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셀프 트래블 - 2023-2024 최신판 ㅣ 셀프 트래블 가이드북 Self Travel Guidebook
김미정.백진수 지음 / 상상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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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 도쿄 여행기

여행 3일차, 2025.12.26.(금요일)
백제의 흔적을 지나, 긴자와 도쿄타워의 불빛 속으로(오전편)

1. 애들과 함께하는 여행의 아침은 느긋하다

아침 9시경 기상.

마님과 둘이 여행을 왔으면
벌써 한참 전에 호텔을 나섰을 시간이다.

그런데 애들과 함께하는 가족여행은 다르다.

어제도 하루 종일 그렇게 돌아다녔으니
아침부터 서두를 이유도 없다.

느긋하게 씻고 준비를 마친 뒤
오전 9시 40분쯤 호텔을 나섰다.

크리스마스이브에는 비가 하루 종일 내렸고,
어제 스카이트리에 올라갔을 때도 밤이 되면서 다시 비와 안개가 몰려왔는데,
오늘 아침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이 맑았다.

자.

도쿄여행 3일차도 시작해보자.


2. 오늘 아침도 역시 스타벅스

오전 9시 50분경.

시부야의 스타벅스에 들어갔다.

커피와 샌드위치를 주문해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했다.

도쿄에 와서 스타벅스를 참 자주 간다.

첫날에는 비 내리는 청의동굴 앞에서 커피를 마셨고,
오늘 아침도 스타벅스에서 시작한다.

이쯤 되면 스타벅스가 우리 도쿄여행의 쉼터이자
중간중간 위치를 알려주는 이정표 같은 존재가 되어가는 것 같다.

커피 한잔 마시고, 샌드위치로 배를 채웠다.

오늘도 걸어야 할 길이 만만치 않다.


3. 유라쿠초역에서 내려 도쿄역으로

아침을 먹고 시부야역으로 향했다.

오늘 첫 번째 큰 목적지는 도쿄역 일대.

정확히는 딸래미가 낮 12시로 미리 예약해둔
초밥집을 찾아가는 길이다.

전철을 타고 유라쿠초역(有楽町駅)에서 내렸다.

유라쿠초역은 도쿄역 바로 남쪽에 있는 역으로,
도쿄국제포럼(東京国際フォーラム)과도 가까운 곳이다.

역에서 나와 도쿄역 방향으로 걸었다.

도쿄국제포럼과 철길을 옆에 두고 걷다 보니
고가 위로 열차와 신칸센이 계속 오갔다.

어제 그렇게 헤맸던 도쿄역을 오늘 또 찾아왔다.

그래도 오늘은 목적지가 확실하다.

딸래미가 예약해둔 초밥집이다.


4. 딸래미가 예약해둔 오늘의 점심

오전 11시 50분경.

예약시간보다 10분 정도 일찍 식당에 도착했다.

오늘 점심은

아사쿠사 스시바 히나토마루 도쿄역 중앙점
(浅草寿司場 ひなと丸 東京駅中央店).

예약시간은 낮 12시.

어제 아키하바라에서는
로스트비프를 먹으려고 한참 줄을 서고 기다렸는데,
오늘은 딸래미가 미리 예약해둔 덕분에 편하다.

창밖으로 도쿄역 일대가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초밥이 나왔다.

야에스 스시(八重洲寿司) 2인분에
참치 5조각 주먹밥, 가리비, 광어, 찐 새우,
다시 국물 계란말이까지 이것저것 푸짐하게 주문했다.

참치부터 여러 종류의 초밥과 미소시루가 함께 놓였다.

마님 앞에는 생맥주가 놓이고, 내 앞에는 콜라가 놓였다.

나는 콜라.

일본에 왔으니 초밥도 한번 제대로 먹어줘야지.

한 점 한 점 집어 먹는데 맛이 좋았다.

딸래미가 식당 하나는 잘 골랐다.

그렇게 네 식구가 맛있게 먹은 점심값은 모두 14,980엔.
4명으로 나누면 1인당 3,745엔이었다.

아침에는 커피와 샌드위치, 점심에는 초밥.

오늘도 한참을 돌아다녀야 하니
배부터 든든하게 채워놓았다.


5. 다이마루 도쿄점에서 잠깐 아이쇼핑

맛있게 점심을 먹고 나왔다.

곧장 우에노로 간 것은 아니다.

도쿄역에 붙어 있는
다이마루 도쿄점(大丸東京店)에 들어가
잠시 아이쇼핑을 했다.

매장은 여러 층으로 나뉘어 있었고,
식품과 의류, 잡화, 생활용품 등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우리는 이것저것 구경하며 천천히 매장을 돌아봤다.

식품매장에서는 생와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또 하나 눈에 띈 것이
헬로키티 모양의 어묵이었다.

분홍색 포장 안에
헬로키티 캐릭터가 그려진 어묵이 들어 있었는데,
일본답게 이런 평범한 식품에도 캐릭터를 입혀놓은 것이 재미있었다.

결국 생와사비와 헬로키티 어묵도 사고,
이것저것 구경하며 잠시 시간을 보냈다.

관광지만 찾아다니는 것도 재미있지만
이렇게 현지 백화점이나 식품매장을 구경하는 것도
여행의 또 다른 재미다.


6. 교바시역에서 우에노로

이제 우에노공원으로 갈 시간이다.

도쿄역 일대에서 교바시역(京橋駅)까지 걸었다.

오후 1시 30분경.

도쿄메트로 긴자선(東京メトロ銀座線)
교바시역(G10)에서 전철을 탔다.

목적지는 우에노역(上野駅, G16).

오후 1시 40분경 우에노에 도착해
우에노공원(上野恩賜公園) 산책을 시작했다.

이날 우에노공원에서 걸은 거리는 약 3.0km.

한 시간 남짓 공원 곳곳을 돌아봤다.

그리고 오늘 이곳에서 내가 특히 보고 싶었던 것은 왕인박사비였다.


7. 우에노에서 다시 만난 교토의 기억

우에노공원을 걷다가 기요미즈 관음당(清水観音堂)을 만났다.

1631년에 세워진 건물로, 교토의 기요미즈데라(清水寺),
우리에게 익숙한 청수사를 본떠 만들었다.

‘기요미즈’라는 이름을 보는 순간 오래전 내 첫 해외여행이 떠올랐다.

내 생애 최초의 해외여행지가 바로 오사카와 교토였다.

그때 교토역에서 버스를 타고 찾아갔던 곳 가운데 하나가 청수사였다.

처음 청수사에 도착해 건물을 보았을 때의 느낌이 아직도 남아 있다.

“우와…….”

산비탈에 저렇게 거대한 목조건축물을
어떻게 만들어 놓았을까.

특히 절벽 쪽으로 내민 기요미즈의 무대와
그 아래를 받치고 있는 수많은 목재 기둥을 보면서
참 많이 감탄했다.

자리 또한 기가 막혔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이는 교토 시가지와
산자락에 자리 잡은 절의 풍경이 어우러져 있었다.

내 첫 해외여행에서 그렇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청수사를
세월이 흘러 도쿄 우에노에서 다시 떠올리게 될 줄은 몰랐다.

물론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교토의 청수사가 아니다.

에도 사람들이 교토의 기요미즈데라를 본떠 만든
우에노의 기요미즈 관음당이다.

교토에서 처음 만났던 일본의 기억이
도쿄 한복판에서 다시 이어졌다.


8. 도쿄 한복판에서 만난 왕인박사

그리고 내가 오늘 우에노공원에서 특히 보고 싶었던 곳에 도착했다.

왕인박사비(王仁博士の碑).

일본 도쿄 한복판, 그것도 우에노공원에서
왕인박사의 이름을 만나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왕인(王仁)은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학문과 문화를 전한 인물로 전해진다.

일본의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도
왕인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일본서기』에서는 왕인이 백제에서 건너온 시기를
오진천황(応神天皇) 때로 기록하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대체로
백제 아신왕(阿莘王, 재위 392~405) 무렵의 인물로 설명된다.

왕인이 『논어』와 『천자문』을 일본에 전했다는 이야기도
널리 알려져 있다.

다만 왕인의 정확한 활동연대와 『천자문』 전래 문제 등은
사료의 성립 시기와 연대 문제 때문에 오늘날에도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단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일본의 고대 사서에 백제에서 건너온 학자로 왕인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비석 앞에는 일본어와 영어뿐 아니라 한글로 된 설명도 마련되어 있었다.

한참을 읽어보고 왕인박사비 앞에서 사진도 남겼다.

어제는 에도성에서 일본의 역사를 따라 걸었고,
오늘은 우에노에서 그보다 훨씬 오래전
백제와 일본이 교류했던 흔적을 만났다.

도쿄 한복판에서 만난 우리와도 이어지는 역사였다.


9. 꼭 한번 와보고 싶었던 우에노공원 스타벅스

공원을 걷다 보니 또 하나 내가 찾아보고 싶었던 곳이 나타났다.

스타벅스 커피 우에노온시공원점
(スターバックス コーヒー 上野恩賜公園店).

사실 이 스타벅스도 한번 와보고 싶었던 곳이다.

넓은 우에노공원 안에 자리 잡은 매장이라
도심 한복판의 스타벅스와는 또 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여기서 커피 한잔 마시면 좋겠구만.”

그런데 자리가 없다.

사람이 가득하다.

결국 매장을 둘러보고 사진만 열심히 찍은 뒤 나왔다.

아침에 이미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셨으니
오늘은 구경한 것으로 만족하자.


10. 붉은 도리이에서 떠오른 이누야마성

공원을 계속 걷다가
붉은 도리이가 줄지어 이어진 길을 만났다.

하나조노이나리신사(花園稲荷神社) 쪽이다.

도리이(鳥居)는 일본 신사의 입구에 세우는 문으로,
신성한 영역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경계다.

붉은 도리이가 연달아 늘어서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른 곳은
교토의 후시미이나리가 아니었다.

작년 1월 겨울여행 때 갔던 이누야마성(犬山城)이 생각났다.

이누야마성으로 올라가는 길에서도 붉은 도리이가 좍 이어져 있었다.

겨울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그 도리이 사이를 지나 성으로 올라갔던 기억이 우에노에서 다시 떠올랐다.

그리고 이곳에서 마님과 애들이 아주 신났다.

도리이 사이에서 포즈를 취하고,
서로 장난도 치고,
이쪽에서도 한 장,
저쪽에서도 한 장.

사진을 겁나게 찍었다.

유명한 건축물이나 역사적인 장소도 기억에 남지만
가족여행에서는 이런 순간들이 또 오래 남는다.

붉은 도리이 사이에서 가족 넷이 실컷 웃고 놀았다.


11. 겨울의 시노바즈 연못

붉은 도리이를 지나 시노바즈노이케(不忍池) 쪽으로 내려갔다.

겨울의 연못은 여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연꽃이 무성했을 자리는
말라버린 줄기와 잎으로 갈색빛을 띠고 있었다.

연못 가운데에는
시노바즈노이케 벤텐도(不忍池弁天堂)가 자리하고 있었다.

물 위에는 오리배가 떠다니고, 새들도 모여들었다.

그리고 나무 사이 멀리
도쿄 스카이트리(東京スカイツリー)가 보였다.

어젯밤 비와 안개 속에서 올라갔던 바로 그 스카이트리다.

오늘은 맑은 겨울 하늘 아래 우에노에서 멀리 바라보고 있다.

하루 사이에 같은 건물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시 만났다.


12. 우에노에서 만난 ‘라스트 사무라이’

우에노공원 산책의 마지막에는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가 기다리고 있었다.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서 있는
우에노공원의 유명한 사이고 다카모리 동상이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사쓰마번(현재 가고시마현) 출신으로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유신을 이루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새로 만들어진 메이지 정부와 갈등한 끝에 정부를 떠났고, 1877년 세이난전쟁(西南戦争)에서 사쓰마의 옛 사무라이들을 이끌고 정부군과 싸웠다.

그리고 마지막 격전지였던 가고시마 시로야마(城山)에서 생을 마쳤다.

그래서 사이고 다카모리는 일본에서 흔히
‘마지막 사무라이’의 상징적인 인물로 이야기된다.

여기까지 오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영화가 하나 있다.

《라스트 사무라이(The Last Samurai)》.

톰 크루즈가 출연했던 2003년 영화다.

영화에서 와타나베 겐이 연기한
사무라이 지도자 가쓰모토 모리쓰구는
사이고 다카모리를 그대로 옮긴 실존인물은 아니지만,
그의 삶과 세이난전쟁에서 영향을 받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영화 마지막, 죽어가는 가쓰모토는
흩날리는 벚꽃을 바라보며 말한다.

“Perfect. They are all perfect.”

완벽해. 모두가 완벽해.

영화 초반부터 이어져 오던
‘완벽한 벚꽃’에 대한 그의 생각이
죽음의 순간에 완성되는 장면이었다.

그러니 우에노공원에서 사이고 다카모리 동상을 보고
《라스트 사무라이》가 떠오르는 것도 당연했다.

그런데 동상에서 눈에 띄는 것이 하나 더 있다.

사이고 옆에 서 있는 개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실제로 사냥을 즐기고
개를 좋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에노의 동상도 사냥하러 나선 사이고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옆에 함께 서 있는 개까지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요소가 되었다.

메이지유신을 이끌었던 사람이 결국 자신이 만드는 데 힘을 보탠 새 정부와 싸우다 죽었다.

막부를 무너뜨린 혁명의 주역이면서 근대화 과정에서 사라져가던 사무라이의 상징이 된 사람.

그의 삶은
《라스트 사무라이》라는 영화가 떠오를 만큼 극적이었다.


13. 오후 2시 50분, 이제 긴자로

오후 2시 50분경.

약 한 시간 동안의 우에노공원 산책을 마치고
다시 우에노역으로 향했다.

오늘 일정은 아직 끝나려면 멀었다.

다시 도쿄메트로 긴자선에 올랐다.

다음 목적지는 긴자(銀座).

오전에는 시부야에서 출발해 도쿄역으로 갔고,
점심을 먹은 뒤 우에노에서 에도와 백제,
그리고 메이지 일본의 흔적까지 둘러봤다.

이제 도쿄에서도 가장 화려한 거리 가운데 하나인 긴자로 간다.

아직 오후 3시도 되지 않았다.

오늘도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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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 도쿄 여행기

여행 2일차, 2025.12.25.(목요일)
에도성에서 시작한 크리스마스(오후편)

15. 워매, 인자 뱃가죽이 등에 붙겄다

『스즈메의 문단속』 성지를 보고 다시 아키하바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침에 호텔에서 조식을 먹고 나온 뒤,
에도성을 걷고 도쿄역까지 걸어와 다시 아키하바라까지 넘어왔으니
이제는 슬슬 배고픈 정도가 아니었다.

“워매, 인자 뱃가죽이 등에 붙을 지경이네.”

시계를 보니 오후 1시 30분쯤.

오늘 점심은 아키하바라에서 먹기로 했다.

목적지는 로스트비프 전문점,

ローストビーフ大野 秋葉原店
(로스트비프 오노 아키하바라점).

아키하바라 거리를 따라 10분 정도 걸어
오후 1시 40분쯤 식당 앞에 도착했다.


16. 아니, 밥 한 끼 먹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식당을 찾아왔는데
도착했다고 바로 밥을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줄이 길었다.

바로 옆에는 ‘STEAK HOUSE ステーキロッヂ’라는 커다란 간판이 붙은 스테이크집이 있었고, 우리가 찾아온 로스트비프 오노는 그 옆의 붉은색 출입구였다.

가게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고 우리도 그 뒤에 자리를 잡았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약 30분을 기다린 끝에 겨우 주문을 넣었다.

그런데 주문했다고 끝이 아니었다.

다시 20분가량을 더 기다린 뒤에야 드디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좁은 계단을 내려가니
밖에서 보던 것보다도 훨씬 아담한 공간이 나타났다.

주방을 마주 보는 카운터석을 중심으로
손님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크리스마스 장식까지 해놓은 작은 가게 안에서는
직원들이 계속해서 로스트비프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가족도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아이구야.

점심 한 끼 먹으려고 거의 50분을 기다렸다.


17. 기다린 보람은 있었던 로스트비프

잠시 뒤 음식이 나왔다.

그릇 위로 얇게 썬 로스트비프가
마치 산처럼 겹겹이 쌓여 있었고,
그 꼭대기에는 노른자가 하나 올라가 있었다.

고기 위로는 하얀 소스가 흘러내리고
옆에는 채소가 곁들여져 있었다.

국물과 작은 양념들도 함께 나왔다.

기다리는 동안 허기가 더 커져서인지
눈앞에 놓인 로스트비프가 더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이제 말이 필요 없었다.

먹자.

가족 넷이 나란히 앉아
약 30분 동안 제대로 점심을 먹었다.

아침부터 에도성과 도쿄역을 걸어 다녔던 탓인지
더 맛있게 느껴졌다.

그릇은 깨끗하게 비었다.

계산표를 보니 오후 2시 37분에 생맥주 한 잔 600엔이 추가됐고, 최종 합계는 10,595엔.

잘 먹었다.

밖으로 나왔는데도
로스트비프 오노 앞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우리는 이미 배부르게 먹었으니
그 줄도 이제는 여유롭게 보인다.

“룰루랄라.”

기다릴 때와 먹고 난 뒤의 세상은 이렇게 다르다.


18. 밥 먹었으니 아키하바라 구경 한번 해볼까

오후 3시 무렵.

식당에서 나오자 다시 아키하바라 거리가 눈앞에 펼쳐졌다.

전광판과 간판이 건물 벽을 뒤덮고 있었고,
전자제품과 게임, 애니메이션 관련 상품을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다.

‘あきばお~(akibaoo)’,
‘らしんばん 秋葉原店’ 같은 가게에도 들어가 이것저것 구경했다.

진열대마다 피규어와 캐릭터 상품들이 빼곡했다.

건담도 있고, 원피스의 나미도 보인다.

밖으로 나오니 또 다른 곳에서는 JRA 관련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 JRA: Japan Racing Association의 약자로, 우리말로 하면 일본중앙경마회 정도 되겠다.

대형 화면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한쪽에는 웬 말 한 마리가 떡하니 서 있었다.

멀리서 봤을 때는 영락없는 진짜 말이었다.

“어? 여기 말도 데려다 놨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 가짜였다. ㅋㅋ

그런데 마님은 바로 앞까지 가서 보고도

“이거 진짜 말 아니야?”

한다.

“아니 여보. 가짜여, 가짜.”

멀리서 속은 나는 그렇다 쳐도
코앞에서 보고도 진짜 말인 줄 아는 마님 때문에 한바탕 웃었다.

역시 아키하바라답다.

거리로 나오면 또 다른 간판,
또 다른 캐릭터,
또 다른 가게가 나타났다.

어딜 쳐다봐도 볼거리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일정은 아직 한참 남아 있었다.

이제 센소지로 가야 한다.


19. 스에히로초역에서 긴자선을 타고 아사쿠사로

오후 3시 30분을 넘기면서
센소지로 이동하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우리가 들어간 곳은

末広町駅 스에히로초역.

도쿄메트로 긴자선의 G14번 역이다.

역 안내판에는

「上野・浅草方面」 우에노·아사쿠사 방면

이라고 적혀 있었다.

오후 3시 35분쯤 긴자선에 올라탔다.

아키하바라의 복잡한 거리를 빠져나와
이제 도쿄에서도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동네로 간다.

목적지는 아사쿠사.

그리고 센소지.


20. 오후 3시 50분, 아사쿠사에 도착하다

오후 3시 50분 무렵 아사쿠사에 도착했다.

역에서 나와 센소지 쪽으로 향하는 순간부터
사람들이 심상치 않았다.

“아이구야, 여기도 사람이 바글바글허네.”

어제 크리스마스이브의 시부야에서도 사람에 치였는데
오늘 아사쿠사 역시 만만치 않았다.

센소지로 이어지는 길에는
일본 사람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뒤섞여 있었다.

기념품점과 전통 물건을 파는 상점들이 늘어서고,
붉은 제등과 일본식 건물들이 이어졌다.

아키하바라에서 불과 얼마 전까지
전자제품과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보고 있었는데,
지하철 몇 정거장을 이동했을 뿐인데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나는 이 풍경을 보면서 교토가 떠올랐다.

오래된 절과 상점가,
전통적인 일본 건축,
그 사이를 가득 메운 관광객들.

“여기는 교토 분위기가 물씬 나는구먼.”

도쿄 한복판인데도 갑자기 다른 도시로 넘어온 듯했다.


21. 나카미세도리, 일본 냄새 물씬 나는 길

센소지로 들어가는 길 양쪽에는
기념품과 전통 과자, 각종 일본 상품을 파는 작은 가게들이
빈틈없이 늘어서 있었다.

이 길이 나카미세도리(仲見世通り)다.

센소지로 향하는 참배길을 따라 형성된 오래된 상점가로,
좁고 긴 길 양쪽에 수많은 점포가 줄지어 붙어 있다.

사람은 정말 많았다.

앞사람을 따라 한 걸음, 또 한 걸음.

가족이 서로 떨어지지 않도록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천천히 걸었다.

가게마다 일본다운 물건들이 가득했다.

그중에서도 자주 눈에 띄는 것이
다루마(だるま)와 마네키네코(招き猫)였다.

다루마는 달마대사를 본떠 만든 둥근 모양의 길상물로,
목표를 세울 때 한쪽 눈을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면 나머지 눈을 채워 넣는 풍습으로 잘 알려져 있다.

넘어뜨려도 다시 일어나는 모양 때문에
끈기와 소망 성취를 상징하기도 한다.

한쪽 앞발을 들어 올리고 있는 고양이,
마네키네코도 여기저기 보였다.

우리말로 하면 ‘복을 부르는 고양이’쯤 되는 물건이다.

들고 있는 앞발에 따라
손님이나 재물을 불러들인다는 의미가 붙어
일본의 상점이나 식당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다루마와 마네키네코,
부채와 전통 장식,
과자와 갖가지 기념품들.

거기에 붉은 제등과 붉고 흰 장식까지 이어지니
걷는 내내 일본 냄새가 물씬 났다.

그렇게 사람들 틈을 따라가다 보니
멀리 거대한 붉은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22. 센소지, 도쿄 한복판에서 만난 오래된 일본

센소지(浅草寺).

도쿄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알려진 곳이다.

센소지의 역사는 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전승에 따르면 628년,
스미다강에서 어부 형제가 관음상을 건져 올린 것이
센소지의 시작이 되었고,
645년 승려 쇼카이(勝海)가 관음당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우리가 걸어 들어간 곳에는
거대한 붉은 문과 오층탑,
그리고 본당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호조몬(宝蔵門)을 지나면서 올려다본
거대한 제등은 가까이에서 보니 더욱 압도적이었다.

그 너머로는 오층탑이 솟아 있었고,
센소지 본당 앞에는 향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본당으로 계속해서 올라갔다.

우리도 그 흐름을 따라 본당으로 향했다.

본당에 올라 뒤를 돌아보니
방금 지나온 호조몬과 나카미세도리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사람이 많기는 정말 많다.

그래도 이 풍경은 좋았다.

현대적인 빌딩과 전철,
전자상가와 애니메이션으로 가득했던 아키하바라를 떠나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이렇게 오래된 일본의 풍경 속에 들어와 있었다.

아키하바라가 현대 일본의 한 얼굴이라면,
아사쿠사와 센소지는 그보다 훨씬 오래된 일본의 얼굴처럼 느껴졌다.

에도성에서 시작해 도쿄역을 지나고,
『스즈메의 문단속』 성지를 거쳐,
아키하바라에서 배불리 로스트비프를 먹고,
다시 센소지까지.

워매.

오늘 일정 한번 빡세다.

그래도 센소지는 천천히 둘러봤다.

오층탑도 보고, 본당도 둘러보고, 가족들과 사진도 남겼다.

사람에 치이면서도 구경할 것은 제대로 구경했다.

도쿄 한복판에서 만난 조금은 교토 같은 풍경이었다.


23. 도쿄에 왔으니 스미다강은 한번 봐줘야지

센소지를 천천히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 오늘 일정도 슬슬 막바지로 접어든다.

하지만 아직 오늘의 가장 큰 일정이 남아 있었다.

도쿄 스카이트리(東京スカイツリー).

그 전에 스미다강(隅田川)으로 향했다.

도쿄에 왔는데 스미다강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않은가.

강변 쪽으로 걸어나가자
멀리 오늘 저녁 올라갈 도쿄 스카이트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회색 겨울 하늘 아래 높이 솟은 스카이트리의 꼭대기는
낮게 내려앉은 구름과 안개 속으로 살짝 들어가 있었다.

조금 있다 저 꼭대기 가까이까지 올라갈 것이다.

오늘 스카이트리 전망대는 미리 클룩에서 예약해두었다.

일부러 크리스마스에 도쿄까지 온 이유 중 하나도
도쿄의 크리스마스 야경을 제대로 보고 싶어서였다.

그 대가가 만만치는 않았다.

항공권도 비싸고, 호텔도 비싸고.

평소 같으면 훨씬 싸게 왔을 여행인데
크리스마스라는 이유로 비용이 확 뛰었다.

“아이고, 허리가 지게 진 것마냥 휘겄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봐야지.

크리스마스의 도쿄 야경을.


24. 스미다강과 스카이트리, 그리고 그 유명한 똥

스미다강변으로 내려섰다.

강 위로 철교가 지나고, 전철 한 대가 강을 가로질렀다.

강 건너에는 도쿄 스카이트리가 우뚝 서 있었다.

아들과 함께 스카이트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나도 혼자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 장 남겼다.

아이들은 앞서 걷고
우리는 강변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도심 한가운데를 흐르는 넓은 강과
철교를 건너는 열차,
그 뒤로 솟아 있는 스카이트리.

도쿄다운 풍경이었다.

그리고 스미다강에 오면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이 있다.

아사히맥주 본사 옆 건물 위에 얹혀 있는
거대한 황금색 조형물.

멀리서 보면 뭐랄까……

“저거 아무리 봐도 똥 같은디?”

ㅋㅋㅋ.

정식 명칭은 ‘플람 도르(Flamme d‘Or)’,
황금 불꽃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아사히맥주의 도전하는 정신과 불타는 마음을 표현한 조형물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뜻을 알고 봐도
내 눈에는 자꾸 똥처럼 보인다.

스미다강까지 왔으니 스카이트리도 보고,
그 유명한 황금색 ‘똥’도 봤다.

이 정도면 됐다.


25. 가까이 있는 스카이트리 가는데 왜 이렇게 힘들어

이제 스카이트리로 이동할 차례.

멀리서 보면 바로 코앞인데
막상 전철을 타려고 하니 또 일이 꼬였다.

아사쿠사역(浅草駅)은
도쿄메트로와 도에이 지하철, 도부철도 등
여러 노선의 타는 곳이 서로 나뉘어 있었다.

우리가 타야 할 곳을 찾느라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아이구, 또 시작이네.”

시부야역에서 헤매고,
도쿄역에서 헤매고,
이제 아사쿠사에서 또 헤맨다.

한참을 돌아다닌 끝에
도에이 아사쿠사선(都営浅草線)을 찾아냈다.

안내판에는

「押上・京成線・北総線・成田空港方面」
오시아게·게이세이선·호쿠소선·나리타공항 방면

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사쿠사역(A18)에서 전철을 타고
오시아게역(押上駅)으로 향했다.

가까운 거리라 전철 자체는 금방이었다.

오후 4시 40분 무렵 역에 도착했다.

그런데 역에 도착했다고
스카이트리에 도착한 것은 아니었다.

복잡한 통로를 따라 다시 한참 이동했다.

결국 스카이트리 타운까지 찾아가는 데
10분 가까이를 또 잡아먹었다.

오늘은 정말 이동할 때마다
미궁 하나씩 통과하는 기분이다.


26. 워매, 여기서 신발을 사자고?

드디어 도쿄 스카이트리 타운(TOKYO SKYTREE TOWN)에 도착했다.

크리스마스라 건물 안팎은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커다란 코카콜라 산타 장식도 보이고,
밖으로 나가자 스카이트리가 바로 머리 위에서 솟아 있었다.

해가 지면서 조명도 하나둘 켜졌다.

그런데 여기서 예상하지 못했던 복병이 나타났다.

딸래미였다.

아침부터 요상한 신발을 신고 하루 종일 걸어 다니더니
결국 발이 아프다고 한다.

“아빠, 나 신발 하나 사야 될 것 같아.”

“뭐?”

지금?

여기서?

사람은 미어터지고,
전망대 예약시간은 다가오는데
갑자기 신발가게를 찾아야 한다.

워매.

스카이트리 타운 안을 돌아다니며
신발가게 찾느라 진짜 죽는 줄 알았다.

여행이라는 게 그렇다.

아무리 계획을 세워놔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꼭 하나씩 튀어나온다.


27. 크리스마스의 스카이트리, 사람이 사람을 덮었다

신발 문제를 해결하며 돌아다니는 사이
밖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스카이트리 주변의 크리스마스 일루미네이션이
본격적으로 빛을 내기 시작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캐릭터 조형물,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
수많은 전구로 뒤덮인 나무들.

예쁘긴 정말 예뻤다.

그런데 사람은 더 대단했다.

크리스마스 행사장 주변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비까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면서
우산까지 하나둘 펼쳐졌다.

사람 사이를 뚫고 걸어가는 것 자체가 일이었다.

“워매, 여태까지 본 사람 중에 여기가 제일 많은 것 같은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는 몰랐다.

며칠 뒤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에서
이보다 훨씬 더한 사람 떼를 보게 될 줄은.

아무튼 오늘만 놓고 보면 최고 기록이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사진은 찍어야 했다.

마님도 찍고,
아들도 찍고,
딸도 찍고,
가족 넷이 모여 사진도 남겼다.

사람은 많고 비는 조금씩 내렸지만
크리스마스의 도쿄 한복판에 서 있다는 기분만큼은 제대로 났다.


28. 오후 6시, 드디어 도쿄 스카이트리 전망대로

오후 6시 무렵.

드디어 전망대 입구에 도착했다.

사람이 워낙 많아 입구 주변부터 북적였다.

미리 사둔 입장권을 확인하고
전망대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슝.

“어?”

금세 도착했다.

도쿄 스카이트리의 덴보데크(天望デッキ)는
지상 350m에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데는
체감상 정말 1분도 걸리지 않은 것 같았다.

350m를 이렇게 순식간에 올라오다니.

문이 열리자
금세 도쿄 상공 한가운데에 와 있었다.


29. 350m 위에서 만난 비 내리는 도쿄의 밤

기대했던 것은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도쿄의 화려한 크리스마스 야경이었다.

그런데 오늘 날씨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낮에는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밤이 되자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안개까지 끼었다.

350m 높이에서 바라보는 도쿄는
맑은 날처럼 깨끗하게 펼쳐지지는 않았다.

유리창 너머로 도시의 불빛들이
안개 속에서 흐릿하게 번졌다.

“아이고…….”

어제는 비 때문에 시부야 스카이 옥상에 올라가지도 못했는데
오늘은 스카이트리까지 와서 또 비다.

그래도 완전히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안개가 잠깐씩 걷힐 때마다
도쿄의 야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로를 따라 자동차 불빛이 길게 이어지고,
스미다강과 다리들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조금 전까지 우리가 걸었던 도시가
350m 아래에서 작은 모형처럼 펼쳐져 있었다.

비와 안개가 아쉽기는 했지만
그 덕분에 또 다른 분위기의 도쿄 야경을 만났다.

완벽하게 맑지는 않았다.

그래도 크리스마스 밤,
가족과 함께 도쿄의 350m 상공에 서 있었다.

그걸로 됐다.


30. 호쿠사이를 만나다

야경을 보고 전망대를 천천히 둘러보다가
내 발걸음을 딱 멈추게 한 것이 있었다.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

나는 우키요에(浮世絵)를 좋아하고,
그 작가중에서도 호쿠사이를 특히 좋아한다.

우키요에는 에도시대에 크게 유행한 일본의 서민 회화다.

배우와 미인, 명소와 풍경,
당시 사람들의 일상과 유행을 목판화로 찍어 널리 퍼뜨렸다.

한 점뿐인 그림이라기보다
여러 장을 찍어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었던 대중미술에 가까웠다.

그 우키요에를 세계적인 풍경화의 경지까지 끌어올린 대표적인 화가가 바로 가쓰시카 호쿠사이다.

호쿠사이는 평생 수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후가쿠 삼십육경(冨嶽三十六景)』.

후지산을 여러 장소와 계절,
다양한 날씨와 시선으로 그려낸 연작이다.

그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
거대한 파도가 화면을 집어삼킬 듯 솟아오른

『가나가와 앞바다의 큰 파도(神奈川沖浪裏)』.

그리고 또 하나가

『개풍쾌청(凱風快晴)』,
흔히 ‘붉은 후지(赤富士)’라고 부르는 작품이다.

맑은 날 아침,
햇빛을 받아 붉게 물든 후지산을
단순하면서도 강렬하게 그려낸 그림이다.

그런데 스카이트리 기념품점에서
바로 이 두 작품을 입체적으로 만든 스노우볼을 만났다.

하나는 거대한 푸른 파도가 솟구치고
그 뒤로 조그맣게 후지산이 보이는
『가나가와 앞바다의 큰 파도』.

다른 하나는 붉게 물든 후지산이 중심에 서 있는
『개풍쾌청』.

워매.

이건 그냥 지나갈 수가 없었다.

하나만 살까?

두 개를 번갈아 보다가 결국 결론을 내렸다.

“둘 다 주쇼.”

ㅋㅋㅋ.

두 개 합해서 한 30만 원.

아이고 비싸다.

겁나 비싸다.

그런데 어쩌겄는가.

우키요에를 좋아하고,
거기다 호쿠사이를 좋아하는데
눈앞에 내가 좋아하는 두 작품이 스노우볼로 딱 나타나버렸으니.

점원에게 괜히 아는 영어까지 총동원했다.

“I love Hokusai.
Very excellent artist!”

ㅋㅋㅋ.

문법이고 뭐고 필요 없다.

내가 호쿠사이를 좋아한다는 뜻만 전해지면 됐다.

그렇게 『가나가와 앞바다의 큰 파도』와
‘붉은 후지’ 스노우볼 두 개를 품에 안았다.

비싸기는 정말 비쌌지만,
도쿄에서 산 기념품 가운데
아마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을 물건이 될 것 같다.


31. 내려오니 비는 더 세지고

전망대에서 내려오니
밖에는 비가 더 내리고 있었다.

유리창에도 빗방울이 가득했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크리스마스트리와 일루미네이션은
비를 맞으며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사람도 여전히 많았다.

비가 온다고 크리스마스를 즐기러 나온 사람들이
어디로 사라질 리가 없다.

우산들이 다시 행사장을 가득 채웠다.

그래도 우리는 사진을 열심히 찍었다.

언제 또 크리스마스에
도쿄 스카이트리 아래에서 비를 맞고 있겠는가.

사진으로라도 많이 남겨놓자.


32. 오후 6시 43분, 이제 집에 가자

이제 진짜 숙소로 돌아갈 시간이다.

오시아게역(押上駅)으로 내려갔다.

오후 6시 43분.

전광판에는
Oshiage ‘SKYTREE’ Z14 가 표시되어 있었다.

하루 종일 걸어 다닌 아이들도 이제 완전히 지쳐 있었다.

전철 좌석에 앉자 아들과 딸은 말없이 쉬었다.

아침 8시에 일어나 9시 40분쯤 호텔을 나선 뒤
에도성부터 시작해 도쿄역,
『스즈메의 문단속』 성지,
아키하바라, 센소지, 스미다강,
그리고 도쿄 스카이트리까지.

오늘 하루 정말 많이도 돌아다녔다.

오후 8시 무렵.

드디어 시부야 숙소로 돌아왔다.


33. 워매, 오늘 다들 고상 많았다

호텔에 들어오니 긴장이 한꺼번에 풀렸다.

오늘은 정말 빡센 하루였다.

에도성의 거대한 석축 위에서 시작해
도쿄역의 붉은 벽돌 역사를 보고,
히지리바시에서 『스즈메의 문단속』 속 빨간 전철을 기다렸다.

배가 등에 붙을 만큼 굶다가
아키하바라에서 로스트비프를 배불리 먹고,
사람으로 가득한 센소지를 지나
스미다강까지 걸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크리스마스 인파와 비를 뚫고
350m 높이의 스카이트리에서 도쿄의 밤을 내려다봤다.

워매.

다들 고상 많었다.

오늘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말자.

푹 자자.

내일 또 돌아댕겨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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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셀프 트래블 - 2023-2024 최신판 ㅣ 셀프 트래블 가이드북 Self Travel Guidebook
김미정.백진수 지음 / 상상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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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 도쿄 여행기

여행 2일차, 2025.12.25.(목요일)
에도성에서 시작한 크리스마스(오전편)


1. 애들과 함께하니 아침 8시 기상

도쿄에서 맞는 크리스마스 아침.

마님과 둘이 여행을 다닐 때라면 아침 일찍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을 것이다.
여행지에서 보내는 시간이 아까워 웬만하면 일찍 일어나 움직이는 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여행은 달랐다. 애들이 함께였다.

아침 8시가 되어서야 느긋하게 일어났다.
이 정도면 우리 부부의 평소 여행에서는 이미 한참 돌아다니고 있을 시간이었다.

창밖으로 바라본 도쿄의 아침은 전날과 달랐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내리던 비는 그쳤고, 건물 사이로 푸른 하늘도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늘 일정은 만만치 않았다.

에도성, 도쿄역, 아키하바라, 센소지, 도쿄 스카이트리까지.

하루 동안 도쿄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빡센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2. 호텔에서 느긋하게 먹은 아침

씻고 준비를 마친 뒤 호텔 3층 식당으로 내려가 조식을 먹었다.

손에는 네 장의 BREAKFAST COUPON.
이번 여행은 네 식구가 함께하는 여행이라는 것이 이런 사소한 장면에서도 드러났다.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아침을 먹었다.

서두를 이유는 없었다.
오늘 갈 곳은 많았지만 그렇다고 아침부터 애들을 몰아붙일 생각은 없었다.

마님과 둘이 왔다면 벌써 어디 한 군데는 보고 있었을 시간이지만,
아이들과 함께하는 여행은 아이들 속도에 맞춰 가는 것도 여행의 일부였다.

그렇게 아침을 먹고 천천히 준비한 뒤,
오전 9시 40분쯤 호텔을 나섰다.


3. 역시 만만치 않은 시부야역, 미궁 속으로

호텔을 나와 시부야역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놈의 시부야역은 올 때마다 헷갈린다.

JR과 도쿄메트로, 도큐선 등 여러 노선이 얽혀 있고,
지상과 지하, 각종 연결통로와 대형 상업시설까지 한데 붙어 있으니
몇 번을 와도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다.

“내가 늙어서 그런가…….”

이번에도 시부야역이라는 미궁 속으로 들어갔다.

시부야 스크램블 스퀘어(渋谷スクランブルスクエア) 안팎을 오가며
안내판을 확인하고 지하 통로를 따라 내려갔다.

그 과정에서 크리스마스 장식이 된 스크램블 스퀘어와
커다란 피카츄가 그려진 유리창도 지나쳤다.

목적은 지하철표였다.

사진 속 안내문에는
Tokyo Subway Ticket을 이용하려면 시부야 스크램블 스퀘어 B6 출구 쪽으로 이동해
3층에서 티켓을 교환하도록 안내되어 있었다.

우리는 안내를 따라가
Tokyo Subway 24-hour Ticket을 손에 넣었다.

도쿄메트로와 도에이 지하철을 24시간 이용할 수 있는 승차권.

오늘처럼 지하철을 타고 도쿄 곳곳을 돌아다녀야 하는 날에는
잘 어울리는 선택이었다.

표까지 해결하고 나니 이제야 본격적인 하루가 시작되는 느낌이었다.


4.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선택한 도시, 에도

오전 10시 20분 무렵 시부야역에서
도쿄메트로 한조몬선(東京メトロ半蔵門線)에 올랐다.

한조몬역(半蔵門駅)에서 내려 오늘의 첫 목적지,
에도성(江戸城)으로 향했다.

지금은 일본의 수도 도쿄 한복판이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들어오기 전의 에도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당시 일본의 정치와 경제, 문화의 중심은
교토와 오사카를 비롯한 간사이 지역이었다.

오랫동안 천황이 자리했던 교토가 정치와 문화의 중심이었고,
오사카를 비롯한 간사이 일대 역시 상업과 교통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처음 일본여행을 갔던 곳도 오사카와 교토였다.

처음 일본을 여행할 때 자연스럽게 찾게 되는 대표적인 도시들이기도 하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오랫동안 일본의 중심이 바로 이 간사이 지역이었다는 사실과도 묘하게 겹친다.

반면 에도는 그에 비하면 변방에 가까웠다.

물론 에도성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15세기 중엽 오타 도칸(太田道灌)이 에도성을 축성했지만,
오늘날과 같은 거대한 도시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 에도의 운명을 바꾼 사람이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였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오다와라의 후호조씨를 무너뜨리고 일본 통일을 거의 완성한 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기존 영지를 떠나 간토로 옮겨왔다.

그리고 에도성을 새로운 거점으로 삼았다.

당시 에도성 주변은 동쪽으로 히비야 만(日比谷入江)이 깊숙이 들어와 있었고,
도시를 크게 만들기에는 땅도 충분하지 않았다.

이에야스와 이후 도쿠가와 막부는
매립과 수로 개착, 하천 정비 등을 계속하며
에도를 본격적인 도시로 만들어 나갔다.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일본의 권력구도는 다시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전투가 벌어진 세키가하라는
지금의 나고야와 교토 사이, 기후현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동서 일본을 잇는 길목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과
이시다 미쓰나리를 중심으로 한 서군이 맞붙었다.

우리에게 임진왜란으로 익숙한 무장들도
이 전투에서 다시 등장한다.

평양성 전투와 강화교섭으로 잘 알려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서군에 섰고,
임진왜란 당시 수군을 이끌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도 처음에는 서군으로 참전했다.

하지만 와키자카는 전투 도중 동군으로 돌아서
오타니 요시쓰구(大谷吉継)의 부대를 공격했다.

반면 임진왜란 당시 울산왜성 전투 등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는 이에야스 측에 섰다.

다만 그는 세키가하라 본전투 현장에 직접 참가한 것은 아니고,
규슈에서 동군 측 군사행동을 벌이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 땅에서 싸웠던 일본 장수들이
불과 몇 년 뒤에는 일본 국내의 패권을 놓고
서로 다른 편에 서 있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결과는 이에야스의 승리였다.

이 전투를 계기로 일본의 권력은 사실상 이에야스에게 넘어갔고,
1603년 그는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에 임명되어
에도에 막부를 열었다.

그때부터 일본의 정치 중심은
교토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간사이에서
점차 에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한때 변방에 가까웠던 에도는
도쿠가와 막부의 정치적 중심지가 되면서 거대한 도시로 성장했고,
그 에도가 훗날 도쿄가 되었다.


에도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일본 작가 한 사람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미미 여사’라는 애칭으로 더 친숙한
미야베 미유키(宮部みゆき).

지금까지 미야베 미유키의 책을 24권 읽었다.

현대사회를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도 좋아하지만,
내게 특히 인상 깊고 좋아하는 책은 에도시대를 무대로 한 작품들, 즉 에도시대물이다.

그중에서도 『얼간이(ぼんくら)』와 『하루살이(日暮らし)』를 좋아한다.

『얼간이』는 에도 후카가와를 배경으로,
철병장(鉄瓶長屋, てつびんながや·데쓰빈나가야)이라는 나가야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도신 이즈쓰 헤이시로와 조카 유미노스케를 비롯한 인물들이 풀어가는 시대 미스터리다.

‘도신’은 한자로 동심(同心)이라 쓰고,
일본어로는 どうしん(도신)이라고 읽는다.

에도시대에 치안과 수사 실무를 담당하던 하급 무사 관리로,
오늘날로 치면 경찰의 실무자와 비슷한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다.

철병장 역시 한자로는 鉄瓶長屋,
일본어로는 てつびんながや(데쓰빈나가야)라고 읽는다.

여기서 나가야(長屋)는 여러 집이 벽을 맞대고 길게 이어진
에도 서민들의 공동주택 같은 곳이었다.

『하루살이』는 『얼간이』의 뒤를 잇는 이야기로,
헤이시로와 유미노스케를 비롯해 전작에서 만났던 인물들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미야베 미유키의 시대소설을 읽다 보면 쇼군이나 다이묘 같은 권력자보다 에도의 골목과 나가야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 더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내 머릿속의 에도는 거대한 성과 쇼군의 도시이면서 동시에, 『얼간이』와 『하루살이』 속 사람들이 북적이며 살아가던 생활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작 미미 여사의 대표적인 에도 시대소설 가운데 하나인 『외딴집』은 아직 못 읽었다.

스물네 권이나 읽어놓고 그걸 아직 안 읽었다니.

ㅠㅠㅠ

언젠가는 꼭 읽어야겠다.

책으로 수없이 만났던 ‘에도’라는 이름.

오늘은 그 에도의 중심이었던 에도성에
내가 직접 걸어 들어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성벽과 해자를 바라보는 느낌도
조금은 다르게 다가왔다.

지하철에서 내려 성 쪽으로 걸어가자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성이 아니라 물이었다.

넓은 해자와 그 너머로 이어지는 높은 석축.

도쿄 한복판의 빌딩숲과 바로 맞닿아 있으면서도
해자를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공간이 펼쳐졌다.

성의 건물 대부분은 사라졌지만,
해자와 석축만으로도 이곳에 얼마나 거대한 성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5. 皇居東御苑, 에도성 안으로

우리는 황거 동쪽 정원(皇居東御苑)으로 들어갔다.

현재 일반인이 둘러볼 수 있는 이 공간에는
에도성의 여러 흔적이 남아 있었다.

입구 주변에는 乾門(이누이몬)과 皇居東御苑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있었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거대한 석축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까이에서 보니 그 규모가 생각보다 훨씬 컸다.

커다란 돌을 층층이 쌓아 올린 성벽은
사람 하나를 그 앞에 세워놓아야 비로소 크기가 실감날 정도였다.

나도 석축 앞에 서서 사진을 한 장 남겼다.

사진 속 사람은 조그맣고,
뒤의 돌벽은 화면을 가득 채웠다.

에도성에 남아 있는 것은 단순히 옛 성터 몇 조각이 아니었다.
성곽의 규모 자체를 몸으로 느끼게 하는 흔적들이었다.


6. 성은 사라지고 천수대만 남았다

안쪽으로 더 들어가 天守台,
에도성 천수대에 도착했다.

한때 에도성의 천수각이 올라서 있던 자리다.

지금 천수각은 없다.

남아 있는 것은 거대한 돌로 쌓은 천수대뿐이었다.

천수대 아래에서 바라본 석축도 거대했지만
직접 위로 올라서니 주변이 한눈에 들어왔다.

멀리 현대 도쿄의 고층빌딩들이 솟아 있고,
그 아래에는 넓은 황거 동쪽 정원이 펼쳐졌다.

옛 에도성과 현대 도쿄가 한 시야 안에 겹쳐 보이는 풍경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천수대에서 사진도 남겼다.

크리스마스에 네 식구가 함께
옛 에도성 천수각이 서 있던 자리에 올라와 있다는 것도
나중에는 하나의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7. 에도성의 흔적을 따라 걷다

천수대에서 내려와 다시 정원을 걸었다.

御休息所跡이라고 새겨진 표석도 지나고,
겨울빛이 내려앉은 나무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화려한 성곽 건물이 남아 있는 곳은 아니었다.

오히려 건물이 사라진 자리를 걸으며
‘이곳에 무엇이 있었을까’를 상상하게 만드는 곳이었다.

전시공간에서는 에도성 천수각의 모형도 볼 수 있었다.

지금은 천수대만 남아 있지만
모형으로 복원된 모습을 보니
조금 전 우리가 올라섰던 거대한 석축 위에
어떤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는지 비로소 그림이 그려졌다.

이어 百人番所(햐쿠닌반쇼)를 지나 성 밖으로 향했다.

거대한 석축 사이의 길을 지나고 성문을 빠져나오자
조금 전까지의 에도성 풍경과는 전혀 다른
현대 도쿄의 빌딩들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다.


8. 분수대 앞 스타벅스에서 잠시 쉬어가기

에도성을 나와 향한 곳은
와다쿠라 분수공원(和田倉噴水公園)이었다.

높이 솟아오르는 분수와 넓은 광장,
그리고 주변을 둘러싼 도쿄 도심의 고층건물들.

그 한쪽에 스타벅스가 있었다.

スターバックス コーヒー 皇居外苑 和田倉噴水公園店.

오전 11시 30분 무렵,
우리는 이곳에 들어가 잠시 쉬었다.

사진에서 보았던 것처럼 이곳은 위치도 좋았지만
건물 자체도 꽤 인상적이었다.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공원과 분수가 보였고,
실내 천장에는 나무 구조물이 격자처럼 이어져 있었다.

에도성을 한 바퀴 걷고 들어와 앉으니
이제야 잠깐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음료를 앞에 두고 창밖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는 에도시대의 거대한 석축 사이를 걷고 있었는데
지금은 스타벅스 창밖으로 분수와 현대 도쿄의 빌딩숲을 보고 있었다.

과거의 에도와 현재의 도쿄가
불과 몇 걸음 사이에서 이어지는 곳이었다.

하지만 오늘 일정은 이제 시작이었다.

잠시 쉬었으니 다시 움직여야 했다.

다음 목적지는 도쿄역.

그리고 그 뒤에는
아키하바라, 센소지, 도쿄 스카이트리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워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9. 도쿄역, 우리 경성역을 떠올리다

스타벅스에서 잠시 쉬고 다시 길을 나섰다.

다음 목적지는 도쿄역(東京駅).

에도성에서 도쿄역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마루노우치 쪽으로 걸어가자 정오가 조금 지나면서
도쿄역의 붉은 벽돌 건물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2시 40분 무렵.

고층빌딩 사이로 도쿄역 마루노우치 역사가 정면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건물은 아니었지만
다시 정면에서 바라보니 문득 우리 경성역이 떠올랐다.

붉은 벽돌,
서양식 건축양식,
오래된 철도역 특유의 묵직한 분위기.

도쿄역은 1914년에 완공된 건물이고,
우리의 옛 경성역사는 1925년에 완공됐다.

두 건물이 같은 설계는 아니지만
내 눈에는 어딘가 닮아 보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두 건물 사이에는 실제로 이어지는 인연이 있었다.

도쿄역 마루노우치 역사를 설계한 사람은
일본 근대건축을 대표하는 건축가 다쓰노 긴고(辰野金吾).

그리고 구 경성역의 설계자로 알려진 쓰카모토 야스시(塚本靖)는
도쿄제국대학에서 다쓰노 긴고에게 건축을 배운 제자였다.

도쿄역과 경성역이 같은 설계도에서 나온 건물은 아니지만,
두 건축가가 사제지간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두 역이 닮아 보였던 것도 그저 우연처럼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어쩐지 비슷해 보이더라.”

하지만 역 앞 풍경은 꽤 달랐다.

도쿄역 앞에는 건물 정면을 시원하게 열어주는
넓은 마루노우치 광장이 펼쳐져 있었다.

역사를 한참 뒤에서부터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앞 공간이 넓고 탁 트여 있었다.

그 광장 덕분인지
붉은 벽돌 역사 전체가 더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우리 경성역 앞에도 이런 공간이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역 앞을 빽빽한 도로나 건물로 채우지 않고
도시 한복판에 이런 넓은 공간을 남겨둔 모습이 부러웠다.

그러다 혼자 피식 웃었다.

“근디 우리나라였으면 여기서 맨날 데모하는 거 아녀?”

뭐, 그건 또 그거대로 우리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크리스마스 당일이라 마루노우치 광장 일대에는
크리스마스트리와 장식들이 남아 있었고,
‘MARUNOUCHI TOKYO’라고 적힌 둥근 조형물도 세워져 있었다.

아들과도,
마님과도,
가족끼리 번갈아 사진을 남겼다.

도쿄역을 배경으로 광장을 천천히 걸었다.


10. 도쿄역 머릿돌 앞에서

도쿄역 정면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붉은 벽돌 벽과 흰색 석재 장식,
좌우로 길게 뻗은 마루노우치 역사는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에서 볼 때 느낌이 또 달랐다.

정면 가까이에는

‘東京駅’

이라고 새겨진 돌 표지석이 있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머릿돌 앞에서 사진을 찍고,
역사 정면에서도 사진을 몇 장 더 남겼다.

도쿄역은 단순히 기차를 타는 장소라기보다
그 자체가 하나의 명소처럼 느껴졌다.

사진을 다 찍고 이제 다음 장소로 이동하려고
마루노우치 중앙구(丸の内中央口)로 들어갔다.

그런데……

밖에서 볼 때는 참 멋있던 도쿄역이
안으로 들어가자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11. 도쿄역도 미궁이다

아이구.

도쿄역도 만만치 않았다.

JR,
신칸센,
도쿄메트로,
수많은 출구와 지하통로.

전광판을 봐도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부야역에서도 헤맸는데
도쿄역까지 이러니 슬슬 환장할 노릇이다.

“아니, 일본 역들은 왜 죄다 미궁이여.”

이쪽으로 갔다가,
다시 안내판을 보고,
또 방향을 틀고.

그래도 오전에 산 Tokyo Subway 24-hour Ticket은
여기서 다시 제 역할을 했다.

어찌어찌 도쿄메트로 마루노우치선(東京メトロ丸ノ内線)
승강장을 찾아 내려갔다.

시각은 오후 1시 10분 무렵.

다음 목적지는
내가 이번 여행에서 은근히 기대하고 있던 곳이었다.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すずめの戸締まり)』의 성지.


12. 두 정거장 만에 아와지초

도쿄역에서 마루노우치선을 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내렸다.

오테마치(大手町)를 지나
아와지초역(淡路町駅, M19).

오후 1시 16분 무렵이었다.

“벌써?”

싶을 정도로 가까웠다.

도쿄역에서 불과 두 정거장.

역을 나와 오차노미즈(御茶ノ水) 쪽으로 걸었다.

조금 걷자
철길과 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 나타났다.

히지리바시(聖橋).

그리고 다리 아래로 흐르는 간다강(神田川).

바로 이곳이
내가 찾던 『스즈메의 문단속』의 도쿄 성지였다.


13. 『스즈메의 문단속』, 영화 속으로 들어가다

나는 『스즈메의 문단속』을 꽤 좋아한다.

주인공 스즈메는 어린 시절 동일본대지진으로 어머니를 잃고,
규슈 미야자키에서 이모와 함께 살아가는 고등학생이다.

그러던 어느 날
폐허를 찾아다니는 청년 소타를 우연히 만나고,
재난을 불러오는 ‘뒷문’을 닫기 위해
함께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게 된다.

영화가 후반부 도쿄로 넘어오면서
이 오차노미즈와 히지리바시 일대도
아주 인상적인 장면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꼭 한 번 실제로 보고 싶었다.

다리 위에 서니
영화에서 보던 풍경이 그대로 펼쳐졌다.

아래에는 간다강이 흐르고,
그 위를 도쿄메트로 마루노우치선이 가로지른다.

조금 높은 곳에는
JR 주오선과 소부선 열차가 오간다.

철도와 강,
터널,
도심 건물이 한 장면 안에 겹쳐지는 풍경.

신카이 마코토 감독 영화에서
그렇게 인상적으로 보이던 복잡한 도쿄의 입체감이
실제로도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다.

잠시 다리 위에 서서 기다렸다.

목표는 하나였다.

영화에서 본 것처럼
빨간 마루노우치선 열차가
간다강 위를 지나가는 순간.

카메라를 들고 기다렸다.


14. 운도 좋지, 기차까지 딱 걸렸다

오후 1시 28분 무렵.

드디어 빨간 열차가 나타났다.

터널을 빠져나온
도쿄메트로 마루노우치선 열차가
간다강 위 철교를 건너오기 시작했다.

“왔다.”

카메라를 들었다.

그리고 셔터를 눌렀다.

딱 내가 기다리던 장면이었다.

더구나 운까지 좋았다.

반대편에서도 빨간 열차가 들어오면서
두 열차가 서로 교행하는 순간까지 만났다.

일부러 시간을 맞추기도 쉽지 않은 장면인데
기다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딱 그 순간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그냥 관광지를 하나 본 것이 아니었다.

영화 속 장면을 기억하고,
그 장소를 찾아와,
그 풍경이 실제로 움직이는 순간까지 기다렸다가
사진으로 남긴 것이다.

나는 이런 게 참 좋다.

영화나 책에서 본 장소를
실제로 찾아가 보는 것.

머릿속에만 있던 장면이
현실의 풍경과 겹쳐지는 순간이다.

히지리바시 아래로 흐르는 간다강,
그 위를 가로지르는 빨간 마루노우치선 열차.

『스즈메의 문단속』 속 도쿄가
잠깐 현실로 튀어나온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을
제대로 한 장 박았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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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셀프 트래블 - 2023-2024 최신판 ㅣ 셀프 트래블 가이드북 Self Travel Guidebook
김미정.백진수 지음 / 상상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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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 도쿄 여행기

여행 1일차, 2025.12.24.(수요일)
비 내리는 크리스마스이브, 푸른빛의 도쿄


1. 새벽 2시 46분, 크리스마스 도쿄를 향해

크리스마스이브 새벽 2시 46분.

아직 대부분의 사람들이 깊이 잠들어 있을 시간, 우리 가족은 대전을 출발했다.

목적지는 인천공항.
그리고 그 너머의 도쿄였다.

이번 여행은 12월 24일부터 28일까지 4박 5일.
크리스마스를 도쿄에서 보내기로 했다.

깜깜한 새벽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은 언제나 묘한 기분이 든다.

몸은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않았는데 마음은 벌써 여행지에 가 있다.

램블러 기록상 대전에서 인천공항까지의 거리는 207.9km.
소요시간은 2시간 10분 4초였다.

중간에 쉬지 않고 그대로 달렸다.

새벽길을 꼬박 두 시간 넘게 달려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2. 인천공항 쉐이크쉑에서 시작한 크리스마스이브

오늘 우리가 탈 비행기는 진에어 LJ0201편.

인천국제공항을 오전 7시 25분 출발해 나리타국제공항에 오전 9시 55분 도착하는 일정이다.

공항에 도착하니 슬슬 배가 고파졌다.

새벽 2시 46분부터 움직였으니 당연했다.

출국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아침부터 먹기로 했다.

인천공항 쉐이크쉑(Shake Shack).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펼쳐놓고 가족 넷이 이른 아침부터 제대로 칼로리를 채웠다.

마님이 먹는 햄버거에서는 치즈가 길게 늘어났고, 딸래미도 햄버거를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평소라면 아침부터 햄버거를 먹을 일도 별로 없겠지만 여행 가는 날 공항에서는 이런 것도 모두 특별해진다.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나서야 출국수속을 시작했다.

공항 안에는 크리스마스이브답게 눈사람 장식도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이번 여행을 떠나면서 우리 가족이 은근히 준비한 것이 하나 있었다.

네 사람이 똑같이 맞춰 신은 회색 뉴발란스 운동화.

출국을 기다리며 네 켤레의 운동화를 가운데로 모아 사진 한 장을 남겼다.

아빠, 엄마, 아들, 딸.

신발 크기도 다르고 발 모양도 제각각이지만 오늘만큼은 같은 신발을 신고 같은 곳을 향한다.

별것 아닌 운동화 한 켤레지만 넷이 함께 여행을 떠나는 순간에는 그게 제법 의미 있게 느껴졌다.

‘우리는 한 가족.’

말로 굳이 하지 않아도 네 켤레의 회색 운동화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4박 5일 동안 이 신발을 신고 도쿄의 거리를 함께 걸을 것이다.

출국수속을 마치고 탑승구로 향했다.

비행기는 예정시각보다 조금 늦어 오전 8시가 넘어서야 인천공항을 출발했다.

창밖 활주로에는 빗방울이 보였다.

도쿄의 날씨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단 간다.

크리스마스 도쿄로.


3. 비 내리는 나리타, 그리고 N‘EX

오전 10시 무렵 나리타공항(成田国際空港)에 도착했다.

그런데 도쿄의 첫인상은 파란 겨울 하늘이 아니었다.

비였다.

하필 크리스마스이브에 비라니.

입국 절차를 마치고 시부야까지는 나리타 익스프레스(Narita Express, N‘EX)를 이용하기로 했다.

승차권은 나리타공항 제1터미널 11시 44분 출발, 시부야 13시 04분 도착.

NARITA EXPRESS 18호, 8호차였다.

유선 자물쇠가 달린 N‘EX 전용 수하물 보관대에 캐리어를 넣어두고 자리에 앉았다.

검은색과 붉은색이 어우러진 좌석에 아들과 나란히 앉아 사진도 한 장 남겼다.

열차가 나리타를 벗어나자 창밖으로 일본의 겨울 들판과 낮은 주택들이 지나갔다.

하지만 비는 그칠 생각이 없었다.

창문에는 계속 빗방울이 맺혀 있었다.

12시 17분 무렵 지바를 지나고, 오후 1시가 가까워지자 차내 전광판에 드디어

‘잠시후 시부야’

라는 글자가 나타났다.

* 일본어: まもなく 渋谷
* 영어: Arriving at Shibuya
* 한국어: 잠시후 시부야
* 중국어: 即將到達 渋谷

차내 전광판은 4개국어를 함께 안내하고 있었다.

이제 오늘부터 4박 동안 머물 도쿄 한복판으로 들어간다.


4. 시부야 도착, 그런데 호텔이 어디 있는 거야?

오후 1시 무렵 시부야(渋谷)에 도착했다.

이번 여행에서 4박을 모두 책임질 숙소는

JR EAST HOTEL METS SHIBUYA
(JR東日本ホテルメッツ 渋谷).

시부야역과 바로 연결되어 있어 교통 하나만큼은 정말 편리할 것 같았다.

그런데 첫날부터 문제가 생겼다.

시부야역 주변이 대대적인 공사 중이었다.

JR선, 긴자선, 한조몬선, 후쿠토신선, 도요코선에 하치코광장과 동쪽 출구, 시부야 스크램블 스퀘어 방면까지 각종 안내판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분명 역과 연결된 호텔이라는데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캐리어를 끌고 시부야역 안팎을 한참 헤맸다.

밖으로 나가면 비까지 맞았다.

“아니, 지하철하고 바로 연결된다더니 호텔 찾다가 사람 잡겄네.”

그렇게 헤맨 끝에 겨우 호텔을 찾아냈다.

첫날부터 시부야가 만만치 않다.

체크인 시간까지는 아직 일렀다.

캐리어만 호텔에 맡겨놓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5. 시부야로 진격의 거인

드디어 짐에서 해방됐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부야로 진격한다.

진격의 거인이다.

그런데 아무리 거인이라도 배가 고프면 허당이다.

새벽 2시 46분부터 움직였고 인천공항에서 먹은 햄버거 이후 제대로 먹은 것이 없었다.

일단 밥부터 먹어야 했다.

호텔에서 나와 걷다가 근처에 보이는 식당에 들어갔다.

멘한쇼쿠도 나카지마(麺飯食堂 なかじま).

딱히 맛집을 찾아 들어간 것도 아니었다.

그냥 배고프니 눈에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다.

메뉴에는 탄탄멘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면과 볶음밥, 중화요리가 있었다.

아이들은 붉은 국물의 면을 주문했고, 우리는 목이버섯과 달걀, 돼지고기가 들어간 볶음요리에 밥을 먹었다.

그런데,

“오?”

생각보다 맛있다.

아무 기대 없이 들어왔는데 첫 끼부터 성공이다.

유명 맛집을 일부러 찾아다니는 것도 여행의 재미지만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간 집에서 뜻밖에 맛있는 음식을 만날 때가 있다.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나니 다시 힘이 났다.

진격의 거인 부활이다.


6. 포켓몬센터, 전 세계 사람들이 여그 다 모였나

아들이 이번 도쿄여행에서 가고 싶어 했던 곳 가운데 하나가 포켓몬센터였다.

시부야 PARCO(渋谷PARCO) 6층에 있는 포켓몬센터 시부야(ポケモンセンターシブヤ)로 향했다.

그런데 매장에 도착하자마자 입이 벌어졌다.

“워매, 전 세계 사람은 여그 다 모아놨나?”

정말 사람이 많았다.

크리스마스이브라 그런지 일본 사람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매장을 꽉 채우고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사람에 밀려 들어가야 할 정도였다.

피카츄 인형이며 각종 캐릭터 상품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정작 아들이 관심 있어 하는 포켓몬카드는 상황이 달랐다.

종류도 별로 없고 상당수가 품절이었다.

그야말로 포켓몬카드 품절 대란.

계산대 줄은 더 기가 막혔다.

무언가 하나 사더라도 계산하려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우리는 사람 구경, 포켓몬 구경만 실컷 하고 그냥 나왔다.


7. 루피도 만나고, 닌텐도도 구경하고

포켓몬센터와 같은 층에는 볼거리가 많았다.

이번에는 양팔을 번쩍 치켜든 『원피스』의 루피가 나타났다.

익살스럽게 웃으며 서 있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근처에는 닌텐도 도쿄(Nintendo TOKYO)도 있었다.

붉은색 닌텐도 간판 아래로 온갖 캐릭터 상품이 진열돼 있었고 『스플래툰』의 잉클링 캐릭터 대형 조형물도 자리 잡고 있었다.

도쿄에 오면 이런 재미가 있다.

한국에서는 화면 속에서만 보던 게임과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 거리와 상점 곳곳에서 실제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아들은 포켓몬을 찾아다니고, 딸래미는 또 사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시부야 PARCO 안을 다시 돌아다녔다.

각종 패션매장과 캐릭터숍이 층층이 들어서 있고 서점에는 일본 만화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가족여행이라는 것이 그렇다.

내가 보고 싶은 곳만 돌아다닐 수도 없고, 마님이 좋아하는 곳만 갈 수도 없다.

아들이 원하는 곳도 가고,
딸이 사고 싶은 것도 구경하고,
그러다 보면 하루가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8. 비 오는 시부야,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 잔

파르코를 나왔지만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거리에는 온통 우산이다.

우산을 쓰고 시부야 공원거리 쪽으로 걷다가 스타벅스 시부야 공원거리점
(スターバックス コーヒー 渋谷公園通り店)에 들어갔다.

청의동굴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스타벅스다.

새벽부터 계속 움직였고 비까지 맞으며 시부야를 돌아다녔으니 잠깐 쉬어갈 시간이 필요했다.

따뜻한 실내에 자리를 잡았다.

커피 한 잔의 여유.

아들도 자리에 앉아 음료를 마시며 쉬었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크리스마스를 즐기러 나온 사람들은 우산을 쓰고 계속 거리를 오갔다.

여행에서는 이런 시간이 좋다.

무엇을 반드시 봐야 하는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 몇 시에 가야 하는 것도 아닌 시간.

그냥 앉아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아, 지금 우리가 도쿄에 와 있구나.’

하고 느끼는 시간이다.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9. 요요기공원, 그리고 크리스마스 마켓

다음 목적지는 요요기공원(代々木公園).

시부야구청을 지나 겨울 나무들이 늘어선 길을 따라 걸었다.

비를 맞은 나무들은 대부분 잎을 떨어뜨린 채 앙상했고, 산책로 곳곳에는 물웅덩이가 남아 있었다.

도쿄 한복판의 화려한 시부야에서 조금만 걸어 들어왔을 뿐인데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공원 안쪽으로 더 들어가자 뜻밖의 크리스마스 풍경이 나타났다.

커다란

‘SHIBUYA Christmas’

간판이 세워진 입구.

그 안으로 붉은색과 흰색 천막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2025 시부야 크리스마스 마켓이다.

음식과 음료를 파는 부스들이 이어지고, 곳곳에 크리스마스 조명이 켜지기 시작했다.

오늘이 12월 24일.

그야말로 크리스마스이브 한복판에 들어와 있었다.

공원 한편에는 아직도 옛날식 공중전화 부스가 남아 있었다.

도쿄처럼 거대한 현대도시 한복판에서 이런 풍경을 만나니 또 묘하다.

조금 더 걸어가자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밤 가장 보고 싶었던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10. 청의동굴(青の洞窟 SHIBUYA 2025)

청의동굴(青の洞窟 SHIBUYA 2025).

요요기공원 느티나무길과 시부야 공원거리 일대를 푸른 LED 조명으로 뒤덮는 겨울 일루미네이션이다.

길 양쪽 나무에 하나둘 불이 들어오더니 어느 순간 거리 전체가 푸른색으로 변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나무에 파란 조명을 달아놓은 행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로 그 안으로 들어가 보니 느낌이 전혀 달랐다.

머리 위도 파랗고,
옆도 파랗고,
비에 젖은 길바닥까지 파랗다.

나무와 거리 전체가 푸른빛 속에 잠겼다.

청의동굴이라는 이름이 왜 붙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올해 행사장에는 거대한 눈사람도 세워져 있었다.

‘청의동굴 THE SNOWMAN(青の洞窟 THE SNOWMAN)’.

커다란 눈사람 표면으로 빛과 영상이 투사됐다.

처음에는 푸른 별빛이 흐르다가 하얀 눈사람으로 변하고, 얼굴이 나타나기도 했다.

몸통에는 글과 영상이 흘렀다.

단순히 조형물 하나를 세워놓은 것이 아니라 눈사람 전체가 하나의 스크린이자 빛의 공연장이었다.

그 뒤로는 푸른 LED를 뒤집어쓴 나무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푸른색의 오묘한 조화.

참 묘한 색이다.

화려한데 요란하지 않고,
차가운 색인데 이상하게 사람을 끌어당긴다.

그리고 오늘은 비까지 내린다.

처음에는 하필 여행 첫날부터 비냐고 투덜거렸는데 청의동굴에서는 그 비가 오히려 한몫했다.

젖은 도로 위로 푸른빛이 그대로 반사됐다.

위에는 파란 나무,
아래에는 파란 길.

그 사이로 수많은 사람들이 우산을 쓰고 걸었다.

비가 와도 사람은 엄청나게 많다.

오늘이 크리스마스이브이니 당연할 수도 있다.

우산을 쓴 사람들의 행렬과 푸른 불빛이 한데 섞였다.

빛이 변할 때마다 거리는 또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마치 도시 한복판이 아니라 잠시 다른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가족과 함께 도쿄에서 맞이한 크리스마스이브.

오늘 하루 가운데 가장 강하게 기억에 남을 장면이다.


11. 다시 시부야로, 사람에 치여 죽겄다

청의동굴(青の洞窟)을 보고 다시 시부야 쪽으로 걸었다.

길가의 가로수에도 푸른 조명이 이어졌다.

비에 젖은 도로 위로 자동차의 붉은 후미등과 파란 조명이 뒤섞여 번졌다.

밤이 깊어질수록 시부야에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시부야 PARCO를 지나 스크램블 교차로 쪽으로 들어서자 아예 우산의 바다다.

검은 우산,
투명 우산,
하얀 우산.

수많은 우산이 교차로를 꽉 채웠다.

건물의 대형 전광판과 네온사인은 정신없이 번쩍이고, 그 아래로 사람들이 끊임없이 밀려다녔다.

저녁도 먹었다.

그런데 희한하게 오늘 하루 중 저녁 메뉴는 벌써 기억이 희미하다.

확실한 것은 음식보다 사람이다.

크리스마스이브의 시부야.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다.

“아이고, 사람에 치여 죽겄다.”

진짜 그 말이 절로 나온다.

비가 와도 아무 소용이 없다.

오히려 모두 우산을 펼쳐 들고 있으니 거리는 더 좁아졌다.

램블러 기록으로 오늘 오후 시부야와 요요기공원을 돌아다닌 거리는 6.8km.

오후 1시 30분부터 4시간 46분 넘게 돌아다녔다.

새벽 2시 46분부터 움직인 몸에는 이제 피로가 차곡차곡 쌓였다.

일단 호텔로 돌아왔다.


12. 마님은 그로기, 우리는 다시 시부야 스카이로

호텔에서 잠시 쉬었다.

새벽 2시 46분 대전 출발.

인천공항.

비행기.

나리타공항.

N‘EX.

시부야.

그리고 비를 맞으며 오후 내내 걸었다.

결국 마님은 그로기 상태다.

오늘은 더 이상 못 움직이겠다고 한다.

마님은 호텔에서 쉬기로 했다.

하지만 나와 아들, 딸은 아직 마지막 일정이 남아 있었다.

시부야 스카이(SHIBUYA SKY).

밤 8시가 조금 넘어서 셋이 다시 호텔을 나섰다.

램블러 기록상 오후 8시 02분 출발.

오늘 밤 마지막 출격이다.

시부야 스크램블 스퀘어(渋谷スクランブルスクエア)로 향했다.

건물 주변은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특히 분홍빛으로 환하게 빛나는 크리스마스트리가 눈에 띄었다.

아들과 나,
딸과 나.

트리 앞에서 번갈아 사진도 남겼다.

이제 시부야 스카이에 올라가 도쿄의 크리스마스 야경을 내려다볼 차례다.

오늘 하루 종일 비 맞으며 돌아다닌 마지막 보상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또 그놈의 비가 문제였다.

입구에 도착해 전광판을 보니 딱 적혀 있었다.

ROOFTOP CLOSE ×

INDOOR OPEN ○

옥상 폐쇄.

실내 전망공간은 열려 있었지만 우리가 보러 온 것은 옥상에서 바라보는 도쿄의 밤이었다.

옆에는 한국어로도

‘옥상 폐쇄 시 무료 취소 서비스’

라고 안내되어 있었다.

아이고.

여기까지 왔는디.

결국 관람을 포기하고 환불받기로 했다.

“젠장…….”

하루 종일 비가 따라다니더니 마지막 일정까지 제대로 발목을 잡았다.

멋진 도쿄 야경을 보고 첫날을 마무리하려 했는데 이렇게 끝나다니 조금 허무했다.

그래도 스크램블 스퀘어 주변의 크리스마스 장식을 조금 더 구경했다.

비에 젖은 시부야 고층빌딩과 거리는 여전히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도 한계다.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13. 비와 푸른빛의 크리스마스이브

그렇게 도쿄에서의 첫날이 끝났다.

하루 종일 비가 따라다녔고, 사람 많은 시부야에서는 몇 번이나 지쳤다.

마지막 시부야 스카이까지 비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그래도 청의동굴(青の洞窟)에서 가족과 함께 걸었던 푸른빛의 길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비에 젖은 길 위로 번지던 푸른빛과 그 사이를 함께 걷던 우리 네 사람.

새벽 인천공항에서 나란히 모았던 네 켤레의 회색 뉴발란스 운동화는 오늘 하루 종일 도쿄의 같은 길을 걸었다.

2025년 크리스마스이브.

우리 가족의 도쿄여행 첫날은 그렇게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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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일본 소도시 여행
두경아 지음 / 길벗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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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함께하는 일본 알펜루트 여행기

여행 5일차, 2026.05.26.(화요일)
이제 진짜 안녕, 도야마 그리고 알펜루트(알프스 재펜)


1. 오전 6시 50분, 이제 정말 떠나는 아침

여행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오늘 오전 10시 15분 고마쓰공항에서 출발하는 인천행 비행기를 타면 이번 여행도 정말 끝이다.

오전 6시 50분경 HOTEL JAL CITY TOYAMA를 나섰다.

며칠 동안 아침마다 나서고 저녁이면 다시 돌아왔던 호텔이다.

첫날 도야마에 도착했을 때는 앞으로 며칠 동안 무엇을 보게 될지 기대가 컸는데, 이제는 캐리어를 끌고 떠나는 날이 됐다.

호텔을 나와 도야마역으로 걸었다.

아침의 도야마 거리는 아직 한산했다.

며칠 동안 수없이 오갔던 도야마역 앞 풍경도 오늘 보는 것이 마지막이다.

낡은 녹색 트램 한 대가 아침 거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 이런 풍경도 안녕이다.

그래도 그냥 갈 수는 없다.

도야마역으로 가기 전에 역시 스타벅스에 들렀다.

역 바로 앞 스타벅스.

여행 내내 참 자주도 마신 커피다.

오늘 아침은 따로 밥을 먹지 않고 커피 한 잔으로 끝냈다.

올 때 대한항공을 타고 인천에서 고마쓰로 올 때도 두 시간 남짓한 짧은 노선인데 기내식이 나왔다.

그러니 돌아가는 비행기에서도 기내식이 나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침은 그냥 커피만 먹자. 비행기 타믄 밥 주잖어.”

마님과 자리에 앉았다.

마님은 마지막 아침 커피를 마시고 나는 출발 시간을 확인했다.

옆에는 우리의 캐리어가 놓여 있었다.

여행 첫날에는 앞으로 며칠 동안 끌고 다닐 짐이었는데 이제는 한국으로 데려갈 짐이다.

마님과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일본에서의 마지막 아침을 시작했다.

오늘은 더 이상 어디를 바쁘게 돌아다닐 필요도 없다.

이제 공항으로 가서 집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2. 오전 7시 37분, 쓰루기를 타고 마지막으로 도야마를 떠나다

커피를 마시고 도야마역으로 들어갔다.

신칸센 중앙 개찰구로 향했다.

전광판을 보니 우리가 탈 열차가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오전 7시 37분 출발. 쓰루가행 쓰루기.

그 뒤로 오전 8시 16분 쓰루기와 오전 8시 24분 가가야키가 차례로 표시되어 있었다.

열차 이름도 재미있었다.

‘쓰루기(つるぎ)’는 다테야마 연봉의 험준한 명봉 쓰루기다케(剱岳)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번 여행 내내 바라보고 그 안으로 직접 들어갔던 북알프스의 산 이름이 신칸센 열차명에도 남아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출발하는 ‘가가야키(かがやき)’는 우리말로 하면 ‘빛남’, ‘찬란함’ 정도의 뜻이다.

북알프스를 실컷 보고 떠나는 마지막 아침에 ‘쓰루기’와 ‘가가야키’라는 이름을 나란히 보고 있으니 괜히 더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탈 것은 오전 7시 37분 쓰루기였다.

개찰구를 지나 승강장으로 올라갔다.

도야마역 역명판도 다시 한번 보였다.

‘富山 Toyama’

며칠 동안 여행의 중심이 되었던 역이다.

열차가 들어오고 마님과 캐리어를 끌고 객차에 올랐다.

객차 안은 의외로 한산했다.

붉은색 계열의 좌석들이 길게 이어졌고 빈자리도 많았다.

커다란 캐리어도 우리 좌석 가까이에 놓아둘 수 있었다.

“마지막까지 한산허니 좋네.”

오전 7시 37분.

쓰루가행 쓰루기가 도야마역을 출발했다.

목적지는 고마쓰역이다.

승차권에는 도야마 오전 7시 37분 출발, 고마쓰 오전 8시 13분 도착으로 적혀 있었다.

열차가 도야마를 벗어나자 창밖으로 다시 익숙한 풍경들이 흘러갔다.

일본식 주택들이 이어지고, 물이 찬 논과 밭이 지나갔다.

그리고 멀리 산들이 길게 이어졌다.

오늘은 어제처럼 쨍하게 맑지는 않았다.

산에는 약간의 연무가 끼어 있었지만 그 너머로 높은 봉우리의 눈이 여전히 보였다.

이번 여행 내내 참 많이 바라본 산들이다.

처음 도야마에 왔을 때부터 눈에 들어왔고,
쿠로베 협곡으로 가는 열차에서도 바라봤고,
어제는 그 산속으로 직접 들어가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를 통째로 넘어왔다.

그리고 오늘은 돌아가는 열차 안에서 마지막으로 바라본다.

“안녕.”

창밖으로 설산을 계속 바라봤다.

“이제 진짜 안녕이야.”

어제 아침에는 저 산을 향해 그렇게 신나게 달려갔는데 하루가 지난 지금은 반대 방향으로 떠나고 있다.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그래서 또 여행인가 보다.


3. 신타카오카와 가나자와, 여행의 기억을 다시 지나 고마쓰로

열차는 서쪽으로 달렸다.

넓게 물을 댄 논과 작은 마을들이 계속 이어졌다.

열차는 신타카오카역에 정차했다.

‘新高岡 Shin-Takaoka.’

이번 여행에서 다카오카와 아마하라시를 찾아갔던 기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아마하라시 해안에서 바라봤던 바다와,
바다 건너 설산을 기다리며 걸었던 시간도 생각났다.

신타카오카를 지나 열차는 다시 속도를 냈다.

객차 안내판에는 잠시 뒤 가나자와가 표시됐다.

‘Kanazawa.’

가나자와라는 이름을 보니 이번 여행에서 가장 특별했던 장소 가운데 하나가 떠올랐다.

노다산.

그리고 위대하신 천하영웅 윤봉길 의사님의 암장지.

관광지 하나를 지나가는 기분과는 달랐다.

그곳에서 의사님이 겪으셨던 마지막 시간과,
순국 뒤 일제가 유해를 아무렇게나 묻었던 그 자리를 직접 찾아갔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마지막 날 열차 안에서 다시 가나자와를 지나니 마음이 묘했다.

열차는 가나자와를 지나 계속 남쪽으로 달렸다.

한동안 도시와 마을이 이어지다가 다시 논과 산이 펼쳐졌다.

멀리 산줄기 사이로 눈을 이고 있는 높은 봉우리도 다시 나타났다.

여행이 끝날 때가 되니 지나왔던 장소들이 하나씩 다시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객차 안내판에 마침내 고마쓰가 표시됐다.

“곧 고마쓰에 정차합니다.”

이제 일본에서 타는 마지막 신칸센도 거의 끝나간다.


4. 오전 8시 13분, 고마쓰역에서 곧바로 공항으로

열차는 정확히 오전 8시 13분 고마쓰역에 도착했다.

신칸센에서 내려 승강장을 빠져나왔다.

고마쓰역은 도야마나 가나자와보다 훨씬 한산했다.

역 밖으로 나오자 바로 공항행 버스 승차장이 보였다.

‘小松空港行き バスのりば’

고마쓰공항행 버스 승차장은 4번이었다.

우리가 탈 버스는 오전 8시 22분 출발.

열차에서 내린 지 10분도 되지 않아 바로 버스로 갈아탈 수 있는 일정이었다.

“시간 딱딱 맞네.”

고마쓰역 앞 모습도 마지막으로 사진에 남겼다.

오전 8시 22분경 공항행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 전광판에도 ‘小松駅 → 小松空港’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고마쓰역에서 공항까지는 멀지 않았다.

시가지를 빠져나가 약 10분 정도 달리자 고마쓰공항에 도착했다.


5. 한산해서 더 좋았던 고마쓰공항

고마쓰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대한항공 국제선 체크인 카운터가 바로 보였다.

그런데 공항 분위기가 참 조용했다.

대도시 국제공항처럼 여행객들이 끝도 없이 몰려 있는 풍경이 아니었다.

대한항공 체크인 카운터에도 사람들이 조금 서 있을 뿐이었다.

“아이고, 사람 별로 없으니 좋네.”

그러고 보니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는 꼴인가.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을 싫어하는 거다.

여행지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좋은 곳이라도 사람이 너무 많으면 정신이 없고,
조용한 곳에서 천천히 둘러볼 수 있으면 훨씬 좋다.

고마쓰공항은 그런 점에서 마음에 들었다.

시골공항답게 크지도 않았고 사람도 많지 않았다.

복잡하게 헤맬 일도 없었다.

체크인을 마치고 공항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국제선 출발 안내가 보이고,
통로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용 조형물도 있었다.

벽 한쪽에는 일본 특유의 화려한 색으로 꾸민 커다란 그림도 설치되어 있었다.

사람이 거의 없는 대기공간에는 의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마님과 앉아서 비행기를 기다렸다.

창밖으로는 고마쓰공항 활주로 너머 산들이 보였다.

높은 산에는 아직 눈이 남아 있었다.

일본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산이 보인다.

전광판에는 우리가 탈 비행기도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대한항공 KE2190.
서울(인천).
오전 10시 15분.

이제 정말 일본을 떠날 시간이다.


6. 대한항공에 오르고, 이번에는 자위대 전투기 구경

탑승 시간이 되어 대한항공 비행기로 향했다.

탑승교 앞에서 마님과 나란히 마지막 사진도 한 장 남겼다.

며칠 동안 참 많이도 사진을 찍었다.

이제 일본에서 찍는 사진도 정말 몇 장 남지 않았다.

비행기에 탑승했다.

출발 예정시간은 오전 10시 15분.

시간도 거의 예정대로였다.

이제 활주로로 나가 바로 출발하나 싶었다.

그런데 비행기가 좀처럼 뜨지 않았다.

창밖을 보니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공항 한쪽에 회색 자위대 전투기들이 여러 대 줄지어 서 있었다.

그리고 전투기들이 계속 활주로 주변을 오가고 있었다.

고마쓰 공항은 일본 항공자위대 제6항공단이 주둔하는 공항이다.

“야, 전투기가 왜 이렇게 많어?”

한 대가 움직이면 또 다른 전투기가 보이고,
활주로 쪽에서는 계속 군용기 움직임이 이어졌다.

고마쓰공항은 민간공항과 자위대 기지가 함께 있는 곳이다.

이날도 훈련이 있었던 모양이다.

민항기를 타러 왔다가 뜻밖에 자위대 전투기 구경까지 하게 됐다.

“전투기가 끝도 없이 나오네.”

우리가 탄 비행기는 그렇게 약 15분 정도 기다렸다.

출발부터 크게 짜증날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언제 또 이렇게 일본 자위대 전투기들을 줄줄이 구경하겠나.

잠시 뒤 마침내 우리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속도가 붙더니 몸이 좌석 뒤로 살짝 밀렸다.

그리고 땅이 점점 멀어졌다.

창밖 아래로 고마쓰공항 활주로와 주변의 논밭, 마을이 한꺼번에 내려다보였다.

조금 더 고도를 높이자 해안선이 길게 나타났다.

바다와 육지가 선명하게 갈렸다.

조금 전까지 우리가 있던 공항과 활주로도 점점 작아졌다.

“안녕, 일본.”

이제 정말 끝이다.

비행기는 인천 하늘을 향해 방향을 잡았다.


7. 두 시간도 안 되는 거리인데 기내식까지

고마쓰에서 인천까지는 두 시간도 걸리지 않는 짧은 국제선이다.

그런데 대한항공에서는 이런 짧은 노선에도 기내식이 나온다.

일본으로 올 때도 기내식을 먹었기 때문에 돌아가는 비행기에서도 나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침에는 따로 식사를 하지 않고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 잔만 마셨다.

예상대로 이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내식이 나왔다.

“그려, 이거 먹을라고 아침 안 먹었지.”

뚜껑을 열어보니 밥과 고기, 초록색 채소가 들어간 따뜻한 식사였다.

옆에는 작은 빵과 과자, 제주 퓨어워터도 함께 나왔다.

커피도 한 잔 받았다.

두 시간도 안 되는 비행인데 이렇게 한 끼를 챙겨준다.

그리고 맛있었다.

나는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 맛있게 먹었다.

마님은 그런 모습도 사진으로 남겼다.

“뭘 밥 먹는 것까지 찍어.” 하면서도 그냥 먹었다.

아침을 커피 한 잔으로 끝냈으니 더 맛있었다.

마님과 나란히 앉아 기내식을 먹었다.

창밖에는 구름과 바다가 이어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래쪽 해안과 섬들도 보였다.

이제 일본에서의 일정은 모두 뒤에 남겨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그러다 문득 우리가 출발한 공항 이름이 생각났다.

고마쓰.

“고마쓰…… 고마씁니다.”

이번 여행도 참 고마웠다.


8. 낮 12시, 다시 인천

낮 12시 정각.

비행기가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고마쓰에서 출발한 지 두 시간도 되지 않았다.

비행기에서 내려 긴 통로를 따라 입국장으로 이동했다.

익숙한 인천공항이다.

일본의 한산한 고마쓰공항에서 출발해 다시 거대한 인천공항으로 돌아오니 분위기부터 완전히 달랐다.

입국심사장을 지나 수하물 찾는 곳으로 향했다.

전광판 시계를 보니 낮 12시 24분.

이제 캐리어만 찾으면 된다.

그런데 이놈의 캐리어가 금방 나오지는 않았다.

비행기가 도착하고 약 40분 정도 지나서야 짐까지 모두 챙길 수 있었다.

며칠 전 같은 캐리어를 끌고 일본으로 떠났는데 다시 그 짐을 끌고 한국 땅에 서 있었다.

이제 정말 모든 여행 절차가 끝났다.

마님과 짐을 챙겨 집으로 향했다.


9. “고마쓰, 고마씁니다.”

이번 여행도 그렇게 끝났다.

돌아보면 이번 여행에는 산과 기차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가나자와에서는 내가 오래도록 마음에 두고 있었던 위대하신 천하영웅 윤봉길 의사님의 흔적을 찾아갔다.

노다산의 암장지를 직접 찾아가 의사님이 순국하신 뒤 일제에 의해 유해가 묻혔던 바로 그 자리를 바라봤다.

거꾸로 묻혔다고 알려진 의사님의 암장지.

그곳에 직접 서 있으니 책이나 사진으로 접할 때와는 전혀 달랐다.

그리고 그 암장지를 찾아내고,
잊히지 않도록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 애쓴 사람들의 흔적도 만났다.

윤 의사님은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 의거로 일본군 수뇌부에 큰 타격을 입힌 뒤 체포되셨고,
그해 12월 19일 가나자와에서 스물다섯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셨다.

그리고 의사님은 바로 충청남도 예산 출신이다.

나 역시 충남사람이다.

그 사실 때문에 노다산에서 느낀 마음은 더 남달랐다.

멀리 일본 땅까지 와서,
같은 충남 땅에서 태어난 한 젊은이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던지고 마지막에는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평소에도 윤봉길 의사님을 위대하신 천하영웅이라 생각해왔지만,
그분의 마지막 흔적이 남은 땅에 직접 서보니 존경심이 더 커졌다.

“의사님, 같은 충남사람인 제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암장지를 바라봤던 기억은 이번 여행에서 쉽게 잊히지 않을 것 같다.

가나자와에서 만난 윤봉길 의사님의 숨결은 이번 여행에서 가장 무겁고도 뜻깊은 기억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기억들이 이어진다.

다카오카와 아마하라시에서는 바다와 설산이 함께 어우러지는 풍경을 보았다.

아마하라시 해안에서 바다 건너 산을 바라보고,
기차와 바다와 작은 마을이 어우러지는 풍경 속을 걸었다.

비 내리는 쿠로베 협곡에서는 토롯코열차를 타고 네코마타까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비에 젖은 짙은 초록의 산, 산허리에 걸린 구름, 깊은 계곡과 철교, 그리고 험한 산속에 만들어진 발전시설까지.

그날은 비가 와서 더 좋았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토록 기다렸던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를 넘어왔다.

일본에 온 뒤 매일 라이브카메라를 확인하며 날씨를 걱정했는데,
정작 우리가 가는 날은 하늘이 거짓말처럼 맑았다.

5월 말의 새하얀 무로도 설원,
영화 『비밀』을 보고 언젠가는 꼭 가보겠다고 마음먹었던 유키노오타니,
설산 사이로 내려다본 구로베호,
그리고 토목기술자인 내 눈을 사로잡았던 거대한 구로베댐.

어제는 해발 2,450m 무로도의 눈밭과 유키노오타니를 걷고 있었는데,

하루가 지난 오늘은 다시 인천에 와 있다.

여행은 참 빠르다.

떠나기 전에는 한참 남은 것 같다가도 막상 시작하면 순식간에 지나간다.

그래도 사진은 남고,

마님과 함께 보고 걷고 웃었던 기억도 남는다.

그리고 마지막 아침 열차 안에서 바라본 설산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안녕. 이제 진짜 안녕이야.”

그렇게 북알프스 알펜루트와 작별하고 고마쓰공항에서 일본을 떠났다.

“고마쓰, 고마씁니다.”

위대하신 천하영웅 윤봉길 의사님의 숨결을 만났던 가나자와도,

바다와 설산을 함께 바라봤던 아마하라시도,

비와 구름 속 쿠로베 협곡도,

눈부시게 맑았던 다테야마와 유키노오타니도,

모두 참 좋았다.

그리고 그 모든 곳을 사랑하는 마님과 함께했다.

“마님, 이번 여행도 정말 고생했수다.”

이렇게 아내와 함께한 일본 북알프스 알펜루트 여행을 모두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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