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 김영하 산문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의 여행의 이유

돌궐의 명장 톤유쿠크는 성을 쌓고 한곳에 머무르기보다 끊임없이 이동하는 삶에서 민족의 힘과 생존의 길을 찾았다. 그가 정착과 안주보다 이동과 기동성을 중시했던 뜻처럼, 나에게 여행은 익숙한 자리에 머물지 않고 세상을 직접 찾아 나서는 일이다.


1. 역사유적을 직접 찾아가 그곳에 남아 있는 사람과 시대의 흔적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2. 산과 협곡, 바다와 고원 등 인간의 힘으로 만들 수 없는 웅장한 대자연의 경치를 직접 마주하기 위해

3. 가족과 함께 보고 걷고 느낀 시간을 오래 남을 기억과 나만의 이야기로 기록하기 위해


“돌궐의 명장 톤유쿠크가 말한 이동의 정신처럼, 익숙한 곳에 안주하지 않고 역사의 흔적과 웅장한 대자연을 직접 찾아 나서며, 가족과 함께한 그 시간과 감동을 오래 남을 이야기로 기록하기 위해 나는 여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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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 - 김영하 산문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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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김영하 『여행의 이유』에서 말하는 여행의 이유

1. 익숙한 일상과 상처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해

2.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고 현재에 머물기 위해

3. 익숙한 신분과 역할을 벗어나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기 위해

4. 낯선 사람과 세계가 건네는 환대를 경험하기 위해

5. 자신이 살던 곳에서 거리를 두고 자기 삶과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기 위해

6. 실패와 우연, 예상하지 못한 사건까지 새로운 경험과 이야기로 받아들이기 위해

※ 인간은 본래 이동하고 방랑하는 존재라는 설명은 여행의 직접적인 이유라기보다, 인간이 여행을 떠나는 근원적 본성이나 배경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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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장을 채웠군."
초조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다시 문짝 틈새로 팔을 집어넣었다. 빗장을 풀자 드디어 문이 열렸다.
"후나오카 씨!"
어두운 실내로 들어서서 조명 스위치를 찾으려던 시마다의 손길이 딱 멈췄다. 조금 전 메데이아의 방에서 보았던 ‘함정‘을 떠올렸기 때문이리라.

"아, 역시......."
문 쪽으로 머리를 두고 상아색 카펫에 엎어져 있는 후나오카 마도카의 모습이 형광등 불빛 아래 드러났다.

예전에 미로나 미궁은 일종의 마귀를 쫓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마귀는 직선으로만 날아다닌다고 믿은 고대 중국인들은 도시의 성벽을 이중으로 만들고, 각 성문의 위치를 서로 어긋나게 마련해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만들었다. 영국에서는 어느 시대엔가 악마와 마녀의 침입을 막기 위해 현관 바닥에 미로무늬를 그렸다는 이야기도 있기는 하지만.......

아니다. 또 한 가지 가능성이 있다.
미지의 제3자가 이 집 어딘가에 숨어 있을 가능성이다. 우리 일행이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가,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살인마가 이 집에 숨어들어 있다면......?

"문은 잠겨 있었죠. 빗장도 안쪽에서 걸려 있었습니다."
시마다의 손이 붙박이 옷장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문을 부수고 들어와보니 보시다시피 후나오카 씨 이외에는 아무도 없어요."

"무슨 일이야? 지금 몇 시지?"
"큰일 났어. 또 사건이 일어났어."
"뭐?"
졸린 눈을 비비던 게이코가 입을 크게 벌렸다. ‘사건‘이라는 말에 잠이 확 깬 모양이다.

"아직 죽지 않았어요."
우타야마는 후나오카의 손목을 잡은 채 시마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시마다가 입을 열기도 전에 거의 반사적으로 다음 행동을 취했다.
"집사람을 데리고 오겠습니다!"

"앗!"
우타야마가 소리를 지르며 후나오카 곁으로 달려갔다.
"왜 그러세요?"
"지금 후나오카 씨가 움직인 것 같아요."

그건 그 차다. 그 차는.......
아니, 지나친 생각일까? 아무런 관련도 없을지 모른다.
어쨌든 그만 자자. 약 기운이 도는 모양이다. 내일 다시 생각해보면 되겠지

"그 워드프로세서를 살펴봐주세요. 아까 제가 궁금해서 전원은 켜두었습니다."
"그러면...... 또?"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후나오카 씨는 아직 작품에 착수하지 않은 것 같더군요."

스자키씨를 죽이는 일보다도 그런 모습으로 만드는 게 범인에게는 더 중요했던 게 아닐까? 아무런 근거도 없지만 그런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혹시 나는 지금 내 작품에 착수해서는 안 되는 게 아닐까?

"예, 후나오카 씨가 자기 직전에 적은 글인 것 같은데, 거기 마지막 부분에......."
우타야마가 대답한 그 순간이었다.
불쑥 짐승이 낮게 신음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잠시 모두들 당황했다. 그 소리가 침대 쪽에서 흘러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후나오카가베개에서 머리를 번쩍 들어 올리고 있었다.

"누가 타월 좀 주세요."
구토는 머리에 충격을 받았을 때 나타나는 가장 위험한 증상이라는 정도의 지식은 우타야마도 알고 있었다.

"그나저나 후나오카 씨 상태는 어떻습니까?"
게이코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사메지마가 안고 있던 담요를 건넸다. 게이코는 담요를 펼쳐 후나오카의 몸을 덮었다.
"정신을 차릴 기미는 전혀 없네요......."

30분 뒤 후나오카 마도카는 숨을 거두었다. 게이코가 염려한 대로 후두부에 입은 타격은 후나오카의 뇌에 치명적인 손상을 미친 셈이다.
시각은 오전 5시 35분.
지상은 이미 새벽을 맞이하고 있었다.

분명히 그건 수기 범주에 들 것이다. 적어도 소설은 아니다. 실제로 취재한 모양을 갖춘 수기 형식의 소설을 쓰려고 했던 것도 아닌 듯하다.
"내가 소설을 쓰지 않으면 범인은 움직임을 취할 수 없을 것이다, 라는 식으로 적혀 있죠. 그렇게 믿고 싶은 심리는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뇨. 잘 모르겠지만 자꾸 신경이 쓰이는군요."
그러고 보니 시마다는 여기 온 첫날부터 이 아리아드네 브론즈 상이 마음에 걸리는 듯했는데.......

"날이 밝아오지만 지금 해산할 수는 없을 겁니다. 아무래도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계속 감시해야만 할 상황에 놓이고 만 것 같군요."
"계속 감시한다고요?"
사메지마가 고개를 들어 물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죠. 하지만 말입니다, 이노 씨가 범인이라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할 수도 없어요. 스자키 씨뿐만 아니라 모두 네 명이나 살해된 지금은."

시마다는 복도로 나와 오른쪽에 있는 그 아리아드네 동상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아리아드네를 꼼꼼하게 살피며 앞으로 내민 아리아드네의 오른손으로 슬쩍 손을 뻗었다. 우타야마가 부르는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시마다가 턱을 괸 손을 풀며 등을 쭉 폈다.
"제게는 뭔지 모르지만 보일 듯 말 듯한 게 있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모양새가 그려지지 않는군요. 아직 어렴풋해서......."

범인의 자기 주장 같은 것을 느끼게 되는군요. 연극성, 극장성......이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관객, 즉 우리 눈을 필요 이상으로 의식한 연출이라는 의미에서요?"

시마다는 아직도 그때 제시한 목 자르기의 논리에 미련이 남는 모양이었다. 범인은 뭔가 뜻하지 않은 사정으로 카펫에 묻은 자기 핏자국을 숨기기 위해 목을 잘라내는 조작을 해야 했다고.

그렇다. 특히 하야시가 쓰던 워드프로세서에 남겨진 그 다잉 메시지의 뜻이. 그리고 아까 후나오카가 잠깐 의식을 되찾았을 때 보여준 그 동작은 무슨 뜻일까. 팔을들어 손을 뻗은 후나오카는 그때 분명히 시마다 쪽을 가리키려고 했다. 그건.......
자기를 습격한 상대를 보았다는 건가?
피할 수 없이 떠오르게 되는 의혹.
그가 범인이라고?

"사실은 말입니다, 기요무라 씨와 하야시 씨가 살해된 현장도 그들이 쓰던 작품을 모방한 듯한 상황이었습니다."
"정말인가요?"

"모르십니까, 사메지마 선생?" 시마다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 미로를 설계한 나카무라 세이지가 그런 장치를 하는 취미가 있었다는 사실을. 건축주가다른 사람도 아닌 미야가키 요타로 선생님이었다는 점을 함께 생각하면 이 집 어딘가에 그런 뭔가가 장치되어 있을 가능성은 크다고 생각합니다만."

"사메지마 선생, 혹시 선생도 이 집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밀 방 같은 것이 있다거나 하는 생각을......?"
우타야마가 무심코 끼어들었다. 어젯밤 시마다가 한 이야기가 떠올랐던 것이다. 사메지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비말 방? 그런 게 있습니까?"

거기까지 듣고서야 우타야마는 겨우 생각이 미쳤다.
분명히 이노 씨가 몸을 숨길 곳이 있다. 자물쇠가 걸린 지상의 문밖이 아니라 이 지하 저택 안에.

"미야가키 선생님의 서재 말입니까?"
"그렇죠."
잠옷 위에 걸친 재킷 주머니에 두 손을 넣으며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나오카 씨는 ‘마지막 피해자‘로서 자기 자신이 습격당하는 연극을 꾸몄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기요무라 씨를 죽이고, 하야시 씨를 죽인 뒤에 자기 방에서 자해를한 다음 경보기를 울렸겠죠. 피해자 가운데 한 명이 되어 혐의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는 식의 패턴입니다. 하지만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몰라도 자기 머리를 때렸을 때필요 이상으로 타격을 입어 결과적으로 목숨을 잃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럼 편지는 범인이?"
"예,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시마다가 자신 있는 표정으로 단언했다.

맞아, 그 석고 가면이다!
기요무라의 방을 혼자 찾아갔을 때, ‘메데이아’에서 시체를 발견한 뒤 시마다와 둘이서 하야시의 방으로 갔을 때, 그때 꺼림칙하게 느껴지던 위화감의 정체를 그제야깨달은 것이다.

"제가 보기에 이 집 객실은 모두 거의 같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문은 안쪽 우측으로 열리죠. 조명 스위치는 들어가서 왼쪽 벽에 있습니다. 그래서 조명을 끈 방을찾아간 기요무라 씨는 자연히 왼손으로 스위치를 더듬다가 독침 함정에 걸려들고 만 것으로 여겨집니다. 가령 그 방이 아니라 이 넓은 홀이나 오락실, 도서실 같은 방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홀은 깊은 밤에도 사람이 올 가능성이 있어 함정을 파기에는 적합하지 못합니다. 눈치를 채셨을지 모르겠는데 오락실과 도서실과 응접실은 문이 안쪽 좌측으로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스위치가 방으로 들어가 오른쪽 벽에 붙어 있죠. 게다가 객실에 비해 문에서 좀 떨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만약 이런방에 그 함정을 설치한다고 하더라도 ‘먹잇감‘은 사전에 위치를 확인하고 스위치를 켜려고 하기 때문에 함정이 들통 날 우려가 있죠."

"어떻습니까? 아주 똑같죠?"
시마다의 말 그대로였다.
두 방으로 가는 복도는 구부러지는 모양새나 막힌 부분의 위치까지 모든 것이 거의 똑같은 구조였다. (‘미로관 부분도‘ 참조)

"그다음에 주목해주셨으면 하는 것은 우타야마 씨가 기요무라 씨의 방을 찾아갔을 때 책상 위에 이 평면도가 놓여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기요무라 씨는 오락실로 갈때 이 평면도를 가지고 가지 않았습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오락실은 찾아가기 매우 쉬운 곳에 있고, 거기서 자기 방으로 돌아오는 일도 그저께부터 몇 번이나 같은길을 걸었으니 이미 외우고 있었다는 이야깁니다. 예를 들면 길 찾기에 가장 좋은 표식으로 벽에 걸린 석고 가면을 들 수 있습니다."

열여섯 개의 갈림길 가운데 ‘테세우스‘와 ‘메데이아‘로 가는 길은? 남쪽에서 헤아려 열세 번째, 그리고 열 번째.
"......아아."
우타야마는 그제야 그걸 눈치채고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어쨌든 범인은 어디선가 니코틴 농축액과 퍼티, 바늘을 조달해 독살을 위한 함정을 설치했던 겁니다. 함정으로 쓴 방은 작품 앞머리에서 무대가 된 메데이아. 하지만이 방이 선택된 이유는 작품 모방이라는 관점 이외에도 어느 정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범행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그 빈방일 필요가있었다는 거죠."

"여기 있는 다섯 명 가운데 지금 이야기한 범행을 저지른 사람은......."
시마다는 천천히 사메지마, 우타야마, 게이코의 얼굴을 보더니 소파에 웅크리고 있는 가도마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 보조 열쇠만 갖고 있다면 누구든 가능했다고 할 수밖에 없겠군요."

어제 이노를 찾으러 시마다와 함께 ‘메데이아‘를 살피러 갔을 때 선택한 갈림길은 분명히 사자 가면이 걸린 쪽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게 달랐다. 기요무라의 방인
‘테세우스‘로 가는 갈림길에 그 사자 가면이 있었고, ‘메데이아‘ 쪽에는 사자가 아닌 유니콘 가면이.......
두 가면이 바뀌어 걸려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기요무라 씨는 자기 방으로 가려고 했지만 메데이아로 가게 되었죠. 그리고 그 문도 문제입니다. ‘테세우스‘와 마찬가지로 ‘메데이아‘의 문도 방 이름을새긴 청동판이 떨어져 있었죠. 방을 잘못 찾아 들어가도록 범인이 미리 떼어놓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범인은 기요무라가 오락실에 간 사이에 ‘테세우스‘로 가는 갈림길에 있던 가면과 ‘메데이아‘로 가는 갈림길에 걸려 있던 가면을 바꿔치기한 것입니다.

"좀 전에 사메지마 선생이 말씀하신 의견에 가까운 생각입니다만, 범인은 우리가 기요무라 씨의 시체를 발견하는 데 드는 수고를 최대한 줄여주려고 한 게 아닌가 싶군요."

그 석고 가면. 송곳니를 드러낸 사자와 이마 한가운데 뿔이 돋은 짐승.

"열여섯 갈래나 되는 갈림길 가운데 어느 쪽이 자기 방으로 가는 길인가. 첫 번째와 두 번째라면 몰라도 열세 번째라는 숫자를 매번 세기는 힘든 일이죠. 그보다는 벽에 걸린 가면 종류를 표식으로 삼아 외우는 편이 훨씬 편하고 실수도 없을 겁니다."

하야시 씨가 묵던 방은 기요무라 씨의 방 바로 옆인 만큼 범행을 저지를 때 무슨 소리가 날까 걱정이 될 테니 당연히 기요무라 씨가 먼저 죽은 상태여야 안전할 겁니다.

"범인이 어지간히 마음 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거나, 아니면 범인이 하야시 씨를 아주 잘 설득했거나, 둘 중 하나겠죠. 그렇다면 적어도 그 상대가 이노 씨는 아니었을겁니다."

"의도하지 않은 밀실이었다는 건가요?" 사메지마가 천천히 물었다. "그러니까 범인은 애당초 ‘이카로스‘라는 방을 밀실로 만들 생각은 없었던 거다. 오히려 기요무라씨 방이나 하야시 씨 방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문을 열어둘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울려댄 경보음에 놀라서 서두느라......."

게다가 그 방을 밀실로 만들 필요가 전혀 없었을 겁니다. 그런 문제와 세 번째 사건에서 하야시 씨가 왜 스스로 범인을 방으로 들였는가 하는 문제를 함께 생각해보면어떻게 될까요?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답이 보이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사메지마가 대신 대답했다. "시마다 씨는 범인이 문으로 도망간 게 아니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싶은 거예요. 그렇죠, 시마다 씨?"
"예, 그렇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방을 밀실 상태로 만들어놓은 채 도망쳐야만 하는 상황이 된 거죠. 그리고 그건 범인에게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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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평론가, 편집자와 그의 아내,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낯익은 장면이었다. 다만 그들이 직업으로서 대하는 ‘소설‘ 속 이야기를 통해 익숙해진 상황이었다. 지금 직면해 있는 상황은 탐정소설과 지극히 흡사하지만 틀림없이 실제로 일어난 살인사건이다.

시마다는 거침없이 구석 쪽으로 걸어가 화장실 문을 열었다. 순간 우타야마는 그 안에서 이노의 시체가 굴러 나올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 예감은어긋났다.

"설마 이노 씨도 살해된 건 아닐 테죠?"
"저도 모르겠네요. 흐음, 이노 씨도 이미 살해되었다? 그랬을 가능성도 분명히......."
이노의 방 ‘에우로페‘는 저택 동쪽, 미야가키의 서재에서 바로 남쪽 옆에 있다. 그다음 남쪽 방이 사메지마에게 배정된 ‘파시파에‘. 하지만 바로 옆방이라고 해도 한방에서 다음 방으로 가려면 구불구불한 복도를 거쳐야 하기에 결코 가까운 거리는 아니다.

"미노스 왕의 어머니 이름이군요. 페니키아 왕인 아게노르의 딸. 제우스의 사랑을 받아 수소로 변신한 그의 등에 타고 크레타 섬으로 건너온 에우로페는 거기서 제우스의 아들 미노스를 낳았죠."

"십중팔구 이노 씨는 이 집에서 나가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올 리 없겠죠. 그리고 만약 이노 씨가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면우리는 이 지하 밀실에 완전히 갇혀버리는 셈입니다."

"흐음, 어라, 안주머니에 지갑이 들어 있네. 이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우타야마 씨, 제가 처음부터 의심스럽게 생각하는 게 있는데 말입니다......."
평면도를 한 손에 들고 성큼성큼 복도를 걸으며 시마다가 말했다.
"이노 씨는 물건을 사러 나간 게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노 씨의 시체가‘라는 표현은 차마 쓸 수 없었다.
"도서실과 살해된 스자키 씨의 방, 그리고 분명히 빈방이 하나 있었을 겁니다. 오락실은 아침에 가도마쓰 씨가 들여다보았다고 하니 생략해도 괜찮겠죠."

"시체가 미노타우로스의 방에 놓여 있는 모습에 대한 묘사입니다. 게다가 그 얼굴 부분에 물소 박제가 놓여 있다는 내용까지......."

"유언에 있는 조건 가운데 작품 속 피해자는 작가 자신이어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죠? 그래서 당연히 작품 속 시체는 스자키 씨인 셈이고, 자신이 쓰기 시작한 소설에묘사된 상황 그대로 살해되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말하자면 사적인 원한이야 어찌 되었건 몇 억이나 되는 돈이 걸려 있으면 우리는 누구나 동기가 충분하다는 이야기지."

기요무라는 자기보다 키가 조금 큰 ‘애독자 대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본격적으로 탐정 게임을 시작하자는 겁니까, 명탐정?"

"미야가키 선생님이 유언으로 남긴 지시를 완수할 여지는 충분히 남아 있다는 이야기야. 그렇지 않습니까, 우타야마 씨?"
기요무라는 어떻게 해서든 콘테스트를 계속하고 싶은 모양이다. 우타야마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현재 탈출은 매우 어렵죠. 경찰은 오지 않아요. 우리는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살인범이 여기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건 제생각인데요......."

"아뇨, 아닙니다. 아무래도 실혈사는 아닌 것 같네요."
깜짝 놀란 시마다가 게이코 곁으로 다가갔다.
"이거 보이세요? 후두부에 꽤 깊은 상처가 있습니다. 뭔가 무거운 장식물 모서리에 얻어맞은 모양이네요."

게이코는 시체 옆을 떠날 때 다리가 휘청했다. 역시 상당한 쇼크와 스트레스를 받았으리라. 그걸 숨기고 시마다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타야마는 여태몰랐던 아내의 강한 모습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게이코의 말 그대로였다. 처참하게 벌어진 목 부분의 상처 조금 위, 피가 묻은 목 주위에 시커멓고 가느다란 자국이 보였다. 이건 분명히 뭔가 가느다란 끈을 둘러 조른 흔적이다.

스자키 쇼스케의 기이한 시체. 즐겨 쓰던 안경은 벗겨져 조금 떨어진 곳에 놓여 있었다. 입가로 보라색 혀를 늘어뜨리고 흰자위만 드러난 얼굴. 그리고 원래 얼굴이있어야 할 자리에 놓인 검은 물소의 머리.......

"누구 침대를 덮치기라도 할 걸 그랬군."
기요무라는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우스갯소리를 할 수 있는 걸까? 우타야마는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노타우로스로 보이게 할 작정이었다면 머리를 잘라내고 그 자리에 물소 머리 박제를 얹어놓는 것이 더 그럴듯하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어차피 그럴 거라면 머리를 아예 완전히 잘라내고 대신 박제 머리를 얹어두는 편이 훨씬 더 그럴듯할 겁니다. 범인은 왜 이런 어중간한 모양으로 만들어둔 걸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범인이 스자키 씨의 소설을 ‘모방해서 한 짓 자체야, 뭐 예를 들자면 범인의 비정상적인 성격이랄까 비정상적인 취향이랄까, 그런 해석으로 넘어갈 수 없는 것도 아니죠. 하지만 제가 지금 주목하고 싶은 것은 범인이 왜 이런 군더더기 같은 조작까지 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스자키 씨의 원고 내용을 기억하시죠? 워드프로세서로 입력하던 그 원고에는 미노타우로스처럼 꾸민 시체가 묘사되어 있었죠. 그런데 그건 물소 머리가 ‘시체의 얼굴을 덮듯이 얹어놓여 있다‘고 묘사되어 있을 뿐이잖습니까? 머리를 잘라내고 그 대신 물소 머리를 얹어놓는다는 표현은 전혀 없었습니다."

"나 참. 코미디는 이제 그만하죠."
생각에 잠긴 시마다에게 싸늘한 눈길을 던지며 기요무라가 말했다.
"현실 세계에서 일어난 사건은 추리소설의 논리로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법입니다."

"살인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한 명 사라졌어요. 사라진 사람은 현관 열쇠를 가지고 있었죠. 자연스럽게 생각하면 가장 의심스러운 사람은 사라진 사람이어야 할 겁니다. 바로 이노 미쓰오 씨죠. 어째서 아직까지 이런 의견이 나오지 않는지 저는 이상하기만 하군요."

"저는 다시 주장합니다. 적어도 정해진 기간 안에 밖에서 도움의 손길이 오지 않는 한 우리는 선생님의 유언에 따라 상속자를 뽑기 위한 콘테스트를 해야 한다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아까 시마다 씨가 제시한 목 자르기 논리, 그 주장은 역시 옳았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요."
기요무라가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 주장이 옳다고 인정한다면 결국 그게 이노 씨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는 이야기죠. 검사 결과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결백한 것으로 나온 이상
‘해당자‘일 가능성이 남아 있는 사람은 지금 여기 없는 이노 씨뿐이니까요."

나카무라 세이지가 손을 댄 건물에는 ‘장치 취향‘이라고나 해야 할 특징이 있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하지만 이 미로관에도 그런 종류의 뭔가가 있는지 어떤지는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작가들 가운데 스자키가 가장 유력한 후보였다. 우타야마 자신도 사실은 그가 상속자가 될 거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는가.

어쨌든 탈출 방법을 찾는 노력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상식을 벗어난 이런 콘테스트는 즉각 중지시켜야 한다.
일단 이렇게 생각하자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정상적이지 못한 이러한 상황에서 우타야마 자신도 일종의 비정상적인 심리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스자키 씨의 원고 내용을 기억하시죠? 워드프로세서로 입력하던 그 원고에는 미노타우로스처럼 꾸민 시체가 묘사되어 있었죠. 그런데 그건 물소 머리가 ‘시체의 얼굴을 덮듯이 얹어놓여 있다‘고 묘사되어 있을 뿐이잖습니까? 머리를 잘라내고 그 대신 물소 머리를 얹어놓는다는 표현은 전혀 없었습니다."

"즉 범인은 스자키 씨를 살해할 때 자신도 어딘가 몸에 상처를 입은 게 아닌가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상처에서 흘러나온 범인의 피가 그 바닥에 떨어졌겠죠. 상아색 카펫에 붉은 피예요. 바로 눈에 띄게 됩니다. 현장에 피를 남기는 일은 매우 위험하겠죠. 그걸 경찰이 발견하고 자세하게 분석하면 바로 누구 피인지 알아낼 우려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 피를 지워야만 하죠."

"그럼 ‘부러진 검‘의 논리입니까? 나뭇잎을 숨기려면 숲에 숨겨라,* 숲이 없다면 그 숲을 만들어라."

"스자키 씨의 소설 속에서 그리고 있는 미노타우로스의 모습을 본뜬 시체, 이 ‘모방‘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는 소설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은이가 죽은 지금은알 길이 없습니다. 한편 실제 사건의 범인은 뭔가 의도를 가지고 시체를 이용해 소설을 ‘모방했는데, 그때 작품 속에서는 묘사하지 않은 ‘목 자르기‘를 했죠. 여기서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는 실로 단순합니다.

"예를 들면 말이죠, 목을 자름으로써 시체는 ‘우두인신‘에 더 가까워진 겁니다. 하지만 이건 아마도 범인이 우리들에게 보여주려는 가짜 그림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뒤에 숨어 있는 진짜 의도가 분명히 있겠죠. 그리고 아마 그건, 좀 비약하자면, 목을 자른 상처에서 흘러나온 혈액...... 스자키 씨의 소설에서는 한 마디도 언급되지않았던 그 붉은색이라는 ‘효과‘ 속에 숨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시마다가 낮지만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만 그런 만큼 의혹의 눈초리를 받을 각오는 하셔야 할 겁니다."
"바닥에 떨어질 정도라면 당연히 코피가 심하게 났을 겁니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열 시간 이상 전에 난 출혈 흔적을 코를 조사해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2026.08.02 오전 7시 35분46%시마다가 자기 방으로 돌아가 펜처럼 생긴 소형 손전등을 가지고 오자 게이코는 콧구멍 검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난색을 표하던 후나오카도 결국 이런 일로 범인취급을 받고 싶지 않다면서 검사에 응했다.

누군가가 지금 이 미로 안에 있다는 느낌을 도저히 지울 수 없었다. 우타야마가 걸으면 그 사람도 걷고, 우타야마가 멈춰 서면 그 사람도 멈춰 서는 듯했다.

‘우리는 말이죠, 희생양입니다.‘
스자키의 쉰 목소리가 귓가에 되살아났다.
‘미궁의 괴물에게 바쳐진 희생양‘

자주색 문 앞에 이르렀다. 청동판에 적힌 글자를 확인하려고 고개를 들었는데 명판이 없다.
그러고 보니 ‘테세우스‘ 명판이 떨어졌다고 기요무라가.......
납득은 갔지만 왠지 살짝 위화감이 들었다. 문에 명판이 없다는 이유 때문은 아마 아닐 것이다. 그게 아니라....... 아아, 이 위화감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기요무라 씨......."
엎어진 남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우타야마는 숨을 멈추고 몸을 구부려 옆을 보고 있는 그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심하게 고통스러운 표정이 얼굴 전체에 새겨져 있었다. 두 손의 손톱이 목에 박혀 있었다. 고통스러운 나머지 쥐어뜯은 걸까?
메데이아. 테세우스를 독살하려고 한 마녀.......
전원이 켜진 워드프로세서.
잠기지 않은 문.
아무도 없는 방.......
조금 전 지나온 열여섯 개의 갈림길이 있는 긴 복도로 나왔다. 문제의 방 ‘메데이아의 위치는 기무라의 방인 ‘테세우스‘에서 남쪽으로 바로 이웃해 있다. 어제 이노를 찾으러 시마다와 함께 살펴보러 갔던 그 빈방이다.

"원고 자체는 겨우 시작한 부분이라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메디이아는 테세우스를 독살하려던 마녀였다거나, 뭔가 암시하는 듯한 묘사가 마음에 걸려서......."
"그리고 그 암시대로 기요무라 씨가 여기서 죽어 있었다는 건가요?"

"범인은 미리 저런 장치를 해두었습니다. 그리고 방 불을 끄고 기요무라 씨를 이리 불러낸 거죠. 캄캄한 실내에 들어와 기요무라 씨가 제일 먼저 무엇을 했을까요? 당연히 조명 스위치를 찾았을 겁니다. 이 집 객실들은 모두 문으로 들어와 왼쪽 같은 위치에 스위치가 있기 때문에 직접 눈으로 확인할 일이 없죠. 기요무라 씨는 왼손으로 더듬었습니다. 손이 닿았을 때는 이미 스위치 주위에 박아놓은 독침이 그의 손가락을 찌른 상태였겠죠."

후나오카 마도카가 기요무라에게 밀담을 요청했다고?
단정하게 찍혀 있는 검은 글자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우타야마는 혼란스러운 머리로 생각했다.
‘콘테스트 문제로 의논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으니....... 이건 두 사람 사이에 모종의 협정을 맺기라도 하겠다는 의미일까? 가령 어느 쪽이든 상금을 받게 되면 둘이서 나누기로 한다거나?

"하야시씨."
소리치며 문을 두드리던 시마다의 손길이 돌연 멈췄다.
"왜요?"
그때까지 멍하니 있던 우타야마가 물었다.
"이문."
시마다가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턱으로 가리켰다.
"열려 있습니다."

"살살 구슬려서 문을 열게 만들었거나, 아니면 마음을 놓을 만한 상대였거나......."
가령 보조 열쇠를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안에서 잠그고 테이블과 의자로 바리케이드까지 쌓아놓았다면 방에 들어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문을 부수려고 한 흔적은전혀 없으니 하야시가 범인을 방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는 말이 된다.

왼쪽에 보이는 워드프로세서가 놓인 책상 앞에 하야시 히로야가 있었다. 수수한 조끼를 걸친 상반신을 쓰러진 회전의자 위에 얹고 엎어져 있었다. 두 손은 책상 가장자리를 움켜쥔 채 고개를 푹 수그리고....... 그 등 한복판에 불쑥 튀어나온 암갈색 물체가 하야시를 그런 형태로 만들어놓은 것임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자, 보십시오. ‘미야가키 요타로의 저택, 미로관에 있는 방 <AIGEU.‘ 문장이 중간에 툭 끊어졌습니다. 그 아래 네 줄을 공백으로 비우고 불쑥 wwh가 나옵니다. 적어도 이 wwh라는 세 글자가 하야시 씨가 쓴 작품의 일부일 가능성은 부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키보드를 잘 보세요........"

"다만 이 wwh라는 세 글자. 이에 관해서는 여러모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하야시 씨가 죽어가면서 남긴 메시지일지도 모른다는 뜻인가요?"
"말하자면 그럴 수도 있다는 거죠."

바로 그때.
지하 저택을 뒤덮은 정적을 박살내듯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타야마는 말 그대로 펄쩍 뛰며 생각을 중단했다.
"뭐죠?"
온몸의 털이 쭈뼛 곤두서는 듯했다.

"후나오카 씨!"
문에 붙은 청동판의 글자는 IKAROS. 다이달로스의 아들 이름이다.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미노스 왕은 다이달로스가 길 안내를 한 것이 틀림없다고 의심해 다이달로스 부자를 미궁에 가두었다. 다이달로스는 거기서 손수 두 개의 인공 날개를 만들어 하늘을 날아 탈출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날개는 새의 깃털을 촛농으로 이어 붙여 만든 것이었기에 아버지의 충고를 무시하고 하늘 높이 날아 올라간 이카로스는 태양열 때문에 날개가 녹아 바다에 빠져 죽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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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키니 섬 ㅣ 아침이슬 청소년 1
시어도어 테일러 지음, 김석희 옮김 / 아침이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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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감상보고]

크로스(Crossroads), 인류가 선택해야 할 길
- 『비키니 섬』을 읽고 -

1. 비키니 섬은 누구의 고향이었는가

『비키니 섬』을 읽기 전부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책의 표지였다. 잔잔한 바다 위 작은 쪽배를 탄 비키니 섬 원주민이 거대한 버섯구름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핵실험 장면을 그린 그림이라고 생각했지만, 책을 읽고 난 뒤 다시 보니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쪽배는 원주민들의 평범한 일상과 삶의 터전을 상징하고, 그 뒤로 솟아오른 거대한 버섯구름은 강대국의 군사력과 핵무기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쪽에는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작은 공동체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인간이 만들어 낸 가장 거대한 파괴력이 있다. 두 모습이 한 화면에 담겨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책이 말하려는 비극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특히 원주민은 버섯구름을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이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삶과 고향이 사라지는 순간을 무력하게 지켜보는 그 뒷모습은 책을 모두 읽고 난 뒤에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나는 이 표지 한 장만으로도 『비키니 섬』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충분히 담아내고 있다고 느꼈다.

『비키니 섬』은 청소년을 위한 소설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작품이다. 이 책은 태평양 마셜제도에 있는 비키니 환초를 배경으로, 핵무기가 인간의 삶과 공동체를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담담하게 그려낸다.

비키니 섬은 원래 미국의 영토가 아니었다. 수백 년 동안 마셜제도 원주민들이 평화롭게 살아온 삶의 터전이었다. 주민들은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고, 코코넛과 판다누스를 기르며, 가족과 이웃이 서로 의지하는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왔다. 그들에게 비키니 섬은 단순한 땅 한 조각이 아니라 조상들의 무덤과 기억, 생활방식이 함께 이어지던 하나의 세계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은 유엔 신탁통치령이 된 이 지역을 핵실험장으로 선정하였다. 1946년 주민들에게 “인류의 평화와 전쟁을 끝내기 위한 실험이니 잠시만 섬을 비워 달라.”고 설득하여 다른 섬으로 이주시켰고, 이후 비키니 환초에서는 모두 23차례의 핵실험이 실시되었다.

특히 1954년 실시된 ‘캐슬 브라보(Castle Bravo)’ 수소폭탄 실험은 예상보다 훨씬 큰 폭발을 일으켜 방사능 낙진이 광범위하게 퍼졌으며, 주민들과 주변 지역에 심각한 피해를 남겼다. 주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약속을 믿고 떠났지만, 방사능 오염으로 인해 지금까지도 자유롭게 삶의 터전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미국이 빼앗은 것은 단순한 섬 하나가 아니었다. 한 공동체의 역사와 기억, 삶의 방식, 그리고 삶의 터전 전체였다.

2. ‘크로스(Crossroads)’, 인류가 선 교차로

소설에서 핵실험 작전의 이름은 ‘크로스(Crossroads)’, 우리말로 ‘교차로’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작전명이라고 생각했지만, 책을 읽을수록 그 이름이 가진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원자력은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도 있는 과학기술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류를 스스로 멸망시킬 수도 있는 핵무기가 되었다. 인류는 평화와 공멸이라는 두 갈래 길이 만나는 교차로에 서게 된 것이다.

하지만 비키니 섬 주민들에게는 선택권조차 없었다. 그들은 강대국이 선택한 길의 희생자가 되었을 뿐이다. ‘교차로’라는 이름은 인류의 선택을 의미했지만, 정작 그 선택의 대가는 아무 죄 없는 작은 섬 주민들이 치러야 했다.

‘크로스’라는 이름은 1946년 당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핵무기를 안보의 수단으로 계속 붙들 것인지, 아니면 군축과 공존의 길로 나아갈 것인지 결정하지 못한 채 오늘날의 인류도 여전히 같은 교차로에 서 있다.

8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인류는 그 교차로를 벗어나지 못했다.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인류의 미래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될 것이다.

3. 가장 무서웠던 것은 무감각함이었다

이 책에는 전쟁이나 핵실험의 참상을 자극적으로 묘사하는 장면이 거의 없다.

오히려

“실제 폭탄 투하 5분 전.”

“모든 보안경을 조정하라.”

“폭탄 투하.”

라는 짧은 방송만 반복될 뿐이다.

이 장면이 더욱 섬뜩했던 이유는 사람의 생명과 삶의 터전이 하나의 군사작전 절차처럼 처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초 단위로 시간을 재고, 누군가는 계기를 확인하며, 누군가는 명령을 전달한다. 그 치밀한 절차가 향한 곳은 적군의 군사기지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대대로 살아온 삶의 터전이었다. 주민들은 이미 강제로 고향을 떠나야 했고, 남겨진 섬은 거대한 핵실험장이 되었다.

작전의 모든 과정은 초 단위로 정밀하게 계산되었지만, 그 계산 속에 비키니 섬 주민들의 삶과 고향의 가치는 들어 있지 않았다. 절차가 정확할수록 오히려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무가치하게 취급되었는지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치밀한 절차와 인간 생명의 가벼움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장면이었다.

더욱 두려운 것은 이 모든 일이 분노나 증오가 아니라, 일상적인 명령과 보고, 점검과 확인 속에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누군가의 고향을 파괴하고 공동체를 해체하는 일이 하나의 임무이자 업무처럼 처리되고 있었다.

핵무기의 가장 큰 공포는 폭발 그 자체만이 아니다. 인간의 삶과 공동체가 군사적 목적 앞에서 너무도 쉽게 희생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과정에 사람들이 무감각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더욱 두려웠다.

4. 핵무기는 누구에게 허용되어야 하는가

『비키니 섬』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과연 핵무기는 누구에게 허용되어야 하는 것일까.

현재 국제사회는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통해 핵무기의 확산을 막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미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들은 막대한 핵전력을 유지하면서도 다른 나라의 핵개발은 강하게 제재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에 대해 국제사회에서는 핵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기존 핵보유국 역시 핵군축에 더욱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비판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강대국은 자신들의 핵무기를 억지력과 안보라는 말로 정당화하지만, 약소국에는 같은 논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강대국의 힘의 논리와 약소국의 안보 불안이 맞물리는 한, 핵확산 문제를 어느 한 나라의 잘못만으로 단순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최근 국제사회의 여러 핵 갈등을 보면서도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 특히 이란을 둘러싼 갈등과 협상, 군사적 긴장이 반복되는 모습을 보며 국제정치에서는 힘의 논리가 정의보다 앞서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느꼈다. 이러한 현실을 보며 약한 나라들이 느끼는 안보 불안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핵무기가 더 늘어나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핵무기는 어느 나라의 손에 있든 결국 인류 전체를 위협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 나라가 안보를 이유로 핵무기를 강화하면 다른 나라도 불안을 느끼고 같은 길을 선택하게 된다. 그 결과 어느 나라도 완전히 안전해지지 못하고, 오히려 모두가 더 위험해지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

『비키니 섬』은 핵무기를 가져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를 단순하게 이야기하는 소설이 아니다. 핵무기를 가진 강대국들이 과연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해 왔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큰 희생을 치른 사람들은 누구였는지를 우리에게 묻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5. 비키니 섬이 우리에게 남긴 질문

『비키니 섬』을 읽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비키니 섬 사람들은 대체 무슨 죄가 있었을까.”라는 질문이었다.

그들은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도 아니었고, 어느 나라를 침략한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저 조상 대대로 살아온 섬에서 평범한 삶을 이어가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강대국은 군사적 필요를 이유로 그들의 고향을 빼앗았다. 사람보다 국가의 전략이, 삶보다 군사적 목적이 우선된 결과였다.

지금도 비키니 섬은 완전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핵실험은 끝난 지 오래되었지만, 주민들은 여전히 자유롭게 고향으로 돌아가 살지 못하고 있다. 한때는 평화로운 남태평양의 작은 섬이었던 비키니 환초는 이제 핵시대의 비극을 증언하는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사람의 발길이 끊긴 뒤 비키니 섬의 산호와 해양생태계는 다시 살아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자연이 회복되는 동안에도 고향을 빼앗긴 사람들의 공동체는 돌아오지 못했다. 푸른 바다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상실이 한곳에 겹쳐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비키니 섬이 품고 있는 가장 쓰라린 아이러니이다.

아름다움은 사람들이 떠난 뒤에야 찾아왔다. 자연은 다시 살아났지만, 사람들의 삶과 기억은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자연의 회복과 인간의 상실이 교차하는 이 현실은 핵실험의 상처가 결코 과거형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책을 덮으며 다시 표지 속 원주민의 뒷모습과 ‘크로스(Crossroads)’라는 작전명을 떠올렸다. 작은 쪽배 위에서 거대한 버섯구름을 바라보는 원주민의 모습은 강대국의 선택 앞에서 아무런 선택권도 갖지 못했던 비키니 섬 주민들의 처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크로스’는 단순한 핵실험의 작전명이 아니었다. 인류가 평화와 대결, 생명과 파괴 사이에서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 것인지를 묻는 상징이었다.

비키니 섬은 그 선택의 대가가 얼마나 참혹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역사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80여 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인류가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지는 결국 우리 모두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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