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이치란 라멘에 처음 갔을 때

라멘 농축 소스를 국자에 담아주는 직원의 손짓 리듬이

정말 오래 한 가지 동작을 반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작년 MMCA 올해의 작가상 수상자 양정욱은

한 가지 노동을 오래한 사람 특유의 리듬을

설치예술로 시각화한 아이디어로 반향을 얻었는데


이 쇼호스트의 환복스킬에서도

그런 전문적 노동의 리듬이 느껴진다

수만 번은 같은 동작으로 환복했을 것 같은 너무 자연스럽고 유려한 리듬이다. 


영어로는 매듭없는 말끔함을 일컬는 seamless라고 표현해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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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박물관에 다녀왔다.


수색역에 있다. 상암의 방송국과 그 아래 입점해 있는 깔끔하고 세련된 점포들이 눈에 띈다. 윗층의 방송국에서 일하는 젊은 직원들이 월급을 받고 아래 내려와 일적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음료와 음식을 섭취하고 다시 올라가 일해 돈을 벌고, 점포는 위에서 내려온 직장인들이 지불하는 돈으로 건물주에게 임대료를 내고, 건물주인 회사는 임대료를 받아 월급을 주는 게 뭐랄까 자족적 시스템? 자가발전? 공생 관계? 처럼 보인다. 아니, 약육강식인가. 누가 스트레스를 주는가


영화박물관은 8.30까지 옛 만화영화 홍길동 특별전을 하고 있다. 우리가 잘 모르는 67-99년까지 개봉된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이 100편이나 된다고 한다. 대단하다


개중 로봇으로 상징되는 과학기술 소년물 태권브이 같은 낙양의 지가를 올린 픽션은 한국인의 심상구조를 형성했다. 베스트셀러는 당시 사회의 마음을 반영하는 재해석된 기록물이기에 픽션으로 그 시대를 일부 읽어내는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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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준의 <공간인간> 어딘가에서 자신은 20대에 운전면허를 따 여행으로 이동의 자유를 누리고 집계약을 해 자기 공간을 확보했으며 30대에 핸드폰이 출시돼 통신의 자유를 얻고 40대에 디지털 세상에 진입했다고 했다 (지금 책이 곁에 없어 내 기억에 의존한 재구성이다)


그런데 그의 자녀세대는 정확히 반대로 세상을 경험한 것 같다. 먼저 태블릿 등으로 디지털로 진입하고 학교에 들어가면서 핸드폰이 생겨 연락을 자유롭게 하고 대도시에 직장이 있으니 대중교통 이동가능지역에 집을 얻은 다음, 차를 위한 운전면허는 부수적이기에 나중에 딴다.


그러니 부모세대는 먼저 마음에 들어온 물리적인 생활공간을 중요시하고 사람과 통화가 다음이며 SNS댓글이야 뭔 상관이냐 할 것이다.


반대로 자녀세대는 자기 세계의 전부인 SNS상의 평가와 (통화가 아닌) 카톡과 DM이 자기 정체성을 테스트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이며 저 멀리 교외로 여행다니는건 자산이 생긴 다음 경험할 수 있는 꿈 같은 일이다.


조너선 하이트의 <불안 세대 the Anxious Generation>는 디지털 세계는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병들게 하는가라는 부제의 책으로


물리적 현실세계 과보호와 디지털 가상세계의 과소보호에 대해 일갈하며(We Overprotect Children in the Real World and Underprotect Them Online)  


부모노릇의 역설(The Parenting Paradox)에 대해 다루었다.


쉽게 말해 애들 학교까지 라이딩은 시키면서 뒷자석에서 핸드폰 하는건 신경쓰지 않는 일반적인 부모의 하루를 미루어보았을 때, 물리세계의 위협에 대해선 너무 보호하지만 가상세계의 위협에 대해선 너무 손을 놓고 있다는 뜻이다.


이 역시 반대로 경험한 탓이다. 부모세대는 학교에서 선생에게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일진, 양아치에 의해서도 혹은 군대와 기업에서도 신체 폭력을 당한 적이 있다. 구타뿐 아니라 유괴 납치의 위협도 종종 있었다.


자신의 어린시절에 대한 방어기제로 아이들을 물리적 현실에서 보호하지만 아이들에게는 물리적 공간보다 가상의 공간이 아이덴티티를 형성하는 기준이다.


유현준의 경험에서처럼 자동차로 인해 물리 세계가 확장되기 전에, 자기가 번 돈에 의한 생활 공간을 스스로 확보하기 전에, 사이버 스페이스를 먼저 접했기 때문이다. SNS 친구가 충분히 생기면 그들과만 대화해서 집에서 안 나오는 히키코모리, 고립 은둔 청소년/청년이 되는 것도 가능하다. 물리 세계는 부수적이기 때문이다.


지진, 전쟁 같은 외부의 재난과 위협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폭염에서도 집에서 에어콘 틀고 지내면 된다. 집에 나가지 않고 이세계에 몰입해 있는 이들은 창문도 열지 않기에 더위와 습도가 느껴지지 않는다. 대중교통으로 접근가능한 대전, 인천은 가볼 수 있어도 차를 타고 가야만 하는 태안, 공주, 부여, 보성 같은 곳은 가본 적 없고 해외처럼 느껴진다.


세계가 확장되는 순서에 차이가 있다. 따라서 물리 공간에 무심한 자녀 세대를 부모 세대는 이해할 수 없고, 현실 친구와 통화하지 않는 젊은 세대는 SNS 좋아요에 목 매지 않는 부모 세대의 감성을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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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성씨는 음독과 훈독이 섞여있는 고유의 읽기 방식이 있기 때문에 한자를 배운 한국인이 한국 음독대로만 읽을 수 없다.


요시다는 길할 길에 밭 전, 좋은 풍요로운 밭이라는 뜻인데

길할 길을 길이 아니라 요시로 읽는다.


그리고 띄어읽기도 중요하다. 요시-다이지 요-시다 아니다.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시게 할 수 없다.

고바야시도 고바-야시가 아니라 작을 소(고)-수풀 림(하야시)에 하가 바로 음운변화를 해서 고-바야시다.

즉, 한자 하나에 한 음절이 아니라 둘, 셋, 심지어 넷까지 할당될 수 있다는 뜻

예컨대 사무라이侍, 타마시이(혼魂)은 한 한자에 음이 넷이 붙은 케이스다


한자로 생활하는 중국인과도 다르다. 야마모토는 한자로 뫼 산에 기본 본(산본)인데 한중일 모두 통하는 음독이 아니라 훈독으로 읽어서 야마모토이고, 중국은 샨번으로 읽는다. 그리고 같은 발음인 샨번이 스기모토 杉本에도 해당되어 헷갈린다.



음독으로 대동단결하면 어떠냐? 할 수 있지만 한국은 당나라음 고정, 일본은 양나라 이후 여러 레퍼런스가 섞여있다. 중국은 청나라후 발음이다


그 결과 일본인의 베스트 성씨를 타이핑한다음 엑셀로 정리하면 이런 결과가 나온다. 한국은 상호주의에 의해, 그리고 과학적인 한글의 음운법으로 인해 일본의 성씨를 그들 발음 그대로 음차할 수 있지만 중국은 완전 다르다.


대충 반만 정리해봤다.


이중 한국에도 임씨가 있고, 일본에도 하야시라고 하고, 중국에서도 린이라는 성씨가 있으니 이 성씨만 한중일 공통으로 그대로 쓸 수 있어서 특이하다.


佐藤 사토 Zuǒténg 주어텅

鈴木 스즈키 Língmù 링무

高橋 다카하시 Gāoqiáo 가오치아오

田中 다나카 Tiánzhōng 티엔쭁

渡辺 와타나베 Dùbiān 두비엔

伊藤 이토 Yīténg 이텅

中村 나카무라 Zhōngcūn 쭁춘

小林 고바야시 Xiǎolín 시아오린

山本 야마모토 Shānběn 샨번

加藤 가토 Jiāténg 찌아텅

吉田 요시다 Jítíán 지티엔

山田 야마다 Shāntián 샨티엔

佐々木 사사키 Zuǒzuǒmù 주어주어무/줘무

山口 야마구치 Shānkǒu 샨코우

松本 마쓰모토 Sōngběn 송번

井上 이노우에 Jǐngshàng 징샹

木村 기무라 Mùcūn 무춘

하야시 Lín

清水 시미즈 Qīngshuǐ 칭쉐이

山崎 야마사키 Shānqí 샨치

阿部 아베 Ābù 아부

모리 Sēn

池田 이케다 Chítián 치티엔

橋本 하시모토 Qiáoběn 치아오번

石川 이시카와 Shíchuān 쉬추안

山下 야마시타 Shānxià 샨시아

小川 오가와 Xiǎochuān 시아오촨

石井 이시이 Shíjǐng 쉬징

後藤 고토 Hòuténg 호우텅

長谷川 하세가와 Zhǎogǔchuān 쟈오구추안

近藤 콘도 Jìndōng 진똥

村上 무라카미 Cūnshàng 춘샹

遠藤 엔도 Yuǎnténg 위엔텅

青木 아오키 Qīngmù 칭무

藤田 후지타 Téngtián 텅티엔

岡田 오카다 Gāngtián 깡티엔

福田 후쿠다 Fútián 푸티엔

三浦 미우라 Sānpǔ 산푸

中島 나카지마 Zhōngdǎo 쭁다오

藤井 후지이 Téngjǐng 텅징

西村 니시무라 Xīcūn 시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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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 후쿠오카 열차 급정지 사고(2명 경상)


차량운전사의 모자가 선반 위에서 떨어져서 비상 브레이크를 눌렀기 때문


세상엔 이런 일도 있구나

하며 운의 신비, 인간과 사물의 동맹, 리스크 매니지먼트에 대해 생각해본다.


모자가 브레이크를 눌렀다니. 세계는 인간의 손에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구나.


기계 고장이나 시스템 결함이 아니라 선반 위에서 굴러떨어진 운전사의 합성섬유 모자가 부드럽게 흔들리다 쿵 떨어져 덜컹대며 움직이던 강철 덩어리를 멈추게 한다는 아이러니. 인생도 이와 마찬가지로 거대한 구조보다 작은 오차가 우리를 휘청이게 만든다.


일상의 질서 속에서 가장 사소한 물체가 체계적인 계획을 무너뜨리고 중대한 사태를 촉발하는 순간, 여기서 우리는 운이라는 이름의 볼 수 없는 힘이 얼마나 정교하게 인간의 계산을 깔깔 비웃는지를 깨닫는다. 


우리는 시스템이 합리적으로 설계되었다고 믿지만 모자 하나의 예측할 수 없는 추락이 철로를 달리던 전차를 멈추게 한다는 점에서


합리성의 외곽에 여전히 틈새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과학이 포착할 수 없는 빈틈과 에움길을 걸어가는 우리는 그루잠 속에서 새로이 번뜩이며 눈뜬 의식에 의해 다른 가능성으로 인도된다.


인간은 예측과 통제라는 장치로 현실을 정리하나 실상 진정한 위협은 거대한 폭발이나 구조적 붕괴가 아니라 의외성 자체일 수 있다. 사고는 커다란 균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 눈에 띄지 않는 파편, 인력의 미필적 고의에서 비롯될 수 있다. 안전 매뉴얼이 예상하지 못하는 순간에 질서가 가장 연약한 물체에 무너진다. 기술 안전과 관리 체계의 허점을 찾기보다는 우연이 확률의 구조 속에 어떻게 편입될 수 있는가를 묻는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관리자가 추구해야하는 방향은 완전한 안전이 아니라, 우연과 예측 불가능성을 전제하는 리스크 매니지먼트라는 겸손한 태도일테다.


우리는 비상 브레이크를 누르는 주체가 언제나 인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사물의 우연한 움직임이 인간을 대신하여 결정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브루노 라투르의 사물-동맹 네트워크를 생각나게 한다. 기술과 인간 중심적 질서가 지닌 자만심은 여기서 무너진다.


이성의 큰길 곁에는 언제나 에움길 하나쯤이 열려 있다. 논리의 인드라망에 걸리지 않는 아스라한 틈새에서, 윤슬처럼 번뜩이는 대안적 사유가 자라난다. 새로운 세상을 예비하는 혜윰이 아스라이 움트고 명징한 판단력을 자랑하는 가라사니의 빛이 과학의 렌즈로만 보았던 가온길을 비춘다.


후쿠오카 열차 사고 유투브 영상 출처: 닛테레

https://www.youtube.com/watch?v=9NmoNotG7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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