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를 차며 돌아서는 한주를 보며 은기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사실 은기의 이야기는 절반이 거짓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에게 진실을 말할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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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야, 모르는 소리 하지 마. 이건 책테크야 책테크. 내가 구한 ‘사드’ 컬렉션이 얼마에 팔릴 것 같아? 부르는 게 값인 거야. 돈 벌어왔다고 칭찬을 해줘야지." 

은기는 자랑스레 어깨를 으쓱 올렸다.

"에휴, 나는 모르겠다. 얼른 저녁 먹고 애나 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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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기적이야, 기적!"

한주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참 나. 그 돈으로 치킨을 사왔어 봐. 당신 딸이 맛있게 뜯어나 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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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미쳤냐, 내가? 용돈은 쥐꼬리만큼 받는데 그럴 돈이 어디 있다고. 다 이 몸의 피나는 검색질과 끈질긴 집념이 결실을 맺은 거지. 오늘 인천에 출장 나갔는데 시간이 좀 남더라고. 그래서 배다리 헌책방 골목에 가봤지. 자기도 알잖아, 드라마 〈도깨비〉에 나왔던 데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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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보 도시미치는 억울하다. 천신만고 끝에 근대 일본의 초석을 놓은 건 그였지만, 살아생전에는 ‘사무라이의 배신자‘로, 죽어서는 ‘냉혈한 독재자‘로 비난받았기때문이다. 역사드라마나 역사소설에서도 그는 거의 주인공이 돼본 적이 없다. 일을 많이 한 정치가는 인정은받을지언정 사랑받지는 못하는 것인가. 
이 책에서는 ‘로망‘은 없었지만 근대 일본의 허드렛일을 마다하지않은 그의 역사적 위치를 정당하게 조명했다. - P234

정충조를 기반으로 다진 정치적 입지
오쿠보 도시미치는 1830년 사쓰마번 가고시마 시모가미야초에서 하급 무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2년 전 사이고가 태어났던 그 동네다. 유신삼걸 중 한 명으로 사이고 같은 로망은 없는, ‘피도 눈물도 없는 철혈재상‘이었지만, 근대 일본의 인프라는 거의 그의 손에 이뤄졌다. ‘근대 일본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무릇 피눈물나게 일하는 아버지에게 로망을 기대하기는 힘든 법이다. - P235

역시 이름이 어렵다. 나도 학생 때는 그냥 대구보리통久保利通이라고 외웠다. ‘대구보‘까지가 성이고, ‘리통‘이  이름이다. 구보 앞에 작을 소자를 붙여 고쿠보라는 성도 있다. - P235

회의는 지력, 담력, 그리고 순간적으로 회의를 장악하는전광석화 같은 말솜씨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회의에서는 순간의 판단과 순간의 제압이 중요한데 오쿠보는그걸 유독 잘한 사람이다. 그런데 회의장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훈수만 두고 있으니 아마도 퍽답답하고 초조했을 것이다.  - P247

그러나 어쨌든 이와쿠라가 오쿠보를 대신해분발하여 ‘왕정복고 대호령‘을 공포하고 신정부를 세우는데 성공했다. 신정부는 천황 밑에 총재, 의정, 참여직이 설치되어 앞의 두 자리에는 황족과 공경, 대명들이, 그리고 참여에는 각 번의 지도자급 사무라이들이 임명되었다. 사이고와 오쿠보도 이에 취임했다. 변방 가고시마의 두 하급 사무라이는 어느덧 신정부의 핵심인물이 되었다. - P247

일본에는 ‘혁명‘이 없다
쿠데타 세력은 ‘유신‘을 표방했다. 유신은 『서경』에서 유래한 말로 세상을 일신한다는 의미다. 주나라가 은나라를 타도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을 때 이를 ‘유신‘이라고칭했다. 우리에게는 박정희의 ‘10월 유신‘으로 익숙한 말이다. 메이지유신 당시에는 ‘일신‘과 ‘유신‘이라는 말이 경쟁하다 유신으로 정착되었다. 700 년간 계속된 사무라이지배를 무너뜨리고 신분제를 혁파하고 서양화를 추구했으니 혁명이라고도 할 만한데, 일본인들은 지금까지도 ‘일본혁명‘ 혹은 ‘메이지 혁명‘이라 하지 않고 유신이라고만 한다. 왜 그럴까? - P248

혁명은 원래 ‘역성혁명易姓革命‘의 준말로 왕조를 교체한다는 뜻이다. 군주가 덕이 부족하여 세상을  제대로 다스리지못할 때에는 천명이 그 왕조를 떠나 다른 가문으로 옮긴다는 천명사상이다. 임금의 성을 바꾸는 변혁, 즉 신라 김씨에서 고려 왕씨로, 고려 왕씨에서 조선 이씨로 천명이 옮겨가는 것이다. 무시무시한 사상이다. 이게 혁명이다. - P248

메이지유신 역시 막부는 쓰러뜨렸지만 무너진것은 도쿠가와씨지 천황 가문은 아니다. 무너지기는커녕유신으로 천황에게 대권이 다시 돌아왔다. 이러니 혁명이란 말을 쓸 수가 없다(흥미롭게도 일본인 학자 중에도 영어로는 ‘Meiji Revolution‘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참고로 메이지明治는 『역경』, 즉 『주역』에서 따온 말이다. 이처럼 일본인들은 선민의식, 일본주의, 천황주의를 강조하면서도 정작연호는 모두 중국 고전에서 가져온다. 쇼와昭和는 『서경』, 헤이세이平成는  『사기』에서 취한 말이다. 2019년 즉위한 천황의 연호 레이와令和는 처음으로 일본 고전인 『만요슈』 에서 따왔다고 해서 화제가 된 바 있다. - P249

여담이지만 천황에겐 성이 없다. 히로히토, 아키히토,
그리고 지금 천황은 나루히토로 이름만 있다. 그러니 사실 역성易姓할래야 할 수도 없다. 
우리는 김수로왕, 고주몽 등아무리 왕이라도 성이 있다.  물론 천황 빼놓고 나머지 백성에게는 모두 성이 있다. - P249

청은 대만이 중국의 판이라도이기는 하나 생번은 교화 바깥에 있는 백성들서 청이 책임질 일이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 P271

지독한 현실주의자의 리더십
오쿠보는 자신의 노선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지만, 옛 사무라이 동료들에게는 사무라이 계층과 무사도와 사쓰마번을 배신한 자였다. 사이고의 죽음과 대비되어 사무라이들의 그에 대한 원한은 높아만 갔다. 결국 1878년 5월 14일, 그는 출근길에 아카사카에서 사무라이 출신  일당들에게 습격을 받아 죽었다. 사이고가 죽은 지 8개월이 채 안 된 때였다. 마차를 타고 내무성에 출근하는 길이었다. 48세 때였다. 그 마차는 지금도 남아 있다. - P279

그래서 오쿠보가 출근할 때 내무성에 그의 발자국 소리가들리면 벌써 모든 사람이 그 소리에 압도되었다는 일화가전해진다. 반대로 그가 죽은 후 새로 집권한 이토 히로부미의 발자국 소리는 그에 비하면 딸깍딸깍 경망스러웠다는이야기가 있다. - P281

살아생전 오쿠보 도시미치의 좌우명은 ‘위정청명爲政淸明, 견인불발堅忍不拔‘이었다. 
‘위정청명‘은 맑고 깨끗한 정치를 지향한다는 뜻이고, ‘견인불발‘은 굳게 참고 견디어 마음을빼앗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쿠보사후재산을봤더니 온통 빚투성이여서 지인들이 유족을 위해 모금을 할 정도였다. 돈에는 깨끗했던 모양이다. - P281

개발을 하고 있던 프로이센이 적격이라고 생각해서 그곳을 모델로 정한 것이다. 후계자 이토는 이를 계승해 프로이센식 헌법을 만들었다.
또 오쿠보의 노선은 개방주의였다. 쇄국은 멸망의 길이라 생각했다. ‘서양을 배워 그보다 강한 일본을!‘이것이 오쿠보가 내걸었던 국가 슬로건이다. 150여년전 그가 새로운 일본을 만들고자 내건 이 슬로건은 지금의 일본에게, 혹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아니면 이미 실효를상실한 것일까.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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