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란정은 생육신의 한 분인 원호(元昊, 1397~1463) 가 살던 곳에 세운 정자다. 원호는 세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다 문종 때는 집현전직제학에 이르렀다. 그러다 단종이 폐위되자 병을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원주로 낙향해버렸다. 온당치 못한 쿠데타정권을 거부한 것이었다.그러다 단종이 청령포로 유배되자  생육신의 한 분인 조(趙旅, 1420~89)와 함께 단종을  찾아뵙고는 아예 이곳에 대를 쌓고 초가집을 지은 뒤  ‘관란‘이라 이름 지었다 - P60

관란이란 ‘물결을 본다‘는 뜻이다. 흐르는 물을 보면서 단종에게 충절을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지은 것이란다. - P61

간밤의 우던 여흘 슬피 우러 지내여다
이제야 생각하니 님이 우러 보내도다
져 물이 거스리 흐르고져 나도 우러 녜리라 - P61

영월 서강의 한반도 지형
  영월 옹정리에는 서강이 굽이지어 흐르면서 영락없는 한반도 지형을 그리며 돌아가는곳이 있다. 이곳 선암마을에는 넓은 주차장과 함께 산언덕에 전망대가 만들어져 관광객을 부르고 있다. - P63

관광만이 살길임을 알게 된 영월은 어떻게든 사람을 불러모으려고 안간힘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주천강 동강으로만 관광객이 몰렸을 뿐 서강의서면, 산골짝 하동면을 외지 사람들이 알 턱이 없었다. 이에 서면은 한반도면, 하동면은 김삿갓면이라고 바꾸어 관광객을 불러모으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영월은 영월사람들의 땅이기 이전에 대한민국의 국토이다. 그것은 애칭 또는 별칭으로 그쳤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관광 홍보 효과는 보았겠지만 국토의 이름을 이렇게 희화화한 바람에 잃어버린 국토의품위는 어떻게 회복한단 말인가. - P63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더 잘 알려진 난(蘭皐) 김병연(金炳淵, 1807~63)의 묘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불과 30년 전의 일로 영월의향토사학자인 고 박영국의 집념이 낳은 결실이었다. - P64

김삿갓 묘 산신각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더 잘 알려진 김병연의 묘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불과 30년 전의 일이다. 묘소 한쪽에 마을 산신각이 있어 산골의 처연한 분위기를 전해준다. - P66

김삿갓 묘 앞의 조형물들
  김삿갓 묘 앞에는 이런저런 조형물들이 어지럽게 배치되어 차라리 산신각 하나만 남아있었을 때가 더 품위 있고 유적지 같았다. - P67

그의 시는 풍자와 해학으로 너무도 유명하고 그 형식의 파격성과 내용의 민중성은 한국문학사에서 독특한 위상을 갖고 있다. 삐뚤어진 세상을 희롱하고 기성 권위에 도전하는 모습과 탈속한 면모에는 큰 박수를보내게 되며, 한글과 한자를 절묘하게 배합한 풍자시는 재미도 재미려니와 통쾌한 웃음을 선사하기도 한다. - P66

국문학에서 그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연암 박지원, 다산 정약용의 뒤를 잇는 사회시로 보는 견해 (주로 북한 학자들)이고또 하나는 희작(作)의 재주를 가진 것에 불과하다고 보거나 아예 김삿갓의 시란 그 시대 떠돌던 풍자시들의 집합으로 실체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의 방랑과 풍자와 해학이라는 것도 개인사적 부끄러움에 기인한것이었고 타락한 세상을 보기 싫어 가린 것뿐이었다고 평가절하하기도한다. - P67

是是非非非是是
是非非是非非是
是非非是是非非
是是非非是是非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함이 꼭옳은 것은 아니고
그른 것을 옳다 하고 옳은 것을 그르다 해도 옳지 않은 건 아닐세
그른 것을 옳다 하고 옳은 것을 그르다 함, 이것은 그르고 또 그른 것이고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함, 이것이 시비(是非) 일세 - P68

태화산에서 바라본 영월 
영월은 예나 지금이나 한적한 고을이다. 오죽했으면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민가와관가가 반반이고 누워서도 다스리는 곳이라고 했겠는가. 현대에 와서도 영월은 여전히 인구 4만의 한적한 곳이다. - P70

오늘날 영월의 명소로는 천연기념물 제219호인 고씨동굴을 꼽고 있고 자랑이라면 소고기가 유명하여 읍내에 한우마을, 한우센터가 있다는것과 영월교도소가 전국의 교정(正) 시설 중 가장 우수한 곳으로 손꼽힌다는 사실 정도다. 박중훈과 안성기가 출연한 영화 「라디오 스타」의무대인 한적한 고을이 바로 영월이다.
이런 영월이 단 한 번 세상을 시끄럽게 하며 역사상 크게 부각된 적이있다. 단종이 청령포에 유배되고 끝내는 여기서 죽음을 맞은 조선왕조초기 엄청난 정치적 사건의 현장이 되었을 때이다. - P70

수양대군의 권력욕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왕위를 찬탈하는 데에 걸림돌이 되는 아우들을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했다. 강화도로 귀양 보낸 안평대군에게 사형을 내리고, 막내동생 금성대군은 경기도 연천으로 유배보냈다. 그리고 1455년 6월에는 드디어 단종을 상왕(上王)으로 물러나게 하고 왕위에 올랐다. - P71

 청령포
  청령포는 영월읍내 서쪽 서강 건너편의 울창한 솔밭이다. 삼면으로 깊은 강물이 맴돌아가고 서쪽으로는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다. 형상은 반도 모양이지만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는 육지 속의 섬이다. - P72

단종어소
  오늘날 청령포에는 단종이 유배 살던 기와집과 하인이 기거하던 초가집이 복원되어 있다. 이는 2000년 4월 단종문화제 때 세운 것이고 원래의 집은 단종 사후 더 이상 사람 사는 일이 없어 이내 무너져버렸다. - P74

관음송
  단종이 유배 살던 집 가까이에는 준수한 관음송이 있다. 수령 600년에 키가 30미터로 우리나라에서 가장큰 키를 자랑한다. 전하기로는 단종이 유배 온 것을 보고 오열하는 소리를 들은 소나무라고 해서 볼 관(觀) 자, 소리 음자 관음송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 P77

노산대에서 바라본 서강 풍경
  노산대는 청령포에서 가장 높은 절벽으로 서강이 동강과 만나기 위해 치달리는 모습이 아련히 펼쳐진다. 굽이굽이 맴돌아 나아가는 우리나라 특유의 강변 풍광은 여기서 바라보는 서강이 제격이다. - P78

망향탑(왼쪽)과 금표(오른쪽)
 망향탑은 단종이 강물을 바라보며 쌓은 것으로 전한다. 금표비에는 ‘동서로 300척 남북으로 490척과, 이후에 진흙이 쌓여 생기는 곳도 출입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 P79

관풍헌
 단종이 유배 온 지 두 달 지났을 때 남한강에 큰 홍수가 일어나 청령포가 물에 잠기게 되자 단종은 급히영월 관아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거소를 옮겼다. 지금 영월읍내에는 동헌을 비롯한 옛 관청 건물들은 다 없어졌고 시내 한가운데에 이 객사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 P80

자규. 두견이 · 접동새 • 소쩍새
단종이 읊은 자규(子規)라는 새는 그 울음소리가  너무도 처연하여 예부터 많은 시를 낳았다. 특히 이조년(李兆年)의 시조 절창으로 꼽힌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 제
일지 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 P82

자규는 불여귀(不如歸)·귀촉도(歸蜀道) 등 여러별칭이  있고 두견(鵑)이, 접동새라고도 한다. 불여귀와 귀촉도는 촉(蜀)나라 망제(望帝)가하루아침에 나라를  빼앗기고 쫓겨나 그 원통함을 참을 수 없어 죽어서자규라는 새가 되어 밤마다 ‘불여귀(不如歸, 돌아갈 수  없네)‘를 부르짖으며 목구멍에서 피가 나도록  울었다는 고사에서 나왔다.
그런데 이 두견이는 소쩍새와 자주 혼동되어왔다. 두견이는 뻐꾸깃과에 속하고 소쩍새는 올빼밋과에 속한다. 두견이는 주행성이고 소쩍새는야행성이다. 두견이는 주로 낮에 울고 소쩍새는 밤에만 운다. - P82

두견이의 울음소리는 느린 2박자와 빠른 4박자가 연이어지면서 ‘딴딴따다다다‘로 들린다. 전설에 의하면 이 새소리는 쌀 됫박이 작아 항시 밥이 모자라 굶주려 죽은 며느리가 원조(怨鳥)가 되어 시어머니에게  ‘쪽박바꿔주오‘ 또는 ‘됫박 바꿔주오‘라며 우는 것이라고 한다. 옛날엔 삼시세끼 먹고 산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이 새소리의 설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 P83

달 밝은 밤 소쩍새 울음소리는 더욱 구슬퍼
시름 못 잊어 누 머리에 기대었노라
네 울음 슬프니 내 듣기 괴롭도다
네 소리 없었으면 내 시름도 없었으리니
세상에 근심 많은 분들께 이르노니
부디 춘삼월에는 자규루에 오르지 마오 - P84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놋다 둘이 사라 - P86

장릉 
숙종 24년에 단종이 복위되면서 무덤도 능으로 격상되어 ‘장릉‘이라는 묘호를 받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단종은 조선의 제6대 왕으로 당당히 종묘 영녕전에 위패가 모셔졌다. 단종 사후 250년 가까이 지나서야 과거사 문제를완전히 해결한 것이다. - P91

장판옥  
여기에는 단종에게 의를 지킨 충신을 비롯해 억울하게 죽은 여인과 노비에 이르기까지 268명의 이름이적혀 있다. 긴 널빤지에 이름을 새겨 모시고 있다고 하여 장판옥이라고 하며 해마다 한식날 배식단에서 제를 올린다. - P95

정조는 불의에 희생된 모든 분들에 대한 위로의 뜻을 이렇게 나타낸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국가유공자, 민주화운동 유공자를 매년 기리는제단을 설치한 것이니 이 장판옥과 배식단은 조선왕조가 무고하게 희생된 사람을 30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끝내는 찾아내어 기리고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들께는 사죄를 했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자랑스러운 유적이다. 정조의 경륜과 치세는 이처럼 존경스럽기만 하다. - P96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면 단종은 살아생전엔 애달프고도 슬픈 인생이었지만 혼백이 묻힌 유택만은 한을 풀고도 남음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단종의 장릉을 ‘영월 장릉‘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파주의 장릉(長陵, 인종의 능),  김포의 장릉(章陵,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추존 원종의 능과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 P96

정순왕후 사릉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는 죽어서도 단종 곁에 묻히지 못하고 남양주 사릉에 모셔져 있다. 사릉은조선 왕릉 중 가장 조촐하고 고즈넉하여 사람의 마음을 애잔하게 한다.
사릉 주변엔 해주 정씨 묘 12기가 있다. 본래 왕릉 주변엔 일반 묘역이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여기만큼은 예외이다. 그 사연은 장릉의 경우만큼이나 길다. - P97

자주동샘 
정순왕후는 비록 노비 신분이지만 백성들이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동대문 밖 숭인동에 있는 비구니 승인 정원에서 평생 단종을 그리며 세 시녀와 함께 살았다. 왕후는 염색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하는데 지금도 정업원터가 있는 숭인동 청룡사 옆에는 ‘자주동샘[紫芝洞泉]‘이라는 샘물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정순왕후가 여기서 빨래를 하면 자주색 물이 저절로 들었다고 한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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