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 문단 ‘배후의 대가‘라고나 불러야 할 존재!
우타야마는 늘 그렇게 생각했다.
대중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한, 이른바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나 시대의 유행을 넘어서 미야가키만큼 열렬한 ‘신봉자‘를 거느린 추리작가도 드물지 않을까.

"끈덕지군, 자네도. 난 원래 마음이 아주 약한 사람일세. 예를 들면 말이야, 내겐 소년 시절부터 간절히 바라던 소망이 하나 있었지. 한번 내 손으로 사람을 죽여보고싶다는 소망이. 하지만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했네. 몇 십 년씩 살인 이야기만 써온 건 말하자면 그 보상 행위겠지."

‘미로관迷路館‘이라고 불리는 그 저택은 미야가키 요타로가 십여 년 전에 별장으로 지은 집이다. 원래 목적에 걸맞게 여름 한철을 지내는 데 쓰던 시절에는 우타야마도 몇 차례 초대받은 적이 있다. 그 이름대로 집 안 복도가 복잡한 미로 모양을 한 기상천외한 건물이라 처음 방문했을 때는 상당히 당황했다. 미야가키는 장난꾸러기아이 같은 얼굴로, 놀라는 방문객들의 반응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곤 했다.

"날 과대평가하는군. 그 유명한 밴 다인 씨가 한 말이 옳아. 한 작가가 뛰어난 탐정소설을 여섯 편 이상은 쓸 수 없다는. 내가 사십 년 가까이 대체 몇 작품이나 썼는지아나? 장편만 해도 그 한계치를 곱절이나 넘어섰네."

"연말에 우연히 알게 됐는데, 규슈에 있는 무슨 절집 셋째아들이라고....... 아, 만나면 알 걸세. 자네도 분명히 관심을 갖게 될 거네."

염려하던 미야가키의 컨디션이 ‘건강한 건지 어떤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미야가키가 아직도 내심 창작에 대한 열정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인할 수있었다. 그것만 해도 오늘 먼 걸음을 한 수확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물론 이때 우타야마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설마 이것이 살아 있는 미야가키 요타로와 이야기를 나눈 마지막 기회가 될 줄은.

"살려줘......."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오른쪽에서 누군가가 우타야마의 어깨로 털썩 쓰러졌다.
"으악!"
우타야마는 소리를 지르며 얼른 피했다. 게이코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쓰러진 사람은 그대로 무릎을 꺾더니 무너지듯 바닥에 폭 고꾸라졌다.

십각관에 수차관....... 참극으로 얼룩진 나카무라 세이지의 저택. 그리고 지금 설마 이렇게 느닷없이 이 미로관에서도?
"이럴 수가!"
우타야마는 큰 소리를 지르며 쓰러진 기요무라를 피해 넓은 홀 안으로 뛰어들었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나카무라 세이지.
다시 시마다의 입을 통해 나온 그 이름에 우타야마는 불쑥 ‘불길한‘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막연한 어떤 예감을 느꼈다.

"그런데 저 도우미 할머니,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우타야마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쓰러져 있던 기요무라가 벌떡 일어났다. 그 옆에 있던 시마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거 정말 실례했습니다. 그래도 제법 명연기였죠?"
기요무라는 활짝 웃으며 입가에 묻어 있던 붉은 얼룩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기요무라 준이치는 만우절 연극을 성공시켜서 무척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제대로 한 방 먹은 시마다도 기분이 상하기는커녕 오히려 아주 유쾌하다는 표정이다. 테이블에 나란히 앉자마자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둘은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기요무라 준이치, 30세.
사 년 전 『기상』 신인상에 입선해 작가로 데뷔. 수상작 「흡혈의 숲은 오컬트적인 소재를 건조한 터치로 그린 수작이었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갸름한 얼굴. 얼핏 보기에도 미남 청년이라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성격이라는 사실을 우타야마는 잘 알고 있다.

"어지간히 하시지, 기요무라 씨?"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흘끔 보며 후나오카가 말했다.
"처음 뵙는 분도 계신데, 실례가 지나치잖아?"
후나오카의 말을 듣고서야 우타야마는 사태의 흐름을 눈치챘다. 허허 하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가 다시 문 쪽을 돌아보았다.

"응, ‘암색텐트‘라는 작은 극단에 있었던 모양이야. 지금은 그만둔 상태지만."

"일부러 주방에서 케첩까지 조달해왔으니 저 사람도 참 곤란하군요. 하지만 원래 배우였으니 연기는 꽤 수준급이죠?"

스자키 쇼스케, 41세.
오늘 모인 미야가키요타로의 ‘제자들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인물이다. 중세 유럽을 무대로 삼은 중후한 본격물이 특기인데, 워낙 집필이 느려 편집자들이 피하려는작가다.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어. 혹시 이미 망령이 드신 걸까?"
"저 할머니는 원래 그런 분이에요."

돌아보니 스자키는 여전히 안쪽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검은 테 안경을 쓴 신경질적인 얼굴. 갈색 스웨터를 걸친 야윈 체격에 구부정한 등이 특징적이다. 그가 기요무라의 명연기에 크게 놀라는 모습을 떠올려보았지만 아무래도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자기가 받는 급여만큼 일하는 것 외에는 별 관심이 없죠. 미야가키 선생님은 오히려 그런 면을 더 좋게 보신 것 같지만. 그리고 조금 전에 벌인 그 소동은 두 번째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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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만드는 기술 이야기 - 다리, 터널, 도로, 통신망, 전력망, 철도, 댐, 상하수도, 건설 장비까지 우리 주변을 둘러싼 인프라의 모든 것
그레이디 힐하우스 지음, 윤신영 옮김 / 한빛미디어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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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함께하는 일본 북알프스 여행기 - 특별기고]

黒部ダム(쿠로베댐) 건설기
― 26년 도로맨의 눈으로 본 일본 토목기술의 기념비
(파쇄대를 뚫고 북알프스에 떨친 일본의 토목기술)

1. 여행지가 아니라 거대한 토목구조물 앞에 서다

立山黒部アルペンルート(다테야마쿠로베 알펜루트)를 여행하며 만난 수많은 풍경 가운데 가장 강렬하게 남은 것 중 하나가 黒部ダム(쿠로베댐)이었다.

웅장한 북알프스의 산과 깊은 계곡 사이를 막아선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

관광객의 눈으로만 보면 장대한 풍경 속에 자리한 유명 관광명소다.

그러나 내 눈에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나는 토목기술자로 26년을 살아왔다.

국도와 고속도로의 설계와 공사현장을 오가며 수많은 도로와 터널, 교량을 직접 설계하고 공사를 감독했다.

그중에는 국내 최초의 해저터널 건설공사도 있었다.

그렇게 평생을 도로와 함께 살아온 사람의 눈으로 黒部ダム(쿠로베댐)과 関電トンネル(간덴터널)을 바라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콘크리트 구조물 하나를 보는 것이 아니었다.

저 거대한 산속에서 측량을 하고, 길을 내고, 터널을 뚫고, 물과 암반과 싸우며 구조물을 세웠을 당시 기술자들과 근로자들의 모습이 먼저 떠올랐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토목기술자의 위대함이여.”

이 댐을 만든 일본의 토목기술자들과 근로자들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2. 전후 일본의 전력난에서 시작된 黒四(쿠로욘)

黒部ダム(쿠로베댐)은 단순히 관광을 위해 만들어진 댐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일본은 빠른 경제복구 과정에서 심각한 전력 부족에 시달렸다.

특히 関西(간사이) 지역의 전력 수요가 급증하면서 안정적인 대규모 전원개발이 절실해졌다.

関西電力(간사이전력)은 사람의 접근조차 쉽지 않았던 黒部川(쿠로베강) 상류의 막대한 수력에 주목했다.

그 결과 추진된 사업이 黒部川第四発電所(쿠로베강 제4발전소) 건설사업이다.

흔히 ‘黒四(쿠로욘)’이라고 부르는 대사업이었다.

1956년 공사가 시작되어 1963년 완공될 때까지 약 7년이 걸렸다.

당시 돈으로 500억 엔이 넘는 막대한 사업비가 들어갔고 연인원 약 1,000만 명이 투입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171명의 근로자가 목숨을 잃었다.

오늘날 거대한 관광명소가 된 黒部ダム(쿠로베댐)은 그만큼 많은 사람의 땀과 희생 위에 세워진 구조물이다.


3. 높이 186m, 일본 최대급 아치식 댐

黒部ダム(쿠로베댐)은 黒部川(쿠로베강) 상류에 건설된 아치식 콘크리트댐이다.

댐 높이는 186m.

댐 정상부 길이는 약 492m에 이른다.

거대한 콘크리트 벽이 산과 산 사이를 하나의 곡선으로 연결하고 있다.

아치댐은 수압을 댐 자체의 무게만으로 버티는 것이 아니라, 곡선 형태를 이용해 양쪽 암반으로 전달하는 구조다.

따라서 무엇보다 양쪽 산의 암반이 충분히 견고해야 한다.

댐의 형태 하나만 보더라도 지형과 지질, 구조계산, 시공기술을 모두 종합한 결과물이다.

내가 댐 위를 걸으며 자꾸 양쪽 산과 댐의 접합부를 바라보게 된 것도 토목쟁이의 버릇 때문이었을 것이다.

관광객들은 호수와 방류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는 콘크리트 구조와 암반부터 눈에 들어왔다.


4. 가장 먼저 해결해야 했던 문제, 어떻게 공사장까지 들어갈 것인가

이곳에 댐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의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사람도 장비도 자재도 들어갈 길이 없었다.

지금이야 버스를 타고 扇沢(오기사와)에서 関電トンネル(간덴터널)을 지나 黒部ダム(쿠로베댐)까지 쉽게 들어간다.

하지만 1950년대 당시 이 일대는 북알프스 깊숙한 오지였다.

거대한 댐을 만들려면 시멘트와 철근, 중장비와 수많은 인력을 끊임없이 현장으로 운반해야 했다.

따라서 먼저 산을 관통하는 자재운반용 터널이 필요했다.

이것이 大町トンネル(오마치터널), 현재의 関電トンネル(간덴터널)이다.

그러나 이 터널이 黒四(쿠로욘) 공사의 가장 악명 높은 난공사가 될 줄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5. 터널 앞을 가로막은 破砕帯(파쇄대)

공사는 순조롭게만 진행되지 않았다.

1957년 5월.

터널을 굴진하던 공사팀 앞에 예상하지 못했던 지질대가 나타났다.

破砕帯(파쇄대)였다.

파쇄대란 단층운동 등으로 암반이 잘게 부서져 매우 약해진 지질대를 말한다.

단단한 암반이라면 발파하고 버럭을 반출하며 앞으로 굴진하면 된다.

그러나 파쇄대에서는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암반 자체가 부서져 있기 때문에 굴착하는 순간 무너질 수 있고 그 틈을 따라 엄청난 양의 지하수가 터져 나온다.

실제 関電トンネル(간덴터널) 공사에서는 차가운 지하수가 터널 안으로 쏟아졌다.

공식 기록에도 이 파쇄대는 黒部ダム(쿠로베댐) 건설의 대표적인 난공사로 기록되어 있다.

불과 약 80m 정도의 구간을 통과하는 데 약 7개월이 걸렸다.


6. 물과 흙과 암반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터널

알펜루트 버스를 타고 関電トンネル(간덴터널)을 지나면서 지금도 당시 破砕帯(파쇄대)를 통과한 지점을 볼 수 있다.

버스 안에서도 이곳이 黒四(쿠로욘) 건설의 최대 난공사 구간이었다는 설명이 나온다.

나도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보려고 했다.

하지만 달리는 버스 안에서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데다 어두운 터널이라 제대로 찍기가 어려웠다.

그곳에서는 당시 암반 틈에서 얼마나 많은 물이 터져 나왔는지, 그리고 공사팀이 그 물과 어떻게 싸웠는지 영상과 자료로 보여주었다.

물을 머금은 부서진 암반.

굴착하면 무너지고,

막으면 다시 물이 터지고,

그 물을 빼내면서 다시 조금씩 굴진해야 하는 공사.

터널공사를 해본 사람이라면 그 상황이 얼마나 무서운지 안다.

터널에서 물은 단순히 ‘물이 나온다’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막대한 용수가 들어오면 지반이 함께 흐트러지고 막장 붕괴와 토사 유출로 연결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공사를 계속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7. 80m를 뚫는 데 7개월

전체 터널 길이에 비하면 파쇄대 자체는 길지 않았다.

약 80m.

하지만 이 80m를 돌파하는 데 무려 7개월이 걸렸다.

하루에 몇 미터씩 굴진하는 일반적인 터널공사의 개념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구간이었다.

한 발 앞으로 나가기 위해 배수하고, 보강하고, 굴착하고, 또다시 무너지는 지반을 잡아야 했다.

당시 기술자들과 근로자들은 결국 파쇄대를 포기하지 않았다.

산을 우회할 수도 없었다.

댐 건설을 포기하지 않는 한 반드시 이 산을 뚫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파쇄대를 돌파했다.

그 뒤에야 자재와 인력을 黒部(쿠로베) 깊숙한 곳으로 대량 수송할 길이 열렸다.

지금 우리가 편안히 버스를 타고 지나는 関電トンネル(간덴터널)은 원래 관광시설이 아니다.

黒部ダム(쿠로베댐)을 만들기 위해 먼저 뚫어야 했던 공사용 생명선이었다.


8. 171명의 이름 앞에서

거대한 토목공사는 기술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현장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다.

黒四(쿠로욘) 건설공사에서는 모두 17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금 黒部ダム(쿠로베댐) 오른쪽에는 그들을 기리는 殉職者慰霊碑(순직자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댐을 바라보며 그 숫자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171명.

지금의 산업안전 기준으로 보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희생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시대의 열악한 장비와 기술, 혹독한 자연조건 속에서 이 거대한 공사를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위험을 감수해야 했는지를 보여주는 숫자이기도 하다.

거대한 구조물의 뒤에는 언제나 사람의 노동이 있다.

토목기술자로 살아온 나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黒部ダム(쿠로베댐)의 높이나 길이보다도 171이라는 숫자가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9. 黒部記(쿠로베기)

댐 주변을 돌아보다 콘크리트 벽에 설치된 청동판 하나를 보았다.

제목은

黒部記(쿠로베기)

였다.

일본 시인 竹中郁(다케나카 이쿠)이 黒部(쿠로베) 개발의 과정을 시처럼 적어놓은 글이다.

현장에서 직접 읽었던 글이라 여행기에 원문 그대로 남겨두고 싶다.


[黒部記 원문]

黒部記

昭和三十一年五月の勇断
たちまち英智による工事に着手
秀れた自然への礼讃をこめて
関電 黒部の両トンネルは掘り進められた

思いもかけず 同三十二年五月
関電トンネルで大破砕帯に遭遇し
人智人力の限りをつくして半年
未来をひらく鍵は貫かれた

ここへわれらが生みつづけた黒部湖は
澄みわたる大空からの光りを貯え
いずかたへでも電力は
昭和三十五年十一月に湧きはじめた

遠く山野をはしり 川を越え 街をくぐり
人間生活の手となり 足となる電力
その源は全く澄い 讃歌はこれを呼んだ
時にこれ 昭和三十八年六月であった

竹中 郁


[黒部記 해석]

1956년 5월의 용단.

곧바로 지혜를 모아 공사에 착수하고,
뛰어난 자연에 대한 찬미의 마음을 담아
간사이전력의 쿠로베 양쪽 터널은 앞으로 굴진해 나갔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듬해인 1957년 5월,
간덴터널에서 거대한 파쇄대와 맞닥뜨렸다.

사람의 지혜와 힘을 모두 쏟아부은 반년 끝에
마침내 미래를 여는 열쇠가 관통되었다.

이곳에 우리가 만들어낸 쿠로베호는
맑게 갠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을 담고,
그곳에서 태어난 전력은
1960년 11월부터 솟아나기 시작했다.

멀리 산과 들을 달리고,
강을 건너고,
도시 아래를 지나,

사람들의 생활에서 손이 되고 발이 되는 전력.

그 근원이 이토록 맑고 깨끗하니
찬가가 이를 노래한다.

때는 1963년 6월이었다.

― 竹中郁(다케나카 이쿠)


글 가운데 특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人智人力の限りをつくして半年
未来をひらく鍵は貫かれた’

라는 부분이었다.

사람의 지혜와 힘을 다한 반년 끝에 미래를 여는 열쇠가 관통되었다.

토목기술자인 내게는 단순한 미사여구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 ‘반년’ 안에 파쇄대와 싸운 기술자와 근로자들의 시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10. 黒部湖(쿠로베호)

댐을 막으면서 산속에는 거대한 호수가 생겼다.

黒部湖(쿠로베호)다.

해발 약 1,450m의 북알프스 깊숙한 곳에 자리한 거대한 인공호수다.

맑은 물과 주변의 높은 산, 그리고 거대한 콘크리트댐이 함께 만들어내는 풍경은 인공구조물과 자연이 묘하게 어우러져 있었다.

댐을 만든 것은 사람이지만 그 물을 채우는 것은 눈과 비이고, 그 주변을 둘러싼 것은 수천 년 동안 그 자리에 있었던 산이다.

현장에서 보니 댐 자체만큼이나 이 호수가 인상적이었다.


11. ダム湖百選(댐호수백선) 黒部湖(쿠로베호)

댐 주변 콘크리트 벽에는 작은 명판 하나가 붙어 있었다.

ダム湖百選
黒部湖

(댐호수백선
쿠로베호)

였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길 100선’ 같은 식으로 일본에서도 지역에 사랑받고 가치가 있는 댐 호수를 선정한 제도가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黒部湖(쿠로베호)는 2005년 일본의 ダム湖百選(댐호수백선)에 선정된 65개 호수 가운데 하나다.


[ダム湖百選 선정 취지 원문]

私たちの生活を水害から守り、
用水や電力の供給を行っているダム湖は、
四季を通じて美しい景観を見せたり、
水や自然の学習と上下流交流の場となるなど、
人々にさまざまな恩恵をもたらしているものが多くあります。

ダム湖百選は、
そのような地域に親しまれ、
地域にとってかけがえのないダム湖を選定、顕彰することによって、
より一層地域に親しまれ、
地域の活性化に役立つことを願って認定するものです。


[해석]

우리 생활을 수해로부터 지키고,
용수와 전력을 공급하는 댐 호수 가운데에는

사계절 내내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주고,
물과 자연을 배우는 장소가 되며,
상류와 하류 지역 사람들이 교류하는 공간이 되는 등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혜택을 주는 곳이 많이 있다.

‘댐호수백선’은 이처럼 지역 주민들에게 사랑받고,
그 지역에서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댐 호수를 선정하고 널리 알림으로써

그 호수가 더욱 지역민의 사랑을 받고,
지역 활성화에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인증하는 제도이다.


선정 기준도 단순히 풍경만 보는 것이 아니다.

좋은 경관,
생태계에 대한 배려,
역사적 가치,
사람과 자연의 교류,
상하류 지역의 교류,
학습장소로서의 이용,
지역 주민의 관심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한다.

2005년 전국 165개 댐 호수가 추천되었고 이 가운데 65곳이 선정됐다.

그 하나가 바로 黒部湖(쿠로베호)다.


12. ダム湖百選(댐호수백선)이 소개하는 黒部湖(쿠로베호)

공식 ダム湖百選(댐호수백선) 자료에서는 黒部湖(쿠로베호)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원문]

黒部湖は、通称「くろよん」の名で全国に親しまれている黒部ダムの貯水池。

建設費には昭和31年当時で513億の巨費が投じられ、
延べ1,000万もの人手により、
実に7年の歳月を経て完成しました。

今では立山黒部アルペンルートの名勝として知られており、
大迫力の放水や、
大自然の中にそびえる巨大建造物としての存在感以外にも、
黒部ダムには数々のエピソードや歴史が詰まっています。


[해석]

쿠로베호는 통칭 ‘쿠로욘’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전역에 널리 알려진 쿠로베댐의 저수지다.

건설에는 1956년 당시 513억 엔이라는 막대한 비용이 투입되었고,
연인원 1,000만 명에 이르는 인력이 동원되어
무려 7년의 세월 끝에 완성되었다.

오늘날에는 다테야마쿠로베 알펜루트의 명승으로 알려져 있으며,
박력 넘치는 방류와
대자연 속에 우뚝 선 거대한 구조물이라는 존재감뿐만 아니라,

쿠로베댐에는 수많은 이야기와 역사가 담겨 있다.


그 글을 읽어보니 역시 黒部湖(쿠로베호)를 단순히 아름다운 호수로만 선정한 것은 아니었다.

거대한 자연,
댐이라는 토목구조물,
그리고 그것을 만들기까지의 역사까지 함께 평가받은 곳이었다.


13. 관광객이 지나가는 터널 속에 남은 공사현장

현재 우리가 扇沢(오기사와)와 黒部ダム(쿠로베댐) 사이를 편안하게 이동하는 길은 70년 가까이 전 공사자재를 운반하기 위해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뚫었던 길이다.

버스는 터널을 아무렇지 않게 달린다.

에어컨이 나오고,
조명도 켜져 있고,
관광객들은 창밖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 콘크리트 벽 너머에는 당시 터널 기술자들과 근로자들이 겪었던 시간이 그대로 남아 있다.

나는 특히 破砕帯(파쇄대)를 지나며 그 생각을 많이 했다.

지금 버스로 몇 초 만에 지나가는 그 짧은 구간을 뚫기 위해 당시 사람들은 7개월 동안 물과 암반을 상대로 싸웠다.

토목이라는 일은 완성되고 나면 너무 당연해 보인다.

터널은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길 같고,

교량은 원래 강 위에 놓여 있었던 것 같고,

도로는 원래 산을 넘어가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길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 먼저 산을 조사했고,
누군가 선을 그었고,
누군가 계산했고,
누군가 발파했고,
누군가는 막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 과정을 아는 사람에게 완성된 구조물은 그냥 구조물이 아니다.


14. 『黒部の太陽(쿠로베의 태양)』

이 공사는 일본 사회에서도 워낙 큰 사건이었다.

결국 黒四(쿠로욘) 건설은 소설과 영화의 소재가 되었다.

木本正次(기모토 쇼지)의 논픽션 소설 『黒部の太陽(쿠로베의 태양)』이 발표되었고, 이를 원작으로 1968년 같은 제목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주연은 三船敏郎(미후네 도시로)과 石原裕次郎(이시하라 유지로).

감독은 熊井啓(쿠마이 케이)였다.

영화에서 가장 강렬하게 묘사되는 장면 역시 関電トンネル(간덴터널)의 破砕帯(파쇄대) 공사다.

암반이 무너지고 차가운 물이 터널 안으로 쏟아지는 가운데 기술자와 근로자들이 공사를 계속한다.

실제 黒四(쿠로욘) 건설이 그만큼 당시 일본인들에게도 ‘세기의 난공사’로 받아들여졌다는 뜻이다.


15. 화려한 관광지 뒤에 있는 7년

오늘날 黒部ダム(쿠로베댐)은 너무나 잘 정비된 관광지다.

전망대가 있고,
식당이 있고,
관광방류를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찾아온다.

알펜루트를 따라온 관광객들은 댐 위를 걷고 黒部湖(쿠로베호)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이곳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관광지라는 모습 뒤에 1956년부터 1963년까지 이어졌던 7년의 공사현장이 보인다.

길도 없었던 산.

파쇄대.

쏟아지는 지하수.

수많은 터널.

거대한 콘크리트 타설.

그리고 171명의 희생자.

그 모든 시간이 끝난 뒤 지금의 黒部ダム(쿠로베댐)이 남았다.


16. 171명의 희생을 기억하는 殉職者慰霊碑(순직자위령비)

이 거대한 쿠로베댐을 바라보며 또 하나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었다.

바로 이 댐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다.

쿠로욘 건설공사에서는 모두 171명이 목숨을 잃었다.

쿠로베댐 우안에는 이들을 기리는 殉職者慰霊碑(순직자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위령비에는 공사현장에서 일하는 여섯 사람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그 곁에는 공사 중 목숨을 잃은 171명의 이름이 하나하나 새겨져 있다.

쿠로베댐을 여기까지 돌아보면서 나는 거대한 아치댐의 위용과 발전시설, 북알프스를 뚫고 들어온 터널과 파쇄대를 보며 토목기술의 힘에 감탄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기술과 장비만이 아니었다.

험준한 북알프스의 산속에서 길을 내고, 터널을 뚫고, 물과 암반과 싸우며 직접 공사를 해낸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171명은 끝내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토목기술자로 26년을 살아오며 수많은 공사현장을 경험한 나에게 그 숫자는 결코 가볍게 다가오지 않았다.

공사현장에서 안전이 얼마나 중요한지, 하나의 거대한 토목구조물이 완성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력이 필요한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높이 186m의 거대한 쿠로베댐을 바라보며 느꼈던 경이로움 뒤에는 그렇게 171명의 희생이 있었다.

그들의 희생까지 기억할 때 비로소 쿠로베댐의 역사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사 중 목숨을 잃은 171명의 순직자들에게 머리 숙여 명복을 빈다.

17. 토목기술자의 눈으로 바라본 黒部ダム(쿠로베댐)

댐을 떠나면서도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 역시 평생 토목현장에서 살아왔다.

설계도면 위에서 선을 그리고,
현장에서 구조물이 실제 모습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수도 없이 보았다.

국도와 고속도로의 설계와 공사현장을 오가며 수많은 도로와 터널, 교량을 직접 설계하고 공사를 감독했다.

그중에는 국내 최초의 해저터널 건설공사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黒部ダム(쿠로베댐)을 보며 단순히

“크다.”

“대단하다.”

라는 감상만 들지는 않았다.

저 구조물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현장에서 고민했을까.

설계자는 밤새 도면을 들여다봤을 것이고,

현장 기술자는 예상하지 못한 지질을 만나 머리를 싸맸을 것이며,

근로자들은 차가운 물이 쏟아지는 막장 안으로 다시 들어갔을 것이다.

토목공사는 자연을 상대로 하는 일이다.

도면에서 아무리 완벽하게 계획해도 현장은 그대로 따라주지 않는다.

특히 산과 땅속은 열어보기 전까지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그것이 터널공사의 무서움이고 토목의 어려움이다.

1950년대의 기술과 장비로 북알프스 한복판에서 이 정도 규모의 사업을 완성했다는 사실은, 같은 토목기술자의 입장에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8. 우리 토목기술자의 위대함이여

나는 黒部ダム(쿠로베댐)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생각했다.

도로를 여행하면서 사람들은 대부분 목적지를 기억한다.

터널을 지나면서 그 터널을 누가 뚫었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다리를 건너면서 그 교량을 누가 설계하고 누가 만들었는지도 잘 생각하지 않는다.

댐에서 사진을 찍으면서도 이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든 사람들의 이름까지 떠올리지는 않는다.

그것이 어쩌면 토목인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완성된 뒤에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어버리는 것.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 당연한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누군가는 몇 년씩 현장에서 살았다는 것을.

그리고 때로는 목숨까지 잃었다는 것을.

黒部ダム(쿠로베댐) 역시 그런 사람들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나는 일본을 무조건 찬양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기술은 기술대로 평가해야 한다.

1950년대 북알프스의 혹독한 자연 속에서 길을 만들고, 터널을 뚫고, 파쇄대를 돌파하고, 마침내 높이 186m의 거대한 아치댐을 완성한 기술자와 근로자들의 집념에는 같은 토목인으로서 경의를 표하고 싶다.

그래서 黒部ダム(쿠로베댐) 앞에서 내 마음속에 떠오른 말은 결국 하나였다.

“우리 토목기술자의 위대함이여.”

그리고 한마디를 더 남긴다.

이 댐을 만든 일본의 토목인들과 근로자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Translated by ChatG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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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본격추리!
지금 밝혀지는 ‘미로관 살인사건‘의 충격적인 진상!

이 작품을 이렇게 ‘소설‘로 발표하기가 아직 조금은 망설여진다. ‘미로관의 살인‘이라는 제목을 보고 이미 눈치챈 독자가 있을지 모르지만, 이 작품은 실제로 일어났던살인사건을 소재로 삼은 글이기 때문이다.
그 살인사건은 이 소설 속에서 밝힌 대로 1987년 4월에 일어났다. 유명 작가가 사는 기묘한 저택에서 일어난 괴사건으로, 당시 일부 매스컴이 상당히 센세이셔널하게 보도하려고 했다.

미로관의 살인시시야 가도미표지 하단에는 짙은 녹색 띠지가 둘러져 있다. ‘기단샤稀譚社 노블스 이달의 신간‘이라는 글 아래 하얀색 고딕체로 인쇄된 광고 문구.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람이 쓴 책이라면 당연히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것도 지은이가 직접 보내온 증정본이다. 읽지 않을 수가 없다. 게다가 책 내용이 그 유명한 미로관 살인사건이라면.......

앞표지 중앙에 네모난 연보라색 슬라이드필름용 프레임이 비스듬히 기울어진 상태로 놓여 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사진 한 장. 피바다를 떠오르게 만드는 새빨간 배경에서 불쑥 솟아오른 물소 머리....... 프레임 오른쪽 위의 연보라색 바탕에 책 제목이 돋을새김으로 박혀 있다. 프레임 왼쪽에는 역시 돋을새김으로 지은이 이름이있다.

1988년 9월 2일 금요일.
여름감기에 걸려 집에서 누워 있던 시마다 앞으로 책 한 권이 도착했다.

복잡한 미로를 품고 있는 지하 저택 미로관迷路館. 이곳에 모인 추리작가 네 명이 미로관을 무대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 순간 참극의 막이 오른다. 밀실로 변한 저택안에서 일어나는 연쇄살인! 과연 진범은 누구인가. (......) 전율할 엄청난 트릭! 경악할 결말! 비교할 수 없는 추리의 매혹!

시마다는 그 사건 내용을 상세하게 아는 사람 중 한 명이다. 매우 심상치 않은 상황에서 발생한 그 사건이 결국 어떤 해결‘을 맞이했는지도 잘 알고 있다.
실제 일어났던 사건의 추리소설적 재현이라.......

소설에 등장하는 인명 지명 등의 고유명사는 이런저런 사정에 비추어 거의 가명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둔다. 이렇게 말하는 나 자신도 시치미 뚝 떼고 소설 속에등장하지만 나 역시 ‘시시야 가도미‘라는 필명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그들‘ 중 몇 명은 분명히 추리소설이라는 기형적인 문학을 각별히 사랑하고 추리문학에 열정을 바친 사람들이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그 사건을 소재로 이렇게추리소설적 재현을 시도하는 일이 죽은 이들에게 애도의 뜻을 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건의 전말을 이런 식으로 발표하겠다고 마음먹은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편집자인 모씨가 적극 권유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그 사건으로 죽어간 ‘그들‘에 대한 추모의 뜻이라고나 할까.

고백하겠다.
나는 실제로 그 사건을 목격하고 온 사람이다. 나 시시야 가도미는 1987년 4월에 미로관에서 일어난 그 연쇄살인사건의 관계자 가운데 한 명이다.

주요 등장
인물괄호 안 숫자는 1987년 4월에 만으로 셈한 나이
미야가키요타로(60) 일본 추리소설계의 원로 대가, 미로관 주인기요무라 준이치(30) ㅡ 추리작가
스자키 쇼스케(41) ㅡ추리작가후
나오카 마도카(30) ㅡ 추리작가
하야시 히로야(27) ㅡ 추리작가
사메지마 도모오(38) 평론가
우탸야마 히데유키(40) 편집자
우타야마 게이코(33) 우타야마 히데유키의 아내
이노 미쓰오(36) 미야가키의 비서
가도마쓰 후미에(63) 가사 도우미
시마다 기요시(37) 추리소설 마니아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우타야마 히데유키는 그가 권한 소파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아, 정말 건강하신 것 같아 마음이 놓입니다."

우타야마가 마주하고 있는 그는 작년 봄에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와 별다를 바 없는 노신사, 미야가키 요타로宮垣葉太郞다.
하지만, 그렇다. 분명히 안색이 좋지 않다. 얼굴이 전보다 더 야윈 것도 같고, 움푹 팬 두 눈은 예전의 날카로운 빛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듯하다.

고개를 끄덕이며 미야가키를 따라 웃음으로 얼버무려보았지만 우타야마는 이때 살짝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건강에 관해 이야기하는 미야가키의 말투가 왠지 전보다 더 자조 섞인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 이야기는 빼고 오래간만에 선생님을 뵙고 싶습니다. 마침 설날에 고향에 들를 예정이기도 해서요."
"아, 그러고 보니 자네 고향이 미야즈였던가?"
우타야마의 본가는 교토 부 미야즈 시. 명승지인 아마노하시다테 근처에서 여관을 운영한다.

미야가키 요타로.
대형 출판사인 기단샤 문예편집부에 근무하는 우타야마가 담당 편집자로서, 그리고 작품의 열렬한 독자로서 오랜 세월 함께 해온 탐정소설 작가다.

추리 문단 ‘배후의 대가‘라고나 불러야 할 존재!
우타야마는 늘 그렇게 생각했다.
대중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한, 이른바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나 시대의 유행을 넘어서 미야가키만큼 열렬한 ‘신봉자‘를 거느린 추리작가도 드물지 않을까.

"끈덕지군, 자네도. 난 원래 마음이 아주 약한 사람일세. 예를 들면 말이야, 내겐 소년 시절부터 간절히 바라던 소망이 하나 있었지. 한번 내 손으로 사람을 죽여보고싶다는 소망이. 하지만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했네. 몇 십 년씩 살인 이야기만 써온 건 말하자면 그 보상 행위겠지."

‘미로관迷路館‘이라고 불리는 그 저택은 미야가키 요타로가 십여 년 전에 별장으로 지은 집이다. 원래 목적에 걸맞게 여름 한철을 지내는 데 쓰던 시절에는 우타야마도 몇 차례 초대받은 적이 있다. 그 이름대로 집 안 복도가 복잡한 미로 모양을 한 기상천외한 건물이라 처음 방문했을 때는 상당히 당황했다. 미야가키는 장난꾸러기아이 같은 얼굴로, 놀라는 방문객들의 반응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곤 했다.

"날 과대평가하는군. 그 유명한 밴 다인 씨가 한 말이 옳아. 한 작가가 뛰어난 탐정소설을 여섯 편 이상은 쓸 수 없다는. 내가 사십 년 가까이 대체 몇 작품이나 썼는지아나? 장편만 해도 그 한계치를 곱절이나 넘어섰네."

"연말에 우연히 알게 됐는데, 규슈에 있는 무슨 절집 셋째아들이라고....... 아, 만나면 알 걸세. 자네도 분명히 관심을 갖게 될 거네."

염려하던 미야가키의 컨디션이 ‘건강한 건지 어떤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미야가키가 아직도 내심 창작에 대한 열정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인할 수있었다. 그것만 해도 오늘 먼 걸음을 한 수확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물론 이때 우타야마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설마 이것이 살아 있는 미야가키 요타로와 이야기를 나눈 마지막 기회가 될 줄은.

"조만간 초대장을 보낼 테니 시간 내서 들러주게."
그렇게 말하면서도 미야가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의 안색을 살피며 우타야마가 물었다.
"저 외에는 어떤 분들을 부르실 예정이신가요?"

젊은 시절 미야가키는 눈길을 끌 만한 미남이었다고 한다. 중년을 넘기고도 그가 마음만 먹으면 섹스 상대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요 몇 해동안은 그런 소문도 돌지 않았다.

부인과 함께 오라는 권유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내는 미야가키가 도쿄에 살 때 인사를 시켜 서로 아는 사이였고, 임신 경과도 순조롭고 안전한 시기이기도했다.

조수석에 앉은 게이코가 말했다. 아내의 밝고 소녀 같은 말투에 우타야마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아내는 우타야마보다 일곱 살 아래다. 그래도 올해로 벌써 서른세살이 된다.

고독한 노인. 아무리 생각해도 미야가키의 지금 모습에는 그런 표현이 걸맞다. 도쿄에서 지낼 때 본 미야가키한테서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이미지였다.

미야가키 요타로의 비서 이노 미쓰오가 보낸 편지를 받은 것이 딱 2주 전이다. 환갑 기념 파티를 한다는 안내장이었다.

스자키 쇼스케. 기요무라 준이치. 하야시 히로야. 후나오카 마도카. 사메지마 도모오. 아까 우타야마가 입에 올린 이 이름들은 모두 그들 다섯 사람의 본명이다. 다섯사람은 모두 미야가키가 발행하는 잡지 『기상의 신인상 출신자인데 집필 활동을 할 때는 다들 본명이 아닌 필명을 쓰고 있다.

그런 까닭에 미야가키 요타로의 ‘제자‘들은 모두 ‘스승‘ 앞에서는 결코 필명으로 부르지 않는다. 담당 편집자도 예외가 아니다. 이것은 오래전부터 하나의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저어,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우타야마는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좀 문제가 생겨서요."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시마다 기요시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어느 절엔가 계시는 스님이시죠? 전혀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군요."
우타야마가 왠지 유쾌한 기분이 들어 슬쩍 농담을 던졌다.

나카무라 세이지.
우타야마도 신문이나 주간지에서 본 기억이 난다. 이미 세상을 떠난 괴상한 건축가. 그가 지은 기묘한 건물들.

폭은 대략 4미터에 1층 높이. 높이가 3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바위로 지은 자그마한 사당 같은 모습이다. 양쪽으로 이어지는 야트막한 돌담 너머는 조금 떨어진위치에서 보면 살풍경한 평지가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여서 게이코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저게 현관이야? 왠지 무서워. 으스스한 느낌이 드네."
"선생님이 무척 좋아하는 분위기잖아."
"음, 그런데 생각보다 작네. 저 안에 미로가 있어?"
분명히 얼핏 보기에는 작은 건물이다.

"원래 제가 미야가키 요타로의 팬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작년에 선생님을 알게 된 건...... 뭐랄까, 그렇군요, 건물이 맺어준 인연이라고나 할까요?"
"건물이? 미로관 말입니까?"

격자 바로 앞 오른쪽에는 어른 가슴 높이까지 오는 대리석상이 놓여 있었다. 하반신은 네 발 달린 짐승, 상반신은 사람 모습을 하고 있다. 우두인신牛頭人身이 아니라우신인두牛身人頭다. 이것 또한 미노타우로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그 괴물의 형상을 단테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잘못 해석한 결과 이런 기형의 기형이 생겨났다고한다.

"저 건물은 말이야, 여기서는 현관 부분만 보이는 거야."

나이가 들어 보이지만 어쩌면 할머니라고 부를 정도로 많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통통하고 키가 작았다. 게이코도 체격이 꽤 작은 편인데 할머니는 더 작았다. 그런 몸으로 아장아장 지하 건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큰 실례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우타야마는 노트르담의 꼽추를 떠올렸다.

할머니가 무뚝뚝하고 쉰 목소리로 세 사람을 맞아들였다.

나온 사람은 세 달 전에 방문했을 때도 보았던 가사 도우미 할머니였다.

"그러니까, 미로관 본체는 저 아래, 지하에 있다는 이야기지."

거무스름한 얼굴을 찡그리고 쓰러져 있는 남자, 기요무라 준이치가 다시 신음소리를 냈다.

사메지마 도모오.
후나오카 마도카.
스자키 쇼스케.
나머지 한 사람, 하야시 히로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때만 해도 우타야마는 그런 사실을 깨달을 여유조차 없었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가 손을 댔다는 기묘한 건물들의 이름. ‘십각관‘ 그리고 ‘수차관이었던가? 그리고 그런 저택에서 일어났다는 사건들.......
나나

미야가키 요타로.
대형 출판사인 기단샤 문예편집부에 근무하는 우타야마가 담당 편집자로서, 그리고 작품의 열렬한 독자로서 오랜 세월 함께 해온 탐정소설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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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ㅣ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시리즈 3
박영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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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 도쿄 여행기 - 특별기고]

우에노공원에서 만난 百濟人(백제인) 王仁(왕인)
― 왕인박사비에 새겨진 기록을 따라


1. 도쿄 한복판에서 만난 백제의 이름

우에노공원을 걷다가 뜻밖의 이름을 만났다.

왕인(王仁).

도쿄 한복판, 우에노온시공원(上野恩賜公園) 안에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학자로 전해지는 왕인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단순한 작은 표석 하나가 아니었다.

지붕 모양의 갓돌을 얹은 커다란 비석,
그 옆의 또 다른 석비,
왕인의 모습을 새긴 청동 부조,
그리고 일본어, 영어, 한국어로 된 설명판까지 갖춰져 있었다.

일본을 여행하며 우리 역사와 연결되는 흔적을 만날 때마다
그냥 지나치기가 어렵다.

특히 왕인은
고대 백제와 일본 사이의 문화교류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다.


2. 현지 안내판에 적힌 왕인박사

안내판의 제목은

博士王仁碑
박사 왕인비.

일본어 설명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古事記」などによると、王仁博士は古墳時代前半に百済国から渡来し、
「論語」・「千字文」を伝えた学者であり、後に帰化したとされる。
また、その子孫は文筆をもって朝廷に仕えたといわれる。

この「博士王仁碑」二基は、王仁博士顕彰会により、
昭和十五(一九四〇)年及び昭和十六(一九四一)年に建立された。

平成二十五年三月
台東区教育委員会

우리말로 옮기면 이렇다.

『고사기』 등의 기록에 따르면,
왕인박사는 고분시대 전반에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와
『논어』와 『천자문』을 전한 학자이며,
뒤에 일본에 귀화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그의 후손들은 문필을 통해
일본 조정에 봉사했다고 한다.

이 두 기의 왕인박사비는
왕인박사현창회에 의해
1940년과 1941년에 각각 건립되었다.

2013년 3월
다이토구 교육위원회

실제로 현지 설명판도 왕인을
백제에서 건너온 학자로 명확하게 소개하고 있다.


3. 안내판에 적힌 한글

더 반가웠던 것은
안내판 아래쪽에 한국어 설명이 별도로 적혀 있다는 점이었다.

왕인박사비

『고사기』 등 사서에 의하면 왕인박사는 백제에서 건너와
『논어』와 『천자문』을 일본에 전해 한자문화 정착에 기여한 왕인박사를 기리기 위해 왕인박사현창회가 1940년과 1941년에 건립하였다.

도쿄 우에노공원 한복판에서
한글로 적힌 ‘백제’와 ‘왕인박사’라는 글자를 읽고 있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4. 왕인은 언제 일본으로 건너갔는가

왕인의 일본 도래 시기는 일본의 고대 사서에서는 오진천황(応神天皇) 때로 전한다.

한국에서는 통상 백제 아신왕(阿莘王, 재위 392~405) 무렵의 인물로 설명되는 경우가 많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는
백제에서 학자가 건너왔다는 전승이 실려 있고,
그 인물로 왕인의 이름이 등장한다.

왕인이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다는 이야기도
오랫동안 널리 알려져 왔다.

다만 여기에는 주의할 점이 있다.

특히 『천자문』은 일반적으로 6세기 중국 양나라에서 성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왕인이 4~5세기 무렵 일본에 건너갔다는 전승과는 연대가 맞지 않는다.

따라서 왕인이 실제로 『천자문』을 전했다는 부분은
오늘날 그대로 확정된 역사적 사실로 보기 어렵다.

왕인이라는 인물에 관한 기록 자체도
후대에 편찬된 일본 고대 사서를 통해 전해지기 때문에
그의 생애 전체를 오늘날의 전기처럼 정확하게 복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일본의 고대 기록에서
백제에서 건너온 학자가 일본 왕실에 학문을 전했다는 기억이 남아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왕인은 바로 그 고대 한일 문화교류를 상징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다.


5. ‘博士王仁碑’

가장 눈에 띄는 비석에는

博士王仁碑

라고 새겨져 있다.

그대로 풀이하면

‘박사 왕인비’.

왕인을 학문을 전한 학자로 기리는 비석이다.

비석 본문에는 한문으로 긴 글이 새겨져 있다.

왕인의 백제 출신과 일본 도래, 학문 전래,
후대에 남긴 문화적 공적을 기리는 내용이 중심이다.

다만 오랜 세월이 지나 글자의 마모가 있고,
햇빛과 그림자가 겹친 부분도 있어
모든 글자를 정확하게 판독하기 어렵다.

확인하지 못한 글자를 억지로 추정해 옮기기보다는
읽을 수 있는 것만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맞겠다.


6. ‘流芳萬古’

옆의 또 다른 큰 비석 상단에는

流芳萬古

라는 네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다.

‘유방만고’.

직역하면

‘향기로운 이름이 만고에 흐른다.’

조금 자연스럽게 풀면

‘그 아름다운 이름과 공덕이 영원히 후세에 전해진다.’

라는 뜻이다.

중국 고전에서 이어져 온 표현으로, 훌륭한 사람의 명성과 업적이 오래도록 후세에 남는다는 의미다.

왕인을 기리는 비석의 제목으로 상당히 어울리는 글귀였다.


7. 1940년과 1941년에 세워진 두 비석

현지 안내판에는 왕인박사비 두 기가 각각

1940년, 1941년

왕인박사현창회에 의해 세워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오늘 우리가 우에노공원에서 보고 있는 왕인박사비는 고대에 세워진 유적은 아니다.

20세기 일본에서 왕인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현창비다.

이 점도 분명하게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비석 자체의 연대와 비석이 기리는 왕인의 시대는
약 1,500년 이상 떨어져 있다.

하지만 20세기 일본 사람들이
백제 출신 학자인 왕인을 따로 기념하고
도쿄 한복판에 이런 비석을 세웠다는 사실 역시
또 하나의 역사다.


8. 청동 부조로 다시 만난 왕인

두 석비 옆에는
왕인이 앉아 있는 모습을 새긴 청동 부조도 있었다.

도포를 입고 관을 쓴 모습으로 표현된 왕인이
두 손을 모으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실제 왕인의 얼굴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역사적 초상이라기보다는
후대 사람들이 상상하고 형상화한 왕인의 모습으로 봐야 한다.

그럼에도 문자로만 읽던 이름이
사람의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나니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9. 일본에서 만난 백제

이번 여행의 전날에는 에도성을 걸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일본 근세사를 생각했다.

그리고 하루 뒤인 오늘,
우에노공원에서는 시간을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백제와 일본의 교류를 생각하게 되었다.

왕인에 관한 기록 가운데에는
후대의 전승이 섞여 있고
역사적으로 검토가 필요한 부분도 분명히 있다.

그래서 전승을 사실처럼 과장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반대로
일본 고대 사서에 백제에서 건너온 학자의 존재가 기록되어 있고,
도쿄 한복판에 그를 기리는 비석 두 기와 안내판이 서 있다는 사실까지 가볍게 볼 이유도 없다.

고대 일본 문화의 형성과정에서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과 기술,
문자와 학문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큰 흐름 속에서
왕인의 이름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10. ‘流芳萬古’

왕인박사비를 떠나기 전
다시 한번 네 글자를 바라보았다.

流芳萬古.

아름다운 이름이 만고에 흐른다.

왕인이 실제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전승 가운데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인지는 여전히 신중하게 살펴야 한다.

그러나 적어도 약 1,6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백제 사람 왕인의 이름이 일본 도쿄 우에노공원 한복판에 남아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 이름을 내가 직접 찾아와
비석 앞에서 읽고 있었다.

‘流芳萬古’.

그 네 글자가 이날따라 조금 다르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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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박물관 산책 - 문화인류학자 이희수 교수와 함께하는
이희수 지음 / 푸른숲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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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보고4] 성 소피아 성당 및 블루 모스크의 역사적 배경과 건축 구조

1. 시대적·역사적 배경 및 건립 의의
가. 성 소피아 성당 (Hagia Sophia)
ㅇ (건립 시기 및 주체) 서기 537년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 (532~537년 건설, 537년 봉헌) 완공되었으며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황제의 권위를 상징함.
ㅇ (역사적 변천) 537~1453년 기간을 중심으로 정교회 세계의 핵심 성당으로 기능했으나 (1204~1261년 라틴 제국 시기에는 가톨릭 성당으로 전환된 기간이 존재) 1453년 오스만 제국의 정복 이후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었으며 현재는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 중임.
나. 블루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ㅇ (건립 시기 및 주체) 17세기 오스만 제국의 술탄 아흐메트 1세가 **1609년 착공하여 1616~1617년 무렵 완공(자료에 따라 표기 차)**한 제국 사원임.
ㅇ (역사적 성격) 오스만 제국의 국력을 과시하고 이슬람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기 위해 성 소피아 성당 바로 맞은편에 건설된 제국 사원으로서, 입지·상징성 측면에서 성 소피아의 위상과 ‘경쟁/대응’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해석되기도 함.

2. 건축 구조 및 공학적 지지 체계 비교
가. 성 소피아 성당
ㅇ (펜던티브 공법) 사각형의 하부 구조 위에 원형 돔을 올리기 위해 곡면 삼각형 벽체인 펜던티브를 대규모로 적용하여 돔이 공중에 떠 있는 듯한 공간감을 구현함.
ㅇ (사후 구조 보강) 초기 설계의 하중 분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외부에 거대한 부벽을 설치하였으며 오스만 제국 시기(16세기 등)에 시난 등 당대 기술 체계 속에서 외부 지지 구조가 추가·강화되며 안정성이 증대된 것으로 정리됨.
나. 블루 모스크
ㅇ (필 파예 지지 구조) 중앙 돔의 하중을 직접 지지하기 위해 직경 약 5m 내외의 거대 원통형 기둥인 필 파예 4개를 핵심 축으로 설계함.
ㅇ (계단식 돔 분산) 중앙 돔을 중심으로 4개의 반원형 돔을 계단식으로 배치하여 필 파예–아치–반돔의 단계적 체계로 하중을 분산·전달함.

3. 사진촬영 명당 가이드 및 현장 답사
가. 사진 촬영 명당 (Hotspots)
ㅇ (술탄아흐메트 광장 중앙 분수대) 두 건물의 외관을 한 화면에 담을 수 있는 대표 촬영 구역(분수 전경 포함)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몰 후 블루 아워 시간대의 촬영을 권장함.-실제 촬영 어려움
ㅇ (세븐 힐즈 루프탑) 구시가지의 고도 제한을 활용하여 두 건물의 돔과 미나레트를 수평적 시각에서 조망할 수 있는 대표적 조망 포인트로 운영·안내되는 장소임.-실제 가보지는 못했음
나. 답사
ㅇ (오전) 오전에 블루 모스크에 입장하여 내부 청색 타일의 채광 효과와 거대 지지 기둥의 규모를 확인하고 히포드롬 광장의 유적을 답사함.(여성은 귀를 가릴수 있는 머플러 착용, 신발을 벗고 입장(모든 관람객))
ㅇ (오전) 톱카프궁전, 이스탄불고고학 박물관 답사 및 오찬 후 성 소피아 성당으로 이동하여 내부의 비잔틴 양식과 오스만 양식의 공존을 답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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