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란정은 생육신의 한 분인 원호(元昊, 1397~1463) 가 살던 곳에 세운 정자다. 원호는 세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다 문종 때는 집현전직제학에 이르렀다. 그러다 단종이 폐위되자 병을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원주로 낙향해버렸다. 온당치 못한 쿠데타정권을 거부한 것이었다.그러다 단종이 청령포로 유배되자  생육신의 한 분인 조(趙旅, 1420~89)와 함께 단종을  찾아뵙고는 아예 이곳에 대를 쌓고 초가집을 지은 뒤  ‘관란‘이라 이름 지었다 - P60

관란이란 ‘물결을 본다‘는 뜻이다. 흐르는 물을 보면서 단종에게 충절을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지은 것이란다. - P61

간밤의 우던 여흘 슬피 우러 지내여다
이제야 생각하니 님이 우러 보내도다
져 물이 거스리 흐르고져 나도 우러 녜리라 - P61

영월 서강의 한반도 지형
  영월 옹정리에는 서강이 굽이지어 흐르면서 영락없는 한반도 지형을 그리며 돌아가는곳이 있다. 이곳 선암마을에는 넓은 주차장과 함께 산언덕에 전망대가 만들어져 관광객을 부르고 있다. - P63

관광만이 살길임을 알게 된 영월은 어떻게든 사람을 불러모으려고 안간힘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주천강 동강으로만 관광객이 몰렸을 뿐 서강의서면, 산골짝 하동면을 외지 사람들이 알 턱이 없었다. 이에 서면은 한반도면, 하동면은 김삿갓면이라고 바꾸어 관광객을 불러모으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영월은 영월사람들의 땅이기 이전에 대한민국의 국토이다. 그것은 애칭 또는 별칭으로 그쳤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관광 홍보 효과는 보았겠지만 국토의 이름을 이렇게 희화화한 바람에 잃어버린 국토의품위는 어떻게 회복한단 말인가. - P63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더 잘 알려진 난(蘭皐) 김병연(金炳淵, 1807~63)의 묘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불과 30년 전의 일로 영월의향토사학자인 고 박영국의 집념이 낳은 결실이었다. - P64

김삿갓 묘 산신각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더 잘 알려진 김병연의 묘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불과 30년 전의 일이다. 묘소 한쪽에 마을 산신각이 있어 산골의 처연한 분위기를 전해준다. - P66

김삿갓 묘 앞의 조형물들
  김삿갓 묘 앞에는 이런저런 조형물들이 어지럽게 배치되어 차라리 산신각 하나만 남아있었을 때가 더 품위 있고 유적지 같았다. - P67

그의 시는 풍자와 해학으로 너무도 유명하고 그 형식의 파격성과 내용의 민중성은 한국문학사에서 독특한 위상을 갖고 있다. 삐뚤어진 세상을 희롱하고 기성 권위에 도전하는 모습과 탈속한 면모에는 큰 박수를보내게 되며, 한글과 한자를 절묘하게 배합한 풍자시는 재미도 재미려니와 통쾌한 웃음을 선사하기도 한다. - P66

국문학에서 그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연암 박지원, 다산 정약용의 뒤를 잇는 사회시로 보는 견해 (주로 북한 학자들)이고또 하나는 희작(作)의 재주를 가진 것에 불과하다고 보거나 아예 김삿갓의 시란 그 시대 떠돌던 풍자시들의 집합으로 실체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의 방랑과 풍자와 해학이라는 것도 개인사적 부끄러움에 기인한것이었고 타락한 세상을 보기 싫어 가린 것뿐이었다고 평가절하하기도한다. - P67

是是非非非是是
是非非是非非是
是非非是是非非
是是非非是是非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함이 꼭옳은 것은 아니고
그른 것을 옳다 하고 옳은 것을 그르다 해도 옳지 않은 건 아닐세
그른 것을 옳다 하고 옳은 것을 그르다 함, 이것은 그르고 또 그른 것이고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함, 이것이 시비(是非) 일세 - P68

태화산에서 바라본 영월 
영월은 예나 지금이나 한적한 고을이다. 오죽했으면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민가와관가가 반반이고 누워서도 다스리는 곳이라고 했겠는가. 현대에 와서도 영월은 여전히 인구 4만의 한적한 곳이다. - P70

오늘날 영월의 명소로는 천연기념물 제219호인 고씨동굴을 꼽고 있고 자랑이라면 소고기가 유명하여 읍내에 한우마을, 한우센터가 있다는것과 영월교도소가 전국의 교정(正) 시설 중 가장 우수한 곳으로 손꼽힌다는 사실 정도다. 박중훈과 안성기가 출연한 영화 「라디오 스타」의무대인 한적한 고을이 바로 영월이다.
이런 영월이 단 한 번 세상을 시끄럽게 하며 역사상 크게 부각된 적이있다. 단종이 청령포에 유배되고 끝내는 여기서 죽음을 맞은 조선왕조초기 엄청난 정치적 사건의 현장이 되었을 때이다. - P70

수양대군의 권력욕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왕위를 찬탈하는 데에 걸림돌이 되는 아우들을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했다. 강화도로 귀양 보낸 안평대군에게 사형을 내리고, 막내동생 금성대군은 경기도 연천으로 유배보냈다. 그리고 1455년 6월에는 드디어 단종을 상왕(上王)으로 물러나게 하고 왕위에 올랐다. - P71

 청령포
  청령포는 영월읍내 서쪽 서강 건너편의 울창한 솔밭이다. 삼면으로 깊은 강물이 맴돌아가고 서쪽으로는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다. 형상은 반도 모양이지만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는 육지 속의 섬이다. - P72

단종어소
  오늘날 청령포에는 단종이 유배 살던 기와집과 하인이 기거하던 초가집이 복원되어 있다. 이는 2000년 4월 단종문화제 때 세운 것이고 원래의 집은 단종 사후 더 이상 사람 사는 일이 없어 이내 무너져버렸다. - P74

관음송
  단종이 유배 살던 집 가까이에는 준수한 관음송이 있다. 수령 600년에 키가 30미터로 우리나라에서 가장큰 키를 자랑한다. 전하기로는 단종이 유배 온 것을 보고 오열하는 소리를 들은 소나무라고 해서 볼 관(觀) 자, 소리 음자 관음송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 P77

노산대에서 바라본 서강 풍경
  노산대는 청령포에서 가장 높은 절벽으로 서강이 동강과 만나기 위해 치달리는 모습이 아련히 펼쳐진다. 굽이굽이 맴돌아 나아가는 우리나라 특유의 강변 풍광은 여기서 바라보는 서강이 제격이다. - P78

망향탑(왼쪽)과 금표(오른쪽)
 망향탑은 단종이 강물을 바라보며 쌓은 것으로 전한다. 금표비에는 ‘동서로 300척 남북으로 490척과, 이후에 진흙이 쌓여 생기는 곳도 출입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 P79

관풍헌
 단종이 유배 온 지 두 달 지났을 때 남한강에 큰 홍수가 일어나 청령포가 물에 잠기게 되자 단종은 급히영월 관아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거소를 옮겼다. 지금 영월읍내에는 동헌을 비롯한 옛 관청 건물들은 다 없어졌고 시내 한가운데에 이 객사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 P80

자규. 두견이 · 접동새 • 소쩍새
단종이 읊은 자규(子規)라는 새는 그 울음소리가  너무도 처연하여 예부터 많은 시를 낳았다. 특히 이조년(李兆年)의 시조 절창으로 꼽힌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 제
일지 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 P82

자규는 불여귀(不如歸)·귀촉도(歸蜀道) 등 여러별칭이  있고 두견(鵑)이, 접동새라고도 한다. 불여귀와 귀촉도는 촉(蜀)나라 망제(望帝)가하루아침에 나라를  빼앗기고 쫓겨나 그 원통함을 참을 수 없어 죽어서자규라는 새가 되어 밤마다 ‘불여귀(不如歸, 돌아갈 수  없네)‘를 부르짖으며 목구멍에서 피가 나도록  울었다는 고사에서 나왔다.
그런데 이 두견이는 소쩍새와 자주 혼동되어왔다. 두견이는 뻐꾸깃과에 속하고 소쩍새는 올빼밋과에 속한다. 두견이는 주행성이고 소쩍새는야행성이다. 두견이는 주로 낮에 울고 소쩍새는 밤에만 운다. - P82

두견이의 울음소리는 느린 2박자와 빠른 4박자가 연이어지면서 ‘딴딴따다다다‘로 들린다. 전설에 의하면 이 새소리는 쌀 됫박이 작아 항시 밥이 모자라 굶주려 죽은 며느리가 원조(怨鳥)가 되어 시어머니에게  ‘쪽박바꿔주오‘ 또는 ‘됫박 바꿔주오‘라며 우는 것이라고 한다. 옛날엔 삼시세끼 먹고 산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이 새소리의 설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 P83

달 밝은 밤 소쩍새 울음소리는 더욱 구슬퍼
시름 못 잊어 누 머리에 기대었노라
네 울음 슬프니 내 듣기 괴롭도다
네 소리 없었으면 내 시름도 없었으리니
세상에 근심 많은 분들께 이르노니
부디 춘삼월에는 자규루에 오르지 마오 - P84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놋다 둘이 사라 - P86

장릉 
숙종 24년에 단종이 복위되면서 무덤도 능으로 격상되어 ‘장릉‘이라는 묘호를 받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단종은 조선의 제6대 왕으로 당당히 종묘 영녕전에 위패가 모셔졌다. 단종 사후 250년 가까이 지나서야 과거사 문제를완전히 해결한 것이다. - P91

장판옥  
여기에는 단종에게 의를 지킨 충신을 비롯해 억울하게 죽은 여인과 노비에 이르기까지 268명의 이름이적혀 있다. 긴 널빤지에 이름을 새겨 모시고 있다고 하여 장판옥이라고 하며 해마다 한식날 배식단에서 제를 올린다. - P95

정조는 불의에 희생된 모든 분들에 대한 위로의 뜻을 이렇게 나타낸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국가유공자, 민주화운동 유공자를 매년 기리는제단을 설치한 것이니 이 장판옥과 배식단은 조선왕조가 무고하게 희생된 사람을 30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끝내는 찾아내어 기리고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들께는 사죄를 했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자랑스러운 유적이다. 정조의 경륜과 치세는 이처럼 존경스럽기만 하다. - P96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면 단종은 살아생전엔 애달프고도 슬픈 인생이었지만 혼백이 묻힌 유택만은 한을 풀고도 남음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단종의 장릉을 ‘영월 장릉‘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파주의 장릉(長陵, 인종의 능),  김포의 장릉(章陵,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추존 원종의 능과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 P96

정순왕후 사릉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는 죽어서도 단종 곁에 묻히지 못하고 남양주 사릉에 모셔져 있다. 사릉은조선 왕릉 중 가장 조촐하고 고즈넉하여 사람의 마음을 애잔하게 한다.
사릉 주변엔 해주 정씨 묘 12기가 있다. 본래 왕릉 주변엔 일반 묘역이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여기만큼은 예외이다. 그 사연은 장릉의 경우만큼이나 길다. - P97

자주동샘 
정순왕후는 비록 노비 신분이지만 백성들이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동대문 밖 숭인동에 있는 비구니 승인 정원에서 평생 단종을 그리며 세 시녀와 함께 살았다. 왕후는 염색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하는데 지금도 정업원터가 있는 숭인동 청룡사 옆에는 ‘자주동샘[紫芝洞泉]‘이라는 샘물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정순왕후가 여기서 빨래를 하면 자주색 물이 저절로 들었다고 한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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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선암 돌개구멍 
요선암의 강바닥은 화강암 너럭바위이기 때문에 돌개구멍이 유난히 만질만질하고 보는 위치에따라 다양한 모습을 연출하여 더욱 자연의 신비로움과 장엄함을 느끼게 한다. 요선암이 있는 주천강변 약 200미터구간의 강바닥은 천연기념물 제543호로 지정되어 있다. - P36

그 구멍이 지름 1미터 깊이 2미터가량 되고 생김새가 다양하다. 화강암에 자연스럽게 뚫린 이런 구멍을 지질학에서는 포트홀(pothole)이라고 한다. ‘둥근 항아리 모양의 구멍‘이라는 뜻일 텐데 순우리말로는
‘돌개구멍‘이라고 한다.
이런 돌개구멍은 하천의 상류지역에서 빠른 유속으로 실려온 자갈들이 강바닥의 오목한 암반에 들어가 물결의 소용돌이와 함께 회전하면서암반을 마모시켜 이루어진 형상이다. 얼마나 긴긴 세월 돌이 구르고 맴을 돌았다는 이야기인가. - P37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1970년대 유신독재 시절 많은 학생·노동자·지식인들이 민주화를 외치다 투옥되었다. 그 고난의 세월에 이들에게 큰 힘이 되어준 것은 무료변론을 맡아준 변호사들이었다. 이분들은메마른 세상의 소금 같은 희망이었다. 우리는 이분들을 인권변호사라고부르고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1988년에 이분들의 정신을 이어받은 변호사들이 결성한 것이다. - P39

적악산(치악산) 동북쪽에 있는 사자산은 수석(水石, 계곡이 30리에걸쳐 있으며, 주천강의 근원이 여기이다. 남쪽에 있는 도화동과 무릉동도 모두 계곡의 경치가 아주 훌륭하다. 복지(福地)라고 할 만하니 참으로  속세를 피해서 살 만한 땅이다. - P41

법흥사는 바로 그 사자산 턱밑에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사자산 법흥사라고 부른다. 법흥사가 등지고 있는 사자산은 영월 ·횡성·평창에 걸친험준한 산이다. 사자산이라는 이름은 법흥사가 창건될 때 불교를 수호하는 상징적 동물인 사자를 일컬어 바꾼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원래 전래되던 이름이 사재산(四財山)이었다는 전언도 있다. 네 가지 재화가 있다는 것인데, 이는 산삼 꿀 옻나무 흰 진흙이란다. - P41

법흥사의 옛 이름은 홍녕사(興寧寺)다.  이 흥녕사는 우리 불교사에서두 가지 기념비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는 자장율사가 모셔온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진신사리 4대 봉안처‘ 중 한 곳이라는 점이다. 나머지 세 곳은 양산 통도사, 태백산 정암사, 오대산 상원사다. 혹은설악산 봉정암까지 여기에 넣어 5대 봉안처라고 일컫기도 한다. 자장율사가 귀국한 것은 선덕여왕 12년(643) 이고 율사가 이 절을 창건할 때의이름이 흥녕사이다. - P42

또 하나의 의미는 누누이 말해왔듯 9세기 후반 하대신라의 구산선문중 하나라는 사실이다. 구산선문을 말할 때는 개창조와 법통이 중요한데 개창조는 징효대사(澄曉大師) 절중(折中, 826~900)이고 법통은 화순 쌍봉사의 철감(澈鑒國師) 도윤(道允 798-868)을 이어받았다. 그리고산문(山)의 이름은 사자산이라 했다. - P42

세상을 움직이는 주도적인 이데올로기가 불교에서 유교로 바뀐 것은 어쩔 수 없는 시류였다고 하겠지만 당시엔 문화재라는 개념이 없어 폐불정책이 결국 엄청난 문화재 파괴로 이어졌다는 것은 아픈 얘기다. - P43

그러나 이는 우리 역사만의 상처가 아니다. 일본은 19세기 메이지시대에 폐불훼석(廢佛毁釋)이라는 광란의 세월이 있어 엄청난 불교 문화재 파괴가 있었고, 오늘날에도 탈레반에 의한 불상 훼손과 이슬람 국가(IS)의 고대 신상 파괴를 볼 수 있으니 그저 무서운 것이 이데올로기일뿐이다. - P43

그런데 내가보기에 이것은 아주 잘못된 문화재 지정이다. 이런 경우는 승탑과 탑비를 일괄 유물로 지정하는 것이 옳다. 더욱이 승탑이 탑비와 함께유존한다는 사실은 문화재적 가치를 한층 높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장 시절 이처럼 잘못 지정된 것을 고쳐보려고 시도한 적이있었다. 그러나 이런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고 이걸 모두 정정하면 교과서 - 백과사전 · 지도 등을  모두 바꿔야 하는 사회적 경비가 만만치 않아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이는 언젠가는 사회적 합의하에 한번은 정정해야할 사항임에 틀림없으니 현명한 후손들이 나서서 해주기를 부탁한다. - P45

징효대사 승탑  
징효대사 승탑은 하대신라에 유행한 평범한 팔각당 형식으로 기단부 탑신부 · 상륜부로 이루어졌다. 네모난 지대석 위에 장구 모양의 기단부, 팔각당의 탑신과 지붕돌을모두 갖추고 있으며, 탑신에는 문짝과 자물통이 새겨져 있고 지붕돌의 모서리에는 귀꽃이 높이솟아 있다. - P46

징효대사 탑비  
높이 약 4미터로 제법 우뚝하고 돌거북 받침(귀부)의 조각을 보면 부릅뜬 두 눈과 여의주를 물고 있는 얼굴에 생동감이 있다. 용머리 지붕돌(이수)의 조각도정교하다. 무엇보다도 최언위가 짓고 최윤이 글씨를 쓴 비문의 금석학적 가치가 높아 보물 제612호로 지정되었다. - P47

법흥사 적멸보궁  
솔숲이 끝나면 사자산을 바짝 등에 진 번듯한 적멸보궁이 나타난다. 모든 적멸보궁은 불상을모시지 않고 뒤쪽에 있는 진신사리탑을 향해 열어둔다. 그러나 법흥사 적멸보궁 뒤에는 고려시대 석실분이 있다. - P49

법흥사 소나무길  
법흥사 적멸보궁으로 가는 길에는 준수하게 자란 키 큰 소나무들이 줄기마다 붉은빛을 발하며우리를 맞아준다. 그 길이 자그마치 300미터나 되니 발걸음이 상쾌하다. 오늘의 법흥사가 내세우는 가장 큰 자랑이며 법흥사에 올 때면 이 길을 걷게 된다는 기쁨과 기대가 있다. - P48

법흥사 적멸보궁 뒤편  
법흥사 적멸보궁 뒤쪽엔 마땅히 있어야 할 진신사리 장치는 보이지 않고 엉뚱하게 고려시대 석실분이 축대 위에 입구를 드러낸 채 자리잡고 있어 당황스럽다. 무언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다. - P50

그리고 900년(효공왕 4년), 스님의 나이 75세 되던 해 3월 9일 징효대사는 제자들을 불러놓고는 "삼계(三界)가 다 공(空)하고 모든 인연이 전부고요하도다. 내 장차 떠나려 하니, 너희들은 힘써 정진하라"고 당부하고는 앉은 채로 입적했다고 한다. 법랍 56년이었다. - P52

징효대사 탑비(오른쪽)와 비문 디테일(왼쪽)  
징효대사 탑비는 스님의 일생을 증언한다는 사실뿐 아니라 비문을쓴 이가 최언위라는 사실에서도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 비석을 말하면서 최언위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면 비석의 금석학적 가치를 반도 전하지 않는 셈이다. 징효대사의 탑비에 새겨진 비문은 이 절집의 인문적 가치를 밝히 드러내주고 있다. - P53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왼쪽),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오른쪽)  
최언위는 문장과 글씨 모두에서 당대 최고였다.
보령 성주사의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는 최치원이 문장을 짓고 최언위가 글씨를 쓴 것이다. 태자사의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는 최언위가 문장을 짓고 김생의 글씨를 집자하여 새긴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그의 문장과 글씨가 어떠했는지 알 만한 일이다. - P54

통일신라 말에 당나라 빈공과에 합격한 인물로는 최언위 이외에 최치원(崔致遠, 874년 합격)과 최승우(崔承祐, 893년 합격)가 있다. 이 세명의 최씨를 일찍이 일대삼최(一代三崔)라 했다. 최언위는 최치원의 사촌동생으로  전주 최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나말여초라는 혼란기를 거치면서 이 세 명의 최씨는 각기 운명을 달리했다. 최치원은 벼슬을 사직하고 각지를 떠돌다 해인사에 은거하여 신라인으로서 생을 마쳤다. 최언위는 왕건에게로 가 고려인이 되었고 최승우는 견훤 밑으로 들어가 후백제인이 되었다. - P54

팔공산 전투를 치르고 나서 국서를 교환할 당시 양쪽에서 이를 담당한이가 고려의 최언위와 후백제의 최승우였다니 일대삼최의 운명은 묘한것이었다. - P55

최언위는 문장과 글씨 모두에서 당대 최고였다. 구산선문의 하나인보령 성주사의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국보 8호)는 최치원이 문장을 짓고 최언위가 글씨를 쓴 것이다. 김생(金生)의 글씨를 집자한 것으로 유명한  태자사의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는 최언위가 문장을 지은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그의 문장과 글씨가 어떠했는지 알 만한 일이 아닌가. - P55

나는 최언위의 일생을 통해 통일신라가 왜 망했고 고려가 어떻게 새왕조를 세웠는가를 생각해본다. 통일신라는 끝내 골품제를 벗어나지 못했다. 당나라 과거에 급제한 지식인들을 여전히 6두품에 두어 아찬(阿飡) 이상  올라갈 수 없게 했다. 최치원이 제시한 ‘시무십조(時務士條)‘라는 개혁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득권을  갖고 있던 보수적인 귀족들이개혁은커녕 자신들의 보호막을 더욱더 두껍게 두르다가 종국엔 멸망의길로 들어갔던 것이다. - P55

이에 반해 고려는 달랐다. 고려는 이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지식인들을 기꺼이 받아들여 새 국가 건설의  브레인으로 삼았다.  신라에서 6두품에 지나지 않던  최언위가 고려왕조에 와서는 태자사부(太子師傅)를 거쳐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이것이 통일신라와 고려의  운명을 가른 것이었다. - P55

고승의 비문을 보면 거의 예외 없이 스님의 남다름을 말해주는 일화가 나오는데 이 비문 중에 징효대사가 도담선사에게 배움을 구할 때 주고받은 선문답 이야기는 참으로 오묘하다. - P56

어느 날 징효대사가 도담선사를 뵙고 배움을 구하고자 절을 올렸는데 처음 뵙는 분 같지가 않았다고 한다.  도담선사도 그러한 느낌이었는지 징효를 보면서  "이렇게 늦게야 상봉하니 그동안이 얼마나 되었는가?"
하고 물으니 징효는 앞에 있는 물병을 가리키며 "이 물병이 물병이 아닌때는 어떠했답니까?"라고 대답했단다. 이에 도담선사는 속으로 ‘어쭈, 제법이네‘라고 생각하고는 다시 수준을 높여 이렇게 물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절중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절이 아닌 때는 누구인가?"
이렇게 나오면 징효는 당황하여 대답을 잘 못할 줄 알았다. 그러나 징효는 당당히 받아넘겼다.
"절중이 아닌 때는 이와 같이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 P56

선문답이란 이처럼 대단히 매력적인 대화법이다. 그 속엔 철리를 꿰뚫는 인식론과 실천론이 다 들어 있다. 한번은 법흥사 답사를 마치고 영월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오르는데 답사에 처음 따라왔다는 한 중년 아주머니가 내게 특청이 있다고 했다. - P57

"법흥사 답사는 법흥사로 가는 길이 아름다울 뿐 절 자체는 그저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비문에 실려 있는 도담과 징효 스님이 주고받은 선문답을 듣고 보니 참으로 느끼는 바가 크네요.
우리 시아버지는 대화 중에 말이 안 통하면 ‘선문답하네‘라며 외면하곤 하셔서 저는 그저 선문답이라는 것이 엉뚱한 소리인 줄로 알았는데참으로 오묘하네요. 선생님, 가면서 이런 선문답 이야기 좀 더 해주실 수있으셔요?" - P57

"밖에 누가 왔느냐?"
"예, 아무개가 가르침을 구하고자 찾아왔습니다."
"일없다. 돌아가거라." - P58

"밖에 누가 왔느냐?"
"예, 스님께 배움을 구하고자 하는 제가 또 찾아왔습니다."
"밖에 눈이 오느냐?"
"예, 많이 옵니다."
"그러면 더 오기 전에 빨리 내려가거라. 길을 잃어버릴라." - P58

"밖에 누가 왔느냐?"
"예, 제가 또 왔습니다."
"밖에 눈이 오느냐?" - P58

"예, 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이 옵니다.
"길이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찾아왔느냐?"
"옛길을 더듬어 찾아왔습니다."
"그러면 이제 옛길을 버리면 되겠구나." - P59

이 마지막 말에 수도승은 문득 ‘옛길을 버리면 새길이 열린다‘는 깨달음을 얻어 "예, 잘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는 다시는 찾아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고전으로 들어가 새것으로 나온다는 입고출신(入古出新)의자세이다.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안다는 온고지신(溫故知新),  옛것을 본받아 새것을 만든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  옛것을 빌려와 현재 상황을 풀어낸다는 차고술금(借古述), 옛것을 가지고 현재를 지탱한다는 이고지금(以持), 그 모두가 비슷한 개념이지만 이 선문답은 개념적 언어가아니라 현재 처한 상황에 입각한 비유법을 통하여 그 깊은 뜻을 인식론이아니라 실천론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선문답의 묘미이다. - P59

관란정  
관란정은 생육신의 한 분인 원호가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자 이곳에 내려와 살며 충절을 지키다 세상을 떠난 곳에 세운정자다. 법흥사에서 영월로 가는 길목인 신천리라는 곳의 강 언덕에 있다.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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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原城, 오늘의 원주) 부곡 옛 고을 서쪽에
깎아 세운 듯한 높은 봉우리 우뚝 솟아 창연히 섰고
벼랑 아래는 물이 깊고 맑아 굽어보면 검푸른데
돌 술통이 부서져 강가에 가로놓였네
<강희맹> - P22

原城部曲古縣西
斷峯峡岘臨蒼然
崖下泓澄瞰黝碧
石槽破碎橫江坝 - P22

수주면에는 아름답고 호젓한 작은 강마을이 점점이 이어진다. 복숭아꽃이 만발하기만 한다면 무릉도원(武陵桃源)이 따로 없을 것 같은데 옛날에는 더 그랬는지  마을 이름에 무릉리도 있고 도원리도 있다. 어디엔가 유서 깊은 명소가 있음직한데 무릉리 강변 절벽에 요선정(亭)이라는 정자가 있어 우리를 부른다. 무릉이란 이상향의 상징이고 요선이란 ‘신선을 맞이한다‘는 뜻이니  이름만 보아도 그 풍광이 아름답다는 것을알 수 있지  않은가. 그리하여 남한강을 따라가는 나의 영월 답사는 이곳요선정을 첫 기착지로 삼게 된다. - P23

듣건대 주천에 두 누각이 있다던데
몇 번이나 수리하여 아직도 온전한가
높고 높은 석벽은 구름에 닿아 있고
맑고 맑은 강물은 푸르게 이어졌네
산새들은 나무 위에서 지저귀고
들꽃과 봄풀은 뜰아래 비치이네
술 지니고 누에 올라 아이 불러 따르게 하고
취하여 난간에 기대어 낮잠을 즐기누나 - P25

聞說雙樓在酒泉
幾經芎理尙能全
峨峨石壁靑雲接
漾漾澄江碧水連
山鳥好禽鳴樹上
野花春草映階前
携登官醞呼兒酌
醉倚欄干白日眠 - P25

이것이 숙종이 지은 「빙허 청허 양루시(淸兩樓詩)」 이다. 숙종은이 시를 직접 써서 당시 원주목사인 심정보(沈輔)에게 내려주며 청허루에 걸게 했다.  이것이 숙종의 어제어필시문(御製御筆) 현판이다. - P25

임금께서 주천에 글 내리신 것을 아직도 말하니
청허루는 이로부터 더 명승이 되었네
누각의 모습은 임금의 글씨와 더불어 빛나고
땅의 기운은 도리어 하늘에 닿았구나
백 리의 농사일은 달라진 것이 없고
봄날의 꽃과 새도 전처럼 여전하구나
이르노니, 지척에 근심이 있음을 분간하여
태수는 쉬면서 술에 취해 잠들지 말지어다 - P28

尙說黃封降酒泉
清虛從此勝名全
樓容重與雲章煥
地氣還應壁宿連
百里桑麻渾不改
一春花鳥摠依前
瞻言咫尺分憂在
太守休爲醉後眠 - P28

농무의 신경림 선생은 남한강의 시인이자 민요기행』의 시인이기도한데, 남한강을 따라 민초들의 서정을 찾아 나섰다가 이 마애불을 보고절로 일어나는 웃음을 참지 못해 그 천진난만함이 낳았을 만한 얘기를시적 상상력에 담아 이렇게 노래했다. 제목은 주천강가의 마애불-주천에서」이다. - P32

다들 잠이 든 한밤중이면
몸비틀어 바위에서 빠져나와
차디찬 강물에

손을 담가보기도 하고
뻘겋게 머리가 까뭉개져
앓는 소리를 내는 앞산을 보며
천년 긴 세월을 되씹기도 한다.

빼앗기지 않으려고 논밭들에
깊드리에 흘린 이들의 피는 아직 선명한데.
성큼성큼 주천 장터로 들어서서 보면
짓눌리고 밟히는 삶 속에서도
사람들은 숨가쁘게 사랑을 하고
들뜬 기쁨에 소리지르고
뒤엉켜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참으려도 절로 웃음이 나와
애들처럼 병신 걸음 곰배팔이 걸음으로 돌아오는 새벽별들은 점잖지 못하다.
하늘에 들어가 숨고
숨 헐떡이며 바위에 서둘러 들어가 끼여
앉은내 얼굴에서는
장난스러운 웃음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 P33

요선정 절벽 위의 소나무와 주천강 
마애불 바로 뒤에는 멋지게 자란 소나무가 마치 정성 들여 가꾼 정원수처럼벼랑 끝을 장식하고 있다. 소나무 너머로 비껴 보이는 주천강은 더더욱 아름답다. 거의 환상적이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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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월에 사재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중남미 소설들 위주로 16
.의지와 운명 1, 2
.영혼의 집 1, 2
.세피아빛 초상
.운명의 딸 1, 2
.콜레라시대의 사랑 1, 2
.채털리 부인의 연인 1, 2
.달려라 메로스
.어둠속의 사건
.연인
.태평양을 막는 제방
.깊은강

가을엔 책을 읽으라고 누가 말했는가

천고마비,
“‘하늘은 높아 푸르고 말이 살찔[天高馬肥(천고마비)]’ 때가 가장 두려워! 언제 흉노가 쳐들어올지 모르니까.”

어제, 아부지 산소 벌초를 했다.

벌초하면서 바라본 하늘은 아주아주 파랬다.

놀러가고 싶어지는 하늘이었다.

흉노가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고 날도 푸르고 좋으니 가을엔 책을 읽지 말고 놀러나 다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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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8-28 16: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우와 ! 대장정님이 포착 하신 하늘! 눈부신 햇살! 푸른 빛에 초록 초록!^^ 읽은 책은 쟁여두고 화창하게 개인 날은 놀멍 쉬멍 ੧ᐛ੭

대장정 2022-08-28 16:55   좋아요 3 | URL
완연한 가을날씨입니다. 파란하늘, 초록빛 산. 놀기에 최적인 날씨입니다만. 🏡 콕하고 있네요. 벌초 후유증. 삭신이 쑤십니다ㅠㅠ

Falstaff 2022-08-28 18: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사람들은 (아직) 모릅니다. 천부의 바람둥이 푸엔테스가 쓴 <의지와 운명>이 아옌데 버금가게 재미있다는 것을 말입죠.

대장정 2022-08-28 22:03   좋아요 2 | URL
재밌다니 빨리 읽고 싶어지네요. 감사합니다 ~~

기억의집 2022-08-28 19: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하늘이 너무 파래 찍었습니다~ 벌초 하셨군요!! 수고하셨습니다~

대장정 2022-08-28 22:05   좋아요 2 | URL
파란하늘이 밖으로 유혹하고 벌초 후유증으로 몸은 피곤하고. 힘든 하루였습니다. 감사합니다 ~~^^

거리의화가 2022-08-29 08: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벌초하고 오셨군요^^ 옆지기도 어제...ㅎㅎ 무척 힘들었다고 하네요. 요새 하늘도 구름도 이뻐서 넘 좋네요. 가을이 성큼 온 느낌입니다. 모아놓고보니 중남미 소설들이 이리도 많군요. 역시 안 읽어본 소설들만 잔뜩... 남은 8월 행복하게 보내시길^^*

대장정 2022-08-29 09:10   좋아요 2 | URL
0ㅇㅇ0저도 안 읽은게 태반이에요.~~벌초할때마다 나중에 내 묘는 아들놈이 깍아주기나 할라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딱 우리 세대까지 인거 같습니다. 행복한 가을 되세요~~^^ 🍂 🥮 🍃 🍂

mini74 2022-08-30 14: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늘 사진 진짜 👍전 콜레라시대의 사랑 넘 찌질하고 재미있었어요 ㅎㅎㅎ 좋은 책들을 잔뜩 사셔서 넘 행복하실듯 합니다 ~

대장정 2022-08-30 22:12   좋아요 1 | URL
찌질하고 재밌다. 왠지 빨리 읽어봐얄것 같네요. 좋은책과 구석진 방만 있으면 한없이 행복하죠 ㅎㅎ 감사합니다 ^^
 

동양화에서 산수화는 5세기 남북조시대 화가 종병이 늙어서 더이상 산에 오르기 힘들어지자 산수화를 그려놓고 누워서 보며 즐긴 데서 나왔다고 한다. 이를 누워서 노닌다고 하여 와유(臥遊)라고 한다.  나의 답사기가 꼭 현장에 가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파에 편하게 기대어독서하는 또 다른 와유가 되기를 바란다.
2015년 9월 유홍준 - P9

남한강의 수맥
국토를 인체에 비유하면 산맥은 뼈, 들판은 살, 강은 핏줄이다. 산과들은 국토의 골격을 이루고 강물은 대지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강은 언제나 그렇듯이 유유히 흐르면서 국토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며 흐르는강물은 여기에 살던 사람들의 애환을 침묵 속에 증언한다. 그리하여 강은 그 이름만 불러보아도 국토의 향기와 역사의 고동이 일어난다. 압록강·두만강·청천강·대동강 임진강·한강·금강·낙동강·섬진강.....…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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