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읽기의 즐거움 - 한국고전산책
정약용.박지원.강희맹 지음, 신승운.박소동 옮김 / 솔출판사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자득自得의 묘

강희맹

 

도둑질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들에게 자신의 솜씨를 모두 가르쳐주었다. 아들은 자신의 재능을 자부하여 자기가 아비보다도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도둑질을 나갈 때에는 언제나 반드시 아들이 먼저 들어가고 나중에 나오며 가벼운 것은 아비에게 맡기고 무거운 것을 들고 나왔다. 게다가 먼 곳에서 나는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고 어둠 속에서도 사물을 분별하는 능력이 있어서 도둑들간에 기림의 대상이 되었다.

 

하루는 아비에게 자랑 삼아서

 

"제가 아버지의 솜씨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고, 억센 힘은 오히려 나으니 이대로 나간다면 무엇은 못하겠습니까?"

 

하니, 아비 도둑이

 

"아직 멀었다. 지혜란 배워서 이르는 데는 한계가 있는 법이어서 스스로 터득함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그러니 너는 아직 멀었다."

 

하였다. 아들 도둑이

 

"도둑이란 재물을 많이 얻는 것이 제일인데, 저는 아버지에 비해 소득이 항상 배나 되고 나이도 아직 젊으니 아버지의 연배가 되면 틀림없이 특별한 재주를 터득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아비 도둑이 다시

 

"그렇지 않다. 나의 방법을 그대로 행하기만 해도 겹겹의 성에도 들어갈 수 있고 깊이 감춘 물건도 찾아낼 수는 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화가 따른다. 아무런 단서도 남기지 않고 임기응변하여 거침이 없는 그런 수준은 자득의 묘를 터득한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너는 아직 멀었다."

 

하였지만 아들은 건성으로 들어 넘겼다.

 

다음날 밤 아비 도둑은 아들을 데리고 어느 부잣집에 들어갔다. 아들을 보물 창고 안으로 들어가게 하고는 아들이 보물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을 때쯤 밖에서 문을 닫고 자물쇠를 건 다음 자물통을 흔들어 주인이 듣게 하였다. 주인이 달려와 쫓아가다가 돌아보니 창고의 자물쇠는 잠긴 채였다. 주인은 방으로 되돌아갔고 아들 도둑은 창고 속에 갇힌 채 빠져 나올 길이 없었다. 그래서 손톱으로 박박 쥐가 문짝을 긁는 소리를 냈다. 주인이 소리를 듣고

 

"창고 속에 쥐가 들었군. 물건을 망치겠다. 쫓아버려야지."

 

하고는 등불을 들고 나와 자물쇠를 열고 살펴보려는 순간, 아들 도둑이 쏜살같이 빠져나와 달아났다. 주인집 식구들이 모두 뛰어나와 뒤를 쫓았다. 아들 도둑은 더욱 다급해져서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는 연못가를 돌아 달아나다가 큰 돌을 들어 못으로 던졌다. 뒤쫓던 사람들이

 

"도둑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하고는 못가에 빙 둘러서서 찾았다. 아들 도둑은 그 사이에 빠져 나갔다. 집으로 돌아와 아비에게

 

"새나 짐승도 제 새끼를 보호할 줄 아는데, 제가 무슨 큰 잘못을 했다고 이렇게 욕을 보이십니까?"

 

하며 원망하였다. 아비 도둑이

 

"이제 너는 천하의 독보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사람의 기술이란 남에게서 배운 것은 한계가 있게 마련이지만 스스로 터득한 것은 그 응용이 무궁한 법이다. 더구나 곤궁하고 어려운 일은 사람의 심지心志를 굳게 하고 솜씨를 원숙하게 만드는 법이다. 너를 궁지로 몬 것은 너를 안전하게 만들려는 것이고 너를 위험에 빠뜨린 것은 너를 건져주기 위한 것이었다. 네가 창고에 갇히고 다급하게 쫓기는 일을 당하지 않았던들 어떻게 쥐가 긁는 시늉과 돌을 던지는 기발한 꾀를 냈겠느냐. 너는 곤경을 겪으면서 지혜가 성숙해졌고 다급한 일을 당하면서 기발한 꾀를 냈다. 이제 지혜의 샘이 한번 트였으니 다시는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천하의 독보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하였다. 그 후에 과연 그는 천하 제일의 도둑이 되었다.

 

도둑질처럼 악한 일도 반드시 스스로 묘법을 터득한 뒤에야 비로소 천하 제일이 될 수 있었다. 하물며 도덕道德과 공명功名에 뜻을 둔 선비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대대로 벼슬하여 국록國祿을 누리는 집안의 자식들은 인의仁義를 행하는 것이 얼마나 훌륭한 일인지, 학문을 연마하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 것인지는 모른 채 현달하고 나면, "선대의 업적을 능가할 수 있다" 고 함부로 말하는데, 이는 바로 아들 도둑이 아비에게 자랑한 꼴이다. 만약 높은 것을 사양하고 낮은 데를 택하며 호방한 것을 버리고 담박한 것을 좋아하며 자신을 굽히고 학문에 뜻을 두어 성리性理의 연구에 마음을 쏟아서 습속習俗에 휩쓸리지 아니할 수 있다면 능히 남들과 대등해질 수도 있고, 공명도 이룰 수 있으며, 등용되면 자신의 경륜을 행하고 등용되지 아니하면 자신의 길을 지켜서 어떤 경우라도 합당하지 않음이 없게 되리니, 이는 바로 아들 도둑이 곤경을 겪으면서 지혜가 성숙해졌고 마침내는 천하의 독보적인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과 같다.

 

너 또한 이 경우와 비슷한다. 도둑이 창고에 갇히고 다급하게 쫓기던 그와 같은 곤경을 겪는 어려움을 피하지 말아서 마음속에서 자득自得함이 있어야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 말을 잊지 말도록 해라.

|신승운 옮김|

 

.............................................................

이 글은 『사술재집私淑齋集』에 실린 것으로, 강희맹이 아들을 훈계하기 위해 지은 다섯 가지의 이야기 「훈자오설訓子五說」에 중 하나이며, 원제는 「도자설盜子說」이다. 자신의 학문에 만족해하는 아들에게, 위대한 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쉼없는 노력을 통해 스스로 지혜를 터득하는 자세가 필요함을, 도둑 부자의 이야기에 빗대어 당부하고 있다.

 

 

마음을 지키는 이름

정약용

 

수오재守吾齋는 나의 큰형님(약현若鉉)께서 당신이 사시는 집에 붙인 이름이다. 나는 처음에는 그런 이름을 붙인 데 대해 이렇게 의심을 하였다.

 

"물건 중에 나와 굳게 맺어져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으로는 마음(心)보다 더 절실한 것이 없으니, 지키지 않는다 한들 어디로 가겠는가. 이상하다 그 이름이여!"

 

내가 장기로 귀양 온 이후 홀로 지내면서 조용히 앉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어렴풋이 그 이름의 의문점에 대해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이렇게 스스로 말하였다.

 

"대체로 천하의 물건은 모두 지킬 만한 것이 없고, 오직 마음만은 지켜야 한다. 나의 밭을 지고 도망갈 자가 있겠는가! 밭은 지킬 만한 것이 못 된다. 내 집을 이고 달아날 자가 있겠는가? 집은 지킬 만한 것이 못 된다. 나의 원림園林에 있는 꽃나무ㆍ과실나무 등 여러 나무들을 뽑아갈 수 있겠는가? 그 뿌리가 땅에 깊이 박혀 있는 것을. 나의 책을 훔쳐다가 없앨 수 있겠는가? 성경聖經과 현전賢傳이 세상에 널리 퍼져 물과 불처럼 흔한데, 누가 그것을 없앨 수 있단 말인가? 나의 의복과 나의 식량을 도둑질해 가 나를 군색하게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천하의 많은 실이 모두 나의 옷감이며 천하의 곡식이 전부 나의 식량인데, 도둑이 비록 훔쳐간다 하더라도 그 한둘에 불과할 것이니 천하의 모든 옷감과 곡식을 바닥낼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모든 천하의 물건들은 지킬 만한 것이 못 된다. 유독 마음이라는 것은 그 성품이 달아나기를 잘하여 드나듦이 일정하지가 않다. 비록 가까이 붙어 있어서 배반하지 못할 것 같으나, 잠깐이라도 살피지 않으면 어느 곳이든 가지 않는 데가 없다. 이익과 작록이 유혹하면 그리로 가고, 위세와 재화가 위협하면 그리로 간다. 질탕한 상조商調나 경쾌한 羽調의 흥겹고 고운 소리를 들으면 그리로 가고, 새까만 눈썹에 흰 이를 가진 아름다운 미인을 보면 그리로 간다. 그리고 한번 가면 되돌아올 줄을 몰라 붙잡아도 만류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천하에서 잃어버리기 쉬운 것으로 마음만한 것이 없다. 그러니 끈으로 잡아 매고 빗장과 자물쇠로 잠가 굳게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잘못 간직하여 마음을 잃은 자이다. 어렸을 때, 과거가 좋다는 것을 알고 그쪽으로 가서 과거 공부에 푹 빠졌던 것이 십 년이었다. 그 결과 마침내 처지가 바뀌어 조정의 반열에 서게 되자,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금포錦袍를 입고서, 대낮에 큰 길을 미친 듯이 활보하였다. 그러길 십이 년. 이제 또 처지가 바뀌어 한강을 건너고 조령을 넘어 친척을 이별하고 선영의 산소를 버려둔 채, 곧바로 동해 바닷가의 대숲 속에 달려와서 머물러야 했다. 나는 그제서야 땀을 흘리며 두려워 숨을 죽이면서 허둥지둥 마음의 자취를 따라 함께 이곳에 오게 되었다. 나는 마음에 이렇게 말하였다.

 

"자네는 어찌하여 이곳에 왔는가? 여우나 도깨비에게 홀려서 온 것인가? 아니면 바닷귀신에게 불려온 것인가? 자네 집과 고향이 모두 초천苕川에 있는데, 어찌 그 본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그러나 그 마음은 멍하니 움직이지 않고 돌아갈 줄을 몰랐다. 그 얼굴빛을 보니 어딘가에 얽매인 곳이 있어서 돌아가고자 해도 돌아갈 수 없는 듯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붙잡아 함께 머물렀다.

 

이때에 나의 둘째형님 좌랑공(佐郞公: 약전若銓)께서도 역시 당신의 마음을 잃었다가, 그 마음을 좇아 남해 지방으로 오셨는데, 또한 그 마음을 붙잡아서 함께 그곳에 머물러 계셨다.

 

그러나 유독 나의 큰형님만은 당신의 마음을 잃지 않고 '수오재'에 편안히 단정하게 앉아 계시니, 어찌 본디부터 잘 지켜와서 마음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바로 큰 형님께서 당신의 집 이름을 그렇게 붙인 까닭인 것이다. 큰형님께서는 늘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에게 '태현太玄' 이란 자字를 지어주셨다. 그래서 나는 오직 나의 '태현'을 지키려고 이것을 내 집의 이름으로 붙인 것이다."

 

라고 하시지만, 이것은 핑계대는 말씀이다. 맹자孟子께서

 

"무엇을 지킴이 큰가? 몸을 지키는 것이 제일 크다."

 

하였으니, 진실하다 그 말씀이여!

|이승창 옮김|

 

.............................................................

이 글은 다산 정약용이 귀양살이 중에 쓴 글로,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가운데 시문집 권13 기記에 실려 있으며 원제는 「수오재기守吾齋記」이다. '기記' 란 작자가 어떤 사건이나 구체적인 경험을 기록하는 전통저인 한문漢文 양식의 하나인데, 이 글은 큰형님인 약현이 자신의 집에 '수오재' 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사연과 함께 나를 지킨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 경험을 적고 있다.

 

 

자득의 묘, 낚싯바늘에 달린 도, 원망할 수 없는 비난, 스스로 고치는 병, 너무 먹어도 탈, 혹 떼려다 혹 붙이기, 과음을 반성함, 쥐와 노는 고양이, 공자와 나나니벌, 입이 있어도 말 못하는 물건, 늙은 의원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효자 왜가리, 책 속에 돈이 있으니, 그물코에 걸린 세상 이치, 돌싸움, 뇌물 먹은 소... 등 제목만 읽어도 호기심이 발동하는 우리나라 옛날 이야기가 마흔 일곱 편이나 들어있는 『고전 읽기의 즐거움』

 

마흔 일곱 편 가운데 「자득의 묘」와 「마음을 지키는 이름」을 옮겨 적었다. 「자득의 묘」는 간략 해설에도 나왔듯이 아버지 강희맹이 아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지어낸 이야기이다. 자식을 가르치려고 만든 이야기에 도둑질하는 아비와 아들이 주인공이라 놀라고, 단숨에 읽어내릴 만큼 재미있어서 놀라고, 이야기에 담긴 깊은 사랑과 지혜에 놀란다.

 

오해했다. '아니 아무리 지어낸 이야기 속 아비라지만 천하 제일 도둑이 되라고 가르치는 아버지라니 이게 무슨 당치않은 수작이냐 어?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이거 이거 이렇게 오래된 전통이었던 거냐?' 이랬다. 다시 읽어보니 촛점 빗나갔다. '천하 제일 도둑'에다가 방점을 찍을 것이 아니라, '곤경과 어려움을 피하지 말고 그 속에서 자득自得', 스스로 지혜를 얻는데 힘쓰라는 게 요점이었던 것이었던 것임을. 음~

 

이 책은 정가 8,800원이다. 마흔 일곱 편 이야기가 전부다 마음에 딱 와 닿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이 책은 어디 가서 5000원 짜리 백반을 시켰는데 오곡밥에 불고기, 굴비, 게장, 잡채, 나물, 찌개, 국이 상다리 부러지게 나오고 후식으로 과일까지 나와서 몸둘바를 모르겠는데 알고보니 재료가 전부다 직접 키운 유기농 채소고 화학조미료 하나도 안쓰고도 간이 딱 딱 맞고 담백하니 음식맛도 끝내줘서 사람들한테 자랑하지 않고는 못배기겠는 그런 기분이 드는 책이라는 것만(?) 밝혀둔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란놀 2012-01-19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이야기 즐겁게 즐기셨기에
이렇게 조곤조곤 적어서 띄워 주셨군요~
고맙습니다 ^^

아이리시스 2012-01-19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핀스님 제 답글 보러와요. 얼른!!!

차트랑 2012-01-20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퍼의 묘(妙)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합니다.
새벽비가 주룩주룩님~
이 페이퍼는 自得의 妙가 표현된 페이퍼임이 틀림없습니다.

정말 妙하게 매력적인 페이퍼입니다요~
새벽비가 주룩주룩님~
정말 잘 읽었어요~~

차트랑공드림

순오기 2012-01-20 0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단에 꽂혀서 정약용 컬렉션에 추가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