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스 카잔차키스를 품고그리스를 가다!"

인간의 탁월함, 그 근원을 찾아서
문명의 배꼽 그리스

그런 까닭에 이 여행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인도 없이는 불가능한일이었습니다. 하여 구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가 쓴 거의 모든 저작들을 구하여, 읽고 또 읽었습니다. 영국의 문예비평가 콜린 윌슨이 그를두고, "이름이 ‘카잔초프스키‘였고, 러시아어로 작품을 썼더라면 그는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을 것"이라 했을 만큼 대단한 문학가였던 그의 소설들은 물론 여행기와 자서전 그리고 지인들과 주고받은 편지에 이르기까지 그의 생각을 좇을 수 있는것이라면 모조리 읽었습니다.  - P6

어찌 보면 이 모든 것이 그리스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그리스의 참모습은 아닐 테지요. 니코스는 "그리스의 얼굴은 열두번씩이나 글씨를 써넣었다 지워버린 팰림프세스트이다." "라고 표현합니다. 쓰인 글자를 지우고 그 위에 다시 쓰게 되어 있는 양피지인 팰림프세스트처럼 열두 가지의 서로 다른 색깔을 가진 나라 그리스의 속살은 도통 한눈에 파악하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신화나 철학,
정치나 사회, 문학과 예술이라는 하나의 틀로만 바라본다면 그리스의참모습을 찾을 길이 묘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 P7

한 권의 책은 저자 한 사람이 쓴 것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 책을쓰기까지 그 저자가 밑줄 그으며 읽었던 모든 책과 깨우침을 준 모든스승들이 함께 쓴 것일 터, 다시 한 번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있을 오류는 모두 저자의 몫임을 밝힌다. - P10

평생 동안 내가 간직했던 가장 큰 욕망들가운데 하나는 여행이어서-미지의 나라들을 보고 만지며, 미지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지구를 돌면서 새로운 땅과 바다와 사람들을 보고굶주린 듯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모든 사물을 보고, 천천히 오랫동안 시선을 던진 다음에 눈을 감고는 그 풍요함이 저마다 조용히, 아니면 태풍처럼 내 마음속에서 침전하다가 마침내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고운체로 걸러지게 하고, 모든 기쁨과 슬픔으로부터 본체를 짜내고 싶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 순례>, <영혼의 자서전> 중에서 - P15

이번 여행을 하면서는 일정을 따로 정하지 않았다. 지도 한 장 달랑들고 비행기와 배로 대륙을 건너고 국경을 넘었다. 철도와 버스, 렌터카와 바이크 그리고 도보로 무수한 경계를 넘고 또 다른 경계에 다다르기도 했다. 해 뜨면 떠나고 해 저물면 머무는 ‘노마드‘ 처럼 동가식서가날들을 보냈다. 더러는 낡은 호텔에 묵고 또 더러는 유스호스텔이나 게스트하우스에 묵으면서 향토사학자나 현지 주민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그리스 구석구석을 파고 들어가 그리스의 참모습에 한 발짝씩 다가가려 했다. 그런 방랑자에게 매끼를 챙기는 것은 사치일지도 모른다. 그런 까닭에 종종 한 끼 식사에도 감사하며 길을 재촉한 꽤 치열한 여행이었다. - P16

즉물궁리卽物窮理
곧 사물에 나아가 그 이치를 궁구해야 한다는 가르침 - P16

그리하여 책과 논문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삼되, 직접 찾아가 그곳 시간의 무덤에서 들려오는 옛 영웅들의 웅변과 민초들의 함성을 만나고자 했다. 이미 무너진 신전의 잔해를 직접 쓰다듬으며 무너지지 않은 문명의 기둥을 확인하고자 했다. 더디고고될지라도 이렇게현장으로 나아가야만 비로소 내가 만나고자 한 문명과 역사를 온전히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또한 그렇게 이해한 그리스를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 싶었다. - P17

그 공간 여행의 출발지를 펠로폰네소스로 정했다. 바로 이곳 펠로폰네소스가 그리스 문명의 어머니이자 서구 문명의 자궁이기 때문이다. - P18

그런 까닭에 ‘그리스‘라는 미궁의 출발점은 펠로폰네소스여야 했다. - P18

더불어 펠로폰네소스는 헬레네의 고향이다. 아시다시피 헬레네는사상 최초의 팜므파탈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여인이다. 바다 건너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와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인 스파르타의 왕비,
오직 그녀를 되찾기 위해 그녀의 남편 메넬라오스와 시숙 아가멤논은전 그리스의 영웅호걸을 불러 모아 피의 응징에 나선다. 무참한 죽음과 엄청난 피바람을 무릅쓴 끝에 메넬라오스는 스파르타의 왕비를 되찾지만, 그녀의 목을 베기는커녕 다시 품에 안고 만다. 헬레네는 마치영웅처럼 귀환했고, 훗날 스파르타에서 여신으로 거듭난다. - P18

바로 그리스, 혹은 그리스인들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마른 스펀지처럼엄청난 수용성을 자랑한다. 숱한 이민족의 침략을 받고 그들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어느새 침략자들을 그리스인으로 만들어버린다. 멋있다고 느끼면 페르시아의 신이건 이집트의 신이건 가리지 않고 올림포스산정에 함께 모시고 경배한다. 심지어 기독교가 그들의 신앙을 완전히대체한 후에도 그 신들의 이름을 살짝 바꾸어 곳곳의 교회에 수호성인으로 삼기까지 한다. - P19

"하느님의 가호가 우리와 함께하시길! 자, 갑시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조르바>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25쪽 - P19

내 삶을 선택할 권리는 나에게 있다

‘탕!‘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의회 앞 신타그마 광장 쪽이었다.
시위대가 운집해 있던 그곳에서 은퇴한 약사가자신의 머리에 권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평생 약사로 일하다가 은퇴 후 연금으로 생활하던 이 노인은
정부의 연금 삭감에 죽음으로 저항한 것이다.
그가 남긴 유서는 다음날 그리스 사회 전체를 술렁이게 했다.
"나는 조국을 믿고 성실하게 일하며 연금을 납부했다.
하지만 조국은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내게 이런 조국을 선택할 권리는 없다.
하지만 내 삶을 선택할 권리는 나에게 있다!"
아테네에 도착하여 공항버스에서 막 짐을 내리려는 순간,
아테네 민주주의의 심장인 신타그마 광장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스는 지중해의 태양 같은 뜨거운 격정과 말라비틀어진 마른풀 같은 무기력이 공존하고, 처음 만난 여행자를 집으로 들여 재워주는 인류애적인 친절과 백주대낮에 불법체류자를 둘러싸고 돌을 던지는 야만이 공존한다. 더구나 이곳은 한때 유럽 최고의 깍쟁이라 불리던 사람들의 후예가 사는 코린토스가 아닌가! - P26

코린토스
번영의 땅이자 약탈의 땅을 가다 - P27

"오래된 조상 아가멤논에서 모레아의 위대한 애국자에 이르기까지고통받는 모레아(모레아는 펠로폰네소스를 가리키는 옛말이다)‘는 재앙과 영광의 충격을 동시에 견디어왔다네. 그러니 그리스 속으로 떠나는 여행은언제나 오래된 어머니인 펠로폰네소스로부터 시작되어야 마땅하지 않겠나. 여기가 바로 그 굶주리고 피에 물든 문명의 뿌리라네." —1 - P28

그러니 이 길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영원한 주제였던 ‘금기를 넘어서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과 신과 어깨를 겨루던 당대의 영웅조차도결국에는 인간의 약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신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는
‘나약한 인간의 실제‘에 대한 내러티브가 담긴 비디오 가이드인 셈이다 - P29

코린토스의 첫인상
생기 없는 얼굴과 마주하다
우리는 코린토스 시청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내렸다. 코린토스에 대한 첫인상은 활력을 잃은 ‘주름‘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그 주름은 땡볕에 그을린 농부의 그것도, 우아하고 기품 있는 노신사의 그것도 아니었다. 거리는 누추했고 상가도 쇠락했다. 그리스에서 손에 꼽히는 인구와 그 이름에 걸맞은 관광도시라는 느낌은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웠다. - P31

결국 손짓 발짓을 동원한 희안한 보디랭귀지와 구글 번역기까지 총동원된 끝에 게츠 한 대를 하루 20유로에 빌릴 수 있었다.
‘신이여 우리를 보호하소서!‘
실로 멋진 가격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9월에서 4월까지의 비수기에그리스를 여행한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 P33

그리스는 어떤 일이든 ‘되는 것도 없지만 안 되는 것도 없는곳‘이라 한다. 그리스의 이런 특징을 모르고 이 나라를 방문하면 대개
‘그리스에는 그리스가 없다‘라거나 ‘돌멩이만 보고 왔다‘ 라는 등 불평가득한 후기만 쏟아내기 십상이다. - P34

어쨌든 내가 빌린 차는 유럽인의 체형에 맞춘 액셀러레이터 유격이하데스의 지하 동굴만큼이나 멀었고, 오랜만에 만져본 수동 기어는 연신 딸꾹질을 하며 쉽게 고삐를 내주지 않았다. 나중에 이 문제로 300유로를 배상하라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받긴 했지만 그래도 바퀴는 굴러갔고, 교차로마다 시동을 꺼트리기를 몇 차례 반복한 끝에 구코린토스(코린토스는 코린토스와 1858년 대지진 이후 다시 건설한 신코린토스로나뉜다)의 유적지 인근에 도착할 수 있었다. - P35

"여기에 올 때마다 나는 레온 스구로스의 섬뜩한 광기가 느껴진다.
네."
"나프폴리오의 영주 레온 스구로스 말인가요?"
내가 되물었다.
"바로 그 레온 스구로스 말일세. 저기 저 성채의 남쪽 벽에서 자신의애마를 탄 채로 뛰어내렸지."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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