 아마하라시도,

비와 구름 속 쿠로베 협곡도,

눈부시게 맑았던 다테야마와 유키노오타니도,

모두 참 좋았다.

그리고 그 모든 곳을 사랑하는 마님과 함께했다.

“마님, 이번 여행도 정말 고생했수다.”

이렇게 아내와 함께한 일본 북알프스 알펜루트 여행을 모두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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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일본 소도시 여행
두경아 지음 / 길벗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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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함께하는 일본 알펜루트 여행기

여행 4일차, 2026.05.25.(월요일)
드디어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를 넘다-2편


19. 오전 9시 40분, 드디어 유키노오타니를 걷다

무로도 고원을 한 바퀴 돌아 다시 터미널 쪽으로 돌아왔다.

오전 9시 30분이 지나면서 드디어 유키노오타니 설벽 산책로가 개방됐다.

우리는 오전 9시 40분경 설벽으로 향했다.

아까 버스를 타고 지나왔던 바로 그 길을 이번에는 직접 걷는다.

밖으로 나가자 먼저 ‘立山・雪の大谷, Tateyama Snow Wall’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해발 2,390m.

기온 8℃.

그리고 오늘의 설벽 높이 11m.

2026년 5월 25일이라는 날짜까지 정확하게 적혀 있었다.

“11미터구만.”

예전에 유키노오타니의 가장 높은 설벽이 20m에 육박했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솔직히 조금은 아쉬웠다.

“4월 개장하자마자 왔어야 했나.”

5월 말이다 보니 그동안 눈이 많이 녹은 모양이었다.
우리가 찾은 이날 현지 안내판에 표시된 최고 높이는 11m였다.

그래도 막상 그 앞에 서보니 11m도 엄청났다.

사람 키의 몇 배나 되는 눈벽이 도로 양쪽으로 길게 이어졌다.

마님과 나는 설벽에 붙어 사진부터 찍었다.

한쪽 다리를 들고 벽에 기대보기도 하고,

두 팔을 활짝 벌려보기도 하고,

설벽을 기어오르는 시늉도 해봤다.

“ㅎㅎ 이거 재밌네.”

눈벽에는 겨울 동안 쌓인 눈의 층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하얀색과 회색빛 선들이 여러 겹 겹쳐져 있었다.

한 번에 쌓인 눈이 아니라 수많은 눈과 바람,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낸 벽이라는 것이 눈으로 보였다.

조금 더 걸어가자 ‘雪の大谷 最高地点 11m’라고 적힌 표지판이 나타났다.

오늘 가장 높은 설벽 지점이었다.

그 앞에서도 마님과 사진을 찍었다.

사람들은 계속 몰려들었다.

설벽 사이 도로가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우리처럼 사진을 찍는 사람,
눈벽을 만져보는 사람,
하늘을 올려다보며 감탄하는 사람들.

가끔 고원버스도 설벽 사이 도로를 지나갔다.

아까 우리가 버스를 타고 지나왔던 모습을 이제는 밖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영화 『비밀』이 떠올랐다.

영화에서 처음 보고

“저기가 어디여. 언젠가는 꼭 가봐야겄다.”

생각했던 바로 그곳이다.

그 장소를 지금 사랑하는 마님과 함께 직접 걷고 있었다.

사진으로 볼 때와는 전혀 달랐다.

눈벽의 높이도,
차가운 공기도,
파란 하늘과 하얀 눈의 대비도 직접 와봐야 느낄 수 있었다.

5월 말에 이렇게 거대한 눈벽 사이를 걷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하고 즐거웠다.

“오…… 내가 진짜 여길 왔구만.”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아뒀던 장소 하나를 이렇게 직접 밟았다.


20. 오전 10시 10분, 이번에는 산속을 뚫고 다이칸보로

유키노오타니에서 신나는 시간을 보내고 다시 무로도 터미널로 돌아왔다.

이제 알펜루트 횡단을 계속해야 한다.

오전 10시 10분경 다이칸보로 가는 다테야마 터널 전기버스에 올랐다.

조금 전까지는 파란 하늘 아래 눈밭을 걷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완전히 산속으로 들어간다.

버스는 다테야마 산체를 뚫어 만든 터널 속을 달렸다.

창밖 풍경은 없다.

콘크리트 벽과 터널 조명이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이것 역시 알펜루트의 재미였다.

산을 올라오는 동안 케이블카와 고원버스를 탔고,

이제는 산 자체를 관통하는 전기버스를 탄다.

눈 위로 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산속을 뚫고 반대편으로 넘어가는 셈이었다.

다테야마를 횡단하고 있다는 느낌이 더 강해졌다.

약 15분 뒤.

오전 10시 25분경 다이칸보에 도착했다.


21. 해발 2,316m 다이칸보, 설산과 구로베호를 내려다보다

다이칸보는 해발 2,316m.

역 밖 전망대로 올라갔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는 순간 또 감탄사가 나왔다.

“와…….”

우리가 조금 전까지 있던 무로도와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었다.

앞쪽으로는 검고 뾰족한 산들이 거대한 벽처럼 솟아 있었고, 산 아래 깊은 골짜기에는 에메랄드빛 구로베호가 보였다.

그 뒤로 또다시 눈을 뒤집어쓴 북알프스의 산들이 길게 이어졌다.

오늘 정말 설산은 원 없이 본다.

하지만 볼 때마다 또 좋았다.

마님과 전망대 난간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둘이 셀카도 찍고,

마님 혼자도 찍고,

나도 설산과 구로베호를 배경으로 사진을 남겼다.

전망대에는 주변 산들의 이름과 높이를 표시한 안내판도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산들이 그냥 이름 모를 산이 아니라 하나하나 이름과 높이를 가진 북알프스의 봉우리들이었다.

그리고 다이칸보에는 재미있는 곳이 하나 더 있었다.

눈을 파서 만든 터널 같은 공간이었다.

‘雪のポケット’, 눈의 포켓.

사람 키보다 높은 눈을 파내 마치 동굴처럼 만들어 놓았다.

밖은 햇빛이 쨍했지만 안으로 들어가니 완전히 눈 동굴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마님과 나란히 입구에 서서 사진도 찍고,

안쪽에서도 또 사진을 남겼다.

“오늘 눈은 정말 원 없이 만져보네.”

무로도에서는 넓은 설원과 유키노오타니의 높은 설벽을 봤다면,

다이칸보에서는 설산 아래로 깊게 내려앉은 구로베호와 북알프스의 험준한 산세를 내려다봤다.

같은 알펜루트 안에서도 장소를 하나 옮길 때마다 풍경이 완전히 달라졌다.


22. 오전 10시 50분, 로프웨이를 타고 허공을 건너다

다이칸보에서 다음 목적지는 구로베다이라다.

이번에 탈 것은 다테야마 로프웨이.

오전 10시 50분 출발편이었다.

역 안으로 들어가니 또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승강장 앞에는 로프웨이를 타려는 사람들이 빽빽하게 줄을 서 있었다.

“야, 오늘 사람 머리 구경도 원 없이 허네.”

ㅋㅋㅋ.

드디어 차례가 되어 로프웨이에 올라탔다.

이번에는 정말 공중에 매달려 가는 케이블카였다.

다이칸보와 구로베다이라 사이를 지지기둥 없이 한 번에 연결한다.

출발하자 발아래로 산비탈이 멀어졌다.

아래에는 아직 눈이 많이 남아 있었고,

멀리에는 구로베호와 험준한 산들이 펼쳐졌다.

맞은편에서는 반대 방향 로프웨이가 산비탈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알펜루트가 얼마나 깊은 산속에 만들어져 있는지가 더욱 실감났다.

조금 전까지 우리가 서 있던 다이칸보는 점점 멀어졌다.

한쪽에는 눈 덮인 산,

한쪽에는 초록이 올라오기 시작한 산.

겨울과 봄의 경계 위를 공중으로 건너는 느낌이었다.

“이야…… 이것도 끝내준다.”

오늘은 타는 것마다 다 재미있었다.


23. 오전 11시경, 구로베다이라에서 또 설산 구경

오전 11시경 구로베다이라에 도착했다.

다이칸보에서 내려오니 고도는 조금 낮아졌지만 여전히 주변에는 눈이 많이 남아 있었다.

구로베다이라 전망대로 올라갔다.

밖으로 나가자 다시 산들이 펼쳐졌다.

조금 전 다이칸보에서 바라보던 산들을 이번에는 다른 높이와 다른 각도에서 보고 있었다.

검은 바위산 사이로 하얀 눈이 골짜기를 따라 길게 남아 있었다.

반대편으로는 우리가 로프웨이를 타고 내려온 다이칸보 쪽 산이 올려다보였다.

맑은 하늘 아래 설산의 윤곽이 아주 선명했다.

“오늘 진짜 설산 원 없이 본다.”

마님과 전망대를 천천히 돌아다니며 또 사진을 찍었다.

이날 하루 도대체 사진을 몇 장이나 찍었는지 모르겠다.

사진을 찍다가 전망대 야외 테이블에 잠시 앉았다.

아침에 가져온 간식도 조금 꺼냈다.

바나나 하나를 들고 또 설산을 바라봤다.

“이야, 바나나 맛도 좋네.”

해발 높은 산속 전망대에 앉아 눈 덮인 산을 바라보며 먹는 간식.

별것 아닌데 이런 것도 여행에서는 기억에 남는다.

마님은 또 휴대전화를 들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는 카메라로 산을 찍고,

마님은 휴대전화로 또 찍고.

오늘 둘이 완전히 사진에 미쳐 있었다.

파란 하늘과 설산.

눈이 녹으면서 초록빛을 되찾기 시작한 산비탈.

그리고 저 멀리 계속 이어지는 북알프스 산줄기.

잠시 전망대에서 쉬며 풍경을 충분히 바라봤다.

이제 다음은 구로베호다.

오전 11시 30분.

이번에는 구로베 케이블카를 타고 산속 터널을 따라 아래로 내려갈 차례다.


24. 오전 11시 30분, 구로베 케이블카를 타고 구로베호로

구로베다이라에서 설산 풍경을 충분히 즐긴 뒤 다시 이동할 시간이 됐다.

오전 11시 30분.

이번에는 구로베 케이블카를 타고 구로베호로 내려간다.

승강장으로 내려가니 빨간색과 크림색으로 칠해진 작은 케이블카가 기다리고 있었다.

구로베 케이블카는 지금까지 타고 온 교통수단들과 또 달랐다.

산비탈을 따라 밖으로 달리는 것이 아니라 전 구간이 터널 속에 있다.

차량에 올라 자리를 잡았는데, 이 케이블카 좌석이 엄청나게 좁았다.

가방을 벗고 앉았어야 하는데 나는 백팩을 등에 멘 채 그대로 앉아버렸다.

등을 뒤로 기대면 가방이 등받이에 걸리고, 그렇다고 공간이 좁아서 다시 일어나 가방을 벗을수도 없었다.

결국 가방이 의자 뒤에 닿지 않도록 몸을 앞으로 잔뜩 숙이고 고개까지 푹 숙인 우스꽝스러운 자세가 되어버렸다.

마님이 그 모습을 놓칠 리가 없다.

사진을 찍는데 나도 내 꼴이 우스워 웃음이 터졌다.

조금 쪽팔리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그렇게 불편한 자세로 내려가는 모습까지 사진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그래도 이동시간은 길지 않았다.

약 5분 뒤 구로베호역에 도착했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역명판 앞에서도 사진을 한 장 남겼다.

이제 드디어 오늘 알펜루트 횡단에서 꼭 보고 싶었던 또 하나의 장소,

구로베댐이다.


25. 터널을 빠져나오자 나타난 구로베댐

구로베호역에서 사람들을 따라 터널을 걸었다.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통로를 지나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시야가 확 트였다.

“와…….”

눈앞에 거대한 구로베댐과 구로베호가 나타났다.

아까 다이칸보와 구로베다이라에서 멀리 내려다보던 구로베호를 이제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었다.

무엇보다 물 색깔이 참 예뻤다.

푸른빛과 초록빛이 어우러진 구로베호의 물빛이 햇빛을 받아 더욱 선명했다.

호수 주변에는 연두색 신록이 한창이었고,

그 뒤로는 아직 눈을 잔뜩 이고 있는 산들이 솟아 있었다.

하늘까지 맑았다.

5월 말의 봄과 겨울이 한 화면 안에 함께 들어와 있는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 호수를 막아선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구로베댐이었다.

댐 위를 직접 걸어 반대편까지 건너가야 한다.

마님과 나는 천천히 댐 위를 걷기 시작했다.


26. 높이 186m, 구로베댐 한가운데 서다

구로베댐 위를 걸어가다 중간쯤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난간에는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는 표지가 붙어 있었다.

「ここは黒部ダム中心」
‘여기는 구로베댐 중심.’

그리고 그 옆에 숫자가 적혀 있었다.

댐 높이 186m.
댐 길이 492m.
표고 1,454m.

“186미터여?”

숫자로만 보면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난간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찔했다.

댐 아래쪽 계곡이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였다.

우리가 걷고 있는 곳이 웬만한 고층건물 꼭대기보다도 높은 곳이라는 사실이 그제야 몸으로 느껴졌다.

반대쪽을 보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거대한 구로베호가 산 사이로 길게 뻗어 있고,

멀리 눈 덮인 산들이 호수 끝을 둘러싸고 있었다.

마님과 함께 구로베호를 배경으로 셀카도 찍었다.

오늘 아침부터 수없이 많은 풍경을 봤는데 또 사진을 찍는다.

그래도 이건 안 찍을 수가 없었다.

거대한 댐 한가운데 서서 한쪽으로는 호수를 보고,

다른 한쪽으로는 186m 아래의 계곡을 내려다보는 경험은 흔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27. 역시 우리 토목기술자의 위대함이여

댐을 건너며 가까이서 보니 구로베댐의 규모가 더욱 실감났다.

댐은 일자로 뻗은 벽이 아니라 산과 산 사이를 막으며 활처럼 휘어져 있었다.

거대한 콘크리트 벽이 계곡을 가로막고 있었고, 한쪽에는 푸른 구로베호의 물이 가득 차 있고 벽 하나 너머는 까마득한 계곡이었다.

높이 186m, 길이 492m.

숫자로만 보면 큰 댐이라는 정도인데 직접 그 위를 걸어보니 규모가 완전히 다르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 댐이 만들어진 역사를 생각하면 더 놀랍다.

구로베댐과 구로베가와 제4발전소 건설은 1956년에 시작해 1963년에 완성됐다.

무려 7년에 걸친 대공사였다.

총공사비는 당시 513억 엔.

이것이 어느 정도의 돈이었는지 감이 잘 오지 않아 1963년 물가를 기준으로 현재 가치로 환산해보면 약 2,657억 엔, 현재 환율로 우리 돈 약 2조 4천억 원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다목적댐인 대청댐과 비교해보면 그 규모가 조금 더 실감난다.

대청댐은 1975년 착공해 1980년 준공했으며 총사업비는 당시 약 1,557억 원이었다. 이를 1980년 소비자물가를 기준으로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9천억 원 정도다.

단순 비교는 어렵겠지만, 현재 가치로 보면 구로베댐 건설에는 대청댐의 약 2.7배에 이르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 셈이다.

연인원 약 1,000만 명이 공사에 참여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오마치 쪽에서 터널을 뚫던 중에는 물과 부서진 암반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파쇄대를 만나 공사가 한동안 막혔다.

길이 약 80m에 불과한 그 구간을 돌파하는 데만 7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그리고 조사와 건설 과정에서 17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금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전기버스를 타고 터널을 지나고, 댐 위를 걸으며 경치를 보고 있지만 이 모든 시설은 당시 사람들의 엄청난 노동과 희생 끝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댐을 바라보는 느낌도 조금 달라졌다.

“야…… 역시 우리 토목기술자의 위대함이여.”

토목기술자인 내 눈에는 단순한 관광지로만 보이지 않았다.

이 깊은 산속에 길을 내고, 터널을 뚫고,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세우고, 물을 막아 발전까지 가능하게 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했다.

사진으로 볼 때는 그저 큰 댐이었는데 직접 그 위를 걸어보고 역사를 알고 나니 왜 구로베댐이 일본 토목사의 상징처럼 여겨지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더구나 주변 풍경도 기가 막혔다.

짙은 녹색의 산, 막 돋아난 연두색 신록, 그 사이로 이어지는 깊은 계곡, 그리고 그 뒤에 솟아 있는 하얀 설산.

인간이 만든 거대한 댐과 북알프스의 자연이 한눈에 들어왔다.


28. 전망대로 올라가는 끝없는 계단

댐을 건넌 뒤 안내판을 보니 위쪽으로 ‘댐 전망대’와 ‘방수 관람 스테이지’가 표시되어 있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다.

“전망대 올라가야지.”

그런데 계단을 보니 만만치 않았다.

산비탈을 따라 빨간 계단이 끝없이 이어졌다.

마님과 함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무로도 고원을 걷고, 유키노오타니 설벽도 걸었고, 계속해서 타고 걷기를 반복한 뒤라 다리가 슬슬 무거워질 때였다.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구로베댐 전망대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한 계단,

또 한 계단.

계단을 오르다 중간중간 뒤를 돌아보았다.

올라갈수록 조금 전 우리가 걸어왔던 댐이 아래로 내려가고, 활처럼 휘어진 구로베댐의 모습이 점점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구로베호의 예쁜 물빛도 위에서 내려다보니 더욱 선명했다.

“야, 올라오길 잘혔다.”

힘은 들었지만 높이 올라갈수록 풍경이 그만큼 보답해주었다.


29. 표고 1,508m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구로베댐

마침내 전망대에 올라섰다.

‘黒部ダム 展望台休憩所
KUROBE DAM REST HOUSE
標高 1,508M’

표지판이 서 있었다.

댐 위가 표고 1,454m였으니 50m 넘게 더 올라온 셈이다.

그리고 여기서 내려다보니 구로베댐의 진짜 규모가 제대로 보였다.

활처럼 휘어진 거대한 댐의 곡선,

그 뒤를 가득 채운 구로베호의 물,

호수 양쪽을 감싸고 있는 초록빛 산,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지는 하얀 설산까지.

아래에서 볼 때와는 또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이야…… 여기가 제대로네.”

짙은 산과 하얀 설산 사이에 푸른빛과 초록빛이 감도는 호수가 길게 들어앉아 있었다.

마님과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었다.

마님 혼자도 찍고,

나도 찍고,

둘이 셀카도 찍었다.

나는 다시 휴대전화를 들고 구로베댐을 찍었다.

아침부터 카메라와 휴대전화를 몇 번이나 들었다 놨다 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눈앞에 이런 풍경이 있는데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오늘 하루 날씨가 도와준 것이 정말 고마웠다.

파란 하늘 아래 구로베호의 물빛도 선명했고 멀리 설산까지 깨끗하게 보였다.

알펜루트를 횡단하며 하루 종일 보아온 설산과 신록,

그리고 거대한 구로베댐과 구로베호가 한 장면 안에 모두 들어와 있었다.

전망대에 올라오길 정말 잘했다.


30. 다시 내려와 오기사와행 전기버스 승강장으로

전망대에서 충분히 구로베댐을 내려다본 뒤 다시 아래로 내려왔다.

올라올 때 힘들었던 계단을 이번에는 거꾸로 내려간다.

알펜루트 횡단도 이제 거의 마지막이다.

오기사와행 전기버스 승강장으로 가는 길은 우리가 올라왔던 길과 달랐다. 반대편 산속으로 이어지는 터널식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조금 전까지 파란 하늘 아래 구로베댐과 설산을 보고 있었는데 다시 콘크리트 터널 속으로 들어왔다.

통로 한쪽에는 물이 흘러나오는 곳도 있었다.

마님이 손을 내밀어 물을 만져봤다.

그렇게 터널을 따라 걸어 전기버스 승강장으로 향했다.

오기사와(扇沢)로 가는 전기버스 안내가 보였다.
전광판에는 우리가 탈 버스가 표시되어 있었다.

‘扇沢行 12:35発’

오기사와행 오후 12시 35분 출발.

시간이 조금 남아 승강장에서 잠시 기다렸다.

새벽부터 산을 오르고 눈길을 걷고 여러 교통수단을 갈아타며 여기까지 왔다.

이제 이 산을 빠져나가는 마지막 교통수단 하나만 남았다.


31. 오후 12시 35분, 알펜루트 마지막 전기버스에 오르다

오후 12시 35분.

드디어 오기사와행 전기버스가 출발할 시간이 됐다.

승강장에는 흰색 차체에 붉은색 선이 들어간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 앞에서도 사진을 한 장 남겼다.

나는 카메라를 멘 채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그렸다.

“자, 이제 오기사와로 진격의 거인.”

오늘 아침 비조다이라에서 무로도로 올라갈 때는 내가 에렌, 마님이 미카사라고 했는데 벌써 알펜루트의 마지막 구간이다.

버스에 올라 자리를 잡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다시 터널이었다.

구로베댐과 오기사와를 잇는 산속 터널을 통과해야 한다.

오늘 하루 참 별것을 다 타봤다.

다테야마역에서 시작해 여러 교통수단을 차례로 갈아타며 산 하나를 통째로 넘어왔다.

버스가 천천히 출발했다.

구로베댐을 뒤로하고 오기사와를 향해 터널 속으로 들어갔다.


32. 오후 12시 50분경, 오기사와에 도착하다

오후 12시 35분 구로베댐을 출발한 전기버스는 긴 간덴터널 속을 달렸다.

이번 터널은 느낌이 조금 달랐다.

이 터널을 빠져나가면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 횡단이 사실상 끝난다.

오후 12시 50분경.

전기버스가 오기사와(扇沢)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괜히 마음이 뿌듯했다.

“마님, 우리 진짜 넘어왔네.”

도야마 쪽 다테야마역에서 산으로 들어와 북알프스를 완전히 넘어 나가노현 오기사와까지 온 것이다.

그토록 기대했던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 횡단이 드디어 끝났다.

밖으로 나오니 조금 전까지의 설원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주변은 짙은 초록색이었다.

버스터미널 앞에는 여러 대의 버스가 서 있었고 주차장에는 자동차들이 빼곡했다.

산 위 무로도에서는 눈벽 사이를 걸었는데 불과 몇 시간 뒤 이곳에서는 신록이 한창이었다.

하나의 산 안에서 겨울과 봄을 모두 지나온 셈이었다.

이제 나가노로 간다.


33. 오기사와에서 잠시 숨을 돌리다

나가노행 버스 출발은 오후 1시 40분경이었다.

터미널 안으로 들어가 버스 승차장을 확인했다.

안내판에는 나가노역과 시나노오마치역 방면 버스가 표시되어 있었다.

시간이 남아 터미널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2026年 05月25日’ 날짜가 들어간 알펜루트 포토스팟도 있었고 한쪽에는 커다란 곰 박제도 전시되어 있었다.

“야, 이런 놈 산에서 실제로 만나믄 큰일나겄네.”

벽에는 ‘고생하셨습니다. 알펜루트 마지막 매점입니다’라는 안내도 보였다.

정말 알펜루트의 끝에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침부터 계속 시간을 맞춰 움직였던 터라 잠시 쉬는 시간도 반가웠다.


34. 오후 1시 40분, 오마치의 산과 마을을 지나 나가노로

오후 1시 40분경 나가노행 버스에 올랐다.

이제 북알프스를 등지고 나가노로 가는 길이다.

오기사와를 벗어나자 산길이 이어졌다.

조금씩 고도가 낮아지면서 넓은 계곡과 초록색 산들이 나타났고 버스는 오마치온센쿄(大町温泉郷)를 지나 시나노오마치 시가지로 들어갔다.

창밖으로 붉은 지붕의 시나노오마치역(信濃大町駅)도 보였다.

시나노오마치를 지나자 다시 논과 밭, 작은 농가들이 이어졌다.

물이 찬 논과 초록빛 마을 뒤로는 아직 눈을 이고 있는 북알프스의 산들이 계속 모습을 드러냈다.

“이야, 산에서 그렇게 내려왔는디도 아직 설산이 보이네.”

산 아래는 완전히 봄인데 멀리 높은 산은 여전히 겨울이었다.

조용한 산촌과 작은 마을, 물길을 차례로 지나며 버스는 나가노를 향해 계속 달렸다.

한참 뒤 건물들이 점점 많아졌다.

버스 앞 모니터에 마침내

‘長野駅東口’

나가노역 동쪽 출구가 표시됐다.

길었던 산길이 끝나고 다시 도시로 들어왔다.


35. 오후 3시 20분경, 나가노역에 도착

오후 3시 20분경 나가노역 동쪽 출구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역으로 걸어갔다.

조금 전까지 산과 논, 작은 마을 사이를 지나왔는데 이제 눈앞에는 커다란 JR 나가노역이 있었다.

우리가 탈 열차는 오후 3시 56분 쓰루가행 호쿠리쿠신칸센이었다.

승강장으로 올라갔다.

역명판에는 ‘長野 NAGANO’.

시간이 조금 남아 승강장에서 쿠키도 하나 먹었다.

잠시 뒤 우리가 탈 신칸센이 들어왔다.

이제 다시 도야마로 돌아간다.


36. 오후 3시 56분, 신칸센을 타고 다시 도야마로

오후 3시 56분.

쓰루가행 호쿠리쿠신칸센에 올랐다.

붉은색 계열 좌석이 이어진 객차에 마님과 자리를 잡았다.

하루 종일 걷고 이동한 뒤 푹신한 좌석에 앉으니 몸이 편안해졌다.

열차가 나가노역을 출발했다.

창밖으로 시가지와 산들이 빠르게 뒤로 밀려났다.

갈 때는 하루 종일 북알프스를 직접 넘어왔지만 돌아오는 길은 신칸센이라 금세 지나갔다.

마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창밖도 바라보며 도야마로 돌아왔다.

오후 4시 55분경 도야마역에 도착했다.

11시간 걸려 도야마역에서 나가노역까지 알펜루트로 횡단한 거리를 신칸센으로 단 1시간만에 주파하여 돌아왔다.

신칸센의 위용이여

새벽에 이곳을 떠난 지 거의 12시간 만이었다.


37. 여행의 마지막 저녁, 스시 우미토야마

도야마역에 도착한 뒤 저녁을 먹으러 갔다.

오늘 저녁은 ‘鮨 海富山(うみとやま)’, 스시 우미토야마였다.

“오늘은 제대로 먹자.”

역시 일본에 왔으면 스시다.

테이블에는 여러 종류의 초밥이 차려졌다.

연어와 참치, 흰살생선 등 여러 가지 스시를 먹고 별도로 한 판을 더 주문했다.

바삭하게 튀긴 튀김도 곁들였다.

도야마에서 유명한 반딧불오징어도 먹었다.

조그만 몸집에 통째로 먹는 오징어인데 도야마를 대표하는 해산물 가운데 하나였다.

“역시 일본에서는 스시여.”

새벽부터 산을 넘고 눈길을 걸어 다닌 뒤라 더 맛있었다.

마님과 천천히 저녁을 먹으며 오늘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자기야, 오늘 날씨 진짜 잘 걸렸지?”

정말 그랬다.

어제 쿠로베 협곡에서는 비와 구름이어서 좋았고 오늘 다테야마에서는 쨍하게 맑아서 좋았다.

이번 여행은 날씨까지 우리 편이었다.


38. 다시 HOTEL JAL CITY TOYAMA로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왔다.

객실에 들어오니 이제야 정말 모든 일정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 4시가 조금 넘어 시작한 긴 하루였다.

몸은 피곤했지만 기분 좋은 피곤함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를 바라던 날씨 속에서 제대로 넘어왔다.

내일은 고마쓰공항으로 가서 인천으로 돌아가면 된다.

씻고 짐을 정리한 뒤 편하게 쉬었다.


39. “마님, 이번 여행도 고생했수다.”

드디어 이번 여행의 모든 일정이 끝났다.

이번에도 언제나 옆에는 마님이 있었다.

내가 사진을 찍느라 한참을 서 있으면 기다려주고,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면 또 서주고,

좋은 풍경이 나타나면 같이 감탄하고,

내가 이상한 포즈를 취하면 같이 웃었다.

오늘도 새벽부터 함께 일어나 하루 종일 북알프스를 넘어왔다.

“마님, 이번 여행도 고생했수다.”

이제 내일이면 일본을 떠난다.

고마쓰공항으로 가서 인천으로 돌아간다.

이번 여행도 이렇게 끝이 났다.

새하얀 다테야마의 설산과 유키노오타니,

푸른 구로베호와 거대한 구로베댐,

그리고 그곳을 마님과 함께 걸었던 기억은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이번 여행도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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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일본 소도시 여행
두경아 지음 / 길벗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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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함께하는 일본 알펜루트 여행기

여행 4일차, 2026.05.25.(월요일)
드디어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를 넘다-1편


1. 일본에 온 뒤 매일 확인했던 무로도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다렸던 날이 밝았다.

오늘은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를 횡단하는 날이다.

사실 일본에 도착한 뒤부터 나는 매일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 홈페이지에 들어가 무로도 라이브카메라를 확인하고 있었다.

오늘은 어떨까.

어떤 날은 파란 하늘 아래 설산이 기가 막히게 보였고, 어떤 날은 안개와 구름에 뒤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걸 볼 때마다 마음속으로 빌었다.

“우리가 가는 날만큼은 제발 맑아라.”

알펜루트를 횡단하는 날 새벽에도 눈을 뜨자마자 라이브카메라부터 확인했다.

오전 4시 12분.

화면에 나타난 해발 2,450m 무로도는 내가 바라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아직 해가 완전히 떠오르기 전이었다.

눈 덮인 산 너머로 하늘이 주황빛으로 밝아오기 시작했고, 어둠이 조금씩 걷히면서 산의 능선과 골짜기에 남아 있는 눈이 또렷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무로도 고원은 아직 온통 눈이었다.

5월 25일인데도 넓은 설원이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나이스.”

나도 모르게 소리가 나왔다.

무로도만 확인한 것이 아니었다.

알펜루트를 따라 다이칸보, 미다가하라, 구로베다이라, 구로베댐의 라이브카메라까지 차례로 확인했다.

해발 2,316m 다이칸보에는 산허리를 따라 구름이 조금 걸려 있었지만 그 위로 설산의 봉우리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해발 1,930m 미다가하라에는 넓은 설원이 펼쳐져 있었고 시야도 좋았다.

구로베다이라에서도 눈을 뒤집어쓴 산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화면마다 찍힌 시간은 오전 4시 12분에서 13분.

불과 몇 시간 뒤면 우리가 직접 저곳들을 지나가게 된다.

오늘은 되겠다.

일본에 온 뒤 며칠 동안 매일 라이브카메라를 들여다보며 날씨 때문에 마음을 졸였는데, 정작 우리가 알펜루트를 횡단하는 날 아침에는 하늘이 우리 편을 들어주는 것 같았다.

어제 쿠로베 협곡에서는 비가 내리고 산허리에 구름이 걸렸다.

나는 원래 비가 지나간 뒤 구름과 안개가 산을 감싸는 풍경을 좋아해서 어제는 그런 날씨가 오히려 좋았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은 다테야마의 새하얀 설산과 유키노오타니를 보러 가는 날이다.

오늘만큼은 파란 하늘과 눈부신 설산을 보고 싶었다.

어제는 비와 구름이어서 좋았고,
오늘은 맑아서 좋다.

우리는 운이 좋은가 보다.

오늘은 쨍해야 하는 날이었다.


2. 새벽 4시 40분, 벌써 환한 도야마의 거리

오전 4시 40분경 호텔을 나섰다.

우리가 탈 열차는 덴테츠도야마역에서 오전 5시 10분에 출발하는 다테야마행 특별쾌속열차였다.

그런데 밖으로 나오자 가장 먼저 놀란 것은 시간에 어울리지 않는 거리의 밝기였다.

“야, 이 시간인데 벌써 이렇게 환해?”

새벽 4시 40분이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밝았다.

대낮 같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우리나라보다 동쪽에 있는 일본이라 해가 일찍 뜬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새벽 거리에 나와 보니 실감이 났다.

아직 사람도 자동차도 거의 보이지 않는 도야마의 거리를 마님과 걸었다.

어제 비가 내리던 도야마와는 완전히 다른 아침이었다.

하늘은 밝아지고 있었고 오늘 하루 날씨가 좋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점점 커졌다.

오늘은 알펜루트를 횡단하는 날이다.

발걸음부터 달랐다.


3. 새벽부터 엄청난 줄, 덴테츠도야마역

오전 4시 50분경 덴테츠도야마역에 도착했다.

그런데 역 안으로 들어가자 깜짝 놀랐다.

“우와, 이 시간에 사람이 이렇게 많어?”

새벽 5시도 되지 않았는데 역 안에는 이미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매표소와 승강장으로 이어지는 곳에는 배낭을 멘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모두 우리처럼 다테야마와 알펜루트를 향해 가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표를 미리 구입해 놓았기 때문에 매표소 앞에서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었다.

바로 승차를 기다리는 줄에 합류했다.

전광판에는 오전 5시 10분 다테야마행 열차가 표시되어 있었다.

‘특별쾌속 다테야마.’

성인 1,000엔의 추가요금을 내야 하는 열차였다.

일반열차보다 돈을 더 내는 대신 다테야마까지 단숨에 달려가는 열차다.

드디어 승강장으로 들어갔다.

이른 새벽부터 몰려든 사람들을 보니 오늘 알펜루트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될지 벌써 짐작이 갔다.

그래도 마님과 나는 자리를 잡았다.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앉아서 가야지.

오늘은 이제 시작이다.


4. 1,000엔 더 내고 다테야마로 단숨에

오전 5시 10분.

특별쾌속열차가 덴테츠도야마역을 출발했다.

무려 1,000엔이나 더 냈다.

그러니 제대로 달려줘야 한다.

어제 우나즈키온센으로 향하면서 지나갔던 철길을 오늘 다시 달렸다.

하지만 어제와 오늘은 완전히 다른 풍경이었다.

어제는 이동 중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산에는 구름이 걸렸다.

오늘은 아침부터 햇빛이 쏟아졌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들판과 논, 작은 마을들이 아침 햇살을 받았고 멀리에는 다시 눈을 뒤집어쓴 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제 보았던 설산인데 오늘 다시 보아도 좋았다.

열차는 빠르게 달렸다.

그리고 어제도 지나갔던 데라다역이 가까워졌다.

데라다역은 우나즈키온센으로 향하는 노선과 다테야마로 향하는 노선이 갈라지는 역이다.

어제는 이곳에서 우나즈키온센 방향 선로를 따라갔고, 오늘은 다테야마 방향으로 간다.

하지만 우리가 탄 열차는 특별쾌속이다.

데라다역에는 정차하지 않고 그대로 통과했다.

어제는 쿠로베 협곡으로,
오늘은 다테야마로.

같은 데라다역을 지나지만 오늘은 어제와 다른 산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5. 이런 역도 남겨둔다고?

도야마 시가지를 벗어나면서 창밖 풍경은 조금씩 달라졌다.

논과 밭이 나타나고 작은 마을들이 지나갔다.

그리고 산으로 들어갈수록 아주 작은 역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그런 역들을 볼 때마다 신기했다.

“일본은 참 대단혀.”

우리나라 같았으면 이용객이 적다는 이유로 진작 폐역시켜 버렸을 것 같은 역들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떤 곳은 정말 역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였다.

특히 오래된 역사는 눈길을 끌었다.

벽은 양철이나 골함석 같은 재료로 만들어져 있었고 곳곳이 벌겋게 녹슬어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붙어 있었다.

그런데도 없애지 않았다.

열차는 여전히 그곳을 지나고 필요하면 사람을 태우고 내려준다.

특히 아리미네구치역(有峰口駅·ありみねぐちえき) 같은 작은 역도 그렇게 철길 옆에 남아 있었다.

번듯하고 새것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오래되고 작은 것들도 제자리에서 계속 역할을 하게 하는 모습.

나는 이런 풍경을 볼 때마다 일본 철도여행이 재미있다.

무조건 허물고 새로 짓는 대신, 구조적 기능만 유지된다면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안고 제 역할을 다하게 만드는 것이 일본 철도 인프라가 가진 뚜렷한 특징이지 싶다.

그리고, 화려함보다는 실용성과 보존을 택하는 방식이 험준한 산악 철도 시스템에도 그대로 녹아있는 것 같았다.


6. 첩첩산중(疊疊山中), 심산유곡(深山幽谷) 속으로

데라다역을 지나 다테야마 쪽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풍경은 완전히 산악지대로 바뀌었다.

첩첩산중(疊疊山中), 심산유곡(深山幽谷)

딱 그 말이 어울렸다.

산은 점점 높아졌고 철길 옆으로 깊은 계곡이 따라붙었다.

아침 햇빛을 받은 산은 온통 짙은 초록빛이었다.

그 사이로 계곡물이 흘렀다.

열차는 산과 산 사이를 파고들듯 달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계곡에는 작은 보와 사방댐 같은 구조물들이 연이어 나타났고, 물은 층층이 떨어지며 아래쪽으로 흘러갔다.

산비탈을 따라 난 도로와 터널도 보였다.

우리가 탄 열차가 점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 눈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멀리 왼쪽으로 다테야마역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왔다.

어제 쿠로베 협곡에 이어 오늘은 다테야마다.

이제 정말 입산이다.

다테야마는 한자로 立山.

우리식 한자음으로 읽으면 ‘입산’이다.

속세를 떠나 산으로 들어갈 때도 입산한다고 하지 않는가.

“자, 이제 진짜 입산하는 겨.”

그리고 이곳부터 진짜 알펜루트가 시작된다.


7. 오전 6시, 입산역에 도착하다

오전 6시경 다테야마역에 도착했다.

아니, 오늘만큼은 ‘입산역’이라고 부르고 싶다.

다테야마역(立山駅). 해발 475m.

이름부터 오늘 일정에 딱 맞았다.

역 앞에는 ‘立山駅’과 함께 날짜까지 표시된 기념촬영 장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2026년 5월 25일.

오늘 우리가 이곳에 왔다는 기록이다.

나도 찍고 마님도 찍고 둘이 함께 사진도 남겼다.

오늘은 사진을 많이 찍어야 한다.

이제부터 보는 것 하나하나가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다렸던 풍경일 테니까.

우리가 예약한 다테야마 케이블카는 오전 7시 출발편이었다.

역 안으로 들어가니 상황이 장난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었다.

매표소에도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케이블카를 타려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졌다.

그런데 우리는 여유가 있었다.

이미 예약을 해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케이블카 승차 줄에는 우리가 1번으로 섰다.

“ㅎㅎ 우리가 1번이네.”

이 맛에 미리 예약하는 거다.

한편 매표소 쪽에는 현장에서 표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계속 줄을 서 있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알펜루트에 예약도 하지 않고 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내 입장에서는 조금 이해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이날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오전 7시 정규편에 이어 7시 10분 임시편까지 편성됐다.

전광판에도 07:00 출발,
그 아래에는 ‘次発 07:10発’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미 첫차를 기다리는 맨 앞자리.

이제 문만 열리면 된다.

다테야마역에서 비조다이라까지.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고원버스를 타고 해발 2,450m 무로도로 올라간다.

새벽 4시 12분 라이브카메라로 바라보았던 그 설산 속으로 이제 우리가 직접 들어간다.

알펜루트 횡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8. 오전 7시, 다테야마 케이블카 맨 앞에서 진격

드디어 다테야마 케이블카를 탈 시간이 됐다.

오전 7시 출발편.

우리는 승차 줄에 가장 먼저 서 있었기 때문에 케이블카가 들어오자 좋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차량은 붉은색과 주황색 계열로 꾸며져 있었고 옆면에는 꽃과 새 그림도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가까이에서 보니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케이블카와는 완전히 달랐다.

공중에 매달려 가는 것이 아니라 가파른 산비탈에 놓인 레일 위를 달리는 차량이었다.

“이게 무슨 케이블카여. 그냥 산악열차지.”

나는 진행방향 쪽 자리를 잡았다.

선로가 바로 눈앞으로 보였다.

출발하자 기다란 레일이 가파른 산비탈을 따라 위로 뻗어 있었다.

보통 철도에서는 보기 힘든 경사였다.

케이블에 이끌려 올라가는 방식이기는 하지만 눈으로 보기에는 정말 작은 산악열차를 탄 것 같았다.

잠시 뒤 터널이 나타났다.

열차는 어두운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

터널 벽 바로 옆으로 레일과 케이블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반대편에서 내려오는 케이블카와 교행했다.

우리가 올라가면 반대편 차량은 내려간다.

좁은 산속 선로에서 두 차량이 엇갈려 지나가는 모습까지 맨 앞에서 그대로 볼 수 있었다.

사진도 찍고 영상도 찍고 눈으로도 열심히 바라봤다.

알펜루트를 시작하자마자 교통수단부터 재미있었다.


9. 오전 7시 7분경, 비조다이라에 도착

약 7분 정도 올라가 오전 7시 7분경 비조다이라(美女平)에 도착했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니 ‘びじょだいら BIJODAIRA’라고 적힌 역명판이 보였다.

이제부터는 다시 교통수단을 바꿔야 한다.

고원버스다.

안내판에는 무로도와 구로베댐, 오오기자와와 나가노 방면으로 가는 고원버스 승차장이 표시되어 있었다.

케이블카에서 내린 사람들이 한꺼번에 계단을 올라 버스 승차장으로 향했다.

우리도 그 흐름을 따라갔다.

밖에는 흰색 차체에 붉은 무늬가 들어간 알펜루트 고원버스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이 버스를 타고 해발 977m의 비조다이라에서 해발 2,450m 무로도까지 단숨에 올라간다.

높이 차이만 해도 1,400m가 넘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테야마역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왔는데 이제는 버스를 타고 더욱 깊은 산속, 더욱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역 안 모니터에는 무로도와 다이칸보의 현재 모습도 나오고 있었다.

무로도 해발 2,450m, 기온 11.1도.

다이칸보 해발 2,316m, 기온 12.1도.

화면에 보이는 무로도의 설산은 여전히 깨끗했다.

“좋아. 날씨 살아있네.”

이제 저곳으로 직접 올라간다.


10. 오전 7시 17분, 에렌과 미카사 무로도로 진격의 거인

오전 7시 17분경 고원버스가 비조다이라를 출발했다.

“자, 무로도로 진격의 거인.”

오늘 나는 에렌이다.

그리고 옆에 앉은 마님은 미카사.

ㅋㅋㅋ.

버스가 출발하자 처음에는 울창한 숲길이 이어졌다.

창밖으로 거대한 삼나무들이 지나갔다.

어떤 나무는 굵기가 어마어마했다.

산 아래에서는 이제 완전히 봄을 지나 초여름으로 가는 풍경이었다.

나무에는 푸른 잎이 가득했고 햇빛도 강했다.

그런데 버스가 고도를 높일수록 조금씩 풍경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출발한 지 약 12분쯤 지났을 때 왼쪽 창밖 멀리 깊은 협곡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사이로 길고 하얀 물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쇼묘폭포였다.

“자기야, 저기 봐. 폭포.”

깊게 파인 협곡 사이로 떨어지는 폭포가 멀리에서도 또렷하게 보였다.

잠깐 나타났다가 버스가 움직이면서 다시 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버스 여행이라 원하는 곳에 멈출 수는 없었지만 이렇게 이동하면서 하나씩 풍경이 나타나는 것도 재미있었다.


11. 초록의 산에서 눈의 나라로

버스가 계속 고도를 높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풍경이 확실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산 정상과 골짜기에 조금씩 남아 있던 눈이 점점 많아졌다.

눈이 남은 산들이 하나둘 나타났고 어느 순간부터는 창밖 어디를 보아도 설산이었다.

“와…….”

“이야…….”

마님과 나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5월 25일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완연한 봄을 지나 초여름으로 가는 시기다.

그런데 눈앞에는 겨울 같은 산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검은 산 능선을 따라 하얀 눈이 줄무늬처럼 남아 있었고 골짜기마다 눈이 길게 이어졌다.

조금 더 올라가자 도로 주변까지 눈으로 덮이기 시작했다.

푸른 하늘 아래 새하얀 설원이 펼쳐졌다.

산 아래에서 보았던 초록색 숲은 어느새 사라지고 있었다.

멀리 아래쪽을 바라보면 우리가 올라온 평야가 희미하게 보였고 바로 주변에는 눈밭과 설산이 펼쳐졌다.

고도 차이가 만들어낸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이 계절에 이런 걸 볼 수 있다는 게 말이 되냐?”

그런데 일본에서는 가능했다.

사진을 찍고 또 찍었다.

어디를 찍어도 설산이었고 어디를 보아도 장관이었다.

아까 새벽 라이브카메라를 보며 ‘나이스’를 외쳤던 것이 다시 생각났다.

오늘 제대로 걸렸다.

날씨가 정말 끝내줬다.


12. 유키노오타니, 영화 『비밀』 속 그곳을 지나가다

무로도에 가까워질수록 도로 옆에 쌓인 눈이 점점 높아졌다.

처음에는 사람 키보다 낮았던 눈벽이 어느 순간 버스 창문 높이를 훌쩍 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거대한 설벽이 나타났다.

유키노오타니(雪の大谷).

눈의 대협곡이었다.

버스는 양쪽으로 높게 솟은 설벽 사이를 달렸다.

창문 바로 바깥으로 거대한 눈벽이 지나갔다.

눈은 한 덩어리의 흰 벽이 아니었다.

겨울 동안 눈이 여러 차례 쌓이고 굳으면서 생긴 층이 줄무늬처럼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오…… 내가 여기를 진짜 왔네.”

감격스러웠다.

유키노오타니는 내가 오래전부터 꼭 한번 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처음 이곳을 알게 된 것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비밀』을 영화로 만든 작품을 통해서였다.

영화 초반에 스키버스가 눈으로 뒤덮인 산길을 달린다.

운전기사는 돈을 벌기 위해 무리하게 운전을 계속하다가 피로가 쌓였고 결국 졸음운전을 하면서 사고를 낸다.

그 버스에 타고 있던 스기타 나오코와 딸 모나미도 사고를 당한다.

어머니 나오코는 죽고 딸 모나미는 살아남는다.

그런데 병원에서 깨어난 딸 모나미의 몸속에는 어머니 나오코의 인격이 들어와 있다.

몸은 딸인데 영혼은 엄마.

히로스에 료코가 딸 모나미를 연기했던 영화다.

참 재미있게 봤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버스가 거대한 눈벽 사이를 지나가는 장면을 보면서 생각했다.

“저기가 어디여? 나중에 꼭 한번 가봐야겄다.”

그곳이 다테야마의 유키노오타니였다.

그런데 지금 그 길을 마님과 함께 버스를 타고 지나고 있었다.

영화로 처음 본 장소를 실제로 찾아왔다는 것이 묘하게 감격스러웠다.

“자기야, 내가 영화에서 보고 꼭 와보고 싶다던 데가 여기여.”

창밖으로 설벽이 계속 지나갔다.

또 영화 『비밀』을 한번 보고 싶어졌다.


13. 오전 8시경 무로도, 먼저 눈의 회랑으로

오전 8시경 무로도에 도착했다.

해발 2,450m.

드디어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다렸던 장소에 발을 디뎠다.

그런데 우리가 버스를 타고 지나온 유키노오타니 설벽 산책로는 아직 들어갈 수 없었다.

입구에는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고 안내판에는 ‘SNOW WALL WALK’ 개방시간이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3시까지라고 적혀 있었다.

“아직 한 시간 반이나 남았네.”

그냥 기다릴 이유는 없었다.

무로도에는 볼 것이 많다.

우리는 먼저 눈의 회랑, 스노 코리도(Snow Corridor) 쪽으로 향했다.

밖으로 나가자 파란 하늘과 눈밭이 한꺼번에 눈앞으로 들어왔다.

정말 새하얀 세상이었다.

눈을 파서 만든 길 양쪽으로 높은 눈벽이 이어졌다.

사람이 그 사이를 걸어가니 눈의 높이가 더 실감났다.

마님과 나도 눈의 회랑 안으로 들어갔다.

사진부터 찍었다.

나 혼자 한 장.

마님과 둘이 한 장.

그리고 눈벽을 만져보았다.

5월 말에 이렇게 두꺼운 눈벽을 손으로 직접 만지고 있으니 참 신기했다.

“자기야, 손 한번 찍어봐.”

둘이 나란히 손바닥을 눈벽에 꾹 눌렀다.

눈 위에 마님 손자국과 내 손자국이 나란히 남았다.

한번 더.

또 한번.

사진도 남겼다.

별것 아닌 손자국인데도 이런 곳까지 마님과 함께 왔다는 기록 같아서 좋았다.

눈 속에 작은 인형을 올려놓고 사진도 찍고, 설벽에 기대 장난스러운 자세로 사진도 남겼다.

나도 한쪽 다리를 들고, 마님도 한쪽 다리를 들고.

ㅋㅋㅋ.

파란 하늘 아래 새하얀 눈벽 사이에서 둘이 신나게 사진을 찍었다.

아까 버스를 타고 올라오며 설산을 바라볼 때부터 계속 감탄했는데 막상 직접 눈 위를 걷고 눈벽을 만지니 또 다른 느낌이었다.

이제 겨우 오전 8시를 조금 넘겼을 뿐이다.

유키노오타니 정식 개방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동안 우리는 무로도 고원을 제대로 돌아보기로 했다.


14. 스키를 메고 설산을 오르는 사람들

눈의 회랑을 둘러본 뒤 본격적으로 무로도 고원을 걷기 시작했다.

주변 안내도를 보며 다테야마 무로도산장과 미쿠리가이케 쪽으로 향했다.

파란 하늘 아래 사방으로 설산이 펼쳐져 있었다.

눈이 녹아 드러난 돌길도 있었지만 조금만 벗어나면 다시 온통 눈밭이었다.

이런 풍경 속을 걷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했다.

그런데 설원 위를 걷다가 더 신기한 사람들을 보았다.

스키를 메고 산을 올라가는 사람들이었다.

스키장처럼 리프트나 곤돌라가 있는 것도 아니다.

스키와 장비를 직접 짊어지고 눈 덮인 산을 걸어서 올라가고 있었다.

“야, 저 사람들은 스키에 미친 사람들인가 봐.”

저 높은 곳까지 자기 발로 올라간 뒤 스키를 타고 내려올 생각인 모양이었다.

타고 내려오는 것은 신나겠지만 그 한번을 위해 무거운 스키를 메고 설산을 올라간다.

나는 도저히 못할 짓 같았다.

그래도 저 사람들에게는 저게 또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이겠지.

5월 말인데도 아직 스키를 탈 수 있는 곳.

눈앞에 펼쳐진 무로도의 풍경을 보고 있으니 그 사람들이 굳이 장비를 짊어지고 여기까지 올라오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15. 설산 한가운데서 먹은 아침 아닌 아침

다테야마 무로도산장 쪽으로 걸었다.

눈밭 사이로 ‘立山室堂山荘’이라고 적힌 이정표가 보였다.

산장 주변에는 눈이 아직 엄청나게 쌓여 있었다.

우리는 산장 앞쪽에 마련된 야외 쉼터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그리고 드디어 아침 아닌 아침을 먹었다.

어제 도야마역 북쪽 로손에서 미리 준비해온 먹을거리들을 꺼냈다.

바나나, 샌드위치와 빵, 스타벅스 커피.

별것 아닌 편의점 음식이었다.

그런데 눈앞에는 새하얀 설원과 설산이 펼쳐져 있었다.

“자기야, 여기서 먹으니께 이것도 꿀맛이네.”

정말 그랬다.

호텔 조식이나 유명한 식당에서 먹는 아침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맛이 있었다.

해발 2,450m 설산 한가운데 나무 테이블에 앉아 사랑스러운 마님과 함께 먹는 아침이었다.

바나나 하나를 먹으면서도 자꾸 산을 바라보게 됐다.

사진도 찍었다.

먹다가 찍고,
산을 보다가 찍고,
마님과 같이 또 찍었다.

아침 4시부터 움직였으니 배도 고팠다.

맑은 하늘과 눈부신 설산을 바라보며 먹으니 정말 꿀맛이었다.

여행에서는 무엇을 먹느냐보다 어디에서 누구와 먹느냐가 더 중요할 때가 있다.

이날 아침이 그랬다.


16. 뇌조를 만나고, 눈을 파내는 미니 포클레인까지

무로도산장 주변에서 뜻밖의 녀석도 만났다.

눈과 돌이 드러난 길가에 새 한 마리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 저거 뇌조 아녀?”

몸에는 갈색과 검은색 무늬가 섞여 있었고 배 쪽은 하얬다.

눈 위쪽에는 붉은색도 선명하게 보였다.

가까이에서 사진도 여러 장 찍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다리에 무언가가 채워져 있었다.

표식처럼 보였다.

사람이 가까이 있는데도 크게 놀라 달아나지 않았다.

“얘는 산장에서 키우는 애인가?”

그때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다리에 달린 표식 때문이었다.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었지만 야생의 설원에서 저렇게 가까이 새를 보는 것 자체가 재미있었다.

조금 더 걸어가니 이번에는 전혀 다른 장면이 나타났다.

작은 굴착기 한 대가 엄청난 양의 눈 속에 파묻히다시피 들어가 눈을 퍼내고 있었다.

커다란 제설차도 아니고 조그만 미니 포클레인이었다.

그 작은 장비가 산더미처럼 쌓인 눈을 한 삽씩 퍼내면서 길을 만들고 있었다.

“야, 5월 말에 아직도 눈을 파서 길을 뚫고 있네.”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우리가 걷는 길 양옆으로도 사람 키보다 높은 눈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겨울 동안 얼마나 많은 눈이 내렸는지를 눈앞에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곳에서는 봄이 와도 눈이 녹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직접 눈을 파내야 길이 다시 열리는 모양이었다.

산장 주변에서 뇌조 같은 새를 만나고, 바로 근처에서는 작은 굴착기가 설산을 파고 있었다.

자연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무로도의 조금 특별한 풍경이었다.


17. 미쿠리가이케와 무로도 고원을 걷다

아침을 먹은 뒤 다시 무로도 고원을 걷기 시작했다.

주변은 정말 어디를 바라봐도 그림이었다.

파란 하늘 아래 새하얀 눈밭이 이어졌고 그 뒤로 검은 산줄기와 눈이 만들어낸 무늬가 선명하게 펼쳐졌다.

눈이 녹은 곳에서는 키 작은 고산식물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눈밭과 초록색 관목 사이로 돌을 깔아 만든 산책로가 이어졌다.

어떤 곳은 눈이 완전히 녹아 돌길이 드러났고, 조금만 걸으면 다시 눈길이 나타났다.

마님과 천천히 걸었다.

사진을 찍지 않고 지나갈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었다.

“자기야, 거기 서봐.”

이번에는 마님을 세워놓고 찍고,

조금 뒤에는 내가 서서 찍었다.

둘이 같이 셀카도 남겼다.

산책로를 걷다 보니 커다란 바위에 붉은 글씨로 표시된 표석도 보였고, 라이초소(雷鳥荘)와 미쿠리가이케 방면을 알려주는 이정표도 나타났다.

하늘에서는 헬리콥터 한 대가 무언가를 길게 매달고 날아갔다.

도로로 물자를 실어 나르기 어려운 높은 산이다 보니 산장이나 시설에 필요한 물자를 옮기는 것 같았다.

설산을 배경으로 헬리콥터가 물건을 매달고 날아가는 모습도 이곳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조금 더 가자 화산가스에 주의하라는 안내판도 보였다.

이 주변 아래쪽에는 지고쿠다니가 있다.

눈 덮인 고요한 설산의 모습만 보고 있으면 잊기 쉽지만 이곳 다테야마가 화산활동의 흔적이 남아 있는 산이라는 것도 실감났다.

한쪽에는 여전히 겨울 같은 설원이 펼쳐지고,
다른 한쪽에서는 눈이 녹으면서 초록색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겨울과 봄이 한자리에서 만나는 것 같았다.


18. 엔마다이에서 아이스크림, 얼어붙은 미쿠리가이케

엔마다이, 지고쿠다니를 내려다보는 전망대 쪽까지 걸어왔다.

주변에는 눈 덮인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었다.

그리고 미쿠리가이케온천 앞에서는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샀다.

연보라색 소프트아이스크림이었다.

“이런 데 왔으니 아이스크림도 먹어줘야지.”

설산을 배경으로 아이스크림을 들고 사진부터 찍었다.

내 것과 마님 것을 나란히 맞대어 건배하듯 사진도 한 장 남겼다.

나는 설산을 바라보며 한입 크게 먹었다.

차가운 눈밭에서 먹는 차가운 아이스크림.

이상한 조합인데 또 맛있었다.

그리고 미쿠리가이케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사진에서 보던 짙고 푸른 미쿠리가이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호수 대부분이 아직 눈과 얼음에 덮여 있었다.

가장자리 일부에서만 얼음이 녹으면서 옥빛 물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얀 얼음 사이로 드러난 푸른빛이 오히려 더 신기했다.

그 뒤로는 눈 덮인 다테야마의 산들이 둘러서 있었다.

완전히 녹은 여름의 미쿠리가이케도 아름답겠지만 우리가 본 것은 5월 말에만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마님과 호수를 배경으로 사진도 남겼다.

아침부터 설산을 원 없이 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질리지가 않았다.

어디를 돌아봐도 또 다른 산이 있었고,
몇 걸음만 옮겨도 풍경이 달라졌다.

이제 시간이 제법 흘렀다.

우리가 기다리던 오전 9시 30분도 가까워지고 있었다.

드디어 유키노오타니 설벽을 직접 걸으러 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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