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셀프 트래블 - 2023-2024 최신판 ㅣ 셀프 트래블 가이드북 Self Travel Guidebook
김미정.백진수 지음 / 상상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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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 도쿄 여행기

여행 2일차, 2025.12.25.(목요일)
에도성에서 시작한 크리스마스(오전편)


1. 애들과 함께하니 아침 8시 기상

도쿄에서 맞는 크리스마스 아침.

마님과 둘이 여행을 다닐 때라면 아침 일찍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을 것이다.
여행지에서 보내는 시간이 아까워 웬만하면 일찍 일어나 움직이는 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여행은 달랐다. 애들이 함께였다.

아침 8시가 되어서야 느긋하게 일어났다.
이 정도면 우리 부부의 평소 여행에서는 이미 한참 돌아다니고 있을 시간이었다.

창밖으로 바라본 도쿄의 아침은 전날과 달랐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내리던 비는 그쳤고, 건물 사이로 푸른 하늘도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늘 일정은 만만치 않았다.

에도성, 도쿄역, 아키하바라, 센소지, 도쿄 스카이트리까지.

하루 동안 도쿄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빡센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2. 호텔에서 느긋하게 먹은 아침

씻고 준비를 마친 뒤 호텔 3층 식당으로 내려가 조식을 먹었다.

손에는 네 장의 BREAKFAST COUPON.
이번 여행은 네 식구가 함께하는 여행이라는 것이 이런 사소한 장면에서도 드러났다.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아침을 먹었다.

서두를 이유는 없었다.
오늘 갈 곳은 많았지만 그렇다고 아침부터 애들을 몰아붙일 생각은 없었다.

마님과 둘이 왔다면 벌써 어디 한 군데는 보고 있었을 시간이지만,
아이들과 함께하는 여행은 아이들 속도에 맞춰 가는 것도 여행의 일부였다.

그렇게 아침을 먹고 천천히 준비한 뒤,
오전 9시 40분쯤 호텔을 나섰다.


3. 역시 만만치 않은 시부야역, 미궁 속으로

호텔을 나와 시부야역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놈의 시부야역은 올 때마다 헷갈린다.

JR과 도쿄메트로, 도큐선 등 여러 노선이 얽혀 있고,
지상과 지하, 각종 연결통로와 대형 상업시설까지 한데 붙어 있으니
몇 번을 와도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다.

“내가 늙어서 그런가…….”

이번에도 시부야역이라는 미궁 속으로 들어갔다.

시부야 스크램블 스퀘어(渋谷スクランブルスクエア) 안팎을 오가며
안내판을 확인하고 지하 통로를 따라 내려갔다.

그 과정에서 크리스마스 장식이 된 스크램블 스퀘어와
커다란 피카츄가 그려진 유리창도 지나쳤다.

목적은 지하철표였다.

사진 속 안내문에는
Tokyo Subway Ticket을 이용하려면 시부야 스크램블 스퀘어 B6 출구 쪽으로 이동해
3층에서 티켓을 교환하도록 안내되어 있었다.

우리는 안내를 따라가
Tokyo Subway 24-hour Ticket을 손에 넣었다.

도쿄메트로와 도에이 지하철을 24시간 이용할 수 있는 승차권.

오늘처럼 지하철을 타고 도쿄 곳곳을 돌아다녀야 하는 날에는
잘 어울리는 선택이었다.

표까지 해결하고 나니 이제야 본격적인 하루가 시작되는 느낌이었다.


4.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선택한 도시, 에도

오전 10시 20분 무렵 시부야역에서
도쿄메트로 한조몬선(東京メトロ半蔵門線)에 올랐다.

한조몬역(半蔵門駅)에서 내려 오늘의 첫 목적지,
에도성(江戸城)으로 향했다.

지금은 일본의 수도 도쿄 한복판이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들어오기 전의 에도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당시 일본의 정치와 경제, 문화의 중심은
교토와 오사카를 비롯한 간사이 지역이었다.

오랫동안 천황이 자리했던 교토가 정치와 문화의 중심이었고,
오사카를 비롯한 간사이 일대 역시 상업과 교통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처음 일본여행을 갔던 곳도 오사카와 교토였다.

처음 일본을 여행할 때 자연스럽게 찾게 되는 대표적인 도시들이기도 하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오랫동안 일본의 중심이 바로 이 간사이 지역이었다는 사실과도 묘하게 겹친다.

반면 에도는 그에 비하면 변방에 가까웠다.

물론 에도성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15세기 중엽 오타 도칸(太田道灌)이 에도성을 축성했지만,
오늘날과 같은 거대한 도시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 에도의 운명을 바꾼 사람이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였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오다와라의 후호조씨를 무너뜨리고 일본 통일을 거의 완성한 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기존 영지를 떠나 간토로 옮겨왔다.

그리고 에도성을 새로운 거점으로 삼았다.

당시 에도성 주변은 동쪽으로 히비야 만(日比谷入江)이 깊숙이 들어와 있었고,
도시를 크게 만들기에는 땅도 충분하지 않았다.

이에야스와 이후 도쿠가와 막부는
매립과 수로 개착, 하천 정비 등을 계속하며
에도를 본격적인 도시로 만들어 나갔다.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일본의 권력구도는 다시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전투가 벌어진 세키가하라는
지금의 나고야와 교토 사이, 기후현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동서 일본을 잇는 길목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과
이시다 미쓰나리를 중심으로 한 서군이 맞붙었다.

우리에게 임진왜란으로 익숙한 무장들도
이 전투에서 다시 등장한다.

평양성 전투와 강화교섭으로 잘 알려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서군에 섰고,
임진왜란 당시 수군을 이끌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도 처음에는 서군으로 참전했다.

하지만 와키자카는 전투 도중 동군으로 돌아서
오타니 요시쓰구(大谷吉継)의 부대를 공격했다.

반면 임진왜란 당시 울산왜성 전투 등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는 이에야스 측에 섰다.

다만 그는 세키가하라 본전투 현장에 직접 참가한 것은 아니고,
규슈에서 동군 측 군사행동을 벌이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 땅에서 싸웠던 일본 장수들이
불과 몇 년 뒤에는 일본 국내의 패권을 놓고
서로 다른 편에 서 있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결과는 이에야스의 승리였다.

이 전투를 계기로 일본의 권력은 사실상 이에야스에게 넘어갔고,
1603년 그는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에 임명되어
에도에 막부를 열었다.

그때부터 일본의 정치 중심은
교토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간사이에서
점차 에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한때 변방에 가까웠던 에도는
도쿠가와 막부의 정치적 중심지가 되면서 거대한 도시로 성장했고,
그 에도가 훗날 도쿄가 되었다.


에도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일본 작가 한 사람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미미 여사’라는 애칭으로 더 친숙한
미야베 미유키(宮部みゆき).

지금까지 미야베 미유키의 책을 24권 읽었다.

현대사회를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도 좋아하지만,
내게 특히 인상 깊고 좋아하는 책은 에도시대를 무대로 한 작품들, 즉 에도시대물이다.

그중에서도 『얼간이(ぼんくら)』와 『하루살이(日暮らし)』를 좋아한다.

『얼간이』는 에도 후카가와를 배경으로,
철병장(鉄瓶長屋, てつびんながや·데쓰빈나가야)이라는 나가야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도신 이즈쓰 헤이시로와 조카 유미노스케를 비롯한 인물들이 풀어가는 시대 미스터리다.

‘도신’은 한자로 동심(同心)이라 쓰고,
일본어로는 どうしん(도신)이라고 읽는다.

에도시대에 치안과 수사 실무를 담당하던 하급 무사 관리로,
오늘날로 치면 경찰의 실무자와 비슷한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다.

철병장 역시 한자로는 鉄瓶長屋,
일본어로는 てつびんながや(데쓰빈나가야)라고 읽는다.

여기서 나가야(長屋)는 여러 집이 벽을 맞대고 길게 이어진
에도 서민들의 공동주택 같은 곳이었다.

『하루살이』는 『얼간이』의 뒤를 잇는 이야기로,
헤이시로와 유미노스케를 비롯해 전작에서 만났던 인물들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미야베 미유키의 시대소설을 읽다 보면 쇼군이나 다이묘 같은 권력자보다 에도의 골목과 나가야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 더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내 머릿속의 에도는 거대한 성과 쇼군의 도시이면서 동시에, 『얼간이』와 『하루살이』 속 사람들이 북적이며 살아가던 생활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작 미미 여사의 대표적인 에도 시대소설 가운데 하나인 『외딴집』은 아직 못 읽었다.

스물네 권이나 읽어놓고 그걸 아직 안 읽었다니.

ㅠㅠㅠ

언젠가는 꼭 읽어야겠다.

책으로 수없이 만났던 ‘에도’라는 이름.

오늘은 그 에도의 중심이었던 에도성에
내가 직접 걸어 들어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성벽과 해자를 바라보는 느낌도
조금은 다르게 다가왔다.

지하철에서 내려 성 쪽으로 걸어가자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성이 아니라 물이었다.

넓은 해자와 그 너머로 이어지는 높은 석축.

도쿄 한복판의 빌딩숲과 바로 맞닿아 있으면서도
해자를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공간이 펼쳐졌다.

성의 건물 대부분은 사라졌지만,
해자와 석축만으로도 이곳에 얼마나 거대한 성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5. 皇居東御苑, 에도성 안으로

우리는 황거 동쪽 정원(皇居東御苑)으로 들어갔다.

현재 일반인이 둘러볼 수 있는 이 공간에는
에도성의 여러 흔적이 남아 있었다.

입구 주변에는 乾門(이누이몬)과 皇居東御苑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있었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거대한 석축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까이에서 보니 그 규모가 생각보다 훨씬 컸다.

커다란 돌을 층층이 쌓아 올린 성벽은
사람 하나를 그 앞에 세워놓아야 비로소 크기가 실감날 정도였다.

나도 석축 앞에 서서 사진을 한 장 남겼다.

사진 속 사람은 조그맣고,
뒤의 돌벽은 화면을 가득 채웠다.

에도성에 남아 있는 것은 단순히 옛 성터 몇 조각이 아니었다.
성곽의 규모 자체를 몸으로 느끼게 하는 흔적들이었다.


6. 성은 사라지고 천수대만 남았다

안쪽으로 더 들어가 天守台,
에도성 천수대에 도착했다.

한때 에도성의 천수각이 올라서 있던 자리다.

지금 천수각은 없다.

남아 있는 것은 거대한 돌로 쌓은 천수대뿐이었다.

천수대 아래에서 바라본 석축도 거대했지만
직접 위로 올라서니 주변이 한눈에 들어왔다.

멀리 현대 도쿄의 고층빌딩들이 솟아 있고,
그 아래에는 넓은 황거 동쪽 정원이 펼쳐졌다.

옛 에도성과 현대 도쿄가 한 시야 안에 겹쳐 보이는 풍경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천수대에서 사진도 남겼다.

크리스마스에 네 식구가 함께
옛 에도성 천수각이 서 있던 자리에 올라와 있다는 것도
나중에는 하나의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7. 에도성의 흔적을 따라 걷다

천수대에서 내려와 다시 정원을 걸었다.

御休息所跡이라고 새겨진 표석도 지나고,
겨울빛이 내려앉은 나무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화려한 성곽 건물이 남아 있는 곳은 아니었다.

오히려 건물이 사라진 자리를 걸으며
‘이곳에 무엇이 있었을까’를 상상하게 만드는 곳이었다.

전시공간에서는 에도성 천수각의 모형도 볼 수 있었다.

지금은 천수대만 남아 있지만
모형으로 복원된 모습을 보니
조금 전 우리가 올라섰던 거대한 석축 위에
어떤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는지 비로소 그림이 그려졌다.

이어 百人番所(햐쿠닌반쇼)를 지나 성 밖으로 향했다.

거대한 석축 사이의 길을 지나고 성문을 빠져나오자
조금 전까지의 에도성 풍경과는 전혀 다른
현대 도쿄의 빌딩들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다.


8. 분수대 앞 스타벅스에서 잠시 쉬어가기

에도성을 나와 향한 곳은
와다쿠라 분수공원(和田倉噴水公園)이었다.

높이 솟아오르는 분수와 넓은 광장,
그리고 주변을 둘러싼 도쿄 도심의 고층건물들.

그 한쪽에 스타벅스가 있었다.

スターバックス コーヒー 皇居外苑 和田倉噴水公園店.

오전 11시 30분 무렵,
우리는 이곳에 들어가 잠시 쉬었다.

사진에서 보았던 것처럼 이곳은 위치도 좋았지만
건물 자체도 꽤 인상적이었다.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공원과 분수가 보였고,
실내 천장에는 나무 구조물이 격자처럼 이어져 있었다.

에도성을 한 바퀴 걷고 들어와 앉으니
이제야 잠깐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음료를 앞에 두고 창밖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는 에도시대의 거대한 석축 사이를 걷고 있었는데
지금은 스타벅스 창밖으로 분수와 현대 도쿄의 빌딩숲을 보고 있었다.

과거의 에도와 현재의 도쿄가
불과 몇 걸음 사이에서 이어지는 곳이었다.

하지만 오늘 일정은 이제 시작이었다.

잠시 쉬었으니 다시 움직여야 했다.

다음 목적지는 도쿄역.

그리고 그 뒤에는
아키하바라, 센소지, 도쿄 스카이트리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워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9. 도쿄역, 우리 경성역을 떠올리다

스타벅스에서 잠시 쉬고 다시 길을 나섰다.

다음 목적지는 도쿄역(東京駅).

에도성에서 도쿄역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마루노우치 쪽으로 걸어가자 정오가 조금 지나면서
도쿄역의 붉은 벽돌 건물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2시 40분 무렵.

고층빌딩 사이로 도쿄역 마루노우치 역사가 정면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건물은 아니었지만
다시 정면에서 바라보니 문득 우리 경성역이 떠올랐다.

붉은 벽돌,
서양식 건축양식,
오래된 철도역 특유의 묵직한 분위기.

도쿄역은 1914년에 완공된 건물이고,
우리의 옛 경성역사는 1925년에 완공됐다.

두 건물이 같은 설계는 아니지만
내 눈에는 어딘가 닮아 보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두 건물 사이에는 실제로 이어지는 인연이 있었다.

도쿄역 마루노우치 역사를 설계한 사람은
일본 근대건축을 대표하는 건축가 다쓰노 긴고(辰野金吾).

그리고 구 경성역의 설계자로 알려진 쓰카모토 야스시(塚本靖)는
도쿄제국대학에서 다쓰노 긴고에게 건축을 배운 제자였다.

도쿄역과 경성역이 같은 설계도에서 나온 건물은 아니지만,
두 건축가가 사제지간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두 역이 닮아 보였던 것도 그저 우연처럼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어쩐지 비슷해 보이더라.”

하지만 역 앞 풍경은 꽤 달랐다.

도쿄역 앞에는 건물 정면을 시원하게 열어주는
넓은 마루노우치 광장이 펼쳐져 있었다.

역사를 한참 뒤에서부터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앞 공간이 넓고 탁 트여 있었다.

그 광장 덕분인지
붉은 벽돌 역사 전체가 더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우리 경성역 앞에도 이런 공간이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역 앞을 빽빽한 도로나 건물로 채우지 않고
도시 한복판에 이런 넓은 공간을 남겨둔 모습이 부러웠다.

그러다 혼자 피식 웃었다.

“근디 우리나라였으면 여기서 맨날 데모하는 거 아녀?”

뭐, 그건 또 그거대로 우리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크리스마스 당일이라 마루노우치 광장 일대에는
크리스마스트리와 장식들이 남아 있었고,
‘MARUNOUCHI TOKYO’라고 적힌 둥근 조형물도 세워져 있었다.

아들과도,
마님과도,
가족끼리 번갈아 사진을 남겼다.

도쿄역을 배경으로 광장을 천천히 걸었다.


10. 도쿄역 머릿돌 앞에서

도쿄역 정면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붉은 벽돌 벽과 흰색 석재 장식,
좌우로 길게 뻗은 마루노우치 역사는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에서 볼 때 느낌이 또 달랐다.

정면 가까이에는

‘東京駅’

이라고 새겨진 돌 표지석이 있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머릿돌 앞에서 사진을 찍고,
역사 정면에서도 사진을 몇 장 더 남겼다.

도쿄역은 단순히 기차를 타는 장소라기보다
그 자체가 하나의 명소처럼 느껴졌다.

사진을 다 찍고 이제 다음 장소로 이동하려고
마루노우치 중앙구(丸の内中央口)로 들어갔다.

그런데……

밖에서 볼 때는 참 멋있던 도쿄역이
안으로 들어가자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11. 도쿄역도 미궁이다

아이구.

도쿄역도 만만치 않았다.

JR,
신칸센,
도쿄메트로,
수많은 출구와 지하통로.

전광판을 봐도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부야역에서도 헤맸는데
도쿄역까지 이러니 슬슬 환장할 노릇이다.

“아니, 일본 역들은 왜 죄다 미궁이여.”

이쪽으로 갔다가,
다시 안내판을 보고,
또 방향을 틀고.

그래도 오전에 산 Tokyo Subway 24-hour Ticket은
여기서 다시 제 역할을 했다.

어찌어찌 도쿄메트로 마루노우치선(東京メトロ丸ノ内線)
승강장을 찾아 내려갔다.

시각은 오후 1시 10분 무렵.

다음 목적지는
내가 이번 여행에서 은근히 기대하고 있던 곳이었다.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すずめの戸締まり)』의 성지.


12. 두 정거장 만에 아와지초

도쿄역에서 마루노우치선을 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내렸다.

오테마치(大手町)를 지나
아와지초역(淡路町駅, M19).

오후 1시 16분 무렵이었다.

“벌써?”

싶을 정도로 가까웠다.

도쿄역에서 불과 두 정거장.

역을 나와 오차노미즈(御茶ノ水) 쪽으로 걸었다.

조금 걷자
철길과 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 나타났다.

히지리바시(聖橋).

그리고 다리 아래로 흐르는 간다강(神田川).

바로 이곳이
내가 찾던 『스즈메의 문단속』의 도쿄 성지였다.


13. 『스즈메의 문단속』, 영화 속으로 들어가다

나는 『스즈메의 문단속』을 꽤 좋아한다.

주인공 스즈메는 어린 시절 동일본대지진으로 어머니를 잃고,
규슈 미야자키에서 이모와 함께 살아가는 고등학생이다.

그러던 어느 날
폐허를 찾아다니는 청년 소타를 우연히 만나고,
재난을 불러오는 ‘뒷문’을 닫기 위해
함께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게 된다.

영화가 후반부 도쿄로 넘어오면서
이 오차노미즈와 히지리바시 일대도
아주 인상적인 장면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꼭 한 번 실제로 보고 싶었다.

다리 위에 서니
영화에서 보던 풍경이 그대로 펼쳐졌다.

아래에는 간다강이 흐르고,
그 위를 도쿄메트로 마루노우치선이 가로지른다.

조금 높은 곳에는
JR 주오선과 소부선 열차가 오간다.

철도와 강,
터널,
도심 건물이 한 장면 안에 겹쳐지는 풍경.

신카이 마코토 감독 영화에서
그렇게 인상적으로 보이던 복잡한 도쿄의 입체감이
실제로도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다.

잠시 다리 위에 서서 기다렸다.

목표는 하나였다.

영화에서 본 것처럼
빨간 마루노우치선 열차가
간다강 위를 지나가는 순간.

카메라를 들고 기다렸다.


14. 운도 좋지, 기차까지 딱 걸렸다

오후 1시 28분 무렵.

드디어 빨간 열차가 나타났다.

터널을 빠져나온
도쿄메트로 마루노우치선 열차가
간다강 위 철교를 건너오기 시작했다.

“왔다.”

카메라를 들었다.

그리고 셔터를 눌렀다.

딱 내가 기다리던 장면이었다.

더구나 운까지 좋았다.

반대편에서도 빨간 열차가 들어오면서
두 열차가 서로 교행하는 순간까지 만났다.

일부러 시간을 맞추기도 쉽지 않은 장면인데
기다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딱 그 순간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그냥 관광지를 하나 본 것이 아니었다.

영화 속 장면을 기억하고,
그 장소를 찾아와,
그 풍경이 실제로 움직이는 순간까지 기다렸다가
사진으로 남긴 것이다.

나는 이런 게 참 좋다.

영화나 책에서 본 장소를
실제로 찾아가 보는 것.

머릿속에만 있던 장면이
현실의 풍경과 겹쳐지는 순간이다.

히지리바시 아래로 흐르는 간다강,
그 위를 가로지르는 빨간 마루노우치선 열차.

『스즈메의 문단속』 속 도쿄가
잠깐 현실로 튀어나온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을
제대로 한 장 박았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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