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 어느 젊은 시인의 야구 관람기
서효인 지음 / 다산책방 / 2011년 10월
평점 :
얼마 전에 김응룡 감독이 승승장구에 나왔다. 여러가지 재미난 이야기를 해줬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이거다.
"투수는 선동렬, 타자는 이승엽, 야구는 이종범!"
오호라~ 몰래온 손님으로 나온 이종범 선수, 이 얘기 처음 들었을때 정말 감격했다며 가슴에 손을 대는 모습도 봤다. 얼마나 좋았을까. "야구 하면 이종범!" 이라는데. 그것도 칭찬에 인색하기로 유명한 김응룡 감독님 입에서 나온 얘기니! (내 가슴이 다 설렌다.)
나는 여기에 하나 덧붙여야겠다.
"야구 이야기, 하면 서효인!"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읽기 전엔 몰랐다. 내가 이 책에 이렇게 푹 빠져들줄이야(띄어쓰기 어렵다. 빠져 들 줄이야? 빠져들 줄이야? 빠져 들 줄 이야..ㅡ.ㅡ;;).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앞으로 야구 얘기 하면 서효인! 이다. 서효인과 다른 스타일로 쓸 사람은 있을 수 있을지 몰라도 서효인 보다 잘 쓸 사람은 보기 어렵다고 본다. 서효인 최고!
야구란
말랑말랑한 테니스공으로 야구를 했다. 야구는 죽지 않아야 하는 게임이다. 타석에서 죽지 않고 살아나가, 날것 그대로의 심장으로 다이아몬드를 모두 돌아야 한다. 그리고 오디세우스처럼 당당하게 귀환해야한다. 그렇게 살아와야 겨우 1점이다. 1점으로 이길 수도 질 수도 있으니, 야구는 생명을 중시하는 게임인 동시에 생명을 겁박하는 게임이다.(39p.)
파울이란
도대체 언제 끝날 것인가? 언제까지 칠 것인가?
두 번까지는 스트라이크 카운트라는 벌칙을 받고, 세 번부터는 무한대로 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는 이상한 규칙, 야구에서의 파울은 기회의 영속성을 의미한다. 대부분 방망이에 제대로 맞히지 못한 타구이지만, 그것이 규격 바깥으로 나가버렸으므로, 타자는 한 번만 더, 다시 한 번 기회를 갖는다. 당신이 살거나, 죽을 떄까지.
살면서 결정적 기회는 단 세 번 온다고 했던가. 아님 사나이는 딱 세 번 울어야 한다고 했던가. 재수는 해도 삼수는 하지 말라고 했던가. 가위바위보는 삼세판이라고 했던가. 무엇이든 세 번은 너무 적다. 우리는 분명히 훈련 받은 대로, 혹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쳤고, 운이 좋지 않았는지 아님 신이 외면했는지 제대로 치지는 못했다. 하지만 잡히지도 않았잖아?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말자.
저번 달 당신의 이력서는 종이 쓰레기로 버려졌다.
오랫동안 준비한 시험에 몇 문제 차이로 떨어졌다.
밤을 새고 코피를 쏟았건만 학점이 나오지 않았다.
내 모든 걸 다 줬는데 그녀가 냉정하게 떠나갔다.
타석에서 잠깐 벗어나 심호흡을 하자. 어깨도 펴고, 발로 방망이를 툭툭 치자. 타석의 흙도 다시 한번 고르자. 아직까진 파울이니까 괜찮아. 자포자기로 허리를 숙여 스리번트 대지 말고.
가운데로 들어오는 공은 끝내 가만두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을 갖자. 파울은 그 마음가짐이 만들어낸 또 다른 기회다. 우리의 시간은 아직 마지막이라는 글러브에 들어가지 않았다.
"당신도 나도 아직 죽지 않았어. 그러니까 힘내"
이런 말을 줄여서 '파울'이라고 부르기로 한다.(56~58p.)
야구장에서는
야구장에서는 하늘을 자주 봐야 한다. 야구 경기의 백미인 홈런은 아름답고 늠름한 포물선을 그리며 하늘 저 멀리 날아간다. 그런 이유로 관중들은 공이 높게 뜨기만 해도 곧잘 소리를 지르곤 한다. 그것이 평범한 우익수 플라이라 해도, 함성 뒤의 아쉬운 탄식까지 하늘 위로 함께 날아가는 것이다. 낮경기의 파란 하늘과 밤경기의 까만 하늘, 그 사이를 날아가는 하얀 공의 율동과 함성과 탄식이 뒤섞인 약간은 쓸쓸한 장관. 야구장만이 선사할 수 있는 그림이다. (95p.)
본헤드bonehead
본헤드는 '얼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반복된 훈련 속에 기량이 완성형에 이른 선수들이 펼치는 게임이 프로야구다. 그들은 플레이에 따라 돈을 받는 직업선수다. 지금도 우리나라 곳곳에서 운동신경 좀 있다는 어린이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던지고 받고 때리고 달리는 연습을 거듭한다. 그들 중에서 고르고 골라서 고른 후에 또 고른 남자들이 이 경기장의 남자들이다.
그런 남자들이 벌이는 어처구니없는 플레이, 이를 본헤드 플레이라고 한다.
본헤드 플레이어는 평소 그가 얼마나 스마트한 사람이었든지 말든지 아랑곳 없이, 그 순간 가장 멍청한 사내로 만든다. 재앙 같은 분위기를 팀에게 남긴다. 그는 사건의 현장에 서서 방금 자기가 왜 그래는지, 누구도 답해주지 않을 의문을 던진다.
'내가 왜 그랬지......' (108p.)
드래프트 되는 청춘들
드래프트draft는 ‘원고의 초안’, ‘은행이 발행한 수표’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신인선수를 선발하는 호텔에서의 장면을 먼저 떠올린다. 스포츠에서 드래프트는 프로 구단이 신인선수를 뽑는 절차이다. (124p.)
E
지방 고등학교 3학년인 E는 전국대회에서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같은 지역의 라이벌에게 이상하게 한두 점 차로 지는 바람에 지역예선을 통과하지 못한 대회가 많았다. 전국구 대회에서는 초반에 예선 탈락했다. E는 소식을 기다린다. 그의 이름이 불릴까. 부모님은 모두 일을 나가셨고, 집에는 E 혼자다. 최소한 부모에게 E는 야구천재다. E는 결국 혼자다.
E는 대체로 그렇다. 그는 발도 빠르고 어깨도 좋다. 직구는 누구보다 잘 때린다. 장타력은 없지만 짧은 안타는 잘 만들어낸다. 도루 능력도 있고, 번트도 잘 댄다. 부모님의 기대가 크다. 그런데, 그런 선수는, 프로에 너무나 많고, 게다가 그는 체격이 왜소하다. 감독님은 어느 팀의 스카우터가 잘 아는 후배라고 했다. 한번 부탁해보겠노라고 내려 앉은 표정으로 말했다. 경기가 끝난 후, E의 유니폼은 항상 더럽다. E는 프로 유니폼을 입고, 흙이 묻은 벨트를 터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쉽지는 않을 것이다. E와 비슷한 능력의 사람은 세상에 너무나 많다고들 한다.
드래프트에서 선발되지 못한 선수들은 쓸쓸하게
집으로, 학교로, 훈련장으로 돌아간다.
매년 7,8백 명이 쏟아져 나오는 드래프트에서,
직업선수가 되는 젊은이는 7,8십 명에 불과하다.
그중 절반 이상은 몇 시즌 못 버티고 방출된다.
국내 야구시장은 프로야구 외에 실업야구 등의 구제책은
마련되어 있지 않다고 해도 무방하다.
수많은 청춘들이
삶의 드래프트, 그 현장에서
묵묵하고 뜨거운 이닝을 함께 버티고 있따.
그 이닝의 끝에 있을
'역전만루홈런'을 기대한다.(131~133p.)
런다운
편의점에서 우스꽝스러운 유니폼을 입고 담배나 음료수 따위를 팔면서, 컵라면 용기를 치우고 남은 국물을 비우면서, 야구장 조명등보다 밝은 조명 아래서 밤샘 근무를 했다. 날짜 지난 삼각김밥을 먹고, 화장실 갈 때는 문을 걸어 잠그고, 그때마다 기다리던 손님의 볼멘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술에 취해 있을 때가 많았고, 꼭 편의점 앞에서 싸우거나 나에게 시비를 걸었다. 나는 최선을 다했으나, 그저 그런 사람이라는 건 별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저 그런 인간성의 사장은 최저임금보다 못한 시급을 주었고, 최저임금을 제대로 받는 아르바이트생이 거의 업다는 이유에서 사장의 입장을 수용해야만 했다. 그도 특별한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그런 새벽의 시간은 밤과 아침 사이에 나를 가둬놓고 내 몸을 공격해왔다. 피곤에 지친 나는 '런다운'에 걸린 채고 어디 도망도 가지 못하고, 베이스라인의 중간쯤에서, 선 채고 졸곤 했다.
밤에서 아침으로 슬라이딩하면서 나는 꼭 아웃당하는 기분이었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저 그런 일로는 그저 그런 대학의 등록금 내기도 빠듯했다. 더러워진, 내가 입은 유니폼이 나를 결정했다. 하지만 그 얼룩들은 이상하게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
어쨌거나 내가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누가 내 이름을 불러줬던가. 내 이름을 부르고, 또 불러서 끝내 응원할 사람은 나 자신 밖에 없었다. 나는 죽지 않고 태그를 피해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최선을 다해 움직이는 동작은 반짝이게 마련이다. 유니폼은 더러워지겠지만, 뭐 어떤가.
그런 반짝반짝한 더러움을 '런다운'이라고 한다.(225~22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